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보니, 유자광 죽은 얘길 안썼다

 

 

야사에 보면. 연려실기술 7권.중종. 유자광이 귀양가 죽었다는 소제목에

 

 

 

유자광이 어렸을 때에 재주가 넘쳤다. 그의 아버지 유규(柳規)가 깎아지른 바위가 있는 것을 보고 자광에게 글을 지으라고 하니 즉시 쓰기를,

뿌리는 구원(九原)에 서렸고 / 根盤九原
형세는 삼한(三韓)을 누르도다 / 勢壓三韓

하니, 유규가 크게 기특히 여겼다. 《어우야담(於于野談)》

 

유자광이 죽은 후에 부관참시를 면치 못할 줄 미리 알고 자기와 모습이 같은 자를 구해다가 종을 삼아 길렀는데, 그 사람이 죽자 대부(大夫)의 예로 장사지내고 관곽(棺槨)과 석물(石物)을 구비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자기가 죽게 되자 처자식들에게 이르기를, “내 묘는 평장(平葬)하고 봉분을 하지 말며, 만일 조정에서 사람을 보내서 내 무덤을 묻거든 죽은 종 아무개의 무덤을 가리켜 주라.” 하였다.그후 조정의 의논이 유자광은 죄가 마땅히 부관참시해야 한다 하여 의금부에서 벼슬아치를 보내 물으니, 집사람이 거짓으로 종의 무덤을 가리켜 주자 그 무덤을 파 시체를 베되 의심하지 않았으므로, 평토한 묘는 탈이 없었다. 《어우야담》
 

 

http://db.itkc.or.kr/index.jsp?bizName=MK

 

아버지 유규에 대해선, 실록에 그 졸기가 자세히 실리다. 유규는 무관이면서 바닥부터 올라간 사람. 매우 강직하고 철저했던 이로 보인다. 자식들을 대할때도 맨몸으로 안대하고 의관을 갖췄단다. 애비의 공덕이 아들에게 간듯 하다. 

 

 

저 야사 이야기. 머 다른 사람을 변장해서 무덤따로 만들어 나중 부관참시 할때 변장한 종의 무덤을 파서 시체를 벳다. 

 

다 뻥이다 뻥.

 

 

 

야사 쓰는 유학자들 조차도, 서얼 주제, 엄마노비 자식주제인 유자광이 그냥 무의식으로 싫었던거다

 

 

 

 

중종 8년 11월 21일 을유 2번째기사 1513년 명 정덕(正德) 8년 
심언의 관직 체차와 유자광의 녹훈 등에 대해 논의하다

 

 

시강관 한효원(韓效元)이 아뢰기를,

"유자광의 죄는 종사에 관계된 것인데, 이제 그 공을 다시 녹훈하라고 명하시고 또 예장(禮葬)하게 하시니 듣기에 놀랍습니다. 이는 군자 소인이 등용하고 물리치는 것과 사라지고 자라나는 것의 기틀이니, 매우 두려운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자광이 살아 있다면 정말로 사정(邪正)과 진퇴를 걱정하겠으나, 이제 그가 이미 죽었고, 그 공은 잊을 수 없다."

하였다.

 

유자광이 1512년. 즉 전해에 죽었다 유배지에서. 중종이 그 집안에 녹훈을 다시 회복해주고, 장례까지 제대로 치르게 했다니까, 시강관 주제가 또 시비를 거는거다. 엄마노비 주제인 서얼 유자광이, 자기들 대빵 김종직 모함씌바 쉑에 그딴 후한 대접을 어드래 해요?

 

 

중종이 저딴거 다~ 아는거다. 애덜 그 속내. 재위하고 8년 지나니 26살 되었나? 야 이씌바리야 유자광 죽었고, 유자광이 그래도 세조때 이시애 난 진압하는데 참여도 하고 예종때, 니덜은 조작이라지만, 역모도 막았고 우리 왕조입장에선, 무오사화 내 봐도 김종직 글 졸 수상하고, 내 즉위하는데 유자광이 힘보탠 그딴 공이 있어. 난 그걸 잊을 수 없다

 

 

중종이 이따위로 해서 물리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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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 출신 자식들이 살아가기 매우 힘든게 조선왕조시대다. 

 

 

노비로 태어났다는 딱지. 이건 절망이다 절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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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때 김도련.의 노비증여사건이 있었다. 졸 유명한 사건이다.

 

세종실록 32권, 세종 8년 4월 26일 기축 5번째기사 1426년 명 선덕(宣德) 1년 
김도련의 노비 증여 사건과 관련한 함길도 행대 감찰 이사증의 보고

 

http://sillok.history.go.kr/id/kda_10804026_005

 

 

함길도에 살고있는 일족 426명을, 그 일족 대빵이 자기 아버지때 노비였는데 도망가서 양인행세하며 일족을 이루었다. 라고 증인도 조작해 만들고 해서. 노비를 뇌물로 주고 기백명의 노비들을, 20여명의 당시 우의정에서 형조판서 등 최고위직 대신들, 지방 대빵들, 중간 간부들까지 다 뇌물로. 저때 제일 많이 노비를 받은 인간이 조말생이다. 당시 최고 엘리트. 36명. 얘가 결정권자였으니까. 

 

이것도 세종이 처음 보고받는게 3월인가 그땐 20여명 으로 보고했는데 다시 보니 36명.  가만히 사는 사람들을 완전히 조작해서 자기들 노비로 만든 사건, 저리 김도련이 기백명의 노예를 줘도 자기한테 남는 장사라 총 426명이니까. 

 

 

노비 만한 재산이 없는거지. 자자손손 노비라. 평생 재산 역시 대를 이어서. 완전히 금덩이다 금덩이 지금의. 

 

 

 

저 노비 출신인 유자광이, 저리 정계 진출 한 것 부터가 싀안한 거고, 저리 오래 붙어먹은것도 싀안한 거고. 

 

 

사방이 웬수인데도 저리 끈덕지게 버틴것. 역모 고변을 오히려 당해도 그거 이겨내고 되려 상대가 죽고. 유배가도 아부 상소문 그거 졸 길고 화려하고. 

 

 

음텽나다 음텽나.

 

 

 

그렇다고 또 쌩판 없는 얘기 만들은 것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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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자광은 조선유학사관이 실록에서도 끊임없이 사관까지도 간신배라 하고 야사에서도 간신으로 다뤘지만

 

 

난 아니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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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얼 중 최악 얼자 출신으로. 나름 최선을 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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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전 종합 DB

http://db.itkc.or.kr/index.jsp?bizName=MK

 

 

조선왕조 실록

http://sillok.history.go.kr/main/main.do

 

 

인물정보시스템

http://people.aks.ac.kr/index.aks

 

 

조선왕조실록 사전

http://encysillok.aks.ac.kr/

 

 

 

 

남의 해석질 역사책들 되도록 보지 마시라. 저 원전을 봐야한다. 

 

다~~~~ 사기다 사기. 우리나라 책들은.

 

 

 

조선왕조실록은  개인의 집단무의식을, 이씨왕조를 통해 볼 수 있다. 왕은 그 이전왕들을 이해해야 제대로 볼 수있다

 

 

사관이 팩트를 쓰는 자세. 자기 의견은 주관으로도 쓰고. 그 객관과 주관을 다 볼수 있다. 보는 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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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몸이 주거주거 일백 번 고쳐 주거
백골이 진토되여 넉시라도 잇고 업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싈 줄이 이시랴
-정몽주

 

이런들 엇더하며 뎌런들 엇더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긔 엇더하리
우리도 이갓치 얽어져 백 년까지 누리리라
-이방원

 

선인교 나린 믈이 자하동에 흘너 드러
반천 년 왕업이 물소리뿐이로다
아희야 고국흥망을 무러 무엇하리오
-정도전

 

수양산 바라보며 이제를 한하노라
주려 주글진들 채미도 하난것가
비록애 푸새엣 거신들 긔 뉘 따헤 낫다니
-성삼문

 

어져 내 일이야 그릴 줄을 모로다냐
이시라 하더면 가랴마난 제 구타여
보내고 그리난 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
-황진이

 

꿈에 뵈는 님이 신의 업다 하것마난
탐탐이 그리올 졔 꿈 아니면 어이 보리
져 님아 꿈이라 말고 자로자로 뵈시쇼

-명옥(기생)

 

 

한쪽은 충하자. 한쪽은 충이머꼬 하며 또 자기 충 만들고

여자는 오직 님뿐.

 

 

조선시대 고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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