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만이, 바예지드1세 가 티무르와 앙카라전투에서 포로되서 잡혀 죽고. 메메드1세 때 내전하고 아들 무라드 2세 부터 본격적으로 형제살해 Fratricide 프라트리사이드 를 해. 동생 세명 죽이고. 메메드2세 도 두동생 죽이고, 바예지드2세 건너뛰고, 위대한 술레이만 은 죽이고싶어도 일찍 죽은 동생 외 없어, 얜 지 아들 잘나간다고 죽여 반역할까봐. 아들 무라드3세 는 다섯 동생을 죽여. 다음 메메드3세 는 19명의 형제들을 죽여. 

 

다음 아메드1세 가 지애비 저 19명 살인에 쇼킹먹어. 안죽여. 2백년 걸쳐 저게 몇대여. 저게 사람 들이 할짓이니. 

 

저게 아시아야. 조선 들이고 중국 들이고. 이전 썰. 

 

전혀 달라 이게. 인간 자체가 달라. 스텝 들을 바탕으로 한 이 이스턴과 저 웨스턴이 전혀 달라 이게. 

 

전혀 다르다니까? 

 

그래서 이 동쪽 들이 반미 반 웨스턴 반 유럽 하는겨. 프랑스 빼고. 오메 프랑스는 다양성 인정 해주는 위대한 프랑스 ㅋㅋㅋ. 

 

배운게 없어 대갈빡에 아는건 없고. 그 허섭한 유교. 정말 유치하고 조잡해도 저따위 유치 조잡한 이야긴 없어. 공자맹자 말처럼 쉬운게 없어 저게. 저게 멀 대단하다고  공자왈 맹자왈. 위대한 조선 회복합시다 유교회복합시다. 저런거에 동조 해대는여자 들을 보면 저게 저게 사람 대가리가 아닐껴 저건. 대가리는 벌레 뇌구조일껴 저게. 

 

정말 사람 죽이는거 좋아하는 들이야 이게. 피야 피. 자기 권력 유지 위해서 적폐라며 죽여. 

 

집단 정체성 이란게 생길 수가 없어. 살아남아야 만 하는겨 개인 이. 이스턴이 그래서 모랄 에띡스 가 없어 이게. 지능이 그래서  떨어진거고. 저 저지능 무지능 의 애들이 테레비에 책에 자기들이 대단한 지식인양 쇼 해대고. 골때리는겨 지금 이게. 

 

왜냐면. 니덜이 저지능 무지능이니까. 니덜이 자각 할 마음 자체가 없어. 니덜이 모랄이 없고 에띡스 가 없으니 저런애들이 또한 판을 치는거고. 

 

태종 정말 그야말로 하치리야 이게. 조선 사가들이 최고로 치는게 이 태종. 

 

어린 형제들 다 잡아 죽이고 삽혈동맹을 해. 피를 나눠먹어. 스키타이 게타이 애들이 기원전 5백년에 한 짓을 그대로 해. 한나라 유방 애들이 백마지맹으로 피나눠먹는걸 저때 해보는겨. 그리고 이무 죽이는거 봐. 무자비한 들이야 이게. 이무 꿈 꿨다고 죽여. 세상에  저따위 들이 어딨어. 터키가 지들의 형제라잖냐 저 나라 가서 ㅋㅋㅋ. 형제가 맞아. 정작 그 터키는 일본을 더 좋아하지만. 

 

아니유! 태종이 종친들을 외척들을 죽여서 강력한 왕권이 선거유! ㅋㅋㅋ. 이 조선 사가들은 악마 도 아니고 걍 무지능이야 저게. 

 

조선 그야말로 더러운 두글자. 

 

아메드1세 가 자기 애비 19형제 죽이는거 보고, 안해. 동생 무스타파1세 가 술탄이 돼. 얜 죽다가 살아난겨. 2백년의 공포에 짓눌려. 미쳐버려 살아남아서 ㅋㅋㅋ. 아메드1세의 아들 오스만2세 가 저런 삼촌을 감금하고 술탄을 해서 30년 전쟁 에 시작을 얘가 해. 코틴전투 에 패하고 예니체리 애들이 홀대 받아서 술탄을 죽여. 무스타파가 다시 받고 다음이 무라드4세 와 이브라힘 이야. 오스만2세와 함께 모두 아메드1세 의 자식들이야. 이브라힘 다음이 메메드4세 술레이만2세 아메드2세 야. 얘들은 이브라힘 의 자식들이야. 

 

무라드4세 가 죽기전에, 자기 동생 이브라힘 을 죽이라고 해. 쟤 미친 놈이라고. 그런데 자식들이 모두 죽었어 술탄자리가 없어서 못죽여 코트애들이. 이브라힘 이 25세 에 술탄에 올라. 1640년. 얘 엄마가 지 자식 술탄을 하렘에 맛들이게 하는겨. 그리고 엄마 가 권력을 쥐어. 이브라힘이 오스만 데카당스 decadence .디케이. 썩은겨. 타락 의 대명사야. 사치 부려야 하고 여자들에게 온갖 사치품을 제공하는거고. 

 

The next year the Janissaries and members of the ulema revolted. On 8 August 1648, corrupt Grand Vizier Aḥmed Pasha was strangled and torn to shreds by an angry mob, gaining the posthumous nickname "Hezarpare" ("thousand pieces").[8] On the same day, Ibrahim was seized and imprisoned in Topkapı Palace.[9] Kösem gave consent to her son's fall, saying "In the end he will leave neither you nor me alive. We will lose control of the government. The whole society is in ruins. Have him removed from the throne immediately." 

 

1648년. 에 이브라힘 을 내리는겨. 저때가 독일 30년 전쟁 끝날때고, 베네치아 가 지중해에서 다시 회복시도 할때야. 베네치아 가 코르푸 섬에 모레아 반도 의 해변에 크레타 는 여전히 갖고 있는겨 2백년을. 이 베네치아 는 어마어마한 나라야 이게. 얘들이 다시 저 헬레스폰트 인 다르다넬레스 해협을 통제하면서 이스탄불이 난리가 나는겨. 더하여 세금이 폭등하고 저 술탄 의 사치때문에. 1647년에 폭동이 나고, 다음해 근위대인 예니체리 와 울레마 의 멤버들이 반란해. 울레마 라는게 지식인층 이야. 그리고 아메드 파샤 를 목매달아서 산산조각 을 내. 

 

Tezkereci Ahmed Pasha (died 8 August 1648), better known as Hezarpare Ahmed Pasha after his death, was an Ottoman grand vizier and defterdar (finance minister).  

 

테즈케레치 아메드 파샤. 파샤 라는게 쟤들의 공직 자리야. 군대 사령관 이고 에얄레트 행정단위의 장 이야. 그랜드비지어 가 행정수반 이고, 얘가 또한 데프터다르. 재무부 장관 인겨. 죽고서 별명이 헤자르파레. 일천개의 조각. 군중들이 천개 조각으로 갈기갈기 몸을 찢은겨. 같은 날 이브라힘 이 감금되고, 엄마 술탄 쾨셈.이 자기 자식 감금에 동의하면서 말하길, 끝에는 그가 당신들과 나를 살려두게 하지 않을거야. 우리는 정부의 통제를 잃을거야. 모든 사회는 파괴된 상태야. 그를 즉시 권좌에서 제거해. 

 

오스만 술탄의 부인 을 하세키 술탄 haseki 이라 하고. 이 쾨셈 이 아메드1세 의 부인이야. 이후 무스타파1세, 오스만2세, 무라드4세. 이브라힘.에 메메드4세 까지 6대 술탄을 지해한겨 이여자가. 세아들에 더하여 손자 까지. 메메드4세 의 섭정도 이여자가 하는겨. 그러다가 메메드4세의 엄마 한테 죽어 이 쾨셈 할머니가. 

 

Ibrahim's six-year-old son Meḥmed was made sultan. The new grand vizier, Ṣofu Meḥmed Pasha, petitioned the sheikh ul-Islam for a fatwā sanctioning Ibrahim's execution. It was granted, with the message "if there are two caliphs, kill one of them." Kösem also gave her consent. Two executioners were sent for; one being the chief executioner who served under Ibrahim.[12] As officials watched from a palace window, Ibrahim was strangled on 18 August 1648. His became the second regicide in the history of the Ottoman Empire. 

 

이브라힘 의 여섯살 아들 메메드 4세 가 술탄이 된겨. 새로운 수상 소푸 메메드 파샤 가, 셰이크 울이슬람 에게 청원을 해. 셰이크 라는게 지배자 야. 울레마 집단의 최고자리야. 파트와 로는, 이슬람 정식 율법이 샤리아 이고, 유럽식 bill 빌 이야. 법적간주 식의 법이야. 파트와 로는 이브라힘을 죽여야 한다. 하늘아래 두명의 칼리프 가 없어 하나 죽여야 해. 쾨셈이 동의 하고 죽이는겨. 두번째 레지사이드. 킹 죽이는겨. 오스만2세 를 죽인적 있거든. 

 

그리고 여섯살 짜리 메메드4세 가 오르고 할머니 쾨셈 이 섭정 하다가, 며느리 가 시엄마를 죽인거로 봐. 이여자가 섭정을 하고 오스만이 다시 정신차리고, 얘가 나이 20이 되어서 오스트리아-터키 전쟁 하고, 지고도 니트라 지역을 받고, 이어서 크레타 섬을 베네치아로 부터 갖고 와. 이게 1669년 이야. 그리곤 비엔나 를 처들어가는겨 1683년. 얘가 어느덧 41세야. 

 

이때는, 트랜실베니아 의 아파피 도 갖고 온거고, 쿠루츠 라는 헝가리지역 반란귀족들도 합스부르크 라면 치를 떠는 오스만편이야. 몰도비아 왈라키아 도 오스만 꺼였고. 이 쿠루츠 가 어퍼헝가리 지역에 산재한거고 Nové Zámky 이전 노베잠키 를 받으면서 이 어퍼헝가리 의 길목을 잡은겨 여기도 오스만께 된거야 20년 지나면서. 

 

 

The Battle of Vienna (German: Schlacht am Kahlen Berge or Kahlenberg (Battle of the Bald Mountain); Polishbitwa pod Wiedniem or odsiecz wiedeńska (The Relief of Vienna); Modern Turkishİkinci Viyana KuşatmasıOttoman TurkishBeç Ḳalʿası Muḥāṣarası) took place at Kahlenberg Mountain near Vienna on 12 September 1683[1] after the imperial city had been besieged by the Ottoman Empire for two months.  

 

비엔나 전투. 가 1683년 9월 12일 인데, 전날부터 해서 저게 하루만에 걍 끝난겨. 독어로는 칼렌베르크 전투. 이 산이 비엔나 북쪽의 얕은 산이고, 여기서 소비에스키 부대가 쳐 내려가는 거거든. 

 

술레이만 이 1526년 에 모하츠 전투 로 올라오면서 1529년 에 비엔나 를 포위 하고 1566년 시게트바 전투 에서 막사에서 죽고 오스만이 이기지만 대손실을 겪고 비엔나를 못간겨. 150년 만에 다시 쳐들어가는겨. 비엔나 를 갖으면 이걸 발판으로 유럽 을 모두 갖고 오겠다는거야 저 아무개념없는 투르크 애들이. 얘들은 고대 개념을 못버린겨 이게. 이게 프랑스는 루이 14세 였고 동시대에. 찐따 두 애가 저 같은 시대에 완벽하게 두개의 나라를 쓰레기로 저때 굳힌거야. 

 

The Great Plague of Vienna occurred in 1679 in ViennaAustria, the imperial residence of the Austrian Habsburg rulers. From contemporary descriptions, the disease is believed to have been bubonic plague, which is caused by the bacterium Yersinia pestis, carried by fleas associated with the black rat and other rodents. The city was crippled by the epidemic, which recurred fitfully into the early 1680s, claiming an estimated 76,000 residents.  

 

 

저때 비엔나 에 4년전에 대역병이 돌아 이걸로 76000명이 죽었어. 이 때 오스만이 쳐들어온겨. 저 상황에서 버틴겨 저 사람들이. 얘들이 두달을 포위하고 저 단판 전투 로 물러난거야. 

 

플레이그 plague 라는게 플라가 plaga 때리는거고 한방 훅 부는거야. 이걸 역병 이라 번역을 하는데, 역 이란 한자는. 갑골에 

 

疫 (离家远行戍边)(“爿”的简写,即“床”的本字,病床,借代疾病 造字本义:名词,急速群体性暴发、并向四方扩散的急性传染病 

 

이가 원행 수변. 집을 떠나 먼길을 가. 수변. 국경 변두리 까지 가는겨. 침대 모습 이 병상 이야. 변경 끝까지 가서 병상 에 눕게 하는겨. 급속군체성폭발, 급속하게 무리 이뤄 폭발해서 사방으로 확산적급성전염병 이 역 이라는 글자 야. 이게 무슨 특정 균 을 말하는게 아냐 한글 사전에 서 개소리 시전하는. 이땅엔 사전 이 쓰레기야 이게. 

 

저때가 1679년 에 비엔나 에서 시작해서 몇년 가는건데. 14세기 에 아시아 몽골 에서 갖고온 페스트균의 흑사병이 2백여년 지나서 다시 터져 유럽에. 네덜란드 에서 시작한거로 봐. 저게 잉글랜드 런던 에 대역병이 발생해 그리고 비엔나로 온겨. 이게 서기 1700년 초 를 지나면서 사라져. 

 

저때의 대역병은, 중세 천년을 지나면서, 문명이 터지고 도시 로 인구 유입들이 급증을 하는겨. 네덜란드 도시들에 인구들이 모이고, 런던에 인구 폭증이야. 이걸 도시 가 감당을 못하는겨. 공중위생 이 아주 낙후가 돼 이때. 도시 외곽지역에 똥 오줌이 이때 쌓이고  불결해져. 저 직전에 런던 대역병이 수만을 죽이고 이게 비엔나 로 온겨. 

 

 

On the political front, the Ottoman Empire had been providing military assistance to the Hungarians and non-Catholic minorities in Habsburg-occupied portions of Hungary. There, in the years preceding the siege, widespread unrest had grown into open rebellion against Leopold I's pursuit of Counter-Reformation principles and his desire to crush Protestantism. In 1681 Protestants and other anti-Habsburg Kuruc forces, led by Imre Thököly, were reinforced with a significant military contingent from the Ottomans,[16]:657 who recognized Thököly as King of "Upper Hungary" (the eastern part of today's Slovakia and parts of northeastern Hungary, which he had earlier taken by force from the Habsburgs). This support included explicitly promising the "Kingdom of Vienna" to the Hungarians if it fell into Ottoman hands. Yet before the siege, a state of peace had existed for 20 years between the Holy Roman Empire and the Ottoman Empire as a result of the Peace of Vasvár.  

 

오스만 진영엔, 헝가리 진영의 반합스부르크 가 다 이리로 온거야. 쿠루츠 가 이리로 오고. 이므레 퇴쾰리 가 리더야. 자칭 어퍼헝가리 짱이야. 오스만이 약속 하는겨 헝가리안 들에게 비엔나 빼앗아서 비엔나 킹덤 만들어서 니덜 주겠다 ㅋㅋㅋ. 그런데 오스만과 오스트리아 는 오스트리아-터키 전쟁 1663-64 이후로 20년 동안 평화였어. 오스트리아 가 선심쓴거거든 프랑스 신경 써야 해서. 

 

In 1681 and 1682 clashes between the forces of Imre Thököly and the Holy Roman Empire (the border of which was then northern Hungary) intensified, and the incursions of Habsburg forces into central Hungary provided the crucial argument of Grand Vizier Kara Mustafa Pasha in convincing Sultan Mehmed IV and his Divan to allow the movement of the Ottoman army. Mehmet IV authorized Mustafa Pasha to operate as far as Győr (then known as Yanıkkale, and in German as Raab) and Komárom (in Turkish KomaronKomorn in German) Castles, both in northwestern Hungary, and to besiege them. The Ottoman army was mobilized on 21 January 1682 and war was declared on 6 August 1682.  

 

저 지역은, 특히나 오스트리아-터키 전쟁 이후로 헝가리-크로아티아 귀족들이 즈리니 가문 중심으로 들고 일어난거야 오스트리아 에 기대할게 전혀 없는겨. 저들이 암살음모에 들켜 탄압당한게 1671년 이고 이 세력이 쿠루츠 가 되고, 더하여 같은 시기 트랜실베니아 는 오스만이 조지2세 라코치 정리하면서 전쟁하고 이어 케민 이 대들고 이걸 아파피 가 받는거거든, 여기에 합스부르크 가 계속 반군 지원하고 용병대주고. 아주 혼란 스러운 20년 이야 저게. 오스만 과 합스부르크 는 평화 라지만, 트랜실베니아 와 어퍼 헝가리는  시끄러운겨. 오스트리아 가 니트라 지역을 오스만에 주고 어퍼헝가리 가 길목이 끊긴겨. 여기에 쿠루츠 들이 득세 하는거고. 이 쿠루츠 와 합스부르크 가 부딪히고, 이 합스부르크 들이 이 와중에 오스만 헝가리 땅으로 들어오는겨. 이걸 이유로, 메메드4세 가 이미 1월에 병력 동원을 하고. 1682년 8월 6일.에 전쟁 선포 해서 다음해 7월에 포위를 한겨. 이게 15개월이 걸린거야. 그만큼 어마어마한 병력을 동원한거고. 이스탄불에서 여까지 오는겨 얘들이. 

 

The next day the forward march of Ottoman army elements began from Edirne in Rumelia. Ottoman troops reached Belgrade by early May. They were joined by a Transylvanian army under Prince Mihaly Apafi and a Hungarian force under Imre Thököly; they laid siege to Győr and the remaining army of 150,000 moved toward the city of Vienna.[16]:660 About 40,000 Crimean Tatar troops arrived 40 kilometres (25 mi) east of Vienna on 7 July,[16]:660 twice as many as the Imperial troops in the area.  

 

4월 1일에 오스만 군대가 에디르네 에서 출발해. 한달 지난 오월 초에 베오그라드에 도착하고. 여기에 아파피 의 트랜실베니아 병력이 끼고, 어퍼 헝가리 쿠루츠 의 병력이 합류해. 15만명의 병력이 비엔나로 향하다. 4만 크림 타타르 가 비엔나 동쪽에 오고. 이때 비엔나 수비병력은 끽해야 2만 명이야.

 

Emperor Leopold fled Vienna for Passau with his court and 60,000 Viennese, while Charles V, Duke of Lorraine, withdrew his force of 20,000 towards Linz.[16]:660 The main Ottoman army arrived at Vienna on 14 July; the city's only defense force was now that of Count Ernst Rüdiger von Starhemberg's 15,000 men  

 

레오폴트 가 파사우 로 6만명 비엔나사람들과 대피하고, 로렌 공작 샤를 도 자기 2만병력을 린츠 로 물러나는거고. 오스만의 메인부대가 비엔나에 7월 14일 에 도착. 도시 의 수비병력은 에른스트 뤼디거 폰 슈타르헴베르크 백작 의 1.5만명. 십대 일 이야. 

 

저런 병력 동원 이 변한게 없어 이 투르크 들은. 이 스텝들은. 페르시아 그리스 전쟁 기원전 480년 크세르크세스 원정 가는 230만명 정예병 동원하는거에서 한 치도 벗어난게 없어 이 야만 들은. 

 

이게 전혀 다른겨 이스턴과 웨스턴 의 인간 들 자체가. 

 

저때 오스트리아 의 빛으로 등장한게 폴란드여. 그만큼 신성로마제국이 힘이 없는거고. 인물이 없는거고. 

 

이 폴란드 가 당시 오스트리아 랑 친할 수가 없어. 얀3세 소비에스키 가 1674년에 킹에 오르는데, 이사람은 리비우 지역 태생이고 우크라이나 지역 코사크 랑 타타르 애들과 전쟁하던 사람이야. 군사 경험이 찐해. 킹 선거 할때는 프랑스 가 지원해줘. 이사람은 친프랑스야. 당시 세임 이 막 파가 나뉘거든. 소비에스키 는 프러시아 브란덴부르크 를 내몰아야 하고 아래는 우크라이나 회복이 목표여. 오스트리아 는 이전 러시아 에 스위든 쳐들어올때 딱히 해준게 없어 얘들이. 

 

그러다가 프랑스 가 네덜란드 전쟁하면서 브란덴부르크 랑 만나서 조약도 맺고, 이후 동시에 스카니아 전쟁 터지고 두 전쟁 끝내면서 프랑스 랑 브란덴부르크 랑 친구 맺는겨. 소비에스키 는 브란덴부르크 가 적이야. 프랑스 가 소비에스키 에게 등돌린겨. 이게 1679년 이야. 폴란드 코트 에 친프랑스 가 쫓겨나가. 소비에스키 가 이때 오스트리아 와 손을 잡아야 하는겨. 

 

Sobieski's plans for the Commonwealth's own military campaign against Prussia was opposed by Commonwealth magnates, many of them taking the Prussian side.[16][21][24][26][27] Backed by Brandenburg and Austria, internal enemies of Sobieski even planned to dethrone him and elect Charles of Lorraine.[26]  

 

The French-Prussian treaty of 1679 meant that Sobieski lost the major foreign ally for his planned campaign against Prussia; consequently he started to distance himself from the pro-French faction, which in turn resulted in the cooling down of the Polish-French relations. During the Sejm of 1683, the French ambassador was expelled for involvement with a plan to dethrone Sobieski, definitely marking the end of the Polish-French alliance.[26] At the same time Sobieski made peace with the pro-Habsburg faction and started to gravitate towards an alliance with Austria.  

 

저때 폴란드 세임 애들이, 소비에스키 를 내쫓고 로렌의 샤를 을 킹으로 올리려 했던겨, 브란덴부르크 와 오스트리아 의 지원을 받아서. 그러다가 프랑스와 프러시아 인 브란덴부르크 가 손잡으면서 소비에스키 가 외톨이가 된거야. 프러시아 를 쳐들어 가려했다가 포기를 하고 프랑스 대사 가 오히려 저 킹 전복계획에 관여되었다며 쫓겨나. 그리고 소비에스키 는 합스부르크 로 돌아서는겨. 요게 마침 1683년 이야. 

 

Pope Innocent XI (LatinInnocentius XI; 16 May 1611 – 12 August 1689), born Benedetto Odescalchi, was Pope from 21 September 1676 to his death on August 12, 1689. He is known in Budapest as the "Saviour of Hungary" 

 

요때 소비에스키 에게 접근한 사람이, 교황 인노켄티우스 11세 야. 이 사람이 헝가리 의 구원자.로 알려진 사람인데, 저때 비엔나 를 도와주라며 나선 사람이 이 교황이고, 이어서 다음해 홀리 리그 를 조직하면서 투르크 를 내쫓아 버리는 일을 이 사람이 하는거야. 이 교황은 역사에서 평판이 좋아. 

 

Because of this surplus he repudiated excessive nepotism within the Church. Innocent XI was frugal in matters of governing the Papal States, from dress to leading a life with Christian values. Once he was elected to the Papacy, he applied himself to moral and administrative reform of the Roman Curia. He abolished sinecures and pushed for greater simplicity in preaching as well as greater reverence in worship—requesting this of both the clergy and faithful 

 

인노켄티우스 11세 가 자기 교황령의 세율을 확 낮춰. 그런데 세금은 더 잘 걷혀. 세금은 내리는겨 이건. 그래야 세수가 올라. 네포티즘 을 비난해. 네퓨 조카 여. 아는 친인척 성직 등용하는거 반대. 시네큐어, 큐어 캐어 안하면서 돈 쳐받는겨. 무노동무임금 원칙이야 성직자의. 공짜로 돈 받지 마라.

 

The King of PolandJohn III Sobieski, prepared a relief expedition to Vienna during the summer of 1683, so honoring his obligations to the treaty (he left his own nation virtually undefended when departing from Kraków on 15 August). He covered this with a stern warning to Imre Thököly, the leader of Upper Hungary, whom he threatened with destruction if he tried to take advantage of the situation—which Thököly in fact attempted. Jan Kazimierz Sapieha the Younger delayed the march of the Lithuanian army, devastating the Hungarian Highlands (now Slovakia) instead, and arrived in Vienna only after it had been relieved.[19]  

 

소비에스키 가 교황 말 듣고 2만7천명 긁어모아서 가는겨. 저해 여름에. 이미 오스만은 비엔나를 15만명으로 포위를 했어. 그리고 신성로마제국의 게르만들을 박박 긁어모아서 로렌공작의 2만에 다른애들 2만해서 사오만. 비엔나 수비병력 일이만 해서 얘들이 이렇게 팔구만명 이 되는겨. 

 

소비에스키가 크라크푸 를 떠나는게 8월 15일이야. 자기 나라는 완벽하게 무방비야 ㅋㅋㅋ. 저 2만 7천명이 폴란드 총 병력인겨. 그러면서 여기 비었다고 어퍼 헝가리 의 퇴쾰리 라는 쿠루츠 리더 보고 너  우리 폴란드 아무도 없다고 쳐들어가면 혼나 경고하고. 그런데 진짜 폴란드를 먹으려 한겨 ㅋㅋㅋ 아무도 없거든 저기. 이걸 리투아니아 에서 지원오는 얀 카지미어즈 가 진압하면서 좀 늦는거고. 그래서 이 병력은 비엔나 전투 끝나고 온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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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때 프랑스 애들은, 리유니온즈 전쟁 이랍시고, 알자스 의 스트라스부르 포위해서 항복받고 갖어 오고, 룩셈부르크 는 포위해서 성벽에 연일 대포질 하다가, 쉬는거야. 그리고 비엔나 전투 는 구경하고, 야 니덜 오스만 애들이랑 싸우는데 내가 좀 쉴께 같은 그리스도 인데. 얜 이게 다야. 프랑스 는 쿠루츠 를 지원하는 애들이고 오스만 하고는 원래 친구고 항상 오스만이 오스트리아 를 동쪽과 지중해에서 괴롭히는걸 즐기는 애들이고 그러면서 스페인 오스트리아 를 먹는거고 저 기회로. 

 

이게 프랑스 라는 나라 들이, 지금도 아시아 의 가치  하는 근본적인 이유야. 다양성을 모토로. 

 

아시아 의 가치 는 똥이야 똥. 

 

저 웨스턴에서 가장 하치리인 프랑스 가, 그야말로 똥이 되는 저 프랑스 가, 열등감 콤플렉스 를 찐하게 갖으면서 다양성에 오리엔탈리즘 을 내세우면서 먼가 기치를 드러내고 픈 저 후진 애들의 근본이, 파비아 전투로 프랑수아 1세 가 포로가 되서 엄마 시켜서 술레이만이랑 손잡으면서 주욱 이게 이어지는겨. 이 인연으로 이들이 의미없은 추상명사 를 갖고 지금도 마치 지들이 제일 잘난 자유의 프랑스 인 마냥, 참 후져 이 프랑스 가. 

 

The main Ottoman army finally laid siege to Vienna on 14 July. On the same day, Kara Mustafa sent the traditional demand that the city surrender to the Ottoman empire.[23] Ernst Rüdiger Graf von Starhemberg, leader of the remaining 15,000 troops and 8,700 volunteers with 370 cannons, refused to capitulate. Only days before, he had received news of the mass slaughter at Perchtoldsdorf,[24] a town south of Vienna, where the citizens had handed over the keys of the city after having been given a similar choice, but were killed anyway. Siege operations started on 17 July  

 

소비에스키 는 8월에 크라크푸 에서 출발해서 수디티즈 넘어야 하는거고. 오스만은 7월 14일 에 비엔나 를 포위했어. 폰 슈트라헴베르크 는 1만5천 병력에 나머지 지원자들에 370개 의 대포야. 항복 안해. 페르츠톨드스도르프 마을 대량 학살 소식을 들어. 비엔나 권역 남쪽 마을이야. 시민들이 항복해서 열어줬는데 걍 학살 하는겨. 이 들은 걍 사람죽이는게 취미야. 조선 들이 약자에 강하고 강자에 약하면서  오백년 쳐죽이며 찢어죽이듯이. 

 

3일 후 7월 17일에 공격이 시작돼. 이걸 두달을 버틴겨 비엔나 가. 대역병으로 7만명 이상이 죽은 직후 의 저 도시가. 

 

The Ottomans had 130 field guns and 19 medium-caliber cannon, insufficient in the face of the defenders' 370.[4] Mining tunnels were dug under the massive city walls, which would then be filled with sufficient quantities of black powder to blow up the walls.[16]:660 According to Andrew Wheatcroft, the outer palisade was around 150 years old and mostly rotten, so the defenders set to work knocking very large tree trunks into the ground to surround the walls. This seriously disrupted the Ottoman plan, adding almost another three weeks to the time it would take to get past the old palisade  

 

이때 오스만 애들이 무식한게 , 대포를 130개 갖고 간겨. 콘스탄티노플 1453년 함락할때 일등공신은 당시 초대형 대포거든. 오스트리아 가 이 대포가 더 많아. 성벽 허무는건 성벽 아래를 파서 화약 을 심어 터뜨리면서 구멍 만드는겨. 아직 저때는 대포 라는건 돌덩이야. 화약넣은 대포알 이 아냐. 외벽에 팰리세이드 가 말뚝으로 벽을 만든건데 이게 150년 된 나무들이어서 여기다가 새로 큰지름의 나무들을 무지 박은겨. 이걸 헤쳐나가는데 시간을 소비하고. 그러면서도 두달 즈음 되서 성벽이 허물어지기 시작해. 마침 요때 온거야 소비에스키가.

 

On 6 September the Poles under Sobieski crossed the Danube 30 km (19 mi) northwest of Vienna at Tulln, to unite with imperial troops and the additional forces from SaxonyBavariaBadenFranconia and Swabia. The forces were also joined by several regiments of Zaporozhian Cossacks from the Polish–Lithuanian Commonwealth.[28] Louis XIV of France declined to help his Habsburg rival, having just annexed Alsace.  

 

9월 6일에 소비에스키 가 다뉴브를 건너서 비엔나 북서쪽 툴린 에 온겨. 여기서 작센 바바리아 바덴 프랑코니아 슈바벤 병력과 합친겨. 여기에 코사크 친폴란드파 가 와죠. 이미 코사크지역은 오스만과 러시아 가 먹은겨. 프랑스는 당연히 안오고 얜  신성로마땅 먹을 생각만 하는거고. 헌데 저 병력들이 자잘 한겨 저게. 끽해야 로렌 공작의 2만이 많은 부대야 이미 온. 

 

 The leadership of the forces of European allies was entrusted to the Polish king, who had under his command 70,000–80,000 soldiers facing an Ottoman army of 150,000.[16]:661 Sobieski's courage and remarkable aptitude for command was already known in Europe.  

 

총 병력이 칠팔만 이야. 최고 사령관을 세워야해. 저기서 타이틀 상으로 소비에스키 가 킹 이야. 아무리 딴 공작이나 백작이 있어도 일단 못해. 소비에스키 가 폴란드 킹 타이틀로 최고 사령 맡을 수 밖에 없는거고 더하여 이미 이사람은 전장에서 경험이 풍부해 특히나 코사크 지역에서. 머 용기와 뛰어난 리더쉽은 이미 알려진건지는 모르고  저건 좀 말이 안되는게 소비에스키 는 딱히 유럽애들은 몰라. 얜 리비우 지역에서 저 동쪽에서 만 논 인간이거든. 

 

During early September, approximately 5,000 experienced Ottoman sappers had repeatedly blown up large portions of the walls between the Burg bastion, the Löbel bastion and the Burg ravelin, creating gaps of about 12 metres (39 ft) in width. 

 

이전 썰한 배스티온. 래블린. 얘들이 5천명의 새퍼들. 공병들이 도끼들면서 화약 터뜨리면서 성벽들을 걷어내는겨. 거의 다 뚫린겨 저 즈음에. 

 

The relief army had to act quickly to save the city and prevent another long siege. Despite the multinational composition of the army and the short space of only six days, an effective leadership structure was established, centered on the King of Poland and his heavy cavalry (Polish Hussars).  

 

9월 6일에 근처로 와서. 바로 다들 합류해서 조직 만들고, 폴란드 킹이랑 그 기병대를 주축으로 단시일동안 정리를 한겨. 딱 6일 걸렸어. 이게 졸 쉽지 않아. 다들 양보한겨 이게. 저기서 누굴 사령으로 만드냐 부터 어그러지기 시작하거든. 솔직히 소비에스키 가 저 완전 듣보잡 폴란드 가 킹 이라고 사령 하는게 속으로 다들 쉽지 않은겨. 게르만들이 저런거 받아들이는게 참 달라 다른 애들이랑. 

 

스파르테 와 아테나이 가 시칠리아 에 겔론을 끌어들이러 가. 페르시아 대군 처들어오는데. 저때도 싸우는게 총 사령권이야. 겔론 이 내가 총지휘 하겠다. 못 받아들여. 내가 끌고 가는 부대만이라도 내가 하겠다. 못하겠다 그것도 그게 무슨 전쟁이 되나. 시칠리아 를 포기해. 아무리 아쉬워도 저런걸로 어그러지거든. 

 

The battle started before all units were fully deployed. At 4:00 am on 11 September 1683, the Ottomans attacked, seeking to interfere with the deployment of Holy League troops  

 

9월11일 새벽 네시에 다 배치가 되고, 칼렌베르크 에서 쳐 내려오는겨. 저게 단 하루만에 끝난겨 다음날 해뜨면서. 

 

그러면서, 이제 본격적인 대투르크전쟁이 비엔나 부터 주욱 젠타 까지 진행이 되는거고, 드네프르강 을 사이에 두고 러시아와 오스만이 제대로 붙는겨 이게. 러시아가 본격적으로 유럽에 등장하는겨. 몰도비아 왈라키아 전체 가 흔들리고.

 

바다에서는 다시 베네치아 가 크레타 섬 뺏기고 나서 다시 시작하는겨 모레아 전투 로 모레아 라는 펠로폰네소스 를 다 갖고와. 곧 다시 줘야 하지만. 

 

저 와중에 잉글랜드는 명예혁명 이라는 게 일어나 1688. 이것도 런던 대역병 으로 시작하는 반카톨릭으로 들썩이는겨. 더하여 9년 전쟁이 동시에 발생해. 저놈의 프랑스 저거 저거. 이 와중에 라인팔츠 가 지땅이라며 처들어오는겨. 그렇잖아도 전 유럽이 열받아 하고 있던 찰나에. 얘가 위그노 사라져라 내가 프랑스의 킹에 카톨릭의 신의 대리인 진짜니라 하민서리 프랑스 위그노 들 이십여만명이 다 나가서 잉글랜드 와 네덜란드 브란덴 으로 가는겨. 프랑스 애들이 자기들의 인재들을 일부러 내 쫓는거야 자기 이념이 중요하다며. 적폐들아 나가거라! 이 프랑스 란 나란 정말 쓰레긴데 이게 루이 14세 가 절정이야. 저런 애를 프랑스 애들은 위대한 프랑스인. 

 

저 위그노 들이 또한 잉글랜드 가서 반카톨릭 에 힘 실어주고 명예혁명 시키는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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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투르크전쟁, 홀리리그 전쟁 은 비엔나 전투 다음 이야긴겨. 저 때는 소비에스키 가 오직 대스타야. 폴란드에서 이 공이 있는겨 소비에스키 로. 

 

 

Plaque at the Polish Congregatio Resurrectionis church on Kahlenberg.

 

칼렌베르크 에 있는, 폴란드 인들이 세운 교회 리서렉션이스트 콩그리게이션 교회(로마 카톨릭의 가지) 의 명패. 소비에스키 가 1683년 Wien 비엔 비엔나 를 그리스도 의 구원을 위해 구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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