Étienne or Estienne de La Boétie (French: [etjɛn də la bɔesi] also [bwati] or [bɔeti];[2] Occitan: Esteve de La Boetiá; 1 November 1530 – 18 August 1563) was a French judge, writer and "a founder of modern political philosophy in France".[3] He is best remembered as the great and close friend of the eminent essayist Michel de Montaigne "in one of history's most notable friendships",[3] as well as an earlier influence for anarchist thought.
에치엔 드 라 보에시. 에티엔. 브와티. 보에티. 프랑스 판사, 작가, 프랑스의 근대 정치 철학의 시작. 몽테뉴보다 세살 많아. 33세에 죽어. 몽테뉴가 가장 슬퍼했는데 이사람 죽고. 몽테뉴와는 결이 달라. 이사람이 쓴 책이 우리가 익숙한, 자발적 복종.이란건데. 아니키즘의 시조새야. 헌데 이런 시조들과 후대의 수준낮은 애들은 그 지쩍 수준, 이게 전혀 달라. 천지차이야.
이 인문학이, 근대로 올수록 대부분 후져버려 이게. 이게 지금 현대인이고. 최고들 몇몇만 저 중세와 근대초기인들의 소양을 좇을 뿐이야. 점점 이런게 잊혀지는겨.
근대의 시작이란건 말야. 아리스토텔레스.를 꺼내면서 시작이 되는거야 이게. 아리스토텔레스.가 하늘로 올라간 중세를 땅으로 내려놓기 시작한 주춧돌이 걸랑.
On May 25, 1085, Alfonso VI of Castile took Toledo and established direct personal control over the Moorish city from which he had been exacting tribute, ending the medieval Taifa's Kingdom of Toledo.
카스티야의 알폰소6세.가 서기 1085년에 톨레도.를 갖고 오면서, 무슬림이 갖고 있던 고대그리스 책들을 이때 다시 보는겨 서유럽이. 5백년만에. 서로마 망하고 부터 따지면, 아니 그 이전부터도 이 서쪽에선 거의 잊혀진 고대그리스가 천년만에야 복구된거야. 다행이도 저 톨레도 복구는 화염의 전쟁터로 갖고 온게 아니라, 게릴라 전으로 인한 타협으로 물러나고 들어간겨. 이슬람 코트의 자료가 온전하게 남아있어. 도서관을 그대로 갖고 온거야. 이걸 처음 본거야 카스티야의 게르만애들이. 중세 대학은 이걸로 세워진겨 저거 텍스트 번역하고 공유합시다. 유럽은 중세 유니버시티 가 백퍼 만든거야. 모든 영지인 지식인들이 함께 모이고 서로 퍼뜨리면서. 이 교류의 정도가 이슬람이 따라오지 못나는겨. 이슬람은 오직 바그다드에 저기 뚝떨어진 스페인반도 톨레도, 코르도바 마드리드 뿐인겨.
With the loss of the study of ancient Greek in the early medieval Latin West, Aristotle was practically unknown there from c. AD 600 to c. 1100 except through the Latin translation of the Organon made by Boethius. In the twelfth and thirteenth centuries, interest in Aristotle revived and Latin Christians had translations made, both from Arabic translations, such as those by Gerard of Cremona,[151] and from the original Greek, such as those by James of Venice and William of Moerbeke.
서기 6백년부터 1100년 즈음까지는 아리스토텔레스는 완벽히 잊혀졌다. 서기 500년 전후 사람 보에티우스(보이셔스), 철학의 위안을 쓴, 뒤 스콜라철학 발판.의 사람이 번역한 오르가논.의 라틴번역 이외엔. 12세기 13세기 에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나고, 라틴어 그리스도들이 번역을 했다 아랍어 주석들 번역과 함께, 크레모나의 제랄드.가. 또한 베니치아의 제임스. 모르베크.의 윌리엄. 크레모나 는 롬바르디아, 모르베크는 플랑드르. 윌리엄은 비잔틴땅 그리스어를 습득하고. 제랄드는 크레모나에서 직접 톨레도로 가서 책을 번역하는겨. 저러면서 동시에 나온게 볼로냐 대학 1088.이야.
저걸 유니버시티.를 만들면서 서로 번역하면서, 유럽 전역에 카피본을 뿌려. 수도사들이 필사를 또한 하고, 필경사들이 밥벌이로 필사하고. 상당부분이 채식본이야. 양피지에 쓰고 파피루스에 쓰는겨 이걸. 이게 대부분 현존하는겨. 유럽의 본격적인 시작이야 이게.
서기 6백년 부터 잊혀졌다.는건 이탈리아만의 입장인거고, 본토백이 로마인거고, 게르만들은 몰라 전혀. 게르만애들에겐 아리스토텔레스.는 저때 1085년 에 처음 보는거고. 처음 보는겨 저건, 로마를 갓 배운 게르만들 켈트들은.
이게 하이미디벌 이라는겨.
12세기 번역의 시대.
Latin translations of the 12th century were spurred by a major search by European scholars for new learning unavailable in western Europe at the time; their search led them to areas of southern Europe, particularly in central Spain and Sicily, which recently had come under Christian rule following their reconquest in the late 11th century.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기여 이게. 물론 인류란 오직 유럽인거고. 지금 문명은 이시기가 만든거야.
헌데, 우리넨, 몰라 이걸. 오직 일본애들만 적극적으로 번역을 하는거야. 그게 일본애들 리터러쳐.고 애니의 컨텐츠여. 지금 저 일본 망가 콘텐츠가 유럽과 북미를 휩쓰는겨. 쟤들 커뮤니티 를 가보면, 큰 섹터가 일본 애니메.야. 현재 급성장 하는 시장이야 이게. 북미 시장이 곧 일본 본토의 2조원을 앞지를 거고, 유럽이 저걸 앞지를거고. 일본 들의 리터러쳐가 어릴때 부터 심어지는겨.
저건 엄청난겨
왠줄아니, 내가 그랬잖니. 유럽애들은 유럽을 몰라. 자기는 자기를 몰라. 밖의 시선이 더 잘보는거야. 대전제,는 밖의 시선의 밖이 제대로 볼 줄 아는 서브젝트 subject 여야 하는거고, 그만큼 꿰뚫고 볼 만큼 번역과 해석의 질과 양이 되어있다는겨. 저걸 오직 일본애들이 하는겨 저걸.
저건 엄청난거야. 저건 안토니오, 페이쇼토 의 종자도 1543년 후에 바로 사비에르 오고. 1603년 일포사전 이라는 사전이 나오고, 꼬마네명 덴쇼 소년사절단 가는, 저 이후 5백년 가까이 쌓인 번역의 축적의 힘이야. 메이지란건 이전 3백년의 번역의 과정이 없었으면 절대 나올수 없는 시대야.
세상에서 유일하게, 인정을 한 애들이 저 일본이야. 아, 내가 너무나 못한 존재구나. 우리가 너무나 미개하구나. 유일하게 인정한 애들이야. 얘들이 세상에서 유럽 밖에서 유일하게 스스로 고개숙여 배운, 그야말로 유일한 애들이야. 이게 5백년이 쌓여서 나오는게 지금 일본 리터러쳐 야.
유럽애들은 유럽을 제대로 볼 수 없어 상대적으로, 외부인이 볼수 있어. 헌데, 외부인은 유럽을, 제국주의 딱지로 보고 열등한 것이 우월한 줄 알고 바라보걸랑. 이따위 시선으론 평생 미개한 똥으로만 사는거야 이게. 이걸 벗어나서 유일하게 고개숙이고 칼갈면서 본 애들이 바로 일본애들이야. 무서운 애들이야.
앞으로 이 일본애들의 시대가 오는겨. 그래서. 당연히.
그 시작이 저 망가. 애니메.야. 어릴때 익숙해지고, 커서도 접하게 될 수 밖에 없는게 이제 일본 리터러쳐 에 일본 문화 일 수 밖에 없어 저게.
톨레도 수복과 동시에 나온게, 이탈리아의 시칠리아 수복이야. 노르만들이 마침 저 톨레도 1085년 즈음에 시칠리아의 무슬림을 점령한겨
Just before the burst of translations in the 12th century, Constantine the African, a Christian from Carthage who studied medicine in Egypt and ultimately became a monk at the monastery of Monte Cassino in Italy, translated medical works from Arabic. Constantine's many translations included Ali ibn Abbas al-Majusi's medical encyclopedia The Complete Book of the Medical Art (as Liber pantegni),[13] the ancient medicine of Hippocrates and Galen as adapted by Arabic physicians,[14] and the Isagoge ad Tegni Galeni[15] by Hunayn ibn Ishaq (Johannitius) and his nephew Hubaysh ibn al-Hasan.[16] Other medical works he translated include Isaac Israeli ben Solomon's Liber febribus, Liber de dietis universalibus et particularibus and Liber de urinis; Ishaq ibn Imran's psychological work al-Maqala fi al-Malikhukiya as De melancolia; and Ibn Al-Jazzar's De Gradibus, Viaticum, Liber de stomacho, De elephantiasi, De coitu and De oblivione.[15]
Sicily had been part of the Byzantine Empire until 878, was under Muslim control from 878–1060, and came under Norman control between 1060 and 1090. As a consequence the Norman Kingdom of Sicily maintained a trilingual bureaucracy, which made it an ideal place for translations. Sicily also maintained relations with the Greek East, which allowed for exchange of ideas and manuscripts.[17]
콘스탄틴 더 아프리칸. 아프리카의 콘스탄틴. 이사람은 서기 1100년 직전에 죽은 사람인데. 의사.야. 사라센.이야. 즉 무슬림이야. 카르타고 에 살았어. 튀니지땅. 즉 베르베르인이야. 이사람이 이탈리아로 넘어와서 자기가 갖고 있던 아랍책들을 번역을 한겨. 이사람이 시작이여. 장미의 이름 에서 그 봉사 수도원장이 악마시하는 책 이 이 사람이 갖고온 책인거고. 장미의 이름은 정확하게 저 12세기 번역의 시대 이야길 하는거야 또한.
그리고, 시칠리아 섬.을 갖고 온겨. 얘들이 여길 항공모함으로 3백년 가까이 있었어. 여기에 이슬람 킹덤이야. 이걸 노르만의 오트빌가문 탄크레드의 12명의 아들.이고 이중 막내가 루제르1세.에 이 아들 루제르2세.가 1130년에 시칠리아 킹.을 하지만 이미 이전 1060년 부터 점령을 한거야. 루제르1세.는 카운트. 백작 이 되고, 아들이 킹을 해. 나폴리 는 막판에 갖고 오는거고. 이 시칠리아 킹덤.이 7백년 동안 있다가 나폴레옹때 지워지고 다시 두개의 시칠리아 킹덤.이 되서 가리발디.가 상륙하면서 사르디냐 킹덤으로 들어와서 이탈리아가 통일이 되는건데.
루제르1세.가 카운티.가 되면서 시칠리아를 갖고 오고. 이때 팔레르모 코트에 무슬림애들이 남기고 떠난 아랍어 주석서의 고대그리스 텍스트들이 있는겨 이게. 1085년에 톨레도 가 들어오고 또 그리스 자료들을 보게 되고.
유니버시티.를 세운거야 그래서.
Xenophanes of Colophon (/zəˈnɒfəniːz/;[1][2] Ancient Greek: Ξενοφάνης ὁ Κολοφώνιος [ksenopʰánɛːs ho kolopʰɔ̌ːnios]; c. 570 – c. 475 BC)[3] was a Greek philosopher, theologian, poet, and social and religious critic. Xenophanes lived a life of travel, having left Ionia at the age of 25 and continuing to travel throughout the Greek world for another 67 years.[4] Some scholars say he lived in exile in Sicily.[5] Knowledge of his views comes from fragments of his poetry, surviving as quotations by later Greek writers. To judge from these, his elegiac and iambic[6] poetry criticized and satirized a wide range of ideas, including Homer and Hesiod, the belief in the pantheon of anthropomorphic gods and the Greeks' veneration of athleticism. He is the earliest Greek poet who claims explicitly to be writing for future generations, creating "fame that will reach all of Greece, and never die while the Greek kind of songs survives."[7]
콜로폰.의 크세노파네스. 영어 제나퍼니즈. 콜로폰.이 사모스섬.있고 해변 에페소스.있고. 이 바로 위에 도시가 콜로폰.이야. 기원전 1천년의 도시야. 이 크세노파네스.는 안트로모픽 갓. 신들을 인간화하는 것에 냉소짓는 사람이야. 저들을 기린다며 스포츠 축제를 하고. 대체 왜 신들이 인간의 형상이냐는겨 저 미개한 애들 저거.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오뒷세이아. 헤시오도스.의 신들의 계보라는 떼오고니아, 웍스 앤 데이즈. 일과 날. 의 저 신들 이야기 하는게 머냐 저거. 신들이 왜 인간의 모습인겨?
Democritus (/dɪˈmɒkrɪtəs/; Greek: Δημόκριτος, Dēmókritos, meaning "chosen of the people"; c. 460 – c. 370 BC) was an Ancient Greek pre-Socratic philosopher primarily remembered today for his formulation of an atomic theory of the universe.[3]
Democritus was born in Abdera, Thrace,[4] around 460 BC, although there are disagreements about the exact year. His exact contributions are difficult to disentangle from those of his mentor Leucippus,
데모크리토스. 디마크리터스. 트라키아 압데라 사람. 레우키포스. Leucippus 의 원자론.을 받아 이룬 사람이야. 플라톤이 가장 증오한 인간이 이 데모크리토스야. 쟤 책들 다 태워야 하는데 저거. 플라톤을 전430-350 으로 러프하게 보면 딱 다음 세대여.
Most sources say that Democritus followed in the tradition of Leucippus and that they carried on the scientific rationalist philosophy associated with Miletus. Both were thoroughly materialist, believing everything to be the result of natural laws. Unlike Aristotle or Plato, the atomists attempted to explain the world without reasoning as to purpose, prime mover, or final cause. For the atomists questions of physics should be answered with a mechanistic explanation ("What earlier circumstances caused this event?"), while their opponents search for explanations which, in addition to the material and mechanistic, also included the formal and teleological ("What purpose did this event serve?").
이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와도 달라. 목적론적 세계관을 거부한 사람이야. 무엇을 위하여 사는가? 무엇 때문에? 가 관심이 아냐 이쪽은. 퍼퍼스. 프라임 무버. 파이널 코즈. 이건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모든 페이건 모든 종교론자 들의 세계관이야.
아리스토텔레스 조차, 매터 라는 재료들이 포름 이라는 형상 을 위해 가는거야. 꽃 이란 건, 꽃의 재료들이 화려 만발 한 꽃 의 포름, 형상을 위함이 저 존재의 목적인겨. 그 바닥의 네이쳐에 의해서.
아리스토텔레스 조차, 어떤 목적 인거냐 가 주 관심사항이야. 이 네이쳐 가 머냐 에 대한 의문 의 정답은.
플라톤이아 아리스토텔레스 나 세상은 궁극은 저 밝음의 이데아 고 퍼퍼스 고 프라임 무버 고 파이널 코즈. 야.
이 둘이 다를게 없어. 단지 설명방식의 차이일 뿐이야. 나머진 곁가지여 그 곁가지를 갖고 쟤들이 다르다 해대는건 무시칸겨 그건. 응 대부분 모두는 그래서 무식해. 아리형은 걍 플라톤 딱깔이야. 지는 아니라 하지만.
아리형 제자들이 그래서, 언무브드 무버.라고 써. 저건 아리형 말이 아냐. 제자들 말이야. 저 배후의 이데아는 움직이지 않는 움직이게 하는거라고.
레우키포스. 데모크리토스.는 달러, 그따위 목적론적 관심 없어. 단지 지금 일어나는 이벤트. 일들이 어떤 이유로들 일어나는 거지? 해서 생각해 낸게, 원자론이야. 쪼개질수 없는 무엇으로 되어있는겨 모든 이벤트들 작동하는건.
Goodness, he believed, came more from practice and discipline than from innate human nature.
선함. 에띡스 가 되는 아가또우 란건, 앞으로 플라톤이란 병딱이가 머 이데아의 보이지 않는 배후 어쩌고 저쩌고, 태양을 빗대면서 할텐데, 걍 아가또우는 그따위 이데아의 아가또우를 인식해서 인간이 배우고 어쩌고 도 아니고, 그게 영혼 스피릿에 새겨졌는데 이데아에서 나와서 타락한 것도 아니고. 걍 현실에서 자기가 훈련하면서 익히는 것에서 나올 뿐이란다. 굿니스 란게 걍 인간이 스스로 해결할 것들인거지 그걸 이데아가 어쩌니 저쩌니 개소리 말란겨 미리 말뚝박으면서.
여긴 신얘기가 없어. 철저한 유물론자들이야. 헌데 이게 근대의 유물론이니 경험론과는 달라. 이들은 철저한 메타피직스. 형이상학자이고, 수학자에 기하학자여. 메타피직스 란 말 조차 서기 1세기에 나오는 말이고.
이들이 근대 과학의 조상님들이여.
Pyrrho of Elis[1] (/ˈpɪroʊ/; Ancient Greek: Πύρρων ὁ Ἠλεῖος, romanized: Pyrrhо̄n ho Ēleios; c. 360 – c. 270 BC) was a Greek philosopher of Classical antiquity and is credited as being the first Greek skeptic philosopher and founder of Pyrrhonism.
엘리스 의 피로. 아리형보다 스무살정도 어려. 회의주의자의 시작. 의심하라 모든걸. 판단을 하지마로 함부로.
피론주의자들. 근대문학에 피론주의자들.이 교회진영에서 욕이여. 너 피론주의자냐?
이들의 핵심테마.는 에포케. 판단 유보. 어디에도 끼지 말라우. 진영논리에 참여말라우. 그럼 행복할지니. 정의짓 할테지만, 저거 다 거짓말 사기니라. 그 정의란 잣대로 넌 세상을 혐오하게 되고 증오 분노 걱정 근심에 빠진단다.
Through epoché (suspension of judgment) the mind is brought to ataraxia, a state of equanimity. As in Stoicism and Epicureanism, eudaimonia is the Pyrrhonist goal of life, and all three philosophies placed it in ataraxia or apatheia.[2] According to the Pyrrhonists, it is one's opinions about non-evident matters that prevent one from attaining eudaimonia.
아타락시아. 라는게 평정심 이란게 아니라. 걱정 근심 에서 벗어난 마음이야. 아프지만 않으면 장땡이야. 헌데 이것이 어찌보면 최고야. 아파본 사람 만이 아는 거걸랑. 저 아타락시아 를 끝까지 유지하면서 죽는게 중요한거고. 이걸 또한 스토아들 에피쿠로스들.이 걱정 근심 고통 없는 아타락시아.를 주창하지만, 피론의 목적 지향점은 유데모니아.이고, 아타락시아.는 지나치는 정거장이고.
몽테뉴.와 데카르트.가 어릴때 부모에게 익힌 습관이, 피론주의야. 쉽게 판단하지 말라. 데카르트는 저 피론.과 몽테뉴.를 받은 인간이야.
저런게, 아리스토텔레스 를 포함해서, 게르만애들이 천년 동안 생각 안 해 본 것들을 보는겨 이게. 아프리카의 콘스탄틴. 시칠리아 코트의 자료. 톨레도의 자료. 대체 이게 머여 이거. 헌데 이걸 말야. 안 버리고, 번역을 하는거야 적극적으로. 그것도, 로마 카톨릭이 교황의 교황정이.
코페르니쿠스의 지구가 돈다는 이야기를, 로마 교황정에서 교황과 추기경들을 앉혀놓고 강의를 하고, 추기경이 감동을 하고, 하던 시절이야 마르틴루터.가 티나왔을 때도.
로마 카톨릭.을 시대 구분 하면서 볼줄 알아야 해 이 인간들을. 저 중세 인간들을.
Thomas Aquinas (/əˈkwaɪnəs/; Italian: Tommaso d'Aquino, lit. 'Thomas of Aquino'; 1225 – 7 March 1274) was an Italian[10][11] Dominican friar, philosopher, Catholic priest, and Doctor of the Church. An immensely influential philosopher, theologian, and jurist in the tradition of scholasticism, he is also known within the latter as the Doctor Angelicus and the Doctor Communis.[12]
저 이야기들을 마음껏 보라고 보장한 인간이 토마스 아퀴나스.야. 이 기여도 로 이 인간이 세계 위인 탑 텐 에 넣어도 누가 머랄 사람이 없어. 그리고 또한 위대한 인간이야. 철학자 탑 텐에서 절대 빼 면 안되는 인간이고.
저때도 저런 번역질 하면서, 처음엔 머냐 이거, 하다가, 가만 이거 봐도 되는겨? 다 애매모호 아사무사 하는거야 저게. 저게 공론이 안잡혀. 이걸 잡아 준 인간, 확실한 논리로 잡아준 인간이 이 토마스 아퀴나스야. 이 인간의 보증으로 마음껏 보는겨 고대그리스 자료들을.
토마스 아퀴나스 가 없으면, 유럽은 없어. 지금 문명은 없고.
Roger Bacon OFM (/ˈbeɪkən/;[6] Latin: Rogerus or Rogerius Baconus, Baconis, also Frater Rogerus; c. 1219/20 – c. 1292),
영국에서 나오는 사람이 로저 베이콘이야. 솜머싯.태생 프란체스칸. 토마스 아퀴나스 보다 대여섯살 많아. 잉글랜드 경험주의의 효시님이셔.
이 잉글랜드 란 곳은 말이지. 자기들만의 언어 올드 잉글리쉬가 5세기야. 즉 7왕국 체제부터. 이게 윌리엄 1066부터 11세기는 미들잉글리쉬 로 가
프랑스는 올드 프랜취.가 8세기-14세기야. 초기엔 완벽한 라틴어에 압도된 시대야. 섬 잉글랜드는 떨어져서 라틴어를 벗어나는겨 일찍. 그러면서 다른 시선의 언어로 보기 시작하는겨 더해져서. 이 프랑스.는 백년전쟁 때 애들이 잉글랜드의 개입으로 달라지는거야. 그리고 이탈리안 전쟁으로 알프스 넘어가서 이탈리아의 것들을 갖고 오면서 유럽에서 압도적인 애들이 된겨 16세기 17세 는. 비록 이탈리안 전쟁 65년간 건진 건 하나 없지만, 저때 무수한 인간들이 알프스 넘어 가고 오면서, 세상에 눈을 떠. 이게 없었으면, 더 일찍 먹혔을겨 잉글랜드에게.
잉글랜드가 먼저 진화를 하는겨 이게. 정복왕 윌리엄 이라는 노르망디 가 오면서, 앵글리칸.에 노르망디 가 섞이면서 얘들이 점점 바닥이 업그레이드가 돼. 이 절정이 아이작 뉴턴이야. 한편으로는 오컬트 로 빠지고 한편으로는 경험주의가 유물론자들로 키우지만, 한편으로는 뉴턴 이 나오는겨 이게. 가장 활발한 잡종의 나라가 융합이 되는게 잉글랜드 스콧 아일랜드의 18세기 이후의 역사야. 얘들이 미국을 만든겨. 이 바닥에 저 로저 베이컨.과 오컴 이야. 이들은 12세기 고대그리스 리터러쳐의 라틴어 번역이 만든거야.
The tract Defensor pacis (The Defender of Peace) laid the foundations of modern doctrines of popular sovereignty. It was written by Marsilius of Padua (Italian: Marsilio da Padova), an Italian medieval scholar. It appeared in 1324
이 흐름으로 나온게. 교황과 황제, 교회와 세속간의 피터지는 싸움에서, 파도바의 마르실리오.의 평화의 수호. 디펜소르 파키스. 교회와 세속의 권력 관계는 어찌해야 되는가. 정치학의 시작이야.
이걸 죽 받아서, 프랑스에서 2백년 지나 나온 인간이 에티엔 드 라 보에시. 의 자발적 복종 이라는 근대 프랑스 정치학의 시작이고. 몽테뉴의 친구고.
The Discourse on Voluntary Servitude. (French: Discours de la servitude volontaire) is a most famous work attributed to Étienne de La Boétie by Montaigne. The text was published clandestinely in 1577.
디스쿠르 데 라 세르비튀드 볼롱테르. 세르비튀드.가 From Middle French servitude, from Latin servitūs, from Latin servus (“slave”). 세르부스. 노예.여. 노예의 상태.야. 저건 복종이 아니라. 노예 의 의미가 들어가야 해 이건. 자발적 노예상태. 자발적 노예의 복종.
몽테뉴.는 에쎄. 야. 이건 시도 어쩌고 가 아니라. 내가 세상 밖으로 나와서 바라보는겨. 내면의 성찰이고, 모든걸 바라보는 겨 모든 테마를. 이건 정말 제대로 다들 읽도록 해 저 당시 몽테뉴 시절로 돌아가서. 이런 형식을 최초로 장르로 만들면서 붙인겨 이인간이 에쎄 라고. 이게 에쎄이가 되고.
이전엔 디스쿠르. 걸랑. 다른 제목들은. 먼놈의 프린키피아 어쩌고 거창하게 붙이는 논문이야. 세상에 나 잘났소 우리 공개적으로 밀도있는 라틴어로 겨뤄봅시다 라는 에티켓 있는 글쓰기야 중세와 근대 초기의 모든 글들은. 몽테뉴 는 이걸 파괴한거야. 그렇다고 소설도 아니걸랑.
디스쿠르.란게 쿠르.가 코세어 cosair 란 해적의 쿠로 curro . 이건 달리다여. 디스쿠르. 여기저기 달리는겨. 말이 서로 주고 받고. 대화 로 쓰는겨. 담론 이라 하고. 토론이야. 자발적 노예복종 의 담론.
自発的隷従論. 일본은 자발적 예종론. 아주 정확히 잘 번역한겨. 칭찬해.
自愿奴役论. 중국 자원노역론. 잘 번역한겨. 칭찬해.
우리는 저게 2천년대 때나 처음 번역이 나와. 창피해. 그것도 자발적 복종 제목. 참 창피해.
니덜 먼가든 번역할때, 좀 나한테 인증서 좀 받고 출판을 해라.
The original freedom of men would be indeed abandoned by society which, once corrupted by the habit, would have preferred the servitude of the courtier to the freedom of the free man, who refuses to be submissive and to obey.
사람들의 원초적 자유.는 소사이어티에 의해 제대로 포기되었는데, 이 소사이어티는 그들 습관에 의해 타락이 되어 버리고 코트인들의 복종을 더 선호하게 돼. 자유로운 사람은 종속되고 복종하는걸 거절하는데, 이 자유보다 복종을 선호하게 돼.
글들은 좀 유치해.
The Discourse on Voluntary Servitude. (French: Discours de la servitude volontaire) is a most famous work attributed to Étienne de La Boétie by Montaigne. The text was published clandestinely in 1577.
서기 1577년 에 나왔는데. 이런 말은, 독일 농민전쟁때도 다 나온겨. 우리가 주인이다. 킹은 우리 의 아래다.
12세기의 고대그리스물의 라틴번역이, 정치사회적으로는 저런 분파도 만들고, 몽테뉴의 깊은 사색으로도 가고, 데카르트의 합리론과 베이컨도 만들고, 경험주의에 유물론도 나오지만. 그 바닥은 중세 스콜라의 저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람들과 몽테뉴.의 깊은 신앙에 바탕을 둔 무게 가 버티고 이어간거야 유럽이란건. 그게 베이컨의 말이야. 얕은 철학은 신을 버리고 깊은 철학은 신앙 근처로 가게 한다.
저들이 오컬트를 또한 막은겨. 이 오컬트.는 모든 종교 모든 인류의 종착지야. 고대 이집트도 결론은 오컬트고. 지금 이슬람도 오컬트야. 불교는 오컬트 일까요 아닐까요 지금.
우리넨 지금 기독종교 또한 오컬트고. 절에 가면 관상에 사주에 점을 보질 않나. 저게 뭔놈의 신앙이니 저게. 뭔놈의 천도제. 저게 무당 굿이랑 머가 다르냐 저게.
오컬트야.
유럽 게르만과 켈트도 오컬트 로 향하던 역사였어. 모든 문명의 종착지인. 헌데 저 12세기의 그리스 텍스트의 라틴번역과 스톨라 철학이 유럽을 오컬트에서 빠져나오게 한거야.
이땅은, 저런 이야기가 전혀 없어.
무식해. 철저한 오컬트의 나라야. 정치판이 이게 신앙이야. 저게 해괴한 신앙이 된겨. 또한 북조선이 오컬트고. 저게 다를바가 없는겨 이게 이념의 신앙놀이가. 대가리가 깨져도 모시겠다는 의지. 저건 인간의 이성을 포기하다 란 스스로의 고백이걸랑.
뉴스공장.
자발적 복종의 노예들이, 대놓고 오컬트를 하는겨 저게. 저 뉴스공장 이란 게 저 삼사십대 애들이 지금 아주 여론을 똘똘 뭉쳐서 미신이 되어버린건데. 저건 말도 안되는거야 21세기 백주대낮에. 어떻게 저런걸 공중파 라디오로 국민 세금으로 저런 프로를 내보내냐고. 마치 말야, 사이비 무당 종교 교주 에게 국민이 세금을 줘서 방송시키는겨. 미친 정신병자 가 정신병원 탈출했는데 걔한테 마이크를 주는겨 월급 일이천만원 줘가면서 ㅋㅋㅋ. 골때리는 나라야. 정부 권력이 저기가서 인터뷰를 해주고. 왜냐면, 지기들 오컬트를 선동해주는 가장 좋은 창구걸랑.
골때리는 오컬트의 나라야.
미국독감. 으로 검색순위 조작질 해. 서로 모여서. 우한폐렴 왜 써요? 해대면서. 철저한 중국 족속 주의 애들이야 저것들이. 저 조선 오백년이 저런 해괴한 오컬트 집단을 만들고, 저걸 국민 세금으로 운영을 하는겨 ㅋㅋㅋ. 인류 문명사에 저런 건 정말 있던 적이 없어. 정말 기괴하고 해괴망측한 나라야.
어떻게 저런 애 말에 저리 다 늙은 이들이 모여서 저런 짓들을 하냐. 아무리 무식하고 지능이 없고 아는게 없고 배운게 없고 열등에 절고 절었다지만.
오컬트의 나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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