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tch position, summer of 1672: French-held areas in black

1672년 여름.의 프랑스 가 점령한 땅이야. 네덜란드가 북브라반트 랑 왼쪽 제일란트.랑 위 홀란트에 더 위 프리슬란트 만 남은겨. 오른쪽 아래 리부르크도 뺏기고 우트레흐트 도 먹히고. 이 오른쪽 헬더란트. 그 위 아이셀강 넘어의 오버아이셀. 위 드렌테. 까지 먹히고, 그 위 그로닝엔 도 위험한 상태고. 

 

북브라반트.를 안뺏긴듯 보이지만, 저 북브라반트 는 저때 자치주.야. 여긴 스타트하울더를 안둬. 얘들은 로마 카톨릭땅이야. 여긴 네덜란드 정체성이 약해. 저게 색깔은 안칠해졌지만 프랑스와 친한겨. 

 

이게 전쟁 시작하자 당해 에 저런 지경인겨 네덜란드가. 저기에, 해변에 제일란트 새우등 섬들로 잉글랜드가 쳐들어오는겨. 

 

1672년 4월 6일에 프랑스가 전쟁선포를 하고, 다음날 4월 7일에 잉글랜드가 전쟁선포 하고, 루이와 찰스가 이미 1670년 도버 비밀조약 맺고, 찰스도 개종하기로 하고, 이 개종껀은 백년 후에나 밝혀지는겨. 

 

저때 네덜란드는 끝났어야 하는거야. 이해를 람프야르. 구겨진 해. 비참한 해.라고 해. Rampjaar. 

 

프랑스는 바다를 몰라, 얘들은 육군이고. 그랑콩데 가 진군 시작하는게 5월 4일.이야. 이 그랑콩데.는 프롱드로 삐쳐서 스페인으로 갔다가, 스페인과 전쟁이 1659년에 끝나고, 프랑스로 온겨. 헌데 풀죽고 조용히 있어야 해. 그러다 폴란드 에서 킹이, 바싸 가문이 끊기고. Wiśniowiecki 비슈니오비에츠키 에 가고, 다시 킹 선거를 하는데, 콩데가 추천이 되는겨 폴란드 코트에. 콩데 부자 둘이. 그랑콩데가 킹 할 뻔도 했어 여기. 그러다 막판에, Sobieski 소비에스키 가문이 킹이 되는겨. 이 폴란드는 바싸 가 완전히 죽이고 나서, 물론 폴란드 사가는 그레이트 하다미 바싸를 추앙해 대고 지금도. 이후 비슈니오비에츠키 는 루떼니아 의 리투아니아고, 소비에스키 는 폴란드 귀족에, 다음엔 작센 선제후 베틴가문이 가고, 다시 폴란드에 작센에. 좋게 말하면 리퍼블릭 이여 저게. 저게 민주 주의 선거고. 

 

개판이 된거야 저건. 아무런 정체성이 없는겨. 다시 베틴가문에 다시 다른 폴란드 가문에 그러다가 지워진겨 저 폴란드 리투아니아 라는 나라는. 지도에서 사악 지워져. 

 

그랑콩데가. 저런 곳에 이름 오르내리며 쉬다가, 상속전쟁 1666-67 때 낑겨서 프랑슈 콩데 지역으로 전쟁하러 간겨. 칠팔년 만에 걍 눈치보며 지내다가 프랑크 이름으로 다시 시작을 해. 그러다가 1672년 네덜란드 쳐들어갈때, 본격적으로 다시 이름을 날리는겨. Sedan 세당, 아르덴 지역에서 출병을 해. 여긴 투렌 이 태어난 곳이야. 투렌이 여기 프린스 였고. 투렌이 거둔겨 이건 그랑콩데 쉴때. 그리곤 스네페 전투 Sneffe 1674 때 에노땅 저기가서 승리를 하고, 베르사유 궁전에서 루이한테 직접 환대 받으며 계단 오르는 그림을 그리는겨. 그랑콩데는 이 네덜란드 전쟁 으로 명예 회복이 되는겨. 그리고 다음해 투렌 죽고, 그랑콩데도 은퇴를 하는거야. 이 네덜란드 전쟁 와중에. 

 

Agreements with the Bishopric of Münster and Electorate of Cologne allowed French forces to bypass the Spanish Netherlands, by attacking via the Bishopric of Liège, then a dependency of Cologne (see Map).  

 

이때 프랑스 군은, 뫼즈강 줄기 따라 내려가면서, 리에주 지나서 가는겨. 길 빌려야 하는거고. 정명가도란건 흔한 일이여 이건. 머 조선사 들 이야기 보믄 감히 길을 빌려달라 이건 나라를 치겠다는거다, 유치한거야 저들은. 길 빌려줄수 있어. 유럽사 보면 걍 흔하고 흔한게 길 빌려주는겨. 이탈리아전쟁도 저런게 흔했고. 

 

쾰른 선제후령과 뮌스터 주교령도 프랑스 편이야. 길빌려 주고 땅 빌려주는겨 주로. 뮌스터 가 헬러란트 변경이고 여기서 헬더란트에 드렌테에 그로닝엔 치러가는 거점인거고. 쾰른땅이 으로 북브라반트쪽 진출하는 라인강 줄기고. 

 

여긴, 이전 쾰른 대주교 칼뱅 이 연애질로 여자한테 빠져서리 반란할때 비텔스바흐 가문이 갖고 와서 뮌스터도 여기꺼여. 리에주 주교령도 비텔스바흐 영향에 있는거고, 프랑스가 합스부르크를 미워하는거지 비텔스바흐를 미워하는게 아냐. 독실 카톨릭이야. 비텔스바흐는 합스부르크를 경계하는 애드리야. 그래서 얘들 둘이 이런식으로 친해져. 

 

네덜란드가, 아래 주교령들도 적이고, 프랑스 가 그랑콩데에 투렌이 쳐들어와 이거. 바다로는 잉글랜드가 쳐들어와. 

 

얘들은 이때 지워졌어야 해. 

 

William III (DutchWillem; 4 November 1650 – 8 March 1702) 

 

윌리엄3세.가 네덜란드 오렌지에서도 3세여. 침묵오렌지가 1세고, 얘 아빠 일찍 홍역 죽은이가 2세고. 잉글랜드도 정복왕 윌리엄1세 에 다음 아들이 2세.고 간만에 3세여. 스콧에선 2세여. 아빠 2세가 죽을때 엄마 마리 뱃속에 있었어. 엄마는 찰스 이름 쓰려는걸, 시엄마 아말리아가 빌렘. 윌리엄으로 한거걸랑. 시엄마는 독일땅 사람이고 네덜란드 정체성이 강해진거고, 마리는 잉글랜드가 찐해. 아빠 찰스 목짤려 충격먹고, 오빠 찰스2세 랑 남동생 제임스를 챙겨주면서, 네덜란드는 이 마리 를 싫어해. 마리는 저 남동생 제임스랑 같이 온 코트애랑 소문도 나고. 더하여 이 마리는 네덜란드 코트에 개입도 안하고 못해. 1660년에 죽어. 할머니 아말리아도 1675에 죽지만 이미 늙엇고. 

 

오렌지 윌리엄이 어리고, 세력도 없고, 힘이 없는겨. 얘가 스타트하울더 를 못받아. 

 

Johan de Witt (24 September 1625 – 20 August 1672)

 

이때 실세가 홀란드 그랜드 팬션어리, 요한 드 비트.야. 얘가 1653년 33세에 그랜드 팬션어리가 돼. 올덴바르네벨트 이후로 여긴 오렌지를 혐오하는 애들이야. 저건 왕조 다이너스티인겨.

 

the Staatsgezinde (Republican) faction of the ruling Dutch Regents such as Cornelis de Graeff and Andries Bicker reigned supreme

 

얘들은 리퍼블리칸. 공화주의자들이야. 선거로 뽑아서 하는겨. 스타트흐진데. 그라프 형제들과 사촌 비커 형제들이 주축이야. 여기에 드비트 형제들이 함께 해. 

 

The Act of Seclusion was an Act of the States of Holland, required by a secret annex in the Treaty of Westminster (1654) between the United Provinces and the Commonwealth of England in which William III, Prince of Orange, was excluded from the office of Stadtholder.[1] The First Stadtholderless Period had been heralded in January 1651 by States Party Regenten, among whom the republican-minded brothers Cornelis and Andries de Graeff and their cousins Andries and Cornelis Bicker, during the Grote Vergadering (Great Assembly) in The Hague,  

 

시클루젼 액트. 배격 격리 법.이야. 홀란드 가 네덜란드 세수 2/3 인 주축이고, 얘들이 1차 잉글랜드 전쟁 할때, 크롬웰이랑 한거잖오. 크롬웰이랑 죽이 맞은겨 이게. 앞으로 네덜란드는 오렌지 애들은 스타트하울더 를 못한다 는겨. 크롬웰 입장에선 저 오렌지는 이제 자기가 목짤라 죽인 찰스의 딸의 자식이고. 이때를 그래서 스타트하울더 없는 시기. 라고 해. 이걸 자기들 헤이그 회의체 에서 이미 1651년, 윌리엄2세 죽고 다음해 레겐텐 들 중 공화파들이 주장을 한거야. 그리고 1654년 에 크롬웰 이랑 조약할때 이것도 공식화 한거야.

 

그리곤 얘 교육을 재들이 하는겨. 왕조 교육을 안 시키고 걍 시민의식 교육을 시키는겨 쟤들이. 

 

다른 주들도 어찌할수 없는거고, 머 가장 돈많은 홀란드 애들이 저러겠다는데 머 어쩔겨, 오렌지는 꼬마고, 드비트 이하 애들이 공화제라고 하면서, 머 나름 잘 굴러가. 바로 2차 잉글랜드 전쟁도 잉글랜드 본토 해변으로 처들어가서 탬즈강도 들어가기도 하고, 바로 상속전쟁 벌어질땐 잉글랜드와 손잡고 스위든과 3자동맹도 맺는게 어 잘하는겨 저거? 해대다가. 

 

The Second Northern War (1655–60, also First or Little Northern War) was fought between Sweden and its adversaries the Polish–Lithuanian Commonwealth (1655–60), the Moscow Tsardom (1656–58), Brandenburg-Prussia (1657–60), the Habsburg Monarchy (1657–60) and Denmark–Norway (1657–58 and 1658–60). The Dutch Republic often intervened against Sweden in an informal trade war but was not a recognized part of the Polish–Danish alliance.  

 

저때 북유럽.에서 북의 전쟁이 또 벌어지는겨. 스위든. 카를10세.가 1654년 에 킹에 오르고, 이전 크리스티나 퀸.이 카톨릭개종에 정치에 관심없고, 야 기분좋~~다 하민서리 스스로 내려와. 그리고 카릉10세가 오르고서, 얘도 마스터 플랜.이 땅넓혀 돈 걷자.야. 얘가 즉위하자 마자 벌린게 북의 전쟁이야. 폴란드땅 먹자, 덴마크땅 먹자. 얘가 폴란드 코트를 다 점령해. 폴란드 전역을 다 갖고 오다가 밀린겨. 이때 네덜란드가 적극 가세하는겨 스위든의 힘을 막으려고, 이건 졸라 의미없는 판단이야. 저때 드비트 의 착각질이야  지가 머라고 스위든과 전쟁에 잉글랜드 프랑스 를 중재 어쩌고, 갓 생긴 애가 공화의 힘을 보여주려고  잘난척 여기저기 들 쑤시고 다닌겨 이게,

 

저 카를10세 저때 얼음바다를 건너서 코펜하겐을 포위흘 하고, 스카니아 라는 해변땅을 갖고 오고 드뎌. 그리고 사운드 해협으로 북해와 연결이 된겨 얘때. 덴마크는 이미 아무 힘이 없는 애들이고, 이때 적극적으로 훼방을 놓은게 네덜란드야. 처음부터 끝까지. 폴란드 땅에도 군대를 보내고, 바다에서도 막고. 

 

The naval Battle of the Sound took place on 8 November 1658 (29 October O.S.) during the Second Northern War, near the Sound or Øresund, just north of the Danish capital, Copenhagen.  

 

저 전쟁때의 1658년, 사운드 전투여. 네덜란드와 스위든의 해전이야. 전쟁 주인이 바뀐겨 이게 ㅋㅋㅋ. 네덜란드가 이겨 어쨌거나. 그리고 얘들이, 스위든의 북미 식민지 땅인 뉴스위든,도 갖고와. 헌데 갖고 오면 머해, 결국 뒤에 잉글랜드 애들한테 모두 뺏기는걸 이전 뉴네덜란드랑 같이.

 

스위든 도 프랑스와 손을 잡는겨. 어차피 네덜란드는 저때부터 웬수가 된거걸랑. 그러면서 스위든은 포메라니아 에서 프러시아 브란덴부르크 와 싸우는거고. 

 

저때 최강의 애들이 잉글랜드 스위든 인데, 얘들은 프랑스 편을 들고. 네덜란드는 신성로마제국 스페인 머 없어도 되는 떨거지들이여 지원군이. 이제 저들 합스부르크는 무의미한 존재야. 30년 전쟁 이후로는. 

 

The Latin phrase bellum se ipsum alet (English: The war will feed itself) or bellum se ipsum alit[1] (English: The war feeds itself, FrenchLa guerre doit se nourrir elle-même),[2] and its German rendering Der Krieg ernährt den Krieg[3] describe the military strategy of feeding and funding armies primarily with the resources of occupied territories. It is closely associated with mass starvation in the population of these territories. The phrase, coined by Ancient Roman statesman Cato the Elder, is primarily associated with the Thirty Years' War (1618–1648).  

 

카를 10세.도 그렇고, 루이14세도 그렇고. 전쟁이 돈이다 라는 개념을, 유럽대륙 내부 에서 한겨. 이걸, 벨룸 세 입숨 알렛. 전쟁이 먹여살려준다. 라는 대카토 가 작성한 개념이야. 이건, 30년 전쟁과 상관이 없어. 얜 저걸, 전쟁하면서 약탈하면서 먹여살리는 병참 개념으로 지금 저걸 해석한거고. 저때 루이나 카를은 전쟁으로 나라의 부를 늘린다는 개념이야. 이건, 고대 와 중세의 개념이야. 이건 해외 식민지 쟁탈전 용어고. 

 

유럽애들은 자기들 땅에서는. 저 개념으로 전쟁을 안해 16세기 이후엔. 가장 뒤쳐진게 루이14세여. 이 개념에 계속 꽂힌게 스위든에 덴마크여 다시. 얘들이 후져진 이유야. 

 

저 개념으로 월드워 해서, 결국 다시 다 돌려줬어. 돌려준것도 유럽애들이 역사적으로 유일 한거야. 받는 놈들은 당연한듯 받는거고. 참 애들이 고마운걸 모르는건데. 

 

저때 망했어야 해 네덜란드는. 시작하자 마자 공포여 저건. 

 

없는 이들이 잘난 척 위대해 어쩌고 대는게 가장 한심한겨. 드 비트 공화주의자 들이 이전의 스타트하울더 오렌지 보다 더 잘난듯 하려고 저리 설쳐댄거걸랑. 저게 완전히 자충수가 된거야. 준비를 하고 내부를 다질 시간에 적만 키운겨 저게. 머 결국 결과론적 얘기겠지만.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서, 저 공화주의자 들을 다 몰아내. 드비트 형제들을 죽여. 그리고서, 윌리엄 오렌지를 스타트하울더 로 세우는겨. 윌리엄이 7월에 올라와. 1672년. 22세야. 라이덴 대학 등 교육 만 계속 받아 온거고. 그리고 다음달에 드비트 형제를 죽여. 

 

The presence of a large French army in the heart of the Republic caused a general panic, and the people turned against De Witt and his allies.[39]

On 4 July, the States of Holland appointed William stadtholder, and he took the oath five days later.[40] The next day, a special envoy from Charles II, Lord Arlington, met William in Nieuwerbrug and presented a proposal from Charles  

 

이 과정이, 윌리엄이 전쟁으로 갖고 온게 아니라, 사람들이 확 돌아선겨 홀란드에서 조차. 그래서 홀란드 주에서, 윌리엄을 다시 스타트하울더로 임명을 한거야. 그리고는 지들이 드비트를 죽인겨. 

 

저 처음 지도를 보면.  Flevoland 플레볼란트 라는 주.는 저때 없는겨. 자이더지 라는 자이더 해.여. 저지도 보면. 암스테르담 오른쪽 아래부터, 우트레흐트 해서 비야넨에서 죽 아래 까지 를 프랑스애들이 못 넘어간거야.

 

저기를, 네덜란드 워터 라인.이라고 해. 

 

The Dutch Water Line[1][2] (DutchHollandsche Waterlinie, modern spelling: Hollandse Waterlinie) was a series of water-based defences conceived by Maurice of Nassau in the early 17th century, and realised by his half brother Frederick Henry. Combined with natural bodies of water, the Water Line could be used to transform Holland almost into an island. In the 19th century, the Line was extended to include Utrecht.  

 

이 낫사우 모리스.는 정말 위대한 인간이야. 침묵 오렌지 보다 천만배 위대한 인간이 이 아들 모리스.야. 걸어다니는 사관학교여. 군사학 이 문명의 최고 중심이야. 사람을 어떻게 부리는가, 어떻게 배치하고, 용병술 이 중요한게 아니라, 이게 중요한게 아녀. 건물을 어떻게 설계 하는가, 병참 을 어떻게 확보하는가, 로지스틱스 라는 물류. 지금 택배망에 물류창고 거점에, 라우팅 이라는 경로 등이 모두 이 군사학 에서 나온거야. 우리가 지금 쓰는 대부분 현대문명은 이 군사학 군사 엔지니어링 이여. 지리학 수로학 도 기본이고, 수학 도 기본에, 공학 이란 엔지니어링에. 모든 학문을 총괄하는게 이 군사학이고 전쟁이야. 카이사르의 전략은 둘째치고 카이사르의 아키텍쳐 능력이 최고인 이유고. 

 

저 더치 워터 라인 조차. 모리스 가 시작한겨. 얘들 중심이 암스테르담 이고 헤이그 이고 이 아래 로테르담 이걸랑. 

 

바다에서 오는건 자신있는데, 육지에서 오는건 어쩌냔 말이지. 이걸 저걸로 막는겨. 

 

 

암프테르담 이 가장 중요한 상업도시야. 여기를 막기위해 그 오른쪽 자이더지.의 해변 도시에서 죽 일자로 내려오면서. 우트레흐트 서쪽에서 Gouda 가우다. Gorinchem 고르킴. Dordrecht 도르드레흐트. 를 지나는 수로 를 만든겨. 모두 지금 남홀란드 주.의 도시들이고. 이 아래 도르드레흐트 아래 강이 Waal 바알 강이야. 

 

이 바알 강이. 라인강이 네덜란드 리부르크와 헬더란트 사이로 들어오면서 하류가 이름을 잃고 사방으로 흩어지는겨 물줄기들이. 이때 반 이상의 가장 큰 줄기가 바알 강이야. 

 

이 바알강 물줄기를, 모리스가 위로 튼거야. 저길 거대한 호수 들로 만든겨. 그 호수 주변과 호수 안에, 도시들을 만든겨 이게. 

 

미친겨 얘 이거. 

 

저건 성벽 주위의 해자 라는 물로 막는것과 차원이 다른겨 이건. 해자 라는건 성벽에서 다리를 놓고 건널 폭 이야. 저건 말이지, 배를 타고 육지랑 만나는겨. 그 배도, 평저선 이어야 해. 골때리는 생각이야 참 기가막혀. 파인 일반 배는 못 지나가 저길. 성으로 접근을 못해. 

 

저때는 우트레흐트 에 저걸 안둔겨. 그래서 프랑스애들이 우트레흐트 는 먹은거고. 

 

저게 프랑스 1789 때 프랑스애들이 올때는 쓸모가 없게돼. 저게 얼면 무의미해지는겨. 그래도 어는걸 활용해서 또 얼음 깨는 전략으로 가는거지만. 저걸 19세기에 다시 개조해. 

 

우트레흐트 도 막는개념으로 가는겨. 더하여 아래 Gorinchem 고르킴 도 막는 일자 개념으로 저게 오른쪽으로 선을 이동을 하는거야. 바알 강 물줄기를 저기로 다시 틀면 되는거고.

 

저 도르드레흐트.는 이전 조지몽크 때 나온, 몽크가 저기 시장 하려다가 텃세땜에 못하고 잉글랜드 간거고.

 

Menno, Baron van Coehoorn (March 1641 – 17 March 1704)

 

저걸, 낫사우 모리스.와 동생 프레데릭 헨리.가 이어서 하고, 프랑스에 보방 이 있다면, 네덜란드엔 쿠호른 남작 메노.가 있어. 얘가 보강하면서, 도시설계 성벽 설계 에 병법을 위한 설계를 하는겨. 

 

루이14세가, 저걸 결국 못 넘어가. 저게 대체 머여 저거 해대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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