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 Hus, born Jan Husinec (/hʊs/; Czech: [ˈjan ˈɦus] (c. 1372 – 6 July 1415)
얀 후스.가 10월달에 떠난 사람이. 갑자기 7월달에 죽었다는겨.
난리가 난겨 이게. 그러면서, 보헤미아 킹 바츨라프.에게 강력한 경고장이 날라들어와. 니덜 거기 이단의 나라냐. 식겁을 하고 훗사이트들을 내쫓아.
Wencelaus was described as a man of great knowledge and is known for the Wenzel Bible, a richly illuminated manuscript he had drawn up between 1390 and 1400.
이 바츨라프.가 대단한 지쩍 소유자로 알려져. 벤첼 성경. 즉 바츨라프 성경이야. 라틴어로 된 채식서 성경이야. 이것도 만든겨. 화려하게. 헌데 이사람은 알콜중독자야. 프랑스 샤를6세의 파티에도 초청장을 못받아 술주정뱅이로 소문이 나서. 보헤미아의
Wenceslaus (also Wenceslas; Czech: Václav IV.; German: Wenzel, nicknamed der Faule ("the Idle");[1] 26 February 1361 – 16 August 1419)
바츨라프.가 죽어. 1419년 8월 16일. 이 사람 죽기 보름 전에. 프라하에서 사건이 터지는겨.
On 30 July 1419, Želivsky led the Hussite procession through the streets of Prague, and past the New Town Hall.
얀 젤리브스키. 라는 훗사이트 사제.가 프라하 시청사를 지나는 행진을 하는겨. 얀 후스.가 죽은지 4년이 지났고, 훗사이트들은 다 쫓겨났어. 그 중 남은 훗사이트들을 이끌고 사제가 시위를 하는거야, 우리 투옥된 훗사이트들 석방하라고. 이걸 거부당해, 그리고 시청사 건물위에서 지켜보던 고위공무원들이 저 장면을 보고, 돌을 던져. 그 돌 이 얀 젤리브스키.에 맞은거야. 사람들이 열받아서 시청사에 처들어가. 판사.와 시장급포함 몇명을 창문밖에 던져. 이들은 다 죽어. 이게 1차 창문투척사건이고. 딱 2백년 후 2차 창문투척사건.때 떨어진 이들은 다 살아. 아마 저 이후 길빠닥을 돌을 걷어내고 흙만 있던거지.
저때 프라하에서 폭동이 일어나고, 그냥 그걸로 끝난겨 저건. 헌데 바로 보름 지나서. 킹 이 죽은겨. 58세.에. 사냥 갔다가 심장마비로 죽어. 혹설엔 저 사건의 충격으로 사망 어쩌곤데, 아냐 걍 술 처먹은 몸이고 다 늙었고, 간만에 여름 따땃 나갔다가 죽은겨.
저 얀 젤리브스키.는 이후 농민들의 중심이 되고, 훗사이트 전쟁에 리더가 되지만, 1422년, 3년후에 바로 잡혀 목짤려.
쫓겨났던 훗사이트들이 프라하를 점령하는거야 킹 사망 소식에. 자식이 없어. 부인이 대리 통치를 해. 여긴 살리크법의 프랑크들이 아냐. 여자가 해도 돼. 아키텐의 엘레오노르.는 말이지, 이 아키텐 땅은 비지고쓰족 킹덤이었어. 이 비지고쓰족은, 여성 평등법이야. 여자가 킹 해도 돼. 엘레오노르는 이 법으로 아키텐의 공작을 한겨. 보헤미아는 신성로마서클이지만 황제는 인사권에 개입 못해. 킹은 세습이 아냐. 귀족들이 회의해서 추대하는겨. 동생 지기스문트.는 내가 세습받아야 한다는거고, 체코인들 시선에선 쟨 걍 룩셈부르크 가문애야. 귀족들이 추대를 해서 니덜이 킹을 한거지 세습이 아냐 킹이란건.
유럽의 킹이란건, 저게 세습같아 보여도, 저게 아녀. 그 바닥은 귀족들의 선거. 회의로 하는겨 저게. 그래서 뚱땡이 샤를이 왔던거고, 샤를 손자들 어릴때 로베르 들이 중간 중간 선거로 킹을 한겨 프랑스도. 위그 카페.도 킹을 선거로 추대가 된거야. 심플샤를의 핏줄이 있었어. 얠 거부하고 귀족들이 카페.를 올린거걸랑.
이미 프라하는 난리가 난거야. 바츨라프 가 죽고. 부인이 용병 고용해서 지키는거고.
헌데, 프라하 귀족들이, 마음은 훗사이트 편이걸랑. 자기들은 보헤미안이고, 얀 후스.는 자기들을 대변했었어. 헌데 지난 4년간 다 투옥되고 쫓겨났어. 이걸 바라보는 귀족 자신들도 탐탁치 않아. 허나, 또한 군주 없는 혼란함도 방치를 못해. 이 귀족들이 가운데 중재를 하고, 지기스문트.를 킹으로 올리는거야.
훗사이트.들이 이걸 거부해. 저 지기스문트.는 아직 게르만의 킹이야. 황제는 공백이고. 쟤 때문에 안전보장 약속받고 얀후스가 갔는데 죽었걸랑.
Jan Žižka z Trocnova a Kalicha (Czech pronunciation: [ˈjan ˈʒɪʃka] German: Johann Ziska; English: John Zizka of Trocnov and the Chalice) (c. 1360 – 11 October 1424) was a Czech general, a contemporary and follower of Jan Hus, Hussite military leader, and later also a Radical Hussite who led the Taborites. Žižka is held to be one of the most renowned military leaders by many historians and today he is widely considered a Czech national hero.
얀 지슈카 스 트로츠노바 아 칼리하. 얀 지슈카.로 불리는데.
Prokop the Great (Czech: Prokop Veliký, Latin: Procopius Magnus) or Prokop the Bald or the Shaven (Czech: Prokop Holý, Latin: Procopius Rasus) (c. 1380 – 30 May 1434) was a Czech Hussite general and a prominent Taborite military leader during the Hussite Wars.
July 30, 1419 – May 30, 1434
훗사이트 전쟁.이 1419년 얀 젤리브스키.의 행진에서 1434년 까지 15년간.의 전쟁이야. 지기스문트는 1433년에 황제가 되는거고, 저 전쟁끝나고 3년 지난 1437년.에 죽어.
저때 훗사이트.의 지도자.는 얀 지슈카.와 다음 프로코프 벨리키. 위대한 프로코프. 이 두 사람이야.
이 두 인간은 엄청난 사람들이야 이게.
Large numbers of crusaders came from all over Europe to fight. Prague was attacked and then abandoned. However, the Hussites subsequently laid siege to the garrison of crusaders, and took back nearly all of the land they had previously captured, resulting in the crusade being a complete failure.
15년간, 총 다섯번.의 십자군들이 동원되는겨 유럽 전역에서. 보헤미아 킹의 보헤미아. 오른쪽 모라비아 마크령. 저지대 실레시아 공작. 고지대 실레시아 공작. 고지대 저지대 루사티아. 마이센 후작. 작센 선제후. 팔츠그라프 선제후. 바바리아 오스트리아 투링기아 헷세.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잉글랜드. 지기스문트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에 헝가리 킹.이여. 여기 병력도 끌고와.
저게 전부 다 모인겨. 저걸 말이야. 얀 지슈카.와 다음 프로코프.가 저걸 다 조지는겨.
지금 체코인의 영웅은 저 두 사람이야. 30년 전쟁때 ㅋㅋㅋ 저런 인물이 단 하나가 없었어.
The Battle of Lipany (in Czech: Bitva u Lipan), also called the Battle of Český Brod, was fought at Lipany 40 km east of Prague on 30 May 1434 and virtually ended the Hussite Wars. An army of Utraquist nobility and Catholics, called the Bohemian League, defeated the radical Taborites and Orphans (or Sirotci) led by Prokop the Great, the overall commander, and by Jan Čapek of Sány, the cavalry commander.
훗사이트.의 마지막 전투. 15년을 찍는게 리판 전투. 셰스키 브롯 전투. 프라하 근처 셰스키 브롯.의 리판.에서 벌어진 전투인데. 여기서 프로코프.가 죽는겨.
Jan Roháč z Dubé (died 9 September 1437 in Prague) was a Bohemian Hussite general who originated in the Bohemian gentry.
이때 포로가 된 사람이. 두베의 얀 로하치. 지기스문트를 킹으로 인정하면 살려준다고 해. 인정못해. 목걸어 죽여 교수형으로.
저 리판. 전투라는건. 십자군에 패한 전투가 아냐. 훗사이트 온건파.가 참전한겨. 훗사이트를 막은건 훗사이트야. 저 훗사이트.에게 전 유럽의 나라들이 전부 참패했어. 저때 등장한게, 핸드건 이라는 수총이야. 부르고뉴가 만든 대포.가 진화가 되서 저기에서 수총으로 훗사이트들이 쓴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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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츨라프.가 죽고, 귀족들이 중심이 되고, 타협하고. 지기스문트를 세우려 하고. 이걸 거부하는게 얀 지슈카.야. 이사람이 프라하를 떠나 모인곳이 보헤미아 서남부. 프라하의 정남쪽 죽 가서 있는 타보르 Tabor 란 도시야. 이때 작명을 한겨 구약에서의 갈릴리해 근처 카르멜산 있는 도시이름을. 이들을 타보라이트.라고 해. 이때 등장을 한거야.
The Taborites (Czech Táborité, singular Táborita), known by their enemies as the Picards,[1] were a Radical Hussite faction within the Hussite movement in medieval Lands of the Bohemian Crown.
타보리테. 테이보라이트. 상대들은 피카르드.라고 부르다. 이 피카르드 라는건 아담의 후손이라 믿는 이들.이란겨 저건. 이 타보르 들이 과격파야. 얀 지슈카.가 시작한겨.
The Sirotci ("Orphans"; German: Waisen), officially Orphans' Union (Czech: Sirotčí svaz), were followers of a radical wing of the Hussites in Bohemia. Founded in 1423 originally under the name Lesser Tábor, it consisted mostly of poorer burghers and some members of the lower aristocracy, who joined with commander Jan Žižka and the eastern Bohemian Hussites, the so-called Orebites (Orebité).
시롯치. 고아들. 시롯치 스바스. 고아들 연합. 원래는 작은 타보르.야. 이게 설립이 되고 다음해 얀 지슈카.가 병으로 죽어. 그래서 고아들.이란 시롯치.가 된겨. 오래비테.로 불리는데. 또한 과격파.야
과격파는 떠나서, 얀 지슈카.는 이미 전쟁을 하는거야. 지기스문트가 보헤미아 킹 대관식 하기 전에. 남은 훗사이트들이 온건한 훗사이트.야. 즉 저들은 먼저 정치적 입장 차이로 갈린거고. 교리가 아냐. 교리는 나중에 달라지는거고.
The programme of the more conservative Hussites (the moderate party) is contained in the Four Articles of Prague, which were written by Jakoubek ze Stříbra and agreed upon in July 1420, promulgated in the Latin, Czech, and German languages.[8] The full text is about two pages long, but they are often summarized as:[8]
- Freedom to preach the word of God
- Celebration of the communion under both kinds (bread and wine to priests and laity alike)
- Poverty of the clergy and expropriation of church property;
- Punishment for mortal sins regardless of stature.
지기스문트.가 형 죽고, 일년만인 1420년 7월 27일 날 프라하에서 대관식을 해. 이전에 프라하 온건파 귀족들이 협상을 하고 추대를 한거야. 대관식 하기 전에, 온건파 훗사이트들이, 지기스문트가 킹 이 되면 이건 지켜주세요 하면서 네가지.를 협의해서 동의를 구하는겨. 이게 대관식 7일 전에야 훗사이트들도 결론이 난 합의 사항인건데.
신의 그 말. 을 설교할 자유. 빵과 와인을 사제와 평신도 에 똑같이 유카리스트 할때 하라. 성직자의 검소와 교회 자산의 몰수. 개인의 지위에 관계없이 사형시킬 죄들에 대한 처벌.
설교도 원래 자격증 있는 사람만 하는겨. 아무나 막막 거리 설교 할 수 없어. 저기서 특이한게 빵과 포도주 의 유카리스트.야. 이 유카리스트 를 카톨릭.은 평신도에게 빵만 건네는겨. 포도주 라는 지저스의 피는 사제만 마셔. 아 치사해 니덜. 지저스는 빵과 포도주가 합쳐져야 진짜 지저스를 영접하는거야. 이게 말야 똑같이 루터의 말이야. 지저스는 빵만 있으면 지저스가 안오셔. 프레즌스 안해. 살과 피가 한몸인데 왜 피는 안주는겨 이거. 짜증 지대로야 니덜. 루터가 특히나 훗사이트에 감동 처먹은게 이 포도주도 같이. 오메 싕기하네 이 보헤미안들, 하는겨.
이들 온건파.를 그래서.
Utraquism (from the Latin sub utraque specie, meaning "in both kinds") or Calixtinism (from chalice; Latin: calix, mug, borrowed from Greek kalyx, shell, husk; Czech: kališníci) was a principal dogma of the Hussites and one of the Four Articles of Prague.[1] It maintained that communion under both kinds (both bread and wine, as opposed to the bread alone) should be administered to the laity during the celebration of the Eucharist.[2] After the Hussite movement split into various factions early in the Hussite Wars, Hussites that emphasized the laity's right to communion under both kinds became known as Moderate Hussites, Utraquist Hussites, or simply Utraquists. The Utraquists were the largest major Hussite faction.
유트라퀴즘. 유트라퀴스트. 칼릭스티니즘. 이라 하는데. chalice 칼리스.가 포도주 따르는 거창한 예배 잔.이야. 단순한 컵이 아니라. 저 와인잔.을 중시하고 와인을 중시해. 와인은 사제만 처먹었걸랑 유카리스트때.
라틴어 Utra que 우트라 케.야. 우트라라 우테르.고 이건, 둘의 각각. 더하기 케. 라는 앤드.야. 뽀인트가 뒤 케. 앤드.야 묶은겨. 둘을 같이. 라는 뜻이야. 빵 포도주 두개를 같이 하자 유카리스트.에서. 칼리스 라는 거대한 잔에 담아줘.
저건 1414년에 나온말이고, 얀 후스.와는 전혀 상관이 없어. 죽기 직전에 보헤미아에서 나온 말이야.
얀 후스.는 존 위클리프.를 따라서, 유카리스트를 달리 생각해.
Impanation (Latin, impanatio, "embodied in bread") is a high medieval theory of the real presence of the body of Jesus Christ in the consecrated bread of the Eucharist that does not imply a change in the substance of either the bread or the body.[1] This doctrine, apparently patterned after Christ's Incarnation (God is made flesh in the Person of Jesus Christ),[2] is the assertion that "God is made bread" in the Eucharist. Christ's divine attributes are shared by the eucharistic bread via his body. This view is similar but not identical to the theory of consubstantiation associated with Lollardy. It is considered a heresy by the Roman Catholic Church[3] and is also rejected by classical Lutheranism.[4] Rupert of Deutz (d. 1129) and John of Paris (d. 1306) were believed to have taught this doctrine.[3]
임파네이션. 임파나티오. 빵에 스며든거야. 파니스 panis 가 빵이야. 유카리스트에 저 빵은, 카톨릭의 그 지저스의 실재. 바닥. 이 변신해서 빵이 된게 아니라, 지저스라는 페르소나. 사람이 빵이 된거야. 이건 전혀 다른겨 문제가. 그래서 신은 빵으로 된겨 라는 주장도 되는겨 이게. 존 위클리프는 이리 생각해. 얀 후스.도 이걸 따라. 마르틴 루터.도 실재 니 그딴게 아니라 프레즌스 presence 빵과 포도주의 합으로 저기 지저스가 나타난겨 유카리스트에.
헌데 훗사이트들은 저런 말은 안하고, 걍 포도주.도 같이 하게 해줘 평신도 들에게. 그래서 유트라퀴즘. 둘다 함께주의. 칼릭스티니즘. 칼리스라는 잔에 포도주 꼭 줘 주의.야. 저들은 온건파.야.
더하여. 이 훗사이트들은, 죄에 대한 처벌이 엄격해. 스태쳐 라는 개인의 지위나 업적에 따라 처벌이 다른데 법앞의 평등이야, 저들이 더 가면, 과격파가, 성문법 번역하는 고정법. 무슨 죄는 몇대 몇년 정해진 그따위로 처벌 하지 말라. 그거 다 잘못된거다. 간통 이따위 짓도 사형이야. 아주 나쁜겨. 이들이 법 처벌에 엄격해. 태형이나 징역 몇년 할 행위도 똑같이 사형이야. 죄에 무게감은 똑같은데 왜 처벌이 서로 다른거냐는 주의걸랑. 이건 과격파의 입장이고, 저 온건파는 저때 귀족 우대 말라야 법처벌시.
더하여 교회 재산 몰수에 성직자 검소. 아 거시기 하지 이것도.
저걸 다 거부당해 온건파들이. 그리고 대관식 하는겨.
그래서, 저 유트라퀴스트.들이, 모두 얀 지슈카.에 들어가는거야.
Wagenburg, Wagon fort. 바겐부르크. 얀 지슈카.의 체코가 저때 유명한 전법이 마차.들을 엮어서 요새로 만드는겨. 이게 뒤에 유럽 전쟁의 아주 특허품이 돼. 얀 지슈카의 전법. 우선 철저한 방어책이야. 기지에 참호를 파고 해자 만들고 적을 방어하고는 다음에 치고 나가는거야. 이게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이리 전쟁했던거고.
15년간의 전쟁들을, 저들이 다 이겨. 오히려 지기스문트의 땅 헝가리도 치러가.
그러다가, 유트라퀴스트들이라는 온건파.가 카톨릭과 손을 잡고, 얀 지슈카 가 병들어 죽고, 프로코프 를 상대로 훗사이트들끼리 내전하면서 끝난거야. 카톨릭은 훗사이트 온건파 주장을 들어주기로 한거고.
The Moravian Church, formally named the Unitas Fratrum (Latin for "Unity of the Brethren"),[3][4][5] in German known as [Herrnhuter] Brüdergemeine[6] (meaning 'Brethren's Congregation [from Herrnhut]', the place of the Church's renewal in the 18th century), is one of the oldest Protestant denominations in the world, with its heritage dating back to the Bohemian Reformation in the 15th century and the Unity of the Brethren (Czech: Jednota bratrská) established in the Kingdom of Bohemia.
패한 과격파들이 나중. 우니타스 프라트룸. 형제들의 하나됨.이라는 모라비안 처치.가 돼. 브레뜨런 들어가면 이건 과격파야. 오른쪽 모라비아로 들어가 피해있는겨.
저러다 2백년만에 다시 30년 전쟁이 터진거야.
입장은 그대로야 바뀌어서, 훗사이트가 주인이 되고, 카톨릭이 쳐들어오는건데. 헌데 훗사이트 전쟁때는 훗사이트 킹덤 코트 자체가 적이었지만, 30년 전쟁 시작은 코트 의 주인도 훗사이트야.
더하여 말이지, 자기들 도와줄 프로테스탄트가 세상에 반이나 깔렸어.
시작하자 마자, 패한겨 훗사이트가. 백산전투 하나로. 그리곤 걍 저 불똥이 독일땅으로 튄것일 뿐이고.
훗사이트 전쟁때는, 훗사이트.가 폴란드의 저때 야기에워 시작 요가일라.여. 폴란드 밖에 기댈 곳이 없는겨. 요가일라.도 지기스문트와 처남매부 지간이야. 마누라 헤드위그는 죽었지만. 니덜 요구사항 들어주께 네가지 하면서도 막상 거절해. 훗사이트가 옆에 요가일라 사촌 비타우타스 에게 가 리투아니아. 당대 최고 두 인간이야 저들이. 헌데 교황이 이단이래.
완전히 홀로 저 십자군 병력들을 막은겨 훗사이트들이. 어엄청난겨 저게.
30년 전쟁도 흐름은 똑같은데, 훨씬 좋아. 이전에는 자기들이 이기면 킹 시켜주께 지만, 저때는 이미 자기들이 코트를 장악하고 작센 팔츠그라프 트랜실베니아 각각 사발통문 돌린겨 니덜 킹할테니 오라고. 야 프랑스에 스웨덴까지 자기들 편인데다가 독일땅 반이 자기들 편이고 네덜란드도 편이고. 하물며 오스만도 자기들 편이었어.
저걸 말이야, 질 수가 없는 전쟁을, 2백년 이전의 훗사이트전쟁과 비교하면 말야, 저건 말도 안되는겨 30년 전쟁은. 저건 완벽한 철저한 참패야 참패. 훗사이트 애들 입장에선.
저게 말이지. 지도자 가 얼마나 엄청난 자리란걸 볼수 있어 2백년 간격의 저 훗사이트 전쟁.과 30년 전쟁. 의 보헤미아를 보면.
얀 지슈카. 프로코프 벨리키.
두 사람이 하늘에서 봤으면, 어이없어서 우서쓸꺼야 30년 전쟁을 보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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