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an-Baptiste Colbert (French: [ʒɑ̃.ba.tist kɔl.bɛʁ]; 29 August 1619 – 6 September 1683) was a French politician who served as the Minister of Finances of France from 1661 to 1683 under the rule of King Louis XIV.
장바티스트 콜베르. 루이14세가 마자랭 죽고 1661년 23세에 제대로 시작하면서, 자기 사람을 심어. 가장 핵심이 돈이여 돈. 얜 전쟁을 돈 버는 수단으로 본거고. 이건 리슐리외 와 마자랭을 이은겨. 이 둘의 문제는, 컴퍼니를 몰랐어. 세금만 쪼은거고.
루이도 전쟁을 해야하는데, 돈이 없어. 재무구조 개선을 해야 하고, 국가 기본 체제를 돈 버는 구조로 가야 해. 전쟁해서 땅따먹어 돈갖고 오기 전에 일단 돈이 있어야 하걸랑. 나이 42세의 장바티스트 콜베르.를 기용해.
평생 일만 한 사람이야. 22년 동안 죽을때까지 재무장관이야.
Colbert worked to develop the domestic economy by raising tariffs and by encouraging major public works projects, and to ensure that the French East India Company had access to foreign markets, so that they could always obtain coffee, cotton, dyewoods, fur, pepper and sugar. Colbert worked to create a favourable balance of trade and increase France's colonial holdings.[citation needed] As there was slavery in the colonies, Colbert also drafted the Code Noir which was to be promulgated two years after his death.[1] In addition, Colbert founded the French merchant marine.
콜베르.가 시작한게 컴퍼니야. 늦은겨. 얘가 프랑스 경제를 근대화 한거야. 너무 늦은겨 이게. 프랑스 동인도회사 서인도회사 를 콜베르가 세운겨. 1664년 에 두개를 동시에 세운겨. 서인도회사는 아메리카 캐리비안 겨냥한건데, 바로 망해 저건. 동인도 회사가 좀 오래 갔지만,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 섬.에, 인도에 가장 늦게 들어가서 기웃대다가 걍 끝난겨 해외는. 아 이 멍청한 프랑스들.
관세 란것도 올리는겨 이때. 기간산업도 얘때서야 하는겨. 얘들은 바다도 몰라. 헨리7세는 조선소 를 세워 큰배 만들기 위한. 아 얘들은 한심해 이게. 그래서 백년 후에 프랑스 대학살을 겪는겨, 그걸 대혁명으로 조작질 해대고 지금도. 또한 제조업을 키우는겨, 자기 산업 키우려고 경쟁 품목은 수입규제를 하고. 섬유직조 산업도 플랑드르 이기려고 지원하고. 경제가 중요함을 알고 이때부터 얘들은 시작하는겨. 조오올라게 늦었지만.
Colbert issued more than 150 edicts to regulate the guilds. (One such law had the intention of improving the quality of cloth. The edict declared that if the authorities found a merchant's cloth unsatisfactory on three separate occasions, they were to tie him to a post with the cloth attached to him.)
콜베르는 길드들을 규제하기 위해 150개 이상의 법안들을 만들었다. 무식한 짓하는거지. 상업의 기본을 모르는겨. 공산당이지 이게. 의도는 품질육성 이걸랑. 상인의 만든 옷감이 세가지 측정기준에 미달하면, 그 옷감으로 그 상인을 푯대에 묶었다.
아 한심한 프랑스.
The Code Noir (French pronunciation: [kɔd nwaʁ], Black Code) was a decree originally passed by France's King Louis XIV in 1685. The Code Noir defined the conditions of slavery in the French colonial empire, restricted the activities of free Negroes, forbade the exercise of any religion other than Roman Catholicism, and ordered all Jews out of France's colonies.
코드 느와르. 흑인 법. 1685년. 콜베르가 초안만들고 죽고나서 나온겨 2년 후에. 프랑스 식민지의 흑인들 규제법이야. 로마 카톨릭 믿게 해야 하고, 프랑스 식민지에서 유대인들 금지.
Nicolas Fouquet, marquis de Belle-Île, vicomte de Melun et Vaux (23 February 1615 – 23 March 1680) was the Superintendent of Finances in France from 1653 until 1661 under King Louis XIV. He had a glittering career, and acquired enormous wealth. He fell out of favor, accused of peculation (maladministration of the state's funds) and lèse-majesté (actions harmful to the well-being of the monarch). The king had him imprisoned from 1661 until his death in 1680.
니콜라 푸케. 벨일 후작. 멜랑 과 보 의 자작. 재무의 감독관 인데, 마자랭 때 임명되고, 루이가 계속 쓴겨. 콜베르 손 좀 덜게 해줄라고. 헌데 이사람이, 삥땅을 많이 치고 떼돈을 벌어. 공금횡령죄로 바로 깜빵가. 이사람이 수감된 곳이 이탈리아 피네롤로.야. 여기서 마드모아젤 우리누나가 사랑에 빠진 Lauzun 로장 을 만나는거고, 로장이 푸케 를 시중드는 아이언 마스크 철가면을 본겨. 할때 이 니콜라 푸케.이고. 루이가 푸케가 얼마나 싫었던지, 저 자리 슈퍼인텐던트 라는 재무감독관 직책을 아예 없애버려.
Jean-Baptiste Poquelin (baptised 15 January 1622; died 17 February 1673), known by his stage name Molière (UK: /ˈmɒliɛər, ˈmoʊl-/, US: /moʊlˈjɛər, ˌmoʊliˈɛər/,[1][2][3] French: [mɔljɛʁ]), was a French playwright, actor and poet, widely regarded as one of the greatest writers in the French language and universal literature.
Jean Racine (French: [ʒɑ̃ ʁasin]), baptismal name Jean-Baptiste Racine (22 December 1639 – 21 April 1699), was a French dramatist, one of the three great playwrights of 17th-century France, along with Molière and Corneille, and an important literary figure in the Western tradition. Racine was primarily a tragedian, producing such "examples of neoclassical perfection"[1] as Phèdre,[2] Andromaque,[3] and Athalie.[4] He did write one comedy, Les Plaideurs,[5] and a muted tragedy, Esther[6] for the young.
Pierre Corneille (French pronunciation: [pjɛʁ kɔʁnɛj]; 6 June 1606 – 1 October 1684) was a French tragedian. He is generally considered one of the three great seventeenth-century French dramatists, along with Molière and Racine.
장바티스트 포켈른. 일명 몰리에르. 장 라신. 피에르 코르네이. 17세기 프랑스 최고의 극작가.야. 이 셋의 글들을 다들 보도록 해. 몰리에르 의 타르튀프 하나 봤는데. 저들 목록이 많아. 헌데 저것도 최근에야 번역이 되서 나오는겨.
저 셋이 모두 루이 14세때 인간들이고. 프랑스의 문학과 건축이 이때야 터지는데, 물론 데카르트의 여진이고, 이 프랑스는 저 다음에 루소 와 볼테르 같은 후진 애들의 촌스런 인민 자유가 나오는겨. 후져 여긴. 루이14세 때 저걸 더 나오도록 확장했어야 하는데, 저들은 걍 이전 갈리아 게르만이 배운 로마의 끝발이야. 프랑스의 가장 위대한 작품은 16세기 인간 프랑스와 라블레.의 가르강튀아 팡타그뤼엘 시리즈여. 생각해보니 진짜 저 자유분방함은 단연 최고야. 지금 프랑스의 자유는 이 사람의 기운이고. 이게 제대로 못 이어가진거야 프랑스는. 이전의 기사도 작품들에. 이 위대한 프랑스 여야 할 땅이 루이14세에 끝난겨. 저런 루이를 저들은 위대한 인간이라 떠받드는거고.
저 셋.의 작품들은 번역된거 족족 다 보도록 해. 난 안볼래. 구찮아. 타르튀프 하나 본게 어디냐.
Sébastien Le Prestre de Vauban, Seigneur de Vauban, later Marquis de Vauban[1] (1 May 1633 – 30 March 1707) commonly referred to as Vauban (French: [vobɑ̃]), was a French military engineer, who participated in each of the wars fought by France during the reign of Louis XIV.
세바스치앙 르 프레스트흐 드 보방. 세뇨르 드 보방. 나중 보방의 후작. 줄여서 보방. 이라고 해. 보방 은 리옹 위 마송 의 왼쪽의 마을이야. 이사람이 단연 루이14세의 사람들 중에 최고야.
Le Vau, Mansart, Claude Perrault, and Le Nôtre. 루이때 건축가들이, 르 보, 몽사르, 클로 페로. 르 노트르. 가 다들 짱짱한 건축가 설계사들이걸랑. 저들 보다 단연 돋보이는 사람이 군인이자 건축 디자인 하는 보방 이야.
유럽에 요새 사진 유명한 건, 이때 이 보방이 설계한겨. 총과 대포가, 특히나 대포가 본격적으로 개발이 업그레이드가 되고 총싸움이 되면서, 설계가 달라지는겨. 도시 설계 하고 외곽을 성벽으로 쌓는걸 달리 해야 하고. 이건 타운 설계 자체도 달리 가야 하는겨.
A bastion or bulwark 배스티온, 불웍 이라는 성벽 마디부분 공격 지점 설계.나 저걸 더 확장을 한 ravelin 래블린 이란 요새 거점.을 키우는겨. 공격 지점 이자 방어지점을 안의 도시 건물들과 떨어뜨리는거고. 대포 를 막으려 비탈을 틀리고.
보방.의 설계 원칙을 갖고, 이걸 네덜란드가 써먹은게 네덜란드 Bourtange 부르타녜. 요새여. 그로닝엔.에 있는. 저런 요새 설계는 이 보방이 만든거야.
성벽 공격과 방어가 전술이 달라지는겨. 군사 전략이 달라지고, 이를 위한 건물 설계가 달라져.
공학 이란건, 전쟁의 기술과 함께, 발전을 한거야. 인간의 문명은, 전쟁이 만든겨 이게. 전쟁으로 살아남기 위해서, 뇌를 적극적으로 써야만 했던거고.
As he grew older, Vauban took an increasingly broad view of his role; his fortifications were designed for mutual support, so he built or planned infrastructure, including roads, bridges and canals. They required supplies, so he prepared maps showing location and quantity of resources eg forges, forests, farms etc, even instructions on how to breed pigs. This inevitably led onto taxation;
전쟁 무기 개발 공급 도 돈이고 군인들 돈 주는것도 돈 돈 돈 이지만, 저런 건물 다시 짓기도 돈이야. 저런 건물은 생짜로 다시 짓는겨. 더 많은 돈이 필요해. 세금을 올려야 해.
by 1705, the French economy was exhausted, a combination of the cost of Louis' wars and the impact of the Little Ice Age, a period of colder and wetter weather during the second half of the 17th century that drastically reduced crop yields.[27] The Great Famine of 1695-1697 killed between 15-25% of the population in present-day Scotland, Estonia, Finland, Latvia, Norway and Sweden, with an estimated two million deaths in France and Northern Italy.[28]
1705년 경. 프랑스 경제는 바닥이 났다. 루이 전쟁들과 소빙하기 영향이 겹치면서 더 최악이었고 농작물도 기근수준으로 줄어들다. 대기근 시기 1695-97 년간 지금 스콧 에스토니아 핀란드 라트비아 노르웨이 스위든 인구의 15-25 퍼가 죽었다, 프랑스와 북이탈리아에서 2백만명이 기근으로 죽은것으로 보이다.
경제는 바닥이고, 돈은 없고. 돈 더 갖고 오기 위해서 전쟁하는거고. 이 루이는 악순환의 연속이야 이게.
Shortly before his death in 1707, he published La Dîme royale, which documented the economic misery of the lower classes. His upbringing made him unusually sympathetic to the impact of war on the poor; on one occasion, he requested compensation be paid a man with eight children whose land was taken to build one of his forts.[29] However, it should also be noted his siege works required the conscription of large numbers of unpaid workers, with severe punishments for those who tried to evade service; 20,000 at Maastricht in 1673 and Mons in 1691, 12,000 at Charleroi in 1693
보방.이 1707년 죽기 전에. 라 딤 로얄.을 출판했다. 이건 저소득충의 경제적 비참함을 기록하다. 그도 없이 자라서 이 가난한 이들에게 감정이 특별했다. 요새 건축을 위해 토지가 국유화된 사람들에겐 보상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허나 그의 설계 자체가 많은 무노동 노동자들을 필요할 수 밖에 없었고, 대부분 죄인들을 활용한거고. 탈출자가 수만 인거고.
Vauban's solution was to levy a flat 10% tax on all agricultural and industrial output, while eliminating tax exemptions, which meant the vast majority of the nobility and clergy paid no taxes. Although confiscated and destroyed by Royal decree, the use of statistics to support his arguments ... establishes Vauban as a founder of modern economics and a precursor of the Enlightenment's socially concerned intellectuals.[31]
보방이 10퍼센트 세금을 징수해. 모든 농작물과 산업상품들에. 이게 부가세 의 시작이여. 세금 면제는 없어. 귀족과 성직자는 면세자들이었어. 이제 면세 혜택이 없어. 보방은 현대 경제학, 계몽시대의 사회적 어쩌고 인텔리겐차의 선구자 로서 역할 저쩌고.
이 세금체계를 디다봐야하는데, 기본적으로, 이때부터, 영주 를 건너뛰고, 킹덤 중앙 코트에서 일률적 세금을 저리 걷게 되는겨. 그래서 쟤한테 현대 경제학의 시작 이란 타이틀을 주는 애가 있는거고. 저소득자 우대 개념도 시작했다는거고. 세제평등 시작 저쩌고 도 했다는거고.
Menno, Baron van Coehoorn (March 1641 – 17 March 1704)
프랑스에 보방.이 있다면, 네덜란드에는 쿠혼 남작 메노. 가 있어. 메노 판 쿠호른.
네덜란드는 저때 인물들이 너무 많아.
조선 은 인물이 단 하나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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