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eutenant-General Michael Jones (died December 1649) was an Anglo-Irish soldier who fought for King Charles I during the Irish Confederate War but joined the English Parliamentary side when the English Civil War started. He is noted for his victories at the Battle of Dungans Hill and the Battle of Rathmines, which facilitated the Cromwellian conquest of Ireland.
마이클 존스.는 아빠가 웨일즈 사람이고, 아이리쉬 클래어 카운티로 이주해서 킬래루 주교.야. 아일랜드에 정착한 잉글리쉬여. 바닥이 웨일즈고 아이리쉬와 같은 게일 이고. 아이리쉬 가 찐한 인간이야. 이사람은 찰스파였다가 팔리어먼트로 갈아탄건데.
The son of Lewis Jones (1560–1646), a Welshman who settled in Ireland, becoming Bishop of Killaloe, the young Jones was a student at Lincoln's Inn when the Civil War began, but fought in the army of Charles I during the early part of the Irish Rebellion of 1641.[1]
After the cessation of hostilities in Ireland in 1643 the extreme party among the Irish Protestants determined to send Jones and other representatives to press their views on the king during the negotiations for the treaty with the Irish rebels, which were to take place at Oxford in the spring of 1644. Carte prints a speech which Jones addressed to Ormonde on behalf of his fellow-commissioners. Finding, however, that he would be expected to bring over his company to join the Royalist army in England, Jones declined to act, and shortly afterwards entered the service of Parliament
링컨 인.의 학생이었어. 변호사들 만드는 최고의 학교여 저기가. 내전이 터지고, 아마 아일랜드에 있던듯 하고, 프로테스탄트였고, 즉 콘페더레이트 가 아녀 이사람은, 1643년에 휴전했을때, 아이리쉬 프로테스탄트쪽에서 마이클 존스 를 찰스 한테 보내. 콘페더레이트 와 우리가 싸우는데 자기들 입장을 전달하러. 이때 옥스포드 포위 를 했던 1644년 봄이고. 더하여 왕정파 와 같이 하라고 병력을 같이 보냈는데, 존스가 잉글랜드 와서 팔리어먼트 에 가담을 한거야.
Jones speedily distinguished himself as a cavalry leader. He took part in the defeats of the royalists at Tarvin (21 August 1644), at Malpas (26 August 1644), and in the repulse of John, Lord Byron's attempt to relieve Beeston Castle on 18 January 1645.[5] On 18 September 1645 Jones, together with Adjutant-general Lowthian, stormed the suburbs of Chester, and six days later helped Poyntz to gain a victory at the Battle of Rowton Heath. On 1 November 1645 Colonels Jones and Thomas Mytton defeated at Denbigh the troops which Sir William Vaughan had collected for the relief of Chester, and in December Jones routed another relieving force at Holt-bridge, and captured its commander, Sir William Byron.[6] On 6 February 1646 the surrender of Chester, Jones was appointed governor of the city by Parliament.
존스 가 바로 팔리어먼트로 들어가서, 타빈 에서 카발리에 들을 이기고. 말파스. 비스콘 을 지켜. 여긴 모두 체스터셔.야. 웨일즈 동북쪽이야. 1644년 8월에서 1646년 2월까지, 이 체스터셔 에서 왕정파를 다 이기는겨. 존스가 팔리어먼트로 부터 여기 거버너 로 임명이 돼.
But his skill and courage, his family connection with Ireland, and his knowledge of the conditions of Irish warfare marked him out for employment in the suppression of the Irish rebellion. On 3 July 1646 it was voted that the horse regiments of Colonels Jones and Sydney should be immediately despatched to Ireland, but he did not actually set out till a year later.[7] Originally it was intended to appoint him deputy-governor of Dublin under Algernon Sydney, but as early as 24 March 1647 he is spoken of as "commander-in-chief of the forces employed in this service of Dublin", and on 9 April an ordinance was passed appointing him governor.[8] Jones and the other parliamentary commissioners landed at Dublin on 7 June 1647, and concluded a treaty with Earl of Ormonde (His old Royalist commander) for the delivery of Dublin and other places still in his possession on 18 June 1647.[4] Ormonde agreed the terms and surrendered Dublin to him without a fight in June 1647 saying that he "preferred English rebels to Irish ones"
기병으로 최고여. 확실한 프로테스탄트고 왕정파를 1년 반 진압하는걸 보고, 아일랜드를 잘 아니까, 팔리어먼트에서 존스를 아일랜드로 보내기로 해. 1646년 7월. 이미 잉글랜드쪽은 팔리어먼트에 기울었고. 헌데 마이클 존스.는 아일랜드에서 태어난거고, 일년간 주저하는데, 아마도 데퓨티 거버너, 부지사로 임명되길 바라면서 지연한 듯 하단거지. 또는 자기 손으로 아일랜드 치러 가는게 부담스러울수도 있을꺼고. 자기입장에선 한번 배신했걸랑. 아일랜드 카톨릭이든 프로테스탄트든 모두 찰스 지지파였걸랑. 더블린 지역의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이 되고 다음해. 더하여 거버너 로 임명되서 1647년 6월 7일 날 더블린에 도착을 해. 오르몬드 가 부른거야. 이건 전적으로 카톨릭 콘페더레이트 애들 탓이야. 오르몬드가 자기가 점령한 더블린.과 자기병력 3천명을 그냥 줘 마이클 존스에게. 오르몬드가 말하길, 마이클 존스는 아이리쉬 반란군들보다 잉글랜드 반란군들을 더 좋아했다. 어차피 모두 반란군인거고, 오르몬드가 보기엔 존스 가 아이리쉬 보다 잉글리쉬 인간들을 더 좋아했다 고 본거야. 아이리쉬 정체성이 없다는겨 존스에겐.
오르몬드 가 마이클 존스 와 걍 웃으면서 저리 헤어진거고, 그러다 오르몬드 는 다시 왕정파 로 아일랜드에 온겨 인치킨 의 요청도 있고. 그리고 찰스의 목이 짤리고.
On 2 August Jones made a sudden sally, drove the besiegers out of Baggotrath, fell on Ormonde's camp at Rathmines, and took camp, artillery, baggage, and eighteen hundred prisoners. "There never was any day in Ireland like this", says Whitelocke, "to the confusion of the Irish, and raising up the spirits of the English, and restoring their interest, which from their first footing in Ireland was never in so low a condition as at that time". A few days later Ormonde wrote to Jones for a list of his prisoners. "My Lord", replied Jones, "since I routed your army I cannot have the happiness to know where you are that I may wait upon you". He tried to use his victory to recover Drogheda, but Ormonde was still strong enough to oblige him to raise the siege (8 August).[14]
오르몬드는 인치킨 과 더블린쪽으로 가고. 1649년 8월에 래뜨마인즈 전투야. 여긴 오르몬드가 점령한 상태고, 오르몬드가 쳐들어가는겨.
아일랜드에 이런 날은 없었었다. 화이트 로크 는 말한다. 아이리쉬들에겐 이런 혼란이, 잉글랜드인들에겐 이런 기세란, 잉글랜드는 당시 아일랜드에 온 이후로 최악의 상황이었는데 다시 힘을 되찾았다.
마이클 존스.가 계속 밀리다가, 래뜨마인즈 전투에서 대승을 하면서 사기가 확 오른거야. 이건 인치킨 이 없어서 그렇고, 오르몬드 가 완전히 판단착오를 한거고. 이건 오르몬드 때문에 진 거야. 허나 어차피, 이기던 지던, 바로 크롬웰이 와.
오르몬드가 존스에게 써서 보냈어 포로목록을. 존스가 답을 해. 경이시여, 내가 당신 부대를 진압한 이후로 행복하지 않아 당신이 있는 곳을 알게 되서, 당신을 기다리께. 존스는 드로거더를 수복하려 했고, 오르몬드는 그래도 여전히 강했다.
그러다, 크롬웰이 오고, 마이클 존스는 크롬웰 밑에서 남부 진압을 하러 가고. 헌데 이미 지쳤어.
On 19 December 1649 Cromwell announced his death to the speaker. "The noble lieutenant-general, whose finger, to our knowledge, never ached in all these expeditions, fell sick; we doubt upon a cold taken upon our late wet march and ill accommodation; and went to Dungarvan, where, struggling some four or five days with a fever, he died, having run his course with so much honour, courage, and fidelity, as his actions better speak than my pen. What England lost hereby is above me to speak. I am sure I lost a noble friend and companion in labours".[17] Jones was buried in St. Mary's Church at Youghal, in the Earl of Cork's chapel.
걍 병들어 죽어. 크롬웰 있을때. 하원의장에 크롬웰이 그의 죽음을 알려. 최악의 여건에서 어쩌고 저쩌고 병 에 걸리서 버티다가 죽고. 엄청난 귀한이였다며, 잉글랜드가 잃은것은 나보다 위인 존재고, 그의 행동은 나의 펜보다 더 잘 말할거라며.
Colonel Edward Sexby or Saxby (1616 – 13 January 1658) was an English Puritan soldier and Leveller in the army of Oliver Cromwell. Later he turned against Cromwell and plotted his assassination.
커널 에드워드 젝스비. 1658년 42세에 크롬웰 애들에게 체포되서 죽었는데. 감금되서 병으로. 잉글랜드 사람이고, 퓨리튼 이었고. 레벨러.였어. 크롬웰 의 초기 아이언사이드. 뉴아미모델.의 전신.때부터 기병 이었어. 이건 기병대고. 그러다 뒤에 대대장 정도까지 올라가고, 팔리어먼트의 외교 사절로 프랑스에도 가고. 핵심적인 한편 이었다가, 올리버 크롬웰이 프로텍터 라는 호국경 에 매달리는 거 보고, 등돌리고, 암살 음모에 관여해. 대륙에 가서 올리버 크롬웰의 모든 외교서류들을 다 공개해서 전략을 들춰내고. 그러다가 체포되서 죽는겨.
레벨러. 는 극좌 야 지금 용어로는. 저때 뉴모델아미 에서 나온건데. 여기 부대에서 선거로 뽑힌 대표들을 Agitator 라고 해. Agent 에이전트 에서 깨진 말이야. 자기 부대 의견을 전달하는겨. 이들이 결국 부대 리더들이 또 되는거지만. 이 에지테이터 가 진화한게 레벨러.야. 초기 찰스1세를 잡았을때 암살을 하려는 이들이 레벨러 였어. 더가서 권리 확대를 시민들까지 가는겨. 정치적 으로 가는겨 얘들이. 평등 을 외치고.
이전에 말했지만, 권리청원 이니 인신보호청원 이니 하는건, 아무런 맥락을 모르는 사가 애들이 오매 위대한 인권 시작 어쩌고 저쩌고 하걸랑. 저건 하원들 을 위한 보호법이야. 시민들 을 위한게 아냐 얘들이. 이걸 시민들 까지 확장하는 실재운동을 하는게 레벨러 여. 이때 등장하는겨. 올리버 크롬웰 애들은, 먼 개소리여 저게. 저당시 저건 공산당 하자는 최초의 소리걸랑. 야, 그건 하원 들을 우리들을 위한 거여. 개소리 말어. 이 레벨러 들이 짜그러지고. 이 반대 가 Grandees 라고 해. 그란디즈. 레벨러 들은 걍 사라지는겨. 이 레벨러 의 한 사람이 젝스비.였어.
The Banbury mutiny was a mutiny by soldiers in the English New Model Army. The mutineers did not achieve all of their aims and some of the leaders were executed shortly afterwards on 17 May 1649.
벤버리 뮤티니. 벤버리 가 옥스포드셔.이고 여기서 뉴모델아미 의 레벨러 들이 반란을 했다는건데. 제목이 잘못된거고, 걍 크롬웰이 야밤에 기습해서 죽인겨 불만있다는 애들을.
The mutiny was over pay and political demands. The pay issue was defused by Oliver Cromwell acknowledging the justice of the soldiers' financial grievances and securing £10,000 towards payment of arrears from Parliament. But 400 troopers under the command of Captain William Thompson who were sympathetic to the Levellers set off from Banbury, where they were billeted, to speak with other regiments at Salisbury about their political demands.
Major White was sent by Cromwell and Thomas Fairfax to mediate with Thompson's troops and give assurances that force would not be used against them. However, on 13 May Cromwell launched a night attack. Several mutineers were killed in the skirmish. Captain Thompson escaped only to be killed a few days later in another skirmish near the Diggers community at Wellingborough. After being imprisoned in Burford Church with the other mutineers,[1] three other leaders were shot: Cornet James Thompson (William Thompson's brother), Corporal Perkins and John Church on 17 May 1649.[2] This destroyed the Levellers' power base in the New Model Army.
뉴모델 아미. 에 돈이 안 꽂히는거고. 얘들은 상비군이야. 헌데 월급이 안꽂혀 제대로. 더하여, 레벨러 들이야. 권력이 더 내려가야 한다는거야. 꼬라지가, 이건 킹 죽고, 크롬웰 이 킹 인겨. 대체 머가 달라. 저게 찰스 죽고 5월 17일 이야. 사개월 후야.
올리버 크롬웰은, 1만 파운드를 확보하고 주기로 한거고, 돈문제는 해결한셈 치고, 헌데 400명 의 뉴모델아미.가 레벨러 들에 동정적인거야. 레벨러 와 생각이 같아지는겨. 정치적으로 움직이는겨 이들은.
토마스 페어펙스 는 원래 최고 자리였고, 찰스 문제와 뉴모델아미 문제로 크롬웰 에게 자리를 내준 상황이야. 밀렸어 이사람이. 중재를 중간에서 하고, 니덜한테 별일 없을거다 안심시키는데, 크롬웰이 야밤 기습을 한거야. 두서너명이 죽고. 부대장 톰슨은 탈출하고 며칠후 죽고. 대부분 투옥이 되고. 리더 세명은 총살시키고. 이걸로 레벨러 들 세력이 끝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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