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rmy of Flanders (SpanishEjército de Flandes) was a multinational army in the service of the kings of Spain that was based in the Netherlands during the 16th to 18th centuries.

 

80년전쟁이 1568-1618년 이고. 이 직전에 나온 부대가 플랑드르 군대.야. 1567년. 이 부대가 1706년 에 해산이 돼. 

 

The War of the Spanish Succession (1701–1714) was a European conflict of the early 18th century, triggered by the death of the childless Charles II of Spain in November 1700, the last Habsburg monarch of Spain.

 

스페인 마지막 합스부르크 카를로스2세. 펠리페4세의 아들.이 자식없이 죽고, 태양왕 루이의 손자.가 펠리페5세 가 되면서 부르봉 스페인이 시작이 돼. 스페인 후계자 전쟁에서 스페인합스부르크 네덜란드.를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 가 갖고 오고, 밀라노에 나폴리도 오스트리아가 갖고 가면서, 플랑드르 군대를 해산을 해. 스페인의 시대는 완전히 끝난겨 유럽에선. 

 

저들은 스페인로드 따라서 알프스 넘고 온 병력 더하기 독일땅 용병들이 라인강 타고 온 이들이야. 

 

The force would be sent through Europe via a sequence of friendly or neutral territories, which would become known as the 'Spanish Road'; surveying of the route began in 1566.

 

이미 펠리페2세가 네덜란드땅의 성상파괴를 보면서 분노한게 이탈리아 전쟁 1494-1559 마무리하면서, 펠리페가 앙리2세한테 조약 전에 한 말이고. 어차피 펠리페2세는 저걸 이탈리아 전쟁 끝내면서 벼르던 땅이고 육칠년 동안. 저 스페인 로드 를 이미 서기 1566년 에 다 조사를 한겨. 1562년에 이미 프랑스 종교전쟁이 터진거고. 빌더스톰 이란 성상파괴는 이때 극심해진거고. 전쟁선포 를 펠리페2세 가 하고 알바공작 페르난도 알바레스 가 출발한거야. 이미 스페인로드 조사 1566년때 하면서 예견된 전쟁이 1568년 80년 전쟁이야. 그러면서 이때 에흐몬트 백작. 호렌 백작 을 처형하고 본격적으로 터진건데. 

 

저때 스페인로드 로 넘어가는 병력들이, 이들이 플랑드르 군대 가 되는거야. 있다보니까 80년 을 있게 된거고. 1648년에 끝나도 이 군대를 유지를 하고, 스페인 후계자전쟁때인 1706년 에야 해산을 해. 80년 전쟁 후 60년을 더 있던겨. 즉 140년을 플랑드르에 있었어. 

 

유럽의 전쟁은 용병이걸랑. 고대 로마의 군대는 원래는 전쟁 때에만 징병되는 군대였고. 그러다 군단기지들이 세워지면서 이게 1년 의 군복무기간 이 되는거야. 로마시민이란게 자기 일이 있는 사람들이거든. 이 시스템이 어그러지면서 로마가 망하는건데.

 

중세 유럽의 전쟁도, 용병이여. 기사 라는 애들은 자기들 땅을 얻은 영주들에 영주에 낑겨 사는 애들이고 얘들은 인생 자체고 영주에 올인하는 리더들이고. 기본적으로 보병 이란건 용병이여. 여기에 기병 용병은 더 비쌀꺼고. 용병대장도 외주여. 사령관은 더 비싸. 이 용병으로의 전쟁이 동양과 전혀 달라. 

 

이게 17세기로 들어오면서, 용병시스템이 점점 이게 상비군이 된겨. 스탠딩 아미.가 구스타브 바싸 가 스웨덴에서 허섭하게 농민들 갖고 징병으로 시작을 했지만, 그래서 초기엔 질 수 밖에 없던거고. 멀 알겟어 농민들이, 싸워봤어야지. 그러다 이게 이력이 쌓이고 스킬이 쌓이면서 스웨덴 제국을 만든건데. 프랑스가 최초로 백년전쟁때 샤를7세가 상비군을 뒀지만, 이게 유지가 안되는겨 이게. 돈이 얼마냐고. 군인이란건 전쟁때나 쓰는거지 전쟁도 없는데 뭔놈의 상비군을 둬. 바로 폐기를 해.  강제로 징병 하는건 처절한 정체성을 갖게 된 스웨덴 에서나 가능했던겨. 징병 이란게 쉽지 않은겨. 

 

조선이 징병을 했다고 어쩌고 저쩌고. 의미가 없는거야 저게. 조선이란 나라는 정체성이 없어 민들에게. 부귀와 영화를 누리는 귀족애들도 전쟁나면 도망가는데 하물며 민들이란. 그래서 임란때 병적에는 수십만의 병력이 있어야 하는데, 정작 터지고 보니 아무것도 없는 이유야. 저걸 유럽애들은 기본부터 파악을 한겨. 돈 지급 없는 징병이란게 말이 되냐고. 이 징병 이란건 세계대전 때에나 나오는거야. 프랑스 1789부터 어설프게 하던게. 저건 정체성의 문제야. 

 

상비군을 용병으로 둔다는건 말도 안되는겨. 이 말도 안되는 일이, 저놈의 플랑드르 군대. 란거야. 

 

80년 동안 전쟁이었걸랑. 이후에도 전쟁이걸랑. 140년 동안 존속한 용병 상비군이여. 스페인이 망한 이유여 이게. 이 돈이 어마무시한겨. 신대륙에서 금은을 갖고 오면 머하냐고, 다 저기로 쏟아붓는데. 저 용병들의 돈들이 유럽 대륙에 퍼진겨. 유럽이란 나라는 그래서, 스페인이 만들어준겨 저 스페인의 돈을 매개로. 정작 그런 스페인은 망한거고. 

 

10,000 (1567) 86,235 (1574) 49,765(1607) 77,000 (1639)

 

플랑드르 병력 규모가. 초기 1만명에서 9만명 가까이에서 1639년엔 8만 가까이고. 

 

 

King Phillip's possessions stretched across Europe, and were reflected in the creation of the new army. In 1567 it was intended that 8,000 Spanish foot and 1,200 horse would form the nucleus of a new army for the Netherlands, to be sent from north Italy via Savoy.[7] It was envisaged at this stage that the total number might potentially reach 70,000 (60,000 foot, 10,000 horse),

 

초기 1만명일때, 스페인 보병이 8천에 기병이 1200명. 기타 공병에 보급병있을테고. 7만명일때는 보병 6만에 기병 1만. 기병엔 사람도 비싸지만 말 값에 말모이.가 이게 비용이 장난이 아닌겨.

 

Pay remained fixed throughout most of the period, three escudos per day up until 1634, then four escudos thereafter.[22] 

 

이들 돈.이. 140년동안 거의 고정되었는데. 1634년까지는 하루에 3 에스쿠도. 이후엔 4에스쿠도.   

 

The first escudo was a gold coin introduced in 1535/1537, with coins denominated in escudos issued until 1833. It was initially worth 16 reales. When different reales were introduced, the escudo became worth 16 reales de plata in 1642, then 16 reales de plata fuerte or 40 reales de vellón from 1737.

 

The second escudo was the currency of Spain between 1864 and 1869.  

 

에스쿠도 라는 화폐.는 골드.여. 16세기 초에 등장한거고. 이게 은화로 등장하는건 19세기여. 

 

레알. real 이라는 스페인 동전.은 은화.야. 포르투갈은 헤알 이라 하고. 이게 14세기에 등장하는데. 

 

스페인이 먼저 등장해. 이브레아 가문 마지막 페드로. 트라스타마라 시작 엔리케 에게 맞아 죽는. 

 

포르투갈은 이 직후 페르난도.에 등장해. 부르고뉴의 마지막. 이 다음이 주앙1세 의 아비스 가문이고. 

 

스페인이 약간 빨라. 레알 이 헤알 보다 빨라. 이건 실버 코인. 은화고, 나중에 금화도 나오고. 에스쿠도.는 2백년 지나나오는 금화 야. 이건 19세기 되어서 은화가 나와. 1 에스쿠도 가 16 레알.이고 금은의 차이여. 아마 비슷한 무게일듯. 요 비율은. 

 

하루에 금화 에스쿠도 3개. 그 다음에 4개.가 어떤 누구 기준인지 모르나. 저게 엄청난거야. 140년 동안. 기본 칠팔만명이여 전쟁 극심해지면. 평시에는 사오만명 유지했을테고. 스페인은 신대륙의 돈을 다 저기에 쏟아붓고 저게 유럽 상인들의 돈줄이 된겨. 유럽의 기업들은 저 플랑드르 용병들의 돈으로 만든거야 저건. 

 

용병이 상비군이 된거야. 막사 는 임시막사가 아니여. 전용 막사가 있어야 하고. 저때 나오는게 병원이야. 19세기에 크림전쟁때 머 나이팅게일이구요 군대병원이 이때예요. 아니여 그게.

 

As time went on, the Army of Flanders began to enjoy various distinctly modern institutions, often before they were adopted by the rest of Europe. Alba set up a military hospital at Mechelen near Brabant in 1567; it was closed the following year, but after many complaints by mutineers it reopened in 1585, ultimately having 49 staff and 330 beds, paid for partially by the troops. The 'Garrison of our Lady of Hal' was created as a more permanent rest home for crippled veterans. A public trustee was also appointed in 1596 to administer the wills of soldiers who had fallen in service.[26] After 1609, a number of small barracks (baraques, called after the French version of the Catalan barraca) were created away from the main urban centres to house the Army – a move that was eventually copied by other nations  

 

메흘렌. 플랑드르 브라반트 근처에 군대 병원을 세워. 이게 서기 1567년 이야. 골때리 이거. 아직 1568년 시작이 아냐. 이때 다 준비한겨 알바 공작이. 그러다 다시 세우고. 49명 병원 직원에 330개 병상. 불구가 된 병사들을 위한 전용 집도 만들었어. 병원에 들어온 병사들의 유언장 을 관리하는 공적인 신탁자 도 서기 1596년 에 운영을 해. 이런게 서기 1609년 에 다른 나라들로 카피가 되다. 

 

The Spanish troops were unruly, but formed an essential professional basis for the new army.[10] Backed by the new Army of Flanders, Alba began clamping down on the unrest; around 12,000 people were tried by Alba: 1,000 were condemned to death, others forfeited property as a result of the trials.[11]  

 

저들은 용병이걸랑. 기본적으로 통제하기가 쉽지 않아. 질서가 없어. 허나 전투력은 최고야. 수시로 교체하는겨. 스페인로드로 계속 공급하고. 문제일으키는 이들은 재판하고. 저걸 시작한 야전사령관 알바공작 페르난도 알바레스 때만 12,000명을 재판하고 1천명을 사형시키고 나머지는 감봉 등을 하는거지. 이 알바공작이 1507년생이야. 카를이 1500년생이고, 펠리페2세가 1527년생이야. 이사람이 스페인 영웅이야. 저 와중에 포르투갈 갖고 온. 그리곤 죽어.

 

barracks is a building or group of buildings built to house military personnel. The English word comes via French from an old Catalan word "barraca" (hut), originally referring to temporary shelters or huts[1][2] for various people and animals, but today barracks are usually permanent buildings for military accommodation. The word may apply to separate housing blocks or to complete complexes, and the plural form often refers to a single structure and may be singular in construction.  

 

군인들 막사.를 영어로 배럭.이라고 하는데. 저건 카탈란 말 바라카.에서 온 말이고. 중세 용병들 중 란트스케네히트.에 하이랜더.에 스페인은 이 카탈란 용병이여. 이들이 특히나 스페인 로드로 많이 간거고. 이 카탈란 용병이 시칠리아 만종 으로 아라곤으로 갖고 온거고 이들이 아나톨리아 가서 오스만애들이랑 싸우다가 비잔틴에 배신당해서 식사대접에 수백이 죽기도 하고 하는 그 카탈란인데. 이들이 저기서 플랑드르 군대 상비군이 되면서 지은 게 대표가 되면서 또한 이게 군대 막사의 배럭 의 대명사가 된거고. 

 

From Middle English *huttehotte, borrowed from Old French huttehute (“cottage”), from Old High German hutta (“hut, cottage”), from Proto-Germanic *hudjǭ*hudjō (“hut”), from Proto-Indo-European *(s)kewt- (“to deck; cover; covering; skin”). Cognate with German Hütte (“hut”), Dutch hut (“hut”), West Frisian hutte (“hut”), Saterland Frisian Hutte (“hut”), Danish hytte (“hut”), Swedish hytta (“hut”). Related to hide.

 

Anglo-Norman, from Old Northern French cotcote (“hut, cottage”) + -age (“surrounding property”). Old Northern French cote probably from Old Norse kot (“hut”), cognate of Old English cot of same Proto-Germanic origin. 

 

군대 막사 배럭 바락.이란게. 헛 hut. 에 카티지 cottage 의 카탈란 말인데 말야. 헛 이란건 스위든 덴마크 프리지안의 숨겨진 집.이야. 이게 몽골애들 막사랑 좀 비슷한 거에 둥근거 팍 덮은 모양새고. 코티지 카티지 하는건. 이건 저 바다건너 위의 노르족이여. 이들이 노르망디 가서 만든 집이 코트 여. 이게 브리튼 가는거고 이들 노르족이 노르망디에 앵글리칸이 되잖니. 우리가 보는 흔한 서양식 집. 삼각 형 지붕에 사각형 이 이 코티지 야. 

 

이 배럭 이라는 플랑드르 군대의 군인전용 막사.가 기숙사 같은,  여러 공간들 나열된 건물 짓는거의 모델이 되는거고. 

 

더하여 건축이란게. 이 배럭 이야. 시작은. 이건 고대 로마의 군단기지여. 이놈의 고대로마라는건 어마무시한건데 말야.

 

 

서기 2세기 즈음에 있었던 로마 군단 기지의 막사여. 이 유물 흔적이 하드리아누스 장벽.의 오른쪽 해변. 지금 이 장벽이 스콧과 잉글랜드의 경계고. 이쪽에 있는 유물로 재현해본건데. 저 로마인간들은 증말 미친놈들이여 저거. 

 

Housesteads Roman Fort is the remains of an auxiliary fort on Hadrian's Wall.[1] Its ruins are at Housesteads in the civil parish of Bardon Mill in Northumberland, England, south of Broomlee Lough. The fort was built in stone around AD 124, soon after the construction of the wall began in AD 122 when the area was part of the Roman province of Britannia. Its name has been variously given as Vercovicium, Borcovicus, Borcovicium, and Velurtion.  

 

하드리아누스 장벽.의 보조 기지.의 유물터가 지금 있는데. 이걸 베르코비키움. 보르코비키우스. 보르코비키움. 벨루르티온.으로 부르다. 이 유럽애들의 건축은 모두 로마에서 갖고 온겨. 로마가 없었으면 중세에 저런 건물은 지을 수가 없어.

 

와 예전이 채널돌리다가, 우리 위대한 조선시대의 건축 보세요 여러분, 캬 이 여백미 하며,.

 

환장하지 진짜. 

 

어떻게 저런 족속들의 땅이 있을 수가 있는거지?

 

대체 저런걸 테레비로 보여주는 의도가 멀까? 걍 정신병자 애들의 발광도 아니고 말야. 저건 거짓말 도 아니고, 걍 미친애의 발광도 아니고 대체 먼지 몰겄어 테레비만 틀면 캬 위대한 우리 조선 유물. 

 

Ambrogio Spinola Doria, 1st Marquess of The Balbases (Genoa, 1569 – Castelnuovo Scrivia, 25 September 1630) was an Italian condottiero and nobleman of the Republic of Genoa, who served as a Spanish general and won a number of important battles. He is often called "Ambrosio" by Spanish speaking people and is considered one of the greatest military commanders of his time and in the history of the Spanish army.[1] His military achievements earned him the title of Marquess of Balbases in the Spanish peerage, as well as the Order of the Golden Fleece and Order of Santiago.  

 

암브로지오 스피놀라 돌리아. 콘도티에로. 라고 해. 용병대장이야. 가장 중요한 인물이여. 용병대장을 누굴 스카웃하는가. 제노바의 암브로지오. 이 이탈리안 들이 유럽의 용병대장을 많이 해. 특히나 바다 선장으로 콘도티에로 들로도 많이 가고. 해전은 이 이탈리안의 콘도티에로 들이 하는겨. 

 

유럽은 저 플랑드르 상비군화된 용병들이 140년간 뿌린 돈으로 먹여살린거고. 저게 유럽기업을 만든겨. 저 돈을 댄건 스페인이고. 스페인은 플랑드르 상비군 용병들에게 돈뿌리다 망한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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