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ymond IV (c. 1041[1] – 28 February 1105), sometimes called Raymond of Saint-Gilles or Raymond I of Tripoli, was a powerful noble in southern France and one of the leaders of the First Crusade (1096–99). He was the Count of Toulouse, Duke of Narbonne and Margrave of Provence from 1094, and he spent the last five years of his life establishing the County of Tripoli in the Near East.
생질.의 레이몬드(불어 레이몽). 툴루즈 백작. 나르본 공작. 프로방스 후작. 나이 55세에 십자군 1차.를 간건데, 남 프랑스의 대표여. 이사람이 트리폴리. 카운티.를 세우는건데 십자군 가서.
남프랑스의 대표.가 레이몬드.에, 퓌앙브레.의 주교 아데마르.가 가는겨. 이사람이 로마 교황정을 대표하는거야.
Adhemar (also known as Adémar, Aimar, or Aelarz) de Monteil (died 1 August 1098) was one of the principal figures of the First Crusade and was bishop of Puy-en-Velay from before 1087.
이 아데마르.가 있었기에, 2백년 레반트 십자군이 가능했던거야. 이 아데마르.가 1차 십자군의 정신적 지주 이자 모랄, 윤리 도덕의 중심을 잡아주는겨. 쟤들은 갓 로마를 익힌 갈리아위의 게르만이라는 야만집단이야 이 프랑크 란 것들은.
유럽 역사 는 서기 1100년 부터인거야 이게. 이전까지는 야만 들이야 저건. 갓 로마를 익힌 문명인인 척 하는 애들이걸랑. 저 레반트 십자군이란게 그냥 일회성 학살극으로 끝나버리고 말아야 했던겨 저건. 헌데 이 아데마르.가 있었기 때문에 그 이상을 가고, 이 아데마르.가 실전에서 몸으로 보여준겨 인간다움을. 어쩌면 이 아데마르.때문에 지금 우리 문명이 있을 수도 있어.
레반트에서 만나는 두 진영인 프랑크와 사라센.이라는 서와 동의 인간들이 말야. 누가 더 앞서있겠니? 사라센의 중심은 바그다드의 칼리프야. 세속에 힘을 다 뺏긴 듯한 너덜너덜 칼리프고, 얘들의 중원은 쌩뚱맞은 투르크들 세상이 되어버린거걸랑. 헌데 이 바닥은 말야, 수메르가 있는겨 이게. 바빌로니아 앗시리아가 있고 페니키아가 있어. 그리스 로마를 얘들은 직접 익힌 애들이야. 여기 이전 고대부터 서기 1100년 까지의 것들이 다 쌓여있는겨.
프랑크 라는 게르만들은, 저 라인강 동쪽에서 넘어오면서 갓 곁눈질로 배워 익힌 애들이야. 얘들은 완전히 야만의 땅에서, 3세기 전후부터 넘어와서 배운애들이야.
프랑크가 사라센이라 칭하는 동쪽애들은 달러. 원래부터 바닥이 저기서 살았던 애들이야. 저들은 딴 곳에서 넘어온 애들이 아녀 이게. 갓 넘어온 투르크들은 저기의 그냥 엔분의 일일 뿐이야. 저 바닥의 아랍애들은 아람어 애들이여. 페르시안 애들은 아케메네스부터 쳐도 아랍애들 직후에 저기 다 스민애들이고,
누가 더 미개하겠니? 저 십자군 프랑크 들이 조오오올라게 미개한겨 이게. 사라센들이 그런 기록을 남겨. 대표적인게 의료행위야. 프랑크 는 다리에 병균이 생기거나 외상을 입으면, 의사가 도끼로 다리를 짤러. 그게 치료했다고 하는겨. 이걸 본 사라센이 학을 띄는겨. 우왕 저 개무식한 게르만 프랑크 들 저거.
저때의 문명의 수준 측정을 하면 말야, 저놈의 프랑크 라는 유럽들은 지들이 하대시 하는 사라센에 비할 수 없어 저게.
저게 말야, 완전히 역전이 된거야, 레반트 십자군 2백년 다녀오면서, 비록 레반트 2백년 십자가 국가들은 지워졌지만, 저 유산은 유럽 대륙에 스민게 엄청난겨. 저 레반트 2백년이 없었으면 지금 유럽이란 없고, 지금 문명이란 없어.
무엇보다도, 완전히 현실로 내려온겨 저 게르만들이. 레반트 2백년을 다녀오면서, 하늘에서 내려온겨. 공허함의 허위를 버리고 현실감을 갖게 돼. 헌데 이 현실감이, 보이지 않는 신 이란 대명사를 공허함 허위. 로 규정 하고 쓰레기에 내다버리고 현실만 취한게 아닌거야 이게. 보다 신을 더 고차원으로 해석하고, 그 바탕에서 현실을 취하게 돼. 이게 하이미디벌 이란거야. 전혀 다른 인간의 세계가 레반트 2백년을 다녀 오고 펼쳐지는거야.
참 멋진 말인데. 난 왜 이리 멋진 말만 해대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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툴루즈 백작 나르본 공작 프로방스 후작. 십자군 출발했던 리더 들 중에 이사람이 가장 부자고, 연배도 가장 많고, 누가봐도 이사람이 최고야. 헌데 점점 이 자리를 부용의 곳프리 한테 뺏긴겨. 아니면 진짜 이사람이 양보를 한거고. 가만 보면, 이 레이몬드.가 자리 욕심이 없어 보여. 삐친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듯 해. 이사람은 아쉬울게 없는 사람이야.
Raymond was deeply religious, and wished to die in the Holy Land, and so when the call was raised for the First Crusade, he was one of the first to take the cross.
저 중세인간들을 지금식으로 보면 안돼. 이미 저 이전에도, 저 프랑크 귀족들이, 죽기전에 한번은 저 예루살렘을 가고싶은게 꿈이야. 죽어도 가서 죽는겨 이게. 이게 정복왕 윌리엄의 아빠였던거고. 지금 시체도 어딨는지 모르는. 이사람들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저당시 완전히 다른 시선으로 봐야해. 정말 목숨 건거야 저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너무나 절절한 사람들이야 저게. 레이몬드.도 저기 가서 죽는겨. 저때 말야. 홀리 랜드.라고 저리 쓰지만. 레반트 가자. 가 아냐
레반트.라는 단어는 1497년.에 처음 등장하는말이야. 몰라 레반트가 먼지.
Jews do not commonly refer to the Land of Israel as "Holy Land" (Hebrew: אֶרֶץ הַקוֹדֵשׁ Eretz HaKodesh). The Tanakh explicitly refers to it as "holy land" in only one passage.[8] The term "holy land" is further used twice in the deuterocanonical books.[9][10] The holiness of the Land of Israel is generally implied in the Tanakh by the Land being given to the Israelites by God, that is, it is the "promised land", an integral part of God's covenant.
홀리 랜드.란 말이, 타나크.에서 단 한번 등장해. 에레츠 하고데쉬.를 홀리 랜드.로 번역을 한겨
The LORD will inherit Judah as his portion in the holy land and will again choose Jerusalem. zechariah 2:12
Et possidebit Dominus Judam partem suam in terra sanctificata, et eliget adhuc Jerusalem.
즈카리아. 2장 12절.에 아드마트.란 히브리어 땅.이야. 에레츠.는 어딘는가 더 찾기 구찮고. 이걸 테라 산크티피카타. sānctificō 산크티리코.의 피동형 퍼펙트 파티시플.의 탈격이걸랑. 성스럽다는 세인트.의 산키오.란건 바치는겨 이건. 바쳐진 거고, 완전히 바쳐진거고 이 상태가 유지되어있는 파티시플.이야. 신에게 완전하게 바쳐져 있는 상태의 땅 이란거야.
저게 타나크.에서 유일하게 나오고. 유대교에서 인정안하는 외경.에서 두번이 나와. 이걸 구약에 카톨릭은 넣은거고. 더하여. 약속의 땅. 약속된 땅.이 두드러지게 나오는거고. 저런 표현을 쓰며 갔을거야 저때.
일부는 땅 따러 갔지만, 대게 말야, 저 기본 마음 바닥은. 절절한 신앙심으로 가는겨 저게. 잘못된 신앙심이든 아니든. 한데 마음만 굴똑이지, 인간이 그리 마음 과 몸이 일관 될 수 없걸랑. 이걸 중심 잡아준게, 퓌앙브레 주교 아데마르.야. 더하여 저들이 저러면서 저 피비린내 속에서 자기들만의 모랄을 익히는겨 저게. 저 모랄 잡는 작업이 이전 오백년은 뜬구름 책만 읊는거고 이후 오백년은 실전으로 몸에 습하는거고,
유럽과 실패한 땅의 완벽한 가름선은 말야. 모랄이야 모랄.
이 조선들의 땅빠닥을 보면 아주 선명하게 아는겨. 저 공자왈 맹자왈.의 말뿐인 도덕 윤리.는 저건 그야말로 말장난 수준이걸랑. 저게 그리스도 책만 보는 봤던 저들과 다를게 없는겨. 하물며 공자왈 맹자왈.의 사당은, 성스럽지 않걸랑. 그 무게가 달라. 저건 오직 인간 만을 위한 제사터 이걸랑. 저건 인간이야 인간. 공자든 공자의 후예 의 문묘든. 저런거에 무슨 절복할 수그릴 성스러움 바쳐질만한게 있겠어? 더하여 모랄이라곤 쌓일 수가 없는겨 저 바닥 자체가.
가장 드러운 애들의 피가 이 조선 오백년이걸랑. 아 여긴 보면 볼 수록, 희망이란 없는 땅인데. 이제 완벽하게 검찰을 잡고, 자기들만의 세상을 만들었더만 보니까. 연일 테레비는 민족놀이. 어머 우리 정의 가 이기고 이써유. ㅋㅋㅋ.
참 슬픈 나라야 진짜.
유럽에 양키가 지금 세상을 다 지배하고 인류학살을 하는거 봐유!! 먼놈의 모랄이유??
그래 니 말이 맞아. 꺼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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툴루즈의 레이몬드.는 트리폴리 카운트.만 취하지. 정작 트리폴리.를 함락을 못해. 이사람이 죽고서야 트리폴리.는 십자군에 들어와. 레이몬드에게 자식이 둘 이야.
William IX (Occitan: Guilhèm de Peitieus; Guilhem de Poitou French: Guillaume de Poitiers,) (22 October 1071 – 10 February 1127), called the Troubador, was the Duke of Aquitaine and Gascony and Count of Poitou (as William VII) between 1086 and his death. He was also one of the leaders of the Crusade of 1101. Though his political and military achievements have a certain historical importance, he is best known as the earliest troubadour[1]—a vernacular lyric poet in the Occitan language—whose work survived.
프와티에.의 기욤9세. 윌리엄9세. 아키텐 공작이야. 부인이 툴루즈 가문여자야. 레이몬드 자식과는 사촌지간이고. 레이몬드가 죽고, 위 아키텐의 기욤.이 툴루즈.를 공격해서 점령해. 헌데 이사람도. 40이 되고 말야. 아 부질없어. 나도 십자군 갈텨. 1101년 떨거지 십자군에 끼는겨. 그리고 툴루즈 땅을 다시 돌려줘. 레이몬드의 자식에게.
Bertrand of Toulouse (or Bertrand of Tripoli) (died 1112) was count of Toulouse, and was the first count of Tripoli to rule in Tripoli itself.
죽은 레이몬드의 장남 버트랜드.가 돈을 주고 툴루즈.를 받아서. 이걸 자기 동생에게 주고, 얘도 십자군을 가. 트리폴리.가 아빠가 죽으면서 세웠는데, 저걸 섭정이 차지한 행세라서 자기가 직접 다스리겠다는겨. 그리고 이사람이 트리폴리가서 죽고, 이 자식들이 트리폴리 카운티를 이어가고, 툴루즈.는 동생이 갖고 가.
저 아키텐.과 툴루즈. 라는 지역이. 또한 프랑스에서 애매한 지역이야 이게. 이 프랑스란 나라는 정말 이상한 나라야 보면 볼수록.
저 좌표.가 Puy-en-Velay 퓌앙블레.야. 퓌.가 라틴어 podium 포디움. 높은 언덕.이고 블레.가 먼지 몰겄는데. 좋음. 같어. 좋은 언덕.이란 뜻같은데. Massif Central. 저기가 마시프 상트할.이라는 거대한 덩어리 고원이야. 이 오른쪽으로 리옹에서 발랑스로 혼느강이 흐르는거고. 이 왼쪽이 절벽 산들이야. 마시프 상트할.이 거대한 기역 모양의 정사각형에 왼쪽 귀퉁이가 평원인겨. 이게 앙굴렘 오른쪽 까지야. 커. 툴루즈 라는 도시가 이 산덩어리 서남 의 평원인겨 이게. 알비 가 이 안쪽 숙 들어간 골짜기 도시야. 여기가 카타르파 있었던 이단의 도시 였고 그래서 알비파 십자군 했던겨. 아래 몽펠리에 베지에.가 이 산덩어리 기슭 해변이야.
십자군 발기하는 클레르몽 공회의.의 클레르몽.이 클레르몽 페랑 Clermont-Ferrand 이야. 여기도 마시프 상트할 산맥인겨. 이 위가 비시 프랑스 하는 Vichy 비시.야. 저 비시 라는게 마시프 상트할 계곡에 있는겨.
르와르 강 Loire 이란게. 퓌앙블레.의 오른쪽 아래에서 발원해서 주욱 올라가서 꺾여 가는 거대한 강이야.
Puy de Sancy. 퓌드상시. 이 산이 1888미터.야 가장 높아. 클레르몽 서남에 퓌앙블레 비슷한 위도 왼쪽에 있어. 여기 산들이 화산들이 있어. 언제 터질지 몰라.
프랑스.의 1154년 지도 인데. 이때가 아키텐의 엘레오노르.가 1152년에 프랑스 킹 루이7세와 이혼하고, 바로 잉글랜드의 헨리2세.와 결혼한 2년 후야. 오베르뉴 Auvergne 카운티.의 수도가 클레르몽.이고 이 마시프 상트할 덩어리의 기역자.의 꺾이는 곳을 오베르뉴. 지역 이라 하는겨. 이 오베르뉴.와 오른족 혼느강 중상류에 이 오른쪽 알프스서쪽.해서 지금 오베르뉴-혼느-알프스 레종.이고 수도가 리옹.이야. 이 아래에 프로방스-알프스-코트쥐르 레종.이 있고. 왼쪽아래가 툴루즈.가 수도인 옥시타니 Occitanie 레종.이야.
저 거대한 아키탄.에서 오베르뉴 가 떨어져 나가고, 부르즈 왼쪽의 빨강도 떼고. 하면 요게 지금 누벨-아키텐 레종.이야. 뉴 아키텐.이란겨. 수도가 보르도 Bordeaux 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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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때가 루이7세.시절인데. 플랑드르.가 당시 아빠 루이6세.가 갖고 온겨. 플랑드르는 저때 에노.까지 플랑드르야. 이 플랑드르.란건 대머리샤를.이 서기 870년에 형 게르만루이.와 죽은 로타링기아 땅을 나누면서. 룩셈부르크를 반 가르고 이 선이 리에주 가서 여기서 뫼즈강까지가 다 대머리샤를의 프랑스꺼야해. 플랑드르.에 레지나르 가문의 에스코강과 뫼즈강 사이도 대머리샤를꺼야. 헌데 대머리샤를 죽고서 자식둘 바로 죽고 게르만의 뚱땡이 샤를 오면서, 저긴 다음 게르만 킹 아눌프.에 프랑코니아의 콘라트.에 새잡이 작센 헨리에 짱짱한 반면, 프랑스진영은 아이들이 서면서 허섭해져 버리고 저 가운데 땅을 모두 뺏긴겨 동쪽에.
랭스.와 트롸.의 샴페인 땅에 아래 부르고뉴 공작령. 원래 여긴 샤를꺼였고. 오른족 로렌에 알자스.는 다 넘어간겨 샤를 죽고서 바로. 그런데 플랑드르 가문.이 갖고 있던 플랑드르와 에노.는 루이6세 때 이걸 갖고와. 저때 플랑드르 가문이 끊겼걸랑 직계가. 여기도 부용 곳프리와 불론뉴 보드앵.의 플랑드르 방계.와 플랑드르 본가의 공작도 자식에게 주고 십자군 1차를 가걸랑. 그리곤 저기도 다 핏줄이 끊겨서, 플랑드르 블론뉴.는 잉글랜드 스티븐 킹 시집가는 다우리로 들어가고, 플랑드르 본가도 바로 끊겨서 전쟁으로 이걸 루이6세가 갖고와서 이걸 로렌가문의 시작 메스Metz 의 아달베르 Adalbert 핏줄에게 주걸랑. 이 플랑드르는 그리고 다시 플랑드르 가문 핏줄이 저 이후 받아서, 여기 여자.가 담피에르.에게 시집을 가서 담피에르 께 되었다가, 여기 담피에르 여자가, 부르고뉴 용감공 필립에게 시집가면서 플랑드르가 발루아 부르고뉴 것이 되는겨. 여기에 룩셈부르크 가문의 마지막 여자, 남편 오스만 전쟁하러 가다 죽은 게르만 킹 합스부르크.의 부인.이 현명공 부르고뉴에 돈 빌려주다가 쫓겨나서 룩셈부르크도 취하고, 전쟁으로 로렌도 가져오려다 용감공 샤를은 죽고 저 거대한 땅을 마리.가 합스부르크 막시밀리언 한테 시집가면서, 프랑스와 합스부르크가 웬수가 되는거고.
할때 저땐 잠시 이전 루이6세가 플랑드르 하나는 건진거야. 그외 로타링기아는 전부 다 게르만 신성로마제국에 뺏긴겨 저게.
저기에 저 거대한 아키탄.은 엘레오노르 꺼였고, 이혼해서 이여잔 저 땅 갖고서리 잉글랜드 헨리2세랑 결혼해서 저건 잉글랜드 땅이 된겨. 그 위 르망.의 멘 Maine 앙제의 앙주. 투르의 투렌.은 헨리2세가 아빠 플랜테저넷 한테 받은거고. 노르망디.도 잉글랜드 고향 이고 잉글랜드 꺼고.
저 왼쪽 브르타뉴.란 것도. 저건 대머리샤를때 조차 저건 남이야. 저건 서기 1500년 지나서 프랑수아1세.가 저 브르타뉴의 클로드.와 결혼하고서야 프랑스꺼가 된겨 저게. 저것도 이전 루이12세.가 브르타뉴의 안나.와 결혼해서 겨우 갖고 올 희망이 생긴거였걸랑. 저것도 합스부르크께 될뻔했어.
Aquitaine (UK: /ˌækwɪˈteɪn/ AK-wih-TAYN, US: /ˈækwɪteɪn/ AK-wit-ayn, French: [akitɛn] Occitan: Aquitània; Basque: Akitania; Poitevin-Saintongeais: Aguiéne), archaic Guyenne/Guienne (Occitan: Guiana), is a historical region of southwestern France and a former administrative region of the country
영어 애키테인. 불어 아키텐. 옥시탄어로 아키타니아. 해서 아키탄 했는데. 아키텐.으로 해.
이 아키텐.은 원래 아키텐 언어족이 있었어. 즉 여긴 인도유럽피언. 이전에 별도의 언어를 만들어 사용한 사람들이 있었어. 아래 피레네 산맥의 바스크.와 가까운 듯 보이는거고. 바스크 언어족.은 지금도 살아남았고, 이 아키텐 들은 죽었어. 완전히 로마때 로마화된 갈리안들에 다음 게르만 와서 다 죽은겨 여긴. 그리고 땅 이름만 아키텐.이 남은겨.
클로비스1세.가 살리안 프랑크족 킹.을 아빠 이어서 받은게 서기 481년.이야 나이 15세.
Armonici assisted him in defeating the Visigothic kingdom of Toulouse in the Battle of Vouillé in 507, eliminating Visigothic power in Gaul. The battle added most of Aquitaine to Clovis's kingdom[14] and resulted in the death of the Visigothic king Alaric II.
클로비스1세.가 서기 507년. 41세. 에 비지고쓰를 갈리아땅에서 내모는거야. 26년 만에. 그리고서는 모든 프랑크족의 킹.을 선언하는겨. 이때서야 프랑크 킹덤이야.
이전에 비지고쓰족.이 툴루즈.를 수도로 해서 있던겨.
비지고쓰.가 서기 418년 즈음에 툴루즈.를 거점으로 자리를 잡고. 이 직전에 오른쪽엔 부르고뉴족.이 자릴 잡아. 이들이 동게르만에 저 오데르강 동쪽에 있던 이들이야. 부르고뉴가 먼저 자리잡고 여기 피해서 툴루즈.로 온겨 비지고쓰가. 이 전엔 수에비.가 더 가서 갈리시아 포르투갈 저짝 끝에 자리잡고. 10년 전에.
비지고쓰가 툴루즈.에서 저길 다 잡다가, 백년 안되서 프랑크족의 클로비스1세에게 참패하고, 수도를 나르본. Narbonne 으로 옮겨. 마시프 상트할을 넘어서 동쪽 해변 으로 간겨. 저 베지에 아래.여 저 위가 몽펠리에.고. 여기 있다가 바로 바르셀로나.로 옮기고. 그리고 톨레도 로 옮기는거야. 그리고 나서 왼쪽의 수에비 킹덤.이 이 비지고쓰로 들어온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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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텐 언어족.이 샤를마뉴 때까지도 존재를 했던겨. 즉 로마때도 섞이면서 살면서도 이들의 정체성은 유지가 되었어. 여기에 비지고쓰가 오고 프랑크가 왔지만, 이때도 아키텐들은 유지가 되었던겨.
A united Basque-Aquitanian realm reached its heyday under Odo the Great's rule. In 721, the Aquitanian duke fended Umayyad troops (Sarracens) off at Toulouse, but in 732 (or 733, according to Roger Collins), an Umayyad expedition commanded by Abdul Rahman Al Ghafiqi defeated Odo next to Bordeaux, and went on to loot its way up to Poitiers. Odo was required to pledge allegiance to the Frankish Charles Martel in exchange for help against the advancing Arabic forces. Basque-Aquitanian self-rule temporarily came to a halt, definitely in 768 after the assassination of Waifer.
오도. 그레이트 일때, 바스크와 아키텐이 하나가 돼., 저때 메로빈지언.이 막바지고, 이때 프랑크.는 샤를마뉴의 할아버지 카를 마르텔.이 메이어.라는 궁정 코트의 대리 짱.이야. 이즈음에 우마이야 애들이 스페인먹고 피레네 넘어서 쳐들어오는거고, 여기는 아키텐.이 막는겨. 저때 아키텐 들이. 무어족들과 연합해서 프랑크 반대에 서기도 해. 그러다 무어들이 세력이 쎄지고, 아키텐의 오도가 샤를 마르텔과 손을 잡아서 무어족들을 막는거고.
클로비스1세.가 비지고쓰들을 이기고, 저 아키텐에 자기 자식들이 서지만, 이게 세월지나면서 바닥의 아키텐 들이 다시 뭉치는겨. 무어족 내쫓고, 샤를 마르텔.이 아키텐.을 점령하려다가 실패해. 그러다 이 아키텐의 짱이 암살당하면서, 이게 샤를마뉴.때에 들어오는겨. 아키텐 언어족은 이때부터 거의 지워지면서 프랑크화 된거야.
샤를마뉴.가 원래 자기땅 각각을 킹덤으로 쪼개려 한거걸랑. 자긴 교황 꼬드김으로 엠퍼러.가 된거고. 그런데 자식들이 다 죽고 막내 경건 루이.만 남은거야. 이 경건 루이.가 원래 타이틀이 아키텐.의 킹.이야. 이 형이 버나드 였고 이탈리아 킹 시켰다가, 이 버나드들이 파리 위 베흐몬드와.의 카운트가 되는거고.
경건루이.의 세자식이 싸우면서 베르됭 조약으로 나눠먹지만, 원래 자식이 네명이야. 막내 대머리샤를.은 둘째부인 자식이고, 장남 로타르.와 다음 게르만 루이. 사이에 아키탄의 킹.이 피핀.이야. 이 아키탄의 피핀.이 저때 못끼고 아키텐만 머문겨. 여길 대머리 샤를.이 먹기로 한거고. 이 아키텐의 배다른 형과 대머리 샤를이 싸우고. 이걸 대머리 샤를이 먹은거야.
Ranulf I (also Ramnulf, Rannulf, and Ranulph) (820–866) was a Count of Poitiers (from 835) and Duke of Aquitaine (from 852). He is considered a possible son of Gerard, Count of Auvergne. Few details are known about Ranulf I, except that he died in 866 in Aquitaine from wounds received in the Battle of Brissarthe against the Vikings (in which Robert the Strong also died).
아키텐의 백작.이 대머리샤를과 이전 배다른 형 피핀.때 라눌프. 람눌프.야. 경건루이의 자식 피핀.의 사위로 봐. 이들이 피핀과 샤를 전쟁때 다들 샤를한테 붙은겨. 그리고 작위를 계속 인정받은거고.
이 라눌프 조.가 끊기고 다시 복원되고 하면서. 이게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까지 온거야.
Fredelo,[1] Fridolo,[2] or Frigidolo[3] (died 852) was the first Count of Toulouse (844–852) of the dynasty of Rouergue.
툴루즈.는 아키텐.의 프와티에에서 툴루즈.까지의 아키텐이야. 샤를마뉴때 여기도 따로 영지를 줬다가, 이게 대머리샤를이 피핀과 전투하면서 이때 프레델로.가 시작을 해. 르웨르그 Rouerge 조.의 시작이야. 이게 끊기고 복원되다 하면서 또한 십자군 가는 레이몬드 까지 온거야.
아키텐.은 라눌프 조.의 엘레오노르.까지 갔다가. 남편 잉글랜드 헨리2세와의 자식 리차드와 실지왕 존.으로로 가서. 필립2세가 실지왕 존한테서 대부분을 빼앗고, 저빼앗긴 땅 찾으러 에드워드3세가 백년전쟁 프랑스랑 하면서, 프랑스가 이기고 아키텐의 나머지를 이때서야 갖고 오는겨 프랑스가. 그리곤, 여긴 발루아에 부르봉의 프랑스 왕가.가 직접 다스리는겨. 왕가가 타이틀 이름만 취하는거고.
툴루즈.도, 저 르웨르그 조.가 십자군 가면서도 동생핏줄로 이어가지만, 저 툴루즈.가 마시프 상트할이 수욱 들어간 우묵한 지역이야. 은거하기가 좋고 피하기 좋아. 카타르파들이 이리로 들어오는겨. 저걸 레이몬드의 르웨르그 들이 통제를 못하는거야. 저 카타르 진압하면서, 이것도 프랑스 킹덤이 직접 갖고 오는겨. 툴루즈.는 백년전쟁 시작 전에 들어온거야.
프랑스 역사란게, 킹덤이 위그 카페.가 서기 전에 저 땅 대부분이 카페 이전에 받은 영주들이 세력들이 각각 쎈겨 이게. 이걸 갓 선 위그 카페.가 다시 잡는겨 이걸.
카페 라는게, 로베르 들이걸랑. 샤를마뉴때 등장한 프랑크 귀족가문인데. 이들이 대머리 샤를 핏줄이 어릴때 뚱땡이 샤를 다음 오도, 심플 샤를 다음 로베르. 가 킹을 해. 이게 다 로베르 들이야. 이 자식이 위그 카페 인거고. 이 위그 카페도 엄마가 게르만 오토 핏줄이지만, 약하걸랑 이게. 카페가 잡을때는 이미 전 국토가 이전 귀족들이 다 자릴 잡고 있는겨.
저 땅들을 다시 쥐는게 루이 6세 부터야. 다음 루이7세. 그리고 이 아들 필립2세. 이 필립2세.가 프랑스에선 아우구스투스.닉이 붙는 최고여. 동시대 잉글랜드 사자심왕 리차드.인데. 이 필립2세 캐릭은 얍삽하고 걍 줘패고 싶은 그야말로 짜증 나는 캐릭이야 이게. 리차드 와 비교되는 겨. 헌데 프랑스 애들 입장에선, 이 필립2세 일때 프랑스가 저 아키탄에 앙주에 노르망디.를 다 갖고 온겨. 이후 잉글랜드의 아키텐. 타이틀은 가론강 아래의 가스코뉴.야 보르도 지나는 짝은 삼각형. 에드워드 3세까지의 아키텐 공작 타이틀.은 이전의 아키텐이 아냐. 완전히 쪼그라진 아키텐이야. 이마저도 백년전쟁하고 다 뺏긴겨.
리차드 동생 존 은 실지왕 이 되고, 프랑스 필립2세는 아우구스투스.가 된거야. 이 필립2세.가 프랑스의 킹.을 최초로 붙는겨 그래서.
이 필립2세가 결혼으로 플랑드르 를 받은겨 저 본가 플랑드르를 다우리로. 그리고 파리 위.의 베흐몬드와.도 얘때서야 들어온거고. 아래 블롸.와 오른쪽 샴페인.은 발루아 와서야 저걸 갖고오는거고. 그러면서 오를레앙.이 서는겨. 발루아 킹 시작 필립6세.의 아들이 장2세.고 이 장2세 동생.이 오를레앙 공작 필립.이야. 장2세.의 자식이 부르고뉴 현명공 필립.이고. 오를레앙 과 부르고뉴.를 발루아가 이렇게 시작을 해. 그러면서, 이 부르고뉴.의 자식들이 또다른 킹덤, 로타링기아 를 다시 만들려다 내전을 하는거고 이게 합스부르크가 이어가는거고.
이 프랑스.는 필립2세.가 백년전쟁 전에 어느정도 묶은겨 이걸. 그러다 발루아 서면서 부르고뉴.가 문제가 되는거지만.
이 프랑스.는 저 거대한 앙주제국 프랑스 땅을 백년전쟁하면서 갖고 왔지만, 얘들이 내전이 없었어 이게. 잉글랜드는 윌리엄이 그렇게 시작한 상태에서의 끊임없는 내전으로 서로 섞이며 묶은거걸랑. 프랑스는 끽해야 저 이후 부르고뉴와의 내전이야. 이탈리아 전쟁 하기 전에.
30년 전쟁이 끝나갈때에, 어린 루이14세 태양왕이 서고, 이때 프롱드의 난.이 터져. 프랑스 귀족들의 반란이걸랑. 이걸로 프랑스가 급히 30년 전쟁을 마무리 하는겨. 그리고 저 반란 세력이 이겨서 코트를 진압을 하고 어린 태양왕 루이는 깨갱하면서 이를 부득부득 간거야. 얘가 커서 절대군주 가 된겨. 어릴때의 귀족 반란의 그림자가 그 반발이 되어서.
헌데 말이지. 저걸 프랑스 역사 풀이애들이, 저때 프랑스는 킹의 힘이 약하고 귀족들이 힘이 쎘는데, 태양왕이 커서 저걸 다 뺏았다.
정말 유치한 해석이야 저게.
이미 그 이전에, 다 뺏아놨어. 필립2세.가 이미 다 한거야. 그걸 다시 태양왕 루이가 재 수거 한거일 뿐이야. 저때 얼마나 귀족애들이 힘이 없었으면 그냥 다 줬겠니.
여하튼. 아키텐 과 툴루즈.는 기본적으로 저런 땅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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