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Kostka Napierski uprising was a peasant revolt in Poland in 1651.

It took place at the same time as the more important Khmelnytsky Uprising in the south-east part of the Polish-Lithuanian Commonwealth and during the Swedish preparation to invade the Polish-Lithuanian Commonwealth.  

 

코스트카 나피에르스키 봉기. 가 1651년. 1648년 에 흐멜니츠키 가 드녜프르강 가운데 에서 봉기해서 서쪽인 포돌리아, 루떼니아 갈리시아 쪽으로 가고, 이 흐멜니츠키 와 손잡은 사람이 코스트카 나피에르스키.야. 폴란드 사람이야. 이사람은 폰데일 지역. 지금 폴란드 가 아래 경계가 왼쪽이 체코 로 수디티즈 산맥으로 경사면이고, 이 오른쪽 남부가 평행하게 슬로바키아 야. 이 슬로바키아 경계 가운데 가 포데일 지역이라고 해. 

 

Podhale (literally "under the Mountain meadows") is Poland's southernmost region, sometimes referred to as the "Polish highlands". 

 

 

The Tatra MountainsTatras, or Tatra (Tatry either in Slovak (pronounced [ˈtatri]) or in Polish (pronounced [ˈtatrɨ]) - plurale tantum), is a mountain range that forms a natural border between Slovakia and Poland. They are the highest mountain range in the Carpathian Mountains.  

 

카르파티아 산맥 이 슬로바키아 전체로 휘감아 뻗을 때. 이 산맥 의 북쪽 기슭이야. 이 슬로바키아 가운데 를 타트라, 타티 라고 해. 요기를 포데일 이라고 저부분만 폴란드 가 살짝 들어가있거든. 폴란드 땅이고. 최고 관광지인데. 이 오른쪽 이 루떼니아 갈리시아 하는 할리치 볼리니아 인 지금 리비우 가 중심인 지역이고, 이 오른쪽이 포돌리아 에 더 가면 드녜프르강 의 치히린 이라는 흐멜니츠키 코트야. 나피에르스키 가 3년후 인 1651년 에서 저기서 봉기를 해. 이때 이 아래가 트랜실베니아 거든. 헝가리 정체성의 중심은 이 트랜실베니아고 이 때 프린스가 라코치 의 아들이야. 조지2세 라코치. 얘가 같이 해줘야 하는데 저때 안간거야. 그러다가 러시아의 폴란드 침입 으로 스위든이 긴장타서 폴란드 쳐들어오면서 이때 스위든 카를10세가 트랜실베니아 의 조지2세 라코치 와 동맹을 맺거든. 이 폴란드 델류지 의 핵심은, 코사크 에 이 트랜실베니아 인겨. 이 정세가 아주 묘해. 러시아 와 스위든 은 적이야. 러시아 는 코사크 랑 손잡고, 스위든 은 저짝 대륙 깊숙히 트랜실베니아 와 손잡고, 그런데 트랜실베니아 는 코사크 와 그럼 머냐는겨 이게. 얘들 둘도 손잡아야 하거든 폴란드를 타겟으로 한다면. 저 놈의 폴란드가 지기스문트 3세 바싸 때문에 트랜실베니아 를 적으로 둔겨 또한. 이 똥을 저때 맞는거고. 

 

코스트카 나피에르스키 는 30년 전쟁때 스위든 쪽에서 용병으로 뛴 사람이야 폴란드인이. 이사람은 프로테스탄트인겨. 폴란드는 지기스문트 바싸가 완전히 로마 카톨릭 으로 돌아선거고. 자유의 폴란드가 얘 때문에 망한겨 이게. 그러면서 나피에르스키 가 돌아와서, 봉기 를 하고, 코사크의 흐멜니츠키 와 손잡고 이쪽서 흔들어 주는거야. 여긴 흐멜니츠키 가 오기엔 너무 멀어, 트랜실베니아 에서 와주기로 했는데, 이때 이 조지2세 라코치 가 안움직인거야 너무 자잘하니까. 그래서 나피에르스키 는 진압되고 임페일드. 말뚝박혀 죽는거고. 저건 농민 봉기 로 봐. 

 

Alexei Mikhailovich (Russian: Алексе́й Миха́йлович, IPA: [ɐlʲɪˈksʲej mʲɪˈxajləvʲɪtɕ]; 19 March [O.S. 9 March] 1629 – 8 February [O.S. 29 January] 1676) was the Tsar of Russia from 1645 until his death in 1676  

 

러시아는 미하일1세 가 32년 재위해서 시베리아 원정으로 태평양 까지 가고, 1645년에 죽고, 아들 알렉세이 가 16세 에 차르에 올라. 즉 이때는 실세가 Zemsky Sobor 젬스키 소볼 이라는 전체 의회.야. 이 보야르들 주교들 관료들 시민들 회의체 로 로마노프 를 차르를 올리고, 그래서 미하일 은 절대군주 행세 는 못하는겨. 협의체 로 움직이는거야. 아들도 16세 에 오르고, 의사결정은 이 젬스키 소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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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8년 봉기 하고 3년지나서 폴란드 남부에 나피에르스키 가 농민봉기 하고, 흐멜니츠키 가 러시아 에도 계속 콜 한거야. 이 흐멜니츠키 가 욱 해서 시작한게 아냐 이건. 이 사람은 치밀한 사람이야. 코사크 들의 정체성은 원래 루쓰 Rus 라는 러시아였고, 이들은 오소독시 야.

 

흐멜니츠키 가 코사크에서 20년 활동해서 짱이 되서 봉기를 한 가장 큰 명분은. 종교 문제야. 

 

The Union of Brest, or Union of Brześć, was the 1595-96 decision of the Ruthenian Orthodox Church eparchies (dioceses) in the Polish-Lithuanian Commonwealth to break relations with the Eastern Orthodox Church and to enter into communion with, and place itself under the authority of the Pope of Rome. The Eparchy of Mukachevo that was located in the Kingdom of Hungary was left out of the process. The union established the Ruthenian Uniate Church

 

유니온 오브 브레스트. 브레스트 라는 도시가 지금 벨라루스 의 서남쪽 끝이야. 요 아래 가 우크라이나 의 리비우. 여. 루떼니아 지역이고, 벨라루스 를 블랙 루떼니아, 리비우 의 루떼니아 를 레드 루떼니아 라고 한다 했잖니. 여기서 1595-96 년에 유니온, 합치는 걸 결정해. 루떼니아 의 오소독시 를 로마 카톨릭 으로 갖고 오는거야. 루떼니아 지역이 오소독시 를 끊고 로마 카톨릭이 된겨. 그러면서 이게 점점 우크라이나 전지역으로 퍼지는거고. 

 

그래서 저게 키예프 까지 가고 아래 주욱 치히린 씨츠 까지 오는겨. 유대인 들을 앞세워서 오소독시 는 교회 입장 불가여. 유대인들을 저런데 써먹는거고 그래서 유대인들은 반유대주의 로 또한 꺼리가 생기는거고. 저 우크라이나 지역이 아주 역사가 독특한 지역이야 저기가. 찌인 한 역사의 현장이야. 코사크 들이 저 이후 봉기를 할때 코사크 등록제 에서 허가제로 바꾸면서 먹고살 꺼리 문제로 봉기하다가, 저 종교 문제가 점점 확산되면서 흐멜니츠키 는 결정적으로 이걸로 일어난거야. 

 

 

니콜라이 고골 의 타라스 불바. 의 코사크 봉기 의 결정적 원인 도 이사람은 저 브레스트 유니온 으로 본거고, 잘 본겨 고골이. 

 

저걸 추진한게 지기스문트3세 바싸 야. 저 지역은 원래부터 류릭에서 다음 리투아니아 에 하미지 하던 땅이고, 폴란드는 종교 자유였다가 얘가 킹 하면서 저길 로마카톨릭으로 바꾸고, 자기 코트도 로마카톨릭으로 바꾸려하고, 러시아 도 로마카톨릭으로 바꾼다면서 저 오소독시 적폐  하다가, 폴란드 란 나라가 지워진겨 얘 때문에. 

 

브레스트 유니온 1596. 이 졸라 중요한겨. 그래서 이후 우크라이나 는 오소독시 에서 로마카톨릭 으로 갔다가, 다시 러시아 로 오면서 오소독시 가 되고, 이때 러시아 의 하부로 들어가는겨 교회는. 그러다가 최근에 우크라이나 랑 러시아 랑 전쟁하면서 우크라이나 가 작년에 이 교회 도 러시아 페이트리아크 에서 나오고, 콘스탄티노플에서 이걸 승인하면서 우크라이나는 별도의 자치 교회 로 된거야. 작년에. 

 

Although the Zemsky Sobor of 1651 was poised to accept the Cossacks into the Moscow sphere of influence and to enter the war against Poland-Lithuania, the Tsar waited until 1653, when a new popular assembly eventually authorized the protectorate of Ukraine with Tsardom of Russia. After the Cossacks ratified the agreement at the Pereyaslav Council, the Russo-Polish War became inevitable.    

 

러시아 가 폴란드 에게 특히나 이가 부득부득 갈리는 애들이야. 헌데 신중한거야. 흐멜니츠키 는 계속 콜하는거고. 의외로 안움직이는거야 러시아가. 젬스키 소볼, 국가 의회 에서 어차피 결정은 한거고, 시기의 문제야 저건. 그러다가 1653년 에야 새 소볼 이 소집해서 우크라이나 를 수호하면서 자기들이 갖고 오자면서 이제야 폴란드 에게 복수하자 하는겨. 그리고 나서 

 

The Pereyaslav Council (Ukrainian: Перея́славська рáда, Russian: Переясла́вская рáда), was an official meeting that convened for ceremonial pledge of allegiance by Cossacks to the Tsar of Muscovy in the town of Pereyaslav (now Pereiaslav in central Ukraine) in January 1654  

 

페레야슬라브 회의. 1654년이야. 러시아 가 결정하고, 여기가 드녜프르 강, 치히린 위에, 키예프 아래 의 도시야. 여기서 코사크 랑 러시아 가 협약한게, 러시아가 코사크 보호해주겠다, 코사크 는 러시아에 충성한다. 

 

oppression by the Jews who governed estates as well as recovery of positions of the Orthodox Church in own lands. However, the autonomy obtained by Khmelnytsky found itself squeezed between three Great powers: Polish-Lithuanian CommonwealthTsardom of Russia and Ottoman Empire.  

 

여기서 가장 큰 명분이, 이념적으로는, 오소독시 의 회복이야. 전쟁이란 먼가 거창한 이념 이 안 걸리면 움직이기 쉽지 않은겨. 저걸 지기스문트 3세 바싸가 명분을 준거거든. 이게  커 사람들을 전쟁에 임하게 하는 사기에. 그러나 흐멜니츠키 는 저때 폴란드, 러시아, 아래 오스만 이야. 참 쉽지 않은겨 우크라이나 라는게 아무 힘도 없고. 그렇다고 머 대단한 문명도 없고. 폴란드 란 나라는 코사크를 죽이려 하면서 로마카톨릭으로 바꾸라고만 하고. 참 한심한 애들이야 지기스문트 부터의 저 폴란드란건. 이게 모두 얀 자모시스키 죽고 부터 시작된거고, 여전히 폴란드는 지기스문트 위대해 자모이스키 는 나뽀 하거든. 주류 사가 들은.

 

 

 

 

 

모스크바 에서 왼쪽 벨리 Bely, 도로고보즈 Dorogobuzh. 여기가 저당시 폴란드 카먼웰쓰 와 러시아 의 경계선이야. 왼쪽에 스몰렌스크 Smolensk 도 당연 폴란드.고. 주욱 아래 Bryansk 브리안스크. 지금 벨라루스 의 고멜 Gomel. 민스크. 왼쪽에 빌니우스 Vilnius. 카우나스 Kanunas. 아래 왼쪽 끝에 그로드노 Grodno. 브레스트 Brest. 지나서 루블린 Lublin. 그아래 리비우 Lviv. 

 

In July 1654 the Russian army of 41,000 (nominally under the Tsar, but in fact commanded by Princes Yakov Cherkassky, Nikita Odoevsky and Ivan Khovansky) captured the border forts of Bely and Dorogobuzh and laid siege to Smolensk.  

 

러시아가 1654년 7월 에 4만 1천명 을 출격해서, 스몰렌스크 로 가는 부대. 아래 브리안스크 로 가는 부대 로 나눠서. 얘들이 동시에 좌아아악 서쪽으로 진격하는겨. 위에 내가 언급한 저 지역들을 다 점령하는겨. 먹고 위로 빌니우스 카우나스 그로드나 브레스트 에 루블린 까지 점령하는겨. 이게 끽해야 만 1년 걸린겨. 코사크 흐멜니츠키 를 앞세운거고 러시아가.

 

저때 폴란드 는 지워지는거였어 원래. 

 

이걸 누가 놀라겠어?

 

스위든이여 ㅋㅋㅋ. 이 스위든이 저 위에 리보니아 가 있잖오. 항상 이 리보니아 로 폴란드와 다퉈왔고, 이 리보니아 는 이반4세 가 폴라드에서 뺏아오려다 못뺏고 오히려 위 잉그리아 까지 줬거든 스위든에. 스위든이 가만 보니까 폴란드 다 뺏기고 저러다 자기들 리보니아 에 잉그리아 위험하고 더 가서 본토 자기들 나라로 쳐들어 올 테세인겨 러시아가. 러시아 는 폴란드 훨 이전에 스위든 과 적이었어 노브고로드 때 부터. 

 

그래서 스위든이 출격을 하는거야 부랴부랴. 어차피 폴란드 손을 보려 해 오던 차에 급해진거야. 

 

이것도 지기스문트3세 바싸 라는 애야. 얘가 스위든도 자기 땅이라면서 여전히 이 아래 두 자식도 스위든 킹 자리 줘요 줘요 해대는거고. 이 폴란드 라는 애들이 지기스문트3세 부터 저 스위든을 적으로 만든겨. 이들이 지기스문트3세 부터 사방을 모~두 적으로 만든거야. 오직 하나 합스부르크 편 들고 로마카톨릭이란 이념 에 미쳐서. 이 이념에 미친 애들 치고 지능 떨어진 미개한 애들이 아닌 애들이 없고 결국 이런 애들이 권력층에 앉아서 이후 수백년 수천년 그 나라가 지워지면서 힘들어지는게 역사의 아주 팩트야 이게. 곧 우리 조선민국도 자랑스럽게 저렇게 비참한 지옥이 되고, 결국 여긴 지워질 수 밖에 없어. 지금 시대 저 권력 애들 때문에. 저들을 정의로 떠받치는 저 미개한 민들. 참 비참한건데.

 

The Russians advance into the Polish-Lithuanian Commonwealth led to the kingdom of Sweden invading Poland in 1655 under King Charles X.

Afanasy Ordin-Nashchokin then opened negotiations with the Poles and signed an armistice, Truce of Vilna, on 2 November. After that, Russian forces marched on Swedish Livonia and besieged Riga in the Russo-Swedish War (1656–1658), a theater of the Second Northern War.  

 

1655년, 1년 만에 러시아가 싹쓸이를 하면서 지금 벨라루스 다 먹고 우크라이나 다 먹고 루블린 까지 간거야. 이거에 식겁해서 스위든이 폴란드를 쳐들어오는겨. 이게 세컨드 노던 워. 라는, 일본애들 번역한 2차 북방전쟁 이야. 

 

러시아 의 적이 스위든이야. 이들은 폴란드 지우면서 저 리보니아 잉그리아 를 갖고 오려 한겨 원래. 스위든 이 들어오면서 전선을 틀어 위 리보니아로. 그러면서 폴란드 와 협상조약 하는겨 우리 더이상 니덜 안 쳐들어가니 안심햐. 아프나시 오드딘-나쇼킨. 이 사람이 러시아 의 핵심 자문이고 두뇌고 외교관이야. 러시아의 수출입세금 폐지 하고, 우편제도 처음 만들고, 리가 만 가는 다우가나 강, 볼가 강에 첫 상선 만든 사람이야. 이 사람이 만든 바닥으로 다음에 표트르 대제 가 러시아 를 근대화 한겨. 전선이 리보니아 로 가면서 러시아-스위든 전쟁 1656-58 이 발발하는거고. 북방전쟁의 부분이고.

 

Khmelnytsky was not against this temporary truce and supported the Tsar though he warned him of Polish furtiveness.[4] Ivan Vyhovsky, the newly elected hetman in 1657 upon the death of Khmelnytsky, allied himself with the Poles in Sept. 1658, creating the Grand Duchy of Ruthenia. However, the Cossacks were also beset with the start of a civil war with this Commonwealth treaty and a new Treaty of Pereyaslav with Russia in 1659.  

 

코사크 흐멜니츠키 가 당연히 싫어하는거야. 이 사람은 폴란드 지우는게 목표였거든. 러시아 가 북쪽으로 틀면서 힘이 빠지는겨. 폴란드와 러시아의 조약에 반대를 해. 폴란드가 분명히 다시 회복해서 재침략할거라며. 그런데 흐멜니츠키 가 바로 죽는겨 1657년에. 아들은 어리고, 새로 선출된 사령관이 이반 비호브스키. 이사람이 친 폴란드 파.야. 코사크 에서 내분이 일어나는겨.

 

The Ruin (Ukrainian: Руїна, romanizedRuyína) is a historical term introduced by the Cossack chronicle writer Samiylo Velychko (1670–1728) for the political situation in Ukrainian history during the second half of the 17th century.  

 

이걸. 루이나. 라고 해. 몰락. 파괴.야. 코사크 가 반짝 섰다가 바로 내분으로 찢어져서 결국 지워지는겨 러시아 행정체제로 완벽히 개편된거고. 코사크 가 친폴란드와 친러시아 로 분열되고 싸우면서, 폴란드 쪽에서 바라볼때 드녜프르강 을 경계로 레프트뱅크 라이트뱅크 로 나뉘어. 레프트 가 강 동쪽이고 라이트가 강 서쪽이야. 라이트 인 서쪽지역이 폴란드 고 레프트 뱅크인 동쪽이 러시아 로 가는거고, 폴란드 지역인 라이트뱅크 왼쪽 포돌리아 에 몰도바 까지가 오스만 에 들어가는겨 크림타타르 와 함께. 이게 뒤에 오스만도 물러가고 폴란드 도 지워지면서 러시아 로 완전히 편입이 되는거야. 

 

The Tsar concluded with Sweden the advantageous Treaty of Valiersar, which allowed him to resume hostilities against the Poles in October 1658, capturing Wincenty Gosiewski at the Battle of Werki. In the north, Sapieha's attempt to blockade Vilnius was checked by Prince Yury Dolgorukov [ru] on October 11. In the south, the Ukrainian Vyhovsky failed to wrest Kiev from Sheremetev's control where Russians kept their garrison. In July 1659, however, Vyhovsky and his Crimean Tatar allies inflicted a heavy defeat upon Trubetskoy's army, then besieging Konotop.  

 

러시아 가 리보니아 에서 스위든과 전쟁하다가 승부안나고 바로 조약을 맺어. 1658년. 그리고 다시 폴란드 로 가는겨. 코사크 와 폴란드 가 손잡은거걸랑. 코사크 의 비호브스키 가 오히려 러시아 상대로 전쟁하는거고, 키예프 못 가져오고, 크림 타타르 랑 손잡고 러시아 남부군 투르베츠코이 부대를 격파하고. 

 

The threat to the Russians during their conquests in Ukraine was relieved after Vyhovsky lost his alliance with Crimean Khanate due to Kosh Otaman Ivan Sirko campaign who later attacked Chyhyryn as well.  

 

이때, 코사크 의 키쉬 오타만, 이반 시르코. 가 반란을해. 코사크 의 지도부가 키쉬. 이고, 키쉬 들은 오타만들 로 되어있고 여기 최고가 헤트만 인겨. 헤트만 인 비호브스키 가 크림타타르 세력을 잃어. 이 크림 타타르 는 코사크 들이 시작할때부터 둘이는 웬수사이여 이건. 코사크 의 웬수 는 폴란드 보다 이 아래 크림타타르여. 크림타타르는 오스만에 하미지 한거고. 못믿을 애들이여 얘들은. 

 

There the rest of cossacks deserted Vyhovsky and rallied under Yuri Khmelnytsky, while Vyhovsky was left with the Polish troops and other mercenaries. A council was gathered with participation of both sides where the union with Poland-Lithuania was proclaimed unpopular and due to the rising arguments and threats Vyhovsky has left the meeting. The council elected Khmelnytsky the new hetman and an official request to surrender the power was sent to Vyhovsky who had no other choice as to comply.  

 

반란한 코사크 이반시르코.가 죽은 흐멜니츠키 의 아들 유리.를 헤트만으로 추대하는거고. 얜 아빠 죽을때 16세였고. 그러면서 친폴란드였던 비호브스키 에게 항복 권유하는거고, 비호브스키 는 항복해서, 웃긴게, 폴란드 애들한테 넘겨져서 처형당하는거야. 이 코사크 들의 저때 역사 보면, 아 이건 말야, 아 비참해, 역사 없는 나라의 역사란건 한편 슬픈거지 저렇게 철저하게 싸우다가 지는데, 이 조선 민국은 저런 것도 없어 이게. 그야말로 가장 부끄럽고 추악한게 조선 오백년 역사고, ㅋㅋㅋㅋ 자랑스런 저항의 역사 ㅋㅋㅋㅋ. 참 한심하지. 야 저런 말을 울먹울먹이면서 테레비에서 하는겨 역사팔이 애가. 저딴걸 감동 처먹으며 들어. 저거, 있잖니, 세계사를 보면 알게 돼. 얼마나 쌩 거짓말인걸. 이 조선 만큼 추악한 역사도 없고, 이 조선 만큼 역사팔이 하는 이들의 거짓말 주작질 에 그야말로 세계사에 대한 무식 무지 로 인한 지들만의 조선 자랑사 는 없어 이게 ㅋㅋㅋ

 

The tide turned in favor of the Polish-Lithuanian Commonwealth in 1660. King John II Casimir, having concluded the Second Northern War against Sweden with the Treaty of Oliva, was now able to concentrate all his forces on the Eastern front.[1]:186 Sapieha and Stefan Czarniecki defeated Khovansky at the Battle of Polonka on 27 June.[1]:186 Then, Potocki and Lubomirski attacked V.B. Sheremetev in the Battle of Cudnów and forced him to capitulate on 2 November, after persuading Yurii Khmelnytsky to withdraw on 17 October.[1]:186 These reverses forced the Tsar to accept the Treaty of Kardis, by way of averting a new war against Sweden.  

 

스위든 이, 폴란드를 누비다가, 아래 트랜실베니아 도 움직이고, 브란덴부르크 는 30년전쟁 직후부터 프러시아(프로이센) 더치 와 유니온이어서개입하게되고 오스트리아 가 움직이는겨. 또한 덴마크 가 움직이는겨. 덴마크가 이전 스위든에 할란드 곳란드 빼앗기고 브레멘 지역에, 저런 스위든이 폴란드도 갖고가. 갑자기 스위든 의 폴란드 침공이 판이 커진겨 이게. 이분위기에서 덴마크가 브레멘을 쳐들어가고, 스위든이 부랴부랴 덴마크 로 가는겨 그러면서 얼음바다 건너서 코펜하겐 가는거고. 그리고 조약 맺고 정리되서 2차북의 전쟁 끝나고, 올리바 올이와 조약 이야. 그다니스크 의 지역이고. 이게 1660년. 

 

폴란드 가 스위든 나가서 정신차리고, 다시 러시아를 정리 하는겨 이제부터. 저 오른쪽 땅 다 뺏긴거걸랑. 얀2세 카시미르 가 동쪽으로 가는겨. 이때 폴란드 인물이, 스테판 차르니에츠키.야 지금 폴란드 역사에서 위인이고, 델류지 를 막으면서 마무리한 사람이야. 폴론카 전투. 벨라루스 의 민스크 서남쪽이고. 쿠드노프 전투. 아래 내려가서 키예프 서쪽이야. 그리고, 새로 옹립된, 흐멜니츠키 의 아들 유리 를 설득해서 드네프르강 건너로 넘어가라 하는겨. 

 

러시아 가 스위든 이랑 전쟁 시 리보니아로 가서 뺏은 땅을 다 돌려주고, 다시 내려 오는겨 폴란드가 벨라루스 에 우크라이나 로 다시 진입하는걸 막으려고. 얘들이 결국 다 뺏긴거고, 죽은 흐멜니츠키 예언이 맞은거지. 

 

Peace negotiations dragged on from 1664 until January 1667, when civil war forced the Poles and Lithuanians to conclude the Treaty of Andrusovo, whereby the Polish-Lithuanian Commonwealth ceded to Russia the fortress of Smolensk and Ukraine on the left bank of the Dnieper River (including Kiev), while the Commonwealth retained the right-bank Ukraine  

 

러시아-폴란드 전쟁이 1654-67 인데, 스위든이 코펜하겐 점령해서 1660년 에 2차 북방전쟁 끝나고, 폴란드가 동쪽에 다시 집중하면서 이때부터 4년간 많이 갖고 온거야. 그리고 이후 3년은 협상하고, 드네프르강 을 기준으로 키예프 포함 강 왼쪽인 라이트뱅크 는 폴란드 카먼웰쓰 가, 강 오른쪽인 레프트뱅크 는 러시아 가 갖고 가고, 스몰렌스크 도 러시아 가 갖고가. 갖고온거 거의 전부 빼앗겼지만 그래도 많이 갖고 온겨 러시아가 협상으로. 결국 이 러시아가 다시 재정비해서 걸출한 인간 표트르대제에 예카테리나 로 저 폴란드 지우면서 갖고 오는거고 리보니아까지. 폴란드는 이 흐름을, 이 역사의 흐름을 못 막는거고. 저게 마지막 발악이었던거야. 정신 안차리거든 얘들은. 못차려 한번 빠진 무식질은. 자기들이 정의 인줄 알거든. 조선민국 애들처럼. 이 조선민국은 지워져. 지금 애들 때문에. 나중 후대에 사가들이 정리를 하겟지만, 그런데 그런 정리도 없을거야. 왜냐면, 걍 역사 자체가 사라지고 나라 자체가 사라질거거든. 후대 역사가가 재정리한다는건 그 나라가 다시 선다는 건데, 설 수 없어 이 조선민국은. 영원히 지워지는거야. 이런 곳에서 머 지금 애들 하는 짓에 대고 분개 하고 할 필요가 없어. 저건 어쩔 수 없어. 완전히 위부터 아래 까지 썪어서. 너무나 너무나 미개한거야. 야당 애들도 미개한거고, 저걸 막아줄 리더 가 있어야 하는데, 없는거야 이게. 그만큼, 이승만 박정희 때부터, 먹고 살기 급급해서 말이지, 학자 를 전혀, 한명도 못키운거야 이 나라가. 인문학자 를 단 한명 못키운거야 해방 이후에. 자연과학 자들만 너무나 바쁜거였고. 이 인문계가 너무나 썪은겨 이게. 머 어떤 애가 자기가 최고 인기강사 어쩌고 하면서 이과가 나라 망친다 해대던데 ㅋㅋㅋ. 참 머때리 여긴. 욕이 안나올래야 안나올 수가 ㅋㅋㅋ.  불쌍한 나라야. 

 

 

Yuri Khmelnytsky (Ukrainian: Юрій Хмельницький, PolishJerzy ChmielnickiRussian: Юрий Хмельницкий) (1641–1685), younger son of the famous Ukrainian Hetman Bohdan Khmelnytsky and brother of Tymofiy Khmelnytsky, was a Zaporozhian Cossack political and military leader. Although he spent half of his adult life as a monk, he also was Hetman of Ukraine on several occasions — in 1659-1660 and 1678–1681 and starost of Hadiach. For background see The Ruin (Ukrainian history).   

 

마지막으로 눈에 띄는 사람이, 흐멜니츠키 아들 유리 흐멜니츠키. 이반 시르코 가 반란해서 이전 헤트만 비호브스키 를 내리고, 이사람은 친폴란드 였지만 폴란드에서 처형시키고, 유리 가 새 해트만 이 돼. 1659년. 18세 야 햇수론. 바로 1660년 에 폴란드 가 다시 쳐들어오는겨 러시아 상대로 회복한거고. 이때 유리 입장이 힘든거야. 당연히 시작은 친러시아 잖니. 폴란드랑 싸우는겨. 패하고 잡혀서, 친폴란드 맹세해. 친러시아파 코사크 가 열받아, 다른 아타만 이 반란하고 코사크 들이 서로 싸우는겨. 유리 는 패하고 새 헤트만 서고. 수도원 몽크 로 볼모 생활하다가 풀려나서 코사크 새 헤트만 아래서 전쟁참가 하는겨 

 

After his release, in 1672 he participated in a campaign against the Tatars and was captured near Uman and brought to Constantinople, where he was allowed to live in a Greek Orthodox monastery. In 1676 — after the Sultan's ally, Petro Doroshenko, surrendered to the Russians — the Porte decided to use Khmelnytsky's famous name to reinforce their claim to the Right-bank Ukraine starting the Russo-Turkish War (1676–1681).  

 

1672년 에 타타르 와의 전투에 참전해서. 포로가 되서 오스만애들의 콘스탄틴에 갔다가 거기 정교회 수도원에서 살아. 코사크 헤트만 이었으니 대우 해주는거고. 그러다가 러시아-투르크 전쟁 이 발발해

 

In 1678 the Turkish army captured Chyhyryn and declared Yuri Khmelnytsky as a new hetman of Ukraine, although in reality he was only a puppet for the Ottoman Sultan. Ottoman Turkish army with Yuri in tow captured and burned down Kaniv and other Ukrainian towns. He then retired to his Sultan dictated capital at Nemyriv in Turkish occupied parts of Ukraine, as a vassal of sultan Mehmed IV until 1681, when the Turks removed him from power due to his unstable mental health and unprecedented cruelty. Two years later, he was briefly re-instated by the Poles. Finally in 1685 the Turks captured Yuri and executed him (strangled[1]) in Kamianets-Podilskyi.

Unlike his father, Yuri was unable to master the very complex situation he faced and was often manipulated by foreign powers.  

 

오스만애들이, 유리 의 이력을 아니까, 저 유리 가 원래 헤트만 이었고, 오스만이 크림반도에서 바로 위 포돌리아 를 먹은겨. 이 오른쪽이 라이트뱅크 라는 드네프르 강 서쪽이야. 유리 가 코사크 두목이고, 유리는 우리한테 있으니까 저건 자기들 꺼란거고. 그러면서 여기 코사크 들이 오스만으로 들어오면서, 바로 강 오른쪽 레프트뱅크 인 러시아 와 부딪히는거야. 이게 러시아 투르크 전쟁 1676-81 이야. 폴란드는 힘없이 눈만뜨고 보는거고 오스만이 여기 차지하면서 러시아랑 걍 비기는거고. 그리고 유리 를 여기 대리로 앉히고. 그러다 내리고, 그러다 다시 유리 가 폴란드 에 의해 다시 여기 짱으로 임명되고. 이런 유리를 오스만 애들이 잡아서 죽여. 

 

코사크 의 끝은 유리 로 끝난거지 저렇게. 

 

걍 가만히 있다가, 힘 있는 놈한테 붙어사는 것도 안되는겨  누가 힘있을것인지 알어. 

 

역사 없는, 탓 이지 머 누굴 탓해. 러시아 오스만 애들이 저까지 가기 위한 천년의 역사 가 있었는데, 끽해야 몇십년 배워서 먼놈의 독립 이고. 

 

답이 없지 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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