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후반부터, 판이 흔들리는건, 잉글랜드와 네덜란드의 본격적인 등장이고. 이 둘은 상인들이 만든겨 바닥에. 잉글랜드는 1215 마그나 카르타 부터 배론들이 만든겨. 힘이 더 아래로 흩어지면서 바닥에 뿌려진겨 이게. 그리고 등장하는게 인클로저 13세기야. 그리고 헨리7세가 이걸 받아서 상업을 키워. 튜더 가 본격 등장하면서. 잉글랜드는 용병의 회사 컴퍼니.가 상업의 회사 컴퍼니로 변천하면서 이 컴퍼니들이 만든겨. 이게 지금까지도 이어간거고 이게 미국을 만든거고.
네덜란드는 머냔 멀이지 저게.
80년 전쟁에 30년 전쟁.이 같이 마무리가 되고, 프랑스는 계속 스페인과 전쟁하고 1659년 까지. 이때 잉글랜드는 내전에 크롬웰이 등장하면서 승기를 잡고, 찰스2세 가 걸리고, 이 찰스 문제를 해결하면서, 동시에 무역상대가 된 네덜란드를 치는겨. 이게 1차 잉글랜드 네덜란드 전쟁 1652-54.야. 잉글랜드가 이기고 찰스2세는 풀죽고 크롬웰이 로어드 프로텍터 로 정식으로 올라가서 권력을 잡고, 프랑스는 여전히 스페인과 전쟁 중일때 잉글랜드가 필요해서 파리에 와있는 찰스2세를 내쫓고 크롬웰과 손잡아서 더둔스 전투, 됭케르크 에서 스페인을 내모는겨 그러면서 프랑스-스페인 전쟁을 끝내 1659.
잉글랜드에 찰스2세가 복귀 되고, 다시 네덜란드여, 경제전쟁이여 이건. 바다의 두 패권이야. 2차 전쟁이야. 1665-67. 이제 유럽의 실세는 잉글랜드 네덜란드여. 저 둘 싸울때 루이14세가 요 틈에 상속전쟁을 하는겨. 1667-68. 루이의 전쟁들이란, 스페인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야. 일평생.
상속전쟁으로 루이의 프랑스가 부담되는겨, 잉글랜드와 네덜란드가. 이 둘이 손을 잡아. 뒤에 스위든은 겉절이고. 그리고는 스페인을 설득해서 니덜 도와줄테니까 포르투갈 독립 인정해라. 리스본 조약.이야. 1668. 저게 1월 에 2월 이야. 스페인을 울며겨자먹기로 포르투갈을 인정하고, 저들이 뭉친 걸 프랑스는 엄두가 안나는겨. 상속전쟁을 마무리해.
루이가 열받았어, 네덜란드한테. 30년전쟁때 우리가 안들어갔으면 니덜은 독립못한거야. 헌데 저놈의 네덜란드가 3자동맹을 주도한겨 홀란드 드비트.가 중심이걸랑. 얘가 감히 우리 뒤통수를 쳐? 이건 완전히 루이의 개인적 감정이여. 프랑스 코트애들의 열받음이고. 정명가도 식으로 스페니쉬 플랑드르 길을 빌리면서 네덜란드로 쳐들어가는겨. 이게 프랑스 네덜란드 전쟁이야 1672-78
이때, 루이14세가 자기 사촌 찰스2세를 꼬셔 먼저. 도버 조약 1670. 찰스도 바닥이 카톨릭이야. 조지몽크 가 올려줬어 러블리 찰스 행세했지만, 팔리어먼트 세상인게 싫어 얜. 더하여, 2차 네덜란드 전쟁시 네덜란드 애들이 켄트 앞바다, 탬즈 입구까지 왔었어 메드웨이 침략 이라는게. 열 받는겨 이게. 아무리 프랑스 상속전쟁으로 프랑스가 부담된다고 홀란드 드비트.가 꼬셔서리 잠시 손잡았지만, 네덜란드에 악감정이 있는겨. 헌데 돈은 없어. 팔리어먼트도 이게 파가 갈리걸랑 반네덜란드 친네덜란드. 더하여 네덜란드도 친잉글랜드 반잉글랜드.
France declared war on 6 April, followed by England on 7 April.
프랑스가 1672년 4월 6일.날 전쟁선포 하고, 다음날 잉글랜드가 전쟁선포를 해. 프랑스-네덜란드 전쟁.과 3차 잉글랜드-네덜란드 전쟁.은 동시에 터진겨. Rampjaar 저게 네덜란드에서 람프야르.라는 비참한 해.야. 1672년. 8월에 드비트 형제를 죽이는겨 민심이 반란하고, 대체 외교를 어떻게 했길래 이럴수가 있니. 그리고 다 큰 오렌지 윌리엄3세.가 홀란드 권력을 갖고와서, 저 두 전쟁을 이기거나 버티는겨 네덜란드가.
음청나 이 네덜란드. 잉글랜드는 1672-74. 프랑스는 1672-78.
네덜란드를 못 갖고 온 루이가, 다시 돌아와서 한가한 상태에서 그동안 전쟁의 변경 점검을 하는겨.
루이의 프랑스가 이전 30년전쟁과의 조약, 이어서 스페인과의 전쟁 1659년 마무리 조약.에 상속전쟁 조약.으로 땅이 넓어졌어 변경이. 헌데 이 변경 지역이 애매해. 그 조약이 정확한 경계가 어디까진겨. 더하여, 우리는 니덜 프랑스 안갈래. 거부하는 변경을 다시 재확인 도장찍으려고 리유니온 전쟁.을 시작해. 1683-84
신성로마는 1683년에 오스만 투르크와 대투르크 전쟁 시작하는해야. 비엔나를 다시 쳐들어와 저때 오스만이. 이 상황에서 신성로마제국 변경을 다 갖고 오고 조약을 맺어 끝내는겨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 는.
그리고, 루이는 다시 재정비하고, 라인강을 건너는겨. 이전 네덜란드 실패한걸 다시 갖고 오려는거고, 신성로마땅도 더 갖고 오면서 자기 능력 알리는거고. 모든 유럽들이 뭉쳐. 이게 9년 전쟁. 대동맹 전쟁이여 1688-97. 조약으로 알자스는 스트라스부르와 함께 프랑스가 갖고 오고 라인강상류 넘어는 다시 주고, 로렌 룩셈부르크 헨트쪽도 돌려줘. 네덜란드는 돈을 받고.
그리고서 카를로스2세 가 죽어. 스페인 후계자전쟁이야. 1701-14. 이 와중에 요세프1세 황제가 죽고, 동생 카를6세.가 신성로마 황제 하고, 스페인은 프랑스 랑 인연끊고 가기로 하고. 다음해 루이14세는 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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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가 스페인과 신성로마제국의 합스부르크를 상대로 땅따먹기 하는거걸랑. 여기에 네덜란드는 괜히 끼인거고.
저때 메인 스타는, 프랑스도 잉글랜드도 아녀. 네덜란드여. 이게 골때리는겨 이게. 기적이여 기적. 이걸 네덜란드의 기적 이라고 해. 17세기 네덜란드 황금시기를.
The Dutch–Portuguese War was an armed conflict involving Dutch forces, in the form of the Dutch East India Company and the Dutch West India Company, against the Portuguese Empire. 1601–1663
네덜란드가 저 와중에 하던 일이, 포르투갈과의 전쟁 1601-63 이야.
포루투갈이 1640년에 독립 선언하고서 이게 나중 1668에 인정이 되서 후대에 이름을 네덜란드-포르투갈 전쟁.으로 명명한거고. 포르투갈이 스페인과 합쳐졌지만, 코트는 포르투갈이 운영이 되는거고, 포르투갈 코트애들 중심으로 이전의 식민지를 운영을 하는거야. 포르투갈이 1640년에 독립선언한건, 무엇보다도, 자기들 식민지가 훼손이 되는겨 이게. 그만큼 스페인이 신경을 안쓰고 못쓰는 것에 대한 반발이야 얘들은 30년 전쟁으로 바빴걸랑, 포르투갈 식민지까지 신경쓸 여력이 없는거고, 포르투갈 코트에서 자체적으로 막는건데, 이게 의사결정이 자기들 스스로 안되는거걸랑 그만큼 힘이 안 나오는거고, 아예 독립을 선언하면서 네덜란드에 막는거야. 스페인도 또한 저런 포르투갈 독립에 여전히 신경을 못써. 프랑스와 1659까지 전쟁으로 힘들고, 네덜란드도 잉글랜드랑 부닥치는거고. 이게 1663년에 마무리가 되는건데.
그래서, 포르투갈 코트에서 가장 사악한 놈들이 되는게 네덜란드야. 포르투갈은 잉글랜드랑 원래 친한거고, 스페인에 들어갔지만 잉글랜드는 포르투갈보다는 스페인배를 공격하고, 그러다 제임스가 펠리페랑 협정을 맺어 사략질 않겠다고. 네덜란드애들 세상이 되는겨 이쪽은.
At dawn of February 25, 1603 three ships of the Dutch East India Company (VOC) seized the Santa Catarina, a Portuguese galleon. It was such a rich prize that its sale proceeds doubled the capital of the VOC. The legality of keeping the prize was questionable under Dutch statute and the Portuguese demanded the return of their cargo. The scandal led to a public judicial hearing and a wider campaign to sway public (and international) opinion. As a result, Hugo Grotius in The Free Sea (Mare Liberum, published 1609) formulated the new principle that the sea was international territory, against the Portuguese Mare clausum policy, and all nations were free to use it for seafaring trade. The 'free seas' provided suitable ideological justification for the Dutch to break Portuguese monopoly through its formidable naval power.
가장 큰게, 1603년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싱가포르 앞바다에서, 산타 카타리나 호.를 나포를 한겨. 얘들 자본금의 두배야 포획물이. 이걸로 드흐로트.의 마레 리베룸 이라는 자유의 바다. 라는 국제법 시작.이 나와. 공해 개념이 나오는겨 이때. 포르투갈애들은 당시 저 모든 바다는 자기들 꺼라 했걸랑. 이걸 방어하는 논리로 네덜란드에서 국제법을 시작하는겨. 이 드흐로트(드그로트)는 저러다 뒤에 올덴바르네벨트.가 반역죄로 모리스 한테 죽을때, 같이 체포되었다가 살아남은거고.
저 기간에, 네덜란드가 인도남부에, 스리랑카에, 말라카, 자카르타, 멀러커즈 제도의 암브로니아. 로 다 들어가 점령을 한거야. 포르투갈은 인도 고아.에 마카오.를 그나마 갖고 있는거고. 네덜란드는 더하여, 나가사키 에 데지마.까지 거점을 마련한거고. 이게 네덜란드-포르투갈 전쟁 1601-63에 벌어진 사건이야. 네덜란드가 제국이 된겨 이게.
더하여, 서아프리카, 황금의 해변이라는 기니만 쪽도 들어오고, 가나 에 기니만 아래의 콩고에. 포르투갈이 헨리 네비게이터 이후 갖고온 아프리카를 야금야금 갖고 오는겨 네덜란드가, 아시아에 더하여.
네덜란드.가 포르투갈과 별개로, 저때 북미에 가서 뉴네덜란드.를 세운겨. 잉글랜드가 들어오기 직전에. 잉글랜드는 제임스타운 1607 이 본격적인거고, 플리머스 컴퍼니랑 버지니아 컴퍼니.가 위와 아래로 본격 들어가는게 1620년 부터야. 요 가운데 매릴랜드는 1630년이여 찰스1세가 자기 엄마이름으로 볼티모어에게 차터를 주걸랑.
조때 직전에 1614년에 뉴네덜란드를, 뉴욕 뉴저지 매릴랜드 쪽에 만드는겨. 헨리허드슨 이 처음으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배로 아시아 가려다가, 뉴펀들랜드 닿고 다음 케이프 코드.에 닿는게 1609년 이야. 이걸 시작으로 네덜란드가 들어오는겨. 얘들이 아시아에서 포르투갈 상대로 영역확장할때 동시에, 북동항로 찾으러 오다가 뉴욕 주위로 들어온겨. 이게 잉글랜드와 동시에 겹치는겨 이 지역이. 이게 잉글랜드-네덜란드 2차 전쟁 1667 끝나고, 드비트 가 3자동맹으로 프랑스 의 상속전쟁의 확장을 막을때 잉글랜드로 들어오고, 다음 3차 전쟁 하면서, 이 북미는 잉글랜드께 된거야 조약으로.
저때가 네덜란드 제국 이란건데.
저기서 주인공은, 루이14세의 프랑스도 아니고, 찰스2세의 잉글랜드도 아니고, 네덜란드여 이게. 오렌지 윌리엄 꼬마일때 홀란드의 드비트.와 이를 이은 저 윌리엄3세 의 네덜란드 코트 들이고. 네덜란드의 저 해군은 어마어마한건데. 저 바닥에 깔아주는 문명의 힘이었고.
저 힘의 원천, 바닥은 머냐는거지.
저건, 이전 프리지아 의 상인들. 프리지아 의 자유 때의 상인들.이 저 바닥의 힘이야. 이들이 부르즈와(부르주아)이고, 네덜란드는 이 부르즈와 가 저때 만든 거야. 독립전쟁 시작 이전 7백년간 독보적으로 쌓인 힘. 이 상인들의 힘은 잉글랜드보다 빨라. 헌데 잉글랜드보다 늦은건 정체성이야. 이 정체성의 힘은 잉글랜드보다 못해.
Netherlands Bourgeois Revolution of the 16th Century
a bourgeois revolution between 1566 and 1609 in the historical region known as the Netherlands that combined a national liberation war against absolutist Spain with an antifeudal struggle.
네덜란드 독립전쟁을, 혹자들은 16세기 네덜란드 부르즈와 혁명. 이라고 해. 저건 비주류들의 견해인데, 다른 사전에서 보이는.
저당시를 네덜란드 황금시대, 덧치 골든에이지.라고 하는데.
The Dutch Golden Age (Dutch: Gouden Eeuw Dutch pronunciation: [ˈɣɑudə(n) ˈeːu]) was a period in the history of the Netherlands, roughly spanning the 17th century, in which Dutch trade, science, military, and art were among the most acclaimed in the world. The first section is characterized by the Eighty Years' War, which ended in 1648. The Golden Age continued in peacetime during the Dutch Republic until the end of the century.
네덜란드 황금시대.가 역설적이게도, 독립전쟁 시작하는 16세기 후반부터 치걸랑. 그래서 17세기 말까지를 네덜란드 황금시기 로 보지만, 대체 저때 저들의 힘은 머여. 저들은 저때, 잉글랜드 조차 네덜란드에 깨갱하던 시절이야.
Friese Freedom or Freedom of the Frisians (West Frisian Fryske Frijheid; Dutch: Friese Vrijheid; German: Friesische Freiheit) was the absence of feudalism and serfdom in Frisia, the area that was originally inhabited by the Frisians.
자유의 프리지아. 프리지아의 자유. 프리즈 프리덤. 800–1523 . 저게 서기 800년 에서 카를이 봉건주의체제로 전환하는 1523년 으로 보는겨. 여기가 다른 애들과 달리, 봉건체제에서 이미 벗어난겨 운영체제가. 저긴 피프 fief 라는 땅을 줘서 거기서 서프.랑 계약을 해서 영주가 나눠먹는 땅이 아닌겨 저긴. 다른거야 다른 땅들과 태생적으로. 저긴 무역 상인들이 상업으로 먹고 사는 데걸랑. 농사짓는 땅이 못되는거였고.
The former Frisian kingdom (Magna Frisia) had been incorporated into Francia after the Frisian–Frankish wars, that ended with the victory of the Frankish troops led by majordomo Charles Martel at the Battle of the Boarn in 734. The remaining territory east of the Lauwers River was conquered by Charlemagne in the course of the Saxon Wars until 785.
프리지아는, 카를 마르텔 때에야 들어온겨. 샤를마뉴의 할배이자 소피핀의 아빠. 프랑크 코트 말기때나 들어온겨. 서기 734년에. 이전까지를 마그나 프리지아. 나중 프리지아 킹덤.으로 작명해주는 c. 600–734. 로마 망하고 나서 여러 군주들이 있던 거고. 그 이전에는 우트레흐트 까지 로마 땅이었고. 넘어는 게르만들의 땅이었고. 로마를 옆에서 익힌 애들이야.
During the decline of the Carolingian Empire in the 9th century, the Frisian coast with the important trading place of Dorestad was strongly affected by Viking raids. In turn the Frankish emperor Louis the Pious and his successor Lothair I, ruler of Middle Francia since 843, tried to pacify the Viking leaders such as Harald Klak or Rorik of Dorestad by vesting them with large estates in the Frisian lands.
샤를마뉴가 카롤린지언 세우고, 아들 경건 루이가 게르만 킹하면서 여기 갖고왔는데, 여기는 드레스타트. 우트레흐트의 아래 도시고, 상업으로 먹고살던 데고, 바이킹들이 항상 쳐들어 오던 곳이고, 바이킹애들에게 여길 준겨. 나중 노르망디 주듯이. 그리곤, 합스부르크 가 갖고 갈때도, 여긴 걍 자유롭게 산겨 봉건체제로 안살고. 7백년 이상을 서기 800년 부터.
Finally in 1498, Frederick's son King Maximilian I ended the freedom in the remaining Frisian lands, when he appointed the Wettin duke Albert III of Saxony his stadtholder in Frisia for a loan of 300,000 guilders. Duke Albert had been a loyal follower of the Habsburgs in their struggle around the Burgundian heritage and had freed the King from custody at Brügge ten years before. However, the Saxon duke had to face strong resistance by the inhabitants, who in 1505 even laid siege to his son Henry at Franeker, while he himself attended the Saxon Landtag assembly in Leipzig.
1498년에 막시밀리언 당시 게르만의 킹. 나중 황제될. 봉건체제로 여길 가려해. 이미 부인 부르고뉴 마리는 죽었고, 이걸 베틴가문 작센의 알베르트.에게 30만 길더.의 보증금을 받고 스타트하울더 로 세워. 저 알베르트.가 작센의 동생 알베르트 계열 시작이고. 부르고뉴로 프랑스 루이11세와 샤를8세랑 전쟁할때 충성해준 댓가로. 얘가 포로되었을때 탈출시켜줬걸랑. 프리지아에서 이게 먼 듣보잡 봉건이야 반란해대고.
Frisia was a possession of Albert's son Duke George of Saxony, but he also failed to subdue Frisia during the Guelders Wars. Frisia was largely controlled by local rebels, supported by troops of Duke Charles II of Guelders, who had been at war with Burgundy and Saxony for several years. In 1515, George sold his title to Frisia to Charles (then Duke of Burgundy), and heir of the House of Habsburg). However, by the purchase Charles gained control of only a few cities: Leeuwarden, Harlingen, and Franeker.
알베르트의 아들 게오르크(조지) 턱수염 조지.가 이어 받았는데 겔더 전쟁. 겔더란트(헬더란트) 땅 전쟁때도 복속시키는걸 못했어. 다 이전에 설명. 예전에. 이때 프랑스가 원주민 지원하는거고. 겔더들이 프리지아 지원하는거고. 턱수염 조지가 자기 스타트하울더 자리를 다시 합스부르크에 팔아넘기고 손털어. 이전에 보증금 준거 돌려받고 프리지아 극성스러워서. 이때 카를5세 황제였던거고 원주인은.
In 1519, Charles succeeded to his full inheritance. In 1522, he sent a Habsburg army under Georg Schenck van Toutenburg to subdue the rebellious parts of the Netherlands. In 1523, Van Toutenburg drove the Guelders forces out of Frisia. Van Toutenburg also defeated the Frisians rebels under Wijerd Jelckama, who was publicly beheaded in Leeuwarden. Frisia was now firmly in the hands of Charles and incorporated into the Seventeen Provinces of the Habsburg Netherlands. Van Toutenburg became Stadtholder and ruled the province for him.
카를5세(카를로스1세)가 다시 받아서, 저걸 진압해야해. 투텐부르크의 게오르크 셴크 를 보내서 반란을 진압해. 그리고 서기 1523년에야 프리지아가 확실히 손에 들어온겨. 이때부터야 들어온겨. 저때 진압한 판 투텐부르크.가 스타트하울더 가 되는거고.
The Lordship of Frisia or Lordship of Friesland (West Frisian: Hearlikheid Fryslân, Dutch: Heerlijkheid Friesland) was a feudal dominion in the Netherlands. It was formed in 1524 when Emperor Charles V finally conquered Frisia.
요걸. 프리지아 로어드쉽. 프리지아 가 영주꺼 로어드. 여기서 로어드는 카를5세여. 스타트하울더는 보증금낸 대리인이고. 1524년 으로봐. 서기 800년 부터의 프리지아 자유.가 끝난겨 700년 만에. 그리고 나서, 1568년, 42년 만에 다시 독립전쟁이 시작이 된겨. 홀란드 가 카운트 받은게 11세기 후반이지만, 이름뿐인 백작이고, 프리지아 의 자유 체제에서 지낸겨 쟤들도.
저 체제에서 걍 그대로, 스타트하울더를 취한것일뿐이야 네덜란드는. 프리지아 로어드쉽. 이란 것이, 걍 네덜란드 독립 후에도 같은 말이여 저게. 리퍼블릭 서기 전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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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네덜란드라는건, 저 엄청난 힘의 네덜란드 제국을 만든건, 프리지아의 자유.라는 700년 이상 쌓인 상인들의 힘이야. 부르즈와 들이고. vroedschap . 프룻샤프라는 도시의회를 만들어. 이들이 레겐텐 Regenten 이라는 부르즈와 계층들이여. 얘들이 만든겨 저 힘은. 레겐텐이 13세기에 나와. 잉글랜드 배런 나올때 여긴 진짜배기 상인들 부르즈와가 나오는겨. 이 둘이 아주 독보적인 나라가 된 이유야 저당시.
- 1.1Migration of skilled workers to the Dutch Republic
- 1.2Protestant work ethic
- 1.3Cheap energy sources
- 1.4Birth and wealth of corporate finance
- 1.5Geography
네덜란드 황금시기의 이유들.을 다섯꼭지로 뽑는데, 저기서 중심은, 돈이여 돈. 돈 이 인격이고 돈이 문명이야 ㅋㅋㅋ. 돈을 만들어낼 수 있는 문명을 만든거고 돈이 문명을 일으킬 촉매제로 쓰일수 있는 바닥이 된게 저 두 나라야. 잉글랜드와 네덜란드는 골든에이지 라는 황금시기가 같어. 잉글랜드는 르네상스로 쓰고. 네덜란드는 이미 르네상스를 지난거고. 북쪽 르네상스는 이탈리아 다음으로 제일 빨라, 헝가리 마티아스 는 유별나게 빠른거였고. 잉글랜드가 엘리자벳 때 되서야 르네상스 겸 황금시대 시작 어쩌고 하걸랑. 저당시는 잉글랜드는 안되는겨 네덜란드한테, 그 역사가. 이 역사의 힘으로 둘간의 전쟁 2차 3차 는 네덜란드가 조진겨 저 상황, 람프야르 라는 불운의 해.에도. 엄청난겨 이 네덜란드는.
돈이여 돈. 7백년 이상의 상인들의 힘이여 저게.
더하여, 모랄 에띡이야. 카톨릭을 버리고 새로운 칼뱅 프로테스탄트 로 새출발 하는 애들이야. 새로운 정신판이야. 모랄 에띡을 새로이 깊게 가는겨. 그러면서 부정부패 문제가 지워지고 뭔가 산뜻한겨 기분이.
번돈으로 배들 만들고 그 배들로 아시아 아프리카의 금은 과 향료들 갖고와서 또 파는거고 금은만들고.
지리적 이유 어쩌고, 발트해와 북해를 연결하는 잇점. 저건 헛소리고.
저런 다섯가지 보다 근본적인건, 이전 700년 동안 쌓인 자유의 프리지아. 의 자유의 상인들, 자유의 부르즈와들의 힘이야 저건.
The transition by the Netherlands to becoming the foremost maritime and economic power in the world has been called the "Dutch Miracle" by historian K. W. Swart
네덜란드가 최고의 해양시절에 경제적 힘을 갖게 된건, 네덜란드의 기적. 이라고 불린다. 20세기 사학자 스워트 에 의하면.
정말 기적이야 저건. 어떻게 저 상황에서 플랑드르 군대 에서 버텨 살아남고, 이어서 잉글랜드 프랑스 의 공격을 버티냐고. 엄청난겨 저건. 17세기의 네덜란드란건.
헌데말이지. 저런 네덜란드가, 오렌지 윌리엄 3세를 1688 명예혁명으로 잉글랜드에 꿔주고. 죽고선. 바로 쇠하는겨 이게. 이것도 문제는, 돈이야 돈., 머 섭정의 무능력에 부패에 이어 민주화로 의견 분열 대기전에, 경제력이 망가진겨 네덜란드가,
저런 황금의 네덜란드 시기를 갖고 온게 일본의 난학 이라는 란가쿠.야. 일본의 메이지는 이 란가쿠 라는, 네덜란드 황금시기의 최고의 유럽것들이 들어오면서 만든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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