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총은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자연을 완성시킨다" 신앙 이성 도덕 본질구조 규정원리 질료 형상 가능태 현실태 본체론적 이성작용 의지작용
토마스 아퀴나스 의 이야기에 저런 말로 도배를 하는데 말야. 저게 완벽하게, 우리가 쓰던 말들과 전혀 다른 개념이걸랑. 전혀 달라 저건. 은총 자연 이따위 말도 일본애들이 번역해댄 말이고, 쓰지도 않았던 말들이고 전혀 우리네 삼천년의 언어족 생활에서 없었던 단어들이야. 저게 대체 먼말이냐고. 랭귀지 게임. 이라는 말하는 서로간의 현장에서 전혀 상관없는 단어를, 노가다 십장과 노가다꾼이 주고 받는겨. 쟤들이야 저걸 이해하는 십장이라도 있는거고, 우리네는 노가다 십장이 전혀 자기 언어게임에서 듣보도 못한 말을 던지며 지시 하는거걸랑. 이게 이땅빠닥 지식인 애들이야. 지들도 모르는 말을 떠들어대는겨 아는척. 저게 이땅빠닥 정치 사회 현실인거고.
인류문명사에 저런 애들은 이단이야. 토마스 아퀴나스 는 이단에 대해서도, 당췌 개종이 안되는 이단은 죽여도 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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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토마스 아퀴나스.의 대부분 논법이, 아리스토텔레스 에서 갖고 온겨 이게. 이 인간도 이단시 되는겨 당대에. 온갖 비난을 받아. 헌데 이 토마스 아퀴나스.가 우리가 흔히 들어본, 주요 추기의 네가지 덕, 신중 관용 정의 용기. 신학의 세가지 덕,. 믿음 소망 사랑(자선). 이 일곱가지 덕 이란걸 셋팅한 인간이고, 신의 증명 다섯가지의 길. 신의 속성 다섯가지, 심플하고 완전하고 무한하고 불변하고 하나 이다 란걸 셋팅한 사람이고. 카톨릭 교리의 무겁게 쓰는 기본적 교리를 정리한 인간이걸랑. 아리스토텔레스 의 고대그리스의 회의론적 경험주의적 관점을 이단시 해대는 애들이 아무 말도 못하는겨. 그리고 고대그리스의 저 실용적인 시선들이 로마 카톨릭에서 용인이 되는거고. 그 밭을 마련한 인간이 그래서 이 토마스 아퀴나스야. 중세 인간 중 가장 위대한 인간 세 손가락에서 빠지면 섭섭한겨 이게.
저것도 네가지 덕 세가지 덕. 도덕. 이따위 말이 아냐. 버츄 를 도덕 이라 번역 할 수 가 없어. 저런 식으로 우리넨 이해를 하게 되걸랑. 뭔말이여 저게. 전혀 달라. 그냥 그대로 버츄 로 써라. 쓰잘덱 없는 한자 번역 카피 하지 말고. 노자 도덕과 쟤들 버츄 는 전혀 다른 말이야. 도덕과 윤리 란 개념은 서양애들에게 없어. 전혀 달라 그게. 도덕 윤리 란 말은 사람 죽이는 말이야.
저기서 버츄 란건. 똑같이 아레테.야 고대 그리스어를 이사람은 라틴어로 그 의미로 그대로 쓴겨. 저건 모두 라틴어여 저사람의 글들과 강의들은. 버츄 비르투 란건 최고잘함. 이야. 저 일곱개 추상명사를 최고로 잘하는 경지.를 갖으란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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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토마스 아퀴나스.의 글들을 보면, 야 샹 걍 수도원에 가서 해골될때까지 수도사를 하고도 싶은데 문득. 아 이 인간 참 깊단 말이지.
Thomas Aquinas (/əˈkwaɪnəs/; Italian: Tommaso d'Aquino, lit. 'Thomas of Aquino'; 1225 – 7 March 1274) was an Italian[10][11] Dominican friar, philosopher, Catholic priest, and Doctor of the Church. An immensely influential philosopher, theologian, and jurist in the tradition of scholasticism, he is also known within the latter as the Doctor Angelicus and the Doctor Communis.[12] The name Aquinas identifies his ancestral origins in the county of Aquino in present-day Lazio,
아퀴노.의 토마스.야. 아퀴노.가 지금 이탈리아 라치오 Lazio 에레기오니.에 있는 카운티인데. 여기 Roccasecca 로카세카 출생이야. 라치오 에레기오니.의 수도는 로마.이고 에레기오니 regioni 의 아래 행정단위가 프로핀치아 provincia 야. 로마 프로빈치아 아래 해변이 Frosinone 프로지노네 프로빈치아.고 여기에 아퀴노.와 로카세카 란 마을이 있어. 또한 여기에 Cassino 캇시노.가 있고 몬테 캇시노 라는 캇시노산.에 수도원이 여기야. 토마스 아퀴나스 나와바리고.
독토르 안겔리쿠스. 독토르 코무니스. 독토르 닥터 라는건 가르치는 사람이야. 선생이여. 안겔리쿠스 란건 엔젤같음.이고 엔젤 이란건 엔겔로스.로 히브리어의 구약을 그리스어로 번역해서 천사.라고 하지만, 천사 란게 하늘이 파견한 메신저.여 걍 날개 달린 요정 어쩌고가 아니라. 신성의 메신저야. 야웨.의 메신저가 엔겔로스 엔젤 이란 천사여. 안겔리쿠스. 천사 같은 천사와 동격인겨 야웨의 사자여. 야웨의 메신저급의 선생. 이란겨. 코무니스 란건. 카먼 이. 이건 모두 같이 공유 포함 하는겨. 모~~두의 선생 이란겨. 인민 공산 이 아니라. 최고급 닉이여 선생에게 붙이는. 로마 카톨릭에서 최고의 선생.이 이 토마스 아퀴나스.야. 저건, 로마 카톨릭 교리.를 가장 보편적으로 가장 깊게 이해하고 있으며 가장 잘 가르친다는겨. Thomism 이사람 학파를 따로 떼내서 토미즘 이라고 붙여.
1225 – 1274. 나이 50에 죽은겨. 이사람은 도미니칸.이야. 알비파 십자군이 1209-1229 이고. 20만에서 백만의 알비파가 죽었어. 이때 태어난 사람이야. 또한 저때가 프리드리히2세 황제가 1250년에 죽는 거고 하이미디벌과 레이트미디벌 이라는 중세 중기와 후기를 가르는 사람이 토마스 아퀴나스야. 이때 또한 로마카톨릭이 이사람으로 교리가 잡히는겨.
프리드리히2세.가 십자군 6차 갔다가 살라딘 조카 알카밀.과 악수하고 부랴부랴 이탈리아 로 오는겨.
Pope Gregory IX (Latin: Gregorius IX; born Ugolino di Conti; c. 1145 or before 1170 – 22 August 1241)
이때 교황이 그레고리 9세. 1227년 부터 교황이야. 프리드리히2세는 1220년에 황제 대관식을 한거고 26세에. 엄마가 시칠리아의 오트 가문의 로제르2세 시칠리아 킹.의 딸 콘스탄스.야. 이 로제르2세.가 윌리엄(기욤)1세.2세 로 끊기고. 형제핏줄 탄크레드도 끊겨서, 이 콘스탄스의 신랑 하인리히 6세 황제가 킹을 하고 이 아들 프리드리히2세가 시칠리아의 킹이되면서 호헨슈타우펜이 갖고 오는겨. 황제 되고, 다음에 교황이 된 그레고리9세 가 연일 파문 날리면서 십자군 가라는거고, 십자군 가서도 살라딘애들이랑 전쟁도 안하고, 해서 파문 또 날리고, 십자군 4차로 비잔틴 점령해서 라틴제국 에 있는 브리엔.의 장.을 시켜서리 프리드리히2세의 시칠리아 킹덤을 니가 다 가져 해대고, 여기에 놀라서 부랴부랴 오걸랑 프리드리히2세.가 그러면서 롬바르디아 동맹이 생기다가 1250년에 죽은겨 2세황제가. 저때부터 겔피 기벨리니 가 이탈리아에서 시작하는거고. 그리고 교황은 앙주의 샤를 부르고, 프리 아들 콘라트.에 만프레트.가 맞서고, 만프레트.가 자기 조카 대신 섭정하면서 전쟁하다가 호헨슈타우펜은 지워지는거고. 앙주의 샤를이 다 먹다가 시칠리아섬은 만종으로 아라곤에 뺏기고 나폴리만 갖는거고. 황제 대공위 시대인거고, 대관식 못한 게르만킹들이 교황파 세속파로 나뉘어서 싸우는겨.
토마스 아퀴나스. 가 저때의 사람이야. 프리드리히2세의 막내 만프레트.가 1266년에 죽어. 이때 토마스는 41세.고. 저때 시칠리아는 나폴리와 함께 앙주의 샤를꺼야. 시칠리아 만종이 1282년 이고. 이때부터는 시칠리아는 바르셀로나 가문 아라곤의 페드로 3세.가 갖고 가는거고. 이건 토마스 가 죽은 이후인거고.
대륙엔 황제대공위 시대로 게르만킹들끼리 내전인거고. 교황이 부추기는 거고. 할때의 사람이야 토마스는.
he was born in the castle of his father, Landulf of Aquino. He was born to the most powerful branch of the family, and Landulf of Aquino was a man of means. As a knight in the service of King Roger II, he held the title miles. Thomas's mother, Theodora, belonged to the Rossi branch of the Neapolitan Caracciolo family.[20]
1225년에 태어나. 아퀴노의 란둘프. 아빠가 귀족에 부자야. 시칠리아 킹덤 시작 루제르2세.의 코트 기사였어. 밀레스 miles 야. 기사 라는 타이틀.을 중세에 라틴어로 밀레스. 한겨. 밀리터리.이고 군인. 솔져.여. 이게 게르만의 영어가 앵글리칸이 되서 나이트.하는거고. 독일땅은 리터 ritter 라 해. 라이더 rider 여. 말탄 기사. 나이트 는 서번트 라는, 주인에게 충성하는 개념이고. 엄마는 나폴리 귀족이고. 삼촌되는 사람은 몬테 캇시노 베네딕트수도원 원장이고. 가족은 그래서 토마스.를 베네딕트 수도원의 몬테 캇시노. 원장 자리로 커리어 관리를 하려던건데, 이게 틀어져. 토마스는 도미니칸 수도회에 들어가고, 가족이랑 이게 문제가 생겨.
A hauberk is a shirt of mail. The term is usually used to describe a shirt reaching at least to mid-thigh and including sleeves. Haubergeon ("little hauberk") generally refers to a smaller version of the hauberk, but the terms are often used interchangeably.
중세기사들 드라마 보면. 자잘한 체인들 옷을 입고 이 위에 갑옷을 걸치는겨. 철로 된 링들 그물 모양. 이걸 Mail 불어로 마이.라고 해. mail maille 이 두개로 쓰는데. 저게 영어로는 멜.로 발음해. chain mail 체인멜.이라고 체인을 붙여 확실한 의미로. 이건 허벅지까지 길게 덮는 외투야. 이보다 좀 짧은 조끼 같은 체인멜.을 하버크 hauberk 라고 해.
저 마이. 멜. mail. maille 이 올드프렌치 인데. 이게 어원이 먼지 몰라. 저게 내가 말하는데, 밀레스 miles 라는 라틴어 군인 기사 의 밀레스의 불어 발음에서 온거야 마이 멜 이란 저 링 그물 갑옷은.
At the age of five Thomas began his early education at Monte Cassino but after the military conflict between the Emperor Frederick II and Pope Gregory IX spilled into the abbey in early 1239, Landulf and Theodora had Thomas enrolled at the studium generale (university) recently established by Frederick in Naples.[24] It was here that Thomas was probably introduced to Aristotle, Averroes and Maimonides, all of whom would influence his theological philosophy.[25] It was also during his study at Naples that Thomas came under the influence of John of St. Julian, a Dominican preacher in Naples, who was part of the active effort by the Dominican order to recruit devout followers.[26] There his teacher in arithmetic, geometry, astronomy, and music was Petrus de Ibernia.[27]
나이 다섯.에 몬테캇시노.에서 교육을 받어. 1230년.
십자군 6차가 1228년-29년.이야. 교황 그레고리9세가 브리엔의 장을 불러서 이탈리아남부 먹어.가 1229년 이야. 프리드리히2세.가 뒤의 20년은 교황과 교황파들의 이탈리아와 전쟁하면서 보낸겨 이게. 20년 동안. 이전부터도 교황취임 1227년 하고 저 할배가 연일 너 이색햐 십자군 빨랑빨랑 가라가라 걍 독촉도 저런 독촉이 없어. 가기싫은거 억지로 간겨 프리2세가. 얘가 중세 애들중에 가장 매력적 인간이야. 사자심왕 리차드. 프리드리히2세 황제. 헌데 외모는 별로래. 헌대 이 열림의 사고방식은 최고야. 저 두인간이 중세 천년의 인간들 중 탑 삼.에 넣어야 할껴.
토마스.가 1230년 나이 다섯.에 수도원 교육 받는 시기도 교황과 황제의 문쟁 한가운데야. 부랴부랴 돌아와서 도착해서 재점령할때걸랑. 1239년. 14세에 부모가 나폴리 유니버시티.에 보낸겨. 이미 프리드리히2세가 돌아온지 10년되고 나폴리를 다시 갖고온겨.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 아베로이즈. 마이모니디즈. 를 본거로 보이는거지. 즉 12세기에 발굴된 고대그리스 자료들과 저때 아랍인들의 글들도 같이 본거야. 주석이 달린 그리스텍스트 에 아랍인들 만의 이야기도 같이 보게 된겨. 특히나 저때 아베로이즈(이븐 루시드), 마이모니디즈 의 이야기들은 실용적이걸랑. 유럽인들이 땅으로 내려오는데 가장 일조한 글들이 또한 아랍만의 글들이야. Avicenna 아비세나.가 저들에게 스미고 이것도 보게되고. 이때 유럽애들이 의학에 눈을 뜨는겨 아비세나 의 글들로. 이 유럽애들은 오컬트의 나라였어 저런게 아니었으면, 하다못해 조지 와싱턴 도 죽을때 한 짓이 사혈.이야. 피 빼는거. 피 빼면 나쁜 피 나가서 건강해지는겨. 몸에 병균 염증 있으면 걍 짤라. 그게 수술이여. 도끼로 걍 팍.
쟤들이 무식한 애들이여 진짜. 쟤들도 오컬트.로 빠졌어야 해.
우리 조선민국이 지금 오컬트 인것처럼. 이 조선애들이 여전히 오컬트의 정치를 하는거잖니 저게. 민들은 미개함의 극치고. 저게 컬트여 컬트.
헌데 저 유럽애들은, 저 컬트. 오컬트.에서 빠져 나온거야. 저걸 해주게끔 한게. 스콜라철학이라는 중세이고. 이 시작 바닥 무게가 저 토마스 아퀴나스.야. 16세기의 몽테뉴, 는 여기서 나오는거고 17세기 시작부터 윌리엄 길버트.의 자기장 이야기에, 케플러, 데카르트, 베이컨, 라이프니츠, 뉴턴 이 나오는 바닥을 제공한건 이 스콜라 철학이고 이 중심에 저 토마스 아퀴나스.야. 이사람이 굳힌 아리스토텔레스의 고대그리스에 아랍글들이고.
아시아 아프리카 는 저런 깊이 쌓인 축적의 새김.을 전혀 이해할 수 없고, 하려고도 안하고, 걍 컬트 짓만 하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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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때 나폴리 대학.에서 도미니크 수도회.에 발을 디뎌. 이때 도미니크들이 적극적으로 인재 영입활동을 할 때고.
At the age of nineteen Thomas resolved to join the recently founded Dominican Order. Thomas's change of heart did not please his family.[28] In an attempt to prevent Theodora's interference in Thomas's choice, the Dominicans arranged to move Thomas to Rome, and from Rome, to Paris.[29] However, while on his journey to Rome, per Theodora's instructions, his brothers seized him as he was drinking from a spring and took him back to his parents at the castle of Monte San Giovanni Campano.[29]
19세. 1244년. 도미니크 수도회.에 등록하기로 마음을 굳혀. 가족이 싫어해. 베네딕트 수도원장 시킬려했걸랑. 도미니크는 탁발이야 설교고 프라이어.야. 베네딕트는 모나스터리고 면벽 독고다이 몽크여. 집안이 몬테캇시노 원장이고. 엄마 테오도라.가 적극적으로 말리고, 도미니칸들은 토마스를 로마로 파리로 교육과정 다 만들어 인재육성 플랜을 짰어. 제대로 키우려고. 즉 저때 토마스 는 이미 유명한 인재야 교계에서. 토마스가 로마로 가는길에 엄마 지시로, 토마스들이 토마스를 납치해, 토마스가 샘가에서 물을 먹을때. 그리고 가족의 성 지오반니 캄파노 산.의 캐슬로 잡아와.
Thomas was held prisoner for almost one year in the family castles at Monte San Giovanni and Roccasecca in an attempt to prevent him from assuming the Dominican habit and to push him into renouncing his new aspiration.[25] Political concerns prevented the Pope from ordering Thomas's release, which had the effect of extending Thomas's detention.[30] Thomas passed this time of trial tutoring his sisters and communicating with members of the Dominican Order.[25] Family members became desperate to dissuade Thomas, who remained determined to join the Dominicans. At one point, two of his brothers resorted to the measure of hiring a prostitute to seduce him. According to legend, Thomas drove her away wielding a fire iron and two angels appeared to him as he slept and strengthened his determination to remain celibate.[31]
토마스는 1년간 죄수신세였고 가족은 그가 도미니칸 되는걸 막으려 했고. 교황은 프리드리히2세와의 전쟁으로 토마스를 신경쓸 여력이 없고. 토마스는 자기 누이들을 가르치면서, 도미니크 수도회원들과 연락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가족들은 토마스를 설득하는데 절망하고 토마스는 더 마음을 굳히고. 한편으로 두 형제는 창녀를 들여서 토마스를 유혹하려고 했다. 전설에 따르면 토마스는 파이어 아이언. 불쏘시개 쇠작대기를 들이대면서 그녀를 쫓아냈고, 두 천사들이 그에게 나타났다 그가 잠들때, 그러면서 교미의 즐거움을 안 누리려는 다짐을 굳히게 했다.
By 1244, seeing that all her attempts to dissuade Thomas had failed, Theodora sought to save the family's dignity, arranging for Thomas to escape at night through his window. In her mind, a secret escape from detention was less damaging than an open surrender to the Dominicans. Thomas was sent first to Naples and then to Rome to meet Johannes von Wildeshausen, the Master General of the Dominican Order.[32]
엄마의 모든 시도는 실패하고, 테오도라는 가족의 위엄을 살리고자 했고, 토마스를 밤에 그의 창문으로 탈출하게끔 했다. 도미니칸들에 대한 공개적 항복보다는 비밀스런 탈출이 가족 명예에 덜 손상되니까. 토마스는 나폴리로 갔고 그리고 로마로 가서 당시 도미니크 수도원 짱을 만났다. 가입하고, 파리대학 가서 공부하는거고 여기서 만난 선생이
Albertus Magnus[6] (before 1200 – November 15, 1280), also known as Saint Albert the Great and Albert of Cologne,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거의 유일하게 신성로마 땅의 사유를 갖은 학자여. 스콜라 철학자. 쾰른의 알베르트. 보헤미아 공작령 태생의 게르만이야.
When Albertus was sent by his superiors to teach at the new studium generale at Cologne in 1248,[33] Thomas followed him, declining Pope Innocent IV's offer to appoint him abbot of Monte Cassino as a Dominican.[22] Albertus then appointed the reluctant Thomas magister studentium.[23] Because Thomas was quiet and didn't speak much, some of his fellow students thought he was slow. But Albertus prophetically exclaimed: "You call him the dumb ox, but in his teaching he will one day produce such a bellowing that it will be heard throughout the world."[22]
1248년. 23세.에 알베르투스.가 쾰른에 새로운 종합대학과정.에 교수로 보내질때 토마스가 따라가, 교황 인노켄티우스 4세는 몬테 캇시노 수도원장을 시켰는데 도미니칸.으로. 베네딕트를 도미니칸으로 바꾸려는겨 교황이. 헌데 이걸 거절하고 자기 선생을 따라가. 알베르투스 가 쾰른에서 토마스를 마기스터 스투덴티움. 배우는 자들의 대표.로 임명해. 토마스는 조용하고 말이 없었다, 그의 동료들은 그가 늦은 뒤쳐진 애라고 생각했다. 알베르투스 가 예언하듯 단언했다. 너희들은 그를 벙어리 소 라고 부르지만, 언젠가는 그의 가르침이 큰 울림의 소리를 만들어서 전 세계에 들릴 날이 올거다.
쾰른에 종합대학이 서는건 저 이후 백년인데. 신성로마땅에서 네번째로 서는 대학. 저때의 쾰른 교육기관이 이게 아니고, 쾰른의 도미니칸 수도원 사람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시키는겨. 알베르투스와 토마스.가. 저때 신성로마땅에는 유니버시티가 없걸랑. 그래서 교육에 목마른 사람들에게 저 스투디움 게네랄레 라는 교육과정을 못 받는거야. 이걸 가서 해주는겨 따로. 즉 신성로마땅에는 수도원에서 비공식적으로 저렇게 종합대학 과정을 가르치고 배운거야. 파리대학은 종합대학인 유니버시티 였고, 토마스는 나폴리 와 파리 를 거친 인재였고.
1259년. 34세 까지 파리 쾰른에 다시 파리.에서 배우고 가르치다.
Naples, Orvieto, Rome (1259–1268)
Quarrelsome second Paris regency (1269–1272)
Final days and "straw" (1272–1274)
이탈리아 나폴리 로마 로 와서 9년 있고. 다시 44세에 파리고 갔다가 돌아와서 2년있다가, 프랑스 리옹 에 공회의 가려고 당나귀타고 아피아가도를 지나면서 떨어진 나뭇가지를 맞아. 큰 가지가 정통으로 떨어졌나벼. 몬테 캇시노 로 갔다가 요양하고 바로 다시 출발하다가 다시 쉬다가 걍 죽은겨. 나뭇가지 에 맞았는데, 이미 이전에 먼가 기운이 다 빠졌어 이사람이. 자기 말글에 회의감이 찐한 말을 하는데.
The Summa contra Gentiles (also known as Liber de veritate catholicae fidei contra errores infidelium, "Book on the truth of the Catholic faith against the errors of the unbelievers") is one of the best-known treatises by St Thomas Aquinas, written as four books between 1259 and 1265.
The Summa Theologiae (written 1265–1274 and also known as the Summa Theologica or simply the Summa) is the best-known work of Thomas Aquinas (c. 1225–1274). Although unfinished, the Summa is "one of the classics of the history of philosophy and one of the most influential works of Western literature."[1]
34세 파리에서 쓰기시작해서 이탈리아에서 완성한, 숨마 콘트라 겐틸레스. 그리고 이어서 말년까지 쓴 숨마 테올로기아이. 토마스 의 위대한 책 들 중에 이 두 개.가 대표인데. 그중에서도 숨마 테올로기아이. 란 거걸랑. 이건 미완성이야. 9년동안 쓰다가 저 리옹 공회의 가는길에 다쳐서 죽은거걸랑. 이 전에 이미 이건 안 쓰기로 한 거 같다는거지 더이상.
숨마. 라는게. summus 수무스.의 명사.고. 수무스.라는건 높다.의 최고급 이야. 가장 높은 이야. 최고 라는겨. 이게 서머리.란 영어지만. 겐틸레스. 라는게 비유대인.이 아니라. 라틴어로. 부락 종족 이고 이게 페이건 히든 이야. 페이건들에 반대하는 가장 높은 가르침. 이고. 신학의 최고봉.이 숨마 테올로기아이.야. 이게 가장 대표적인 로마 카톨릭의 서적이야.
이사람이 애퍼리션.을 두 번 경험한걸로 봐. 모두 1273년. 죽기 1년 전이야.
It is traditionally held that on one occasion, in 1273 at the Dominican convent of Naples in the chapel of Saint Nicholas,[60] after Matins, Thomas lingered and was seen by the sacristan Domenic of Caserta to be levitating in prayer with tears before an icon of the crucified Christ. Christ said to Thomas, "You have written well of me, Thomas. What reward would you have for your labor?" Thomas responded, "Nothing but you, Lord."[61][62] After this exchange something happened, but Thomas never spoke of it or wrote it down.
1273년. 나폴리 도비니칸 수도원에서. 마틴스. 수도운의 조과. 이사람들의 타임테이블 이야. 한밤중에서 새벽 이전의 두시간.이야. 이때 성구관리자 누구가 본거야 토마스가 기도중 눈물흘리면서 공중에 떠 있어, 십자가 지저스 상 앞에서. 지저스가 토마스에게 말했다. 너는 나에 대해 잘 써왔다, 토마스. 너는 너의 노동에 대해 무슨 보상을 받으려 하니? 토마스는 답했다, 낫띵 벗 유, 로어드. 당신 외에는 아무것도. 그러나 토마스는 이것에 대해 말하거나 쓴게 없다.
이 리워드 reward 보상 이란 말이 성경을 특히나 신약에서 아주 도배하는게 이 보상 이란겨. 헌데, 당신 주 외엔 아무것도요. 이건 토마스 만의 특허품이야.
신의 심판 없는, 보상 과 벌 없는 종교 란건 있을 수 가 없어. 이게 신의 역할이걸랑.
헌데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 말이 골때려. 보상이 당신 신.이야. 이건 더 깊게 가보면 불경한겨 이게. 최고의 요구고 보상이야. 신 당신 자체가 내 보상이야. 나를 당신과 동격으로 만들어 줘. 라고 하면 너무 과한 해석일까? 당연히 과하다 하지.
On 6 December 1273, another mystical experience took place. While he was celebrating Mass, he experienced an unusually long ecstasy.[62] Because of what he saw, he abandoned his routine and refused to dictate to his socius Reginald of Piperno. When Reginald begged him to get back to work, Thomas replied: "Reginald, I cannot, because all that I have written seems like straw to me"[63] (mihi videtur ut palea).[64] As a result, the Summa Theologica would remain uncompleted.[65] What exactly triggered Thomas's change in behavior is believed by Catholics to have been some kind of supernatural experience of God.[66] After taking to his bed, he did recover some strength [67] and died three months later.
그리고, 12월 6일. 이건 날짜가 찍혀. 이전은 연도 와 장소 와 시간 에 목격자 만 찍혔는데. 날은 몰라.
긴 엑스타시를 경험해. 황홀을. 먼가를 봤어. 그리고는 이후의 할일을 거부하고 자기 동료 레지날드.에게 먼가 구술할 것도 거부해. 레지날드 가 보셔 빨랑 합시다. 아마 구술이나 저술 작업을 하는듯 한데, 레지날드는 다섯살 어리고, 토마스의 구술을 받아 적는겨. 토마스가 답을해. 레지날드, 나는 할 수 없어. 왜냐면, 내가 쓴 모든 것들이 나에게 마치 스트로, 지푸라기 같아.
팔레아 라는게 이게 껍데기.야. 콩 껍질, 등에 볏집 이고. 이건, 쓰잘덱 없는겨 가치없는거고.
자기가 쓴 모든 말글이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느끼는거야. 저날 미사때 먼가를 경험하고. 그리곤 저 책을 더이상 안써. 그래서 저건 미완으로 남아. 저걸 신학대전. 이라고 번역을 한건데 일본 중국에서.
그럼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 신학.을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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