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entence (if not the idea, which had been expressed in various earlier forms) was coined by English author Edward Bulwer-Lytton in 1839 for his play Richelieu; Or the Conspiracy.[1][2] The play was about Cardinal Richelieu, though in the author's words "license with dates and details ... has been, though not unsparingly, indulged".[1] The Cardinal's line in Act II, scene II, was more fully:[3]
True, This! —
Beneath the rule of men entirely great
The pen is mightier than the sword. Behold
The arch-enchanters wand! — itself is nothing! —
But taking sorcery from the master-hand
To paralyse the Cæsars, and to strike
The loud earth breathless! — Take away the sword —
States can be saved without it![4]
펜은 칼보다 강하다. 서기 1839년에 에드워드 불워-리튼.의 대본, 리슐리외; 다시말하면 음모덩어리. 에서 나오는 대사 인데.
진실이로다, 이것이야말로!-
사람들을 다스리는 그 이면은, 완전히 위대하게도
펜은 더 강하다 칼보다. 보시라
대마법사들이 서성대도다! -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니다! -
그러나 마술을 부리고 있다네 저 부리는 손에서
카이사르들을 마비시키고, 치더니
저 왁자지껄한 지구가 숨을 멎는구나! - 칼은 내버려라-
국가는 구원될수 있다 그것없이도!
Assyrian sage Ahiqar, who reputedly lived during the early 7th century BCE, coined the first known version of this phrase. One copy of the Teachings of Ahiqar, dating to about 500 BCE, states, "The word is mightier than the sword."[10]
According to the website Trivia Library,[12] the book The People's Almanac[11] lists several supposed predecessors to Bulwer's phrasing. Their first example comes from the Greek playwright Euripides, who died c. 406 BCE. He is supposed to have written: "The tongue is mightier than the blade."[12][a]
아히카르. 라는 아람인의 이야기.라는 파피루스에 기원전 500년의 글에 나오는 말. 말은 칼보다 강하다. 이때 처음 등장하고
에우리피데스.가 기원전 406년에 죽었는데. 이사람이 썼다는, 혀는 칼날보다 강하다.
신약에 히브리인 서신.과 탈무드.에 보이지만, 저 말이 유행한건 정확하게, 에드워드 불워리튼. 이 저때 퍼뜨리면서 1840년대부터 유행이 된 말인데. 저건 리슐리외 대사여. 쟤가 내세운 악마 캐릭이 리슐리외 인거고. 악마들의 말이야 펜은 칼보다 강하다.
선동하기 좋은게 펜 이란 뜻이야. 펜의 마법이 선동의 제 일의 도구이고.
사람들을 문명인으로 만드는건, 저런 펜의 선동질로는 만들수가 없어.
"Indeed, the word of God is living and effective, sharper than any two-edged sword, penetrating even between soul and spirit, joints and marrow, and able to discern reflections and thoughts of the heart." 히브리인들에 서신 4장2절.
신의 말은 살아있고 효과적이고 날카롭고 어쩌고 하지만 말야. 이게 마음에 새겨지고, 구현이 되는게 수천년간의 과정일 뿐이야. 걍 펜이란건 선동하기 좋은 도구일뿐이고. 혐오 조장하고, 사람들 말살시키고. 그게 나치의 히틀러야.
세상은 저런 추악한 펜들의, 혐오 조장 하는 말글일 뿐이야. 즉 쟤가 잘 본거야 에드워드 불워리튼 이란 영국애가.
헌데 저걸 웃기게도, 뭔 정의롭다며 하는 애들이 저딴 말을 인용하는거 보면 참 웃겨 저런 풍경이.
Charles-Marie Gustave Le Bon (French: [ɡystav lə bɔ̃]; 7 May 1841 – 13 December 1931) was a leading French polymath whose areas of interest included anthropology, psychology, sociology, medicine, invention, and physics.[1][2][3] He is best known for his 1895 work The Crowd: A Study of the Popular Mind, which is considered one of the seminal works of crowd psychology.[4][5]
저런, 펜이 칼보다 강하다, 저런 듣기 좋은 말의 위력.으로 사람들 선동하는거군, 하면서 저걸 글로 푼 사람이 귀스타브 르봉.이야. 프랑스 대학살 1789를 혁명으로 해대다니 저 끔찍한 피바다의 시기를, 대체 왜 우리네 프랑스인들은 저리 잘 속아넘어갈까, 아 저 칼보다 강한 말의 위력이란. 하며 쓴게 군중심리학.이란거야. 이게 군사학의 필독서고, 이걸 써먹은게 나치 들이야. 저기서 티나오는게 반유대주의고, 이것도 역시나마 주작소설들을 사실로 받아들이게 하고 홀로코스트를 하는거고 이 들이.
저게 북조선이고. 인민군 위대해 해대민서리 북에 가서리 숙청당한 인간들이 또한 숱한거고.
북조선 개별방문하세요~~ 실향민은 돈대주겄소~~. 이런거 반대하면 적폐질 당하겄지? 참 코메디야 코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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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aying quickly gained currency, says Susan Ratcliffe, associate editor of the Oxford Quotations Dictionaries. "By the 1840s it was a commonplace."[9]
서기 1840년대에 저 말이 흔했다. 즉 저건 리슐리외 음모주의자 의 리슐리외 대사에서 유행을 탄건데. 즉 지들이 정의롭다며 하는 게 지들이 악마시하는 리슐리외 란거지.
Edward George Earle Lytton Bulwer-Lytton, 1st Baron Lytton, PC (25 May 1803 – 18 January 1873) was an English writer and politician. He served as a Whig MP from 1831 to 1841 and a Conservative MP from 1851 to 1866. He was Secretary of State for the Colonies from June 1858 to June 1859, choosing Richard Clement Moody as founder of British Columbia.
에드워드 조지 얼 리튼 불어-리튼. 리튼 배런.이야. 얜 휘그당 의원이었다가 전향하곤 토리당 국회의원하고. 영국 식민지 장관이었어. 졸 잘나갔걸랑.
He coined the phrases "the great unwashed", "pursuit of the almighty dollar", "the pen is mightier than the sword", and "dweller on the threshold". Then came a sharp fall in his reputation, so that he is little read today. The sardonic 1982 Bulwer-Lytton Fiction Contest claimed to seek the "opening sentence of the worst of all possible novels".[3][4][5][6]
얘가 유행시킨 말들이 제법 되는데. 저 말에 더하여. 더 그레이트 언와시트. 퍼수트 오브 디 올마이티 달러.
Messrs. the Great Unwashed" in Lytton's Paul Clifford (1830) 얘 소설에서 나오는 문구. 메서즈. 안씻는 대중들. 메서즈 라는게 미스터의 복수고. 일만 민들.을 대변하는 말이야.
Hoi polloi (Greek: οἱ πολλοί, hoi polloi, "the many") is an expression from Greek that means the many or, in the strictest sense, the people. In English, it has been given a negative connotation to signify deprecation of the working class, commoners, the masses or common people in a derogatory or (more often today) ironic sense.[1]
호이(오이) 폴로이. the many. 고대그리스어가 초기엔 호. 로 발음되고 이게 오.가 돼. 폴로이.는 폴루스.고 이건 많다 라는 뜻일 뿐인데. 이게 로마로 가서 폴루스.가 플레브스 plebs 가 되고 이게 피플이 되는겨.
프롤레타리안.이란건. 로마 라틴어 proles 프롤레스.야. 이건 까기만 하는겨. 낳는겨. 이게 마르크스 가 자랑스럽게 써대는, 가진 것 없고 생식해서 생산만 해대는 위대한 계층 하는 프롤레타리안. 프롤레타리아트. 라는 정확한 뜻이야.
Bulwer-Lytton is also credited with an appellation for the Germans: "Das Volk der Dichter und Denker" (The people of poets and thinkers).
얘가 독일인들을 일컫는 말, 시인들과 사상가들의 사람들.
올마이티 달러.라는 강력한 달러는 얘보다 먼저 나온 말이고. 드웰러 온더 뜨레스홀드, 가장자리의 거주자 라는건, 사이에서.의 무당들이 접하는 귀신이야. 이승과 저승의 가장자리에 있는 유령이고.
걍 허섭인데. 헌데 사진보면 잘난 듯.
얘가 평판이 완전히 떡이 된거고. 그래서 지금 얘 글들은 안 읽는거고
The Bulwer-Lytton Fiction Contest (BLFC) is a tongue-in-cheek contest, held annually and sponsored by the English Department of San Jose State University in San Jose, California. Entrants are invited "to compose the opening sentence to the worst of all possible novels" – that is, deliberately bad.
얘 이름을 딴 소설상.이 불워리튼 픽션 콘테스트. 소설 중에 최악의 시작을 쓴 소설을 매년 뽑는데.
This opening, from the 1830 novel Paul Clifford, continues:
It was a dark and stormy night; the rain fell in torrents, except at occasional intervals, when it was checked by a violent gust of wind which swept up the streets (for it is in London that our scene lies), rattling along the housetops, and fiercely agitating the scanty flame of the lamps that struggled against the darkness.
얘 서기 1830년의 소설 폴 클리포드.가 이리 시작한다는거지. 그것은 어둡고 폭풍치는 밤이었다 폭우가 내리고 어쩌고 저쩌고.
저게 이땅빠닥 조선반도에서 보는 아주 흔한 레퍼터리여 저게. 니덜이 위대하답시고 떠받드는 그 선생 애들의 모~든 글들이 저래. 아 정말 이땅빠닥의 소설들은, 정말정말 못봐줘 이건. 걍 똥이야 똥.
끔찍해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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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넨, 정말 제대로 가이드 해주는 평론가.가 단 하나 없는게 문젠데. 지들끼리 떠받들고. 아 음청나 진짜. 똥글들을 서로서로 띄워주고. 아 끔찍해.
웬걸, 오잉, 당당히 나와서, 우리가 조구기여!.
당연해.
그 인식의 수준이야. 그 말글수준에, 그 수준에서 나오는 모랄이고 세상보는 수준이고.
쟤들이 이땅의 선생이야.
헌데, 그렇다고, 또 다른 이들의 글도 없어.
이문열 소설이라봤자, 이 인간도 바닥이 유학이야.
유치한거야 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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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이야. 아이들은, 유럽 문학책들 읽어 두툼한것들. 요즘은 번역 잘 된게 많이 나와. 아동용 절대 읽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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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배워 철저하게. 영어로 봐. 일어 배워서 쟤들꺼 보고. 쟤들 리터러쳐 가 조선보다 숫자만으로 7백년이 앞섰다. 쟤들 글로 된 이야기가. 쟤를 리터러쳐 엄청나다 저게. 그래봤다 유럽애들 밑이지만.
팩트다 팩트. 현실인식없고 반성 없고 조선 위대해 하는한 이땅은 희망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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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이라곤 없어 여긴. 오직 남들만 반성하래. 자기들 오백년은 위대하대. 야 정신병도 저따위 정신병은 이건 머 약도 없다 이건.
Louis XIII (French pronunciation: [lwi tʁɛz]; sometimes called the Just; 27 September 1601 – 14 May 1643) was King of France from 1610 to 1643 and King of Navarre (as Louis II) from 1610 to 1620, when the crown of Navarre was merged with the French crown.
루이13세.가 아빠 앙리4세 암살로 1610년 나이 9세에 킹에 올라서, 엄마가 섭정을 하는건데. 이 엄마가 메디치.의 마리.걸랑. 이 여자는, 메디치 가문 시작 메디치 은행 세운 지오반니의 막내 핏줄이야. 위대한 로렌초는 지오반니의 첫째 코시모 핏줄이었고.
이탈리아 전쟁끝나고, 코시모의 피렌체.는 끊겨서 막내의 메디치가 갖고가고, 마리 의 할아버지가 카를5세한테 토스카나 그랜드 듀크.라는 대공작 타이틀을 받걸랑. 더군다나 이 마리.의 엄마는 페르디난트1세 황제의 막내딸이야. 아주 완벽한 합스부르크여. 이 여자가 아들 루이13세 위에서, 친합스부르크.의 외교정책을 하는겨.
이 프랑스 라는 나라는, 대머리샤를 죽고서, 가운데 로타링기아를 오른쪽 게르만 킹에게 다 뺏기고는, 저걸 갖고 오겠다는게 10세기 초부터야 얘들은. 이게 2차대전까지 오는겨.
Gerberga of Saxony (c. 913 – 5 May 968/9 or 984?) was a French queen who ruled as regent of France during the minority of her son Lothair in 954–959. She was a member of the Ottonian dynasty. Her first husband was Gilbert, Duke of Lorraine. Her second husband was Louis IV of France. Contemporary sources describe her as a highly educated, intelligent and forceful political player.
작센의 게르베르가. 제르베르즈. 이여자가 루이4세.의 부인이야. 여기서 아들이 로타르. 이고. 로타르.가 13세에 킹이 되는겨. 엄마 게르베르가.가 섭정을 하고. 이때가 위그대제. 위그카페의 조상님이 등장하는때인데.
작센의 게르베르가.는 오빠가 오토황제.여. 그리고 오토황제의 누나.가 위그대제.의 부인이야. 게르베르가.에게 위그대제.는 형부여. 프랑스 란 나라가, 카페자식들이고, 엄마쪽으로 저게 오토의 자식들인겨. 신성로마제국은 오토와 전혀 상관이 없는거고 뒤엔.
저때도 프랑스 코트에선 완전히 로타링기아를 뺏긴겨 게르만애들에게. 더하여 퀸이 오토핏줄이야. 얘들이 반발이 무지 심한거야. 힘은 없고 억울하고. 그래서 아들 로타르 가 킹에 오르는데, 코트에서 이게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이때 형부인 위그카페.에게 아키텐과 부르고뉴 땅을 주면서 지원을 받는거야. 뒤에 카페는 이 힘으로 된거야.
Emma of Italy (Emma d'Italie; c. 948 – after 987) was the Queen of Western Francia as the wife of King Lothair, whom she married in 965. Their son, Louis V, was the last Carolingian King.
킹 로타르의 부인.이 이탈리아의 엠마.야. 이여자도, 엄마가 아델레이드. Adelaide 야. 이 아델레이드.가 첫결혼은 프로방스의 위그. 이탈리아 킹과 결혼해서 낳은 딸이 엠마.이고. 그리고 재혼으로 들어가는 자리가 오토황제야. 이 엠마가 게르만의 오토와의 사이에서 어중간해진겨. 이때 도련님인 자기 신랑의 동생이 이여잘 간통으로 고소하면서 로타링기아를 먹고 프랑스 킹을 하려하걸랑. 그리곤 루이5세 죽고, 얘가 살아있음에도 얜 프랑스 코트의 적이 되서 카롤린지언.은 루이5세로 끝을 맺고. 위그 카페가 서는건데.
저때도, 여자들이 오토의 핏줄들이란 것때문에 친 게르만 편 든다고, 프랑스 코트가 반발이 무지 심한겨 저때도. 이 절치부심이 프랑스 코트에서 천년을 이어가는겨 이게.
이 절정이, 루이13세의 엄마야. 메디치의 마리. 친정이 합스부르크에 의해 대공작이 되었고, 자기 엄마는 페르디난트1세 황제의 막내딸이고. 아들을 섭정하면서 신성로마제국편을 철저하게 드는거야.
이걸 거부하는게, 웃기게도, 다 성장한 아들이야. 이 아들에게 저 프랑스의 레종 데타 라는 정체성이 있는겨. 대체 우리엄마는 프랑스 사람이야 합스부르크 신성로마사람이야?
그리고, 왜 다 컸는데, 나한테 권력을 안 넘기는겨 이거?
리슐리외.가 16세 많어. 리슐리외 는 웃기게도, 엄마 메디치의 마리.가 선발한 인재야.
He was consecrated as a bishop in 1607 and was appointed Foreign Secretary in 1616. Richelieu soon rose in both the Catholic Church and the French government, becoming a cardinal in 1622, and King Louis XIII's chief minister in 1624.
리슐리외.는 서기 1607년. 22세에 주교가 돼. 엄마의 의도대로. 뤼송 이란 방데지역에. 가족 연금받았던. 이건 앙리4세때고. 1610년에 루이 13세가 즉위해. 외교부 장관이 되는게 1616년이야. 이건 섭정하는 마리 가 임명한겨. 루이 13세는 다음해 1617년 나이 16세에 권력을 잡아.
Concino Concini, 1st Marquis d'Ancre (23 November 1569 – 24 April 1617), was an Italian politician, best known for being a minister of Louis XIII of France, as the favourite of Louis's mother, Marie de Medici, Queen of France.
콩치노 콩치니, 토스카나 사람이야. 엄마가 자기 고향사람 델꼬온겨. 이사람이 실세고. 루이 13세.가 암살을 시키고, 권력을 잡는겨. 엄마는 쫓겨났다가 둘이 화해를 해.
이때 루이13세의 심복은
Charles d'Albert, Duke of Luynes (5 August 1578 – Longueville, 15 December 1621)
루인공작 샤를.이야. 헌데 이사람이 1621년에 죽어. 그러면서, 리슐리외.가 이사람 자리를 대신하는거야. 리슐리외.는 엄마 마리가 캐스팅한 인간이야. 헌데 리슐리외.는 루이13세 편이지 엄마 메디치 마리편이 아냐. 마리가 열받는겨.
Day of the Dupes (in French: la journée des Dupes) is the name given to a day in November 1630 on which the enemies of Cardinal Richelieu mistakenly believed that they had succeeded in persuading Louis XIII, King of France to dismiss Richelieu from power.[1] The actual day is thought to have been on the 10th, 11th, or 12th of the month.
엄마 마리.가 쫓겨나고 감금억류당하고 화해하고. 10여년이 흐른 서기 1630년.이야. 자기 아들 루이 13세도 다 커서 29세가 되었고. 이때 동쪽에선 30년 전쟁 중이고 막 스위든이 바다건너 착륙할때고. 엄마 마리가, 자기 아들에게, 리슐리외 를 내쳐라. 너 엄마 선택할래 리슐리외 선택할래. 헌데 루이가 답을 안하고 베르사이유로 사냥을 떠나.
리슐리외.는 자기가 팽당한 줄 알았어. 저기가 뤽상부르 궁.이야 파리의. 리슐리외의 적들이 리슐리외를 죽이려 드센 분위기에서 겨우 탈출을해서 루이한테 가. 루이가 재신임을 확인해 주고. 엄마 마리는 그냥 떠난겨. 브뤼셀 에 암스테르담으로.
메디치의 마리.의 딸이 찰스1세의 부인 마리.야. 뒤에 목짤려 죽는. 이 마리.이름 따서 미국 메릴랜드.가 나온거고. 엄마 메디치.는 암스테르담에서도 귀빈인겨. 프랑스와 척질일이 없걸랑. 뒤엔 프랑스가 자기들 편이 되는거고. 딸 잉글랜드땅에도 목짤리기 전이니 여행가고. 이여자는 걍 리슐리외 에 대한 배반감만 느끼는거지, 권력 놓고 오히려 여행을 다니는거야. 1642년에 쾰른에서 죽어. 시신은 프랑스로 갖고 오고. 아들 루이13세는 다음해 죽어. 미묘한 모자사이야. 이건 엄마의 욕심만 큰거였고, 엄마는 권력놓고 오히려 뒤 10년 여행이 편한겨 이건. 부들부들 할꺼도 없고.
저때, 엄마 마리.가 아들아 너 엄마냐 리슐리외냐 하면서, 리슐리외는 자기가 끝났다 생각한거고, 엄마는 자기가 이겼다 생각한거고, 엄마의 주변애들은 자기들세상이라 착각을 한거고. 모두 속은겨 루이13세한테. 저날을 라 주르니 데 뒤프. Dupes 뒤프가 명사.로 사기당한 자.야. 복수고. 저건 사기당한자들의 날. 이란 건데. 모두 루이한테 사기당한겨.
리슐리외.가 서기 1621년인 36세부터 본격 신임을 받기 시작한겨. 루인공작 죽고.
리슐리외.가 이게 족보가 없걸랑. 헌데 가만보면, 무자게 똑똑한 천재 로 보이고.
François Leclerc du Tremblay (4 November 1577 – 17 December 1638), also known as Père Joseph, was a French Capuchin friar, confidant and agent of Cardinal Richelieu. He was the original éminence grise—the French term ("grey eminence") for a powerful advisor or decision-maker who operates secretly or unofficially.
프랑스와 레클레어 뒤 트렘블레. 페레 조셉. 조셉 영감. 고리오 영감 할때 페레. 하걸랑. 프란체스코 수도사 인데, 이사람이 프랑스 코트에서 아빠에 이어 신임받은거고, 나서지 않고 엄마 마리.의 자문을 한거고, 그러다 리슐리외.를 캐스팅한거고, 리슐리외는 이사람 눈에 띄어서 출세를 하는겨. 또한 이사람도 반합스부르크고.
리슐리외.도 엄마 마리.가 캐스팅해서 같이 쫓겨났걸랑. 그러다 루인 공작 죽은 1621년에 다시 코트로 들어온거야. 엄마 마리.는 리슐리외가 자기 챙겨줄줄 알았는데 삐친거고.
To further consolidate power in France, Richelieu sought to suppress the influence of the feudal nobility. In 1626, he abolished the position of Constable of France and ordered all fortified castles razed, excepting only those needed to defend against invaders.[35] Thus, he stripped the princes, dukes, and lesser aristocrats of important defences that could have been used against the King's armies during rebellions. As a result, Richelieu was hated by most of the nobility.
그리곤, 반합스부르크 기치하에, 힘을 킹으로 모으는겨, 귀족들 영향력을 죽이고, 콘스타블 이란 마굿간지기란 이름의 코트 사령관을 없애. 이 콘스타블 이란 말이, 폴리스 의 일개 순경.이 돼. 미드 영화를 보면. 19세기 문학에 어이 순경, 어이 경찰 할때 호칭이 오피서.에 이 콘스타블.이야. 모든 요새들을 철거하라고 명령해. 주요 수비할 곳만 빼고. 귀족들이 부들부들 데는겨 이게.
그리곤, 다음으로, 위그노 진압이야
Another obstacle to the centralization of power was religious division in France. The Huguenots, one of the largest political and religious factions in the country, controlled a significant military force, and were in rebellion.[36] Moreover, the King of England, Charles I, declared war on France in an attempt to aid the Huguenot faction. In 1627, Richelieu ordered the army to besiege the Huguenot stronghold of La Rochelle; the Cardinal personally commanded the besieging troops
이사람의 핵심은 권력의 집중이야. 이대로는 프랑스는 안되는겨. 얘들이 이탈리아를 다 뺏긴거고, 얘들 딴에는 빼앗긴 나폴리를 갖고 오려다 오히려 더 뺏긴거고. 리슐리외는 자기들 정비하면서 결국 얜 로타링기아 다 갖고오겠다는겨. 그리곤 이후 나폴리도 다시 갖고 오겠다는겨 얜. 그러기 위해선 권력의 집중이야. 위그노가 여전히 문제야 내분일으키는데. 라 로셸.이 백년전쟁 전부터 저긴 잉글랜드세력이었고, 여기가 여전히 위그노 들 세상이고, 여기가 낭트.에 바로 방데전투 로 프랑스 1789 대학살의 내전중 가장 비참한 내전이 또한 이쪽이야. 이런걸 이용하는건 잉글랜드고, 잉글랜드의 내전을 이용해서 지원하는건 프랑스고, 얘들 둘은 정말 천년의 웬수야 이건. 상상을 초월해 이 프랑스와 영국의 서로간의 증오심은.
Although the Huguenots suffered a major defeat at La Rochelle, they continued to fight, led by Henri, duc de Rohan. Protestant forces, however, were defeated in 1629; Rohan submitted to the terms of the Peace of Alais
위그노와의 전쟁.이 서기 1629년.에 끝나. 로한 공작 앙리.가 항복을 하고. 조약을 맺어. 알레스 조약. 위그노는 모든 정치적 잇권을 내려놓고 요새는 철거하고 해산하는겨. 낭트 칙령의 공식적 철회야. 위그노가 결정적으로 지워져. 태양왕 루이때 도 티나오지만 세력이 미미해. 저 다음해에 마리와의 담판에 리슐리외.가 승리한거고.
로한공작 앙리.는 반란군 대장이걸랑. 헌데 말야. 걍 저기서 조약하고, 이사람은 베네치아 로 가서, 베네치아의 사령관으로 지내는겨.
이런게 달라 극동이랑. 극동은 저럴 여지가 없어. 아시아 역사는 숨통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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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리슐리외.가 하는게, 반합스부르크 전쟁을 뒤에서 하는겨. 신성로마의 프로테스탄트에 돈을 대주고, 네덜란드에도 돈으로 지원을해. 그리고, 스페니쉬 로드.를 막아야 해. 여기에 사보이를 꼬시는거야. 리슐리외는 용병을 대주고.
The Relief of Genoa took place between 28 March 1625 and 24 April 1625, during the Thirty Years' War.[10] It was a major naval expedition launched by Spain against the French-occupied Republic of Genoa, of which the capital Genoa was being besieged by a joint Franco-Savoyard army composed of 30,000 men and 3,000 cavalry.[11]
제노바 의 안심. 구출된 제노바야. 서기 1625년 3월에서 4월. 프랑스는 합스부르크가 웬수야. 특히나 이탈리아 전쟁으로 더욱더. 베네치아와 사보이랑 손을 잡아. 이 사보이.가 아주 영특한겨 이게. 이탈리아전쟁땐 합스부르크와 손잡고, 요때는 프랑스와 손을 잡아.
Charles Emmanuel I (Italian: Carlo Emanuele di Savoia; 12 January 1562 – 26 July 1630), known as the Great, was the Duke of Savoy from 1580 to 1630. He was nicknamed Testa d'feu ("the Hot-Headed") for his rashness and military aggression.
사보이공작.이 카를로 에마누엘레.가 그레이트 딱지인데. 이사람이 위 제네바 먹으려다 실패하고, 아래 해변의 제노바.를 먹으려 한거야. 제노바는 스페인병력이 오는 항구여. 이사람은 가만 보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목표로 한 듯해. 리슐리외가 그렇게 꼬시는거고.
제노바를 저때 포위했는데, 스페인군대가 오면서 포위를 풀고 프랑스와 스페인은 조약을 맺고, 프랑스는 저쪽 전쟁에 개입 안키로 해.
이게 만토바 후계자 전쟁으로 깨지는겨.
The War of the Mantuan Succession (1628–31) was a peripheral part of the Thirty Years' War. Its casus belli was the extinction of the direct male line of the House of Gonzaga in December 1627. Brothers Francesco IV (1612), Ferdinando (1612–26) and Vincenzo II (1626–27), the last three dukes of Mantua from the direct line, had all died leaving no legitimate heirs. The war, fought among the backers of rival claimants, pitted France against the Habsburgs in a contest for control of northern Italy.
만토바 후계자 전쟁. 1628-31. 후계자 족보는 넘어가고. 만토바 는 피에몬테의 오른쪽이고. 이 만토바 공작.이 같이 갖고 있던자리가 저당시 몬페라토.야
Monferrato was a duchy since 1574 on the eastern side of Piedmont, and an Imperial fief since the eleventh or twelfth century. The Gonzagas had enlarged their realm with Monferrato after receiving it in dowry from the wife of duke Frederick II Gonzaga.
이놈의 몬페라토.는 수도가 카살레 Casale 인데. 여긴 왼쪽이 사보이의 토리노.이고 오른쪽이 합스부르크의 밀라노야. 사보이.가 욕심이 발동하면서 반합스부르크를 취하면서 이게 애매해진겨. 여기가 막히면 합스부르크는 피곤한겨 이게. 더하여 만토바도 마찬가지고. 여기가 모두 스페니쉬 로드.로 가는, 나폴리 병력과 스페인 함대의 병력이 상륙해서 알프스 향해 지나가는 길이야 여기가. 이걸 또한 리슐리외.가 아는거고.
Charles Gonzaga (Italian: Carlo I Gonzaga) (6 May 1580 – 22 September 1637) was Duke of Mantua and Duke of Montferrat from 1627 until his death. He was also Charles III Duke of Nevers and Rethel, as well as Prince of Arche and Charleville.
저걸, 1627년에, 느베르 공작 Nevers 이 갖고 가기로 한거야. 느베르.는 부르고뉴 공작령의 아주 왼쪽 지역이여. 그리곤 임차료를 사보이 공작 에마누엘레.에게 주기로 한겨. 사보이가 가깝걸랑 몬페라토는. 더하여 합스부르크황제에 하미지 하는거고. 헌데 이걸 어겨 얘가. 사보이와 합스부르크의 밀라노가 만토바 몬페라토 를 반반 나눠먹기로 하고 처들어가는겨. 이게 1628년 이야.
While Louis XIII of France and Cardinal Richelieu were concerned by new Huguenot uprisings in Languedoc, the capture of La Rochelle in 1628 allowed them to send forces to the relief of Casale, then besieged by a Habsburg army from Milan.[4] In March 1629, the French stormed barricades blocking the Pas de Suse and by the end of the month they had lifted the siege of Casale and taken the strategic fortress of Pinerolo.[5]
전장의 중심은 몬페라토.의 카살레 성이고, 여길 포위하고 처들어가려는거고. 느베르 공작은 리슐리외가 빽인거고, 이때 랑그도크.에 위그노가 다시 봉기해서, 이걸 진압하면서 프랑스 병력이 알프스 넘어 저길 가면서 수사, 피네롤로 를 점령하는건데, 저게 아주 참혹한 전쟁이야 3년간. 역병으로 지역민들이 몰살을 당하고.
사보이 공작 에마누엘레.는 제노바.를 가장 욕심냈는데, 리슐리외.가 이걸 답을 안해. 사보이공작은 저 와중에 죽고. 프랑스가 결과적으론 피네롤로 등 땅을 더 확보하면서 유리하게 조약 끝나고, 저때 스위든의 구스타부스 아돌푸스.가 1630년에 대륙에 상륙하면서, 여긴 서로 마무리하는거야.
그리곤, 리슐리외는 스위든에 돈 대주면서 상황을 즐기다가, 아돌푸스 가 죽으면서, 프랑스는 직접 참전을 하기로 하는겨.
그러면서, 이전엔 위그노 진압한다고 로마 교황한테 칭찬받았다가, 완전히 로마 카톨릭의 적이 된거야 리슐리외와 프랑스는. 로마교황이 리슐리외의 권한을 무시하는거고.
그러다가, 자기 캐스팅한 메디치의 마리가 1642년에 죽고, 이사람도 이때 죽어 57세에. 그리고 다음해 루이13세가 42세에 죽고, 아들 태양왕 루이14세.가 나이 다섯살.에 킹에 오르는거야. 이때 또한, 리슐리외.가 캐스팅한 마자랭 추기경.이 리슐리외의 복사판으로 태양왕 루이의 실세가 되면서, 프랑스의 시대가 오는겨.
물론, 30년전쟁으로 프랑스 재정은 바닥이 난거고, 프롱드 라는 프랑스 귀족반란으로 30년전쟁이 마무리가 급히 되는거고. 그래도 이미 그 바닥의 프랑스 귀족들의 힘빼긴 리슐리외가 다 한거야. 어린 태양왕이 귀족들에게 받은 모욕을 커서 되갚으면서 모든 귀족 권력을 다 뺏고 전쟁을 위한 전쟁을 하곤 얘 다음에 프랑스는 망한거야. 이 여파가 지금의 프랑스고.
리슐리외와 마자랭이 만든 프랑스 전성기지만, 프랑스는 저때 더욱 후져진거야 그 내면에는. 그렇다고 이걸 리슐리외와 마자랭과 태양왕 탓으로 돌리기엔, 프랑스 역사가 그리 단순하지가 않아. 이 여파가 프랑스 1789라는 대학살로 가는거고, 이걸 프랑스 혁명 이라고 하는건, 역사학자들이 완전히 주작 날조한 그야말로 사기중의 사기야. 프랑스 1789 를 대혁명 하는건. 와안벽한 사기야 그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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