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ondemnations at the medieval University of Paris were enacted to restrict certain teachings as being heretical. These included a number of medieval theological teachings, but most importantly the physical treatises of Aristotle. The investigations of these teachings were conducted by the Bishops of Paris. The Condemnations of 1277 are traditionally linked to an investigation requested by Pope John XXI, although whether he actually supported drawing up a list of condemnations is unclear.
콘뎀네이션즈. 중세 파리대학. 이 이단적인 것 에 대한 가르침 을 제한 하기 위해서 이행되다. 다수의 신학적 가르침들을 포함하는데, 가장 중요한것은, 아리스토텔레스 의 피지칼, 네이쳐 주제들 이었다. 이런 가르침들에 대한 조사들은 파리 주교들 에 의해 실행되다. 1277년 금지들은 전통적으로 교황 21세의 요청에 의한 거로 되어있는데, 그가 실제로 목록을 주고 요청했는지는 불분명 하다.
콘뎀네이션. 이라는게, 로마 때 담마니토 메모리아이. 기억 지우기야. 담노 damno 가 나는 거절하다 못믿겄다 이고, 명사가 담나티오.여. 메모리아 가 명사 이고 소유격이 메모리아이. 기억 의 지우기.야. 기억을 거절 부정 하는겨. 담노 가 더가서 해치고 고소하는거고.
갓댐 댐잇 하는게. 신이여 저걸 거절하소서 죄를 주소서 하는겨. 제기랄 이딴 뜻이 아니라. 신이 널 벌할껴 라는 욕질하는겨. 제기랄 은 먼뜻이냐? 걍 먼뜻인지 모르고 쓰는거지
콘 이 붙어서 더 강한겨. 파문 비난 할때 이걸로 써. 엑스커뮤니케이션 과 함게.
이건 1210년 1270년 1277년 딱 세번 나온거야. 그것도 파리 에서만. 즉 이건 로마카톨릭 전체 차원이 아냐. 오직 파리 부근 에서만 시행이 된거야. 파리 주교 의 주도아래. 저거 싫으면 걍 이사가면 되는겨.
이 유럽 애들이란게 당대 다른 애들과 비교하면 차원이 다른겨 이게. 인류역사는 자유 와 개방 이 만든거야. 아무것에 대한 자유 와 개방이 아냐. 문명 에 대한 자유 개방 이지, 민 들 인민 이 주인이여 저들에게 모두 문열어줘, 깡패 조폭이 주인이야 모두 자유야, 우리 집 왜 잠궈 같은 인민들이 주인이고 니집 내집 어딨어 자유여 자유. 니 마누라 니딸도 공유해 공유경제 공유정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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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 압바스 초기는 바그다드에 크리스찬이 같이 지내며 토론을 해. 저게 바로 닫힌겨 이슬람은 십자군 시작되면서.
유럽은 금서 란게 없어. 이전 봤듯이. Index librorum prohibitorum 인덱스 리브로룸 프로히비토룸. 서적 금지목록 이 서기 1559년 이 시작이야 이게. 이탈리안 전쟁 끝날때고. 마르틴 루터 티나오고 독일농민전쟁 터지고서 나온겨 이건. 아우뗀티카 하비타 1155년 이야. 프리드리히1세 의 학자들 표현의 자유. 내욕해도 돼 니덜 자유여. 최근엔 브이아이피 가 북조선이 쓰던 표현 썼는데 고발당했다미 ㅋㅋㅋ. 쟤들 1155년 수준 조차 안되는겨 이게. 지금 여기 조선민국 을 중세 12세기 와 비교하면 안돼. 이 조선민국 의 지능은, 신석기 시대 시작하는 호모사피엔스 30만년전 이전의 그 지능으로 보면 돼. 조선 오백년이 망친걸 겨우겨우 밤새서 양키 일본들꺼 따라잡다가 다시 저 미개한 집단 조선 족에게 완전히 발목잡힌거야 지금. 이 나란 반드시 망하게 되어있어. 여자들은 창녀가 될것이고 남자들은 비굴해질것이고 아이들은 거지가 될것이야. 쟤들이 베네수엘라 차베스 를 지지하던 애들이야. 저걸 다큐로 찍은 애가 지금 언론계의 우두머리야. 쟤들은 베네수엘라 로 만들기 위해서 작정을 한 애들이야. 의지 도 분명하고 지금 액션 플랜 도 완전히 저건 북조선 처럼 되자 베네수엘라 처럼 되자 는 강력한 미개의 의지야. 여긴 희망이 없어. 야당 애들도 저것들이 재벌과 권력에 기생충질 하면서 역시 배떼기 두드리면서 살아온 것들이거든. 저런걸 막을 힘도 대가리 지능도 없어. 걍 똑같은 애들이야 저게.
헌데 저런 분위기가 미국 분위기도 저렇고 유럽도 점점 저래가. 이 바바리안 미개 애들이 점점 수를 확장하면서 문명이 점점 후져지는겨 이 생각들이. 결국 세계 대전 은 터질 수 밖에 없어. 저게 일이백년 쌓이면 모두들 미개화 되는거야. 제대로 된 생각들은 소리를 못내는거고. 저것들이 한방에 사라질꺼야. 물론 그 이전에 여긴 북조선것이 되던 중국것이 되던 하겟지. 여긴 진짜 아무 희망이 없어 내가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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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때가 1210년 이야. 12세기에 유럽에 카타르파 발도파(부데스) 가 득실대는겨. 뒤에 프라티첼리 나오고 Henry of Lausanne 루잔의 앙리.가 1116년에 등장해. 동쪽교회의 이단 1천년 역사가 보고밀 로 끝나고 이흐름이 넘어오는겨 바로.
1209가 Massacre at Béziers 베지에 학살 이야. 카타르 2만명이 죽어. 성 도미니크 와 성 프란치스코 가 1170년생 1181년생이야. 프란치스코 가 11년 어리지만 먼저 세워 수도회를. 도미니크 가 카타르 보고 뒤에 세우고. 13세기 초에.
이전에 보름스 협약이 1122년 이고 런던협약이 1107년 이야. 헨리1세가 먼저 교황에 무릎 꿇고 다음 하인리히5세가 무릎꿇은겨 서임권으로. 완전히 교황 세상이 된거야. 인류문명사에 신권이 세속권을 이리 갖고 논 적이 없어. 골때리는애들이야 이 로마교황애들이. 헌데 역설적으로 이런 짓들이 유럽을 만든거야 이러면서 신권에 대한 진저리를 치는거걸랑.
카타르파를 진압하는 알비 십자군이 Albigensian Crusade or the Cathar Crusade 1209–1229. 베지에 학살 시작으로 20년 하는겨 2백만이 죽어. 저때 킹은 필립2세야. 손자 성루이9세 가 15세 때 끝나는겨. 동쪽 신성로마제국은 잘리거(살리안)조때부터 교황이랑 싸우느라고 정신없고, 하인리히5세가 무릎꿇고 1122년에, 이어 호헨슈타우펜 의 프리드리히1세 가 여전히 저놈의 교황 에서 버둥버둥 할때여 롬바르디아 지역이 교황 의 지원으로 이때 독립하려는겨 이게 롬바르디아 리그 이고. 프리드리히는 교황세 믿은 얘들 진압하다가 세월 다보내고 십자군 간겨. 3차 십자군 가는길에 죽어. 이어 아들 하인리히6세 도 십자군 가려다 죽고 꼬마 프리드리히2세 는 애 고, 괼피의 오토4세 하다가 프리드리히2세 가 황제에 올라.
The Third Crusade (1189–1192)
The Fourth Crusade (1202–1204)
The Sixth Crusade, commonly known as the Crusade of Frederick II (1228–1229)
3차 십자군 이 1192년에 프리드리히1세 가 죽으면서 흐지부지 되고. 4차 십자군은 선박제조값을 베네치아에 못 갚아서 이돈 갚는다고 뜬굼포 비잔틴 황제 아들이 자기 삼촌 쿠데타 했다고 쫓아내면 주겠으요 해서리 콘스탄티노플 가서 아예 점령해대고. 6차 에 프리드리히2세 가 교황의 몸살에 어거지로 원정해서 살라딘 조카 랑 악수 하고 오고 돌아와서 교황이 빼앗은 땅 다시 회복하다가 1250년 에 죽고.
저때는, 신성로마 제국은 교황 과 다투느라 자기들 관리가 힘들어 알프스 넘어서. 더하여, 교회 이야기 관심도 없어. 교황이 죽일 놈이야 황제 입장에선. 오히려 프리드리히1세는 아우뗀티카 하비타 1155년, 야 니덜 말 하고 픈거 막막 해. 할 때야. 야 니덜 그러면서 좀 저 교황들 욕좀 해줘.
저때 이단이 본격화 되는건 프랑스 진영이야 시작이. 특히나 카타르의 저 알비 지역. 세속권력이 프랑스 카페가 쎄. 교황이 여긴 못건드려. 여기 교회 진영도 세속에 붙어서 독립적인거야.
Philip II (21 August 1165 – 14 July 1223)
Louis IX (25 April 1214 – 25 August 1270)
알비 십자군 때 킹이 필립2세야. 이전에 2차 십자군 다녀왔어. 리차드2세랑. 주연자리 리차드한테 주고, 이때 상대는 살라딘 이고. 필립2세는 먼저 오면서 실지왕 존 꼬셔서 잉글랜드 땅 빼앗는거고, 얘때 카타르 가 누비면서 1209년 베지에 학살 시작하고 알비십자군 20년을 한겨 얘때. 그리고 뒤에 아들 루이8세는 이삼년 재위야. 바로 성루이 9세야.
Frederick II (26 December 1194 – 13 December 1250)
신성로마제국은 1220년부터 프리드리히2세야. 이전 십여년은 괼피의 오토4세고. 여긴 교황이 1122년 보름스 조약으로 확실히 황제를 자기들 수중에 넣으면서 갖고 노는 애들이야 교황이 황제를. 프리드리히2세도 이 분위기에서 황제가 된거고, 그러다 등떠밀려 6차 갔다가 돌아오면서 교황 조지면서 겔피 기벨리니 내전인겨.
저게 서기 1천년부터 프리드리히2세 죽음 1250년 까지의 하이미디벌 250년 이야. 유럽은 이때 만들어진거야. 유럽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대야.
The Condemnation of 1210 was issued by the provincial synod of Sens, which included the Bishop of Paris as a member (at the time Pierre II de la Chapelle).[3] The writings of a number of medieval scholars were condemned, apparently for pantheism, and it was further stated that: "Neither the books of Aristotle on natural philosophy or their commentaries are to be read at Paris in public or secret, and this we forbid under penalty of excommunication."[3] However, this had only local force, and its application was further restricted to the Arts faculty at the University of Paris.[3] Theologians were therefore left free to read the prohibited works, the titles of which were not even specified.[3] Alexander of Aphrodisias was probably among the Aristotelian commentators whose influence was targeted.
저 분위기에서 나온게 1210년 콘뎀네이션. 금지.야. 파리 부근 에서만 나온겨 이건. 이 전해에 베지에 학살 시작한거야 카타르 진압을. Sens 상스 지역 시노드 에서 발표를 해. 얘들 나름 공회의 야 이 지역의. 이 상스 라는 곳이 프랑스 교회자리의 중세부터 최고 자리들 중 하나여. 중세 때 대주교 자리는 여기고, 여기가 부르고뉴 서북쪽 끝이고 바로 위가 파리야. 왼쪽이 오를레앙 에 여기들 주인 자리가 오히려 이 상스. 야. 여기서 자기들 교구 는 이단 금지하고 가르침 금지. 이때 결국 이것의 주 타겟은 파리대학 이야. 이 파리대학이 1150년 이야. 유니버시티 가 1088 볼로냐 1096 옥스포드 다음이 여기야. 이 파리대학이 68혁명 하면서 조각조각 나서 사라진겨. 프랑스 란 나라는 근본적으로 후져 저게.
자유 가 저딴게 자유가 아냐. 저건 인민 놀이 의 자유야. 프랑스 가 참 기괴하게 되가는 나라 중 하나야.
1210년 금지.의 주 타겟은 이후도 그렇고 결국 아리스토텔레스 야. 아리스토텔레스 때문에 보는 내추럴 필로소피. 그 코멘터리들. 이건 머여? 아비세나 의 주석서여. 저건, 팬띠이즘. 범신론 인데 어떤 범신론이야? 임머넌스 야. 모든 띵 들에 네이처 가 스몄어. 네이처 는 신이고. 이거 파리대학에서 가르치면 파문이야. 읽어도 안돼. 몰래든 공개적이든.
그래서 신학자들은 떠났다 금지된 책들을 읽으려고. 헌데 딱히 목록이 딱 정해진건 아니었다. 걍 지들 꿀리는데로 빨간줄 긋는거지.
The University of Toulouse (founded in 1229) tried to capitalise on the situation by advertising itself to students: "Those who wish to scrutinize the bosom of nature to the inmost can hear the books of Aristotle which were forbidden at Paris."[3] However, whether the prohibition had actually had an effect on the study of the physical texts in Paris is unclear.[3] English scholars, including Robert Grosseteste and Roger Bacon, studied at Paris, when they could have chosen to study at the University of Oxford, where the works could still be discussed in public.[3] It is assumed that at the least they continued to be read in Paris in private, and there are also signs that their discussion had become public by 1240.[3]
툴루즈 대학이 1229년 에 세워졌는데. 카타르의 알비 가 이 툴루즈 지역이고. 이게 1229년에 진압이 다 되면서 2백만명 죽고 그해에 세워진거야. 학생 모집하는데 광고를 내다 "파리에서 금지된 아리스토텔레스 의 책들을 볼수 있어요, 네이쳐 에 대한 부점. 하트를 내면 깊숙히까지 보고싶은 사람들은 오세요" 그러나 실재로 파리에서 네이처 관련 텍스트들을 금지 햇는가는 불명확 하다. 로저 베이컨, 로버트 그로세테스트. 가 잉글랜드 사람들이고 옥스포드에서 공부했었는데 파리에서도 공부하다, 옥스포드에선 그 작품들이 공개적으로 토론되었다. 적어도 파리에서는 개인적으로 읽었다고 본다, 또한 서기 1240년 까지도 공개적으로 그들의 토론이 이루어졌다는 흔적도 있다.
1210년 금지 가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았다 라는거야. 걍 읽을 애들 읽은거고 토론도 했어.
By 1270, the ban on Aristotle's natural philosophy was a dead letter.[5] Nevertheless, the Bishop of Paris, Étienne Tempier, convened a meeting of conservative theologians and in December 1270 banned the teaching of certain Aristotelian and Averroist doctrines at Paris.[6] Thirteen propositions were listed as false and heretical, some relating to Averroes' doctrine of the soul and the doctrine of monopsychism, and others directed against Aristotle's theory of God as a passive unmoved mover.[6] The banned propositions included:
60년 후인 1270년 에도 금지 해. 이 1270년 이 루이9세가 죽은 해야. 십자군 8차 가서. 얘가 십자군 7차 를 이집트 로 가서 병참기지 근본을 친답시고 갔다가 포로 잡혀서리 완전히 김 팍샌겨 레반트 십자군 국가가. 8차 에는 튀니지로 가서 결국 죽어 성루이9세가. 그리고 서기 1291년 아코 함락 으로 레반트 2백년 십자군이 끝난겨. 이 결정적 장면은 성짜 붙은 이 성루이 9세야. 교황이 가장 찬양하는.
1270년 저 분위기 에서. 다시 금지 하는겨 파리 주교가. 이건 상스 가 아니라 파리 주교 가 독자적으로 한거야. 에치엔 탕피. 12월에 모여서 아리스토텔레스 에 더해서 아베로이즈 가 12세기 말에 죽은 스페인무슬림 이고 아리스토 빠야. 이사람 주석서들이 퍼진거야. 금지. 이때는 13개의 얘들의 항진 명제 가 나열돼 구체적으로. 잘못되었다며. 모노싸이키즘. 싸이키, 영혼,은 모노 하나야. 이건 머겠어? 팬띠즘 이 확장되서 저들이 무선통신으로 하나 라는겨. 저 자체가 신 과 공유가 되서 신은 트랜센던스 로 떨어져 있든 붙어 있는 신과 같은겨 이게. 장사가 안돼 이런말은. 신 과 만물 은 동격 이 아냐 장사하는 애들 입장에선. 언무브드 무버. 최초의 시작.의 아리스토 이론 거부.
언무브드 무버, 최초의 것은 움직여지지 않은 움직이게 하는 자. 이것도 아리스토텔레스 가 만든 말이야.
In Book 12 (Greek: Λ) of his Metaphysics, Aristotle describes the unmoved mover as being perfectly beautiful, indivisible, and contemplating only the perfect contemplation: self-contemplation. He equates this concept also with the active intellect. This Aristotelian concept had its roots in cosmological speculations of the earliest Greek pre-Socratic philosophers and became highly influential and widely drawn upon in medieval philosophy and theology. St. Thomas Aquinas, for example, elaborated on the unmoved mover in the Quinque viae.
메타피직스 12권에서, 언무브드 무버,를 완벽하게 아름답고, 나뉠수 없고, 사유하는 존재 로 서술해. 완벽한 사유 인데 셀프 사유야. 그 자체 로 사유하는 존재야. 액티브한 인털렉트 와 같은 컨셉으로. 이건 소크라테스 이전 의 우주적 관점에 뿌리를 두고 있고 중세 철학에 깊은 영향을 주고 토마스 아퀴나스 가 이어 받다.
The unmoved movers, if they were anywhere, were said to fill the outer void, beyond the sphere of fixed stars:
It is clear then that there is neither place, nor void, nor time, outside the heaven. Hence whatever is there, is of such a nature as not to occupy any place, nor does time age it; nor is there any change in any of the things which lie beyond the outermost motion; they continue through their entire duration unalterable and unmodified, living the best and most self sufficient of lives… From [the fulfilment of the whole heaven] derive the being and life which other things, some more or less articulately but other feebly, enjoy."[15]
— Aristotle, De Caelo, I.9, 279 a17–30
언무브드 무버즈. 어디에 그들이 있었다면, 바깥의 을 채워야 해, 저 고정된 별들의 공간을 넘어선. 이 태초의 저 무버들. 복수여. 얘들이 저 우주 바깥의 넘어서에서 꽉 차서 있었어야만 하는겨. 왜? 낫띵 프럼 낫띵 이야. 낫띵에선 낫띵 만 나올뿐이야. 이게 고대 그리스 사람들의 명제였어. 먼가 있어야 해.
하늘 넘어서 공간도 텅빔도 시간 도 없음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거기에 무엇이 있든, 어느 공간(일부만을)도 차지 하지 않고, 나이를 드는 시간도 아닌 어떤 네이처의 성질을 갖은 것이다. 가장 바깥쪽의 움직임의 넘어 에 있는 어떤 것들의 어떤 변화도 아니고. 그들은 계속 그들의 전체 주기를 통해서 변형도 안되고 수정도 안된 채로 베스트 를 살고 삶의 가장 자기 충족을 산다... 모든 하늘의 꽉채움실행 으로 부터 그 존재와 삶이 나온다, 다른 것들, 즉 언무브드 무버 로 부터 나오는 것들은 즐긴다 (태어난 그 존재와 삶을) 분명하게 더 또는 덜, 다른 이들은 약하게 피동적으로.
The unmoved movers are, themselves, immaterial substance, (separate and individual beings), having neither parts nor magnitude. As such, it would be physically impossible for them to move material objects of any size by pushing, pulling or collision.
움직이지 않는 움직이게하는것들 은 그들 스스로, 머티리얼하지 않은 서브스턴스 이고, 즉 안만져저 (분리되고 나뉨불가의개별적 존재들), 구성하는 부품들도 없고 크기도 없어. 그래서, 피지칼하게, 물리적 으로 그들 언무브드 무버 들이 물질적인 오브젝트들을 움직인다는것은 불가능해 밀던 당기든 충돌 시키든.
즉 아리스토텔레스 는, 꽈악 차 있는 하늘 넘어의 저게 있는데, 수정불가 변형불가 시간안겪는 것이고, 피조물들은 여기서 단지 나올 뿐이야. 여기서 단지 나와서 자기 존재와삶 이 나오는겨. 그리고 피조물들이 각각의 네이처 에 따라서 즐거움을 적극적으로 누리느냐 피동적으로 움추리며 누리느냐 는 거고, 중요한건, 저 언무브드 무버들 은, 피조물 들 이라는 머티리얼 오브젝트 들을 움직이게 하지 않는다는거야. 배후의 신 이 뒤에서 자기로 부터 나온 띵들을 밀고 땅기고 충돌시키는 짓 을 하는것은 불가능해.
교회에서 가장 싫어하는 말이야. 저건 신의 개입 을 적극적으로 부정하는겨. 패시브 한 신이야. 저 지점에서 저건 이단이야.
이 아리스토텔레스 를 더 가면 말이야
Hypokeimenon (Greek: ὑποκείμενον), later often material substratum, is a term in metaphysics which literally means the "underlying thing" (Latin: subiectum).
To search for the hypokeimenon is to search for that substance that persists in a thing going through change—its basic essence.
휘포케이메논. 머티리얼 서브스트레이텀. 바닥의 것. 이야. 이게 우시아 이고 서브젝트 서브스턴스 인 그 자리 서브젝티브 의 것들이야.
According to Aristotle's definition,[1] hypokeimenon is something which can be predicated by other things, but cannot be a predicate of others.
아리스토텔레스 의 정의에 의하면. 휘포케이메논 은 다른 것들 에 의해 서술될 수 있는 것 인데, 이것은 다른 것들의 서술어 는 될 수 없다.
휘포케이메논 이 후포케이메논의 변형인데. 말뜻 자체가 바닥에 잠겨 있는 것. 이야. 이게 우시아 이고 에센스 여.
아리스토텔레스 는 저걸 말을 애매하게 쓴거야. 휘포케이메논 은 다른것들 에 의해 서술되는겨. 그런데 다른것들의 서술어는 될 수 없어. 저 지점이 아비세나 를 들 쑤신겨 40번을 반복해서 읽어도 이해 안되는 지점이 저기서 걸랑.
휘포케이메논 이, 우시아 야. 서브스턴스 그 자체고. 서브젝티브 자리 주어 자리에 오는 건데. 이건, 다른 것들 에 의해 서술돼. 이 다른 것들이 머여? 나머지 9개 카테고리 야.
우시아 는 다른것들의 서술어 로는 자리 못잡아.
헌데 우시아 라는 휘포케이메논 이라는 것 자체 에 대해선, 그냥, 바닥에 잠긴 것. 이래버리고 만겨.
이것 자체에 대해서, 아비세나 가 완전히 다른 세상을 만든거야. 이 휘포케이메논 자체도, 다른 것들 이라는 9개 카테고리 라는 피상적인 서술어 로 서술될 수 잇는 것 뿐만 아니라, 9개 카테고리 외의 다른 서술어로도 저건 설명할 수 있다. 라면서 쑤시고 들어간거걸랑. 이걸 토마스 아퀴나스 가 받는거고.
아 하튼, 저 언무브드 무버 의 설명은 아리스토텔레스 만큼 의 설명 이상이 없어 이것도 지금까지. 아 음청나 이 아리스토텔레스. 당연히 신의 개입을 원하는 교계에서는 이단이야 저런 말은. 지금 생명기원설 은 이 아리스토텔레스 의 저 언무브드 무버즈. 의 저 이야기 일 뿐이야 주류 의 이야긴.
- "That there is numerically one and the same intellect for all humans".[6]
- "That the soul separated [from the body] by death cannot suffer from bodily fire".[6]
- "That God cannot grant immortality and incorruption to a mortal and corruptible thing".[6]
- "That God does not know singulars" (i.e., individual objects or creatures).[6]
- "That God does not know things other than Himself".[6]
- "That human acts are not ruled by the providence of God".[7]
- "That the world is eternal".[8]
- "That there was never a first human".
파리 주교 에치엔 탕피.가 금지하는 명제들 이야. 모든 인간들에겐 하나에 똑같은 인털렉트 지성이 있다. 죽어서 몸에서 분리된 영혼은 불에서 고통 겪을 수 없다. 신은 필멸의 것에 불멸과 안시체썩음성질 을 줄 수 없다. 신은 개체적 단위들을 알지 않는다. 신은 신 그자신보다 피조물 것들을 알지 않는다. 인간 행동들은 신의 섭리에 의해 지배되지 않는다. 세상은 영원하다. 아담따위 첫번째 인간은 없었다.
The chain of events leading up to Bishop Tempier's condemnation of 1277 is still not entirely clear
1277년 에도, 즉 7년 지나서 또 했는가는 불명확하다. 즉 저 해에 대대적으로 감사 하면서 일명 적폐 숙청을 하는거야. 자기들 교구 에 한정해서. 1277년 에는 했다는데 구체적으로 모르겟다야. 계획문서는 있는데 실행여부를 몰라
On 18 January 1277, Pope John XXI instructed Bishop Tempier to investigate the complaints of the theologians. "Not only did Tempier investigate but in only three weeks, on his own authority, he issued a condemnation of 219 propositions drawn from many sources, including, apparently, the works of Thomas Aquinas, some of whose ideas found their way onto the list."[12] The list published on 7 March condemned a great number of "errors", some of which emanated from the astrology, and others from the philosophy of the Peripatetics.[11] These included:
1277년 1월에 교황 요한21세가 파리 주교 탕피 에게 신학자들의 불평들을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탕피 가 자기 권한으로 3주동안 조사했을 뿐만 아니라, 교황이 219개들의 명제들 금지문을 발표했다 많은 소스들에서 갖고온. 특히나 토마스 아퀴나스 의 책들에서. 토마스의 아이디어에서 팁을 받아서 리스트를 작성했다. 그 리스트는 무수한 에러들 을 사례로 들면서 근거들을 나름 갖고 금지를 시켰다는겨.
The condemnation of 1277 was later partially annulled "insofar as the teachings of Thomas Aquinas would seem to be implied."
1277년 의 금지는, 나중에 부분적으로 무효화 되다. 토마스 아퀴나스 의 가르침들이 저 내용에 많은겨.
1225 – 7 March 1274. 토마스 아퀴나스 가 1274년에 죽고. 3년 후에 나온겨 저게. 어설프게 나온거야.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 빠야. 그런데 ㅋㅋㅋ 저 토마스 껄 어설프게 인용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 금지 한겨 교황애들이.
1210-1277 이 정확이 토마스 아퀴나스 생몰 이고. 로저 베이컨 1214-1292 여. 스콜라 의 시작이야 이게. 이때 파리에서만 저런 일이 있었어. 저러면서 오히려, 더더더 디다보믄겨 사람들이. 아리스토텔레스 모르던 사람들도 더 디다보는거고. 오히려 저게 ㅋㅋㅋ 더 아리스토 붐을 일으켜. 금지 하려는 애들은 금지 시키려고 더 디다 보면서 이상한 말 없나 하는거고. 저러면서 스코투스 가 1266년 생이야. 바로 오컴의 윌리엄 이고. 1291년 아코 함락 되고 교황 교권이 흔들리고 아비뇽 교황정 에 웨스턴 스키즘 이야. 유럽은 이 아비뇽교황정 으로 부터 완전히 사유적으로 대 혼란기가 오면서 생각이 날라가기 시작한거야.
저 중심에, 이전 금지하면서 오히려 퍼진 아리스토텔레스 의 사유 와 사유 방식 이 저들 의 대논쟁의 저수지인겨 이게.
저때 교권 세속권 논쟁 중심이 오컴의 윌리엄이고. 파도바 의 마르실리오 가 데펜소르 파키스. 평화의 수호 라는 중세 최초로 정치란 무엇이고 정치체제는 어때야 하는가를 내는거야. 체세나 의 미켈레 나오고. 오컴 윌리엄은 로저베이컨 생각 써먹고. 이게 에코 할배 의 장미의 이름.이야. 이 책은 20세 최고의 책이야.
유럽은 저 아리스토텔레스 가 만든거야. 지금 문명은.
슬람이들은 아리스토텔레스 를 죽여서 미래조차 사라진거야.
사유 를 죽이면, 영혼 은 죽어. 짐승 보다 못한 인간의 삶이 돼 이건.
곧 우리 조선 민국 이 그리 될거야. 꼬라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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