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wiss peasant war of 1653 was a popular revolt in the Old Swiss Confederacy at the time of the Ancien Régime. A devaluation of Bernese money caused a tax revolt that spread from the Entlebuch valley in the Canton of Lucerne to the Emmental valley in the Canton of Bern and then to the cantons of Solothurn and Basel and also to the Aargau.
일단, 빨랑빨랑 프랑스 1789 대학살 까지 일단 아 빨랑 이번주 안에 정리를 해야겄다. 유럽사 를 가만 디다보년, 유럽애들 자체도 자료들은 정말 좋은데, 이걸 해석해내는 사가들이 완전히 역사 해석을 개판으로 해버린게 너무나 잘 보이는데 내 눈엔. 가장 오역질이 저놈의 프랑스 대혁명 하는, 프랑스 대학살 1789 걸랑. 아 저 이야길 하려면 저때까지 이야기를 봐야해 이거. 아 건너뛰고 빨랑 빨랑 정리하고 싶은데. 아 빨랑 저 일본사 이야길 해야하고, 십자군 이야길 제대로 해야하고. 이 십자군 이 아주 핵심이여 이게. 여기서 프리드리히 1세 이야길 해야해. 겔피 기벨리니.가 이게 핵심이여. 이 시작이 프리드리히 1세여. 이 프리드리히1세 에서 생기게 되는 롬바르디아 동맹 이라는게 유럽역사의 핵심이고, 스위스 란 나라는 이 롬바르디아 동맹 이라는, 프리드리히1세 부터 황제 진영에 대항하면서 교황과 손잡고 역시나 세속과 교회 사이에서 터진 지점이 이 겔피 기벨리니 란 이름이여 이게. 중요한겨. 저게 또한 십자군 시대인거고. 이게 얽히고 섥힌 듯 보여서, 일단 몰라 이런 이야길 우리는 전혀. 헌데 저 지점이 유럽사의 핵심이고 이게 이 하이미디벌 이 전혀 다른 인간 문명을 만든겨 이게.
아 은제 하냐 이거. 쉼. 대충이라도 하까 이거. 아 걍 대충 넘어가기엔 내맘이 허락하질 않으니. 몸은 치이고 생각은 많고 샹.
The Federal Charter or Letter of Alliance (German: Bundesbrief) is one of the earliest constitutional documents of Switzerland. A treaty of alliance from 1291 between the cantons of Uri, Schwyz and Unterwalden, the Charter is one of a series of alliances from which the Old Swiss Confederacy emerged. In the 19th and 20th century, after the establishment of the Swiss federal state, the Charter became the founding document of Switzerland in the popular imagination.
스위스 연방 헌장. 이 서기 1291년. 분데스브리프. 라는 동맹의 글자. 라는 카르테스.가 라틴어 로 된 문서 가 있어. 이게 위조인줄 알았다가, 바로 뒤에 카를4세 황제 도 이런 동맹금지 칙령을 발표하고, 저 문서의 탄소측정해 보니 저때여. 저건 진짜.로 판명을 해. 박물관에 있어. 우리 슈비츠 운터발덴. 세 캔톤이 합치고, 이게 아이트게놋센샤프트.의 시작이 되는데.
The Rütlischwur (German pronunciation: [ˈryːtliˌʃvuːr]) is the legendary oath taken at the foundation of the Old Swiss Confederacy by the representatives of the three founding cantons, Uri, Schwyz and Unterwalden, traditionally dated to 1307. It is named for the site of the oath-taking, the Rütli, a meadow above Lake Uri near Seelisberg. Recorded in Swiss historiography from the 15th century, the oath is notably featured in the play William Tell (Wilhelm Tell) by Friedrich Schiller (1804).
1291년 차터 에 대한 서약식 맹세식.이 뤼틀리슈부르.야. 뤼틀리 라는 초목초지.에서 세 캔톤의 대표들이 엄중한 제식을 하면서 의례를 하는거야. 서기 1307년. 이야. 16년 후.이고. 레전드 로 보는데. 질리스베르크. 근처의 우리 호수 변에 목초지 뤼틀리. 에서 했어.
CC BY-SA 3.0 저작소유권 이거 숫자들 표시된거만 올려라. 아 저거 이미지 다 지우느라 조뺑이침.
Karte Vierwaldstättersee
저 호수.가 카르테 피어발트슈테터지. 저게 영어로 포레스트 캔톤들.인겨. 숲으로 된 캔톤들 이란게 호수 이름이야. 이게 루전. 슈비츠. 니드발덴. 우리. 네 캔톤에 접한 호수여. 루선(루전) 쪽 호수를 루선호수. 우리 쪽 호수를 우리 호수 라고 이름을 따로 붙이기도 해. 저게 길게 늘어 뻗은 호수인데. 저기서 뤼틀리. 라는곳이 저 우리 캔톤.의 북쪽 호수 왼쪽에 있는 질리스베르크.라는 산에 있는 목초지.여.
아이트게놋센샤프트 를 시작하는 1291 세 캔톤의 헌장 동맹서.일때 이 셋이. 우리 운터발덴 슈비츠.여. 이 운터발덴.이 저 호수 아래 접한 곳이 니드발덴. 왼쪽이 오브발덴(니트 오프) 으로 뒤에 나뉜겨 이건.
저곳이, 프리드리히 쉴러 의 서기 1804년 연극대본 인 빌헬름 텔.의 무대야 저 지도가. 이 빌헬름 텔.이 뤼틀리슈브르.의 이야기여. 이 자유의 시인 쉴러.가 뷔르템베르크 태생에 바이마르 해서 죽는 독일땅 사람이, 자유 의 상징을 이 스위스 이야길 갖고 대본을 쓴거야. 왜 저런 일이 벌어졌는가 를 쓴 드라마여. 이걸 필히 읽도록 해. 짧아서 읽기도 쉽고.
저기서 저 캔톤들이 합스부르크 애들에 치여 살면서 당하고, 이에 반발하는 귀족들과 민들이 합세 하는거걸랑. 단지 빌헬름 텔.은 농민도 아니고, 사냥꾼이야. 영주가 정체성 묶으려고 모자를 걸어놓고 인사 하라는 거고, 이걸 빌헬름 텔.이 자기 아들 과 함께 지나가다가 엮이면서 본보기 보인답시고 아들한테 사과 올려 쏘란거걸랑. 빌헬름 텔은 화살 재수 좋게 맞힌거고 떨면서. 아들은 당당하게 믿고, 와이프는 빌헬름 텔 이 개개끼 감히 아들에게 화살을 쏴 해대민서 나중에 혼나. 여기서 주인공은 빌헬름 텔 이 아냐. 걍 저 중에 능력 잇는 사람일 뿐이고. 이 사람은 우리 캔톤 의 사냥꾼이고, 그래도 잡아 죽이려고 체포해서 영주가 자기 본토땅인 저 루전 캔톤으로, 우리캔톤에서 체포해서 가다가, 빌헬름텔이 꺾이는 저 지점 뤼틀리 있는 질리스베르크. 일껴 아마 폭풍만나서 배에서 탈출하걸랑. 아 예전에 봐서 긴가민가 인데 아마 맞을 듯.
스위스 란 곳이 가만 디다보면 호수 의 천국이여 저 꼭대기에서 조차.
저걸 꼭 보도록 해. 빌헬름 텔. 저런걸 봐야 역사가 제대로 읽혀. 이야기로 느껴저야 해 역사란건. 역사 는 논문이 아녀 이게. 역사는 이야기 여 이야기. 히스토리 의 스토리야. 역사 는 논문 의 건조한 논설로 보는게 아녀. 이야기로 보는게 스토리의 히스토리인 역사여. 이야기로 느껴져야지 인간사가 보이는겨 이게. 맥락이 그래서 보이는거고. 모든 사가들의 실패.는 헤로도토스 의 작명 히스토리.라는 스토리 를 망각하는데 잇어.
그래서, 저 호수를 중심으로. 세 캔톤이 시작해서. 바로 왼쪽 루선.이 들어오고, 슈비츠 위에 취리히.가 들어오고, 루선 왼쪽의 베른 이 가입을 하는겨.
Map of the theatre of the Swiss peasant war of 1653, showing the most important cities and places.
1653년 스위스 농민전쟁.은 피어발트호수 의 왼쪽 위에야. 루선 의 서북에 베른 캔톤. 졸로툰 Solothurn 캔톤. 아르가우. 요기서 터진거야. Reuss 로이스 강. Aare 아레강 계곡 지역이고. 이 두 강이 라인강 상류로 흐르는거고.
After initial compromises mediated by other cantons had failed, the peasants united under the treaty of Huttwil, forming the "League of Huttwil"
저 세지역의 농민들이. 베른 의 후트빌.에 모여서 동맹을 한겨. 후트빌 동맹.이야. 스위스 코트 를 상대로 농민들이 뭉친겨. 문제는 말이지. 세금이야 세금. 이 스위스 도 30년 전쟁 시작이 또한 여기여 Bündner Wirren 뷘트너 비렌. 이게 저 남쪽에 그라우뷘덴에서 터진겨 이전 썰. 카톨릭이 프로테스탄트에 대드는거고, 여기가 스페니쉬로드 길목이야. 스페인이 끼는거고. 그러면서 협정맺고 스페인이 저 그라우뷘덴 통해서 서쪽으로 여길 지나서 라인강을 타고 올러가는거걸랑.
물론 저 뷘트너 비렌.은 올드스위스연맹 인 아이트게놋센샤프트 에 안들어가 저때. 독자적 리그여 저긴. 즉 다른 나라여 저때는.
그라우뷘덴 의 세동맹.은 이게 나폴레옹 때 Cisalpine Republic 시스알파인 리퍼블릭.을 만들때 여기 들어가는겨 스위스 동남부는. 이 이쪽알프스 공화국.이 왼쪽에 피에몬테 파르마 를 두고 오른쪽에 베네치아 공화국 을 두고 이 사이에서 저 그라우뷘덴 의 세동맹에 밀라노 만토바 볼로냐 를 죽 잇오 라벤나 이으면서 새로 만든겨 나폴레옹이 이태리 원저하면서. 이때 스위스 의 아이트게놋센샤프트.는 헬베티이 공화국 으로 서는거고. 이 오른쪽 아래 그라우뷘덴.은 서기 1803년 에야 뤼틀리슈부르 시작 아이트게놋센샤프트 인 올드스위스 와 합치는겨 이게.
올드스위스동맹.은 1648년 30년 전쟁 끝날때. 정식으로 인정 받은겨. 이때도 그라우뷘덴 지역은 걍 느슨한 동맹이지 남이야 이건.
Rural and urban cantons had the same standing in the federation. Each canton was sovereign within its territory, pursuing its own foreign policy and also minting its own money. The diet and central council of the federation, the Tagsatzung, held no real power and served more as an instrument of coordination. The reformation in the early 16th century had led to a confessional division amongst the cantons: the central Swiss cantons including Lucerne had remained Catholic, while Zürich, Bern, Basel, Schaffhausen, and also the city of St. Gallen had become Protestant. The Tagsatzung was often paralysed by disagreements between the equally strong factions of the Catholic and Protestant sides
The Federal Diet of Switzerland (German: Eidgenössische Tagsatzung, IPA: [ˈtaːkˌzatsʊŋ]; French: Diète fédérale; Italian: Dieta federale) was the legislative and executive council of the Swiss Confederacy which existed in various forms since the beginnings of Swiss independence until the formation of the Swiss federal state in 1848.
올드스위스.의 지도체제.는 타크잣숭. 이야. 아이트게노지셰 타크잣숭. 스위스 의 원래 이름은 이 아이트게놋센샤프트.여. 얘들의 사법 행정 위원회.가 타크잣숭.인데. 이게서기 1500년 부터 1848년 까지고. 얘들 스위스도 내전을 하면서 이게 해산이 되고, 지금의 연방의회.가 선거야.
저 타크잣숭 체제.가 힘이 없었다는거지. 얘들은 합스부르크 와 싸우면서 독립을 이루고 그냥 지내면서 스페인 로드 통로 역할을 한거고. 여기서 그 이상 진도를 못나간겨 스위스는. 그냥 용병으로 계속 먹고 살고, 그 와중에 상업과 제조를 하고 농업을 이어간거야. 기본 바닥이 서로 달라. 루선 은 카톨릭. 취리히, 베른 바젤 샤프하우젠. 세인트 갈렌 은 프로테스탄트. 이 두종교간 다름 이 바닥에 있어서 중앙이 힘이 약했다는것도 있고. 어쨌거나 쟤들은 캔톤들의 나라야. 가장 강력한건 각각의 캔톤이야. 이걸 연방 차원에서 다루기기 쉽지 않은겨.
로칼 들이 쎄지는겨. 힘이. 이걸 연방 가운데서 통제를 못하는거고. 타크잣숭.이 힘이 없어. 그냥 느슨하게 관리해대면서, 옆의 캔톤 의 일들에 관여를 안하고 못하는겨 이게.
때마침, 30년 전쟁이 터진겨.
At its root, the peasant war of 1653 was caused by the rapidly changing economic circumstances after the end of the Thirty Years' War. The Swiss Confederacy had been spared from all belligerent action; the Swiss peasants generally had profited from the wartime economy as they had been able to export their agrarian products at higher prices than before. After the Peace of Westphalia, the southern German economy recovered quickly, the Swiss exports dwindled, and the prices for agrarian products dropped. Many Swiss peasants, who had raised mortgages during the boom at wartime, suddenly faced financial problems.
문제는 역시나 먹고사는거야. 스위스 컨페더러시 라는건 아이트게놋센샤프트.야. 동남부 세리그 그라우뷘덴지역.은 서기 1803년에 저 이름으로 들어오는거야. 여기는 30년전쟁에서 자유로운겨. 길 빌려주고 지나가는 군대들 피엑스 노릇하면서 먹고 산거고, 또한 그래서 여기만 온전하니까 대륙으로 수출하면서 오히려 훨 잘 살았어 전쟁때는. 높은 가격에 팔았어 대륙은 폐허가 되었으니. 베스프팔렌 조약 이후에, 독일지역이 경제 회복을 하면서, 이전 비싼가격으로 잘 살던 스위스 수출이 주저앉아. 농산물 가격이 떨어지고. 농민들이 윗동네 전쟁으로 돈빌려서 투자를 했는데, 갑자기 폭망하면서 돈줄이 마른겨 이게.
At the same time the war had since the 1620s caused significant expenses for the cities, e.g. for building better defenses such as new bastions. A significant source of income for the cantons ran dry: their financial means exhausted by the war, France and Spain no longer paid the Pensions, the agreed sums in return for the cantons providing them with mercenary regiments
더하여. 서기 1620년대부터, 스위스 도시들이, 30년 전쟁 후반기에 전장이 라인강상류 쪽으로도 막 올라오면서, 얘들도 건물 재건축을 하는겨 방어체제로. 배스티온들 성벽들을 새로 획기적 방어용으로 재건축을 하면서 돈을 많이 들여. 즉 세금을 더 걷어야 해. 총 대포가 급진전하면서 이전 성벽이 무용지물이여. 차원이 다른 돈의 전쟁 시대에 건물이 바뀐겨 이때. 더하여 스위스는 용병으로 먹고 살던 애들이야. 후반기로 갈수록 고용인이었던 두 나라도 용병돈을 제때 지급을 못해. 더하여 전쟁이 끝났어. 돈줄이 마른겨. 용병으로 먹고살던 이들도 끊긴겨 밥줄이. 연방에서 이들에게 돈을 대줘.
The population began hoarding the silver coins, and the cheap copper money that remained in circulation continually lost in purchasing power.[c] Zürich, Basel, and the central Swiss cantons therefore began already in 1623 to mint more valuable coins again. Bern and also Solothurn and Fribourg set a compulsory fixed exchange rate between copper and silver money instead, but this measure did not break the de facto devaluation. At the end of the war, the population thus faced both a postwar depression and a high inflation, combined with high taxes.[7][8][9] This financial crisis led to a series of tax revolts in several cantons of the Confederacy, for instance 1629–36 in Lucerne, 1641 in Bern, or 1645/46 in Zürich. The uprising in 1653 continued this series, but would take the conflict to an unprecedented level
사람들이, 은화.를 안쓰고 저축을 해. 그리고 싼 구리 동전을 쓰는거야. 취리히 바젤 가운데 캔톤들 은 이미 서기 1623년에 은화 수준의 동전을 새로 만들어 다시. 구리 동전은 가치가 없는겨 이건. 이 가운데 프로테스탄트 들은 시대에 따라 업그레이드 하면서 사는데, 외곽인 베른 졸로툰 프리부르.는 여기가 카톨릭 애들이야. 얘들이 은화 는 쌓고 구리동전 쓰면서 살다가 구리동전은 점점 가치가 떨어지고. 이걸 막기 위해서 고정환율제.를 이 캔톤들은 적용을 해. 이게 얘들 세 캔톤 만 세상에서 존재하면 이런게 가능한데, 국경없는 곳에선 저런 건 아주 무식한 개념이야. 상대가 니덜 후지니까 우리가 보호해주마 하는게 고정환율제 를 용인해 줄때 서야 가능한거야. 이게 중국이야 지금.
경제가 완전히 망가진겨 이쪽지역이. 즉 이쪽지역이 과거 체제를 못벗어나서 농업과 용병으로 먹고살다가 저지경이 되면서, 이게 터진겨. 또한 다른 지역들도 덜하지만 비슷한 압박이 들어왔던거고. 이게 가장 취약했던 베른 을 중심으로 터진겨.
Since the 15th century, the political power in the city cantons had become more and more concentrated in the hands of a few urban families, who increasingly saw their public offices as hereditary positions and who developed aristocratic and absolutist attitudes. Slowly, an urban oligarchy of magistrates had formed. This concentration of power in the city cantons in a small urban élite caused a veritable "participatory crisis" (Suter). The rural population increasingly was subject to decrees issued without their consent that restricted their rights of old and also their social and cultural freedom
캔톤들이, 연방 중앙 타크잣숭.은 힘이 없고, 각 캔톤 의 그 각각 로칼들이 경제적 부가 집중이 되는거야. 여전히 귀족 중심의 혈연 위주의 공무원들 공직은 편한거야 연금받아 사는거고. 그러면서 얘들이 점점 경제적 부가 쌓여. 싼값의 매물들을 얘들이 취하는거야. 이것에 대한 불만 이 쌓이는거고. 이게 결국 경제 사회 정치 문제로까지 번지면서, 계급투쟁이 되는겨. 이건 모랄.의 문제야 또한. 갓 독립한 스위스 아이트게놋센샤프트 애들이, 이전 신성로마의 중세 영주 체제에서 벗어난거지만, 그래봤자, 지들도 결국 영주화 된거야. 이름만 바뀐 것일 뿐이고. 인민 이 주인 이 되서 배부른 개돼지가 된거고, 갑자기 부가 늘어났어. 예전 영주들은 저럴때 민들에게 풀었어. 이런건 천년의 모랄의 쌓임에서 나온거야. 저때 갓 부자가 된 로칼 들이 저런 모랄을 갖추려면 천년이 더 필요한 거고. 저건 모랄 전쟁이야. 모든 이념 전쟁은 결국 모랄 의 타락에서 시작하는거고. 그래봤자 그걸 엎은 민들은 똑같은 야만으로 돌아가서 다시 지들만 배뚜드리고 사는거지.
이런 현상들은 이미 저때 다 겪은겨. 스위스는 저때 하는거고. 이런걸 이미 알아서 영국 애들은 안하게 된거고. 이런거 모르는 프랑스 애들은 어 스위스도 저런거 했어. 우리도 해야지 하면서 엎는 짓하면서 혁명으로 띄우는거고.
At the beginning of December 1652, Bern devalued its copper Batzen by 50% to adjust its face value to its intrinsic value to combat the inflation. The authorities set a term of only three days to exchange the copper coins at the old rate against more stable gold or silver money. Not many people could thus take advantage of this exchange offer, and for most—and in particular the rural population—half their fortunes just vanished.
시작은 경제고. 결국 인플레이션.이야. 인플레이션 은 머라고? 능력은 없는데 화폐만 많은겨. 저때는 불리온 코인 시대여. 이 불리온 코인은 그 금속 그대로의 비율로 쓰이는거야. 이건 걍 산수야. 전체 시장에서 교환되는 비율대로 쓰이는겨. 얘들은 이걸 무시하고, 구리 동전만 예전의 비율대로 시장에 돌린겨. 그것도 고정환율로. 시장에선 이미 반으로 가치가 떨어졌어. 즉 예전엔 은화 하나에 구리 열개면. 지금은 은화 하나에 구리 20개 인데, 똑같이 10개 로 규정을 해버린겨. 이걸 시장에 맞게 20개로 조정을 하면서, 구리동전 인 밧센 을 교환 수집해서 녹여없애고 다른 동전으로 만들어야 하는거야 중앙에서. 당연히, 민들은, 재산이 갑자기 반으로 확 줄은거야 저게. 없는데 더 없어진겨 이게. 저게 어차피 제대로 된 가격 이지만, 민 들은 그리 못 느끼는거야, 갑자기 자기 재산 날라간 마냥. 돈 에 대해 개념없이 애초에 캔톤 리더들이 고정환율제 정한 것 부터가 잘못된겨 저게.
얘들의 화폐 경제 니 경제 이론은 중세 천년의 저런 걸 다 겪고 나온거야. 저걸 뼛속 깊이 알어. 이전에 로마때부터 겪은겨. 쟤들 경제이론은 체득된 2천년의 역사여. 저 경제 개념에 대해 이념 애들은 미개한거야. 이 대표적인 애가 마르크스 류인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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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April 23, 1653, representatives of the people of the countryside of Lucerne, Bern, Basel, and Solothurn met at Sumiswald and concluded an alliance to help each other to achieve their goals. A week later, they met again at Huttwil, where they renewed that alliance and elected Niklaus Leuenberger from Rüderswil in the Emmental as their leader.[25]
On May 14, 1653, the peasants met again at a Landsgemeinde at Huttwil and formalized their alliance as the "League of Huttwil"
서기 1653년 4월말에 모이기 시작하는겨. 루선 베른 바젤 졸로툰. 대게 카톨릭 지역의 농민들에 용병했던 이들이여. 루선도 여기접한 외곽지역의 농민들이 여기로 오는거고. 그리고 5월에 만든게 후트빌 동맹.이야.
On May 18, 1653, the peasants delivered ultimatums to Bern and Lucerne and raised 16,000 troops.
바로 군대를 조직해. 1만6천명. 저기에 용병이었던 이들이 적극 가담하는거고 쎈거야 이건. 이 스위스 인간들은.
until they controlled it completely by June 20, 1653. Schybi was captured a few days later and incarcerated at Surs
한달 하고 끝난겨. 6월 20일에 최종 진압이 돼.
그리고, 스위스 연방의 타크잣숭.에서 엄명한게, 모랄 이야 모랄. 공직자의 모랄. 이게 근본적인 문제임을 알고, 이 프로테스탄트 들이 가장 잘한건 말야, 카톨릭 천년 동안 타락했던 모랄.을 이들이 잡은거야. 프로테스탄트 는 이점에서 역사에 의미를 둬야 해.
이걸로만 정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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