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ssays (FrenchEssais, pronounced [esɛ]) of Michel de Montaigne are contained in three books and 107 chapters of varying length. They were originally written in Middle French and were originally published in the Kingdom of France. Montaigne's stated design in writing, publishing and revising the Essays over the period from approximately 1570 to 1592 was to record "some traits of my character and of my humours." The Essays were first published in 1580 and cover a wide range of topics.[1]  

 

몽테뉴.의 수상록. 수필집. 이라는 에쎄.가 1533년생.이 1592년 60년 살면서 죽기직전 37세 부터. 22년 동안 출판 수정을 하고 죽었는데. 서기 1580년. 첫판이 47세 때 나온거고. 즉 10년 동안 쓴걸 출판하고, 이후 12년 더 수정해서 개정판들을 낸건데 말야. 

 

아빠가 1568년.에 죽어. 몽테뉴 35세. 이후 1571년에 성에 들어가서 은거생활을 하는겨 거의. 아빠의 죽음이 큰거야 이사람은. 그러면서 산다는 것에 대한 회상을 하는거걸랑. 인간의 것들에 대해서. 

 

서기 1561년. 18세에 샤를 9세의 코트에 들어가서. 루앙 함락도 참전하고. 1563년까지 있다가, 고향 보르도의 의회생활을 하면서 파리를 떠난거걸랑. 위그노전쟁 1562-98. 이 바씨학살.로 시작해서, 성 바르텔레미의 날 사건이 10년후 1572년.이고,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는데. 이때는 앙리2세와 메디치의 카테리나.의 세자식들이 킹이야 36년간의 위그노 전쟁은. 프랑수아2세는 스콧마리를 과부로 만들고 일찍 죽고, 다음 동생 샤를9세 1560-74. 앙리3세 1574-89. 가 암살 당하면서 앙리2세와 이전 프랑수아1세.의 발루아 앙굴렘.이 끝나고. 이전은 발루아 오를레앙의 루이12세 였고 그이전은 샤를8세까지의 발루아 였고. 앙리4세부터는 부르봉 이걸랑. 복잡할게 없어 애들 족보도. 

 

몽테뉴.는 위그노 본격 시작하는 1562년 바씨 학살 직전에 샤를9세 코트 있다가, 2년 하고 떠난거야. 생미셸 기사단의 칼라.도 받아. 

 

The Order of Saint Michael (FrenchOrdre de Saint-Michel) is a French dynastic order of chivalry, founded by Louis XI of France on 1 August 1469,[2][6]  

 

성 미카엘. 생미셸 기사단은 샤를8세 아빠 루이11세 가 만든거고, 루이11세는 부르고뉴 자식인 용감공 샤를.이 웬수고. 얜 킹덤 세우려고, 애들 모아서리 퍼블릭 윌 리그 만들고, 몽레리 전투에. 루이11세에 연일 대드는거고 그러다 낭시전투로 먼저 죽걸랑. 그러면서 또 저놈의 딸 마리가 막시밀리언이랑 결혼하면서 이때부터 합스부르크와 내전하면서 웬수가 되서 이탈리안 전쟁이 아들 샤를8세때부터 65년간 시작하는건데. 이 루이11세가 부르고뉴 애들의 현명공 필립이 만든 기사단 황금양모피가 부러웠걸랑. 그래서 만든 기사단이 생미셸 기사단이야. 

 

부르고뉴는 백년전쟁 터지고, 에드워드3세가 가터 기사단을 만든걸 카피해서 저 황금양모피를 만들고 이걸 합스부르크가 마리가 시집하면서 이 기사단을 갖고 간거야. 

 

몽테뉴가 저 생미셸 기사단원도 되는겨 샤를9세가 줘서. 헌데 저길 자기가 떠난겨 이건. 그래서 위그노 전쟁의 중심에서는 벗어난거지 이후에. 자기 동네는 위그노들 천지가 되고, 엄마도 위그노로 전향하지만. 그리고 엄마랑 같이 사는겨. 헌데 아빠가 죽어. 아예 성 안으로 칩거를 들어가. 엄마와 다른 성에 사는거야. 가끔 만남을 간거고. 여기서 쓴게 10년 정리한게 몽테뉴 첫판 이고 이후 12년 더 쓰고 수정해서 사후에 개정판이 나와. 

 

 

이건 미들 프랜치.로 쓴거야. 라틴어에 최고의 사람이 자기땅의 언어로 낸겨. 

 

문명의 흐름을 볼때 가장 중요한 잣대는 리터러쳐.고 이건 언어족의 변화고 진화야. 이 흐름으로 봐야해. 나만의 최고 사관인데. 이게 맞아. 그래서 우리 조선민국은 너무나 후진거고. 무지한거고. 이 한자문명권은 전혀 언어가 진화가 안되고, 글자가 진화가 안된겨. 폰트 글씨체만 바뀐겨 이게. 

 

Charles of Orléans (24 November 1394 – 5 January 1465) was Duke of Orléans from 1407, following the murder of his father, Louis I, Duke of Orléans, on the orders of John the Fearless, Duke of Burgundy.[1]  

 

미들프렌치.가 14세기부터 나오는데. 17세기 초까지인, 이것도 데카르트 때야. 30년전쟁이고. 이 이후부터 마던프렌치야. 올드 프렌치.는 8세기부터고. 올드 잉글리쉬는 7왕국 서는 5세기고. 잉글랜드의 힘의 저력은 노르망디 윌리엄 1066년인 11세기부터의 미들잉글리쉬야. 미들 프렌치보다 3백년이 빠른겨 이게. 올드와 미들이 3백년씩 빨라. 이게 잉글랜드.가 강대국 영국 을 만든 힘이야. 

 

잉글랜드의 정체성은, 영어를 법정코트어로 법규정한 1362년 플리딩 스태튜트. 에드워드3세 때야. 백년전쟁 시작하면서. 이때 코트에 20대 청년이 제프리 초서.고 나중에 캔터베리를 영어로 쓰는겨. 

 

미들프렌치.도 백년전쟁때 시작하는겨. 백년전쟁일때 프랑스도 자기들 언어가 바뀌어.

 

  • the French language became clearly distinguished from the other competing Oïl languages, which are sometimes subsumed within the concept of Old French (l’ancien français)
  • the French language was imposed as the official language of the kingdom of France in place of Latin and other Oïl and Occitan languages
  • the literary development of French prepared the vocabulary and grammar for the Classical French (le français classique) spoken in the 17th and 18th centuries.

올드 프렌치의 오일어와의 결별이 시작이 되고, 공식 언어가 되는게 이 미들 프렌치야. 라틴어 오이(오일)어 옥시탄어 대신 자기들의 미들프렌치를 공식어로 지정하게 되는겨 이게. 이게 늦어 에드워드 3세 1362년 시작하는 것보다. 이게 프랑스가 나중 영국에 뒤집혀지고 근현대사가 후져진 근본적 이유고 볼 수 있는 평가 지표야. 

 

프랑스가 자기 언어의 변화를 시작한 것도 백년전쟁 저 노르망디가 앵글리칸이 되서 대륙에 쳐들어오고서 얘들도 언어가 변하는겨. 먼가 더 섞인겨. 이 먼가 섞인게, 저 노르망디가 앵글리칸이 되서 익힌 미들잉글리쉬.가 여기에 들어온거야. 

 

 이 시작이. 오를레앙 의 샤를 이야. 서기 1407년-1465년 공작.  13세에 올라. 아빠 루이.가 부르고뉴 무섭공 존.에 암살당하고 1407, 이걸로 부르고뉴-오를레앙 내전인 아르마냑-부르고뉴 내전이 터지고. 이 부르고뉴 무섭공 장. 존은 샤를7세 가 도팽일때 회담하다 몽트로 다리에서 암살당하고 1419. 부르고뉴는 완전히 잉글랜드와 손을 잡고. 아라스 협약.1435년. 으로 부르고뉴 와 프랑스 킹덤 코트가 화해를 하는거고.

 

전다르크.는 1430년에 잡히고 다음해 화형당하는거고. 아라스 협약 사오년 전이야. 

 

잔다르크 는 Compiègne 콩피엔느. 외즈 지역. 북프랑스에서 잉글랜드-부르고뉴 연합에 잡힌겨 1430년. 잔다르크는 부르고뉴애들에게 잡혀. 이걸 잉글랜드가 1만 리브르 를 주고 잔다르크를 잉글랜드가 점령한 루앙.으로 데려 오는겨. 잔다르크 를 이단 으로 선언해서 샤를7세의 정통성을 치려는 거걸랑. 즉 부르고뉴가 돈에 팔아서 잉글랜드 가 죽인겨.

 

 

The Battle of Agincourt (/ˈæʒɪnkɔːr(t), -kʊər/;[a] FrenchAzincourt [azɛ̃kuʁ]) was one of the English victories in the Hundred Years' War. It took place on 25 October 1415 (Saint Crispin's Day) near Azincourt, in northern France.[b] England's unexpected victory against the numerically superior French army boosted English morale and prestige, crippled France, and started a new period of English dominance in the war.

 

아젱쿠르 전투 1415년. 아젱쿠르 도 북쪽이고 칼레 근처야. 잉글랜드가 숫적열세임에도 이걸 이기고. 이때 포로가 되는 사람이  21세 가 된 오를레앙 의 샤를 이야. 아빠가 암살당한지 8년 지난거고. 이사람이 포로가 되서 잉글랜드서 사는겨 런던탑에 있다가 캐슬로 옮기고. 얘들은 포로 가 감빵가는게 아니라, 걍 성에서 편히 살아 못나가게 할뿐. 여기서 24년간을 있어. 1440년.에야 프랑스로 와. 46세에. 이미 아빠 암살범 무섭공 존.은 1419년 암살당하고, 잔다르크 1431년 화형.에 아라스 조약 1435년.으로 부르고뉴와 프랑스 킹이 화해를 했어. 이때가 현명공 필립.이야. 이 부르고뉴 현명공 필립.이 또한, 잉글랜드에 있는 오를레앙 샤를.에게 먼저 화해 하자고 해. 이미 다들 아빠들 죽었어. 둘이 동갑 비슷해. 그러자고 하고, 그리고나서 온거야. 이십사오년만에. 

 

그러면서, 이사람이, 프랑스 말을 잊고, ㅋㅋㅋ. 영어를 더 잘쓰게 된겨. 

 

이사람이 미들 프렌치 의 시작이야. 오를레앙의 샤를.이 잉글랜드에 24년 있으면서, 영어화된 프랑스어로 시들을 쓴게 전해져. 이게 미들 프렌치야. 

 

https://www.youtube.com/watch?v=VCCxbNkzvLQ

 

IS SHE NOT PASSING FAIR?

Is she not passing fair,
   She whom I love so well ?
On earth, in sea, or air,
   Where may her equal dwell ?
Oh! tell me, ye who dare
   To brave her beauty's spell,
Is she not passing fair,
   She whom I love so well ?

 

그녀는 참으로 아름답지 않나?

   그녀, 내가 아주 정말 러브하는.

땅위에서, 바다 나 공기 속에서,

   어디에 그녀와 같음이 살고 있을까?

오! 나에게 말해, 당신은 그나마

   그녀의 아름다움의 마력을 대할 수 있으니

그녀는 정말 아름답지 않니?

 그녀, 내가 정말 아주 러브하는

Whether she speak or sing,
   Be jocund or serene,
Alike in ev'rything,
   Is she not beauty's queen ?
Then let the world declare,
   Let all who see her tell,
That she is passing fair,
   She whom I love so well !

 

그녀가 말을 하던 노래 부르던

   즐겁고 평화로와라, 

모든 것이 차이가 없어

   그녀는 아름다움의 퀸이 아닐까?

자 세상이 선포하게 해,

   그녀를 보는 모두가 말하도록 해,

그녀는 아주 정말 아름답다고,

   그녀, 내가 너무너무 러브하는.

 

by 오를레앙의 샤를

 

.

걍 잉글랜드에서 팔자좋게 저런 시들 쓰는거지. 

 

미들 프렌치.로 몽테뉴가 에쎄.를 써. 그래서. 

 

몽테뉴 에쎄.나 몇개 볼까 했더만. 

 

남들이 자기에 대하여 자신과 포부를 가지는것을 보면 감탄을 금할수 없다. 나는 미리 그런일을 할수있는 수단이나 방법을 생각하지 못한다. 결과를 보고나서밖에는 내 역량을 알지 못한다. 다른 모든일에도 그렇지만 나는 나 자신에대한 확신을 가지지 못한다. 그래서 어쩌다가 내가 하는일이 잘 되는 수가 있으면 그것은 내 역량이라기 보다는 운수가 좋았기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어떻는 나는 모든 일을 되어가는대로 조마조마한 생각으로 계획한다. 철학 자체도 아무것도 결론 내리지 못하며 근거가 박약하고 아는것이 없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인정할 때 가장 잘하는 일로 보인다. 사람이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가장 그릇된 사상을 가꾸게되는 주요한 요인은 자기 자신을 높이 평가하는데서 온다고 본다.-위키 한글 몽테뉴. 

 

다들 보도록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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