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때 연일 탄핵한다. 

 

 

 

그 이유는 무오사화.

 

 

특히 대간들, 그 삼사들의 인간들과, 역시 대신들도 연일 유자광 ㄱㄱㄲ 

 

우리 종조. 김종직과 그 억울한 대부들 유생들 가족들 죽인 ㄱㄱㄲ

 

 

 

 

 

 

무오사화. 에서. 명재집을 인용한 연려실기술의 그 김종직에 대한 비판이 가장 객관적이다.

 

 

김종직의 조의제문. 그리고 술주시 서문. 은 유자광의 해석이 틀리다. 라고 말할 수가 없다. 

 

유자광은 중종때 저 일로 하도 지랄대니까 답하길. 저 조의제문과 술주시 이야기는, 다른 이들에게 들었다 그들이 다른 대간들을 통해 상께 보고한다고도 알고 있다 하며 이름도 거명한다. 

 

대간들에게 알리다 는 건 꾸며낸지 아닌지 모르나. 저건 몰래 쫙 퍼진 얘길꺼라. 그걸 유독 유자광 만 단독적으로 알고 해석해서 보고했을리가 없다. 

 

 

무오사화가 1498. 유자광이 1439년생이면 나이가 60이다. 남이사건이 30년전 1468년. 

 

 

 

 

 

 

유자광이 없는 얘기 지어낸거 없다. 저건 FACT 다 팩트 팩트. 

 

 

유자광이. 이건 이런 뜻이요. 하니까. 연산도 그렇고, 거기 대신들도 다~~~ 그것에 동의를 하는거다.

 

 

 

 

 

지금시대에 봐도, 그 조의제문과 술주시서문. 내용은. 단군과 수양대군 에 비유해도 . 머라 할 수 가 없다.

 

 

 

유자광은 자기 주장 던진 것이고. 그다음은 그 흐름에 따라, 왕이랑 대신들이랑 대간들이랑 지들이 알아서 간거다.

 

.

 

 

 

꼬투리를 잡았다. 는 것에 대해 책임을 물을 수가 있으나. 그 책임의 무게는 모르겠다.

 

 

 

 

 

 

 

남이역모조작사건이란 것도 다시보자

 

 

 

 

유자광과 남이. 에서 링크를 건게 있다. 거기 보면. 

 

야사에선 유자광이 몰래 입직. 담뒤에서 남이가 하는 말을 듣고 말을 만들어내서 예종께 찔렀다. 라고 되어있지만. 웃기는 소리다

 

 

 

실록에 졸라게 자세하게 나와있다.

 

 

 

예종 즉위일에만 혜성이 나타난게 아니다. 예종 즉위 달에 혜성이 나타났다 가 한 일곱번인가 기사가 나온다. 야사는 여기서 즉위일 고거 하나 똑 떼서 풀다.

 

 

거기보면, 당일 남이가 유자광 집에 가서, 강목을 보고 혜성의 의미를 서로 논한얘기. 유자광이 한 말을 남이가 고대~로 하긴한다 처음에. 

 

헌데 남이는 그말만 했을 뿐 역모니 머니 안했다.

 

 

유자광의 말에서 남이와 다른 부분은, 경북궁으로 주상을 옮겨야 치기 편하다. 남이는 이딴말 안했다 하고, 유자광은 했다고 한다. 

 

 

유자광의 말과 남이는 이부분에서 갈린다.

 

 

 

 

 

 

헌데, 다른 입직하는 무관, 거기 이름이 나오는데, 남이가 그 무관이름도 대며 당일 자기 행적을 세세히 얘기하니, 그 당사자를 불러서 먼얘길 했느냐 하니, 남이가 칠팔일 간격의 궁궐 수비상황에 대해서 꼬치꼬치 묻긴 하였다. 하며 이상한 표정을 짓더라. 한다. 이부분은 유자광과 상관이 없다.

 

 

 

이건 심문하는 쪽에서, 마치 남이가 뭔 일을 도모하는 듯하다. 란 해석을 가능케 했고,

 

 

그다음, 당일밤 남이를 잡으로 백명의 위사를 데리고 가니 남이가 담을 넘어 도망을 가다 머리채 잡히고 왔다. 이것도 빌미가 된다. 

 

그리고 거의 매일 갑옷을 입고 칼을 정비하고 갑옷수리하고. 이것도 빌미가 되고.

 

 

 

 

 

 

유자광은 이야기를 상소를 한거고, 그 이후, 졸 자세한 심문이 시작되고, 여기서 남이의 말들이 자꾸 이상한 해석질을 만들어 내게 하는거라.

 

 

아 기억나는건, 누구와 대화 하다가, 예종이 어려서 간신이 난을 일으킬거다. 란 말을 진짜 한거다 남이가. 

 

헌데 남이는 이걸, 우려를 말한거지 자기가 난을 일으킬라는 건 절대 아니다 한거고.

 

 

 

 

괜히 남이 집에 놀러간 정승 , 팔순을 바라보는 강순. 이. 말년에 덤터기 쓴거고, 곤장 맞을때 상황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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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자광이 남이의 소위 역모사건에 살을 얼마나 부쳤을까?

 

 

 

아 이거 모르겠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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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자광도 똑같은 역모 상소를 당한다. 자기 수행비서한테서

 

 

성종 1년 4월 3일 신해 3번째기사 1470년 명 성화(成化) 6년 
유자광의 반인(伴人) 박성간이 유자광이 난언을 하였다고 고하다


유자광(柳子光)의 반인(伴人)266) 박성간(朴成幹)이 유자광이 난언(亂言)을 하였다고 고하였다. 원상(院相) 최항(崔恒)·김질(金礩)과 승지(承旨) 등에게 명하여 박성간에게 물으니, 박성간이 말하기를,

"유자광이 아우 유자석(柳子晳)과 더불어 말하기를, ‘간밤에 꿈이 흉하였어. 해가 처음 떠오르는데 쏘아 맞혀 곧 떨어졌거든.’ 하니, 유자석이 말하기를 ‘그것 참 좋은 꿈이오.’ 하였습니다. 유자광이 말하기를, ‘내 뜻과 꼭 합한다.’ 하고, 유자광이 인하여 말하기를, ‘전일에 남이(南怡)가 지극히 어리석어 남에게 누설하였지, 비록 부자(父子)간이라도 어찌 감히 말하겠어? 만일 그 꾀대로 하였더라면 나와 남이가 누가 득(得)이 되었을는지 몰라. 내가 군사 3,40인을 거느리고 밤을 틈타 우두머리[頭頭人]를 먼저 제거하면 누가 능히 항거하겠어?’ 하였습니다."
 

 

 

유자광이 바로 감옥에 잡혀드가는데, 거 있는 교도관 애가 붓과 먹이 있는 걸 보고 달라하고, 자기 옷을 찢어서 거기다가 막 쓴다.

 

 

유자광의 저 에너지 죽인다 정말

 

성종 1년 4월 4일 임자 1번째기사 1470년 명 성화(成化) 6년 
유자광이 상언하여 난언을 한적이 없음을 고하다

 

 

실록사이트 가면 날짜만 보면 바로 확인가능. 죽이지 않냐 유자광?

 

 

 

 

 

누군 당하고 누군 모면하고.

 

 

 

성종이 13살. 어리니까 성종 엄마. 나중 인수대비가 다시 조사해 봐라. 하고 결국 유자광은 살고, 상소한 부하는 오히려 머리짤린다. 

 

 

유자광이 예종때 남이역모를, 왕조 종친들 입장에선, 막아준거다. 왕족입장에선 유자광이 은인이다 은인. 예종 어릴때 즉위하자 마자 그 역모사건을 막아준 사람. 그러니 당연히 같은 왕조 핏줄이라 신중할 수 밖에 없다. 더하여 유자광의 말빨.

 

 

 

왕족입장에선 남이가 억울하니 마니 의미없는거라. 왕족에 충성하는 유자광이 필요한 것일뿐.

 

 

 

이 일 이후 오히려 성종3년 1472년.  숭정 대부(崇政大夫) 무령군(武靈君) 이란 관작을 제수받는다.

 

숭정대부면 종일품. 유자광의 아버지 유규.는 무과 급제후 하급관리에서 시작해서 최고가 호조참의 였다 정3품. 참의면 지금 국장급. 판서 참판 다음이 참의. 정품 종품 은 품계. 지금의 공무원 1급이니 몇급하는 급수. 그 품계, 급수가 되어야 그 관직, 직위를 얻을 수 있다. 

 

 

성종때 한명회 탄핵 상소 올리며 한명회랑 상소 대결 하는거 졸 잼.

 

 

성종실록 64권, 성종 7년 2월 19일 계사 2번째기사 1476년 명 성화(成化) 12년 
유자광이 한명회의 발언을 탄핵하고 벌주기를 청하는 상소를 올리다
http://sillok.history.go.kr/id/kia_10702019_002


성종실록 64권, 성종 7년 2월 23일 정유 2번째기사 1476년 명 성화(成化) 12년 
유자광이 한명회의 처벌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다
http://sillok.history.go.kr/id/kia_10702023_002


성종실록 64권, 성종 7년 2월 28일 임인 2번째기사 1476년 명 성화(成化) 12년 
좌의정 한명회가 유자광의 탄핵에 대해 변명하고 사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다
http://sillok.history.go.kr/id/kia_10702028_002

 

성종실록 65권, 성종 7년 3월 10일 계축 6번째기사 1476년 명 성화(成化) 12년 
좌의정 한명회가 사임 상소를 올렸으나 돌려주게 하다
http://sillok.history.go.kr/id/kia_10703010_006
 

 

저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붙는거다. 조선시대 밀림의 정수 두명이. 

 

유자광. 1439-1512  한명회, 1415-1487

1476년 이면 유자광 38세 한명회 61세. 성종나이 20세.

 

 

한명회가 성종의 장인이지만, 훈구라. 임금의 장인을 치는 과감함. 그래도 성종에게 밉보일게 없다 개인적으론. 오히려 임금께 더 아부하고, 훈구를 견제하기에 좋다 성종입장에선. 12살에 임금이되어 즉위년 포함 8년이 지나 나이 20이 된 성종. 자기도 이제 자기정치 하고 싶을거라.

 

이딴 판단이 유자광에겐 있었을거라.

 .

 

 

 

현석규 상소문제로 임사홍과 같이 유배가고. 주춤했지만. 그리고 한명회 탄핵상소했다고 또 매번 조정에선 유자광 관련 탄핵상소

 

 

그래도 가끔 아부질 상소 올리는 유자광

 

성종 10년 7월 13일 정묘 2번째기사 1479년 명 성화(成化) 15년

유자광이 노조경의 탐학·군역의 해이·조선 배의 문제 등에 관해 상소하다
http://sillok.history.go.kr/id/kia_11007013_002
 

성종 11년 10월 28일 갑술 2번째기사 1480년 명 성화(成化) 16년

동래부에 부처된 유자광이 병든 어미가 있는 고향으로 양이해 달라고 상소하다
http://sillok.history.go.kr/id/kia_11110028_002

 

 

성종 12년 1월 7일 임오 2번째기사 1481년 명 성화(成化) 17년

특명으로 남원에 양이된 유자광이 전문을 올리다
http://sillok.history.go.kr/id/kia_11201007_002
 

음청난 인간이다 저 남원에서 올린 아부질 보면. 

 

 

 

열받은 사관이 이리쓴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유자광은 약간의 재주가 있었으나 경박하고 조급하여 무릇 일을 만나면 바로 상소하였으니, 그 재주를 팔아 임금에게 총애를 구하려는 행위였던가? 그렇다면 비록 재주가 있다 한들 무슨 취할 점이 있겠는가?" 하였다

 

 

사관들에게도 유자광은 천하의 웬수이자 밉상 ㅋㅋㅋ

 

 

 

.

 

 

 

 

 

 

 

 

중종때 결국 무오사화 껀이 빌미가 되어서 유배를 간다. 그 내용도 보면 매우 허섭하다

 

 

중종실록 2권, 중종 2년 윤1월 25일 기사 3번째기사 1507년 명 정덕(正德) 2년 
공조 참의 유숭조가 삼공 시해 모의를 아뢰니 조광보 등을 잡아 국문하다
http://sillok.history.go.kr/id/kka_10201125_003

 

조광보가 저기서 3대장을 지목하고 유자광도 지목하면서 간신배 하니, 지목당하는 3대장은 바로 중종과 독대해서. 쟤 말 아니래요~ 한다. 헌데 유자광은 그따위 독대 안한다.

 

 

 

 

중종실록 2권, 중종 2년 윤1월 26일 경오 1번째기사 1507년 명 정덕(正德) 2년

죄인들을 공초하다


유자광(柳子光)이 아뢰기를,

"신이 지난 무오년096) 에 대사를 아뢸 때 혼자서 아뢴것이 아니라, 노사신(盧思愼)·윤필상(尹弼商)·한치형(韓致亨)과 함께 의논해서 아뢴 것이었습니다

중종실록 2권, 중종 2년 윤1월 27일 신미 3번째기사 1507년 명 정덕(正德) 2년 공초를 계속하여 죄인들을 벌하다

무령 부원군 유자광(柳子光)이 소매 속에서 검은 색 부채를 꺼내어 두어 번 휘졌다가 갑자기 성낸 안색을 하며 말하기를,

"괴이하다. 이 부채에 글씨 쓴 것이여!"

하며, 좌우 사람들에게 쓴 글을 보이는데, 그것은, ‘위망입지(危亡立至, 위기 망할 때가 왔다) 네 글자였다. 자광이 재삼 손가락을 튕기더니, 또 탄식하며 말하기를,

"내가 예궐(詣闕)할 때 이 부채를 협사(篋笥)105) 안에서 꺼내어 잠시도 손에서 놓지 않았는데, 누가 이것을 썼는가? 이보다 더 괴이한 일이 없다."

하니, 좌우 사람들 역시 매우 괴이하게 여겼다.

 

중종실록 3권, 중종 2년 7월 30일 신미 4번째기사 1507년 명 정덕(正德) 2년

유순정이 유자광에게 사실을 대답하도록 하는 방책을 아뢰다

유순정(柳順汀)이 의논드리기를,

"무오년의 일은 유자광(柳子光)이, 허침(許琛)이 처음 발설한 것으로 대답하였으니, 지금 비록 다시 묻는다 해도 반드시 다른 말이 없을 것이므로, 물어봐도 도움이 없을 것입니다. 다만 허반(許磐)은 성종조(成宗朝)에서 미처 등제(登第)하지 못하였으니 그 사초(史草)가 없을 것이 분명한데도 유자광의 대답에, ‘허반(許磐) 사초(史草)’라는 말이 있었으니 거짓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뜻으로 다시 힐문한다면 거짓으로 꾸며대지 못하고 반드시 대답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중종 2년 5월 1일 계묘 5번째기사 1507년 명 정덕(正德) 2년 
유자광을 평해로, 그 자손도 먼 지방으로 유배시킬 것을 명하다
 

 

 

 

 

저 3대장 중 유순정이 허반관련 사초얘긴 전혀 사실과 다르다. 그건 이전 실록에서 그대로 나와있다. 

 

 

 

 

엄마 노비인. 유자광.

 

 

 

 

고려말 조선초때. 일천즉천. 부모중 한사람이 천하면 자식도 천하다. 즉, 한쪽이 노비면 자식은 자자손손 노비였다.

 

 

 

그걸 태종때 노비종부법으로 바꾼다. 아버지가 노비면 자식이 노비다. 로. 

세종때 노비종모법으로 다시 바꾼다. 엄마가 노비면 자식이 노비다. 물론 원칙이고 예외는 있었겠지. 

 

대표적인게 유자광이다. 그 계유난 이후. 유자광은 엄마가 노비지만 세조의 총애로 벼슬을 얻은거라.

 

 

 

 

유자들이 보기엔, 저 엄마노비 출신 유자광. 핏줄이 자기랑 다른 거다. 

 

 

 

노비가 지들 위에 벼슬자리 있는거

 

 

아주 역겨운거라 지들입장에선. 거기다가 감히~~ 감히~~~ 자기들 문자종조 글빨종조님 영남유학의 대빵 사림의 대빵인 김종직선생님을 욕보여??

 

 

 

 

유자광은 죽을때까지 사방이 웬수라

 

 

 

 

성종때도 동래 유배가서도 상소올린다 대신들 사치부린다고 ㅋㅋㅋ. 그래서 관련자 대신들 사직하고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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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자광이 천하의 간신배냐????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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