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iege of Breda of 1624–25 occurred during the Eighty Years' War. The siege resulted in Breda, a Dutch fortified city, falling into the control of the Army of Flanders.  

 

30년전쟁 의 주요 전투 를 보면, 브레다 전투 1624. 네덜란드 노뜨 브라반트.의 도시 브레다. Breda. 네덜란드입장에선 80년 전쟁의 연장선이고. 

 

노뜨 브라반트 주.의 수도는 s-Hertogenbosch. 세르토헨보스. 노뜨 브라반트 의 북쪽에 있고. 브레다 는 남쪽에 있어. 이 브레다 란 도시는 낫사우 가문이 결혼으로 갖고 오면서 낫사우 땅이 되고 저지대 지역의 중심도시였어 그래서. 오렌지 낫사우 침묵 오렌지가 네덜란드 대표가 되면서 낫사우가문의 땅이 중요해진거야. 

 

네덜란드 가 아래 벨기에랑 접하면서 둥근 부채꼴로 벨기에를 감싸. 가운데 전체를 접하는 주.가 노뜨 브라반트.이고. 왼쪽에 세우껍질 세 개섬인듯 한게 제일란트 Zeeland 야. 노뜨브라반트 오른쪽이 림부르흐. limburg 가 길게 벨기에를 깜싸고. .

 

저길 접하는 벨기에.는 안트베르펜.이 가운데서 접하고. 안트페르펜 오른쪽 아래에 같은 이름 림부르흐.가 위 노뜨브라반트.와 오른쪽 네덜란드 림부르흐.랑 접하고. 벨기에 림부르흐 아래에 리에주.가 있어. 벨기에 리에주 주.가 위에 네덜란드 림부르흐.와 접하고. 안트베르펜 왼쪽이 플랑드르 주.가 두개여 서플랑드르 동플랑드르. 이 동플랑드르 윗면이 네덜란드의 제일란트 와 접하고. 

 

벨기에 도 브라반트.가 있어. 플레미쉬 브라반트.와 아래 왈로니아 브라반트. 이 사이에 브뤼셀 이 있고. 

 

네덜란드는 노뜨 브라반트.란 이름으로 벨기에 브라반트 와는 떨어져 있는겨. 안트베르펜 과 림부르흐에 막혀서. 

 

네덜란드의 왼쪽 아래 해변의 주가 Zeeland 제일란트.야. 덴마크 코펜하겐이 있는 섬이 Zealand 셰일란(트)여. 알파벳이 달러 이게. 네덜란드 제일란(트)의 Zee 지.는 바다 Sea 여. 덴마크의 Zea 지는 몰러 어원을. 아마 똑같은 바다 일껴. 제일란트 셰일란트.로 구분해서 말해야 하고. 트 발음을 요즘은 안해. 안트페르펜 이라고 요즘은 안해. 이 끝발음을 안내는 경향이 있어. 영어발음은 모두 걍 질란드여. 

 

뉴질랜드 New Zealand 란 나라는. 알파벳은 덴마크의 셰일란트의 Zealand 알파벳인데. 뉴질랜드 라는 질랜드.는 네덜란드 제일란트 Zeeland 에서 온겨. 뉴질랜드 라는 섬은 네덜란드 사람이 발견한겨 30년전쟁 과 80년전쟁 후반에. 그리고나서 백여년 지나서 영국사람 제임스쿡 이 다시 간거고. 저건 그래서 네덜란드 제일란트 zeeland 를 zealand 뉴 해서 붙인건데 알파벳을 덴마크 섬껄 쓴거야. 구분하도록 하고. 

 

네덜란드의 수도.는 암스테르담.이여. 여기에 킹의 팰리스.가 있어서 걍 상징적인 수도야. 암스테르담은 북 홀란트.Holland 오른쪽 해변에 있는 도시고. 기능적인 실질 수도는 헤이그.여. 이건 남 홀란트.에 있어. 남 홀란트 는 제일란트 위에 있는 주.야. 헤이그 해변이고. 여기에 네덜란드 정부 청사 가 있고, 대법원도 여기고 의회도 여기에 있고, 외국 대사관들도 헤이그 에 있어. 헤이그 가 정부기능의 대표이고. 암스테르담 은 킹의 팰리스 라는 상징의 허울이 아니라, 여긴 상업의 도시야. 안트베르펜 함락 이후 만든 도시라서 상업의 중심은 암스테르담.이야. 여기에 네덜란드 대표 기업들이 본사고, 테슬라 넷플릭스 등 얘들의 유럽 본사 는 암스테르담이야. 

 

이 네덜란드 라는 나라.는 1568-1648 이라는 80년 전쟁으로 만들어진 나라인데. 저 짧은 역사에서 말야. 그 면면을 디다보면  존경스러 진짜. 

 

이 유럽사 애들은, 정말 그야말로 각각을 디다보면, 너무나 많은 이야기에, 야 정말 고개가 숙여져. 동양의 개판 똥 쓰레기 같은 역사를 보다가 여기를 보면, 이건  차원이 달라 이게. 

 

조선에 만 환장한 애는 조선 외는 모르걸랑. 조선이  위대한겨. 왜냐면, 조선 이외의 글자는 몰라. 남의 이야긴 관심이노 없어. 조선 위대해. 저 시리얼킬러들의 이야기가 얘들은 위대한겨. 왜냐면, 비교할 꺼리가 머리에 없걸랑. 역사 라는건 비교 하는 것이란 기본 조차 모르걸랑. 인간의 삶은 비교 를 하는거고, 모든건 비교야 비교. 모든건 상대적인거야. 절대 를 취하면 그건 릴리전 이란 신앙이여. 이건 컬트여 오컬트. 이 조선사 보는 애들 은 이게 역시나 오컬트여. 대놓고 컬트짓하는건데. 이성 이란게 없어 이게. 이게 또한 중국사이고 인도사야. 아 그야말로 끔찍하다 이거. 너무나 더러운 역사여 저게. 헌데 저런 드러운 역사가 지들의 중국몽이여. 저 피를 어쩌란 말이냐 저거.

 

어쩌면 좋냐 저걸. 

 

니덜이나 조구캐.

 

브레다 포위. 가 1624-25. 8월 28일에서 다음해 6월 5일.까지 11개월 포위하고, 항복하고 브레다를 주고 네덜란드 병력은 그냥 나온겨. 

 

Maurice of Orange (DutchMaurits van OranjeGermanMoritz von Oranien; 14 November 1567 – 23 April 1625) was stadtholder of all the provinces of the Dutch Republic except for Friesland from 1585 at earliest until his death in 1625. Before he became Prince of Orange upon the death of his eldest half-brother Philip William in 1618, he was known as Maurice of Nassau.  

 

저때 네덜란드의 스타트하울더. 모리스.가 4월23일 에 죽어 헤이그.에서. 모리스 는 남 홀란트.의 헤이그 를 수도로 둔겨. 그리고 나서 협상하고 브레다.를 스페인에게 넘긴거야. 6월 5일에. 

 

이때 브레다.에 있던 네덜란드 진영의 사람들이. 

 

Justinus van Nassau (1559–1631) was the only extramarital child of William the Silent. He was a Dutch army commander known for unsuccessfully defending Breda against the Spanish, and the depiction of his surrender in the painting by Diego VelázquezThe Surrender of Breda.   

 

낫사우의 유스티누스. 침묵 오렌지의 유일한 혼외자식.이야. 침묵 오렌지.의 자식들이 십수명인데 이사람이 정식 결혼을 네번 하걸랑. 카톨릭 승인 받을 필요도 없고. 장남 필립 윌리엄.은 카톨릭이라 오렌지만받고 동생 모리스.가 스타트하울더.야 어릴때 넘겨받아. 모리스 보다 나이가 훨많아 유스티누스.가. 나이 70이 다 되서 브레다 에서 농성전을 한겨 이 할배가. 자기 동생 모리스 가 죽고 저기서 나와서 육년후에 죽고. 

 

저때 같이 농성했던 사람이. 이전 잉글랜드 코트에서 유일하게 지원했던 Horace Vere 호러스 비어. 이고. 

 

Peter Ernst, count of Mansfeld (GermanPeter Ernst Graf von Mansfeld;[1] c. 1580 – 29 November 1626), or simply Ernst von Mansfeld, was a German military commander who, despite being a Catholic, fought for the Protestants during the early years of the Thirty Years' War.  

 

같이 네덜란드 편이었던, 브레드 포위전의 리더가. 만스펠트 의 에른스트.여. 이미 저때 만스펠트 가문은 작센에 먹힌 상태고. 이 에른스트 캐릭 이  웃긴겨 보믄. 

 

이사람은 배스타드.야. 혼외자식이야. 아빠는 독실한 카톨릭에 카를5세 랑 같이 튀니지 참전해서, 황금양모피 기사단원이여. 땅도 받아. 이어 펠리페2세 시절에는, 알렉산더 파르네이즈 알바공작 과 함께 하고, 알바공작 죽고는 네덜란드지역의 거버너 도 한 사람이야. 완전히 스페인 합스부르크 의 핵심이고, 독실한 카톨릭이야.

 

저 에른스트.도 아빠따라서 독실한 카톨릭이야. 헌데 배스타드 비합법적 자식이걸랑.

 

젊어서 13년 롱투르크 전쟁에 참전해. 이때 헝가리 트랜실베니아쪽을 알게 되는거고. 그리고 윌리히 후계자 전쟁, 30년 전쟁 터지기 전의, 당근 카톨릭 편으로, 이때 페르디난트2세 황제의 동생 레오폴트5세 밑에서 있었는데, 이때 얘가 놀렸나봐, 아마도 배스타드라고. 몰라 자세히 이걸. 

 

In the War of the Jülich Succession he served under Archduke Leopold V of Austria, until that prince's ingratitude, real or fancied, drove him into the arms of the enemies of the House of Habsburg  

 

저때 쟤가 장난인지 진짠지 에른스트.를 하대하고 놀린겨. 이때부터 에른스트 에게는 합스부르크 가 최고 웬수가 돼. ㅋㅋㅋ. 종교는 안버려 자기는 독실한 카톨릭이야. 그런데 프로테스탄트 편에서 싸우는겨. 아 이 캐릭 골때리. 

 

이사람이 당시 프로테스탄트 에 인물이 없는데, 거의 최고 수준의 인물이여 30년전쟁에선. 프로테스탄트 진영엔. 

 

Although he remained a Roman Catholic, from about 1610 he openly allied himself with the Protestant princes, and during the earlier part of the Thirty Years' War he was one of their foremost champions.[2]

He was despatched by Charles Emmanuel, Duke of Savoy, at the head of about 2000 men to aid the revolting Bohemians when war broke out in 1618. He took Pilsen, but in the summer of 1619 he was defeated at the Battle of Sablat;   

 

1618년 프라하 사건이 터질때, 저 사보이 공작 카를로 에마누엘레.가 프로테스탄트 편을 들걸랑. 얜 이게 종교가 아니라, 이 에마누엘레.는 확실히 신성로마황제 자리에 마음이 있어 이사람은 가만 보믄. 반 합스부르크 로 저길 처음에 들어간거야. 이때 이사람이 부린 사람이, 에른스트 야. 사보이 공작의 지원으로 백산전투 이전에, 보헤미아로 들어가는겨. 이때 Budějovice 보헤미안들이 부데오비체.를 포위했걸랑. 체코 서남쪽인데, 여길 지원하러 에른스트 가 가다가, 중간에 자블라트 Sablat 에서 에른스트가,  Bucquoy 뷔콰 백작에게 패해. 이 뷔콰.는 지금 프랑스 땅이지만 당시 스페인꺼고. 이때 합스부르크.가 사보이 공작이 지원한걸 알고 열  받은겨 저 사보이저거. 이때 에마누엘레 가 완전히 깨갱해서, 나 절대 개입안할께유 하면서 초기에 확 힘이 빠진겨 프로테스탄트가. 저 에른스트 가 패해서 부데오비체 도 못갖고 오면서 다음 백산전투에서 완전히 패한겨. 이 에른스트 가 결정적 인물인데. 

 

그리고 나서 브레다 전투 도 간겨 저 포위전에. 항복하고 다 나오고, 그래도 반 합스부르크.야. 

 

The Battle of Dessau Bridge (GermanSchlacht bei Dessau) was a significant battle of the Thirty Years' War between Danish Protestants and the Imperial German Catholic forces on the Elbe River outside Dessau, Germany on 25 April 1626.  

 

뎃사우 다리 전투. 1626년. 브레다 전투 나오고 바로 여길 간겨 이사람은. 뎃사우 가 작센안할트 땅이고, 자기지역 만스펠트와 가까와. 여기서 발렌슈타인.에 패하는겨. 아 이 발렌슈타인  쎄. 에른스트 가 저기서 패하고, 헝가리 땅으로 도망가는겨. 여기에 트랜실베니아 의 배뜰렌 이 있잖오. 자기 젊을때 롱투르크 전쟁 하면서 낯익은 땅이여. 베뜰렌이 먼저 발기해서 보헤미아 도와줬잖오. 조지 라코치.가 너무 어려서 합스부르크에 패했걸랑. 여기로 저 에른스트 가 온겨. 헌데 베뜰렌이 힘이 빠지고 합스부르크와 손잡고 개입안하기로 하면서, 에른스트가 저기도 못있어. 이사람은 저 크로아티아 남부 해변 가서 죽었어. 

 

에른스트 폰 만스펠트. 1626년. 나이 46세에. 아 저 오스트리아의 레오폴트 쟤가 대체 머라고 놀리고 하대했길래 이사람이 이리 행동했는지 알길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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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urice founded a whole new school of military professional practice. These pointed the way to the professional armies of the future by reapplying Roman tactics and innovating in the fields of logistics, training, and economics (e.g.paying troops regularly and on time). Many graduates of service under Maurice, such as his nephew the Marshal Turenne, or his disciples such as Gustavus Adolphus of Sweden, applied the Mauritian reforms to great effect in the remainder of the 17th century  

 

모리스 가 1625년에 죽는데. 이사람은 걸어다니는 사관학교야. 군사 기술의 최고를 연구하고 익혀. 아빠 침묵 윌리엄 죽고, 어려서 스타트하울더가 되었고, 레스터 백작 더들리.가 그래서 네덜란드 대표행세를 하다 가고 1588 스페인 아르마다 로 잉글랜드 덕으로 회복할때 요때는 갓 21세여. 이전에 올랐지만, 이 직후에나 좀 힘이 생긴겨 20대 갓 지나면서. 네덜란드는 실재적으로는 이 모리스.가 세운거야. 이사람이 로마의 군사기술에 모든 군사관련 서적과 기술을 다 터득을 한겨. 스웨덴 드 라 가르디.도 여기서 배운거고, 군사 엔지니어링을 데카르트 도 여기와서 배운겨. 스웨덴 구스타부스 아돌푸스 도 모리스의 군사학을 익힌거고. 유럽의 군사학은 이 모리스 에서 시작한거야. 

 

Maurice started out as the protégé of Landsadvocaat (Land's Advocate, i.e. secretary to the nobility of Holland and legal counsel to the States of Holland, but functioning as de facto chief minister of Holland and the States-General) Johan van Oldenbarnevelt. But gradually tensions rose between these two men. Against Maurice's advice, and despite his protests, Van Oldenbarnevelt decided to sign the Twelve Years' Truce with Spain, which lasted from 1609 to 1621. The required funds to maintain the army and navy, and the general course of the war were other topics of constant struggle.  

 

모리스.와, 네덜란드에서 경쟁상대 가 요한 판 올덴바르네벨트. 홀란트.의 란트삿포카트. 땅의 애드보케이트. 애드보케이트란게 강력하게 대변하는 자.걸랑. 

 

스타트하울더 란건 전체 지역을 대표하는 사람.이고, 이건 스페인에서 대리인 으로 내세운거고. 얜 영주 가 아녀. 파견 공무원이고, 영주인 합스부르크의 대리인.이 스타트하울더.야. 각 지역의 대리인 들이 애드보케이트.여. 스타트하울더 의 아래이고. 

 

저때 홀란트. Holland 의 애드보케이트.가 올덴바르네벨트.야. 

 

The Lands’ Advocate of Holland was the most powerful man of the United Provinces when there was no Stadtholder in Holland (because two-thirds of the tax income of the republic came from the county of Holland).

 

문제는 이 홀란트.란 주인데. 지금은 남과 북.으로 나눈 홀란트. 이 홀란트.가 당시 전체 세입의 삼분의 이. 2/3 란겨. 이 홀란트.가 네덜란드 모든 지역의 핵심 중 핵심이야. 

 

네덜란드 80년 전쟁 시작.이 두 사람의 처형이여. 에흐몬트 백작 라모랄, 호렌 백작 필립. 홀란트 반도의 양옆 해변땅이고. 홀란트 없는 네덜란드란건 없어 이게. 

 

특히나 홀란트 의 애드보케이트.는 스타트하울더 보다 쎈겨 얜. 가장 말빨이 쎄. 스타트하울더 가 가장 피곤한 상대가 이 홀란드의 애드보케이트.야. 

 

네덜란드 를 그래서. 홀란드 라고도 했던 이유여. 지금도 네덜란드를 비공식적으로 홀란드 라고도 쓰는거고. 

 

네덜란드 는 리퍼블릭 이 아녀. 네덜란드는 지금 킹덤 오브 네덜란드즈.야. 

 

저때 네덜란드를 덧치 리퍼블릭.이라고 하는데. 이때 리퍼블릭.은 일곱개 프로빈스들을 합친 유니온을 리퍼블릭.이라고 칭할 뿐이야. 일단 낫사우들이 킹.은 아녀. 그렇다고 말이지, 리퍼블릭 도 아녀. 얘들은 세습을 한겨. 다이너스티여 이건. 저걸 리퍼블릭 이라고 부를 수가 없어. 단지, 세습은 했지만, 그것도 매번 동의한 세습이었어요 라고 억지 주장을 하는겨. 저 시대는 리퍼블릭 이라고 할 수가 없어. 낫사우 다이너스티. 인데 딱히 킹덤은 아녀. 킹 이란 타이틀은 쓰지 않았어. 그런 체제도 아니였고. 

 

저런 다이너스티.가 이미, 조용 윌리엄 다음 2대가 모리스.야. 이건 세습이 된겨, 특히나 홀란트 애들이 보기엔. 

 

저거 머여 저거, 말만 스타트하울더 지 저게 킹덤의 킹과 머가 달라. 

 

네덜란드는 홀란트 의 저런 다이너스티에 대한 거부감이  쎈겨. 모리스 가 오르고 부터. 세월이 지나면서. 이런것도 참 비정상적인 마인드인데. 누구가 하는게 중요한게 아녀 독재를 하든 세습을 하든, 잘하기만 하면 되걸랑. 이건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의 주장이기도 하고, 맞아 이게. 체제가 중요한게 아냐. 잘만 하면 되는거지. 

 

Johan van Oldenbarnevelt (Dutch pronunciation: [ˈjoːɦɑn vɑn ɔldə(n)ˈbɑrnəvɛlt]), Heer van Berkel en Rodenrijs (1600), Gunterstein (1611) and Bakkum (1613) (14 September 1547 – 13 May 1619) was a Dutch statesman who played an important role in the Dutch struggle for independence from Spain.  

 

이 시작이. 올덴바르네벨트.야. 1547년 생. 모리스 보다 20년 위야. 할아버지여 이사람은. 이사람에 대한 지명도 모리스 가 한거야. 처음엔 별 일이 없어. 

 

올덴바르네벨트.가 2인자 이자 실세여. 모리스는 어리고. 모리스는 군사학에만 관심갖고 일단 전쟁이 중요한거고. 올덴바르네벨트.가 외교의 대표가 돼. 이사람이 만든게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야. 영국에 가서 본게 영국 동인도 회사고. 이걸 바로 카피를 한겨. 2년 후에. 

 

그리고 12년 휴전을 한 당사자도 올덴바르네벨트.야. 모리스 는 반대를 한겨. 이때 모리스는 40이고 저할배는 60이여. 이 할배가 자기가 짱인 줄 안겨 이건. 모리스는 어린 꼬마때부터 본 애고. 모리스의 반대를 무릅쓰고 도장을 찍은 인간이 올덴바르네벨트.야.

 

The Battle of Nieuwpoort,[1] was a battle during the Eighty Years War between a Spanish army under Albert of Austria and an army of the Dutch Republic and its protestant allies of England and the Kingdom of Scotland, under the commands of Maurice of Nassau and Francis Vere. It took place on 2 July 1600 near the city Nieuwpoort in what is now Belgium.

 

 

뉴포르트 전투 1600년. 이때 모리스 33세고. 이 전투도 됭케르크 의 스페인편 해적 쫓으라면서, 올덴바르네벨트.가 모리스 를 시켜서 전쟁하란겨 이게. 여하튼 이겼어 모리스가. 그런데 기분  나쁜겨.  저게 지가 짱이여 내가 지 밑이여. 홀란트 애드보케이트 면 다여 저거. 그러다가 12년 조약도 올덴바르네벨트 가 한거야 반대를 무릅쓰고 

 

Franciscus Gomarus (François Gomaer; 30 January 1563 – 11 January 1641) was a Dutch theologian, a strict Calvinist and an opponent of the teaching of Jacobus Arminius (and his followers), whose theological disputes were addressed at the Synod of Dort (or Dordrecht) (1618–19).  

 

고마리우스.가 1563년생. 아르미니우스 가 1560년생.이야. 둘다 칼뱅이여. 헌데 아르미니우스.는 절대적 운명론을 거부하는겨. 그러면 장사가 안돼. 구원의 길을 열어놓은겨 이사람은. 칼뱅의 절대적 운명론은 문제가 많어 저건. 아르미니우스.가 오히려 좀 열린거고, 이건 칼뱅말씀이 아녀 해대면서 나온게 고마리우스.야. 얘들은 반대로 더 철저하게 가는겨. 

 

With the religious troubles between Gomarists (strict Calvinists) and Arminians (more liberal Calvinists), the struggle between Van Oldenbarnevelt and Maurice reached a climax.  

 

이들이 고마리스트.와 아르미니언즈.로 나뉘어. 여기에, 홀란트 애들이 아르미니언.이 되는거야. 

 

In 1610 the Arminians, henceforth known as Remonstrants, drew up a petition, known as the Remonstrance, in which they asked that their tenets (defined in the Five Articles of Remonstrance) should be submitted to a national synod, summoned by the civil government. It was no secret that this action of the Arminians was taken with the approval and connivance of Van Oldenbarnevelt, who was an upholder of the principle of toleration in religious opinions  

 

저들 아르미니언 들이. 서기 1610년 부터는 레몬스트란트.가 돼. 12년 휴전이 1609년 부터여. 올덴바르네벨트.가 지 멋대로 스페인과 휴전하고, 그 다음해에 얘들이 자기들 주장을 종교적 으로 하는겨 이게. 다섯 조항의 레몬스트런스. Remonstrance.

 

레몬스트란트.라는게. remonstrate 레몬스트레이트. 라는 라틴어이고, 몬스트로 라는건 강하게 주장하는거고. 앞에 레.가 붙었어. 강하게 주장하는겨. 그 행위.가 레몬스트란스.이고 이걸 하는 자들이 레몬스트란트 란 말로 저때 자기들이 만든거야. 우리를 아르미니언 이라고 부르지 마라. 우리는 레몬스트란트. 다. 강력한 주장이란건, 기존 의 것에 대한 강력한 반발이야. 앞으로 우리는 고마리스트 의 절대적 칼뱅운명론을 거부한다 며 자기들의 종교적 주장을 인정해라 라는겨. 저건 다섯조항이 종교 이야기야. 그 첫번째가 컨디셔널 일렉션 이라는 조건적인 선택 을 통한 구원. 고라이스트 라는 칼뱅파는 언컨티셔널 이여. 이미 정해졌어.  고리타분한거야 이건. 

 

저건 정치적 다섯 조항이 절대 아니고, 단지 종교적인 문제야. 저기서 중심이, 올덴바르네벨트.여. 홀란트 고. 

 

이건 바닥에 말야, 홀란트 지역의 감정이 찐하게 쌓인겨 이건. 지들이 네덜란드를 먹여살리는거고, 대체 저놈의 모리스 라는 낫사우는 2대 로 세습이여 머여. 왜 우리 세금이 쟤들한테 쓰여야 해. 이런게 바닥에 깔렸다고 봐야해. 

 

 

이 네덜란드 란 나라가 웃긴겨. 

 

The office started in 1619 and replaced the title of land's advocate.  

 

홀란트 를 예로들면, 랜드 의 애드보케이트 라는 이름이. The grand pensionary (Dutchraadpensionaris) 영어로 그랜드 펜션어리.로 번역되는, 타이틀로 바뀌어 이게. 서기 1619년. 

 

1619년.에 올덴바르네벨트.를 반역죄로 죽인겨 모리스.가. 이때 같이 체포된 사람이, 국제법 창시자 그로티우스. 드 흐로트.(그로트)여. 이사람은 풀려나고. 그리고 저 애드보케이트 란 타이틀이 그랜드 펜션어리.로 바뀌어. 펜션 이라는 연금 월급 받는 자리이고, 큰 월급 받는 자리가 홀란트여. 

 

저때 여러 사람들이, 죽이지는 말라고 탄원을 해. 자기 의붓엄마 도 탄원하고 제발 죽이지는 말라. 이걸 모리스가 거부해. 이 감정이 20년 쌓인겨 모리스가. 뉴포르트 전투 1600년.에 12년 휴전 에. 레몬스트란트 들이라는 아르미니언들의 종교적 주장 다섯가지는 별게 없어 저게. 오히려 레몬스트란트 라는 아르미니언들 주장이 훨씬 합리적이고. 헌데 그게 중요한게 아냐. 저런거 다 받아들이면, 결국 올덴바르네벨트 의 홀란트 땅이 되어버리는겨 모리스 입장에선. 

 

His last words to the gathered crowd were: "Men, do not believe I am a traitor, I have acted sincerely and piously, as a good patriot, and I shall die this way." Van Oldenbarnevelt's last words to the executioner were purportedly: "Make it short, make it short." He was buried under the Court Chapel (Hofkapel) at the Binnenhof.  

 

올덴바르네벨트.가 72세여. 목을 짤라. 반역죄로. 유럽에서 가장 치욕스러운 형벌이 목짜르는겨. 올덴바르네벨트의 마지막 말. 사람들아, 믿지 말라 내가 반역자라는건. 나는 진심으로 경건하게 선한 애국자로서 행동해왔다 그런데 내가 이런식으로 죽게 되다니. 처형수에겐 이리 말한걸로 전해지다. 메이크잇 쇼트 메이크잇 쇼트. 짧게 해라 짧게. 빨리 끝내줘 빨리 끝내줘. 

 

 

홀란트.에서 저런 일들이. 계속 발생하는겨 이게. 이 홀란트에서 나오는 세력들이, 리퍼블릭.이야. 

 

이들이 결국 세우는 나라가. 

 

The Batavian Republic (DutchBataafse RepubliekFrenchRépublique Batave) was the successor of the Republic of the Seven United Netherlands. It was proclaimed on 19 January 1795 and ended on 5 June 1806, with the accession of Louis I to the throne of Holland.  

 

바타비안 리퍼블릭.이야. 1795-1806. 프랑스 1789년 대학살 하면서, 얘들 병력으로 세운, 프랑스 학살군애들의 위성국가여. 11년간. 

 

바타비.라는게 로마때 나온 말이고, 저지역의 게르만 부족 이름이야.

 

 

In Dutch history, the year 1672 was known as the rampjaar, the "disaster year." That year, following the outbreak of the Franco-Dutch War and the Third Anglo-Dutch War, the Dutch Republic was simultaneously attacked by England, France, and the prince-bishops Bernhard von Galenbishop of Münster, and Maximilian Henry of Bavariaarchbishop of Cologne. The invading armies quickly defeated most of the Dutch States Army and conquered part of the Republic.  

 

 

네덜란드 역사.에서 서기 1672년.을 람프야르. 비참한 해. 라고 해. 람프 라는게 꾸겨지는겨. 불운 이고. 저때 네덜란드가 프랑스 잉글랜드 쟤들 둘에게 동시에 적이된겨. 이건 죽잖거걸랑. 저기에 저들 동맹국들이 아래서 쳐들어오는거고. 이때 네덜란드는 사라졌어야 해. 저걸 자초한게 역시나 홀란트여.

 

Johan de Witt (24 September 1625 – 20 August 1672) 

 

이때 홀란트 그랜드 펜션어리.가 요한 드 비트.야. 모든 민심을 다 잃고. 저 람프야르 해인 1672년.에 죽여. 이때 스타트하울더.가 오렌지 윌리엄3세여. 뒤에 1688 명예혁명으로 브리튼 킹이 되는. 모리스 동생 프레데릭 헨리.의 아들 윌리엄2세 의 아들이여. 판은 똑같어. 올덴바르네벨트 의 감정선이 1619 사형 후 끽해야 53년 만에 또 터진겨. 이게 바타비안 리퍼블릭.으로 얘들 딴에는 2백년 만에 복수를 한겨 11년 짧게 정권 잡고. 프랑스 대학살군 의 힘을 업고. 

 

드 비트 형제들의 몸들. 동생이 Cornelis 코르넬리스.이고. 저 두 형제를 매달아서 배를 갈라 죽인겨. 

 

Jan de Baen (20 February 1633 – 1702) was a Dutch portrait painter who lived during the Dutch Golden Age. He was a pupil of the painter Jacob Adriaensz Backer in Amsterdam from 1645 to 1648. He worked for Charles II of England in his Dutch exile, and from 1660 until his death he lived and worked in The Hague. His portraits were popular in his day, and he painted the most distinguished people of his time.  

 

얀 데 반. 1672년 일때 39세. 저당시를 그린 사람이야. 

 

람프야르.의 책임을 저 둘에게 물은겨 사람들이. 

 

이 네덜란드 라는 나라가. 웃긴겨 이게. 

 

In the 16th, 17th and 18th centuries, the regenten (the Dutch plural for regent) were the rulers of the Dutch Republic, the leaders of the Dutch cities or the heads of organisations (e.g. "regent of an orphanage"). Though not formally a hereditary "class", they were de facto "patricians", comparable to that ancient Roman class. Since the late Middle Ages Dutch cities had been run by the richer merchant families, who gradually formed a closed group. At first the lower-class citizens in the guilds and schutterijen could unite to form a certain counterbalance to the regenten,  

 

이들이 16세기 부터. 나오는 말이. 레겐텐.이야. 리전트 라는 말을 섭정.으로 쓰지만. 이건 다스리는 자.야. rego 레고. 나는 다스리다. rule 룰 이여. 레고 가 레게레. 이고 이게 룰.이 되 레굴라. regula 가 짝대기야. 리전트 는 섭정이 아녀 걍 다스리는 자여 원래. 룰러 여. 리더 여 리더. 조직의 리더. 리더들 이란게 레겐텐.으로 네덜란드에서 쓰인거고, 이 레겐텐 들이 의회.를 이루는겨. 

 

The regenten as the cities' ruling class originated in the 13th century, arising over the course of time under the influence of several factors. Commoners managed to obtain emancipation from dependent status as serfs by making skillful use of the power struggle between the sovereign and the nobility;  

 

이 레겐텐은 13세기 부터 시작하다. 여긴 상업으로 먹고 사는 이들이걸랑. 바다와 강을 타는 상인들의 땅이 네덜란드야. 여긴 해적이 아녀. 해적들이 장물 팔러 오는데가 또한 여기지만. 이들은 상인이야. 이 상인들이 힘이 쎄지면서, 귀족과 밀땅하는겨 권력을. 얘들이 가장 빠른겨 이게. 13세기부터 등장해서 16세기에 자리 잡은겨. 그게 의회야 도시마다. 그래서 부르고뉴 에서 여길 갖고와서 못 버틴게 이들 레겐텐 들이야. 듣보도 못한겨 이건. 이들이 가장 빨라 유럽에서. 이건 상인들이고, 귀족들이 아녀. 폴란드 의 셰임 에 셰이크 란 의회는 귀족애들의 의회고. 저건 상인들의 모임이야. 귀족과 다른건 머여? 다이너스티여. 땅을 갖고 세습하는거. 이들은 자기들 이 만든 재산으로 세습을 하는거고, 영주들의 파트리쿠스가 이 부르조아 들의 파트리쿠스 로 바뀌는게 근대야. 

 

The vroedschap (Dutch pronunciation: [ˈvrutsxɑp]) was the name for the city council in the early modern Netherlands; the member of such a council was called a vroedman, literally a "wise man". A honorific title of the vroedschap was the vroede vaderen, the "wise fathers"  

 

이들의 도시의회.를 프룻사프. 라고 하고. 여기 멤버를 프룻만. 이라고 해. 시의회 에 시의원 이고. 

 

네덜란드는 철저하게 상인들의 나라고, 브리튼도 철저하게 상인들의 나라고. 여기서의 정치조직이 그대로, 브리튼은 팔리어먼트 의 나라고 이 네덜란드는 프룻샤프 의 레겐텐들이 모인 의회의 나라여. 이들은 그야말로 피의 역사에서 저걸 주도적으로 5백년 이상을 해온 이들이야 네덜란드는.

 

난 가끔, 네덜란드 가 저거 하니까 우리도 저거 해야. 독일이 저거 하니 우리도 저거 해야. 스위스도 저거니 우리도 저거.

 

정말 말이지. 저런 말을 하는 저 아가리들이 너무 창피한데.

 

그걸 그대로 갖고 온다고 되겠니 그게. 

 

그러기 전에. 쟤들 세금을 얼마 내는 줄 아니. 그따위말 하려면. 니덜이 주장하는 서민층의 세금을 두배가까이 올리고 나서 그따위말 하던가. 아뉴 세금은 상위층만 내는거유. 쟤들처럼 서민들도 저리 내면 어째쓰까유.

 

쟤들은 상인들의 나라고 철저한 시장 지배의 나라다. 시장을 악으로 보고 시장을 통제하는 애들이 어떻게 쟤들껄 그대로 갖다 쓰니.

 

모든게 사기야 사기. 사기 아니면 거짓말. 

 

네덜란드 란 나라는 저 짧은역사에, 디다보면 볼수록, 참 싕기해 저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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