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버 크롬웰 대학살의 청교도혁명이란 것과, 프랑스 1789 대학살의 혁명이란 건. 맥락이 똑같은거고. 헌데 전혀 다른겨 장면들이.
잉글랜드는 4백년 전에 먼저 한겨 저걸. 그러면서도 나름 격식이 그나마 있어.
프랑스는 그런게 없어. 얘들은 킹 코트를 민들이 쳐들어 가는 애들이야. 프롱드 때 처럼 민들이 킹 침실을 몰려 들어가. 이때는 귀엽기나 하지, 잠자니까 몰래 나오는 ㅋㅋㅋ. 이 프랑스 애들은 이때까지는 참 재밌었는데 말야. 완전히 쓰레기가 되는건데 이후에.
잉글랜드는 프랑스애들보다 사백년 이상이 앞섰어 이 바닥 싸이키가. 이게 지금이고 또한.
물론 극동은 저런 프랑스보다 수십만년이 후진거고. 이 극동은 그냥 똥짝대기 모임들이고. 일본 빼고. 애들은 그래도 프랑스 뒤꿈치는 밟을 수준은 되고. 그래봤자겠지만.
Charles was moved to Hurst Castle at the end of 1648, and thereafter to Windsor Castle.[254] In January 1649, the Rump House of Commons indicted him on a charge of treason, which was rejected by the House of Lords.[255] The idea of trying a king was a novel one.[256] The Chief Justices of the three common law courts of England – Henry Rolle, Oliver St John and John Wilde – all opposed the indictment as unlawful.[257] The Rump Commons declared itself capable of legislating alone, passed a bill creating a separate court for Charles's trial, and declared the bill an act without the need for royal assent.[258] The High Court of Justice established by the Act consisted of 135 commissioners, but many either refused to serve or chose to stay away.[259] Only 68 (all firm Parliamentarians) attended Charles's trial on charges of high treason and "other high crimes" that began on 20 January 1649 in Westminster Hall.[260] John Bradshaw acted as President of the Court, and the prosecution was led by the Solicitor General, John Cook
찰스는 1648년 말에 허스트 궁으로 옮겨지고 이어 윈저궁으로. 다음해 1월 죽는 달에 찌꺼기 의회가 반역으로 기소를 하는겨. 킹이 반역을 한겨 ㅋㅋㅋ. 이게 법적으로 웃긴거야. 킹이 자기들 나라의 상징인데, 상징이 반역을 한겨. 상원에서 거부해. 킹을 재판하는건 처음이야. 잉글랜드의 카먼로 세개의 코트의 짱들인 헨리 롤, 올리버 세인트 존. 존 와일드 도 불법이라며 모두 반대해. 재판해야 할 곳에서 재판을 못하는겨 이건. 그래서 하원애들이 자기들이 독자적으로 사법할수 있음을 선언하고 찰스를 재판할 코트, 사법기구를 새로 만든겨. 걍 지들 맘대로지. 저때 하원이란건 크롬웰 의 딱깔이로 전락을 한거고. 당연히 킹의 동의없이 법은 효력이 있다고 하는거고. 그래서 하이코트 오브 저스티스.가 새로 생긴겨 이때. 이게 소위 대법원 이야. 135명의 위원들로 구성했는데, 많은 이들이 사절해. 단지 68명이 찰스 재판에 참여해. 모두 찌꺼기 하원 애들이고. 반역과 다른 중범죄 로 혐의를 만들고. 1월 20일 에 시작을 해. 웨스트민스터 홀 이라는 유럽에서 가장 큰 홀이야. 존 브래드쇼.가 대법원장 을 하는거고. 존 쿡.이 기소를 한 검사장 인거고.
존 브래드쇼.는 먼저 죽고. 역시나 시체 꺼내서 목짤리는 세명 중 한명이고.
Thus, John Cook was tried and found guilty of high treason for his part in the trial of King Charles I. He was hanged, drawn and quartered with the radical preacher Hugh Peters and another of the regicides on 16 October 1660. Shortly before his death, Cook wrote to his wife Mary:
We fought for the public good and would have enfranchised the people and secured the welfare of the whole groaning creation, if the nation had not more delighted in servitude than in freedom.
존 쿡.은 찰스2세가 복귀하고, 얜 반역죄를 물어서 재판받고 유죄 받고. 매달고 긋고 짤라서 죽여. 쿡은 죽기전에 부인 마리에게 썼다.
우리는 공공의 선을 위해 싸웠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투표권을 주었을 텐데, 모든 신음하는 창조물의 안녕을 지켰을 텐데, 나라가 자유상태의 즐거움만큼 노예상태에서 즐거워하지 않았다면.
자기들이 지배할때는 자유 였고, 그래서 사람들이 즐거웠어, 헌데 다시 킹의 노예가 되었어, 즐거워 하지 말아야 하는데. 노예로 되서 우울해했으면 자기는 이리 안죽고, 앞으로 투표권도 더 줄거고, 안녕을 지켜줬을텐데. 민들이 노예상태를 즐겨서 자기는 이리 죽는다는거지. 민들이 킹을 저리 반길줄이야. 무시칸 민들이여 해댐시
가실때까지 착각속에 가시는거지. 존 밀턴 류야.
빠질 해대는 애들은, 자기와 같은 생각의 애들은, 즐거운겨. 야, 너 만 즐거운겨. 너의 빠 만 즐거운거고. 너의 빠동무들만 즐거웠던거고. . 죽어서 저 세상에서라도 정신차려라 350년전에 죽은 애야.
얜 부인에게 거짓말 하는게 아냐. 저게 진심일껴.
빠질하는 대부분은 구국의 정신으로 하는겨 저게. 야 돈이나 받고 해라. 그 윗대가리애들은 알바비라도 쳐 받고 월급받고 그짓을 해댄다 이 똥자루들아.
쟤야 검사장에 한자리라도 하니까 머 아쉬울게 있겠누.
Charles was accused of treason against England by using his power to pursue his personal interest rather than the good of the country.[263] The charge stated that he, "for accomplishment of such his designs, and for the protecting of himself and his adherents in his and their wicked practices, to the same ends hath traitorously and maliciously levied war against the present Parliament, and the people therein represented", and that the "wicked designs, wars, and evil practices of him, the said Charles Stuart, have been, and are carried on for the advancement and upholding of a personal interest of will, power, and pretended prerogative to himself and his family, against the public interest, common right, liberty, justice, and peace of the people of this nation."[263]
찰스는 잉글랜드에 반역죄로 고소되었다 그의 힘으로 개인의 이익을 추구했다고, 그땅의 선보다는. 공소장을 보면, 찰스는 그의 계획을 이루기 위해, 자기와 자기의 주변인들과 그들의 사악한 행위들을 보호하기 위해, 현재 의회와 여기 있는 사람들에 반대하는 전쟁을 반역적으로 악의적으로 일으켰다. 사악한 계획들, 전쟁들, 찰승류의 악마같은 행위들은 역사적으로 과거부터 있어왔고, 행해진다 개인 의지와 권력의 이익을 내세우고 유지하기 위해. 그리고 그와 그의 가족에게 특혜를 줬다 공공의 이익, 공공의 법, 자유, 정의. 평화에 반하는. 이 땅의 사람들의.
일반론으로 역사적으로 저랬고, 찰스가 그 사례 라는겨.
Reflecting the modern concept of command responsibility,[264] the indictment held him "guilty of all the treasons, murders, rapines, burnings, spoils, desolations, damages and mischiefs to this nation, acted and committed in the said wars, or occasioned thereby."[265] An estimated 300,000 people, or 6% of the population, died during the war.
현대 개념인 전쟁범죄 공통의 책임을 반영하면서 공소장은 그를 모든 반역들, 살인들. 강탈들, 화재들, 파손들. 막막함들, 손해들, 불운들, 이땅에 끼친. 앞서 나열된 전쟁들에서 행해진. 것들에 유죄 이다. 대략 30만, 당시 인구의 6퍼가 죽었다.
Over the first three days of the trial, whenever Charles was asked to plead, he refused,[267] stating his objection with the words: "I would know by what power I am called hither, by what lawful authority...?"[268] He claimed that no court had jurisdiction over a monarch,[256] that his own authority to rule had been given to him by God and by the traditional laws of England, and that the power wielded by those trying him was only that of force of arms. Charles insisted that the trial was illegal, explaining that,
재판 첫 3일간, 찰스는 반론하라고 요구받을때마다 거절했다. 나는 안다 여기에서 내가 불려지는 힘.에 기대서, 적법한 권위에 기대서. 어떤 코트도 한 군주에게 재판을 할수 없다, 나의 다스림의 권위는 신에 의해, 잉글랜드의 전통적인 법들에 의해 나에게 주어진 것이고, 나를 재판하는 쟤들에게 주어진 저 권력은, 단지 군대의 힘의 권력일 뿐이다. 재판은 불법이다.
정확한 찰스의 지적이지. 핵심을 본겨. 쟤들의 저런 짓은. 오직 군대가 준 힘.이야. 이게 쟤들이 끝까지 유지했던 군정이었고. 앞에서 설명했던. 아주 정확해.
저 공소장이 저게 먼 초딩애들도 아니고.
no earthly power can justly call me (who am your King) in question as a delinquent ... this day's proceeding cannot be warranted by God's laws; for, on the contrary, the authority of obedience unto Kings is clearly warranted, and strictly commanded in both the Old and New Testament ... for the law of this land, I am no less confident, that no learned lawyer will affirm that an impeachment can lie against the King, they all going in his name: and one of their maxims is, that the King can do no wrong ... the higher House is totally excluded; and for the House of Commons, it is too well known that the major part of them are detained or deterred from sitting ... the arms I took up were only to defend the fundamental laws of this kingdom against those who have supposed my power hath totally changed the ancient government.
찰스가 말해. 세속의 어떤 권력도 나를 어떤 범죄자라며 의심하면서 나를 부를 수 없어, 오늘의 이런 짓은 신의 법들에 의해 보장될 수가 없어. 왜냐면 반대로, 킹들에 대한 복종의 권위는 명확히 보증이 되는거고, 구약과 신약 둘다에서 엄격히 명령 되어진거야 이땅의 법을 위해서, 나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아, 어떤 배운 법률가도 단언 못해 킹에 대한 탄핵이 있을 수 있다는건, 킹들은 모두 자기 이름 속에서 사는거야. 그리고, 킹들의 보편적 격언중 하나가 있어, 킹은 잘못을 할 수 없다고, 저 높은 집은 완전히 따로 떨어진 곳이라고, 하원에 대해서는, 너무 잘 알겠지만, 저들 하원의원들 대부분은 구금되어있고 여기 지금 못앉아있어, 프라이드가 숙청해서 니덜 여기 다 찌꺼기 의원들이잖니. 내가 취한 군대는 단지 이 킹덤의 근본적인 법들을 수호하기 위한거야, 나의 힘이 마치 고대부터의 다스림을 완전히 바꿨다고 가정하는 애들에 맞서기 위해.
쟤들은, 자기의 권리를 신성하게 여기는겨. 자기가 잘못할 수 없다는 건, 그만큼 자기 자리에 대해 막중함을 느끼는겨. 저건 건방진 표현이 아냐.
The court, by contrast, challenged the doctrine of sovereign immunity and proposed that "the King of England was not a person, but an office whose every occupant was entrusted with a limited power to govern 'by and according to the laws of the land and not otherwise'."[270] At the end of the third day, Charles was removed from the court,[271] which then heard over 30 witnesses against the king in his absence over the next two days, and on 26 January condemned him to death. The following day, the king was brought before a public session of the commission, declared guilty, and sentenced.[272] Fifty-nine of the commissioners signed Charles's death warrant.
코트는 반대로, 사버린 임뮤니티. 권력자의 면제권이여. 과연 킹은 재판받을 수 없는가. 이미 법이 있어 권력자는 재판받을 수가 없어. 이 법에 대한 반대 논리를 만들어야 해. 잉글랜드의 킹은 사람 이 아니고 자리 라는거야. 제한된 힘으로 그 땅의 법에 따라서 다스리는 자리. 이지 사람 이 아니라며, 킹의 자리는 기소를 못해도, 그 자리 에 앉아있는 너.는 기소 를 해서 재판해도 된다는겨 쟤들은. 세번째 날 마지막에 찰스는 재판 코트에서 떠나게 하고, 30명 증인들 심문하고, 킹에 반대하는. 킹은 자리에 없는 채. 다음 이틀간. 그리고 1월 26일 검사는 그를 사형 구형하다. 그 다음날 킹은 데려와서 위원들 앞에, 유죄 판결하고 유죄니까 사형이고. 59명의 위원들은 찰스 처형 서류에 싸인했다.
1월 20일 시작해서, 증인심문 하고, 1월26일 날 구형하고. 27일날 선고를 한겨. 7일 동안 처리한겨이게.
Charles's beheading was scheduled for Tuesday, 30 January 1649. Two of his children remained in England under the control of the Parliamentarians: Elizabeth and Henry. They were permitted to visit him on 29 January, and he bade them a tearful farewell.[274] The following morning, he called for two shirts to prevent the cold weather causing any noticeable shivers that the crowd could have mistaken for fear:[275][276] "the season is so sharp as probably may make me shake, which some observers may imagine proceeds from fear. I would have no such imputation."
찰스의 참수는 30일. 즉 선고 후 3일 지나서. 화요일. 토요일에 사형선고를 한거지. 그의 다른 두 자식은 잉글랜드에 있었어 하원들 통제하에. 엘리자벳과 헨리. 그들은 29일에 아빠 찰스를 만나게 허락받다. 눈물의 이별을 해. 다음날 아침 찰스는 두개의 셔츠를 달라고 해 춥지 않으려고, 왜냐면, 군중들이 볼텐데, 자기가 무서워서 떠는 듯 오해시키기 싫다는겨. 날씨는 매우 추워서 나를 떨게 할 확률이 높아보여, 몇 관중들은 상상할수 있어 추워서 떠는구나, 나는 그런 모욕 받기는 싫어.
엘리자벳.은 14세고, 헨리는 9세야. 둘이 수감되고, 엘리자벳은 다음해 병으로 죽고, 헨리는 크롬웰이 석방시켜서 파리로 가고, 형 찰스2세 복위되는해 병으로 죽어.
He walked under guard from St James's Palace, where he had been confined, to the Palace of Whitehall, where an execution scaffold had been erected in front of the Banqueting House.[277] Charles was separated from spectators by large ranks of soldiers, and his last speech reached only those with him on the scaffold.[278] He blamed his fate on his failure to prevent the execution of his loyal servant Strafford: "An unjust sentence that I suffered to take effect, is punished now by an unjust sentence on me."[279] He declared that he had desired the liberty and freedom of the people as much as any, "but I must tell you that their liberty and freedom consists in having government ... It is not their having a share in the government; that is nothing appertaining unto them. A subject and a sovereign are clean different things."[280] He continued, "I shall go from a corruptible to an incorruptible Crown, where no disturbance can be."
세인트 제임스 궁.에서 나와서 화이트홀 궁.으로 가고, 여기 건물 뱅퀴팅 앞에 처형대.가 있었다. 찰스는 관중들과 격리되다 많은 군사들로, 그래서 그의 마지막 말은 그와 같이 처형대 있던 이들에게만 들렸다. 그는 이전 스트랫포드 백작 웬트워뜨 처형을 못막은 것에 대해 스스로 자책했다.
부당한 판결을 내가 겪고 이게 현실화 되었는데 이건 나에대한 부당한 판결에 의한 것뿐이야. 그는 소리질렀다, 그는 어느 누구 못지 않게 사람들의 해방과 자유를 바랬다고. 그러나 나는 분명히 당신들에게 말해야겠는데, 그들의 해방과 자유는 다스림 에 있는거야, 그건 그들 민들이 다스림을 나누는게 아냐. 다스린다는 건 민들에게 주어지는 게 아냐. 서브젝트 라는 소속됨 과, 사버린 이라는 다스림은 명백하게 다른거야. 그는 계속했다. 나는 썪은 땅에서 안썪은 크라운으로 갈거야, 거긴 이런 혼돈의 방해는 있을 수가 없을테니.
명백하게 만든말이야. 다스리는건 다른거야 이건. 야, 전과자 살인경력의 경비원이 의원이 되고, 아무것도 배운거 없는 민이 의원이 돼? ㅋㅋㅋ. 노동자가 권력이여? ㅋㅋㅋ. 데모 해서 노동 투쟁 하면 뿌듯한 열사여? 대체 정치란게 머냐. 민 이 주인이 되는 세상이 유토피아여? ㅋㅋㅋ. 참 선동하기 좋고 좋게 들리지.
아무 능력 없는 애를 수술실 칼 들게 하는 의사를 시켜라. 길거리 초등애한테 칼 줘서 니 몸 찢는걸 너 맡길래?
다른거야 저게.
찰스 말이 단지 고리타분한 킹의 말이 아냐.
저게 지금 조선 민국을 보면 알아. 아무런 경험 없는 애들이, 오직 감옥 다녀온걸 자랑으로 여기고, 걍 나눠주고 민족 해대면 강대국이 되는 줄 아는겨. 배운게 없어. 멀 해봤어야지.
뱅큇.이라는게, 밴치 bench 에서 나온 말이고, 벤치에서 간단한 음식 먹는겨. 이게 궁의 연회 장소에 거주지인 건물이고. 화이트홀 궁.의 바깥경계 건물이야. 이 경계건물을 Pavilion 퍼빌리온 이라고 해. 이 화이트홀 궁.은 1240년에 만든, 요크 대주교.의 런던 거주지였고, 그래서 이름이 요크 궁.이었다가, 에드워드1세가 쓰면서 화이트홀 로 이름을 바꾼거야.
웨스트민스터 궁.이 아래에 있고 이 궁 동쪽템즈해변에 웨스트민스터 애비 abbey 가 있어.
저기가 모두, 시티 오브 웨스트민스터.이고 그레이터 런던.의 버러들 중 하나고, 시티오브런던.의 서쪽이야. 시티오브런던.이 가운데 템즈강 위.이고, 강건너 아래가 써덕 이라는 버러.야.
성 제임스궁.의 제임스는 제임스 더 레쓰.라는 알패오의 아들.이고. 제임스라는 야코보 가 셋.이야. 제버디의 아들 제임스, 지저스의 형제 제임스. 알패오의 아들 제임스. 지저스 형제 제임스와 알패오 아들 제임스.를 성제롬은 같은 이로 간주했는데, 지금 신학자들 대부분은 서로 다른 사람 이라고 봐. 허나 많은 이들이 저 둘은 같은 사람으로 보고 지금도.
지저스의 형제 라는 제임스.는, 머 성모마리아 가 낳은겨 그럼? 이 아니라, 배 다르고 씨 같은 형제 아니면 사촌 으로 봐.
성 제임스 궁.는 헨리8세때 시작한거고. 즉 튜더 가문의 상징이야 저게. 마지막 감금을 여기서 한겨 찰스1세는 그리고는 오육백미터 동쪽으로 가서 화이트홀 궁의 연회했던 템즈강변 에서 처형을 당하는거야.
At about 2:00 p.m.,[282] Charles put his head on the block after saying a prayer and signalled the executioner when he was ready by stretching out his hands; he was then beheaded with one clean stroke.[283] According to observer Philip Henry, a moan "as I never heard before and desire I may never hear again" rose from the assembled crowd,[284] some of whom then dipped their handkerchiefs in the king's blood as a memento.
오후 두시에, 찰스는 그의 머리를 블락 위에 놓았다, 기도를 하고, 처형수에게 신호를 보낸 후, 자기손들을 쭉 펴고 머리는 얹고. 그는 단 한방의 깔끔한 도끼질로 짤렸다. 당시 18세였던 펠립 헨리 가 옥스포드의 교회학생이었는데 팔리어먼트 방문길에 지켜보다. 탄식 소리-내가 결코 이전에 들어본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결코 다시 듣고 싶지 않은 - 들이 모여진 군중들에서 쏟아져나왔다. 그들 몇몇은 자기들 손수건을 킹의 피에 담갔다 기억을 위해.
필립 헨리 는 찰스2세 의 어릴때 친구기도 했고, 이사람은 비국교도고, 성직자야. 단지 옥스포드 학생으로 놀러왔다가 떠나는 길에 저 광경을 본거야. 사람들의 울음소리들이 쏟아진걸 들었는데, 이전에 저런 소리들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는 거지.
The executioner was masked and disguised, and there is debate over his identity. The commissioners approached Richard Brandon, the common hangman of London, but he refused, at least at first, despite being offered £200. It is possible he relented and undertook the commission after being threatened with death, but there are others who have been named as potential candidates, including George Joyce, William Hulet and Hugh Peters.[288] The clean strike, confirmed by an examination of the king's body at Windsor in 1813,[289][h] suggests that the execution was carried out by an experienced headsman
웃긴게, 처형수야. 저 목짜르는게 쉽지 않어 이게. 앤불린 은 헨리가 퀸 대접한다며 칼로 치라 했걸랑. 나머진 다 도끼야. 칼로 머리 치는것도 쉬운게 아니거니와. 도끼도 이게 한방에 안끝나. 잘쳐야 해. 스콧 마리도 한번 에 못 쳐서 다시 한번 더 친겨. 확실하게 끊어내야 해. 사무라이 할복 을 절복 이라해 셋푸쿠. 이건 배가르는 거고, 죽는게 아녀. 걍 의지의 표현일 뿐이고, 카이샤쿠 로 옆에서 머리를 치는겨 뎅강. 이것도 대게들 못쳐서 막 막 짜르고 별 짓을 다해. 그래서 카이샤쿠 옆에 카이조에 를 두는겨. 제일 실력자로. 카이샤쿠 를 못하면 카이조에 가 빨리 죽여줘야해 고통을 줄이기 위해.
이게 뼈 덩어리잖어. 저게 쉽지 않은겨. 도끼도 쉽지 않은데, 하물며 칼은 더 어려워 이건. 저 카이샤쿠 가 제대로 못쳐서 고통받아 죽은 애들 많아.
도끼질을 졸 잘했는데. 누군지 몰라. 마스크를 썼걸랑. 무서운거야 이거. 감당이 안되는거고. 하원애들이 리차드 브랜든 에게 200파운드를 줄테니 해달라, 거절해. 아마 너 안하면 죽일껴 해대도 거절을 해. 그만큼 먼가 싫은거야 저 짓이.
지금도 누군지 몰라. 하튼 실력자 임은 분명해.
저것도, 다른거야 루이16세 와. 150년 후의 루이는, 자기 마지막 말도 못하게 해.
On Monday, 21 January 1793, Louis XVI, at age 38, was beheaded by guillotine on the Place de la Révolution. As Louis XVI mounted the scaffold, he appeared dignified and resigned. He delivered a short speech in which he pardoned "...those who are the cause of my death.... ".[60] He then declared himself innocent of the crimes of which he was accused, praying that his blood would not fall back on France.[61] Many accounts suggest Louis XVI's desire to say more, but Antoine-Joseph Santerre, a general in the National Guard, halted the speech by ordering a drum roll.
찰스1세.는 1월 30일에 죽고, 루이16세.는 1월 21일에 죽어 38세에. 길로틴 으로 죽어 혁명 광장에서. 그는 근엄한듯 보이면서 물러서는 듯 좀 사양하는 자세야. 짧게 말을 해, 내 죽음의 원인인 이 사람들을 용서하라며, 그러면서 자기 죄는 무죄임을 주장하고 프랑스에 자기 피가 떨어지지 않게 해달라. 복수 하지 말라는겨. 헌데 더 이상 말을 하려 하는데, 보위부 애들이 멈추게 하고 드럼을 친겨. 떠들지 말라는거지
There are also accounts of a blood-curdling scream issuing from Louis after the blade fell but this is unlikely, since the blade severed Louis's spine.
칼이 떨어질때 루이가 막 비명을 질렀다. 이 프로테스탄트 들의 거짓말 주작질 은 이런 데서도 나오는건데. 가장 억울한 두 사람이 저 루이와 마리 앙트와네트야. 모두 사기 이고 거짓말 이야. 선동 하기 위한 거짓말들 이야.
The executioner, Charles Henri Sanson, testified that the former king had bravely met his fate.
처형수 상송이 증언하다, 루이는 용감하게 죽었다고.
It was common practice for the severed head of a traitor to be held up and exhibited to the crowd with the words "Behold the head of a traitor!"[293] Although Charles's head was exhibited,[294] the words were not used, possibly because the executioner did not want his voice recognised.[293] On the day after the execution, the king's head was sewn back onto his body, which was then embalmed and placed in a lead coffin
프랑스애들 보면, 반역자 머리를 들고, 군중에게 머리를 치켜 올리고, 반역자의 머리를 지켜보라! 를 외치는 게 절차 인데, 머리는 치켜 들었는데, 말은 안했다는거지. 저 샤를앙리 상송 이란 처형수가 저때 3천명의 머리를 자른 거로 봐. 저때 50이 넘었어 나이가. 걍 직업이야 이게. 얘들은 저 머리를 걸어놓고 다음날 붙여줘 관 안에.
Archbishop William Laud, who was beheaded by Parliament during the war, described Charles as "A mild and gracious prince who knew not how to be, or how to be made, great."[322] Charles was more sober and refined than his father,[323] but he was intransigent. He deliberately pursued unpopular policies that ultimately brought ruin on himself.[324] Both Charles and James were advocates of the divine right of kings, but while James's ambitions concerning absolute prerogative were tempered by compromise and consensus with his subjects, Charles believed that he had no need to compromise or even to explain his actions.[325] He thought he was answerable only to God. "Princes are not bound to give account of their actions," he wrote, "but to God alone"
이 잉글랜드 애들이, 자기들 역사 평가가 야박해. 특히나 중세와 그 직후. 얘들 공통이 저때까지의 자기들 역사에 대한 평가가 야박해. 프로테스탄트 들의 영향인데 이게. 찰스1세에 대한 평가도 거의 걍 무능 이야. 가장 좋아봤자 걍 논쟁적인 인물에 상반된 성격 어쩌고. 아일랜드 만 제대로 다뤘으면 어찌될지 몰라 이게. 헌데 아일랜드 조차 과연 콘페더레이트 가 찰스 말 듣고 아이리쉬 프로테스탄트와 손잡았을까. 얘들은 이것만 제대로 되었으면 분명히 달랐을꺼야 역사가. 아일랜드는 지들이 자초한 역사야 저게. 헌데 저게 쉽지 않은거고 또한. 찰스가 뒈져서야 정신 드는거지.
윌리엄 로드 대주교.는 찰스를 부드럽고 온화한 군주였다고, 그레이트 되는 법은 방법도 관심없고, 되려고도 하는 관심도 사람이었다. 아빠보다는 냉철했고 정제되었지만, 비타협적이었다. 인기 없는 정책을 추구해서 몰락을 자초했다. 이게 종교 통일 에 간척사업이야. 헌데 이사람은 국가 차원에서 이걸 했어야 해. 결국 된겨 이건 뒤에. 단지 좀 앞섰을 뿐이고, 헌데 이 찰스1세가 저렇게 죽었기 때문에, 스콧과 잉글랜드가 하나가 되고, 아일랜드 라도 일부가 합친거야. 애들은 합치는게 백천만배 나은거고, 당연히 독립 어쩌고하는 애들은 싫어할 테지만.
쟤들은, 모~두 말이야. 저 군주들은, 죽을 때. 당당 히 죽어. 여자 들도.
더하여, 내 피로 복수하지 마세요!
이건 공통이야.
야 이, 어떤 나라는, 지가 자살을 해. 운명이염~~. 복수얌~~~.
저런건, 유럽사 를 보면, 없어. 저런 짓을 추앙질 할 수도 없고. 저게 머냐면, 이 조선애들은, 전쟁 나면 토끼는 애들이잖니. 임란 호란 을 보면, 걍 토껴. 한강다리 넘어 가는것도 맥락이 같어 저게.
똑같어 저게. 당당히 머가튼 적폐 들의 코트지만, 재판을 받아서 니의 변호를 하던가.
차라리 적폐 라며 지금 쳐 들어간 두 인간이, 저런 이들보다 천만배 나은겨 저런 면에선.
웃겨. 야 차라리 죽어라 자살해라, 쪽팔리지 않니? 왜 사니? 우리 주군처럼 자살을 해~~.
일본들 할복 하는걸 쟤들이 숭상질 하는겨 저게. 이 일본에 대한 열등감이 찐한건지. 저게 일본애들도 이 맹자 고자상 의 유교 짓이 베여있걸랑. 치욕스럽게 살바엔 뒈지겠다 가 일본 절복질 자살질 이걸랑. 조선은 토끼기 여. 아니면 휘~~이이잉 질이냐. 어떻게 저런 애들을 숭상 추모를 해대냐고. 저건 말야, 아이들에게, 너, 억울하면 자살해라 라는 가르침과 머가 다르니. 그래서 자살들 해대는겨 이땅에서 특히나.
쟤 쟤 쟤 , 쟤들은 그야말로 가장 ~~ 하치리 똥자루야 그래서. 아이들한테, 너, 억울하면 자살해라. 이 이상의 가르침이 없어 저런짓은. 처런 추모 질은 절대 해선 안돼.
걍 니덜 끼리 몇몇만 추모 하든 말든. 배워라 배워 저 유럽 군주 애들의 말을. 나는 무죄야 헌데 나는 받아들여 나는 나를 죽이는 애들을 용서해 복수하지 말어. 이건 아주 공통된 저 유럽 군주 애들 의 말이야.
저게 브리튼을 만든겨 저 야만의 브리튼애들이. 그래서 얘들이 가장 앞선거고. 이게 이 바닥 감정선을 앤불린 레이디제인그레이 스콧마리 라는 위대한 세 여자의 처형당시의 이야기와 말. 이 만든거야. 저건 정확한 팩트들의 이야기고.
저런 이야길 다 하게 한거야 아무리 반대 애들도.
프랑스애들은 저것 조차 못하게 해. 왜냐면, 무서워서. 킹이 저리 말하다간. 소리내다간, 당하걸랑.
똑같아, 로마 공화정과 황제정의 오육백년 기간을 단축시키기 위한, 군정 이야 쟤들도. 온갖 스파이 쁘락치들을 전역에 깔고 공포정치를 한게 저때야 얘들도. 거리는 총칼의 피바다 시대가 1789 프랑스 대학살 이란 시기여. 대혁명으로 포장된.
아무것도 배운 거 없이, 공상놀이 이성으로, 멀 하겟니 쟤들이.
적폐놀이 하는겨. 지들만의 사람들 심고 권력 장악해서. 민들은, 굶어죽어가는거고.
저걸, 잉글랜드는 조지 몽크.와 주위 사람들이, 다시 돌려놓은거야. 프랑스 는 나폴레옹 이 조지몽크와 달리 자기가 한겨. 이럴수 밖에 없었고. 이들은 이미 이전 오백년이 전혀 다른 역사였걸랑.
찰스의 평가는 저래선 안되고, 제임스도 마찬가지고,
인물평가란게, 참 의미가 없다고 느껴지는데 요즘. 저 찰스 평하는 쟤들 보고.
영국의 위대한 인간들 을 들라면, 탑텐에 윌리엄, 헨리2세, 사자심왕 리차드, 에드워드3세, 헨리7세, 엘리자벳 등 이 킹퀸 이 가장 위대해, 더하여 저 세여자.
그 나라의 위대한 인간이란, 그 나라의 정체성 을 만들고 확장한 인간이어야 해. 쟤들 평하는거 보면 기준이 없어 이런 큰 기준이. 더하여, 프리덤 이야. 이 프리덤 이란 건, 갓. God 과 동의어고, Soul 영혼 과 동의어야. 이걸 더 넓혀주게 한 사람이어야 해. 정체성과 갓프리덤소울.
쟤들은 걍 구조적으로 계속 저런 인물들이 재생이 된거고,
조선은, 구조적 으로, 정체성과 갓 자체가 코트의 목적이 아니라, 단지 몇몇만의 조선의 조폭 이념 유교로 지들만의 하렘에서 놀면서 적폐놀이 하면서 정권질 하는 애들이걸랑. 구조적으로 정체성의 확장, 자유와 영혼 이라는 신에 대한 추구를 할 수가 없어. 여긴 똥자루들 똥짝대기들만 생산이 되는겨 이게. 여긴, 인물이 구조적으로 태생적으로 나올 수가 없는겨 그래서. 그래서 스스로 뒈지는 인간 들이 숭배 되는, 정말 전 세계적으로 저런 식의 결말을 추앙해대는 부락은 이건 있어본적이 없어. 외적이 오면 도망가는 애들이 코트 오백년의 조선 들이걸랑. 피여 피. 저런 조선을 위대해 해대며 여전히. 저 조선 위대해 해대는 애들은 정말 그야말로 인류의 적이고, 생명의 적이여 저것들은.
이런면에서 보면, 브리튼은 인물들이 넘쳐나고, 유럽대륙은 상대적으로 적어. 반면 이 아시아, 특히나 중국과 조선.은 인물들이 없는거고, 이 조선.은 걍 , 찌끄레기도 아니고, 걍 똥짜루 애들의 땅이야 위인 이랍시고 창조된 인물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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