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랜드 의 역사를 보면 말이야. 이걸 다른 나라들을 보고 여길 보면, 정말 그야말로 압도적이고 독보적이여 여긴. 그러면서 앞으로 나가고 포용을 하는겨 소위 적폐들을. 이 통합의 역사는 얘들을 못따라가. 엄청나 얘들이. 이 조선 애들로서는 상상을 못하는 수준이야 이게.
이전에 영국이란 나라는 앤불린, 레이디제인그레이, 스콧마리 이야기했지만, 저 세여자가 만든겨 이 잉글랜드는. 더하여 엘리자벳1세. 이 영국의 여자들은 그야말로 위대해. 처형 장면에서의 저 여자들의 상징은 말야, 용서와 화해 여. 이게 바닥에 있어 이들이. 이걸 다른 애들은 못따라와. 그만큼 격렬하게 부딪히고 서로. 아 음청나 이 영국사란건.
얘들만 살아온겨. 진짜 격렬하게 살았어 저 브리튼 인간들은. 특히 잉글랜드. 처절하게 서로 싸우면서도 화해하고 묶은겨 이들은. 이 잉글랜드의 힘은 위대한겨. 이런 잉글랜드이기 때문에 미국을 만든거고.
조선 적폐 놀이애들 시선에선 사상을 못해. 일단 이 조선 애들은, 잉글랜드역사 를 이해할 수가 없어. 유럽사를 모르는데 어찌 잉글랜드 역사를 이해하겄니.
인신보호청원(人身保護令狀, 라틴어: habeas corpus 너는 몸이 있다)
하베아스 코르푸스. 가 1215 마그나 카르타 때 나오는겨 기본 정신이. 이 마그나 카르타 라는게 소위 인권의 시작 어쩌고 하지만, 인권 이란 말은 휴먼 라이트의 약자고. 권리청원 권리장전 모두 일본애들의 아주 잘못된 번역이고. 라이트 는 권리가 아녀. 이전썰 넘어가고.
마그나 카르타.가 킹을 옥죄면서 이게 킹의 권한을 통제를 한거야. 그러면서 저기서 퍼슨 이란 사람 을 함부로 하지 못하게 할때, 여기서 퍼슨 은, 배론 들의 대명사여. 우리 배론 들을 함부로 못 다루게 한게 마그나 카르타.야. 이게 팔리어먼트고.
하베아스 코르푸스.를 너는 몸이 있다. 참 그야말로 한심한 번역이야 저게.
habeās, second-person singular present active subjunctive of habeō
2인칭 단수 현재 액티브 서브정크티브 잖니. 서브정크티브.가 서브 융게레.여. 융게레 가 조인 join 참여에 더해지는거고 서브 바닥에 더해지는겨. 바닥을 추가하는겨. 이게 가정법 으로 말하는거고. 머 한다면. 이여. 머라 해석해야 하니. 니가 몸을 갖는다면. 니가 구속을 한다면. 2인칭이 누구겠니. 킹이여. 누구를 구속해? 우리라는 팔리어먼트 의원이야. 이 바닥에 까는건. 코트의 킹이 우리 의원을 구속을 한다면. 이란 뜻이여 저게. 머 너는 몸이 있다.
인신구속한다면, 그 구속이 합법인지 코트로 불러서 물어라! 하는겨.
저기서도 구금당하는 자.는 누구여? 배론이하 팔리어먼트 멤버들이여. 다른 나라는, 킹이 권력 잡기 위해서 맘대로 혐의 씌워서 구금하고 고문하고 권력을 뺏걸랑. 너 이후라도 그런짓 하지 말란겨 이게 마그나카르타 1215에 나오는거고 더 강화한겨 1640년 에. 찰스1세 때. 스콧 비숍 전쟁 패하고, 할수 없이 찰스가 팔리어먼트 를 소집하고. 이때 팔리어먼트가 이걸 더 추가를 한거야.
The Petition of Right . 1628. 권리청원 이라는 1628 은. 찰스1세.가 즉위하고 3년 지나서야. 이것도, 팔리어먼트 를 보호하기위한 요구사항이야. 말로는 머 인권 어쩌고 저쩌고 지만. 이게 결국 민들 권리까지 적용이 된거고. 지들이 만들고 이제 자기들도 민들을 함부로 못하는겨 이게. 퍼티션 이란건. 요구 하는거야. 라틴어여. 무거운 공적인 말이 퍼티션이야.
잉글랜드가 저런게 앞선건, 1215 마그나 카르타 부터여. 전적으로, 킹과 배론 들이라는 하급 귀족들과의 싸움에서 나온겨 이게. 이게 인권 개념 확대의 실현을 한거고. 얘들이 이게 차원이 다른겨 대륙보다. 이런게 비슷한게 네덜란드 가 된거고. 역시나 레겐텐 이라는 부르주아 들이 회의체 를 구성하면서 얘들도 뒤에 잉글랜드 팔리어먼트 와 비스무레 간거야.
잉글랜드는 저 배론 과 젠트리 가 만든거고. 그래서 인권 개념도 얘들이 시작을 한거야. 1215년 에 시작한겨 이게. 전혀 의도치 않게. 저때 라이트 란건, 신이 부여한 법 이란 거야 이 라이트 는. 신이 부여한 옳은 법. 정신. 천부인권이란게 1215부터 시작한겨. 이게 계속 대립하면서 구체화 되는거고. 이건 전적으로 배론 과 젠트리 를 위한거야 시작이. 이게 의도치 않게 전 시민층으로 확대가 된거고. 지들이 저걸 요구할때 지들 계급만 내세울 수가 없었던거고. 자연스레 이게 바닥 시민들에게 깔리는겨. 그래서 얘들은 진짜 카먼웰쓰 인거야. 카먼 이란건, 우리들 모두 이고 같음 이야. 위대한겨 얘들은.
차원이 달라 차원이. 대륙보다도, 하물며 극동은, 이 극동 이야긴 유럽사와 비교를 하는게 아냐 특히나 16세기 부터는. 이 극동 이야긴, 걍 후짐들 이야기야 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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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들이 즉위를 하면, 마스터 플랜.을 짜. 이 유럽 이야길 보면. 킹들마다 이게 있어. 자기가 꼭 하고 싶은게 있어. 자기의 비전. 을 세우고 이걸 실현하려 해. 역사에 먼가 남기고 싶은겨. 이건 대부분 유럽 군주들의 공통된 사항이야.
찰스1세.도 아빠의 유지를 이어서. 더 나가서 진짜로 세 킹덤을 하나로 합치고 싶은겨. 세 킹덤의 전쟁은 이 이슈가 가장 커. 찰스1세의 이 의지. 이 의지의 실패가 내전으로 치달은 거고. 그럴 수 밖에 없었고. 단지 레큐전트 법. 1558 하면서 앵글리칸 예배식 안따르면 그 교회 신도들 모두 벌금. 설교하면 징역. 이런걸로 저런 게 해결이 안돼.
This extravagance was tempered by James's peaceful disposition, so that by the succession of his son Charles I in 1625 the two kingdoms had both experienced relative peace, internally and in their relations with each other, for as long as anyone could remember. Charles followed his father's dream in hoping to unite the kingdoms of England, Scotland and Ireland into a single kingdom.[14] Many English Parliamentarians were suspicious of such a move, fearing that such a new kingdom might destroy old English traditions that had bound the English monarchy. As Charles shared his father's position on the power of the crown (James had described kings as "little gods on Earth", chosen by God to rule in accordance with the doctrine of the "Divine Right of Kings"), the suspicions of the Parliamentarians had some justification
쟤들 저때 사치 라는 엑스트러버건스.는 과한 평가야. 쟤들은 걍 품위유지 수준이여. 특히 이 잉글랜드는. 저런 사치 어쩌고는 대게 근대 사가 들의 중세 욕질에 흔히 붙는 단어야. 대표적인게 앙투아네트 목걸이에 빵이야기고. 모~두 사기야 사기. 중세 유럽 이미지 대부분은, 조작 이고 주작 이야. 마치 조선 위대해유 하는 것 처럼. 이 조선 위대해 는 그야말로 벌레들의 무지에서 나오는 개소리고.
제임스도 성격도 보면 유해. 바보 소리 들을 만큼. 아 이 제임스 가 참 싀안한 사람이야. 난 제임스 높이 평가해. 평화의 시기고 미국 제임스 타운 의 제임스고. 팔리어먼트 가 강력한거고 스튜어트 듣보잡이라며 우습게 보는거고 잉글랜드 애들이. 아무것도 못해 제임스는. 엘리자벳 이 뭔가 깊은 작업이 들어갔어 제임스에겐. 엄마 스콧마리 이야기 담지 말라. 스콧과 잉글랜드 합쳐야 한다. 이런게 깊이 들어간겨 이게. 평화롭게 다진겨, 뭘 하고 싶어도 못해 낯설고 잉글랜드 팔리어먼트는. 찰스1세가 1625년에 올랐어. 아빠 해오던거 봤걸랑. 깝깝해 팔리어먼트가. 자긴 진짜 합치고 싶어. 이게 아주 강력해. 스콧 아일랜드 와 하나 되는겨. 아빠가 킹들은 신이 선택한 작은 신들이라고 했어. 디바인 라이트 오브 킹 이라는 이 왕권신수설.이란게 잉글랜드의 특허여 이건. 리차드 1세가 만든말이여. Dieu et mon droit" ("God and my right") 리차드 1세.가 십자군 갔다가 동생이 쿠데타 오르고 땅뺏긴 소식에 돌아오다가 체포되서리 신성로마에서 재판받을때 한소리야. 나는 군주고 군주는 신 외에 가장 높고, 따라서 책임이 막중하다. 라며 신과 나의 법정신. 권한. 을 처음 꺼내고. 제임스1세.가 의회 연설할때, 신의 대리인 이 킹들 이라며 언급한겨. 이게 유럽애들 최초여 이런 맥락은.
대륙에선, 신성로마는, 신의 대리인은 교황이여. 황제는 교황의 대리고.
찰스1세가 아빠 저말이 찐한겨. 헌데 힘도 못쓰는 아빠. 난 할껴 세킹덤을 하나로 묶는거. 앵글리칸 인 척 하면서 카톨릭을 더하는겨. 이건 아일랜드 는 카톨릭이라 이걸 합치려는 의도여. 가장 다른건 저 스콧의 프레스비테리안 이란 장로교여.
그런데, 찰스1세.는 아빠 제임스와 마찬가지 입장이야. 하고싶은 건 서원을 했는데, 못하는겨 이게. 멀 할수가 없어.
이 상충 이 내전으로 간겨 결국.
By the 17th century, Parliament's tax-raising powers had come to be derived from the fact that the gentry was the only stratum of society with the ability and authority to collect and remit the most meaningful forms of taxation then available at the local level. So if the king wanted to ensure smooth revenue collection, he needed gentry co-operation. For all of the Crown's legal authority, its resources were limited by any modern standard to an extent that if the gentry refused to collect the king's taxes on a national scale, the Crown lacked a practical means of compelling them.
잉글랜드의 부.가 젠트리 계층으로 간거야. 권력도 이리로 간겨. 이들이 팔리어먼트고. 팔리어먼트 가 권한도 생기고, 경제적 부도 성장을 한거야. 헨리7세 가 수립한 상업의 부흥이 이때 젠트리를 키운거야. 무얼 하려면 돈이여. 헌데 팔리어먼트의 허가 없이는 돈을 못 걷고 못쓰는거야. 그래서 킹이 저 법을 벗어나는 쪽으로 세금을 걷는겨. 팔리어먼트를 빌리지 않고.
Unable to raise revenue without Parliament and unwilling to convene it, Charles resorted to other means. One was to revive conventions, often outdated. For example, a failure to attend and receive knighthood at Charles's coronation became a finable offence with the fine paid to the Crown. The King also tried to raise revenue through ship money, demanding in 1634–1636 that the inland English counties pay a tax for the Royal Navy to counter the threat of privateers and pirates in the English Channel.[26]
잉글랜드는 솔즈베리 서약 이후로, 킹에게 하미지를 해야해. 이벤트가 있으면 킹을 위해 모여야 하고. 이건 전혀 다른겨 대륙과. 대륙의 기사들은 작위는 해당 영주 가 하는겨. 대륙은 아리스토스 라는 고급귀족들만 모이는겨. 잉글랜드는 그게 아녀. 이게 또한 잉글랜드의 정체성을 만든거고. 헌데 이것도 점점 유명무실해지는거거든. 점점 많아지면서 저게 될 수가 없어. 킹 대관식 하는데 모든 기사들이 다 갈수도 없고. 헌데 요걸 트집을 잡아. 찰스의 대관식에 참석 안하거나, 기사작위 직접 받으러 오지 않은 이들에게 벌금을 물리는겨. 이걸로 땅을 뺏기도 해 ㅋㅋㅋ.
더하여. 쉽 머니. 잉글랜드가 만든 해군.을 위한다면서, 해변의 카운티들에게 세금을 물리는겨. 세목을 새로 만든거야 찰스가. 사략과 해적들을 막아준다는 명목으로.
쉽머니 에 반발해서 체포하기도 해. 일단 저런걸로 찰스가 부딪히는겨.
기사들 벌금. 쉽머니. 에 더하여.
Tonnage and poundage were duties and taxes first levied in Edward II's reign on every tun (cask) of imported wine, which came mostly from Spain and Portugal, and on every pound weight of merchandise exported or imported. Traditionally tonnage and poundage was granted by Parliament to the king for life, but this practice did not continue into the reign of Charles I. Tonnage and poundage were swept away by the Customs and Excise Act 1787.
톤이지 앤드 파운디지. 이건 에드워드2세 때 나온 관세야. 스페인과 포르투갈산 포도주. 상인들의 수출입 물량에 대한 걸, 파운드 당 얼마 돈당 얼마 관세를 받는겨. 즉 이런것도 백년전쟁 직전에야 생긴거야. 이건 팔리어 먼트가 킹한테 준 세목이고 이건 킹 돈이야.
저런게 모두, 팔리어먼트 가 정지 시키는겨 뒤에.
종교 통일이야. 스콧 아일랜드 전에, 잉글랜드의 앵글리칸 을 먼저 유하게 가야해. 얜 바닥이 카톨릭이여. 이게 개인적 감정이 들어갔을거야. 더하여 전략적으로도 이건 맞아. 카톨릭 냄새를 더 해야 나머지 두개가 합해질수 있어.
He believed in High Anglicanism, a sacramental version of the Church of England, theologically based upon Arminianism, a creed shared with his main political adviser, Archbishop William Laud.[30] In 1633, Charles appointed Laud Archbishop of Canterbury and started making the Church more ceremonial, replacing the wooden communion tables with stone altars.[31] Puritans accused Laud of reintroducing Catholicism; when they complained, he had them arrested. In 1637, John Bastwick, Henry Burton, and William Prynne had their ears cut off for writing pamphlets attacking Laud's views — a rare penalty for gentlemen, and one that aroused anger.[32] Moreover, the Church authorities revived statutes from the time of Elizabeth I about church attendance and fined Puritans for not attending Anglican services.[33]
하이처치. 하이 앵글리칸이즘.은 이때 시작한겨 그래서. 카톨릭에 더하여, 아르미니언이즘 을 넣는겨. 이건 칼뱅의 운명론을 약화한거걸랑. 즉 스콧 장로교를 포섭하려고 아르미니언을 더한건데. 이 아르미니언이즘은 카톨릭에서 논쟁한 적이 없어. 상관이 없어 이게. 물론 칼뱅의 절대적 운명론은 카톨릭도 당연히 반대지만 아르미니언 은 나름 괜찮은겨.
이때 저 기획자 가 윌리엄 로드.라는 대주교여. 캔터레비에 임명해. 나무로 된 예배단 을 돌 로 바꾸고 이전 카톨릭 미사처럼 엄숙하게 한다는거지. 퓨리튼 이 로드 를 고발해 카톨릭을 심는다고. 체포하고 귀를 짤라. 앵글리칸 예배에 참석안하는 퓨리튼 들에겐 벌금을 매겨. 이건 레큐전트 법 1558 이야. 엘리자벳 때 만든건데 악법 취급받아서 사문화 되었다가 부활하는거야. 모~~든 이들에게 벌금이여 이건. 참석 안하는.
George Villiers, 1st Duke of Buckingham, KG (/ˈvɪlərz/;[1][2] 28 August 1592 – 23 August 1628), was an English courtier, statesman, and patron of the arts. Despite a patchy political and military record, Buckingham remained at the height of royal favour for the first three years of the reign of King Charles I, until a disgruntled army officer assassinated him.
조지 빌러즈. 버킹엄 공작.이야. 찰스1세가 초기에 가장 아끼는 측근이여. 마스터 오브 호스 Horse .말 의 마스터. 이게 브리튼에서 서열 3위 자리여. 군수 짱이여. 더하여 로어드 애드머럴. 해군 제독이고. 외교부 장관이야. 팔리어먼트에서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고. 이사람을 탄핵하는겨 의회에서. 이때 찰스가 의회를 해산해. 즉위하자 마자 벌어지는일이야. 그래서 조지 빌러즈.가 자리 유지하는겨.
헌데, 돈이 없어. 새로 팔리어먼트를 소집해. 1628년. 즉위하고 3년째여.
Having dissolved Parliament and unable to raise money without it, the king assembled a new one in 1628. (The elected members included Oliver Cromwell, John Hampden,[20] and Edward Coke.) The new Parliament drew up a Petition of Right, which Charles accepted as a concession to obtain his subsidy.[21] The Petition made reference to Magna Carta,[22] but did not grant him the right of tonnage and poundage, which Charles had been collecting without Parliamentary authorisation since 1625.[23] Several more active members of the opposition were imprisoned, which caused outrage;[23] one, John Eliot, subsequently died in prison and came to be seen as a martyr for the rights of Parliament.[24]
이때 만든게, 권리청원 이라는 1628년 이야. 이게 6월 이야. 이걸 찰스가 받아. 돈이 필요해서. 이 권리청원 1628에서 톤이지 파운디지 라는 수출입 관세 를 뺏어서 팔리어먼트가 갖고가. 더 강경하게 주장하는 팔리어먼트 의원들이 투옥이 돼. 존 엘리옷 은 버킹엄 을 탄핵하라는겨 계속. 더하여 미니스터들인 코트 장관들도 일일이 의회가 검증해야 한다는거고. 감옥에서 죽고. 이런 걸로, 1640년에 하베아스 코르푸스.가 나오는겨.
조지 빌러즈.가 권리청원 나오고, 두달 후에 암살을 당해.
1628년 이후로, 팔리어먼트 를 소집 안해 찰스가. 팔리어먼트 는 킹만이 소집할 권한이 있어. 즉위후 3년 부터 혼자 지배하는겨 이게. 이 앙금이 터진게 내전인겨. 십여년 쌓인거야. 스콧 에서 주교들을 내쫓으면서.
저당시 스콧.의 중심세력.은 커버넌터즈. 라고 해
The Covenanters were a Scottish Presbyterian movement that played an important part in the history of Scotland, and to a lesser extent that of England and of Ireland, during the 17th century. Presbyterian denominations tracing their history to the Covenanters and often incorporating the name continue the ideas and traditions in Scotland and internationally.
커버넌터들. 교회와 의회를 넘어서 이들이 뭉친겨. 이 커버넌트. 란건 약속의 궤.라 지만. 약속 이전에. 이건 agreement 어그리먼트.여. convene 컨빈에서 깨진 말이고. 라틴어 함께 모이다.에서 나온거고. 이건 동의.야. 같은뜻을 갖은 이들.이야. 이건 1557년, 스콧마리.가 프랑스 프랑수아2세 랑 결혼한다할때 반대하던 장로교들이 시작한겨. 이들은 커버넌트 란 이름으로 결정문을 내고 자기들은 커버넌터.가 되는겨. 같은뜻의 사람들.
저건 시작이 프레스비테리언.의 로어드들. 리더들의 연합체여. 이건 스콧 교회들 조직인겨. 따로 정치성을 띤거야. 이들이 의회와 교회 위에서 대변하는거고 전쟁도 이들 의사결정이야.
잉글랜드에서는 카톨릭과 아르미니언을 심고, 제단도 나무에서 돌로 바꾸고, 퓨리튼들이 대주교를 기소하고, 귀도 짤리고 하면서 일어날때, 스콧에서는 예배서를 바꾸란게 결정적인겨. 주교들을 내 쫓아. 이건 전쟁하자는거야. 찰스1세가 처들어가야해.
The English army mustered at the border town of Berwick-upon-Tweed totalled some 15,000 men but the vast majority were untrained conscripts from the Northern trained bands or militia, many armed only with bows and arrows. A Scottish army of 16,500 men under the experienced veteran Alexander Leslie, camped a few miles away on the other side of the border near Duns.[17] Many on both sides had fought in the European wars but the Scots ensured that a much higher percentage of their officers were veterans, providing a significant advantage over the English.
찰스는 돈이 없어. 그리고 스콧들에 사람들이 동정적이야. 일반적으로 봐도 좀 부당해 보이는겨. 찰스는 팔리어먼트 소집 안한지 십년이 넘고. 잉글랜드 는 네덜란드 가서 전쟁참여하던 이들이고 80년전쟁 1588 이후에. 스콧은 용병으로 먹고사는겨. 스위스 용병 다음에 이 스콧 용병이야. 강력해 이 인간들이. 스콧 의 병력이 잉글랜드보다 쎈거야.
스콧은 16500명이고 잉글랜드는 끽해야 15000 명 모은겨 찰스가. 이걸 지는거야 찰스가.
A Scots army defeated Charles's forces in the north, then captured Newcastle.[39] Charles eventually agreed not to interfere in Scotland's religion and paid the Scots' war expenses
뉴캐슬도 뺏기고, 조약할 수 밖에 없어. 스콧 종교에 관여안하겠다. 스콧의 전쟁비용을 지불하겠다. 이게 1639-40. 비숍 전쟁이야.
Charles needed to suppress the rebellion in Scotland, but had insufficient funds to do so. He needed to seek money from a newly elected English Parliament in 1640.[40] Its majority faction, led by John Pym, used this appeal for money as a chance to discuss grievances against the Crown and oppose the idea of an English invasion of Scotland. Charles took exception to this lèse-majesté (offense against the ruler) and dissolved the Parliament after only a few weeks; hence its name, "the Short Parliament
진압해야해. 할수 없이 12년 만에 팔리어먼트를 소집하는겨. 팔리어먼트 가 그동안 쌓인 분노를 터뜨리는거야 킹에 대한. 바로 해산시켜. 쇼트 팔리어먼트. 짧은 의회. 라 이름 지어.
All this put Charles in a desperate financial state. As King of Scots, he had to find money to pay the Scottish army in England; as King of England, he had to find money to pay and equip an English army to defend England. His means of raising English revenue without an English Parliament fell critically short of achieving this.[21] Against this backdrop, and according to advice from the Magnum Concilium (the House of Lords, but without the Commons, so not a Parliament), Charles finally bowed to pressure and summoned another English Parliament in November 1640.[38]
그런데, 계속 돈문제가 걸려. 잉글랜드로 온 스콧 자기 부대들 돈도 줘야 하고. 돈이 없는겨. 마그눔 콘킬리움. 윌리엄 초기때 의회.는 로어드즈. 고급귀족들 연합이 되고 이들이 팔리어먼트 를 소집할 수 밖에 없다고 하고. 할수 없이. 해산한 그 해 말 11월에 다시 소집한거야. 이게 롱 팔리어먼트.라는겨.
The new Parliament proved even more hostile to Charles than its predecessor. It immediately began to discuss grievances against him and his government, with Pym and Hampden (of ship money fame) in the lead. They took the opportunity presented by the King's troubles to force various reforming measures — including many with strong "anti-Papist" themes — upon him.[44] The members passed a law stating that a new Parliament would convene at least once every three years — without the King's summons if need be. Other laws passed making it illegal for the king to impose taxes without Parliamentary consent and later gave Parliament control over the king's ministers. Finally, the Parliament passed a law forbidding the King to dissolve it without its consent, even if the three years were up. Ever since this Parliament has been known as the Long Parliament. However, Parliament did attempt to avert conflict by requiring all adults to sign The Protestation, an oath of allegiance to Charles.[c]
똑같은 해.고. 똑같은 반복이고. 킹이 이전 숏 팔리어먼트 만든 장본인에. 소집과 해산을 맘대로 하는것 부터 못하게 해. 이제 팔리어먼트는 킹의 소집권을 뺏는거야. 무조건 3년마다 열어야 하고. 회기도 정해. 해산도 맘대로 못해. 불법적 세금을 못거둬 의회 없인. 이게 쉽 머니.여. 이것도 빼앗는겨. 더하여, 킹의 미니스터들 도 통제해. 이건 킹의 코트이고 지금식 행정부여.
걍 의회 세상이 된겨. 그래도 혹시나 킹이 삐칠까봐, 찰스에 충성합니다 라는 맹세를 돌리고 싸인을 하는겨. 걍 갖고 노는거지 머.
Thomas Wentworth, 1st Earl of Strafford (13 April 1593 (O.S.) – 12 May 1641) was an English statesman and a major figure in the period leading up to the English Civil War. He served in Parliament and was a supporter of King Charles I. From 1632 to 1640 he was Lord Deputy of Ireland, where he established a strong authoritarian rule. Recalled to England, he became a leading advisor to the King, attempting to strengthen the royal position against Parliament. When Parliament condemned Wentworth to death, Charles reluctantly signed the death warrant and Wentworth was executed.
토마스 웬트워뜨. 스트랫포드 백작. 조지 빌러즈 와 함께 찰스 지지파.야. 이사람은 아일랜드의 로어드 데퓨티. 찰스 대리인.인겨. 찰스가 돈이 없는걸 알어, 아일랜드에서 이 인간이 세금을 걷어서 찰스에게 주는겨. 조지 빌러즈 처럼,
이 웬트워뜨.가 1632년 부터 아일랜드에 있으면서. 아일랜드의 돈을 주면서, 찰스에게 조언하는게, 아일랜드의 종교를 인정해주고, 저 카톨릭 세력.이랑 손잡아서 팔리어먼트 를 누르라는거지. 이 이야기가 새어 나가면서, 팔리어먼트 입장에서 반란으로 재판없이 사형 시키라는겨 킹한테.
A bill of attainder (also known as an act of attainder or writ of attainder or bill of penalties) is an act of a legislature declaring a person or group of persons guilty of some crime and punishing them, often without a trial. As with attainder resulting from the normal judicial process, the effect of such a bill is to nullify the targeted person's civil rights, most notably the right to own property (and thus pass it on to heirs), the right to a title of nobility, and, in at least the original usage, the right to life itself. Bills of attainder passed in Parliament by Henry VIII on 29 January 1542 resulted in the executions of a number of notable historical figures.
어테인더 법. 어테인더 라는게, 법률용어인데, 올드 프렌치고. 중죄인에게 모든 권리를 박탈하는 거야. 여기에 더하여, 재판 없이 유죄 라 규정하고 처벌 하는겨. 헨리 8세 때인 1542년 에 생겼고, 이걸로 반역자로 낙인 찍혀 그냥 사형시키고. 이게 19세기까지 있었고. 월드워 투 때 나치 협업자 를 브리튼에서 비밀리에 활용한게 이 법이여.
스트랫포드 백작 웬트워뜨.가 이 법안으로 팔리어먼트에 잡혀서 처형당해. 찰스1세 는 무서워서 싸인하고. 왜냐면 저때 또한 찰스 니도 공범이여? ㅋㅋㅋ. 킹 한테 반역 음모를 씌우는겨 저 팔리어먼트들이.
처형당한 날이 1641년 5월 12일 이야.
These notes contained evidence that Strafford had told the King, "Sir, you have done your duty, and your subjects have failed in theirs; and therefore you are absolved from the rules of government, and may supply yourself by extraordinary ways; you have an army in Ireland, with which you may reduce the kingdom."[46][47][48]
웬트워뜨.가 찰스에 말한 노트가 증거로 채택이 된건데. 찰스에게 말하길. 당신은 당신 의무를 다 했고, 당신의 속민들은 그들의 의무를 하지 않았어. 그러므로 당신은 정부의 지배에서 의무감이 없어. 스스로 지원을 찾아야 해 특별한 방법으로. 아일랜드의 군대를 갖고 있어 당신은. 그걸로 저들을 진압할 수 있어.
On 21 April, the Commons passed the Bill (204 in favour, 59 opposed, and 250 abstained),[50] and the Lords acquiesced. Charles, still incensed over the Commons' handling of Buckingham, refused his assent. Strafford himself, hoping to head off the war he saw looming, wrote to the king and asked him to reconsider.[51] Charles, fearing for the safety of his family, signed on 10 May.[50] Strafford was beheaded two days later.[52] In the meantime both Parliament and the King agreed to an independent investigation into the king's involvement in Strafford's plot.
스트랫포드 를 어테인더법 으로 처리하는겨. 의회애들이 정하는겨. 4월 21일에 투표를 해 지들끼리. 찬성 204명 반대 59 기권 250. 즉 저때 총 의원들이 513명 이야. 킹이 승인을 해야 해. 거부해. 스트랫포드 가 킹을 설득해 내 가족을 지켜달라며 나는 죽겠소. 킹이 스트랫포드 웬드워뜨의 가족이 다칠까봐 싸인을 하고 2틀 후에 참수형으로 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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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롱 팔리어먼트.때 하베아스 코르푸스. 통과시키고. 의회 소집권 킹꺼 박탈하고. 의무적 3년마다 의회 소집하고. 회기 갯수도 법으로 정하고. 기사들에게 벌금 물리는것도 폐지해. 쉽머니 폐지에 더하여. 스트랫포드 백작 도 저리 처형시켜.
Charles and his Parliament hoped that the execution of Strafford and the Protestation would end the drift towards war, but in fact, they encouraged it. Charles and his supporters continued to resent Parliament's demands, and Parliamentarians continued to suspect Charles of wanting to impose episcopalianism and unfettered royal rule by military force. Within months, the Irish Catholics, fearing a resurgence of Protestant power, struck first, and all Ireland soon descended into chaos.[58] Rumors circulated that the King supported the Irish, and Puritan members of the Commons soon started murmuring that this exemplified the fate that Charles had in store for them all.
저걸로 끝난 줄 알았어. 그런데 이게 더 불을 지펴. 팔리어먼트 요구는 더 거세지고. 교회 통일하면서 하이처치 하는걸 의심하고. 아일랜드 가 특히 떠는거야. 아일랜드가 완전히 저때 불안해진겨 저러다 저 팔리어먼트 프로테스탄트들이 우리를 쳐들어온다. 스트랫포드 백작이 아일랜드 병력 이야기 꺼내면서 완전히 팔리어먼트 의 적이 된겨. 아일랜드 입장에서는 쟤들이 여길 쳐들어온다. 앵글리칸 입장에서는 특히나 퓨리튼들이, 찰스가 완전히 우리한테 등돌렸다. 중얼중얼 대기 시작하다.
In early January 1642, Charles, accompanied by 400 soldiers, attempted to arrest five members of the House of Commons on a charge of treason.[60] This attempt failed. When the troops marched into Parliament, Charles enquired of William Lenthall, the Speaker, as to the whereabouts of the five. Lenthall replied, "May it please your Majesty, I have neither eyes to see nor tongue to speak in this place but as the House is pleased to direct me, whose servant I am here."[60] So the Speaker proclaimed himself a servant of Parliament, rather than the King
다음해 1642년 1월.에 찰스가 4백명의 병력으로 하원의 5명을 반란혐으로 체포하려 해. 실패해. 팔리어먼트로 진입을 해. 스피커. 하원의장한테 물어 그 다섯명 어딨냐. 윌리엄 렌홀.이 답하다. 그대를 즐겁게 하고 싶지만, 나는 여기서 보는 눈과 말할 혀가 없어염. 하원이 즐거워 하겠지만, 나는 여기 하원의 서번트로 있는거예요.
하원 의장 자신이 자기는 팔리어먼트의 서번트 이지 킹의 서번트 가 아니라는겨.
In early January 1642, a few days after failing to capture five members of the House of Commons, Charles feared for the safety of his family and retinue and left the London area for the north country.[63]
하원의장의 저 말을 듣고, 런던을 떠나는겨 찰스1세와 가족과 수행원들이. 1642년 에. 이게 잉글랜드 내전의 시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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