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rles joined his troops at Berwick on 30 May and issued a proclamation announcing he would not invade Scotland, providing the Covenanter army remained ten miles north of the border 

 

비숍전쟁 1639-40 시작할때. 1639년 5월 20일에 찰스1세가 베릭. Berwick-upon-Tweed. 베릭 어폰 트위드.라는 마을이고. 지금 노떰벌랜드 카운티.의 북쪽 끝이고. 이 카운티가 스콧과의 경계여. 트위드 강이고. 찰스는 전쟁할 규모도 안되고, 걍 압박하러 간거야 저때. 이사람은 스콧에서 태어난 인간이고 감히 스콧애들이 자기한테 덤비는건 상상도 못하는겨.

 

The plan consisted of three parts; an English army of 20,000 would advance on Edinburgh from the south, while an amphibious force of 5,000 under the Marquis of Hamilton landed in Aberdeen and linked up with Royalist troops led by the Marquess of Huntly. Lastly, an Irish army under Randal MacDonnell, Earl of Antrim would invade western Scotland and join forces with the MacDonalds and other Royalist clans  

 

베릭 위에가 에딘버러여. 스콧의 찰스파.가 해밀턴 후작.이야. 5천명. 그리고 헌틀리 후작. 스콧 귀족들이고. 여기에 앤트림 백작 맥도날드.여. 앤트림은 얼스터 동북지역 해변 카운티고. 이 맥도날드.는 스콧애들이잖니. 솔리 보이.가 엘리자벳때 끝까지 저항하고, 이 후손들은 백작 을 받은겨. 얼스터 플랜테이션 하면서 아일랜드에 자리잡은 스콧 인간들이야. 아일랜드에서 이들이 온거야. 

 

James Hamilton, 1st Duke of Hamilton KG PC (19 June 1606 – 9 March 1649) was a Scottish nobleman and influential political and military leader during the Thirty Years' War and the Wars of the Three Kingdoms.  

 

George Gordon, 2nd Marquess of Huntly (1592 – March 1649), styled Earl of Enzie from 1599 to 1636, eldest son of George Gordon, 1st Marquess of Huntly by Lady Henrietta Stewart, daughter of Esmé Stewart, 1st Duke of Lennox, born at Huntly Castle, Huntly, Aberdeenshire, in Scotland[1] was brought up in England as a Protestant, and later created Viscount Aboyne by Charles I.  

 

해밀턴 공작 제임스 해밀턴. 헌틀리 후작 조지 고든. 비숍 전쟁 부터 찰스파여. 둘다 1649년 3월 에 죽어. 1월에 찰스 목아지 짤린거고. 해밀턴은 전 해에 잡히고, 헌틀리는 숨어다니다가 잡히고 바로 죽어.

 

The Battle of Naseby was a decisive engagement of the First English Civil War, fought on 14 June 1645 between the main Royalist army of King Charles I and the Parliamentarian New Model Army, commanded by Sir Thomas Fairfax and Oliver Cromwell. It was fought near the village of Naseby in Northamptonshire.  

 

1642년 1월에, 다섯명의 하원의원들 체포하려다 실패한 찰스.가 런던을 떠나면서, 저게 전역에서 터진거야. 이 잉글랜드 내전이란건 전 지역에서 반발한 백수십개 이상의 전투가 벌어지는거야 이건. 엄청난 내전이야. 저게 초기엔 시작하자마자 왕정파가 승기를 잡아. 시작하자 마자는 약간 찰스가 유리해. 이 세력이 서로 만만치 않은겨. 그러다 1645년 6월의 네이즈비 전투.에서 찰스 군대가 대패를 해. 이게 아주 결정적 이야. 

 

Robert Dalzell, 1st Earl of CarnwathPC (1611 – 21 June 1654), known as Robert Dalzell, 2nd Lord Dalzell from 1636 to 1639, was a Scottish nobleman and Royalist supporter during the English Civil War.  

 

저때 병력도 상대적으로 적었고, 팔리어먼트의 일인자가 저때 토마스 페어펙스,고 2인자가 올리버 크롬웰.이야. 이들이 함께 한거고. 찰스가 앞장서는데, 칸워뜨 백작 로버드 달젤.이 찰스 말의 고삐를 잡는겨 위험하다며, 그래서 찰스 말이 물러나고, 이때 병력이 이게 후퇴하라는 신호인줄 알고 뒤로 빠지다가 대패를 한거야. 찰스는 도망가고, 저때 모든 병력을 찰스가 잃으면서 끝난거야. 팔스의 가방이 넘어가고 여기에 모든 외교서신에 아일랜드와의 관계가 노출이 되고, 전략이 다 드러난겨. 

 

네이즈비.는 노땜프톤셔.고 런던 서북쪽이야. 이 위에 레스터셔가 있고. 

 

The Battle of Langport was a Parliamentarian victory late in the First English Civil War which destroyed the last Royalist field army and gave Parliament control of the West of England, which had hitherto been a major source of manpower, raw materials and imports for the Royalists. The battle took place on 10 July 1645 near the small town of Langport, which lies south of Bristol.  

 

그 다음달에, 랭포트 전투. 여긴 브리스톨 만 남쪽 소머싯.이야. 여기가 왕정파 병참의 중심이걸랑. 여기서 병력과 물자를 대는데. 여기서 참패를 해. 네이즈비 전투. 랭포트 전투 의 1645년 유월 칠월 이 두개로 끝난겨. 3년도 안되서. 

 

The Siege of Oxford refers to the English Civil War military campaigns waged to besiege the Royalist controlled city of Oxford, involving three short engagements over twenty-five months, which ended with a Parliamentarian victory in June 1646.  

 

찰스1세.가 1644 년 부터 자기 코트를 옥스포드.에 두는겨. 여긴 대학도시고, 두 아들 찰스와 제임스가 학교다니는 중이여. 여길 1644년에서 46년 까지 세번을 포위해. 1645년 에 두번째 포위를 해. 이때가 5월이야. 여기서 찰스가 나가서 6월 중순에 네이즈비 전투가 벌어지고 대패한거야. 그리고 다시 옥스포드로 와. 여길 또 포위해. 페어팩스 가 포위하면서 왕자들 식사하라고 밥도 배달해 줘. 찰스가 세번째 포위 1646년에 4월에 하인으로 변장을 해서 탈출을 해. 

 

He put himself into the hands of the Scottish presbyterian army besieging Newark, and was taken northwards to Newcastle upon Tyne.[232] After nine months of negotiations, the Scots finally arrived at an agreement with the English Parliament: in exchange for £100,000, and the promise of more money in the future,[g] the Scots withdrew from Newcastle and delivered Charles to the parliamentary commissioners in January 1647.  

 

자진해서 스콧 장로교 군대에 자수를 해. 뉴워크.가 노팅엄셔.이고. 이 아래가 레스터셔.고. 뉴워크 가 옥스포드 와 함께 찰스 지지하는 두 축이야. 여기를 포위한 스콧 군대에 나 여기있다. 그리고 타인강의 뉴캐슬.로 가는겨. 노떰벌랜드 남쪽이야 뉴캐슬이. 쟤들 어폰 타인. 하는 어폰 하는건 강 에 있다는 겨 저게 도시 이름이고. 9개월 동안 여기서 스콧애들이 팔리어먼트 애들과 협상하는겨. 얼마줄래. 10만 파운드 에 플러스 알파 주기로 하고 넘기는겨. 1647년 1월 에. 

 

Parliament held Charles under house arrest at Holdenby House in Northamptonshire until Cornet George Joyce took him by threat of force from Holdenby on 3 June in the name of the New Model Army.[235] By this time, mutual suspicion had developed between Parliament, which favoured army disbandment and presbyterianism, and the New Model Army, which was primarily officered by congregationalist Independents, who sought a greater political role.[236] Charles was eager to exploit the widening divisions, and apparently viewed Joyce's actions as an opportunity rather than a threat.[237] He was taken first to Newmarket, at his own suggestion,[238] and then transferred to Oatlands and subsequently Hampton Court, while more ultimately fruitless negotiations took place.[239] By November, he determined that it would be in his best interests to escape – perhaps to France, Southern England or to Berwick-upon-Tweed, near the Scottish border.[240] He fled Hampton Court on 11 November, and from the shores of Southampton Water made contact with Colonel Robert Hammond, Parliamentary Governor of the Isle of Wight, whom he apparently believed to be sympathetic.[241] Hammond, however, confined Charles in Carisbrooke Castle and informed Parliament that Charles was in his custody.  

 

찰스는 자기가 자진해서 체포가 된겨. 스콧 애들에게. 설마 스콧 애들이 나를. 헌데 진짜 죄수 취급하는거야 저것들이. 

 

노땜프톤셔의 홀든비.에 있다가. 서퍽의 뉴마켓. 템즈강 위의 오트랜드로 옮기고 템즈강변의 햄프톤 궁으로 가는데. 

 

1646년 5월에 걍 스콧애들에 나 잡아가라 하고는 1월에 잉글랜드로 넘기고 11월이 된거야. 이사람이 탈출을 하려해. 프랑스나 잉글랜드 남쪽이나. 베릭 스콧접경으로. 

 

저때 팔리어먼트 들의 문제가, 뉴모델 아미.여. 찰스 는 홀든비.로 올때 조지 조이스.가 이 뉴모델 아미.여. 뉴모델아미.와 팔리어먼트 가 세력이 갈리는겨 이즈음에. 팔리어먼트 에서는 뉴모델아미 를 해산하고싶고 얘들이 장로교들이 특히나 이쪽이야. 찰스가 뉴모델아미 애들의 구금속에 있는겨. 찰스를 어찌하나를 두고 얘들이 다투면서 답이 없는겨 이게. 이 와중에 찰스가 탈출을 시도해. 로버트 해몬드.가 와이트 섬.의 리더고. 여긴 햄프셔 잉글랜드 남쪽 해변의 섬이야. 자기 편일 줄 알았는데, 찰스가 오해를 한거야. 와이트섬에 오히려 구금되고, 저 상태서 다음해 재판받고 1649년. 1월 30일날 목짤리는겨. 

 

The Battle of Preston (17–19 August 1648), fought largely at Walton-le-Dale near Preston in Lancashire, resulted in a victory for the New Model Army under the command of Oliver Cromwell over the Royalists and Scots commanded by the Duke of Hamilton. The Parliamentarian victory presaged the end of the Second English Civil War

 

찰스가 탈출 실패하고나서. 1647년 11월. 그 다음해 1648년 에 랭커셔 의 프레스톤 전투.가 굳이 2차 잉글랜드 내전 1648-49 로 나누는데. 찰스가 구금동안 스콧애들에게 비밀리 연락해서 니덜 장로교 인정해줄테니 내편 하라며. 헌데 이게 의미가 없어. 걍 기존 스콧의 왕정파가 움직인겨. 이때 중심이 해밀턴.이야. 해밀턴은 이때 잡혀서, 찰스 다음해 목아지 짤리고 3월에 해밀턴도 처형 당하고. 헌틀리 후작 조지 고든.은 도망다니다가 잡혀서 처형을 당한겨. 스콧의 두 시작 찰스파. 비숍전쟁 시작했던 이들이 찰스 1월 죽을때 3월에 죽은겨. 이들은 끝까지 찰스파였어. 

 

 

Randal MacDonnell, 1st Marquess of Antrim (1609 – 3 February 1683) was a Roman Catholic landed magnate in Scotland and Ireland, son of the 1st Earl of Antrim. He was also chief of Clan MacDonnell of Antrim. He is best known for his involvement, mostly on the Royalist side, in the Wars of the Three Kingdoms.  

 

비숍 전쟁때 찰스를 따랐던 맥도널드.가 앤트림 후작 랜달 맥도날.이야 스콧 솔리보이 핏줄에 오닐이 마누라여. 아빠가 잉글랜드 하미지 해서 백작이고. 이들은 어쨌거나 스콧이야. 스콧 처들어가는데 힘이 안나는겨 이게. 아일랜드 돌아와서 내전이 터지고, 중립을 취해. 이사람은 자기 병력이 있는겨. 자기 땅을 지키는거고. 그러다 올리버 크롬웰 이 지배하면서 벌금만 물고, 이사람이 나름 처신을 잘한거야. 그러다 찰스2세 왕정복위되고 런던탑에 갇혀. 헌데 딱히 크롬웰 때 크롬웰 편도 들지 않았어. 풀려나. 내전의 상황에서 제일 처신 잘하면서 살아남은 사람이야. 물론 역사에선 평가를 안하겠지만. 랜달 맥도넬 처럼 살아야해 이 조선들의 땅에서 살려면. ㅋㅋㅋ. 저게 피론주의자야. 피론주의자가 되도록 해. 

 

해밀톤 공작 제임스 해밀톤 은 짤려 죽어. 이 사람들 참혹하게 죽이는 처형짓이 이 브리튼 이여. 얘들이 대륙에 떨어져서 야만의 습성이  찐해 한편으로. 반역으로 처형할때 배짜르는 짓들이 대부분 이 브리튼이여 이게. 프랑스가 상대적으로 그런일이 적은거고. 다 야만의 습성인건데 저런게. 

 

이 해밀톤.이 1606년 생이야. 스콧 비숍전쟁이 1639년 이고. 저때 33세 인데. 이사람이 전쟁 경험이 없어. 1631년 때 스위든 구스타부스 아돌푸스 가 30년전쟁 들어갈때 병력 이끌고 같이 갔는데. 전쟁 경험과 군대경험이 없어. 저기 다녀오고 비숍에 찰스편을 든건데. 좀 무능해 사람이. 단지 열정만 한가득 이야. 헌데 웃긴건 30년 전쟁때 이 해밀톤 부대가 명성이 자자한겨. 전쟁을 잘해. 해밀톤 덕이 아니라. 해밀톤의 참모가 탁월한 인간이야.

 

Alexander Leslie, 1st Earl of Leven (1582 – 4 April 1661) was a Scottish soldier in Swedish and Scottish service. Born illegitimate and raised as a foster child, he subsequently advanced to the rank of a Swedish Field Marshal, and in Scotland became Lord General in command of the Army of the Covenantersprivy councillor, captain of Edinburgh CastleLord Balgonie and Earl of Leven. In England he commanded the Army of the Solemn League and Covenant and was senior commander of the Army of Both Kingdoms (1642-1647).  

 

 

해밀톤 도 나중에 공작 작위를 받는거고. 원래 걍 마크였어. 참모가 24세 많은 아빠뻘인 알렌산더 레슬리.야. 뒤에 레벤 백작 이 되는. 레슬리 는 스콧 부락이여. 이사람은 배스타드.고 네덜란드 전쟁때 참전해서 캡틴도 받아. 더하여 스위든 용병으로 가서 러시아 폴란드 상대하던 용병이여. 해밀톤 의 부대를 이사람이 사령하는거야. 

 

헌데 레슬리.는 프로테스탄트 여. 자긴 찰스가 싫은겨 개인적으로. 이때 해밀톤 과 갈라서서 커버넌트 에 합류하는겨. 즉 자기가 모시던 해밀톤 과 적이 된거야. 그리고 잉글랜드 내전때도 잉글랜드 팔리어먼트 가 기대는 최고의 사령관 중 한명이 이 스콧의 레슬리야. 초기에 팔리어먼트가 밀릴때도 뉴번 전투. 마슨무어 전투 등 왕정파를 이긴게 이 레슬리 부대야. 프레스톤 전투 라는 해밀톤을 포로로 잡고 뒤에 처형하는 이 전투도 레슬리가 참전한겨. 

 

회의감 느끼는거야 이사람이. 찰스1세 목아지도 짤리고. 

 

팔리어먼트의 명령을 거부해. 나 이제 하기 싫어.

 

올리버 크롬웰.이 체포해서 런던탑에 가둬. 풀어줘. 다시 가둬. 스위든 크리스티나 가 중재해서 다시 풀어줘. 왕정복위 되고 1661년. 80 다되서 죽어.

 

he answered "that as he was not accustomed to give ear to false prophets, he did not wish to be troubled by him." Although he refused to admit that he had acted contrary to the laws, or had done anything to deserve death, he declared that he freely forgave those who had voted for his death. His body was brought to Seton, and was interred in the burial-place of that family. [4]  

 

헌틀리 후작 조지 고든.은 도망다니다 잡힌겨. 3월에 처형당하는데. 스콧 들이 머  빌면 용서 어쩌고 해주고 간증해주고 해 대민서리 지금이라도 잘못했다고 해라. 그는 답했다. 야 나는 그런 니덜의 이상한 예언놀이게 내 귀를 준 적이 없어. 더이상 피곤하고 싶지 않아. 나는 법을 위반 한 적도 없고. 죽을 만한 어떤 짓도 하지 않았어. 그렇지만, 나를 사형 하란 투표에 찬성한 애들을 용서할꺼야. 이사람은 그냥 목쫄려 죽은거고 자기 가족 무덤에 묻혀. 

 

James Graham, 1st Marquess of Montrose (1612 – 21 May 1650) was a Scottish nobleman, poet and soldier, lord lieutenant and later viceroy and captain general of Scotland. Montrose initially joined the Covenanters in the Wars of the Three Kingdoms, but subsequently supported King Charles I as the English Civil War developed. From 1644 to 1646, and again in 1650, he fought in the civil war in Scotland on behalf of the King. He is referred to as the Great Montrose.  

 

제임스 그램. 몬트로스 후작. 위대한 몬트로스. 비숍전쟁때 커버넌트여. 이때 27세인거고. 알렉산더 레슬리.부대에 있던거고. 조지 고든 헌틀리후작에 맞선거고. 스콧의 로어드 류트넌트에 바이스로이.에 캡틴 제너럴이 돼. 이건 레슬리 한테 배운겨. 로어드 들어가고 제너럴 들어가면 장성급인거야. 이건 찰스1세.가 준 자리야. 몬트로스 는 비숍 전쟁 이후 에는 양다리 걸치다가 찰스에 기운 찰스파가 돼.

 

In July 1639, after the signing of the Treaty of Berwick, Montrose was one of the Covenanting leaders who visited Charles. His change of mind, eventually leading to his support for the King, arose from his wish to get rid of the bishops without making Presbyterians masters of the state.  

 

베릭 조약.이 찰스가 베릭 가서 걍 싸인하고 온겨. 그래도 전쟁을 하지만. 이때 스콧 커버넌터들 의 한명이 몬트로스.인데. 이때 찰스에 반한겨 얜. 몬트로스 는. 저 장로교애들이 정치를 하는게 싫은거야. 자기가 커버넌트로 싸인을 했지만, 그 리더애들의 짓들이  싫은겨. 

 

Archibald Campbell, 1st Marquess of Argyll, 8th Earl of Argyll, chief of Clan Campbell, (March 1607 – 27 May 1661) was a Scottish nobleman, politician, and peer. The de facto head of Scotland's government during most of the conflict of the 1640s and 50s known as the Wars of the Three Kingdoms,  

 

아치볼드 캠벨. 아가일 후작. 캠벨 부락의 짱인데. 이사람도 비숍전쟁때 갓 30대 초반이야. 다들 어려 애들이. 아가일.은 스콧 서쪽 해변이고. 얘가 커버넌트 의 실세야. 몬트로스 가 제일 싫어하는 인간이고. 몬트로스 가 이사람때문에 돌아서는겨 저 커버넌트에 등을 돌려. 

 

Cumbernauld Bond was a pledge between eighteen Scottish noblemen who met at Cumbernauld in August 1640 

 

커버놀드 연합. 커버놀드 가 중서부고. 오른쪽이 에딘버러 이고 왼쪽이 아가일.이야. 헌데 여긴 말이지, 카톨릭이 많은겨. 이들은 아가일 백작에 후작인 저 아치볼드 캠벨 이 싫은거야. 얘들이  극단적 장로교걸랑. 스콧 귀족들이 이 쪽이 모여서 극단적 아가일 장로교 애들에게 맞서자며 뭉친거야. 이걸로 몬트로스.가 투옥이 돼. 1640년 8월 이야. 비숍 전쟁 직후 부터 이사람은 찰스로 간거야. 

 

The king signed a warrant for his Marquessate and appointed Montrose Lord Lieutenant of Scotland, both in 1644. A year later in 1645, the king commissioned him captain general.  

 

찰스1세가 1644년에. 스콧의 군사권을 몬트로즈에게 주고. 다음해에 캡틴 제너럴 도 주고. 찰스는 1642년 1월에 런던을 떠난거고. 내전 상황에서 스콧의 찰스대리는 몬트로스 가 된겨. 

 

 

Highlanders had never before been known to combine together, but Montrose knew that many of the West Highland clans, who were largely Catholic, detested Argyll and his Campbell clansmen, and none more so than the MacDonalds who with many of the other clans rallied to his summons. The Royalist allied Irish Confederates sent 2000 disciplined Irish soldiers led by Alasdair MacColla across the sea to assist him. The Irish proved to be formidable fighters.[19]  

 

하이랜더들은 이전에 뭉친적이 없었다. 그러나 몬트로스는 서쪽 하이랜더 부락들이 대부분 카톨릭이고 아가일과 그 캠벨 부락들을 싫어하는걸 알았다. 맥도날드 들도 쟤들을 싫어했다. 모두 그의 소집에 응했다. 왕정파와 아이리쉬 콘페더레이트들은 2천명의 훈련된 아이리쉬들을 보냈다 몬트로스 를 지원하기 위해 바다건너. 아이리쉬들은 강력한 병력들이었다.

 

스콧 을 크게, 하이랜드 로우랜드 로 나눠. 에딘버러 위로 서북부 전체를 하이랜더. 이 아래 를 잉글랜드 접경까지 로우랜드.라고 해. 하이랜드가 북이 아니라, 이 북쪽이 고지대여. 상대적으로 아래가 저지대고. 고지대 가 카톨릭이 많은거고. 여기에 맥도날드가 있어서 아일랜드로도 간거고. 헌데 저 아가일 애들은 장로교로 빠진거고. 저기서 민심을 잃은겨 아가일 부락이. 헌데 저 아가일의 아치볼드 캠벨.이 커버넌트 의 실세인거고. 

 

He was brought a prisoner to Edinburgh, and on 20 May sentenced to death by the parliament. He was hanged on the 21st, with Wishart's laudatory biography of him around his neck. He protested to the last that he was in truth a Covenanter and a loyal subject.

His head was removed and stood on the "prick on the highest stone" of the Old Tolbooth outside St Giles Cathedral from 1650 until the beginning of 1661.[23]  

 

몬트로스.는 1650년 5월에 교수형으로 죽어. 스콧애들한테. 1649년 1월에 찰스1세 죽고도 찰스2세 지지하는거고. 그러다 1년후에 잡혀서 죽는겨. 의회에서 사형판결하고 다음날 죽여. 마지막까지 그는 커버넌터 라며, 킹의 신민이었을 뿐이라고. 자기는 커버넌트야. 단지 킹에 자기 정체성을 담은것뿐이란거지. 

 

죽고 머리를 짤라서, 걍 가장 높은 곳에 머리를 찔러 뒀다는겨. 죽어서도 추워 떨고, 잘 보이게. 

 

저때이후, 스콧의 진영이 확 바뀐거야. 아가일의 아치볼드 캠벨이 몰리는겨. 이미 이건 찰스1세의 처형 부터 흔들리게 돼 이 스콧이.

 

This alliance, however, was at once destroyed by the execution of Charles I on 30 January 1649, which excited universal horror in Scotland. In the series of tangled incidents which followed, Argyll lost control of the national policy. He describes himself at this period as "a distracted man ... in a distracted time" whose "remedies ... had the quite contrary operation".[6]  

 

이건 스콧 모든 민들에게 그야말로 충격인겨 이건. 얘들은 이전에 스콧마리 도 쫓아내서 잉글랜드 에서 죽이게 한거걸랑. 저건 자기들 추상 자기들 마음 을 죽인거야. 장로교 들은 기분 낄낄 좋아했지만. 스콧마리는  억울한 여자야. 아 이  프레스비테리언 스콧 들 그야말로 후짐들. 어라 헌데 찰스1세도 죽었다네? 

 

기분이  싸한겨. 이 들이 자기 의 추상들을 잉글랜드에 보내서 두명이나 죽게 한거걸랑 결국. 

 

세상이란 의지의 드러남 이야. 표상 이란건 일본애들 번역이고. 투사 여. 프로젝트 빔이고 스크린이고. 집단의 무의식 이란 제어불가능한 것 무의식이란게 신이야 신. 그 신에 의해 움직일 뿐이야. 저거에 걸리면 끝난겨 권력은. 어제까지 빨던 그 집단 무의식이 하루아침에 웃으면서 목을 짜르는게 저 의지.라는겨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아 헌데 조선은 걱정마. 워낙 미개해서 저런 일들은 없어. 마음 껏 선동놀이하고 살아라 권력아 ㅋㅋㅋ. 어여 북조선과 합치고 중국 자치구로 들어가서 모든 인간들을 굶겨 죽이던 적폐놀이로 학살을 하던 빨랑빨랑 해 이 것들아. 

 

아 난 저것들이 지들이 정의요 흑흑 해대는거 보면. 

 

다른 애들은 연쇄살인을 해도 지들이 정의 라는 말은 안하걸랑. 참 특이한 정신병이여 저건. 

 

어머, 찰스1세를 죽였대. 이어 막막 목매달아 사람들 죽여. 저거 저거 맞아 진짜? 아가일 은 점점 권력의 통제력을 잃어갔다. 그는 자기자신을 서사한다 이당시. 어긋나버린 사람. 어긋나버린 시간속의. 처방책들은 완전히 반대의 것에 있네. 

 

1649년 1월.이 내전을 끝내고 승리의 기쁨의 잔을 마시는게 아니라, 스콧 애들은 오히려 싸~한겨 이게. ㅋㅋㅋ. 

 

 

 Upon his arrival in Scotland on 23 June 1650, he formally agreed to the Covenant; his abandonment of Episcopal church governance, although winning him support in Scotland, left him unpopular in England. Charles himself soon came to despise the "villainy" and "hypocrisy" of the Covenanters. 

 

찰스2세.가 헤이그 에 있었어. 저 이후 1년반 지나서 6월 23일 에 스콧에 도착해. 이전에 합의가 된거야. 이걸 반대하려고 몬트로스 가 먼저 아예 쳐들어갔다가 잡혀 죽은겨 먼저. 찰스2세도 니덜 커버넌트 인정하마 하면서 온겨. 환영을 받는거고 스콧민들에게. 당연히 커버넌트 란 애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받는겨 이건. 몬트로스 가 처형 당하고 온거야 다음달에. 

 

찰스2세는 곧 커버넌터 들의 악랄함과 위선을 경멸하기 시작했다.

 

존 녹스 부터 이 것들은 똑같아. 아 이 스콧 저 스콧메리 를 경멸하며 욕질한 존 녹스 들. 아  스콧 메리 만 생각하믄 열받아 저 스콧 장로교 들. 

 

William Hamilton, 2nd Duke of Hamilton KG (14 December 1616 – 12 September 1651) was a Scottish nobleman who supported both Royalist and Presbyterian causes during the Wars of the Three Kingdoms.  

 

해밀톤 이 죽고 동생이 받아. 얘가 제일 싫어하는것도 저 아가일의 캠벨이고. 찰스2세.는 겨우 걍 어설프게 킹 하는겨. 해밀톤이 열받아서 걍 은퇴하고. 아가일도 힘이 없어지는거야. 이 해밀톤 파가 권력을 잡게 돼. 몬트로스 와 해밀톤 이 서로 부딪히는 왕정파야. 왜냐면, 몬트로스 가 족보가 약한데 찰스1세가 몬트로스를 적극적 신임한거걸랑. 죽은 해밀톤은 능력이 없었고 그래서 몬트로스랑 사이가 안좋았고 그런 몬트로스가 죽고 해밀톤이 좀 세지지만. 결국 걍 모두 흐지부지 되는겨 나중엔. 의회가 지워질 정도로. 여긴 정치적 인 면에서 인물이 사라진거야 이때 이후로. 

 

찰스2세가 1660년에 왕정 복위 되고, 이때서야 저 아가일의 아치볼드 캠벨.을 처리하는겨. 

 

 After the defeat of Dunbar, Charles retained his support by the promise of a dukedom and the Garter, and an attempt was made by Argyll to marry the king to his daughter, Lady Anne.[6][9] On 1 January 1651, he placed the crown on Charles's head at Scone. But his power had now passed to the Hamiltonian party  

 

스콧이 찰스2세랑 손잡은걸 알고 잉글랜드가 쳐들어가는거고. 던바전투.에서 커버넌트가 패하고. 찰스는 여전히 아치볼드 캠벨이 필요하고. 캠벨이 자기 딸과 킹을 결혼시킬라 하고. 다음해 왕관을 씌워줘. 그렇지만 이미 권력은 해밀턴당으로 넘어갔다. 

 

He was immediately sentenced to death,[6] his execution by beheading on the 'Maiden' taking place on 27 May 1661,[10] before the death warrant had even been signed by the king. His head was placed on the same spike upon the west end of the Tolbooth as that of Montrose had previously been exposed, and his body was buried at Kilmun Parish Church near the Holy Loch, where the head was also deposited in 1664  

 

찰스2세가 잉글랜드로 복귀하고. 아가일의 아치볼드 캠벨.을 바로 잡고. 사형 판결 내고 목을 짤라. 그리고, 몬트로즈 가 똑같이 당한, 머리를 꼭대기 위에 걸어놓는 거 그대로 하고, 3년 후에 머리 붙여줘 교회에 묻어. 

 

 

by Marshall, H. E. (Henrietta Elizabeth), b. 18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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