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mazing Grace, how sweet the sound
That saved a wretch like me
I once was lost, but now am found
Was blind but now I see

 

Was Grace that taught my heart to fear
And Grace, my fears relieved
How precious did that Grace appear
The hour I first believed

 

Through many dangers, toils and snares
We have already come
T'was Grace that brought us safe thus far
And Grace will lead us home
And Grace will lead us home

 

Amazing Grace, how sweet the sound
That saved a wretch like me
I once was lost but now am found
Was blind but now I see

Was blind, but now I see

 

황홀한 그레이스, 얼마나 스윗하니 저 소리가
구해줬어 어떤 버려진 이를 나와 같은
나는 한번은 잃어버려졌어, 그러나 지금 찾아져 있지
눈이 멀었어 그러나 지금 나는 볼 수 있지

그레이스였어 나의 하트에 두려움을 가르친건
그리고 그레이스였어, 나의 두려움들이 줄어든건
얼하나 귀한가 그 그레이스가 나타났던 것이
그 시간에 나는 처음 믿었어

많은 위험들 수고들 그리고 함정들을 지나서
우리는 이제 와 버렸어
그것은 그레이스였어 우리를 안전하게 이렇게 멀리 데려온 것은
그리고 그레이스 는 인도할거야 우리를 집으로
그리고 그레이스 는 인도할거야 우리를 집으로

황홀한 그레이스, 얼마나 스윗하니 저 소리가
구해줬어 어떤 버려진 이를 나와 같은
나는 한번은 잃어버려졌어, 그러나 지금 찾아져 있지
눈이 멀었어 그러나 지금 나는 볼 수 있지
눈이 멀었어 그러나 지금 나는 볼 수 있지

 

.

그레이스 란건. 그라투스. 기쁘게 "해주는" 거야. 기쁨을 주는 존재여.  기쁘게 해주는 것의 어드젝티브야. 신 의 속성이야. 그래서 프레이즈. 감사하고 찬양하는겨. 고귀함의 가치에 대해.

 

이게 스페니쉬 로 가서 그라띠아스 Gracias 라는 인사야. 감사합니다 라는 땡큐 고 무차스 그라띠아스  감사해요. 할때 이건, 플리징 하는 대상 에 대한 예찬 의 어감이고 당신이 나에게 기쁨을 줍니다 하는거야. 

 

From grātus (pleasing), from Proto-Indo-European *gʷerH- (to praise; to welcome), whence also Sanskrit गूर्ति (gūrtí, praise, welcome, benediction).  

 

신의 속성 중에 가장 직접적인겨. 기쁨을 주는 속성이야. 기쁨이란, 상대적 감정이야 또한, 고통 을 덜어주면 기쁨이야. 평상시 감정에서 쁠러스 더 좋음의 기쁨 이 아냐 이 그레이스 란건. 고통에서 꺼내줘서 기쁜거야. 일차적으론. 더하여 이제 집 으로 가면 더한 기쁨의 그레이스 이고. 집 이란 홈 은, 노스토스 야. 태초 이고 라이프 의 시작점 이야. 

 

인간은 이 노스토스. 홈. 이것에 대한 갈망 으로 사는거야 존재의 이유야.

 

이것 없으면, 적페놀이나 하며 구데기 처럼 살면 되는거고. 저건 걍 구데기야. 

 

"Amazing Grace" is a Christian hymn published in 1779, with words written in 1772 by the English poet and Anglican clergyman John Newton (1725–1807).  

 

이 찬송가 는 서기 1779년 에 나왔어. 가사 는 7년전인 1772년 에 나온겨. 앵글리칸 성직자 존 뉴턴 이 쓴거야. 자기 경험담이야. 이사람이 노예무역을 했었걸랑. 졸 파란만장해. 

 

존 버니언 의 천로역정이 1678년 에 나왔어. 이건 그야말로 베스트셀러여. 가장 많이 팔리니 책이 17세기에 이 천로역정 이야. 존 버니언 은 저때 찰스2세 때고 찰스가 루이14세 꼬드김에 네덜란드랑 전쟁하고 마무리할때고 10년후에 1688 명예혁명 전이야. 잉글랜드 가 러블리 찰스 로 강대해지는 바닥 쌓는겨 이때. 올리버 크롬웰 내리고 브리튼은 날라가가 시작하는겨 천로역정은 이때 나온겨. 그리고 백년 후에 나온게 어메이징 그레이스.야. 

 

저때는 미국 이 등장하기 직전이야. 인지세 거부 운동에서 대표성 없는 영국에 세금 못내 가 1765년 이고 보스턴 학살 이 1670년 이야. 말이야 보스턴 학살 이지 디다보면 학살 도 아냐 예닐곱 명 죽은겨 그것도 시민들이 먼저 시비 건거거든 떼로 모여서 잉글랜드 보초병들 놀림 조롱 하다가 소수의 병사들이 공포에 질려서 총질 한거야. 재판 을 미국 시민들이 주도 해. 배심원들도 미국 시민들이야. 무죄여 무죄 ㅋㅋㅋ. 어찌할 수 없이 총 쏜걸로 보는거야 저 재판정에서. 저건 전혀 본토가 개입이 안되었어 재판에. 저때 병사들 변호사가 존 아담스 여. 조지 와싱턴 다음 2대 대통령이야. 유죄 받은 한명의 병사 에게는 너 그정도의 긴박성은 없었다며 유죄 하고 도 벌 은 인두로 낙인 찍고 풀어주는게 다여. 

 

엄청난거야 저게. 감히 이 조선 민국에선 상상도 못해 저들의 사법 행위는. 우리는 여전히 머 진상조사 어쩌고 진실규명 저쩌고 ㅋㅋㅋ. 쟤들과 비교하면 정말 어이없는 코메디야. 왜냐면, 남의 이야기들은 전혀 전혀 모르거든 이땅 인간들이. 

 

1765년 이후 저 흐름이 10년 지속되고 1775년 에 조지 3세 가 쳐들어가고 다음해 1776년에 독립선언하고 1783년에 끝나는겨 미국 독립 전쟁이. 존 뉴턴의 어메이징 그레이스 는 저때인 1772년 에 쓰여진거고 독립전쟁 한창 인 1779년에 노래로 나와. 

 

영국은 18세기 들어오면서, 스페인 계승전쟁, 오스트리아 계승전쟁 젠킨스의 귀전쟁에 세계대전인 7년전쟁 을 다 이기거나 실속 챙기고서, 이때 동시에 터진게 저 인지세 반대 운동으로 시작한 미국 독립 움직임의 10년인겨. 영국이 웃긴게 대륙애들 대상으로는 다 이겼는데, 미국 독립 힘은 못막은겨 ㅋㅋㅋ. 그만큼 저 미국으로 간 유럽인들의 정체성이란건 어마어마 한거야 저게. 

 

저 미국이 요즘 망가지는겨. 갓 문명을 익힌 흑인 애들과 어설프게 착한 척 하는 백인애들 로 인해. 시애틀 주장보면 가관이야. 모~든 법체계 무시, 재판은 흑인들 배심원 위주. 감옥소 범인들 다 풀어주라. 저게 저게 인민 들의 세상이야. 그러면 지들이 권력 잡으면 위대해질거 같지? 천만에. 모랄이 개판이고, 완전히 저것들만의 야만스런 권력놀이 가 시작되는거야. 저 미국이 점점 어찌 될 지 몰라 저게. 결국 지워질거야 저 미국도. 프랑스 와 함께. 누가 남을까? ㅋㅋㅋ. 

 

맞아 결국 스칸디나비아 에 영국 애들인거야. 게르만의 시작이 저들이야. 

 

저 스칸디나비아 라는게 참 싀안한겨. 중세 천년을 아무힘도 없던 애들이, 중세 천년 지나면서 오히려 여기가 유럽인들의 도피처 가 되면서 이리로 오는겨. 스칸디나비아 는 쟤들의 홈 이고 쟤들의 뿌리지 저곳이 문명을 창조하진 않았어! 저긴 절대 문명의 배꼽이 아냐. 저들은 오히려 중세 유럽 천년의 문명을 빠르게 흡수한거야. 저곳을 우습게 나는 봤었는데, 가만 생각해보니 저곳이 우스운 곳이 아닌거야. 나중에 더 보도록 하고. 

 

프랑스 가 다 지워진다는 대목에 웃겼는데. 프랑스 언어 조차 다 지워지고. 프랑스 옛 지명들이 다 사라져 ㅋㅋㅋ. 디나흐 도 이해못하는겨 디나흐 입장에선 프랑스 가 원수 일 수 없어. 얘는 프랑스 혁명 을 찬양하는 애야. 스위스 태생이고 비록 오스트리아 걸쳤지만 엄마로, 스위스는 프랑스랑 친해. 오히려 오스트리아 가 너무 싫고. 이상한거야 왜 프랑스가 사라지지? ㅋㅋㅋ. 아 저 대목 보고 웃겼는데. 저건 진짜 이야기야 내 확신한다 진짜. 

 

정말 살떨린다 저거. 내  많은 책을 봤걸랑 잡다하게. 저건 최고의 책이야. 

 

아 이 이야기 할라는게 아니라. 저 노래 이야길 하려한건데 짧게. 아 길어지네 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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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누가 역사를 모독하는 걸까. 누가 반역사적 애들일까

 

지들이 성스런 날이라며 모이는 날 기집들 옆에 앉히고 술처먹는 애들 ㅋㅋㅋ. 여성동지께서 화가 나셨다지. 저것들이 권력의 중심이고 국개 해대고 북조선의 유교사회주의 오손도손 행복으로 살고있다는둥. 지들의 자식 의 지들의 성소에서 먼놈의 삼섬인지 어쩌고 저쩌고 ㅋㅋㅋ. 지들 일본 파리 해대는데 불쌍한 할머니들 이용해처먹으면서 지들 자식들 지들 돈벌이에 환장하고 그러다 스스로 목을 졸라 자살을 했대 ㅋㅋㅋ. 야, 밧줄에 목걸어서 대롱대롱 자살하는 사람도 고통스러워서 자기가 자기 목을 뜯어 뜯어 줄 끊으려고. 이제는 사람이 죽어도 모두 자살이야 자기들 이념에 불리한 자살은. 

 

누가 역사를 모독하는 거니? 누가 반역사적 인간들이니?

 

너야 너 너 너 너. 

 

아 저거 졸 웃기더만, 닌텐도 백만개인가 팔렸다는 기사에 어떤 민족주의자가 한탄을 해, 어떻게 우리가 일본 물건을 저리 사대냐 참 정신 나간 친일 들이 이리 많은가, 거기에 답글, 저 민족주의자의 일본 텐가 구입 글을 붙이며, 어멋 일본 자위기구 는 사시는 분이 먼 소리 ㅋㅋㅋ. 

 

참 조선 들이란. 

 

여자들이 조선 조선 하는거 보믄 참 싕기한겨 진짜. ㅋㅋㅋ. 

 

불쌍하지도 않다 니덜은. 

 

 

John Newton (/ˈnjtən/; 4 August [O.S. 24 July] 1725[1] – 21 December 1807) was an English Anglican clergyman and abolitionist who was forced to serve as a sailor in the Royal Navy for a period. 

 

존 뉴턴 이 1725-1807년 이야. 영국이 스페인이랑 본격적으로 대서양에서 붙을 때 태어난겨. 이제 스페인은 지는 해이고. 이전에 스페인 계승전쟁 에서 합스부르크에 붙은 영국한테도 스페인은 힘없고, 이후 젠킨스 귀전쟁에 7년전쟁도 영국이여. 대서양에 바다는 영국꺼야. 

 

John Newton was born in Wapping, London, in 1725, the son of John Newton the Elder, a shipmaster in the Mediterranean service, and Elizabeth (née Scatliff). Elizabeth was the only daughter of Simon Scatliff, an instrument maker from London.[2] Elizabeth was brought up as a Nonconformist.[3] She died of tuberculosis (then called consumption) in July 1732, about two weeks before her son’s seventh birthday.[4] Newton spent two years at a boarding school, before going to live at Aveley in Essex, the home of his father's new wife.[5]

At age eleven he first went to sea with his father. Newton sailed six voyages before his father retired in 1742. At that time, Newton's father made plans for him to work at a sugarcane plantation in Jamaica. Instead, Newton signed on with a merchant ship sailing to the Mediterranean Sea.  

 

런던 와핑 에서 태어났다. 아빠 는 쉽마스터, 선장이었다 지중해 다니는. 엄마 엘리자벳 은 시몬 스캣리프 의 외동딸이었는데 런던에서 악기제작자 였다. 엘리자벳은 논 콘포어미스트. 앵글리칸 이 아닌겨. 이걸 나중 정리하고 저런거 정리되면 좀 편해 저 비국교도. 번역 드러운건데 모두 일본 번역. 엄마가 결핵으로 7세에 죽었어. 뉴턴은 기숙학교에서 2년 지내고. 얘들은 열살 전에 부모 떠나서 기숙학교에 다녀. 꼬마때에. 새엄마 집으로 가서 살다. 11세에 처음 아빠 따라 배를 타다. 아빠가 1642년, 뉴턴 17세 에 은퇴할때까지 여섯번 항해하다. 그때 아마는 그에게 자메이카 의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게끔 계획했는데 뉴턴은 지중해로 항해하는 상선 과 계약했다. 

 

In 1743, while going to visit friends, Newton was captured and pressed into the naval service by the Royal Navy. He became a midshipman aboard HMS Harwich. At one point Newton tried to desert and was punished in front of the crew of 350. Stripped to the waist and tied to the grating, he received a flogging of eight dozen lashes and was reduced to the rank of a common seaman.[6]

Following that disgrace and humiliation, Newton initially contemplated murdering the captain and committing suicide by throwing himself overboard.[7] He recovered, both physically and mentally. Later, while Harwich was en route to India, he transferred to Pegasus, a slave ship bound for West Africa. The ship carried goods to Africa and traded them for slaves to be shipped to the colonies in the Caribbean and North America.  

 

1743년. 18세에 친구들 방문길에 체포되서 징집이 된겨 강제로 해군에. 이 강제 징집이 크롬웰 반란 때부터 영국은 이미 시작이 된거야. 강제 징집이란 중세에 전혀 없던 개념이야. 대륙에선 1789 프랑스 대학살 때부터여 강제징집은. 영국은 이것도 먼저야. 미드쉽맨, 육군으로 따지면 소위 정도여. 간부 중에서 가장 아래여. 이때는 영국이 스페인이랑 바다에서 젠킨스 귀 전쟁 1739-48 할때고 바로 오스트리아 계승전쟁으로 이게 엮여. 이 때 뉴턴은 탈영하려다 잡혀서 350명 승무원들 앞에서 벌받다. 허리까지 다 벗기고 거칠게 묶여서 80여대의 채찍질을 당하고 일반 선원으로 강등되다. 

 

불명예와 치욕으로 뉴턴은 처음에 선장을 죽이고는 자살 하려 했다 바다로 뛰어들어서. 그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회복 되었다. 나중에  하위치 선이 인도로 가는길에 서아프리아로 향하는 노예선 페가수스 로 갈아탔다. 그 배는 아프리카로 가는 상품들을 싣고 노예로 바꿔서 캐리비안해와 북아프리카 식민지로 가는 거였다. 

 

Newton did not get along with the crew of Pegasus. In 1745[8] they left him in West Africa with Amos Clowe, a slave dealer. Clowe took Newton to the coast and gave him to his wife, Princess Peye of the Sherbro people. She abused and mistreated Newton just as much as she did her other slaves. Newton later recounted this period as the time he was "once an infidel and libertine, a servant of slaves in West Africa."[9]

Early in 1748 he was rescued by a sea captain who had been asked by Newton's father to search for him, and returned to England on the merchant ship Greyhound, which was carrying beeswax and dyer's wood, now referred to as camwood.[10]  

 

뉴턴은 페가수스 승무원과 잘 못지내다. 1745년 20세 에 서아프리카 섬에 노예 상인 아모스 클라우 와 떨궈졌어. 클라우 는 뉴턴을 해안으로 데려가서 자기 와이프 셔브로 족 사람 프린세스 파이.에게 줬는데 그녀가 뉴턴을 자기 노예들처럼 다루다. 뉴턴이 나중에 이 시절을 회상하길 그는 "한때 신앙없고 방종한(리버타인, 모랄없이 프리섹하며 방탕함), 노예들의 하인 이었다 서아프리카 에서"

 

1748년 23세에 그는 구출되었다 뉴턴 아빠의 요청을 받은 어떤 선장에 의해. 그리고 잉글랜드 상선 그레이하운드 로 돌아와서 밀랍과 염색제 나무, 지금 캠우드 라는 빨강 목재 를 실어날랐다.

 

그리고는 운명의 날을 맞아

 

In 1748, during his return voyage to England aboard the ship Greyhound, Newton had a spiritual conversion. He awoke to find the ship caught in a severe storm off the coast of Donegal, Ireland and about to sink. In response, Newton began praying for God's mercy, after which the storm began to die down. After four weeks at sea the Greyhound made it to port in Lough Swilly, Ireland. This experience marked the beginning of his conversion to Christianity.  

 

1748년 23세에 그레이하운드 배에서 잉글랜드 가는 항해길에 영적인 전환을 갖았다. 그는 아일랜드 도니갈 해안에서 심각한 폭풍에 갖혔다 깨보니, 배는 막 잠기려하고. 이 도니갈 이 아일랜드 여가수 엔야 가 나고 자란 곳이고 북서쪽 해변이야. 뉴턴은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갓의 머시 를 위해, 그리고 폭풍이 잠잠해지기 시작하다. 4주 후에 그게이하운드 선은 아일랜드 러프 스윌리 의 항구 에 닿았다 이 경험이 그를 그리스도 로 전향하는 분기점이 되다. 

 

러프 스윌리 도 도니갈 해안이고, 여기가 피요르드 야 졸 복잡하고 가파른 절벽 사이 들이고 위험해 여긴. 겨우 살아남은겨. 4주 만에 왔어. 

 

He began to read the Bible and other religious literature. By the time he reached Britain, he had accepted the doctrines of evangelical Christianity. The date was 10 March 1748,[12] an anniversary he marked for the rest of his life. From that point on, he avoided profanity, gambling and drinking. Although he continued to work in the slave trade, he had gained sympathy for the slaves during his time in Africa. He later said that his true conversion did not happen until some time later: "I cannot consider myself to have been a believer in the full sense of the word, until a considerable time afterwards." 

 

그는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른 종교 서적을. 그가 영국에 도착하고서 에반젤리칼 그리스도 교리를 받았다. 에반젤리칼 은 마틴 루터 가 퍼뜨린 유 안겔리온, 좋은 메신저 이고, 프로테스탄트 는 영주 들이 퍼뜨린 말이고. 1748년 23세 의 저 세례일을 자기 생일로 하다. 그때부터 그는 욕질 도박 술 을 피하다. 그리고도 계속 노예선에서 일했다, 그러면서 이때 세례 받고 자기가 아프리카 시절 노예들에 대한 공감 을 가졌던겨. 그는 나중에 말했다 그의 진실된 전향은 일어나지 않았따 그 이후 언제까지는. "나는 내 자신을 그 말 전체 의미로의 믿는자 였다고 생각 할 수 없다, 그 이후 굉장한 시간이 흐를 때 까지는. 

 

저때는 3월 이고, 같은 해 사고 나기 직전이야 저때는. 그리고 서 조난 사고가 난겨. 노예선을 타다가. 

 

Newton returned in 1748 to Liverpool, a major port for the Triangle Trade. Partly due to the influence of his father's friend Joseph Manesty, he obtained a position as first mate aboard the slave ship Brownlow, bound for the West Indies via the coast of Guinea.  

 

리버풀 에 돌아와서 삼각무역을 하다. 아빠 친구 영향으로, 그리곤 노예선에 일등 동료 머 높겄지 그 자리로 해서 서인도들로 향하다. 

 

It was when returning to England aboard the ship Greyhound in 1748, [he] awoke to find the ship caught in a violent storm and about to sink. He prayed for God's mercy, the storm died down. After four more weeks at sea, the Greyhound made it to port in Lough Swilly in the north of County Donegal in Ulster, Ireland. This experience marked the beginning of his conversion to Christianity. 

 

세례 받고 나쁜짓 피하려 하고 그러면서도 노예무역선 타다가, 사고를 당한겨 강한 폭풍에. 그리고 침몰하려해 배가. 이때 기도했다고 기도빨 먹혀서 4주만에 섬에 닿은거야. 머 막 시점이 왔다갔다 하는데 아 넘어가 구찮아 생각하기

 

Newton continued to work in the slave trade. After his return to England in 1750, he made three voyages as captain of the slave ships Duke of Argyle (1750) and African (1752–53 and 1753–54). After suffering a severe stroke in 1754, he gave up seafaring and slave-trading activities, but continued to invest in Manesty's slaving operations.[15]  

 

뉴턴은 계속 노예무역으로 일하다. 잉글랜드에 1750년 25세에 돌아온 후, 노예선 두 개의 선장 으로 세번 항해하고, 1754년 29세에 심각한 발작이 온 후에 바다일과 노예무역일을 접었지만 노예 관련 사업에 투자는 계속했다. 

 

In 1780 Newton moved to the City of London as rector of St Mary Woolnoth Church, where he contributed to the work of the Committee for the Abolition of the Slave Trade, formed in 1787. During this time he wrote Thoughts Upon the African Slave Trade. In it he states; "So much light has been thrown upon the subject, by many able pens; and so many respectable persons have already engaged to use their utmost influence, for the suppression of a traffic, which contradicts the feelings of humanity; that it is hoped, this stain of our National character will soon be wiped out."  

 

런던 시티 에 1780년 55세 때 교회 렉터 로 있다가, 렉터 는 권력 쥔 목사여. 그는 노예 무역의 철폐 위원회 에서 일하다.  실컷 우려먹고, 1748년 23세 부터 32년을 머한겨. 이 18세기 에 이미 영국은 흑인노예 철폐 운동을 한거야. 이게 미국 북쪽에 그대로 전해진거고. 미국 북부 에서 저게 스스로 나온게 아냐 노예 철폐가. 이미 이 노예 시장 근절은 정복왕 윌리엄 이 1066년 오면서도 한겨 저 아일랜드 에 노예 장사 한다는거에 학을 띄고. 얘들이 이게 제일 빨라 시안하게. 

 

자기 종족을 노예 노비로 쓴건 유일해 이 조선 오백년이.  위대한 조선. 

 

 

In 1755 Newton was appointed as tide surveyor (a tax collector) of the Port of Liverpool, again through the influence of Manesty. In his spare time, he studied Greek, Hebrew, and Syriac, preparing for serious religious study. He became well known as an evangelical lay minister. In 1757, he applied to be ordained as a priest in the Church of England, but it was more than seven years before he was eventually accepted.  

 

1755년 30세 에 리버풀 항구 의 타이드 서베이어. 교회 십일조여. 이일 하면서 그리스어 히브루어 시리안어 배우고 심각하게 종교 공부 하다. 그는 레이 미니스터, 평신도 에서 좀 윗계급인겨. 1757년 32세에 사제 교육 을 시작해서 앵글리칸 으로. 7년 이상 걸린겨 사제 가 된게. 이 사제 란게 보통 자리가 아녀. 즉 39세 에 되서. 1772년 47세 에 저걸 쓴겨.

 

아 별거 없네 머 좀 재밌는거 있나 해서 봤구만. 왜냐면 내가 이 노래에 대해 언젠가 한번 적고 자 했걸랑. 별거 있는 듯 해서. 

 

아 재미없다 이거. 

 

하튼, 1772년 존 뉴턴이 쓴 가사와는 좀 달러. 더 길어 뉴턴껀. 버스 뒤에 세개 가 더있는데 저 켈틱 여자들의 노래는 절반 만 부른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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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etch 렛치 란건 난파되서 버려진 자. 불운한 자.야. 정확히 저 존 뉴턴이 경험담으로 그때 침몰되는 자 의 렛치.이고

 

어메이징 이란건 a maze 메이즈 라는게 미로 야. 게르만 말이고 labrynth 래브린뜨 란건 그리스어 미로 고. a 에이 란건 퍼펙트야. 완벽한 미로 이고, 복잡한거야. 놀라운 감정선 이야, 놀라울때의 복잡해서 표현 못할 정도의 황홀함.

 

그레이스 를 찾아서 노스토스 인 홈 으로 가자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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