The Holy League (LatinSacra Ligua) of 1684 was an alliance organized by Pope Innocent XI to oppose the Ottoman Empire in the Great Turkish War. The League's initial members were the Papal States, the Holy Roman Empire under Habsburg Emperor Leopold I, the Polish–Lithuanian Commonwealth of John III Sobieski, and the Venetian Republic; the Tsardom of Russia joined the League in 1686. The alliance lasted until the Treaty of Karlowitz brought an end to the war in 1699  

 

홀리 리그. 사르카 리구아. 1684년 에 만든거야. 교황 인노켄티우스 11세가 주도해서. 비엔나전투 하고 다음해 결성이 된겨. 이게 4월 25일 이야. 이건 베네치아 가 다시 해전으로 참전하는게 가장 크고, 베네치아 는 갈리폴리 전투 1416년 이후 3백년 되어가는겨 이게. 이 베네치아 는 어머어마한 나라고 그야말로 가장 고귀한 나라야. 끽해야 20만도 안되는 시민들이 오스만에 맞선겨 3백년을. 이전 5차 전쟁에 1669년에 크레타섬을 빼앗겼어. 250년 동안의 베네치아 꺼였어 저건. 너덜너덜 해진 상태에서 15년 만에 다시 하는겨. 그래서 전쟁찬반 이 격렬한겨 저 안에서. 왜냐면, 돈이 없고 전력도 없어 이제. 이렇게 버틴것도 용한겨. 해전도 이전 에도 일이만대 일이십만 으로 오스만과 전쟁한겨 5차 때도. 

 

홀리 리그 라는게 힘을 주는거야. 교황이 주도해서 모든 그리스도 의 땅은 특히나 베네치아 에 힘을 실어주라는겨 이게. 펀딩이 들어오고 교황령 도 돈에 사람을 지원하고, 아드리아해변의 달마시아 의 그리스도 들도 베네치아 에 자원을 해. 

 

홀리리그 의 핵심은 베네치아 와 오스트리아 가 손잡은겨 이게. 이 둘은 또한 웬수 사이야 웃기게도. 레판토 해전 때 스페인의 물자 가 아쉬워 베네치아가 손잡았지만, 베네치아 는 항상 신성로마제국에는 눈엣가시야 중세 초기부터. 해변과 알프스 산을 경계로 수시로 전쟁하던 애들이야. 그러다가 오스만이 지중해 등장하면서 아드리아해 입구 막는다는 수고비로 돈좀 받아왔지만 이 둘은 껄끄러운 사이야.

 

베네치아 가 저때 제대로 힘을 받는겨 이건. 오스트리아 도 고마운거고. 

 

오스만 이 서진하는걸, 바다와 육지에서 동시에 연합해서 서유럽이 힘을 합친게 비엔나전투 1683년 으로 시작한 대투르크 전쟁. 이게 처음인겨. 그래서 오스만이 대륙에서 대패 하면서 베오그라드 까지 빼앗긴거야 이건.

 

Nevertheless, at the outbreak of the war, the military forces of the Republic were meagre. The long Cretan War had exhausted Venetian resources, and Venetian power was in decline in Italy as well as the Adriatic Sea. While the Venetian navy was a well-maintained force, comprising ten galleasses, thirty men-of-war, and thirty galleys, as well as auxiliary vessels, the army comprised 8,000 not very disciplined regular troops. They were complemented by a numerous and well-equipped militia, but the latter could not be used outside Italy. Revenue was also scarce, at little more than two million sequins a year.[11][13] According to the reports of the English ambassador to the PorteLord Chandos, the Ottomans' position was even worse: on land they were reeling from a succession of defeats, so that the Sultan had to double the pay of his troops and resort to forcible conscription. At the same time, the Ottoman navy was described by Chandos as being in a sore state, scarcely able to outfit ten men-of-war for operations. This left the Venetians with an uncontested supremacy at sea, while the Ottomans resorted to using light and fast galleys to evade the Venetian fleet and resupply their fortresses along the coasts.[14] In view of its financial weakness, the Republic determined to bring the war to Ottoman territory, where they could conscript and extract tribute at will, before the Ottomans could recover from the shock and losses incurred at Vienna and reinforce their positions.[13] In addition, Venice received considerable subsidies from Pope Innocent XI, who played a leading role in forming the Holy League and "nearly impoverished the Curia in raising subsidies for the allies".[10]  

 

베네치아 의 군사력은 메거, 절적양적으로 부족했다. 긴 크레타 전쟁으로 모든 자원을 소진하고 이탈리아와 아드리아해서 쇠락해지다. 베네치아 해군은 잘 유지되었는데, 갤리온 보다 큰 갤리스 선들이 10척. 맨오브워 가 30척, 갤리선 30척 에 보조선박들이 있었고, 병력은 8천명 으로 그리 훈련이 안된 정규군 이었다. 돈도 없다. 오스만 주재 잉글랜드 대사 의 보고로는 오스만은 더 열악했다. 땅에선 계속 패전하고 술탄은 자기 병력에 돈을 두배로 줘야했고 강제 징집을 해야 했고 동시에 오스만 해군은 고통스런 상황이고 맨오브워 10척도 겨우 운용될 수준. 베네치아 가 배에서는 압도적 인 상황이다 저때는, 반면 오스만은 작고 빠른 겔리선 과 해변의 요새들에 의존해야 했다. 

 

베네치아 의 재정적 문제가 전쟁 참여의 걸림돌이었는데 이건, 베네치아 가 오스만 지역을 차지해서 징발과 공물로 갖고 오기로 한겨. 베네치아 가 이지경 까지 간거야. 더하여 교황이 돈과 병력을 지원하는거야 저때.

 

In January 1684, Morosini, having a distinguished record and great experience of operations in Greece, was chosen as the commander-in-chief of the expeditionary force. Venice increased her forces by enrolling large numbers of mercenaries from Italy and the German states, and raised funds by selling state offices and titles of nobility. Financial and military aid in men and ships was secured from the Knights of Malta, the Duchy of Savoy, the Papal States and the Knights of St. Stephen of Tuscany, and experienced Austrian officers were seconded to the Venetian army.[11] In the Venetian-ruled Ionian Islands, similar measures were undertaken; over 2,000 soldiers, apart from sailors and rowers for the fleet, were recruited.[11] On 10 June 1684, Morosini set sail with a fleet of three galleys, two galleasses, and a few auxiliary vessels. On the way to Corfu he was joined by further four Venetian, five Papal, seven Maltese, and four Tuscan galleys. At Corfu they were united with the local naval and military forces, as well as forces raised by noble Greek families of the Ionian Islands  

 

이탈리아 와 게르만 스테이트 들에서 대규모 용병들이 와, 귀족 타이틀과 자리들을 팔아서 펀드들을 조성해. 여기에 자원하는 귀족들도 오는겨 베네치아와 상관이 없는 귀족들이. 돈과 사람 부족한건 몰타 기사단, 사보이 공국, 교황령, 토스카나의 성 스테파노스 기사단 이 오고, 오스트리아 에서도 여기에 들어오고. 이게 홀리리그 의 힘이야. 이오니아 제도의 베네치아 섬들인 코르푸, 케팔로니아, 이타케 에서도 병력들이 모집되고, 1684년 에 모리시니 가 6월 10일 에 세척 겔리선, 두척 겔리스. 로 출발을 해. 뒤에 합류들을 하고. 저 코르푸 는 1386년 부터 베네치아 꺼에 1500년에 케팔로니아 이타케 에 저 섬들조차 나폴레옹 오기 까지 3백년 에서 4백년이 베네치아 꺼야. 

 

Venetian Dalmatia (LatinDalmatia Veneta) refers to parts of Dalmatia under the rule of the Republic of Venice, mainly from the 16th to the 18th centuries.[1] The first possessions were acquired around 1000, but Venetian Dalmatia was fully consolidated from 1420 and lasted until 1797 when the republic disappeared with Napoleon's conquests.    

 

베네치안 달마시아. 아드리아해 입구 의 달마시아 해변과 섬들은 모두 베네치아 꺼였어. 4백년이. 다 나폴레옹이 저 너덜너덜해진 베네치아 를 접수 하고 빼앗긴겨 지금. 

 

Francesco Morosini (26 February 1619 – 16 January 1694) was the Doge of Venice from 1688 to 1694, at the height of the Great Turkish War. He was a member of a famous noble Venetian family (the Morosini family) which produced several Doges and generals.[1] He "dressed always in red from top to toe and never went into action without his cat beside him.

 

베네치아 의 사령이 프란체스코 모로지니. 모로지니 가문이 베네치아 초기 부터 유명한 가문이고. 머리에서 발끝까지 언제나 빨강 이었다. 그리고 항상 옆에 그의 고양이 가 없이는 움직인적이 없다. 이사람이 펠로폰네소스 반도 인 모레아 를 점령하는겨. 

 

Count Otto Wilhelm Königsmarck (5 January 1639 – 5 September 1688) was a Swedish military officer from Minden. He attained the rank of field marshal in 1676, commanded the Battle of Stralsund (1678), and became Governor General for Swedish Pomerania from 1679 to 1687. 

 

오토 빌헬름 쾨니흐스마크. 스위든 사람이야. 프리드리히 선제후 가 쳐올라가는 슈트란준트 전투 의 사령이었고. 포메라니아 총 거버너 였다가 이리 온겨. 프로테스탄트 가 오스만 막으려고 로마카톨릭 교황 의 호소에 온겨 이사람은. 프로테스탄트 니 카톨릭 이니 이딴게 의미가 없어 구분이. 나중에 썰하겠지만,  의미없는 구분이야 저게. 명예혁명 때 풀어보고 이런건. 

 

모리지니 는 모레아 를 갖고 오지만, 이전 뺏긴 네그로폰테 라는 에우보이아 섬은 못갖고와. 그리고 돌아와서 병으로 죽어. 도제 로 선출되었다가 죽은겨. 

 

Morlachs (Serbo-CroatianMorlaci, Морлаци or Crni Vlasi, Црни Власи) has been an exonym used for a rural Christian community in HerzegovinaLika and the Dalmatian Hinterland. The term was initially used for a Vlach pastoralist community in the mountains of Croatia in the second half of the 14th until the early 16th century.  

 

Herceg Novi surrendered to the Venetians on 31 September ending almost a century and a half rule of the Ottomans established in 1540. The Ottomans tried to retaliate in March and May 1688. Suleyman Pasha Bushati attacked Montenegrin Highland tribe Kuči, only to suffer a devastating defeat twice, with 1500 casualties and lost Medun to them. In the summer of the same year, at the tribal assembly in Gradac in Lješanska nahija, Montenegro officially recognised Venetian suzerainty.[67]  

 

이때, 달마시아 지역, 크로아티아 몬테네그로 세르비아 의 내륙과 해변에서도 동시에 들고 일어난거야. 내륙 지역은 오스트리아 병력에 합세하는거고, 해변은 베네치아 와 합세해서 달마시아 전투들을 하는겨. 이때 저쪽 슬라브 인간들이 몰락스. 와 몬테네그린 들이야. 몰락스 라는건, 저 달마시아 지역의 그리스도 공동체 사람들이고. 블락 블라크 와 같이 혼용했다는 거지. 

 

블라크 블락 이란게 왈라키아 라는 로마니아 인간들을 칭하던 것 에서 시작한거고 이건 육칠세기에 등장하는 말이야 비잔틴이 부르는. 왈라키안 하면 발칸산맥 너머 다뉴브강 인간들을 말하던거고 중세시작하면서. 이들이 발칸 넘어 내려오면서 블라크 로 불렸다고도 하고. 이 블라크 블락 이란 말이 저짝 크로아티아 인간들을 칭하는 말로도 쓰는겨. 몰락 을 저들의 그리스도 인간들 이라도 하지만 같이 쓰는겨. 이 몰락 이 타임머신 책의 미래의 사탄 캐릭이되고. 

 

몬테네그로 가 이미 이전에 오스만과 싸워서 독립을 한겨 베네치아 의 달마시아 해변과 섬들의 지원으로. 그리고 베네치아에 하미지를 하고. 이걸 오스만이 다시 점령하러 오려는거고 저때 제대로 몬테네그로 가 서는거야. 베네치아 와 몬테네그로 는 절친이야 원래. 그런데 오스트리아 에 치우치는걸 베네치아가 싫어하고. 이 몬테네그로 가 세르비아-크로아티아 언어족 에 속해서 중간이라지만, 세르비아 가 처음 시작할때가 라스카 라는 지역에 이름 이고 몬테네그로 는 여기 남서부 지역이고 세르비아 에서 시작한 이들이야. 해변에서 여기가 먼저 독립을 한겨 몬테네그로 가. 세르비아 는 저 이후 베오그라드 에서 잠깐 킹덤하지만 바로 오스만에 쫓겨나서 바로 지워지고 얘들을 몬테네그로 보다 1백년 지나서야 정체성이 티나오는겨. 

 

베네치아 의 참전으로 모레아 반도 와, 내륙 달마시아 인 몬테네그로 를 제데로 갖고 오고. 오스만 애들은 세르비아 아래로 몰려나가고 보스니아 는 그래도 여전히 오스만 꺼야. 사바강 아래에 다니르알프스 줄기는 오스만이 계속 갖고 간거야 저 이후도 일단. 해변 지역만 다 뺏긴겨 아드리아해는. 

 

이때 내륙에서 비엔나 이후 도망가 쫓겨내려오면서, 오스트리아 의 지원군이 세르비아 슬라브야. 

 

After allied Christian forces had captured Buda from the Ottoman Empire in 1686 during the Great Turkish War, Serbs from Pannonian Plain (present-day HungarySlavonia region in present-day CroatiaBačka and Banat regions in present-day Serbia) joined the troops of the Habsburg Monarchy as separate units known as Serbian Militia.[4] Serbs, as volunteers, massively joined the Habsburg side.[5] In the first half of 1688, the Habsburg army, together with units of Serbian Militia, captured GyulaLipova and Ineu from the Ottoman Empire.[4] After the capture of Belgrade from the Ottomans in 1688, Serbs from the territories in the south of Sava and Danube rivers began to join Serbian Militia units.[4]  

 

부다 페스트 를 3년 후 에 빼앗고, 죽 내려가면서 세르비아족 들이 합류하는겨. 세르비안 밀리티아 라는 별도의 군조직으로. 자원병들에 대규모야. 

 

이 세르비아인들이 저때 거주하던 곳이, 크로아티아, 바츠카, 바나트 에 있었고 여기라 판노니안 평원 지역이고. 율라, 리포바, 이네우 를 점령해. 헝가리 접경에 넘어서 로마니아 땅이야 지금. 베오그라드 를 1688년 에 점령해. 오스만 애들이 베오그라드 밑으로 쫓겨난겨 저때. 

 

 

 

베오그라드 왼쪽 의 좌표 가 고대 로마의 Sirmium 시르미움 이야. 프레펙쳐 의 수도였어. 나중 훈족 아틸라 와 비잔틴 사신이 만나는 곳이었고. 중세에 Syrmia 시르미아 야. 세르비아 킹덤 있을때 별도로 이쪽에 시르미아 킹덤이 따로 있었어. 두 킹덤의 킹인겨 세르비아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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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비아 의 베오그라드 Belgrade 포함한 북부 를 Vojvodina 보이보디나. 라고 해.

 

보이보디나 와 위 헝가리 접경을 Bačka 라고 불렀어. 저기가 판노니안 평원 이야. Szeged 세게드 를 지나 아래 베오그라드 까지 흐르는 강이 Tisa 티사 강이야. Baja 바야 를 지나 아래죽 가서 크로아티아 랑 국경 나누고 베오그라드 지나는게 다뉴브 강이야 이게 주욱 로마니아 랑 경계 나누는거고. Timisoara 티미수아라 위 Arad 아라드 에서 왼쪽으로 로마니아 와 헝가리 를 나누는 국경선이 Mureş 무레쉬 강이야. 

 

바츠카 오른쪽. 즉 티사강 오른쪽을 바나트 Banat 라고 해. 베오그라드 까지가 서쪽 경계야.

 

세르비아 의 이쪽 북동 바나트 를 불가리안 바나트 라고도 해. 여기가 7세기에 시작한 폴리시안 이교도들이 불가리아에 이주해서 산맥넘어서 또한 이리로 와서 그리 불러. 티미수아라 을 중심으로  로마니아 바나트 라고 해.

 

Baranja 바라냐. 라는 지역은. 삐죽이 크로아티아 와 헝가리 만나는 지역이야. 드라바 강을 경계로. 

 

바라냐, 바츠카, 바나트, 를 구분 하면 쉽고. 

 

Banat, Bačka and Baranja (Serbian: Banat, Bačka i Baranja / Банат, Бачка и Барања) was a de facto province of the Kingdom of Serbia and the Kingdom of Serbs, Croats and Slovenes between November 1918 and 1922. It included the geographical regions of BanatBačka, and Baranja and its administrative center was Novi Sad.     

 

저 세 이름으로 세르비아의 북쪽인 보이보디나 를 중심으로, 1차대전 직후에 저길 바나트 바츠카 바라냐 주. 라고 한거고. 

 

The Kingdom of Yugoslavia (Serbo-CroatianKraljevina Jugoslavija / Краљевина Југославија;[5] SloveneKraljevina Jugoslavija) was a state in Southeast and Central Europe that existed from 1918 until 1941. From 1918 to 1929, it was officially called the Kingdom of Serbs, Croats and Slovenes    

 

1차대전 끝나고, 이름이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솔로베니아 킹덤 이야. 공식으로. 이걸 유고슬라비아 킹덤 이라 한거고.

 

이 전에 세르비아 라는건, 베오그라드 를 경계로 아래는 막 오스만에서 나온 세르비아 가 따로 있고, 위는 바나크 바츠카 바라냐 라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의 세르비아야. 이 둘이 합쳐서 다른애들과 함께 유고슬라비아 킹덤을 한겨. 

 

The Banat of Temeswar or Banat of Temes was a Habsburg province that existed between 1718 and 1778  

 

The Voivodeship of Serbia and Banat of Temeschwar or Serbian Voivodeship and the Banate of Temes (GermanWoiwodschaft Serbien und Temeser Banat), known simply as the Serbian Voivodeship (Serbische Woiwodschaft), was a province (duchy) of the Austrian Empire that existed between 1849 and 1860.   

 

1683-99 대투르크 전쟁으로 오스트리아 와 오스만이 최종 국경 나누는 선은 헝가리에 트랜실베니아 까지 인거야 오스트리아가 취하는건. 오스트리아 가 베오그라드 를 먹은 걸 토해냈어 일단. 이 베오그라드 아래의 세르비아 는 1918년 이 되서야 위 보이보디나 와 합해지는겨. 

 

오스트리아 가 대투르크 전쟁 이후에 십여년 지나서 다시 오스만이랑 저기서 전쟁을 해. 이때 갖고 오는 지역이 티사강 오른쪽 티미수아라. 야. 여기를 독어로 테메스바르 라고 한겨. 저기를 오스트리아 가 테베스바르 바나트.로 관리를 한거야. 

 

The Kingdom of Serbia (Serbian: Краљевина Србија / Kraljevina SrbijaGermanKönigreich SerbienLatinRegnum Serviae) was a province (crownland) of the Habsburg Monarchy from 1718 to 1739.  

 

티미수아라(테메스바르)를 오스트리아 가 1718년 부터 취할때, 이 왼쪽에는 세르비아 킹덤이 20년 짧게 서. 이건 베오그라드 아래쪽에 선겨. 오스만이 오스트리아 랑 전쟁하면서 완전히 저때 또 밀려 나간거야. 그러다가 이 세르비아 킹덤은 바로 오스만이 다시 쳐올라가 지우는거야. 오른쪽 테메스바르 바나트 는 끝까지 오스트리아가 갖고 가고. 

 

오스만-투르크 전쟁 1683-99 일때, 세르비아 가 합류하면서 같이 싸우면서 베오그라드 까지 갖고 와. 여기에 세르비아인들이 이전 저 드라바강 사바강 다뉴브강 에 헝가리에 거주하던 이들이 이리 들어온겨. 기존 베오그라드 인들도 일종의 해방인거고. 그런데 바로 조약 하면서 이 세르비아의 보이보디나 지역은 다시 오스만 이 갖고 간거야. 이때 들어온 세르비안 들이 다시 이동을 해야해. 이들이 바로 위 헝가리 남부로 이동을 한겨. 기존 베오그라드인들과 함께. 이걸 1차 세르비안 대이동 이라고 해. 

 

그리고, 다시 오스만-투르크 전쟁으로 다시 내려가서 이번엔 베오그라드 아래에 킹덤 을 세웠어. 20년을. 그런데 또 쫓겨나. 이걸 2차 대이동 이라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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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리 리그 를 1684년 에 해. 2년 후에 러시아 가 가입해. 뜬굼없이 로마카톨릭 애들에 또한 오소독시 가 끼는겨. 이때는 그리스도 진영에 분파 구분이 없어. 세르비안들은 오소독시야. 세르비안 이동할때 리더가 오소독시 주교야. 이들이 자기들 카톨릭 진영 헝가리로 들어오게 해주는겨 두번을. 

 

During the war, the Russian army organized the Crimean campaigns of 1687 and 1689, which both ended in Russian defeats.[19] Despite these setbacks, Russia launched the Azov campaigns in 1695 and 1696, and after raising the siege in 1695[20] successfully occupied Azov in 1696.  

 

러시아 가 홀리리그 에 가입하고, 자기들이 동쪽에서 교란해주겠다고 선심을 쓴거지만, 이 러시아는 크림반도 를 먹는게 이때부터 이미 작심한거야. 폴란드 와 전쟁으로 드네프르강 오른쪽을 갖고 오고, 이때는 강 중류 에서 머문겨 이게. 아래는 크림타타르 들이 크림반도에서 오른쪽 아조프해를 걸쳐 있는겨 얘들이. 러시아는 이 크림반도를 잡아서 지중해로 진출하는걸 이때부터 잡은거야. 

 

 

 

크림반도 캠페인 이라는게. 드니프로 Dinipro 아래를 쳐 내려가는겨. 즉 이 아래는 타타르 땅이고 오스만꺼야. 오스만은 여기를 지키는겨. 이때인 1687-89 첫 원정에 목표가 저 아래 좌표 야. 크림반도 목아지야. Perekop 페레코프 지협 이라고 해. 저 위에서 여기를 쳐 내려오려는데, 드니프로 에서 한발자욱도 못내려간겨 이때 러시아는. 두차례 원정을 모두 실패해.

 

1695년 에 방향바꿔 아조프 원정으로 가는거야. 표트르 가 스물이 넘어서 참전하는겨. 이전엔 엄마가 섭정을 하다가. Mariupol 마리우폴. Taganrog 타간로크. 저 아조프 구석 해변 을 갖고와. 그리고 1699년 에 대투르크 전쟁 이라는 16년 전쟁이 끝나. 

 

폴란드 는 비엔나 를 구하러 간 거지만, 일단 초기에 말이야. 자기 나라 총 병력 2만7천을 끌고 가는게 웃긴겨 이게. 자기 나라는 텅텅 비고. 오스트리아 는 지기스문트 바싸 부자들이 충성충 을 찐하게 했지만 받은것도 없어 이 멍청한애들은. 돈을 선금도 안받고 간거야. 저걸 말이야 공짜로 갈 수가 절대 없어. 교황이 돈 주겄다 는 말도 하는거고, 이때 소비에스키 는 교황에게, 오스만 진영을 우리가 갖고오면 그 지역의 것을 취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해. 즉 약탈 을 허용해달라는겨. 교황이 침묵을 해. 오스만 애들이 하는 짓을 허락할 수는 없다는 건지. 

 

어쨌거나 갔어 지 나라 모든 병력 데리고. 

 

The Battle of Párkány (TurkishCiğerdelen Savaşı) was a battle fought between October 7–9, 1683 in the town of Párkány (today: Štúrovo), 비엔나 전투 이기고 바로 한달 안되서 파르카니 전투. 오른쪽 니트라 지역의 슬로바키아 땅이야. 이것도 이겨. 여기 참전 한거고. 

 

After early victories, the Polish found themselves a junior partner in the Holy League, gaining no lasting territorial or political rewards.[36] The prolonged and indecisive war also weakened Sobieski's position at home.[36] For the next four years Poland would blockade the key fortress at Kamenets, and Ottoman Tatars would raid the borderlands. In 1691, Sobieski undertook another expedition to Moldavia, with slightly better results, but still with no decisive victories  

 

그런데, 막상, 폴란드 입장에선 아무런 이익도 없는겨 이게. 얘들은 그냥 공짜로 가서 봉사 한거야. 교황이 돈 줬을 리도 없고. 약탈하려면 오스만 수도를 털어야지 헝가리땅 털수는 없거든. 저길 이긴다고 자기들 땅 되는것도 아니고. 그리고는 저 흐름속에서, 이전에 자기가 킹전에 싸웠던 저놈의 우크라이나 땅이야. 교황이 아마 그랬을겨 당신이 동쪽 좀 흔들어달라우. 머 그렇잖아도 저긴 다시 갖고와야해. 포돌리아 지역도 타타르 오스만애들한테 빼앗겼거든. 몰도비아 도 중간 지역이었는데 저기라도 더 갖고 올까 하는거고. 

 

Battle of Podhajce took place on 8–9 September 1698 near Podhajce in Ruthenian Voivodship during the Great Turkish War. 6000-strong Polish army under Field Crown Hetman Feliks Kazimierz Potocki repelled a 14,000 man Tatar expedition under Qaplan I Giray. Lack of sufficient number of light cavalry on the Polish side prevented a successful pursuit of Tatars and their captives.  

 

지금 피드하이치. 포돌리아 지역이야. 루떼니아. 이게 1698년. 이 다음해에 젠타 전투고. 폴란드 는 저런 젠타 니 모하츠 전투에 이제 안껴. 이미 해줄건 다 한겨 비엔나 하나만으로도. 그러다 피드하이치 이겨서 타타르 저기 내쫓고 저기만 취한거야. 정작 오른쪽 드네프르 강변 은 못갖고와 갖고올 병력도 없고. 그리곤 소비에스키 는 걍 심장마비 걸려 죽은겨. 모처럼 착한 짓 한 폴란드 지만, 저게 그나마 폴란드 의 마지막 이야. 지워지기 전의.

 

소비에스키 가 처음 무료봉사 해주고, 베네치아 가 해변애서 모레아 에 달마티아 내륙을 갖고 오고. 정작 스타는 저 당시, 프랑스 코트 의 인간이야. 프랑스 코트 의 인물이 뜬굼없이 오스트리아 로 와서리, 이십대에, 저 16년 전쟁 동안 삼사십대를 보내고 젠타 전투의 주역에, 바로 뒤의 프랑스 와의 9년 전쟁에 프랑스 를 조지는게 이때 등장한 외젠 이야. 루이가 버린 허약한 아이가 루이 의 최대 적이 된거야.

 

프랑스 란 나라가 , 권력은 너무나 한심한 인간들인데, 바닥의 개인개인들이 참 재밌어. 로망스 야 그야말로. 

 

필립 4세 가 지 할배 의 빚진돈 안갚으려고 템플 기사단장을 화형시키고 해체시킬때 오히려 귀족 개개인들이 병원기사단으로 몰려가서 오스만 애들에 맞서는겨. 

 

The Siege of Rhodes of 1522 was the second and ultimately successful attempt by the Ottoman Empire to expel the Knights of Rhodes from their island stronghold and thereby secure Ottoman control of the Eastern Mediterranean. The first siege in 1480 had been unsuccessful.  

 

로도스 섬 전투 에 병원기사단이 육칠백명이야. 여기에 프랑스 애들이 제일 많아. 섬주민들 육천여명에. 오스만애들이 칠만명이야. 기걸 버텨 이사람들이. 6개월을 버텨. 협상맺아서 기사들은 나가. 나머지들은 오스만애들이 가죽벗기고 공차고 놀아. 이 들은 몇만 몇십만 의 대갈 싸움 이상 아녀 이게. 몰타 해전도 저 짝은 데서 병원기사단이 버텨. 저길 가는 이들이 특히나 프랑스 귀족 애들이야. 자기들 킹 이 너무 쪽팔리다고 대신 자기들 개인 들이 가. 외젠 도 마찬가지야. 프랑스 킹 은 저 와중에 같은 그리스도 땅 따먹기 해. 나 혼자 갈텨 나이 이십 갓 넘어서. 혼자 찾아간겨 ㅋㅋㅋ 황제를 만나러. 당시 아무것도 모르고 전쟁 할 줄도 모르는 외젠이. ㅋㅋㅋ. 이 외젠이 저 투르크 들을 조지고, 다음에 저 루이 14세를 조지는겨. 루이 는 외젠 이 없었으면 스페인 오스트리아 를 다 먹었을거야.

 

프랑스 가 저런 게 그나마 매력적이야. 저런 매력의 프랑스 를 허섭들이 악용하는겨. 관장사 시체팔이 하는 곳처럼. 프랑스는 똥이야 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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