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자광 1439 - 1512

 

 

유자광 자꾸 쓰니깐 유자광이 좋아질라 카네. 천하의 간신배라 하는 유자광. 을 내 왜 쓰기 시작했나 몰겄지만. 끝나다 보면 알겄지.

 

 

 

무오사화로 김종직과 그 세력을 조진다.

 

 

호남이 영남의 ㅋㅋㅋ 그 어마어마한 사림세력의, 영남 유학의 뿌리를 이때 조지는, 엄마 노비 출신의 졸 허섭해 보이는 , 세력 없는 ㅋㅋㅋ 인간 독고다이 유자광.

 

 

아마 이 사람이 유일하지 않을까? 신라세력을 어찌보면 백제가 조진거걸랑? ㅋㅋㅋ 넘 과장인가? ㅋㅋㅋ

 

 

 

저 7월 11에 시작해서 8월에도 계속 김종직 문파에 대해 역적으로 몰며 상소하고 곤장질에 유배보낸다. 이왕 하는거 대충하면 안되거든 후환이 두려우니. 시작한 쪽은.

 

 

저때 7월 25일, 유자광은 도총부 도총관 을 받았다. 도총부는 중앙군 조직. 의 대빵. 

유자광 원래 관직이 사옹원 제조. 司饔의 옹은 밥. 익힌 음식이고, 저런 사. 란 글자는 갑골 상형보면, 권력지팡이 잡은 사람이 소리 지르는 것이다. 국가 기관에서 그래서 자주쓰는 단어. 왕실의 음식을 관장하는 곳의 제조. 2번째 사람. 대빵 도제조는 왕실 종친이 형식으로 앉는다. 

 

연산군이 이런 야생의 유자광을 졸 좋아하는거라. 연산군이 가만 보믄 세조랑 냄새가 비슷한거라. 그 밀림의 정서.

 

 

 

저 무오사화 있고, 하니 나라 분위기가 싱숭생숭한거라. 김종직 산하 유생들, 억울하다며, 이런저런 소리 나는건 당연하고.

 

거기에 유자광. 이전 남이 역모사건의 주범아닌가? 모든 유생에겐 유자광이 원수 중에 원수. 그 원수가 중앙군사조직의 짱을 겸하니 울분이 치솟는다

 

 

 

연산 4년 11월 30일 임술 2번째기사 1498년 명 홍치(弘治) 11년 
유생들이 은밀히 시국을 논한 일에 대한 박원성의 공초 내용

 

 

 

당해 무오사화 있고 4개월 후 11월 말일. 유생들이 몇몇 모여 나라와 군주를 욕했다는 말을 누가 꼰지른거지. 저런거 꼰지르면 돈과 여자와 관직이 생기걸랑. 

 

 

 

6일후 윤달 11월 기사가 연산의 성격을 알 수 있다.

 

연산 4년 윤11월 6일 정묘 1번째기사 1498년 명 홍치(弘治) 11년

시국을 논한 유분·남계희·유승연에게 불로 지지는 형을 집행하다


전교를 내리기를,

"이 무리들의 정실이 가증스러우니, 불로 지지는 형을 쓰는 것이 어떠하냐?"

하매, 윤필상 등이 아뢰기를,

"화독(火毒)이 안으로 들어가서 생명을 앗아가는 날이면 국문할 근거가 없어질까 두렵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조금만 지져도 되지 않겠느냐?"

하므로, 드디어 유분·남계희·유승연을 지져대었다.
 

 

 

그 유생들의 주도자 세명에게 불로 지져서 고문하면 어떨까? 하고 연산이 묻는다. 신하가 답한다. 그러다 죽으면 어째요? 하니 연산이 조금만 지지면 괜찮지 않을까? 해서 불로 지졌다

 

 

 

 

 

저게 유교다 유학이고. 조선시대의.

 

 

 

 

 

.

그리고 그 같은 윤달11월에 함경도에 또 벽서사건. 역모가 있어서 잡아 문초한 일이 있다. 그리고 함경도 상황을 더 알려고 연산이 유자광을 보낸다

 

연산 4년 윤11월 28일 기축 1번째기사 1498년 명 홍치(弘治) 11년 
벽서 사건의 일로 함경도에 파견하는 유자광을 파명사로 삼다
 

 

파명사, 명을 전달하는 사람. 

 

 

 

헌데, 이때 유자광이, 함경도에를 가서, 또 임금님을 위한 아부질을 열라 했나보다 ㅋㅋㅋ 유자광 졸 웃기당

 

 

 

연산 5년 1월 11일 신미 2번째기사 1499년 명 홍치(弘治) 12년 
지평 권세형 등이 유자광이 사사로이 진상한 잘못을 국문할 것을 청하다


지평 권세형·정언 윤은보가 아뢰기를,

"유자광이 사사로 생전복과 굴조개를 헌납한 것은 군상의 환심을 얻어 은총을 입고자 한 때문이니, 그 죄가 심중합니다. 국문하지 않으면 아니됩니다. 유자광은 들어 말할 것도 못 되거니와 성희안(成希顔)은 사리를 조금 알면서도 자광의 아부하는 마음에 순종하고 이를 금하지 아니하였으니, 국문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유자광이 어찌 다른 정이야 있겠으며, 성희안이 어찌 상관이 하는 일을 금하겠는가. 이도 또한 국문하는 것이 옳지 않다."
 

 

 

 

ㅋㅋㅋ 유자광이 함경도에 가서 민들을 부려서 생전복과 굴조개를 캐게 했나보다. 그리고 그걸 연산에 바친거라. ㅋㅋㅋ 겨울이다 한겨울. 

사간원 사헌부에서, 유자광 저거 천하의 간신배가, 일부러 임금님께 아부질할려고 하는 짓입니다. 저거 나쁜미친놈 지 아부질에 민들을 고생시키는거니 속지마시고 심문해야 합니다 ㅋㅋㅋ

 

지평. 은 사헌부의 관직명, 정언. 은 사간원의 관직명. 지금으로 치면 4-5급 고시붙은 이들.

 

사헌부는 감찰기관, 지금의 청와대 민정수석 정도? 더하기 감사원?. 사간원은 그냥 임금께 간언 조언하는 곳. 간 한다는 말은 어려운 말 하다.

 

홍문관 포함 저 삼사. 는 갓 과거급제해서 들어온 젊은애들이고, 육조의 대신들은 닳고 닳은 늙은이들이다. 저 삼사는 특히 사림. 영남에, 사림이라 하면 세조때 정유난 공신으로 훈구. 공신받은 이들이 아닌 유생들. 해서 성종때 이 훈구의 힘을 줄이기 위해 사림을 등용한다. 특히 삼사에. 

 

삼사에서 일하다가 돌고 돌아 나중 육조 대신들이 되는 것.

 

삼사의 젊은 유생들에겐, 자기들 대빵 김종직과 그 파를 몰살한 유자광은 천하의 웬수.

 

 

 

저때부터 두달을 거의 매~일 상소한다. 유자광 저거 간신배. 임금님한테 아부질하는 거라고.

 

 

 

연산 입장에선 유자광이 너무 기특한거라. 아부는 알고 받아도 기분 좋은게 아부다. ㅋㅋㅋ. 아 자길 위해 그 좋은 생전복과 굴조개를 주니 얼마나 좋냐? 특히 사옹원 제조라 유자광은. 음식관장하는 이인데 그게 머 대단한 나쁜짓이라고.

 

 

그래도 하도 지랄지랄대니까, 무오사화때 줬던 도총관 겸직자리를 내려놓게 한다. 졸 귀찮으니. 유자광 불쌍. 임금께 생전복이랑 굴조개 줬다고 ㅋㅋㅋ

 

연산 5년 2월 23일 계축 2번째기사 1499년 명 홍치(弘治) 12년 
유자광의 일을 다시 의논하여 도총관을 체임하게 하다

 

 

그래도 연산군은 유자광을 졸 아낀다. 실록보믄 가끔 쌀 몇십석을 주다 라는 기사가 보인다. 그러다가 다시

 

 

2년 후인 연산 7년 1501년 8월에 사옹원 제조 유자광에게 도총부 도총관 자리를 겸직하라 주는데, 이것도 바로 말이 많아서 다시 없는얘기로 된다.

 

 

모든 삼사와 대부분의 대신들에게 유자광은 웬수 ㅋㅋㅋ

 

 

 

 

 

 

 

 

그러다가 2년 후, 졸 재밌는 기사

 

 

 

 

연산 9년 5월 13일 무인 1번째기사 1503년 명 홍치(弘治) 16년 
유자광에 대한 인물평


사옹원 제조 유자광(柳子光)이, 밥바리 두 개에 하나는 높이, 하나는 평평하게 담고, 또 밥 담는 그릇에 쌀을 담아, 상전(尙傳)에게 부탁하여 아뢰게 하되,

"조종조(祖宗朝)에 당상관(堂上官)은 높이 담고 당하관은 평평히 담게 하였는데, 상정(詳定)된 뒤로 당상·당하를 가릴 것 없이 모두 쌀 한 되씩으로 하였기 때문에 대궐 안의 대소(大小) 인원으로 선반(宣飯) 을 받는 자들이 모두 〈밥을〉 높이 담지 않는다고 까다롭게 책망하므로, 이 때문에 반공(飯工)들이 감당하지 못하여 거개 도망해 흩어집니다. 대궐 안에 이런 원통한 일이 있으므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상전이 밥그릇을 가지고 들어가 아뢰었다. 전교하기를,

 

"원래 상정한 것이 있으니 다시 고칠 수 없다. 반공을 침해하는 자를 금단하는 규정[事目]을 의논하여 아뢰라."

하였다. 유자광이 전교를 받고 기쁜 안색을 하며, 사옹원 낭청(郞廳)들을 손짓하여 불러 말하기를,

 

"지금부터는 정승이라도 전교대로 하여야 한다."

 

하니, 좌우 사람들이 낯빛을 변하며 서로 눈짓만 하였다.

자광은 성질이 본래 시기하고 사나우며 좀 재예(才藝)가 있었으니, 조정에서 서자라고 배척하여 직책을 맡기지 않으므로 항상 분한 앙심을 품고 적발(摘發)하여 일 일으키기를 좋아하여 한 번 위의 뜻에 맞기를 노렸다. 그러나 그가 맡은 직무가 충훈부(忠勳府)의 당상이나 사옹원의 제조뿐이어서, 무슨 일을 가지고 그 술책을 부릴 수가 없으므로 사체(事體)에 손상되는 것도 불구하고 반공(飯工)의 원망을 빙자하여 그 분을 푼 것이니, 그의 사납고 강팍스러움이 이러하였다.
 

 

 

 

 

유자광이 원래 관직인 사옹원의 실질 대빵 제조라. 궁내 음식관장은 하는데, 아 열 받는거라 삼사 랑 대신들한테.

 

그래서, 말을 전하게 하는데 임금 연산한테.

 

아 대신들 대간들이, 상정, 상세하게 다시 법이 개정된 뒤엔 당상당하 직위 가릴 것없이 똑같은 양의 밥을 담기로 했는데, 어떤 이들은 자꾸 밥이 적다 왜 예전처럼 고봉밥 높게 많이 안주느냐 불평합니다요. 해서 밥푸는 이들 반공.들이 도망치는일도 있습니다요.

 

하니까, 연산이, 앞으론 정승들도 그딴 요구질 말고 똑같은 양 먹어라. 하는거라

 

ㅋㅋㅋ 사관이 쓰길, 유자광이 서얼출신이라 힘있는 자리는 못얻고 충훈부 같은 서훈 관리하는 허섭자리나 밥챙겨주는 사옹원자리 밖에 못하니, 저딴 짓이라도 해서 다른 대간 대신들에게 분풀이 하는것이다. 하고 나중에 실록편찬할때 쓰는거라 ㅋㅋㅋ

 

 

유자광 졸 불쌍하당.

 

 

 

 

 

 

 

 

유자광에게 정이 가는 기사. 아 이거 보면 좀 짠하다

 

 

그 다음해 1월1일. 와 씌바 정월 초하루에. 

 

드뎌, 연산군 눈에 벗어나는 일을 당한다. 졸 억울한 유자광

 

 

 

 

 

 

연산 10년 1월 1일 계해 2번째기사 1504년 명 홍치(弘治) 17년 
음식을 두 소반에 나누어 차릴 것을 청한 유자광을 국문케 하다


사옹원 제조(司饔院提調) 유자광(柳子光)이 아뢰기를,

"음식을 올리는 큰 소반이 매우 무거워 들기 어려우니, 두 소반에 나누어 차려 드리기 편하게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신하로서 인군 앞에서 공경하고 조심한다면 어찌 들기 어려우랴? 자광이 말할 것이 아니요, 승지 역시 아뢸 것이 아니다. 자광을 국문하도록 하라."

하였다.

 

 

 

 

유자광 엄마가 노비다. 아마 밥차려주는 일을 졸 햇을거라. 

 

연산이 맨날 밥상받는데, 졸 뻐쩍찌근 하게 차림을 받았나보다. 

 

그 무거운 상을, 사옹원에서, 여자들이 차리고, 여자들이 그 상을 들고 들어가는게, 유자광의 눈에 어느날 졸 안타까왔던거다. 옛날 노비 엄마도 생각이 나고.

 

 

해서 연산한테. 아 상 무거우니까 여인들이 힘들어 보여유. 두 상으로 나누어서 드리면 안될까유? 하니까

 

 

이게 미쳤냐? 감히 임금님을 어찌보고, 존승하는 마음이 없는게다. 너 의금부 가서 고문좀 받아라 ㅋㅋㅋㅋ

 

 

 

 

 

연산은 능상. 이란 말을 많이 쓴다. 아마 실록에서 가장 많이 나올게다 연산군일기에. 다른 왕들에 비해서. 

 

대부분의 죄가 능상. 위를 능멸했다는 죄목이다. 

 

 

 

 

 

저때부터 연산군에게 찍혔다. 유자광이.

 

 

 

 

 

이후로, 이극균이 연산에게 여색 그만하라고 탄언하다가 유배되는데, 이극균이랑 연관된다고 임사홍과 유자광이 같이 탄핵되고 2년 후 복직이 된다

 

 

연산 10년 윤4월 28일 무자 5번째기사 1504년 명 홍치(弘治) 17년 
이극균과 사귄 유자광·임사홍을 충군시키게 하다


연산 12년 1월 1일 신사 1번째기사 1506년 명 정덕(正德) 1년 
유자광·채수를 복직시키게 하다
 

 

 

 

 

 

허나, 이미 연산의 마음은 떠난거라. 그놈의 밥상. 이 머라고

 

 

갑자사화 이후에 유자광이 다시 등장한다

 

 

 

연산 12년 1월 24일 갑진 4번째기사 1506년 명 정덕(正德) 1년 
유자광 등이 사송한 생치를 가지고 간 별감을 대접하지 않으니, 국문하게 하다
백관(百官)에게 생치(生雉)를 차등 있게 하사하고, 전교하기를,

"유자광(柳子光)·구치홍(具致洪)·안윤량(安允良)·채수(蔡壽)·최응현(崔應賢)·김봉(金崶)은 사송(賜送)한 생치를 가지고 간 별감에게 대접을 하지 않았으니 국문하라."

하였다.

 

 

복직시키고, 연산이 선물을 줬는데, 그 선물 배달한 별감에 대접안했다고 또 갈군다.

 

 

연산 얘 하는거 보면 항상 이렇다?

 

 

 

복직시키고 갈구고 유배보내고 다시 오라하고 괜찮냐? 토닥이다가 또 패고 유배보내고 죽이고

 

 

 

얘 골때린다 이거 뒤에 가면.

 

 

 

 

 

야, 대체 연산을 역사에서 억울한 성군이라느니, 하튼 그따위 해석하는 수준이 이나라 역사 학자들 수준이다

 

 

 

.

 

 

 

 

연산군때 유자광은 저걸로 거의 볼짱 다 본거다. 그놈의 밥상. 이극균 관련 일은 걍 덤일뿐. 예전같으면 그런 엮임도 능히 연산이 넘어갔지만.

 

 

 

 

 

 

 

연산군의 갑자사화 당일을 보자

 

 

이날 기사는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긴장감이 넘친다

 

갑자사화 시작일의 마지막 기사다

 

 

 

 

연산 10년 3월 20일 신사 5번째기사 1504년 명 홍치(弘治) 17년 
안양군과 봉안군을 곤장 때리다


전교하기를,

"안양군(安陽君) 이항(李㤚)과 봉안군(鳳安君) 이봉(李㦀)을 목에 칼을 씌워 옥에 가두라."

 

하고, 또 전교하기를,

"숙직 승지 두 사람이 당직청에 가서 항과 봉을 장 80대씩 때려 외방에 부처(付處)하라. 또 의금부 낭청(郞廳) 1명은 옥졸 10인을 거느리고 금호문(金虎門) 밖에 대령하라."

 

하고, 또 전교하기를,

"항·봉을 창경궁(昌慶宮)으로 잡아오라."

 

하고, 항과 봉이 궁으로 들어온 지 얼마 뒤에 전교하기를,

"모두 다 내보내라."

 

하였다. 항과 봉이 나오니 밤이 벌써 3경이었다.

 

항과 봉은 정씨(鄭氏)의 소생이다. 왕이, 모비(母妃) 윤씨(尹氏)가 폐위되고 죽은 것이 엄씨(嚴氏)·정씨(鄭氏) 의 참소 때문이라 하여, 밤에 엄씨·정씨를 대궐 뜰에 결박하여 놓고, 손수 마구 치고 짓밟다가, 항과 봉을 불러 엄씨와 정씨를 가리키며 ‘이 죄인을 치라.’ 하니 항은 어두워서 누군지 모르고 치고, 봉은 마음속에 어머니임을 알고 차마 장을 대지 못하니, 왕이 불쾌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마구 치되 갖은 참혹한 짓을 하여 마침내 죽였다.

 

왕이 손에 장검을 들고 자순 왕대비(慈順王大妃) 침전 밖에 서서 큰 소리로 연달아 외치되 ‘빨리 뜰 아래로 나오라.’ 하기를 매우 급박하게 하니, 시녀들이 모두 흩어져 달아났고, 대비는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왕비 신씨(愼氏)가 뒤쫓아가 힘껏 구원하여 위태롭지 않게 되었다.

 

왕이 항과 봉의 머리털을 움켜잡고 인수 대비(仁粹大妃) 침전으로 가 방문을 열고 욕하기를 ‘이것은 대비의 사랑하는 손자가 드리는 술잔이니 한 번 맛보시오.’ 하며, 항을 독촉하여 잔을 드리게 하니, 대비가 부득이하여 허락하였다. 왕이 또 말하기를, ‘사랑하는 손자에게 하사하는 것이 없습니까?’ 하니, 대비가 놀라 창졸간에 베 2필을 가져다 주었다. 왕이 말하기를 ‘대비는 어찌하여 우리 어머니를 죽였습니까?’ 하며, 불손한 말이 많았다. 뒤에 내수사(內需司)를 시켜 엄씨·정씨의 시신을 가져다 찢어 젓담그어 산과 들에 흩어버렸다.

 

 

 

.

 

자기엄마 폐비 윤씨를 죽은 원인이 그 후궁들 중 엄씨 정씨 두 여자라, 3경이면 밤 12시전후. 뜰에다가 결박하고,

 

 

손수 마구 치고 짓밟다.

 

 

맨손으로 졸라 줘패는거다. 발로 밟고. 

 

이건 오랜 기간동안 쌓이고 쌓인 화풀이다. 연산은 즉위 초에 알았다. 알면서도 모른 척했고, 알면서도 그 분노는 생기지 않았다. 

 

연산은 원래의 천성이 졸 쎄다. 깡이 다르다 다른 이들과 달리. 그 지겨운 아니되옵니다 를 다 물리친 이가 연산이다. 그것도 20되기 전에. 그리고 그럼에도 아니되옵니다는 지겹게 계속되어오다. 무오사화때 한번의 맛뵈기가 있었지만 그뿐. 

 

그 신하들간의 감정싸움에 타고난 천성. 그 바닥엔 사악한 그림자가 있다.

 

 

 

이게 터지고 터진거다.

 

 

 

가장 살 맛나는 복수는, 맨 손 맨 발로 조지는 거다. 

 

기록을 보면 어떤 도구를 사용하지 않다.

 

 

 

나무로 때려서 오는 간접적인 촉감보다는

 

 

직접적 조짐이 더 확실한거라.

 

 

 

 

저 느낌을 맛보기 위한 맨몸의 짓밟기. 가 나오는 그 바닥의 감정은. 쌓이고 쌓인거다

 

 

 

연산은 폐비윤씨. 지 어미에 대한 이야기를 직전에 들은게 아니다.

 

 

오~래전에 알고 있었다. 

 

 

 

자기가 맨손 맨발로 줘 패다가, 저 어미의 아들 둘을 시켜서 패게한다. 얼마나 통쾌할까? 연산의 입장에선. 

 

글을 자세히 봐야한다. 갖은 참혹한 짓을 다하니. 에서 무슨 짓을 했을까???? 그래서 하튼 죽었다 두 여인은.

 

 

 

 

그리고, 자기 양엄마, 애비 성종의 계비 자순왕대비를 나오라 한다. 긴칼을 들고, 왕비 신씨가 말리다. 이 신씨는 신수근 동생이다. 이 왕비신씨 말은 먹히나 보다.

 

그러더니 인수대비. 할머니에게 간다. 한확의 딸. 할머니에게 술 받아 처먹으라 하고, 손자한테 술한잔 주라한다. 인수대비가 차마 손자에겐 술을 못따르다. 

 

그리고 죽은 두 여인을 찢어서 젓갈로 담아 뿌리게 하다.

 

 

 

 

 

 

 

 

저때부터 연산은 미친거다.

 

 

 

그 그림자가 터진거고

 

 

 

제어가 안되는거라.

 

 

 

 

 

 

 

 

 

저건 오랜 기간의 쌓이고 억누르고 참아온 감정이라. 

 

 

이때까진 연산이 그래도 인내심 졸 발휘한 거다 어찌보면.

 

 

 

 

 

 

 

냉중엔 하도 교미하다가, 재미가 없으니까,  지 종친 마누라들, 지 신하들 마누라들을 강제 하고

 

 

 

지 졸  충성딱까리 임숭재. 가 아플때도 가서. 임숭재 마누라가 옹주다. 애비 성종의 후궁 딸. 그 옹주를 또 오입질한다.

 

임숭재가 죽고. 귀신이 되어서 복수할까봐, 귀신이 되어서 지 마누라 먹은거랑 다른 자기 오입질 얘기를 퍼뜨릴까봐 , 임숭재 관을 열고 임숭재 아가리에다가 철덩어리를 쑤신다. 귀신이 되어서도 말 못하게 할라고

 

 

인류사에 졸라 드물거라

 

그런데,  저게 조선의 본색이다.

 

 

 

 

연산군이 성군이었는데, 억울하게 역사에 의해 매도가 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