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자광, 아래에서처럼

 

세조 13년 1467년 6월에, 뜬굼없이 세조에게 상소를 보낸다. 

 

신이 밥처먹다 수저를 내팽기치고 정벌하는 군대에 참여해서리 전하생각 나라생각에 병적에 이름올라간 것도 기억못할 정도로 이시애 쉑 머리를 참할 생각밖에 없슴메~

 

하면서 자기 이름 알리는 상소를 보낸다. 이걸 봐도 유자광이 어떤 이 인가를 따져볼 수 있겠다.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다. 

 

세상에서, 아부라는 것 만큼, 알고도 좋은게 없다 ㅋㅋㅋ 아부받는 사람은. 이거 명심해라. 

 

세조가 아주 좋아하는거다. 이 상소를 읽고, 유자광이 화악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이시애는 두달 후 8월 12일에 잡혀 처형된다. 이미 그 세력은 일주일 여전에 대패하였고 도망다니다가 잡힌다.

실록을 보면 사지를 찢어 죽였다 했다

 

 

이때 일등 공신이 바로 남이. 남이장군하는 남이다. 

 

남이, 1441 - 1468

 

족보는 넘어가자. 

 

유자광 1439 - 1512 보다 두 살 어리다. 

 

 

 

남이(南怡)가 날쌔기가 남보다 뛰어나, 이시애를 토벌하고 건주위(建州衛)를 칠 때에 언제나 선두에 서서 힘껏 싸웠기에 1등 공신이 되었고, 자헌(資憲)의 계자(階資)에 올라 병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성화 무자년(1468, 세조 14)에 세조가 승하하고 예종(睿宗)이 새로 즉위하였는데, 이때에 혜성(彗星)이 나타났다. 남이가 대궐 안에 숙직하면서 사람들과 더불어 혜성을 보고 말하기를,

“이것은 곧 묵은 것을 제거하고 새 것을 펼 징조이다.”

하였다. 유자광(柳子光)이 본시부터 남이의 재주와 명성과 벼슬이 저보다 위에 있는 것을 시기하였었는데, 이날에 역시 입직하였다가 벽 너머로 그가 말하는 것을 엿듣고는 거기에다 말을 보태고 날조하여, 남이가 반역을 음모한다고 몰래 아뢰었다. 이에 옥사(獄事)가 일어나 남이가 죽음을 당하였다. 당시 나이 26세였다.

 

대동야승(大東野乘)의 동각잡기(東閣雜記) 중

http://db.itkc.or.kr/index.jsp?bizName=MK&url=/itkcdb/text/nodeViewIframe.jsp?bizName=MK&seojiId=kc_mk_h006&gunchaId=av006&muncheId=03&finId=022&NodeId=&setid=1528679&Pos=25&TotalCount=47&searchUrl=ok

 

여기 위 사이트 하튼 가나다 순으로 보면 저 책이 있다. 클릭하면 제대로 안들어가지만.

 

 

 

자기보다 두살 어린 남이가, 이시애 난으로 일등 공신이 되고, 병조판서, 지금으로 치면 국방부장관이다. 26세에. 나폴레옹이 파리진압한게 26세, 다음해 이태리원정군 사령관이된게 27세다. 

 

 

유자광은 병조정랑 자리를 받는다. 지금으로 치면 고시붙어서 5급 사무관 정도 되겠나?  꼬운걸까? 정말 저건 없는 말 지어낸 것일까?

 

야사는 야사일 뿐, 저 얘기가 실록에 아주 자세히 나온다. 

 

유자광이 매우 상세하게 고한다. 그리고, 불려온 남이. 대체 뭔일인가 당황하는 냄새가 난다 실록을 보면, 그러다 유자광의 말을 알게되고, 먼소리냐 한다

 

예종실록 1권, 예종 즉위년 10월 24일 경술 4번째기사 1468년 명 성화(成化) 4년

유자광이 남이의 역모 사실을 고하니 남이를 붙잡아 실상을 묻다

 

오늘 저녁에 남이가 신의 집에 달려와서 말하기를, ‘혜성(彗星)이 이제까지 없어지지 아니하는데, 너도 보았느냐?’ 하기에 신이 보지 못하였다고 하니, 남이가 말하기를, ‘이제 천하(天河)151) 가운데에 있는데 광망(光芒)이 모두 희기 때문에 쉽게 볼 수 없다.’ 하기에 신이 《강목(綱目)》을 가져와서 혜성이 나타난 곳을 헤쳐 보이니, 그 주(註)에 이르기를, ‘광망이 희면 장군(將軍)이 반역(叛逆)하고 두 해에 큰 병란(兵亂)이 있다.’고 하였는데, 남이가 탄식하기를, ‘이것 역시 반드시 응(應)함이 있을 것이다.’ ....

 

혜성얘기나 강목 책 들고 대화는 한 거 같다. 헌데 보면 남이 졸 억울한 냄새 난다. 

 

하튼 저기서 유자광의 역모 내용 진술하는 것은 아주 자세하다. 완전 영화 시나리오다. 유자광 엄청난 인간이다

 

 

 

 

 

예종실록 1권, 예종 즉위년 10월 27일 계축 2번째기사 1468년 명 성화(成化) 4년 반역을 꾀한 강순·남이·조경치·변영수 등을 환열시키고 7일동안 효수하다
http://sillok.history.go.kr/id/kha_10010027_002
임금이 반역(反逆)한 이유를 묻게 하니, 남이가 사실대로 대답하지 아니하므로, 이에 곤장을 때렸더니 남이가 큰 소리로 말하기를,

"원컨대 우선 천천히 하소서. 신의 꾀한 일을 말하자면 깁니다. 원컨대 한 잔 술을 주시고 또 묶은 끈을 늦추어 주면 하나하나 진달하겠습니다."

하므로, 명하여 술을 내려 주고 묶은 끈을 늦추게 하니, 남이가 말하기를,

"신이 과연 반역을 꾀하고자 하였습니다. 유자광(柳子光)과 더불어 이야기한 말이 모두 옳습니다."
 

 

당일 남이 를 잡아 불러들인다. 그리고 문초하고, 그러다 3일 후 27일. 

 

곤장을 때리니, 아 졸 아픈거라, 술 한잔 주세요. 묶은 끈 좀 쪼이니까 느슨하게 해주시고요. 그럼 하나하나 자세히 말씀드리겠쓰요.

 

하니 술한잔 정말 주는거라. 그리고, 유자광 개노미 하는 말이 맞다. 낵아 반역을 꾀할라고 했다.

 

 

 

 

정말일까? 내용 보면, 그런건 있다. 예종이 1450년생. 세조 죽은해가 1468이다. 18세 9월달에 왕위에 오른다. 다음해 죽지만.

 

남이가 세조때 총애를 받고, 두렵다 한다 예종이 어리니까, 또 간신이 다른 왕자를 등에 업고 예종을 엎을까봐, 아 그러면 세조의 사랑 자기도 같이 죽는거 아닐까, 왜냐하면 세조가 어린 단종을 죽였잖은가? 

 

단종이 1441-1457. 1452년에 즉위한다. 11살. 다음해 계유정난으로 내려오지만. 

 

저런 무의식적인 두려움이 있었을까? 14년전의 단종 엎은 기억? 예종은 11살도 아니고 18살인데? 그래도 그때까진 단종 다음으로 어린 군주는 맞지만.

 

 

 

 

아, 아닌거 같다. 아무리 유자광 편을 들어줄라해도 낵아.

 

 

 

당일 강순. 이 같이 국문을 당한다. 강신 1390 ~ 1468, 이시애의 난을 남이와 같이 평정한 일등공신. 영의정이었다. 나이가 78세다.

 

 

 

 

 

 

저날의 실록기록 이어서

 

(강순 왈)

"신이 어려서부터 곤장을 맞지 아니하였는데, 어찌 참을 수 있겠습니까? 남이의 말과 같습니다."

하였다. 취초(取招)하도록 명하니, 강순이 붓을 당겨 즉시 이름을 쓰지 아니하고 남이를 돌아보며 꾸짖기를,

"내가 어찌 너와 더불어 모의하였느냐?"

하니, 남이가 말하기를,

"영공(令公)이 말하지 아니하였다고 하는가? 나와 같이 죽는 것이 옳다. 또 영공은 이미 정승이 되었고 나이도 늙었으니 죽어도 후회가 없을 것이나, 나 같은 것은 나이가 겨우 스물 여섯인데 진실로 애석하다."
 강순·남이·조경치·변영수·변자의·문효량·고복로·오치권·박자하를 저자에서 환열(轘裂) 하고 7일 동안 효수(梟首)하게 하였다

 

 

강순이 곤장을 맞아본 적이 없는, 80을 바라보는 몸이다. 졸라 아픈거라. 아 씌바 몰라요 난.

 

그러니 붓을 준다. 이름을 쓰라고. 그러니까 노인 강순. 이 남이를 보면서, 야이 띱때꺄 왜 날 갖고 그러냐? 내가 너랑 뭔 역적모의를 했다고? 니 내헌테 전생에 웬수진거 있냐?

 

 

허니, 남이가 말한다. 아 씌바 할배요, 당신은 정승도 하고, 살만큼 살았고, 뭔 후회가 있겄슈. 난 스물여섯밖에 안됐는데 졸 억울허요. 아마 생일이 안지났나보다.

 

 

그냥 이름들을 막막 불렀나보다 썼나보다. 당일 강순 남이 포함 9명을 환열. 수레에 양쪽 걸어서 사지를 찢어죽였다. 그리고 머리를 7일간 거리에 걸어놓았다. 저기가 군기시. 일거라 지금 태평로. 사람들 다 보게

 

 

유교의 신, 왕에게 도전하면 찢어죽임당해서 이리되니 설설 알아서 기라 하는 협박질이 조선왕조 유학이다. 저런 일 흔했다

 

 

 

 

더 웃긴건. 다음날 28일

 

예종실록 1권, 예종 즉위년 10월 28일 갑인 3번째기사 1468년 명 성화(成化) 4년 공신의 호칭을 3등으로 나누어 정하고 남이의 어미를 환열시키다
"남이의 어미는 국상 성복(成服) 전에 고기를 먹었고 그 아들이 대역(大逆)을 범하였으며, 또 천지간(天地間)에 용납할 수 없는 죄가 있으니, 청컨대 극형에 처하소서."

하니, 명하여 저자에서 환열(轘裂)하게 하고, 3일 동안 효수(梟首)하게 하였으니, 남이가 증(蒸) 한 때문이다.
 

 

저 심문할때 남이가 국상중인데 고기를 먹었다고, 왜 먹었냐니까 남이가, 우리 엄마가 먹으라 했다고, 그때 내 몸이 아파서. 

 

하니까 남이 엄마도 역적에미면서 자식에게 고기를 먹였다 하여 또 찢어죽였다. 머리를 3일을 길거리에 걸어놨다. 자식은 7일이었고.

밑에 사관이 증 한 때문. 의 해석을 어미와 상접 근친을 했다고 썼는데. 아  너무한거 아녀?

 

 

 

 

 

 

그리고 유자광은, 일등공신이 되어서, 저 남이의 집을 받는다.

 

 

 

 

 

 

 

유자광이 아주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지점이, 이 남이 역모 조작?사건이다. 

 

이걸로 그 이후, 유자광은 인간이 아닌거라 후세들에게.

 

 

 

 

 

 

 

이게 바로 연산군 무오사화의 발단인데.

 

 

김종직(金宗直)이 함양 군수(成陽郡守)였을 때 자광의 시(詩)가 현판(懸板)으로 걸린 것을 보고, 그것을 뜯어 내어 불살라 버리게 하면서 말하기를,

“자광이 어떤 자이기에 감히 이렇게 하였느냐?”

하였다. 자광이 듣고 이를 갈았다. 그러나 종직이 임금에게 한창 총애와 신임을 받으므로 도리어 아부하여 사귀었고, 

 

-동각잡기

 

연려실기술은 이를 인용했을 뿐이다. 다 저기 위에 걸린 사이트에 있다.

 

 

 

선비자연하는 이들에게, 유자광은 인간이 아닌거라, 남이는 억울하게 죽었다고 소문이 짜 하게 난거라.

 

 

김종직이 저런 짓. 한 것이.

 

 

 

유자광에겐

 

 

이를 갈을만 한거지. 유자광, 무서?운 사람이라. 이 자존심이란. 복수의 칼.

 

 

무오사화때, 흐지부지 끝날 것을, 단지 세조가 자기 아들 그 죽은 장자(덕종)의 첩을 건드렸다. 는 사건이 맞냐 틀리냐 로 가다가 걍 끝나게 되다가, 

 

뜬금없이 저 김종직의 조의제문. 을 지가 졸라게 해석을 또 해서, 이거 역적이다. 몰아버린거다.

 

유자광의 글질, 씨나리오질. 유자광은 작가다 작가. 그 화려함은 세조에게 이시애 잡으러 가겠다는 상소, 그리고 남이가 역모꾸몄다는걸 세세히 말하는 내용보면, 엄청난거다 정말 이사람.

 

 

김종직이 안그랬다해도 그랬다 했을 정도로 했을거라.

 

 

 

 

유자광이 영광 유씨. 버들 류. 인데. 전라도 사람이, 영남의 사림을 그냥 조진 사건이다 이건. 내 혼자 걍 생각나서 말하다.

 

 

호남에 이름난 유학자 없다. 끽해야 기대승이다. 다~ 영남이다.

 

 

이 영남세력을 홀로 조진 이가 어찌보면 유자광이다 ㅋㅋㅋ

.

 

 

 

 

저 지 현판글 쓴거 내렸다고, 

 

그 원한질에서 시작한거다.

 

 

 

 

 

김종직은 거, 걍 냅두지. 왜 그걸 내려 버렸다니 그래.

 

 

인간의 일은 모른다. 인간의 일은 졸 사소한 것에서 역사가 시작되는거라.

 

 

 

여기까지만 쓰자. 구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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