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liver Cromwell (25 April 1599 – 3 September 1658)[note 1] was an English general and statesman who led the Parliament of England's armies against King Charles I during the English Civil War and ruled the British Isles as Lord Protector from 1653 until his death in 1658. He acted simultaneously as head of state and head of government of the new republican commonwealth.
올리버 크롬웰. 이 59세에 죽는건데. 얜 전혀 듣보잡 인간이야. 찰스1세가 1642년 1월에, 몰리고 열받아서 다섯명의 하원의원들 체포하러 다닐때도 듣보잡이야. 이 다섯에 안껴 얜. 헌데 어떻게 권력을 잡게 된거냐 말이지.
믿음이여 믿음. 아 이 믿음 이란게 웃긴건데.
얜, 신이 자기를 선택했고, 자기는 원죄를 벗어난거고 구원받았다는 믿음이 강렬해. 이 강렬한 믿음으로 내전에 임하고 애들도 그런 리더쉽으로 다뤄. 애들이 얘한테 폭 빠진거야. 한니발한테 애들이 빠지듯이. 한니발은 병사들과 똑같이 지내면서 병사들이 충심으로 대한거걸랑. 얘도 그런 스타일인데, 얜 신과 통했다는 확신이 있는 인간이야. 골때리. 그래서, 학살도 하는거야. 아일랜드 사람들을. 사탄 이거든. 특히나 카톨릭 은 사탄이야 이 인간에겐.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겨.
이 이념에 미친 애들한텐 답이 없는겨 그래서.
이게 나치.고 모택동 이고 레닌 이고 모택동 이야. 적폐여 적폐 상대는. 조오온나리 죽여도 정의야 그게.
조선 애들이 그랬던거고. 적폐여 상대는. 나는 정의고. 상대는 소인배고 지들은 군자여. 조선 건국이래 육백년이야 이게. 그래서 아무 거리낌 없이 암살도 하는겨. 저앤 적폐걸랑. 그게 해방 후 이땅의 모습이야. 그런걸 또 지들 편의 암살은 당연한거야. 저런 애가 또 자기들 정의야. 저런건 모든 이념의 땅과 후진 나라들의 아주 공통된 모습이야.
Lord Protector of the Commonwealth of England, Scotland and Ireland.
16 December 1653 – 3 September 1658
얘 공식 타이틀.은 1653년 12월부터 죽을때 까지 1658년 9월. 5년동안 카먼웰스.의 로어드 프로텍터 였어.
찰스 죽이고, 5년동안 최고 권력 자리가 공석이야. 이전에는 카운슬 이 최고권력인겨.
The English Council of State, later also known as the Protector's Privy Council, was first appointed by the Rump Parliament on 14 February 1649 after the execution of King Charles I.
카운슬 오브 스테이트. 찰스 죽고, 럼프 팔리어먼트에서 보름후에 선정을 한겨. 저건 번역하면, 찌꺼기 의회. 라고 하면 돼. 전해에, 뉴모델아미 의 그란디즈에 반대하는, 뉴모델아미 에 반대하고 찰스1세 처형에 반대하는 롱 팔리어먼트 를 토마스 프라이드.가 숙청을 해. 너 찬성 반대 해서 자기들 편으로 남은 찌꺼기 들로 구성된게 럼프 팔리어먼트야. 여기서 찰스1세를 처형 판결을 한거고. 애들이 만든 카운슬.이고. 여기의 짱이 로어드 프레지던트.야.
John Bradshaw (1602 – 31 October 1659)
초대 로어드 프레지던트.가 존 브래드쇼.이고 이 인간이 찰스1세 사형 판결할때 대법관석에 선 인간이고. 찰스2세가 복위 전에 죽어서, 죽은 애들 꺼내 다시 죽일때, 크롬웰 과 사위 이어튼 에 이 존 브래드쇼.가 돼. 이들은 다 목을 짤라.
올리버 크롬웰.은 로어드 프레지던트.를 안해. 참 이런건 배워야 해. 실세는 말이지, 저럴때 등장하는게 아니걸랑.
The Commonwealth was the political structure during the period from 1649 to 1660 when England and Wales, later along with Ireland and Scotland,[1] were governed as a republic after the end of the Second English Civil War and the trial and execution of Charles I. The republic's existence was declared through "An Act declaring England to be a Commonwealth",[2] adopted by the Rump Parliament on 19 May 1649.
카먼웰쓰. 로 자기들 정식 국호 를 정한건, 저 이후 세달 지나서 5월 19일 인겨. 카운슬 이 정하고 의회가 승인을 한겨. 이때는 잉글랜드 인거고, 나중에 아일랜드 스콧을 넣은거고. 그리고 5년지나서, 정식으로 크롬웰이 로어드 프로텍터.가 되는겨. 물론 카운슬 스테이트 도 계속 유지를 하는거고. 얘들은 크롬웰 아래서 노는 애들이 된거야 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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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크롬웰.의 장녀 캐서린 크롬웰의 핏줄이야. 토마스 크롬웰이 헨리8세 때 최고자리걸랑. 그래서 이 크롬웰 성을 쓴겨 얘가. 제일 유명하고. 클레베의 앤.을 중매자리 섰다가 헨리한테 미움받아서 반역자 몰려 죽은 거걸랑. 얜 이걸 이용한겨 지 이름에. 이런걸 배워야 해. 이런건 카이사르 가 자기 고모부 써먹던 거랑 맥락이 같은겨. 집안에서 잘 활용한겨 애들 이름으로.
올리버 크롬웰.은 Huntingdon 헌팅던 에서 태어났어. 케임브리지 근처야. 여기서 1628년 에 하원의원으로 뽑힌겨. 29세에. 이때 의회는 찰스가 갓 즉위해서 권리청원 이란게 나오는 의회고. 찰스가 해산하고. 1640년에 스콧 비숍전쟁으로 의회소집할때 롱 팔리어먼트가 열릴때도 올리버 크롬웰은 의원이 돼. 이때는 케임브리지.야. 이때 잉글랜드 내전을 한겨. 롱 팔리어먼트이고. 이 인간은 럼프 팔리어먼트 의원에. 뉴모델아미 를 쥐고 배후세계로 논겨. 그러다가 일본애들 번역한 호국경이 된겨 이게. 아 음청나 얘.
After the dissolution of the Barebones Parliament, John Lambert put forward a new constitution known as the Instrument of Government, closely modelled on the Heads of Proposals. It made Cromwell Lord Protector for life to undertake "the chief magistracy and the administration of government". Cromwell was sworn in as Lord Protector on 16 December 1653, with a ceremony in which he wore plain black clothing, rather than any monarchical regalia.
찰스가 1649년 1월에 목짤리고, 크롬웰이 8월에 아일랜드 원정가고, 여기서 다음해 까지 있다가, 1650년에는 스콧에 원정가는겨 찰스2세가 저리 갔으니. 그리고 잉글랜드 돌아와서, 찌꺼기 의회를 해산하고, 배어본즈 의회를 만들고. 이것도 해산을 해. 그리고나서, 존 램버트 가 새 헌법을 내밀어. 인스트루먼트 오브 거번먼트.라는 이름으로. 이건 이전에 한번 했던 헤드즈 오브 프로포절즈.를 되풀이 한겨. 저건 찰스가 감금되고 이미 권력 넘어온 상태에서 계엄령 같은 거걸랑.
걍 지들만의 헌법.을 만들고, 의회도 자진해서 투표를 하는겨 해산이. 왜냐면 찰스한테 대든 명분이 의회 소집 및 해산을 권력자 맘대로 못하게 했잖오. 지들끼리 투표해서 해산하면서 절차적 민주주의 ㅋㅋ 를 하는겨 지들이. 지들은 킹과 다르다며.
헌법을 저렇게 만들고. 저기서 호국경.을 만든겨 지들이. 그리고 초대 호국경은 올리버 크롬웰 이 된겨. 얘가 호국경이 된 근거가 저거여 ㅋㅋㅋ. 머 의회가 모여서 한것도 아니고. 그리고서 호국경 체제의 의회.가 다시 만들어지는겨 ㅋㅋㅋ. 아 코메딘데.
The family's estate derived from Oliver's great-great-grandfather Morgan ap William, a brewer from Glamorgan who settled at Putney near London,
올리버의 고조할배가 모간 앱 윌리엄.인데, 웨일즈 아래 글래모르간 에서 양조장하던 사람이야. 런던 근처 퍼트니로 이주하고. 즉 크롬웰 이란 이름은 아빠 정도에서 성으로 쓰기 시작한건데. 머냐면, 돈을 번겨 저때부터 증조 에서 내려오면서. 그러면서 크롬웰 을 쓰고자 한겨 가문의 유명함을 드러내고 픈거야 부가 쌓이고.
Cromwell's paternal grandfather Sir Henry Williams was one of the two wealthiest landowners in Huntingdonshire. Cromwell's father Robert was of modest means but still a member of the landed gentry. As a younger son with many siblings, Robert inherited only a house at Huntingdon and a small amount of land. This land would have generated an income of up to £300 a year, near the bottom of the range of gentry incomes.[13] Cromwell himself in 1654 said, "I was by birth a gentleman, living neither in considerable height, nor yet in obscurity"
크롬웰의 할아버지.가 지주였어 헌팅던 에서. 아빠 로버트 는 짝은 지주야. 왜냐면 형제가 많은겨. 나누다 보니까 집 하나와 작은 땅 하나를 받은겨 아빠는. 이걸 올리버 가 받은거고. 크롬웰이 1654년 호국경이 되서 말했다. 나는 젠틀맨 으로 태어났는데, 대단하게도 그렇다고 없이도 살지 않았어 걍 평범하게 살았어.
Cromwell was baptised on 29 April 1599 at St John's Church,[15] and attended Huntingdon Grammar School. He went on to study at Sidney Sussex College, Cambridge, then a recently founded college with a strong Puritan ethos. He left in June 1617 without taking a degree, immediately after his father's death.[16] Early biographers claim that he then attended Lincoln's Inn, but the Inn's archives retain no record of him. Antonia Fraser concludes that it was likely that he did train at one of the London Inns of Court during this time.[17] His grandfather, his father, and two of his uncles had attended Lincoln's Inn, and Cromwell sent his son Richard there in 1647.[17]
Cromwell probably returned home to Huntingdon after his father's death. As his mother was widowed, and his seven sisters unmarried, he would have been needed at home to help his family.[18]
헌팅던 그램머 스쿨.에 입학하고. 그램머 스쿨이 가장 좋은 초딩학교여. 케임브리지의 시드니 서식스 칼리지 에 갔는데, 여긴 그때 생긴 렬렬한 퓨리튼 감성의 학교였다. 1617년 18세에 학위 없이 나왔어. 아빠가 죽어서. 링컨 인.이라는 법학 공부하는 학교에 간겨. 여기에 그에 관한 아무런 기록이 없다. 헌데 어쨌거나 여기 다녔어. 그리고 헌팅던에 다시 와서, 엄마는 혼자 되고, 누이들이 일곱이야. 집에서 돈벌어야 하는겨. 가세가 확 기운겨 아빠 죽으면서. 받은 땅도 짝고.
Little evidence exists of Cromwell's religion at this stage. His letter in 1626 to Henry Downhall, an Arminian minister, suggests that Cromwell had yet to be influenced by radical Puritanism.[21] However, there is evidence that Cromwell went through a period of personal crisis during the late 1620s and early 1630s. In 1628 he was elected to Parliament from the Huntingdonshire county town of Huntingdon. Later that year, he sought treatment for a variety of physical and emotional ailments, including valde melancholicus (depression), from the Swiss-born London doctor Théodore de Mayerne. In 1629 he was caught up in a dispute among the gentry of Huntingdon over a new charter for the town, as a result of which he was called before the Privy Council in 1630
저때 20대이고, 고향에서 있으면서 1628년에 하원의원이 잠시 된거고. 헌팅던에 있으면서 과격한 퓨리튼 이 된거로 보여. 아르미니언 목사에 준 편지를 보면. 크롬웰은 나이 30전후에 개인적 위기를 겪었다. 먼지 몰겄는데, 육체적 정신적 병이 문제였나봐. 몸 과 정신 치료하는데 몰두를 했다. 우울증 같은. 헌팅던 젠트리 사회에서 새로운 마을 조문을 만드는데 관여하고 이걸로 1630년에 코트의 카운슬에도 불려갔었다.
In 1631 Cromwell sold most of his properties in Huntingdon—probably as a result of the dispute—and moved to a farmstead in nearby St Ives (then in Huntingdonshire, now in Cambridgeshire). This signified a major step down in society compared with his previous position, and seems to have had a significant emotional and spiritual impact. A 1638 letter survives from Cromwell to his cousin, the wife of Oliver St John, and gives an account of his spiritual awakening. The letter outlines how, having been "the chief of sinners", Cromwell had been called to be among "the congregation of the firstborn".[21] The language of this letter, which is saturated with biblical quotations and which represents Cromwell as having been saved from sin by God's mercy, places his faith firmly within the Independent beliefs that the Reformation had not gone far enough, that much of England was still living in sin, and that Catholic beliefs and practices needed to be fully removed from the church.[21] It would appear that in 1634 Cromwell attempted to emigrate to Connecticut in America, but was prevented by the government from leaving.[23]
1631년. 32세에 헌팅던의 자기 재산들을 다 팔았어. 아마 저때 저 조문 만드는게 먼가 문제가 된겨 킹 코트에서. 그리곤 케임브리지 쪽으로 이사를 하고. 여기서 먼가 사람들 만나면서 달라진거야. 강한 감성적 정신적 충격을 얻었다. 크롬웰 1638년 39세 편지를 보면 정신적 각성을 했다는게 보인다. 죄인들의 우두머리 라고 크롬웰은 자칭한겨. 그러면서 첫자식. 장자들 중 하나라고. 퍼스트 본.은 지저스여.
얘가, 신들린겨 저때. 케임브리지 로 가서. 1631년 부터. 일찍 들었어 보니까. 1638년에 편지에서 확인이 되고.
신이 들리려면, 잡신 말고, 나는 지저스요 지저스와 직통이요 해대는 지경까지 가야 강력한 믿음이 생기는겨.
저때가 막, 비숍전쟁 시작하기 직전이야. 그리고 여기서 다시 케임브리지 하원의원이 되서 롱팔리어먼트 에 들어간거야.
크롬웰은 신의 은총으로 죄에서 구원되었다고 생각하는겨. 당시 리포메이션 시대에도 이런 생각 하는 사람은 없었다는거지. 당시 프로테스탄트들 업계에서 가장 앞장선 분이셔 이분이.
그래서, 미국 코네티컷 으로 이민가려했다가, 이게 중앙 킹 코트에서 막으면서 못간겨. 그리고는 하원이 된거야.
이분은 강력한 믿음력을 받으신 상태에서 저때 하원으로 들어가신겨.
이때 이분은 완전 듣보잡인겨.
아 왜 갑자기 이분 이분 해대냐 이거.
Along with his brother Henry, Cromwell had kept a smallholding of chickens and sheep, selling eggs and wool to support himself, his lifestyle resembling that of a yeoman farmer. In 1636 Cromwell inherited control of various properties in Ely from his uncle on his mother's side, and his uncle's job as tithe collector for Ely Cathedral. As a result, his income is likely to have risen to around £300–400 per year;[24] by the end of the 1630s Cromwell had returned to the ranks of acknowledged gentry. He had become a committed Puritan and had established important family links to leading families in London and Essex
크롬웰은 자기 동생 헨리와 함께 닭들 양들을 키우면서 달걀과 울을 팔며 지내다. 당시 요우먼 과 비슷했다 수준이. 그러다가 1636년에 삼촌과 엄마쪽의 유산을 받고, 삼촌 의 교회 십일조 징수일을 받아서 수입이 좋아졌다. 그래서 다시 젠트리 수준으로 돌아왔다. 퓨리튼에 전념하고 런던과 에식스 의 잘나가는 친척과 교류하게 되다.
Cromwell became the Member of Parliament for Huntingdon in the Parliament of 1628–1629, as a client of the Montagu family of Hinchingbrooke House. He made little impression: records for the Parliament show only one speech (against the Arminian Bishop Richard Neile), which was poorly received.[26] After dissolving this Parliament, Charles I ruled without a Parliament for the next 11 years. When Charles faced the Scottish rebellion known as the Bishops' Wars, shortage of funds forced him to call a Parliament again in 1640. Cromwell was returned to this Parliament as member for Cambridge, but it lasted for only three weeks and became known as the Short Parliament. Cromwell moved his family from Ely to London in 1640.[27]
처음엔 별볼일 없어. 과거 헌팅던 의원의 기록도 연설 한개 있고. 아르미니언 주교 상대한 연설인데, 후지단 거지 내용이. 케임브리지 의원이 되고. 찰스가 어쩔수 없이 의회소집해야 한거고. 헌데 이것도 단지 3주 열렸고. 이때 크롬웰이 런던으로 이사를 온겨. 그리고 저해 11월에 다시 의회가 열려. 롱 팔리어먼트의 시작이야.
A second Parliament was called later the same year, and became known as the Long Parliament. Cromwell was again returned as member for Cambridge. As with the Parliament of 1628–29, it is likely that Cromwell owed his position to the patronage of others, which might explain why in the first week of the Parliament he was in charge of presenting a petition for the release of John Lilburne, who had become a Puritan cause célèbre after his arrest for importing religious tracts from the Netherlands. For the first two years of the Long Parliament Cromwell was linked to the godly group of aristocrats in the House of Lords and Members of the House of Commons with whom he had established familial and religious links in the 1630s, such as the Earls of Essex, Warwick and Bedford, Oliver St John and Viscount Saye and Sele.[28] At this stage, the group had an agenda of reformation: the executive checked by regular parliaments, and the moderate extension of liberty of conscience. Cromwell appears to have taken a role in some of this group's political manoeuvres. In May 1641, for example, it was Cromwell who put forward the second reading of the Annual Parliaments Bill and later took a role in drafting the Root and Branch Bill for the abolition of episcopacy
크롬웰은 헌팅던 의원때 처럼 잘나가는 애 우산으로 들어가야 하는거고. 퓨리튼 을 석방하라는 탄원에 나서기도 했다. 크롬웰은 첫2년간 상원의 아리스토크랫들. 고급귀족들과 교류를 하고 신앙으로, 하원 의원들과는 가족끈과 종교끈으로 교알게 되고. 양심의 자유 가 막 어젠다가 되었다 하고. 크롬웰이 이때 좀 나선듯도 하다. 1641년 에는 법안의 읽기 두번째 주자로 나서고. 찰스의 종교통일 금지 법안 초안 작성에도 참여한듯.
저러다가 내전이 본격적으로 터진겨 1642년 1월 이후에. 잉글랜드에서. 이사람은 듣보잡이야.
헌데, 전쟁하면서, 올리버 크롬웰 이 이끄는 부대가, 두각을 나타내는거야.
얘가 저때 기병 전법이. 니투니 라는게 무릎을 붙일 정도로, 기병들을 아주 붙여 다니게 한거야. 이건 위험한겨. 총 맞기 쉽상이걸랑. 헌데 이게 오히려 상대에겐 위협적인겨. 전쟁은 기세싸움이걸랑. 딱 붙은듯한 기병들이 한덩어리로 몰려오면서 총쏘는거야. 저건 무식한듯한 죽음을 각오한겨 이게.
이 올리버 크롬웰.이 자긴 구원된 인간이라며, 당연히 신 이 자기 배후에 있는겨.
강력한겨 이런게. 이게 잔다르크 여. 또한.
제일 무서버 이런게.
아 이 믿음이란게 진짜 골때리는겨 이게.
그러면서, 자기 자신도 완전히 지저스 2인자 처럼 행동하는거고, 이게 부대원들한테서 걍 떠받들어지면서 충성충 하는거고. 이게 철기군 의 시작이고. 이게 뉴모델아미 가 되는겨.
그러면서 저 듣보잡 크롬웰.이 페어펙스 까지 내 몰고, 일인자 가 된겨.
머 더 이상은 더 볼 게 없겠어.
걍 이유.가 궁금해서 정리해봤다. 다른건 안궁금하다 이 이상은 얘한텐.
신들리자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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