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epan Timofeyevich Razin (Russian: Степа́н Тимофе́евич Ра́зин, Russian pronunciation: [sʲtʲɪˈpan (ˈsʲtʲenʲkə) tʲɪmɐˈfʲeɪvʲɪtɕ ˈrazʲɪn]; 1630 – June 16 [O.S. June 6] 1671), known as Stenka Razin (Стенька), was a Cossack leader who led a major uprising against the nobility and tsarist bureaucracy in southern Russia in 1670–1671  

 

스테판 티모피이비치 라진. 40세 에 반란해서 죽은건데. 1671. 스텐카 라진 으로 알려지다. 코사크 리더 이고, 지금 러시아 리터러쳐 와 음악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인물 이라고 보면 되는데, 민들 을 대표 하는 사람이거든. 귀족 과 차르코트 의 관료들에 대항했다고. 교묘한건데, 차르 는 존중을 하는데,  차르 를 둘러싼 관료 와 귀족들 이 싫다는거걸랑. 딱히 차르 황제 도 기분 나쁠거 없고, 민중들에겐 인기있는 캐릭이야 지금도. 

 

러시아 가, 흐멜니츠키 반란 을 시작으로, 준비되서 다시 서진하는 거거든. 로마노프 의 2세대인 알렉세이 부터. 폴란드 와 전쟁하고, 스위든이 들어오고, 러시아는 폴란드로 부터 스몰렌스크 에서 레프트뱅크 인 드네프르강 동쪽을 갖고오고, 이때부터 러시아 가 오스만 이랑 만나는겨. 바로 오스만이 크림에서 올라와서 라이트뱅크 인 강 왼쪽을 갖고 오고, 바로 붙는겨 저 강 을 사이로 러시아 와 오스만이. 

 

John II Casimir (PolishJan II Kazimierz WazaLithuanianJonas Kazimieras Vaza; 22 March 1609 – 16 December 1672) was King of Poland and Grand Duke of Lithuania from 1648 until his abdication in 1668  

 

얀2세 카시미르. 폴란드 킹이, 1668년에 내려와. 자의반 타의반, 부인도 죽고, 아무것도 못해 세임애들때문에. 프랑스 가서 죽어. 

 

Michael I (PolishMichał Korybut WiśniowieckiLithuanianMykolas I Kaributas Višnioveckis; 31 May[1] 1640 – 10 November 1673) was the ruler of the Polish–Lithuanian Commonwealth as King of Poland and Grand Duke of Lithuania from 29 September 1669 until his death in 1673.[2]  

 

1668년 부터, 28세 에 킹이 되서 5년후 1673년 에 죽는데. 비슈니오비에츠키 가문의 미하우 1세. 33세 에 죽어 갑자기. 귀족 가문이지만, 힘이 없어. 이미 폴란드는 끝난겨 이게 셰임애들의 민주주의로. 참 안타까운 나란데 여긴. 자부심의 폴란드 귀족애들이 고리타분한 능력없는 귀족들로 바뀐게 이때부터야. 이게 2백년 지나서 폴란드 인형 이란 이야기까지 가는거고. 독살 로 죽은 거로 봐. 암살 당한겨. 이 바로 다음날에 코틴전투 1673년 이야. 이 전투를 폴란드가 이겨. 

 

John III Sobieski (PolishJan III SobieskiLithuanianJonas III SobieskisLatinIoannes III Sobiscius; 17 August 1629 – 17 June 1696) was King of Poland and Grand Duke of Lithuania from 1674 until his death.  

 

헤트만이 얀3세 소비에스키 야. 이사람이 킹으로 선출이 돼. 1674-96년 까지. 그리고 베틴 가문에 가서 다음에 지워지는건데. 

 

1668년. 과 1673년. 이야. 

 

Polish-Cossack-Tatar War was the war between the Polish-Lithuanian Commonwealth and the Ottoman Empire (in practice, a proxy war between the Cossack Hetmanate and Crimean Khanate) over Ukraine. It was one of the aftermaths of the Russo-Polish War (1654–1667) and a prelude to the Polish–Ottoman War (1672–1676)

 

폴란드-코사크-타타르 전쟁. 1666-71.  이 전쟁 와중에 얀2세 카시미르 가 사임을 한거야. 폴란드 코트가 망가진겨 이건. 요때 코사크 와 크림타타르 가 손잡고 폴란드로 쳐들어가는겨. 코사크 의 헤트만 은 이때 오스만 에 하미지 를 한거고. 이걸 막는게 뒤 킹이 되는 소비에스키 이고. 그런데 저때 1668년에 얀2세 가 내려왔어. 폴란드 킹 자리가 빈거야. 요때 크림 타타르 칸 이 ㅋㅋㅋ, 폴란드 킹 선거에 출마를 해. 요때 우리 언니 덴마크 크리스티나 도 스위든 가서 다시 기웃거리다가 여기로 출마를 하시는거고. 그러면서 크림타타르 가 오스만에서 친폴란드 로 돌아선겨. 갑자기 손 잡았던 코사크와 타타르 가 적이 돼. 오스만이 칸 을 바꿔

 

Adil GirayAdil Khan Girai (Crimean TatarAdil Geray, عادل كراى‎‎) was khan of the Crimean Khanate from 1666 to 1671. He strongly supported the Polish-Lithuanian Commonwealth, and was one of the candidates in the Polish royal election of 1669.[1] In 1671 Giray was removed as khan by Mehmed IV, the Ottoman sultan, when the sultan decided to wage war with the Commonwealth.[2]  

 

아딜 기라이. 친폴란드 로 돌아선 크림타타르 칸. 이야. 사연이 있는 사람인데, 친엄마가 폴란드 귀족여자고, 타타르가 생포를 해. 기라이 Giray 가문이 크림타타르 칸 가문이야. 기라이 의 자식이 여자를 마음에 들어해서 결혼하자고 해. 여자는 그리스도야 그럴 수 없어. 기라이 가 돌려보내고 돈만 받아오라고 시켜. 돌아가는 중에 이 여자가 애를 낳아, 기라이 는 자기는 교미한적 없다며 수행한 세명을 죽여. 하인이 애를 갖고 도망가고 아이가 목동으로 커. 기라이 칸이 나중에 얠 알게 돼 자기 형제 핏줄이라며. 얘를 데려와서 칸이 된겨 저때. 그러다가 친 폴란드로 돌아서서 짤려 오스만한테. 

 

그리곤 다시 타타르 와 코사크 가 친오스만 으로 손잡고 폴란드 에 대들다가 역시나 이때 소비에스키 한테 패하는겨. 그리고나서 직접 오스만이 등장을 하는거야. 

 

Polish–Ottoman War (1672–1676) was a conflict between the Polish–Lithuanian Commonwealth and the Ottoman Empire, as a precursor of the Great Turkish War. It ended in 1676 with the Treaty of Żurawno and the Commonwealth ceding control of most of its Ukraine territories to the Empire.    

 

바로 폴란드-오스만 전쟁이야. 1673년 코틴 전투 직전에 미하우1세 킹이 죽은겨. 소비에스키 가 여기서 승리 하고 폴란드 킹이 되는거고. 그래도 이후 오스만이 이기고, 포돌리아 에 오른쪽 라이트뱅크 인 드네프르강 서쪽을 다 갖고 오는겨 오스만이. 

 

저 코틴전투 1673은, 예전 오스만2세 가 30년 전쟁 터질때 보헤미아와 약속해서 얘가 쳐 올라가거든 코틴 으로. 니스터 강변 몰도비아 북쪽이야. 여기서 패하고 예니체리 한테 암살당하잖니. 50년 지나서도 저기서 지는겨 오스만은. 

 

그래도 우크라이나 를 다 갖고 와 이때. 강 오른쪽은 러시아 이고. 

 

The Russo-Turkish War of 1676–1681, a war between the Tsardom of Russia and Ottoman Empire, caused by Turkish expansionism in the second half of the 17th century.  

 

그러면서 본격적으로 러시아 터키 가 1676년 에 붙는거야. 이게 세계대전 1차 까지 가는겨. 340년 을. 우크라이나 의 가운데 강 줄기 드네프르강 을 두고. 

 

In 1678 the Turkish army captured Chyhyryn and declared Yuri Khmelnytsky as a new hetman of Ukraine, although in reality he was only a puppet for the Ottoman Sultan. Ottoman Turkish army with Yuri in tow captured and burned down Kaniv and other Ukrainian towns. He then retired to his Sultan dictated capital at Nemyriv in Turkish occupied parts of Ukraine, as a vassal of sultan Mehmed IV until 1681, when the Turks removed him from power due to his unstable mental health and unprecedented cruelty. Two years later, he was briefly re-instated by the Poles. Finally in 1685 the Turks captured Yuri and executed him (strangled[1]) in Kamianets-Podilskyi.  

 

저 강을 사이에 두고 러시아 오스만 이 서로 마주하고, 결판 안나고, 할때 오스만이 여기 코사크 헤트만 을 유리 에게 주는게 1678년 이야. 37세. 수도원에 포로로 있는걸 여기 앉힌겨. 흐멜니츠키 의 아들. 헌데 

 

유리 가 16세 에 헤트만 이 될때는, 친러시아 코사크 들이 올린거거든. 이전 친폴란드 를 내리고. 그러다 러시아  스위든 쳐들어와서 폴란드랑 손잡으면서 러시아는 코사크 를 버리는거야. 유리 가 친폴란드 해야해. 친러시아 주류인 코사크 가 반란해서 유리 는 크림타타르 랑 손잡아, 그런데 약탈에 회의 느껴 수도사 가 돼. 그리고 다시 나와서 코사크 애들 밑에서 타타르 에 전쟁하다가 포로 되서 오스만에 가는겨. 그리곤 오스만이 러시아 랑 저때 1676년 전쟁할때 유리 를 코사크 헤트만으로 올려. 16세 부터 37세 까지 이렇게 살은겨 20년을. 

 

친러시아 친폴란드 친타타르 하다가 친오스만 이 된거야. 

 

완벽하게 충성하자 인거야 이제. 졸 잔인해졌어 사람이. 오스만이 유리 의 코사크 와 같이 러시아랑 전투하고, 태우고 막막 해. 그리고 은퇴를 해서 포돌리아 지역인 네미리브.에 서 임차인으로 있는겨. 1681년 까지. 러시아 와의 전쟁 때까지야. 그런데 저 도시 자리를 박탈해. 사람이 잔인하고, 정신병이 있는거야. 그러다 2년 후에 폴란드 에서 유리 를 헤트만 으로 임명한거야. 폴란드 애들 입장에선 저긴 무단 점유거든 여전히 자기들 꺼고. 1685년 에 유리를 체포해서 죽여. 

 

오스만이 메메드4세 가 1642년 생인데 나이 여섯에 올라서, 다 큰거야. 20대가 되서, 트랜실베니아 의 무단 행위를 처벌하기 위해 직접 갖고 오고, 바로 오스트리아 가 문제제기하면서 오스트리아-터키 가 붙고 터키가 더 왼쪽으로 가서 비엔나 와 마주하고, 이게 오스트리아-터키 전쟁 1663-64 이고. 오른쪽에선 폴란드-터키 1672-76. 러시아-터키 1676-81 하면서 왼쪽 오른쪽을 다 정리하고나서, 비엔나 로 쳐들어가는겨. 이게 대 투르크 전쟁 1683-99 야. 

 

그러면서 오스만 은 저물어가기 시작하는거고, 저때 이전 상대했던 러시아 는 표트르 등장하면서 대북방전쟁을 하는거고. 오스트리아 는 오스만을 몰아내면서 헝가리에 트랜실베니아 를 완벽히 갖고오고, 라이트뱅크 에 포돌리아 인 드네프르 서쪽은 폴란드 가 오스만에서 이때 갖고 오지만, 폴란드는 바로 찢어져 지워지는거고.

 

오스트리아 는 스페인 후계자전쟁으로, 스페인은 완전히 포기를 하는거고 오히려 오스만 몰아낸 동쪽이 오스트리아 차지가 돼. 

 

할때 스텐카 라진. 1670-71 은. 

 

Razin's father, Timofey Razya, supposedly came from a suburb of Voronezh, a city near Russia's steppe frontier, called the Wild Fields. Razin's uncle and grandmother still lived in the village of New Usman' or Usman' Sobakina, 8 kilometres (5.0 mi) outside of Voronezh, until 1667.[2] Who was his mother remains unknown, historians do not have any reliable data. In one of the documents, he was mentioned as tuma Cossack which initially means half-blood. This word was used by "upper Cossacks" as a derogatory nickname towards all "lower Cossacks"  

 

이사람 약력은 어릴때 알려진게 단지, 아빠가 보로네슈. 와일드 필즈 라는게 포돌리아 에 코사크들 있는 니퍼강 좌우변 인 우크라이나 중남부 전체 지역의 대명사이고, 보로네슈 는 여기 동북쪽인 지금 러시아 땅이고. 투마 코사크 로 불렸다, 반 코사크 라는 하류 코사크를 말해. 순수 코사크 가 자기들은 상류고 섞인애들은 하류 라며 투마 코사크 라고 했대. 

 

He was first mentioned in the sources in 1652, when he asked for permission to go on a long-distance pilgrimage to the great Solovetsky Monastery on the White Sea for the benefit of his soul.[8] In 1661, he was mentioned as part of a diplomatic mission from the Don Cossacks to the Kalmyks. After that, all trace of him was lost for six years, when he reappeared as the leader of a robber community established at Panshinskoye, among the marshes between the rivers Tishina and Ilovlya, whence he levied tribute from all vessels passing up and down the Volga 

 

22세때야 보여. 솔라비에츠키 수도원 을 가는데 허락해달라고. 백해 의 섬 의 수도원이야. 영혼의 이익을 위해서. 갔냐? 몰겄네. 30세 즈음에 외교미션을 받은게 보여. 돈코사크 에서 칼미크 로. 칼미크 들이, 저때 들어온 몽골 애들이야. 준가리아 에서 살다가 몽골애들에게 쫓겨서 여까지 들어온겨 카스피해 서북쪽해안에 쑤셔박혀서. 여기 를 공무로 돌아다니면서 인맥이 쌓이고, 강도 의 리더 로 재등장한거야 6년 후에. 그러면서 볼가강 지나는 모든 배들에서 통행세를 받는겨 이사람이. 

 

여기가 볼가강 이지만, 볼가 코사크 도 언급되지만, 코사크 하면 자포리지안 과 돈 코사크야. 볼가 강도 왼쪽 돈 강과 함께 돈 코사크 영역이야. 

 

돈 코사크 는 이반4세 때 스트로가노프 휘하로 시베리아 원정간 코사크야. 그리고 비참한 시기이후엔 왼쪽 자포리지안 과 함께 폴란드 코트의 용병일을 하며 먹고살아. 30년 전쟁 도 폴란드 쪽에서 돈받아 일하고. 여기도 폴란드에 휘둘려서 사는게 비참하고, 러시아는 힘이없을때고 폴란드 스위든 처들어올때 여기가 무정부 상태여 또한. 여기 코사크 들이 경제가 피폐 해진겨. 이 돈강과 볼가강 쪽은 강도들 투성이 인거고. 

 

이때 저 스텐카 라진.이 민심을 대표해. 저때 지방의 관료들이 민들의 증오의 타겟인거고. 굳이 차르 반대 를 안내세우고 관료 들에 귀족들의 부정부패 가 문제라며 반란을 하는겨 이사람이. 

 

돈 강에서 코사크들을 규합해서 볼가강으로 간거야. 코사크 핏줄을 이용한거고. 이사람이 볼가강 에 오른쪽 우랄 강 까지 들어가는겨. Yaitsk 예이츠카 라는 우랄강 중류여 카스피해 머리정수리 들어가는. 수도사 행세하다가 여길 점령해. 마을 민들도 코사크를 동정해서 안 싸워. 1667년에 시작해서 예이츠카 에선 정부군에 쫓겨나고 페르시아 원정을 해

 

Razin went to Isfahan to ask the shah for land in Persia in exchange for loyalty to the shah, but departed on the Caspian for more pillaging before they could reach an agreement.[18] Razin arrived in Farahabad (on the southern shore of the Caspian Sea in Iran) and masqueraded as a merchant in the city for several days before he and his men pillaged the city for two days. That winter the Cossacks with Razin fended off starvation and disease on the Miankaleh Peninsula, and in the spring of 1669 Razin built a base on the eastern side of the Caspian Sea and began raiding Turkmen villages.[19] Then in the spring of 1669 he established himself on the isle of Suina, off which, in July, he annihilated a Persian fleet sent against him. Stenka Razin, as he was generally called, had now become a potentate with whom princes did not disdain to treat.

In August 1669 he reappeared at Astrakhan and accepted a fresh offer of pardon from Tsar Alexei Mikhailovich there; the common people were fascinated by his adventures. The lawless Russian border region of Astrakhan, where the whole atmosphere was predatory and many people were still nomadic, was the natural milieu for such a rebellion as Razin's.  

 

카스피해를 죽 도는겨. 왼쪽 해변 지금 다게스탄 에 아제르바이젠 에 돌아다니고, 저 내륙 이스파한 까지가서, 저때 사파비 여 이란은. 내가 샤 한테 충성할테니 땅 좀 줘유. 그러면서 약탈하는겨 허락 해달라면서 카스피해 주변을. 저기가 이란 북부 인 카스피해 해변까지 돌아다니는겨 라진 과 돈 코사크 들이. 상인 인척 들어가서 도시를 이틀간 약탈하다. 카스피해 동쪽해변에서 기지 건설하고 투르크멘 마을들을 약탈하다. 자기한테 보낸 사바피 배도 약탈해. 완전 짱이야. 그러다 1669년, 2년 후에 아스트라칸. 카스피해 서북변이고 바로 왼쪽아래가 칼미크 고. 알렉세이 차르 가 용서를 해줬대. 민들이 황홀해해 라진 의 모험들로. 저지역은 특히나 무법지역의 정서였고. 

 

In 1670 Razin, while ostensibly on his way to report at the Cossack headquarters on the Don, openly rebelled against the government, capturing Cherkassk and Tsaritsyn. After capturing Tsaritsyn, Razin sailed up the Volga with his army of almost 7,000 men. The men traveled toward Cherny Yar, a government stronghold between Tsaritsyn and Astrakhan. Razin and his men swiftly took Cherny Yar when the Cherny Yar streltsy rose up against their officers and joined the Cossack cause in June 1670.[20]  

 

라진 이 1670년 에, 돈코사크 본부인 왼쪽 돈강 에서, 세력을 다 모아서, 오른쪽으로 쳐들어가는겨 제대로. 체르카스크 차리친.이 볼가강 중류 카스피해 들어가는 곳이거든. 죽 오른쪽으로 해서 볼가강 을 접수하고 7천명 으로. 아스트라칸 은 카스피해 북서 뒷통수고. 그리고 볼가강 따라 올라가서 죽 타고 돌아서 모스크바 까지 가려는겨. 음청나 이게. 사람들이 몰려 오히려 코사크로. 자기 지역의 관리들에 대한 반기로. 1670년 오유월에 시작한겨. 

 

Razin proclaimed that his object was to root out the boyars and all officials, to level all ranks and dignities, and establish Cossackdom, with its corollary of absolute equality, throughout Muscovy

 

라진은 선언했다 목적은 보야르들 과 모든 관리들을 뿌리뽑고 모든 신분들을 다 올리고. 코사크들의 지배땅을 세우고. 완벽한 평등을 실현하겠다. 모스크바 이름의 전체 땅을. 

 

it continued for six months after Razin had received his quietus. At Simbirsk his prestige had been shattered.  

 

6개월동안 계속되다가 심비르스크 에서 힘이 떨어져. 볼가강 중류에 서쪽 삼사백키로에 모스크바고. 

 

In 1671, Stepan and his brother Frol Razin were captured at Kagalnik fortress (Кагальницкий городок) by Cossack elders. They were given over to Tsarist officials in Moscow, and on 6 June 1671, following the announcement of the verdict against him, Stepan Razin was quartered on the scaffold on Bolotnaya Square. A sentence of death was read aloud: Razin listened to this calmly, then turned to the church, bowed in three directions, passing the Kremlin and the tsar and said: "Forgive me". The executioner then proceeded to first cut off his right hand to his elbow, then his left foot to the knee. His brother Frol, witnessing Stepan's torment, shouted out: "I know the word and the matter of the sovereign!" (that is, "I am willing to inform upon those disloyal to the tsar"). Stepan shouted back, "Shut up, dog!" These were his last words; after them the executioner hurriedly cut off his head. Razin's hands, legs, and head, according to the testimony of the Englishman Thomas Hebdon, were stuck on five specially-placed stakes. The confession helped Frol to postpone his own execution, although five years later, in 1676, he was executed by beheading at the same place in Bolotnaya Square  

 

1671년. 스테판 과 그의 브라더 프롤 이 체포되었다 코사크 원로들에 의해서. 코사크 가 잡아서 모스크바 에 인도하고 1671년 6월 6일 에 판결 나고, 교수대에서 찢겨지고. 사형판결이 크게 읽혀지다. 라진은 조용히 들었다 그리곤 교회로 향하고 세 방향들로 꾸벅이다. 크레믈린 과 차르 쪽 향해서. 그리고 말하다. 나를 용서해라. 처형수가 오른 팔뚝을 짜르다. 그리곤 왼쪽 무릎을 짜리다. 형제 프롤 이 이걸 보고 소리 지르다. 나는 알아 그 단어를, 그리고 그 사버린의 문제를. 즉 나는 차르에 불충한 이들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께요. 스테판이 돌아서서 닥쳐 개야!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리고 머리를 짤랐다. 잉글리쉬 토마스 헵든 의 증언에 의하면 다섯 각각의 막대기에 그것들이 걸렸다. 프롤은 처형이 연기되고 오년후 참수 되었다. 

다음해 폴란드 오스만 전쟁이고, 이어 러시아 오스만 전쟁이고, 우크라이나 에서


솔로비에츠키 섬. 백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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