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lanners of the rebellion were a small group of Irish landowners, mainly Gaelic Irish and from the heavily planted province of Ulster. Hugh Oge MacMahon and Conor Maguire were to seize Dublin Castle, while Phelim O'Neill and Rory O'Moore were to take Derry and other northern towns. The rebellion was to be executed on 23 October 1641.

스트랫포드 백작 토마스 웬트워뜨 가 처형된게 1641년 5월12일 이여. 웬트워뜨가 아일랜드 킹대리고, 아일랜드에서 세금 걷어서 원래 아이리쉬들이 싫어할 수밖에 없는데. 그래도 이 사람이 아일랜드 카톨릭 인정하고 찰스가 이 힘과 합치란게 들통이 난겨. 아일랜드가 떠는거야. 잉글랜드 팔리어먼트가 여길 처들어올껴 이거. 

더하여, 얼스터 플랜테이션 으로 아이리쉬 들에 이전 아이리쉬화된 잉글랜드인들이 삐쳤걸랑. 이 두 개의 마음이 섞인게 애매한거야. 이 집단 무의식의 힘은 맹목.이야. 눈가림 이고. 여기서 사건이 발생하는거야. 의도치 않은. 

이때 아일랜드를 먹자 아예. 하며 쿠데타 세력이 등장해. 휴 오지 매크맨. 코너 맥과이어. 더블린을 점령하려는겨 쿠데타로. 스트랫포드 백작 이 처형당하고 벌어지는 거야. 1641년 10월 22일에 발각이 된겨. 다음날에 하려 했걸랑. 더블린에 병력이 짝아. 쉽게 쟁취할 수 있었는데 이게 들통이 난거야. 

휴 오지 매크맨.은 매크맨 부락들이고. 얼스터의 남쪽이야. Thomond Oriel. 여기 방계가 또몬드 와 오릴.인데 또몬드는 9년 전쟁때 아일랜드를 떠나서 프랑스로 가고. 오릴 의 매크맨 만 남은겨. 걍 토종 아이리쉬여. 

코너 맥과이어. 는 매크맨의 왼쪽 Fermanagh 페르마나.지역의 부락이야. 이들은 배런 이야. 나름 자리를 잡은 아이리쉬야. 저때 메크맨 과 혈연으로 뭉치고 반란을 주도해. 맥과이어는 먼저 사형당하고, 매크맨.은 모든 사실 인정하고, 4년 후에 프랜시스 베이컨 의 법정에서 사형판결 받고 죽어. 

Rory O'Moore (Irish: Ruairí Ó Mórdha) (c. 1600 – 16 February 1655), also spelled Roger O'Moore or O'More or Sir Roger Moore, was an Irish landowner of ancient lineage, and is most notable for being one of the four principal organizers of the Irish Rebellion of 1641.  

로리 오무어. 매크맨 과 맥과이어 와 함께 주도자야. 둘은 잡히고, 이사람은 안잡힌겨. 

Sir Felim Rua O'Neill of Ceann Ard (Kinard) (c. 1602 – 1653), also called Phelim Roe O'Neill or Féilim Rua Ó Néill (Irish), was an Irish nobleman who led the Irish Rebellion of 1641 in Ulster, which began on 22 October 1641  

펠림 루아 오닐. 키나드.가 Caledon 캘키딘.이고 티론 Tyrone 카운티고. 오닐들 있던곳이고. 이 오닐 이나 맥과이어 나 팔리어먼트 의원이야. 

펠림 오닐.은 늦게 알어. 그래서 이사람은 더블린에서 안잡혀. 저길 안간거야. 둘이 잡히고 이 얼스터 에서 이사람이 들고 일어나고, 로리 오무어 도 합세 하는겨. 처음 저 넷 이 시작한거야. 둘은 잡히고, 둘은 살고. 이 중에 중심은 이 펠림 오닐.이 되는겨. 저때 다들 막 40 이 된거야. 

저때 얼스터 학살.이 일어난겨. 5개월 이상. 이 책임이 펠림 루아 오닐.에게 있다고 하는거고. 

The number of planters killed in the early months of the uprising is the subject of debate. Early English Parliamentarian pamphlets claimed that over 200,000 Protestants had lost their lives.[29] In fact, recent research has suggested that the number is far more modest, in the region of 4,000 or so killed, though many thousands were expelled from their homes.[30] It is estimated that up to 12,000 Protestants may have lost their lives in total, the majority dying of cold or disease after being expelled from their homes in the depths of winter  

얼스터 플랜테이션 으로 사회적 반감이 최고조일때인겨. 9년 전쟁 이후 30여년동안 쌓인겨 이게. 저당시 잉글랜드 팔리어먼트 애들이 나중에 발표하길 20만의 사람들이 얼스터에서 죽었다는겨. 최근의 사료들은 훨씬 적을 거란 거고, 아마 4천명 정도. 즉 저때 잉글랜드 팔리어먼트 애들이 올리버 크롬웰의 아일랜드 대학살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과장 했다 란거걸랑. 수천명은 쫓겨난겨 자기들 플랜테이션 에서. 총 12,000명이 죽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대부분은 추위와 병으로, 집에서 쫓겨나서. 저때가 10월 말 부터 해서 한겨울지나는 동안 벌어진게 얼스터 학살이걸랑. 

 

저당시 인구가 얼스터가 전체 20만명이 될 수도 없고, 잉글랜드 팔리어먼트 들이, 아일랜드 대학살을 정당화 하기 위해 저때 만든 조작된 수치여 저게. 

O'Neill went ahead and started the rebellion in the north, capturing the important fort of Charlemont, but quickly found that he could not control the Irish Catholic peasantry he had raised. These people, many of whom had been displaced during the Plantation of Ulster, began attacking the Scottish and English Protestant settlers with varying intensity over a period of 5 months. Being in command, O'Neill has been blamed for complicity or lack of oversight in these massacres, the detail of which is still a matter of contentious debate.  

오닐.이 북쪽에서 반란을 시작하고 주도한겨. 샬러몬 을 점령해. 그런데, 아이리쉬 카톨릭 농부들을 통제 못하는겨. 자기가 만든 부대인데, 이들의 열받음이 40년 가까이 쌓인거걸랑 9년전쟁 이후로는. 더하여 래뜰린 학살 따지면 칠팔십년 넘은겨. 이런게 쌓여서 저때 들어온 스콧인들 잉글랜드인들 프로테스탄트 정착민들에게 아주 화끈하게 푸는거야. 5개월 이상. 한겨울 넘으면서. 오닐이 이걸 주도는 안한듯 해도, 책임은 있다는거지. 

On 24 October 1641 O'Neill issued the Proclamation of Dungannon in which he claimed to have the King's authorisation to rise in defence of the Crown and the Catholic religion. On 4 November 1641 O'Neill again issued the proclamation at Newry and read out a commission from Charles I of England dated 1 October, commanding him to seize: "...all the forts, castles, and places, of strength and defence within the kingdom, except the places, persons, and estates of Our loyal and loving subjects the Scots; also to arrest and seize the goods, estates, and persons of all the English Protestants, within the said kingdom to Our use. And in your care and speedy performance of this Our will and pleasure We shall rely on your wonted duty and allegiance to Us which We shall accept and reward in due time." This gave O'Neill's forces the impression that they were acting within the law. Charles later denied issuing the commission.[10]  

10월 23일 하기로 했는데, 전날에 매크맨과 맥과이어가 체포가 되고, 이틀 후에 선언문을 발표해. 자기는 킹의 권한을 갖고 있는겨, 세 킹덤의 합인 크라운과. 카톨릭을 지키는 명분으로. 찰스 1세 가 자기한테 허락을 했다는거야. 모든 요새 성 들을 점령하고, 대신 스콧 신민들은 충성스럽고 사랑스러우니 여긴 가지 말라며. 잉글랜드 프로테스탄트 의 것들만 체포하고 취하라. 즉 자기는 찰스1세 와 이미 연대가 된거고, 스콧 도 우리편이니까 스콧은 우리랑 함께 하자는거고. 그러면서 합법 이란겨. 찰스1세는 이걸 부정했다. 

 

O'Neill was a member of the Irish Parliament in the 1630s and studied law at King's Inns in London, as a knowledge of the subject was considered important for landowners of the era. He may have at one point briefly converted to Protestantism, before returning to Catholicism.  

 

이 펠림 오닐.도 아이리쉬 팔리어먼트 의원이고, 런던의 킹스 인즈.라는 최고 법학과정에서 법공부하고, 앵글리칸도 되었다가 다시 카톨릭이 된건데.

 

스콧의 헌틀리 후작 조지고든,이나 해밀톤 도 당근 작위 있는 이고, 당연히 당대 지식인이고 대학 다 나온 이들이고, 위대한 몬트로즈 라는 제임스 그램.은 글래스고 대학 나오고 그리스책 번역한 인재고, 쟤들이 극동의 단순무식한 애들이 아녀 이 수준이. 

 

In 1639 O'Neill was awarded a knighthood by the Lord Lieutenant Thomas Wentworth thanks to the influence of his relation the Earl of Antrim.[6] Shortly before the rising, O'Neill evicted some of his Gaelic tenants near Caledon and replaced them with British settler families who were able to pay higher rents. 

 

펠림 오닐.은 완전히 잉글랜드화 된 인간이야. 스트랫포드 백작 웬트워뜨한테 기사작위도 받았어 직전에. 자기 땅에 브리튼 사람들을 플랜테이션 직접 한겨. 왜냐면 렌트비를 더준대. 

 

헌데, 저러면서도 괜히 바닥엔 아이리쉬 에 대한 마음이 불끈한겨. 결국 지가 심은 사람들을 자기가 만든 부대로 내치게 한겨. 얘도 가만 보믄 좀 이도저도 아닌 인간인거여.

 

On 17 March 1642 these nobles signed the "Catholic Remonstrance" issued at Trim, County Meath that was addressed to King Charles I. On 22 March, at a synod in nearby Kells chaired by Hugh O'Reilly, Archbishop of Armagh, a majority of the Catholic bishops proclaimed that the rebellion was a just war.  

 

On 10 May 1642, Ireland's Catholic clergy held a synod at Kilkenny. Present were the Archbishops of ArmaghCashel and Tuam, eleven bishops or their representatives, and other dignitaries.[4] They drafted the Confederate Oath of Association and called on all Catholics in Ireland to take the oath  

 

저건 네명 이 시작해서 두명 체포되고, 펠림 오닐.이 주도하게 되는거야. 그리고 바로 선언문 발표하고, 다음에야 아일랜드 카톨릭이 뭉치는겨. 얼스터 학살 겨울 지나고, 1642년 3월에, 귀족들이 모여, 미드 카운티.에서 카톨릭 레몬스트런스. 30년 전에 네덜란드 아르미니언들 올덴바르네벨트 들이 한 레몬스트런스 를 그대로 갖고 오는겨 이게. 네덜란드는 칼뱅애들이, 아일랜드는 카톨릭애들이. 참 골때리는건데. 즉 저건 교회용어여. 주도를 아르마 대주교 휴 오라일리. 할배가 하고. 자기들 반란은 정당한거고. 그리고 5월에 콘페더레이트 초안이 처음 나오고. 

 

The first Confederate General Assembly was held in Kilkenny on 24 October 1642 

 

정식 콘페더레이트 대회의.가 당해 10월에 시작하는거야. 이들이 콘페더레이트 가 되는겨. 얼스터 렌스터 먼스터 코노트 자잘한 귀족들이 참여하고 대주교 주교들에. 귀족들이 높아야 비스카운트. 자작이야. 

 

여기서 군사권의 중심은 펠림 오닐.이야. 주도권을 쥐었걸랑. 

 

여기에 황당하게도, 교황 사절이 와서 콘페더레이트 에 참여해.  

 

Giovanni Battista Rinuccini (15 September 1592[1] – 28 December 1653) was an Italian Roman Catholic archbishop in the mid-seventeenth century. He was a noted legal scholar and became chamberlain to Pope Gregory XV. He was made the Archbishop of Fermo in Italy by Pope Urban VIII in 1625. He is best known for his time as Papal Nuncio to Ireland during the Irish Confederate Wars (1645–49) during the Wars of the Three Kingdoms.  

 

지오반니 바티스타 리누치니. 교황 그레고리 15세의 집사여. 페르모 대주교이고. 교황이 이사람을 아일랜드에 사신으로 보내고, 콘페더레이트 에 적극적 발언을 해. 영향력이 쎈거야. 촌 동네 아일랜드에 온 교황 사절이여. 그렇다고 지들이 병력 주는것도 아니고.  

 

Eoghan Ruadh Ó Néill (anglicised Owen Roe O'Neill), c. 1585 – 6 November 1649, was a Gaelic Irish soldier and one of the most famous of the O'Neill dynasty of Ulster in Ireland.  

 

Thomas Preston, 1st Viscount Tara (1585 – October, 1655) was an Irish soldier of the 17th century. After lengthy service as a mercenary in the Spanish Army Preston returned to Ireland following the outbreak of the Rebellion of 1641

 

오웬 오닐. 토마스 프레스톤. 1585년 생으로 같어. 저때 55세이고. 둘 다 스페인 용병이었어. 스페인 플랑드르 군대에서 네덜란드 전쟁에 30년전쟁 프랑스 애들과도 싸운겨.

 

오웬 오닐.은 정통 오닐 가문이야. 이전 9년 전쟁때 주도한 휴 오닐.의 동생이야. 형은 따나서 로마가서 죽고. 헌데 오웬 오닐은, 배스타드여. 펠림 오닐.과는 세컨드 커즌이고 펠림 이 아들뻘이야 나이로. 펠림 오닐은 지주여 돈많은. 갓 기사 작위도 받았고. 오웬 오닐은 배스타드 지만, 오닐의 정통성이 강하고 곧 할배나이야. 플랑드르 군대에서 두드러졌고. 토마스 프레스톤 도 레벤 전투에서 버틴인간이야. 스페인에 콜하는거야. 우리 아일랜드 일벌어졌는데, 스페인이 우리 배후하라. 스페인이 이때 못 나서. 30년 전쟁 막바지여. 이것만도 벅찬겨. 아라스 전투에서 막 패했을 때여. 여유부릴 때가 못돼. 

 

오웬 오닐.과 토마스 프레스톤 이 오면서 콘페더레이트 에 가담을 해.

 

프레스톤.은 형이 Gormanstown 미드 카운티 고먼스타운 자작.이야. 위원회 한자리 있는 형이고. 그래서 저 의회의 군사력을 프레스톤 이 취하는겨. 오웬 이 당해 7월에 오는데, 프레스톤 에 밀린겨. 얼스터로 가. 사촌 아들뻘 펠림 오닐.이 있는. 

 

이 펠림 오닐.은 원래 지주고, 잘 살던 사람이고, 괜히 아이리쉬 마음이 들어서리 이리 된건데. 그래서 온건파 일 수 밖에 없어. 전쟁 잘 몰라. 얼스터 학살 벌어진건 걍 무주공산 들어간거고, 자기가 원한 일도 아니고. 그러다가 오웬 오닐 이 온거야. 이 펠림 오닐은 나중에 1653년 에 잡혀서 처형당해. 얼스터 학살 이유로 현상금 붙은 사람이 돼. 

 

 

To Ó Néill the devastation of Ulster made it look, "not only like a desert, but like hell, if hell could exist on earth". Ó Néill stopped the killings of Protestant civilians, for which he received the gratitude of many Protestant settlers. From 1642–46 a stalemate existed in Ulster, which Ó Néill used to train and discipline his Ulster Army. This poorly supplied force nevertheless gained a bad reputation for plundering and robbing friendly civilians around its quarters in northern Leinster and southern Ulster.  

 

오웬 오닐이 얼스터 와보니까, 자기 사촌 펠림 오닐.이 약탈 학살한 현장을 본거야. 지옥 같았다, 지옥이 땅에 존재한다면. 오웬 오닐이 학살을 멈추게 하고, 여기 정착민들이 고맙다고 하고. 오웬 오닐이 여기서 자기 얼스터 부대를 훈련시킨겨. 헌데 병참을 제대로 못받아, 결국 약탈 로 유지를 할 수 밖에 없는겨. 친한 거주민들을 대상으로. 악명이 높을 수 밖에 없고. 답이 없는 현장이야. 

 

The Battle of Benburb took place on 5 June 1646 during the Irish Confederate Wars, the Irish theatre of the Wars of the Three Kingdoms. It was fought between the Irish Confederation under Owen Roe O'Neill and a Scottish Covenanter and Anglo-Irish army under Robert Monro. The battle ended in a decisive victory for the Irish Confederates and ended Scottish hopes of conquering Ireland and imposing their own religious settlement there.  

 

밴버브 전투. 1646년. 오웬 오닐.의 얼스터 부대랑. 교황사절 리누치니.가 배불리 먹인 용병들과 합세해서, 스콧 커버넌트 와의 전투야. 얼스터여. 스콧애들이 이리 온겨. 여기에 잉글랜드가 합세하고. 이걸 오웬 오닐이 대승을 해. 적은 부대로, 3백여면 죽었는데 스콧 잉글리는 이삼천명이 죽어. 

 

아일랜드 콘페더레이트 에서, 전투를 이기는 사령관 은 저때부터 오웬 오닐. 하나인거야. 리누치니.가 이 오웬오닐을 지원하게 돼 이때부터. 

 

James Tuchet, 3rd Earl of Castlehaven (c. 1617 - 11 October 1684) was the son of Mervyn Tuchet, 2nd Earl of Castlehaven and his first wife, Elizabeth Barnham (1592 - c. 1622). Castlehaven played a prominent role in the Wars of the Three Kingdoms that took place in the middle of the 17th century, and was particularly active in the conflicts in Ireland at this time.   

 

캐슬해이븐 백작 제임스 투셰. 완전히 잉글랜드화 된 아이리쉬.여. 잉글랜드에도 땅이 있는. 아빠가 목짤리면서 빼앗겼지만. 잉글랜드 정착민들이 가장 좋아하고. 프레스톤 과 투셰 가 같이 움직이는데, 투셰 가 전쟁을 잘 못해. 그래도 민심은 이 투셰 를 좋아해. 그나마 전투 벌어지는 승리하는 부대가 이 투셰 부대야 아일랜드는. 오웬 오닐보다 못하지만. 

 

In March 1646 a treaty was signed between Ormonde and the Catholics, which would have committed the Catholics to sending troops to aid the Royalist cause in the English Civil War. The peace terms, however, were rejected by a majority of the Irish Catholic military leaders and the Catholic clergy including the Nuncio, Rinuccini. Ó Néill led his Ulster army, along with Thomas Preston's Leinster army, in a failed attempt to take Dublin from Ormonde. The Irish Confederates suffered heavy military defeats the following year at the hands of Parliamentarian forces in Ireland at Dungans Hill and Knocknanauss, leading to a moderation of their demands and a new peace deal with the Royalists. This time Ó Néill was alone among the Irish generals in rejecting the peace deal, and found himself isolated by the departure of the Papal Nuncio from Ireland on 23 February 1649  

 

벤버브 전투. 에서 승리를 할 즈음에, 이전 3월에 잉글랜드 내전에 찰스를 도와 줄 부대를 파견하기로 했어. 찰스가 스콧 에 잡아가쇼 하는게 1646년 5월 이야. 옥스포드에서 변장 탈출하고 노팅엄셔 뉴워크에서. 이 전해에 네이즈비 전투.와 랭포트 전투로 끝난겨 찰스 왕정파는. 1645년 중반에 확 기울은거야. 이걸 콘페더레이트가 알고, 아일랜드 전투를 피하고 잉글랜드로 가기로 하고. 오르몬드 공작과 조약을 맺어. 

 

Lieutenant-General James FitzThomas Butler, 1st Duke of OrmondKGPC (1610–1688) was an Irish statesman and soldier, known as Earl of Ormond from 1634 to 1642 and Marquess of Ormond from 1642 to 1661.[a] Following the failure of the senior line of the Butler family, he was the second representative of the Kilcash branch to inherit the earldom.  

 

오르몬드 공작 제임스 피츠토마스 버틀러. 오르몬드 는 버틀러 들의 땅이야. 버틀러는 데스몬드 반란때도 엘리자벳 편이고 제임스와 친하고, 이사람 친구가 처형당한 스트랫포드 백작 웬트워뜨.야. 이사람은 더블린.을 점령중인거고, 킬페니의 콘페더레이트와 조약을 맺는겨. 프로테스탄트들의 종교를 허용하자, 아일랜드는 지금 콘페더레이트 가 지배적인겨 이게. 헌데 이 전해 1645년에 네이즈비 전투, 랭포트 전투 하면서 잉글랜드 본토가 왕정파가 카발리에 들이 밀리는거야. 저길 건너가야 해. 그래서 이게 성사가 되었어. 벤버트 전투 직전 3월에.

 

오르몬드 는 킹 지지 왕정파 지만, 콘페더레이트 가 아니여. 이게 상황이 웃긴거야. 서로 킹 지지인데, 서로 싸우는거야. 즉 다른 귀족애들입장에선, 아이리쉬화된 이들이, 저건 걍 반란군이야. 

 

헌데 콘페더레이트 애들이 막상, 강경파가 저걸 거부하는거야. 이 중심에 저 교황사절  리누치니.가 주도하고 교회 애들이 적극 나서서, 프로테스탄트를 용인하다니 아일랜드에서. 말도 안된다며 저 조약 파기를 선언해. 

 

저때 무조건 갔었어야 하는거야 아일랜드는. 밴버브 전투 이기고 좀 좋걸랑 기운도. 

 

저건 오르몬드 와 전쟁 하겠다는거야. 오르몬드 공작이 더블린 을 갖고 있었걸랑. 오르몬드 는 이때 잉글랜드 팔리어먼트를 부르는겨. 

 

오웬 오닐과 프레스톤의 부대가 더블린을 점령하려는 게 실패해.  이후 대부분 전투에서 콘페더레이트 는 밀리는거야. 

 

Ormond then judged that he could not hold Dublin against the Confederates. He therefore applied to the English Long Parliament and signed a treaty with them on 19 June 1647 delivering Dublin into the hands of the Parliamentarians on terms that protected the interests of both royalist Protestants and Roman Catholics who had not actually entered into rebellion. At the beginning of August 1647, Ormond handed over Dublin, together with 3000 royalist troops under his command, to the Parliamentarian commander Michael Jones, who had recently arrived from England with 5000 Parliamentarian troops. 

 

저때 오르몬드.가 더블린을 콘페더레이트 상대로 못지키니까, 팔리어먼트와 조약 맺고, 더블린을 넘기는거야. 자기 병력 3천명과 함께. 그리고 잉글랜드는 마이클 존스.가 5천명의 부대를 데리고 더블린에 오고. 오르몬드 는 팔리어먼트 편으로 돌아서게 되고, 찰스 1세 면회가고, 처형당하는거 보고 다시 아일랜드 콘페더레이트 병력을 맡는거야. 

 

저게 아주 결정적 장면이여 저게. 저때 저 교황사절 리누치니.

 

오웬 오닐.은 협상파여. 콘페더레이트는 협상 반대여. 현실을 모르는 애들이 얘들 회의체야. 대부분 카톨릭 에 쩔고 쩐 애들이 현실감 이 없는겨 이게. 이념에 미치면 이렇게 되는거걸랑. 이념에 미친 애들이 현실감이 없어 원래. 

 

찰스 1세 처형 당하고, 1649년.에. 저해 8월에 올리버 크롬웰.이 넘어오는겨 대학살을 하러. 

 

오웬 오닐.은 협상파였고 쟤들과 대화하는 애들이야. 콘페더레이트 가 보기엔 반민족주의자 로 비치고 변절자로 비치고. 

 

Daniel O'Neill (Irish: Dónall Ó Néill; c.1612 in Castlereagh – 24 October 1664 in Whitehall) was an Irish army officer, politician, courtier and postmaster general. He was part of the O'Neill Dynasty of Ulster, the nephew of Owen Roe O'Neill and the great-nephew of Hugh O'Neill, Earl of Tyrone.  

 

다니엘 오닐. 오웬 오닐.의 조카야. 펠림 오닐보다는 10년 어리고. 저때 30세여. 이사람은 잉글랜드에서 찰스1세 따라다니면서 싸우는거야. 그러다 찰스2세 의 스파이를 하고. 

 

이 오닐들이, 렬렬한 잉글랜드 킹덤 지지파가 된거야. 웃기게도. 1688 명예혁명 이후엔 재코바이트 가 된거고. 제임스2세 지지하는. 이게 웃긴겨. 아일랜드의 마음의 고향이 저 잉글랜드 킹이 된겨. 아주 애매해저 버린거야, 아일랜드 라는 정체성이. 

 

Ó Néill died on 6 November 1649[11] at the O'Reilly stronghold of Cloughoughter Castle on an island in Lough Oughter in County Cavan.[2]  

 

케이븐 카운티.의 클러프아우터 성.에서. 오라일리. 영주의 성인데, 사제가 독살로 죽였다느니, 걍 병으로 죽었다느니. 

 

토마스 프레스톤.은 헤이그로 가서 찰스2세 랑 같이 나중에 복귀된 왕정에서 작위를 받는거고. 

 

오르몬드.도 찰스2세 세상을 사는거고. 투셰 도 보상 받고 새세상 사는거고. 

 

오웬 오닐의 아들같은 사촌동생 펠림 오닐.은 현상금 붙었어. 크롬웰 애들에게 잡혀서 처형당하고. 

 

저 리누치니 는 크롬웰 오기전에 아일랜드 떠나서 이태리 가서 잘살고 뒈지고. 

 

 

콘페더레이트.의 깃발 헤덜드리. 비바트 렉스 카롤루스. 찰스 킹이여 만수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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