얀 후스. 참 이야기 할 게 많은 사람인데.

 

Jan Hus, born Jan Husinec (/hʊs/; Czech: [ˈjan ˈɦus] c. 1372 – 6 July 1415)  

 

얀 후스.가 1414년에 지기스문트의 안전보장으로 콘스탄스 공회의에 와서, 분위기에 휩쓸리고 투옥되서. 다음해 선고받고 바로 화형당하는데, 53세. 이사람은 산 채로 화형을 당해. 가장 악형이야. 대게 죽은 시체를 태우는데, 템플러 기사단장 자크 드 몰레.도 잔다르크.도 산 채로 화형당해. 

 

죽은 유골을, 라인강에 뿌리는겨, 사람들에게 우상화 될까봐. 더하여, 이때 같이 이단 선고받는게 존 위클리프.야. 존 위클리프.의 시체도 꺼내서 없애는겨. 

 

그리고, 성서 번역을 함부로 하지 말라. 이게 이때부터야. 얀 후스.를 이단으로 하고 화형시키고, 존 위클리프도 꺼내서 없애고. 이 성서번역 하지말라,는 존 위클리프의 성경번역 에서 나온 금기야. 로마에서 승인을 받아야 해 성경 번역을 하더라도. 마르틴 루터.는 딱 1백년 후에 나온겨 1517년 대자보 사건 95개 논제가. 오직 인덜전스 하나만  판거야.

 

성직자의 순결을 거부한게 또한 존 위클리프 지만 말야, 존 위클리프.는 주교였고 결혼도 안했어. 이사람은 전체적인 문제점을 연역적으로 문제제기를 한 사람이야.

 

허나, 마르틴 루터.는 달라. 얜 말야. 오직 인덜전스 만 파고 든거걸랑. 그리고 자기가 갑자기 스타가 되고 영주의 망토속으로 들어가면서 얘 이야기가 추가가 되고 덧대지는거야. 결혼해도 돼, 이건 지가 건진 수녀를 어드래 해보까 아 막 땡기넹, 그래 결혼하면 어때. 사제니 수도사니 왜 결혼하면 안된다는거야? 

 

이 마르틴 루터, 에르푸르트 대학 졸업반에 잠시 집에 왔다가 학교 가는길 번개 옆에 치곤 벌벌 떨면서 법학에서 신학으로 갈아탄거걸랑. 그리고 바로, 성 오거스틴 모나스트리.의 몽크 수도사가 된 애야. 선서 하면서. 얜, 수도사야 이게. 수도사 신분으로 신학 공부한 애고 다시. 그리곤 수녀를 꺼내주곤. 수도사가  꼴리는거야. 아  땡기네. 아 오거스틴 율법에 따르는 수도사 신분으로 어쩌까잉. 남들처럼 몰래 거시기 하긴 그렇고잉. 오매 왜 수도사는 여자 두면 안되까잉?

 

Martin Luther married Katharina von Bora, one of 12 nuns he had helped escape from the Nimbschen Cistercian convent in April 1523, when he arranged for them to be smuggled out in herring barrels.[102] "Suddenly, and while I was occupied with far different thoughts," he wrote to Wenceslaus Link, "the Lord has plunged me into marriage."[103] At the time of their marriage, Katharina was 26 years old and Luther was 41 years old.  

 

마르틴 루터.가 카타리나 수녀라를 탈출시켜주는게 서기 1523년 4월.이고. 결혼을 2년 후에 하는겨. 카타리나 26세 루터 41세. 카타리나는 죽을때까지 루터에게 헌신을 해. 생계 어려워서 빨래와 바느질일로 먹고도 살고. 

 

이 루터.의 일대기를 좇다보면 저런게 참 골때려. 

 

Battle of Leipheim. Weinsberg Massacre 

 

독일 농민전쟁이 1524-25 지만. 시작 가을부터는 분노만 하고 대들면서 협상을 하고, 이게 결렬이 되서 진짜 전투가 발생한게 라이프하임. 전투야. 울룸 Ulm 옆이야. 이게 서기 1525년 4월 4일.이고. 바인스베르크 학살. 같은 달에. 지금 슈투트가르트.의 바인스베르크 성을 농민들이 함락을 해 Landsknecht 란트스크네히트. 란스크네히트 저지대 용병이 합세해서. 70여명 귀족들을, gauntlet 곤틀렛. 기차줄 두줄 선 파이크스 짝대기들 사이로 통과시키고 줄라게 뚜들겨 패죽이는거걸랑. 

 

저걸 뒤에 마르크스 는 환호하는거고, 마르틴루터.는 농민들은 사탄이요 해대는거고. 

 

Second Battle of Würzburg (1525)[edit]

After the peasants took control of Freiburg in Breisgau, Hans Müller took some of the group to assist in the siege at Radolfzell. The rest of the peasants returned to their farms. On 4 June, near Würzburg,  

 

저 농민들이 저때 4월 반짝 한겨. 마지막 전투가 두달 후야. 6월 4일. 뷔르츠부르크. 저지대 프랑코니아.여 마인강 줄기. 이걸로 끝난겨. 

 

마르크스 애들은, 아 위대한 혁명 아까비. 하는거고, 마르틴 루터.는 오잉 내가 농민들 사탄이라고 해서리 저리 사라졌느니라! 해대며 옴메 나 예언잔가벼 해대는거고.

 

On 13 June 1525, the couple was engaged with Johannes BugenhagenJustus Jonas, Johannes Apel, Philipp Melanchthon and Lucas Cranach the Elder and his wife as witnesses.[104] On the evening of the same day, the couple was married by Bugenhagen.[104] The ceremonial walk to the church and the wedding banquet were left out, and were made up two weeks later on 27 June.[104]  

 

마르틴 루터.가 결혼을 한게 저 농민전쟁 자뻑질 직후여. 6월 13일. 저때 루터 주위애들이 벙찐겨. 대체 저거 머하는애야?

 

저걸 존 위클리프.의 결혼하세요.와 같이 보면 안돼. 이 루터는 드가면 드갈수록  유치해. 저 마르크스 앵겔스 들이 농민전쟁 찬양질하는것도  유치한거지만.

 

16세기 종교전쟁의 인물들 중에서, 가장 유치하고 허섭한 애가 마르틴 루터야. 얘가 역사에 이름을 앞에 남긴건 단 하나야. 작센 선제후 형제와 그 자식의 우산아래 있었을 뿐이야. 남들은 독고다이 맨몸으로 돌아다니고, 누군 총칼들고 싸웠걸랑. 그리고 사라진거고 얜 선제후 밑에서 있으면서 주절주절 글들 써서 역사의 맨 앞에 남은겨.

 

저 게르만 땅 애들이, 정말 유치한 놈들은 차마 눈뜨고 못 볼 수준의 유치야 저게. 정말 너무나 유치해. 

 

헌데 저 유치찬란한 애들을 빨아대는 게 또한 조선 민족놀이 하는 애들 중에  숱한겨 이게. 자기 지능에 딱 맞는 이야기애들 수준인거지. 그렇다고 저 민족놀이 하는애들이 쟤들 말글을 이해하는것도 아니고, 저 말글들 중에 또 발톱의 먼지만 듣보고 오잉 위대한 마르크스 다시 보기 이따위 짓 하는 애들이 숱한겨 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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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후스.를 범죄자로 낙인찍고 사형선고를 내린 곳은, 보헤미아 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저 콘스탄스 호 콘스탄스 도시. 라인강 상류인겨. 지기스문트 라는 보헤미아 킹 당시 동생.이고 다음 보헤미아 킹 승계자에. 당시 게르만의 킹.이고 신성로마 실세 의 안전보장을 약속받고 갔다가, 분위기에 휩쓸려 죽은거걸랑. 이 분위기를 지기스문트.도 전혀 보지 못한거고, 생각도 못한거고. 

 

저 소식을 들은 보헤미아.에선 난리가 난거야.  

 

The Council of Constance was a 15th-century ecumenical council recognized by the Catholic Church, held from 1414 to 1418 in the Bishopric of Constance in present-day Germany. The council ended the Western Schism by deposing or accepting the resignation of the remaining papal claimants and by electing Pope Martin V.  

 

콘스탄스(콘스탄츠) 공회의.가 4년간 열렸는데, 이때가 아비뇽 교황정 1309년. 바로 아비뇽 교황정과 로마 교황정.이 분열된 스키즘. 1378. 로 접어들어서 이 110년을 종지부 찍으려는 로마진영의 회의야. 얀 후스.는 1372년 생이야. 이사람 인생은 아비뇽 교황정과 로마 교황정의 다툼인 스키즘 시대여. 스키즘 시대에 태어나서, 얀 후스가 스키즘을 마무리하면서 죽은겨.

 

콘스탄스 호수 의 콘스탄스에 6백명의 주교들 수도원장들 닥터들이 여기 다 모인거야. 이 직전이 피사 공회의고, 아비뇽 쪽도 오라고 해서 알프스 넘어에서 한겨. 대게 한번 공회의가 저리 수백명을 대표하는거고, 대리인들 보내고 위임장 써주지만 저때 특히 다 모인겨. 아비뇽 교황정 70년과 이후 스키즘 40년의 110년간의 위기감을 느낀 교회진영의 절박함이 6백명의 대규모 회의를 갖게한거야. 이걸로 아비뇽 교황정은 완전히 끝나는거고. 110년만에 로마 교황정이 자리를 다시 잡아.

 

저때는 13세기 14세기 카타르파 발도파 프라티첼리로 서유럽이 불이 났고 걍 교회진영도 너덜너덜 해진거고. 교황과 황제의 대립은 극에 달했던거고 이 와중에 아비뇽은 따로 110년간 떨어져 나가있고, 불 좀 다 끄고 이제 새로 시작하자 하면서 6백명이 모인거야. 이때 첫 타겟이, 얀 후스 인겨. 아비뇽 교황정을 누르는 안건 하나에 더하여, 가장 시급한게 얀후스.의 보헤미아야. 자기들의 이단들이 잠잠해진 듯 했는데, 얀 후스 가 등장한거야. 다시 카타르 발도 프라티첼리.가 등장하는건가, 이게 가장 두려웠던겨. 공회의 시작하자마자 얀 후스.를 이단 규정하는겨. 

 

이 분위기를 지기스문트.가 갈파를 못한겨 이건. 지기스문트.가 얀후스를 죽이기 위해 안전보장을 미끼로 오게 한건 아닐꺼야. 단지 지기스문트.는 아비뇽교황정을 죽이기 위해 저거 하자 한거걸랑. 세속에 큰 지분이있어. 이게 자기도 어찌할 수 없이 돌아가는겨 판세가. 얀 후스.가 핵심 안건이 아니걸랑. 아비뇽 교황정이지 얀 후스는 걍 전채요리 정도로만 생각한겨 이사람은. 

 

 

Sigismund of Luxembourg (15 February 1368 in Nuremberg – 9 December 1437 in ZnaimMoravia) was prince-elector of Brandenburg from 1378 until 1388 and from 1411 until 1415, king of Hungary and Croatia from 1387, king of Germany from 1411, king of Bohemia from 1419, king of Italy from 1431, and Holy Roman emperor from 1433 until 1437, and the last male member of the House of Luxembourg.[1]

 

지기스문트.는 황제에 나중 1433년. 65세에 오르는겨. 첫 타이틀이 브란덴부르크 마크.야. 브란덴부르크.가 아스카니아 가문의 곰 알베르트.가 시작해서, 2백년 가다가 끊겨. 이때 황제가 루트비히4세.고 끊긴 브란덴부르크.를 자기 비텔스바흐 가문의 자기 장남.에게 줘. 이게 60년 가다가, 여기 시집간 여자가 룩셈부르크 가문의 황제 카를4세.의 딸이야. 지기스문트의 여동생이야. 자식이 없고, 이걸 장인.인 카를4세 황제가 전쟁하고, 결국 룩셈부르크.가 받아내서 자기 장남에게 주고, 이 장남이 보헤미아 킹이 되면서 자기 동생 지기스문트 에게 준겨. 이 지기스문트.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로 시작해서, 헝가리 앙주 루이의 큰딸 마리.와 결혼해서 헝가리 크로아티아.의 킹.이 되고. 그다음에 게르만의 킹.이 1411년 43세.에 되서 저 콘스탄스 공회의 1414-18년.에 참석한겨. 

 

이때 형.이 보헤미아.의 킹.이야. 카를4세 황제의 장남. 룩셈부르크 가문 하인리히7세.가 프랑스 필립2세.의 후원으로 황제가 되서, 아들 장님 요한.이 보헤미아에 장가가서 첫 킹 하고. 이 요한이 낳은 사람이 카를4세.여.

 

Wenceslaus (also WenceslasCzechVáclav IV.GermanWenzel, nicknamed der Faule ("the Idle");[1] 26 February 1361 – 16 August 1419) was, by inheritance, King of Bohemia (as Wenceslaus IV) from 1363 and by election, German King (formally King of the Romans) from 1376. He was the third Bohemian and fourth German monarch of the Luxembourg dynasty. Wenceslaus was deposed in 1400 as King of the Romans, but continued to rule as Bohemian king until his death.

 

영어 웬시슬라우스. ヴェンツェル 일본애들은 부엔쓰에루. 독어 벤첼. 체코어 바츨라프. 일본이 메이지때 독일이 보불전쟁으로 프랑스를 이기면서, 일본의 유럽말이 이 독일발음이 많은겨. 라틴어를 독일발음으로 하는거고, 우리 우대한 조선민국이 그래서 라틴어 표기가 일본애들이 배운 독일발음이야. 벤첼.을 부엔쓰에루 하는거고. 바츨라프.라고 불러주자고. 

 

바츨라프.가 다음 황제 지기스문트.의 일곱살 많은 형이야. 닉이 데어 파울레. 게으르단 거걸랑. 보헤미아 킹을 41년 했어. 58세에 죽어. 게르만의 킹.에 올랐다가 이자릴 뺏겨 교황때문에. 이 게르만 킹을 동생 지기스문트.가 갖고오는겨. 또한 보헤미아 내에서는 이 바츨라프.가 중심을 못잡고 아비뇽과 로마 사이에서 아무 의사결정을 못하고, 마음만 얀 후스 편을 들 뿐이걸랑. 이래 저래 걍 게으름 바츨라프.로 낙인이 찍힌겨 역사에.

 

카를4세 황제가 1378년.에 죽어. 이때부터 40년이 아비뇽 로마 서로 교황 해대는 스키즘.이야. 이걸 마무리하는게 저 콘스탄스 공회의.이고. 다음 황제 지기스문트.가 로마 가서 대관식 하는게 1433년.이야. 즉 스키즘.으로 대관식 하는 황제가 없는 대공위시기인겨. 게르만 킹.을 1411년 43세에 되고 22년 후인 1433년 65세가 되어서야 황제에 오른겨. 그리고 4년 후에 죽는거고. 이 다음에 지기스문트.의 딸이 시집간 합스부르크.의 알베르트.가 게르만의 킹에서 오스만이랑 싸우다 죽고, 합스부르크.의 막시밀리언1세 황제의 아빠 프리드리히3세.가 1452년에야 대관식하면서 황제자리가 19년이 비었던겨. 

 

바츨라프.가 게르만의 킹.이었다가, 교황들 스키즘.으로 세속도 흔들리고, 이때 교회 표가 1356년 골든 불.로 쾰른 마인츠 트리어. 세장이야. 여기에 세속 인간 한장만 더하면 얘가 게르만의 킹.이 되는겨. 요때 라인팔츠그라프. 선제후였던 비텔스바흐.가 교회에 붙어서, 바츨라프.를 내리고 자기가 게르만의 킹.에 오른겨. 얘가 그러다 교회에 밉보이고, 교회는 룩셈부르크.의 지기스문트의 조카.에게 게르만의 킹.을 줬다가, 이게 지기스문트.에게 온거야 서기 1411년.에. 형 바츨라프.는 그냥 보헤미아 킹.만 하던거고. 그러다가 바츨라프.가 나중에 죽어서 지기스문트.가 보헤미아킹.도 하다가, 대관식 해서 황제가 된건데. 

 

얀 후스.를 이단 규정하고 사형선고.를 한건 콘스탄스 공회의.야. 이때 보헤미아의 킹.은 바츨라프.인거야. 

 

저 시대를 이해하려면, 아비뇽 교황정. 직후인 웨스턴 스키즘.이라는 아비뇽과 로마 분리.가 이해가 되어야 해.

 

Unable to maintain himself in Italy, Robert took the name Clement VII and reestablished a papal court in Avignon, where he became dependent on the French court.[11] Clement had the immediate support of Queen Joanna of Naples and of several of the Italian barons. Charles V of France, who seems to have been sounded beforehand on the choice of the Roman pontiff, soon became his warmest protector. Clement eventually succeeded in winning to his cause Castile, Aragon, Navarre, a great part of the Latin East, and Flanders. Scotland supported Clement because England supported Urban  

 

아비뇽 교황정 1309년 부터 시작한 70년 가까운 시절 로마가 빈겨. 니덜 제발 로마로 들어와. 콘클라베 해서 교황뽑고 로마교황정 다시하자. 이걸 아비뇽이 받아. 로마에서 내세우는건 나폴리 킹덤 사람 바리 대주교 우르바누스6세고, 아비뇽에서 내세운건 제노바의 로베르., 나중 안티포프 클레멘스7세야. 예상을 깨고 우르바누스6세가 교황이 되고, 삐친 아비뇽애들은 다시 아비뇽가고 이때부터 스키즘 하는거걸랑. 이때 프랑스 샤를5세.는 잉글랜드랑 백년전쟁 하면서 이전 아빠 장2세.가 뺏긴 땅 다시 회복하느라 바쁘고, 거의 관심이 없어, 잉글랜드는 아비뇽으로 옮긴 교황이 연일 지들 땅인척 존 위클리프 저거 이단 해대며 에드워드3세한테 파문시켜라 독촉하고, 에드워드는 족까 하고는 바로 죽었어. 손자 리차드2세.가 즉위할때고 잉글랜드는 그래서 로마편이야. 나폴리는 완벽한 아비뇽 스폰서고. 저게 세속에서도 갈리는겨. 스콧은 당연히 잉글랜드 싫으니까 아비뇽편들고. 

 

아비뇽은 클레멘스 7세.에 이어 베네딕트 13세.야. 이사람은 아라곤 귀족이야. 스페인쪽이 여기 붙어. 

 

로마는 우르바누스6세.에 이어이어 그레고리 12세.야. 

 

저 두 스키즘을 못보겠다며, 통합하자. 라는 문제인식과 함께 피사 공회의.가 열려. 

 

Peter of Candia or Peter Phillarges (c. 1339 – May 3, 1410) as Alexander V (LatinAlexander PP. V) (ItalianAlessandro V) was a nominal pope elected during the Western Schism (1378–1417). He reigned briefly from June 26, 1409, to his death in 1410 and is officially regarded by the Catholic Church as an antipope.[2]  

 

피사 공회의.에서 교황으로 추대한게 칸디아의 피터. 필라르게스.야. 알렉산더 5세 안티교황. 바로 죽고 요한23세.가 서는데. 

 

즉 서기 1409년 부터는. 교황이 셋.이 된거야. 세속도 셋으로 갈려. 

 

알렉산더 5세.와 요한23세.의 세속 배후는 발루아 앙주.이고 이 뒤의 프랑스를 기대하는겨. 헌데 뜬굼없이 이쪽에 휘둘리는게 보헤미아 킹덤이여. 이 피사 회의의 교황진영은 이게 제일 약한거걸랑 세력이. 남들은 관심이 없는데 보헤미아가 얘들에게 휘둘려. 저 현장의 중심에 얀 후스가 있는건데.

 

Charles the Short or Charles of Durazzo (1345 – 24 February 1386) was King of Naples and titular King of Jerusalem from 1382 to 1386 as Charles III, and King of Hungary from 1385 to 1386 as Charles II. In 1381, Charles created the chivalric Order of the Ship. In 1383, he succeeded to the Principality of Achaea on the death of James of Baux.  

 

나폴리 킹덤.이 조안나1세.가 죽어. 이 조안나는 카페앙주의 나폴리 샤를2세의 손녀.야. 나폴리의 조안나가 프로방스에 주위 마크인 팔라커.도 받아. 아비뇽은 조안나의 품안에 있는겨. 아비뇽 교황정은 조안나.가 배후인거고. 이여자가 결혼 네번을 해도 자식이 없고. 양자를 들인게 발루아의 루이1세.야 장2세.의 차남이고, 샤를5세가 형이야. 아빠가 앙주를 주고. 이때부터 발루아 앙주.가 된거고. 나폴리 조안나로 부터 미리 프로방스를 받아. 나중 나폴리도 받기로 했는데, 조안나1세가 죽고 나폴리를 차지한게, 두라초의 샤를.이야. 샤를2세의 막내아들 핏줄이야. 

 

Ladislaus the Magnanimous (ItalianLadislao il Magnanimo di NapoliHungarianNápolyi László; 15 February 1377[1] – 6 August 1414) was King of Naples and titular King of Jerusalem and Sicily, titular Count of Provence and Forcalquier (1386–1414), and titular King of Hungary and Croatia (1390–1414). He was the last male of the senior Angevin line.  

 

카페앙주의 두라초.로 가서 자식 라디슬라우스. 로 온겨. 그리고 다음엔 이사람 누나 조안나2세.로 가고 이걸 또 발루아 앙주 루이1세의 손자 르네.에게 줬지만, 이걸 옆 시칠리아 아라곤에서 뺏아가는거고. 이거 찾으러 백년전쟁 이긴 프랑스가 다시 알프스 넘은 이탈리아전쟁 하는건데. 

 

피사 공회의.에서 두 교황 묶어야 한다며 난데 없이 알렉산더5세 안티교황이 추대가 돼. 1409년. 이때가 두라초.의 아들 라디슬라우스.가 나폴리 킹 할때걸랑. 알렉산더5세를 뽑은 배후는 앙주의 루이2세여. 아빠가 조안나1세에게 받은 나폴리를 자기가 갖고 오겠다는거걸랑. 저때 킹이 사촌 미친놈 딱지 샤를6세.고. 알렉산도5세.는 통합을 빌미로, 세속의 앙루루이2세.에게 나폴리를 찾게해주겠다는거고. 저 나폴리.는 조안나1세부터는 아비뇽 60년 중 30년이 조안나1세의 아비뇽이야 저게. 로마애들이 가장 싫어하는게 저놈의 조안나고 저 나폴리야. 이게 이어져서 조안나2세까지 오는거고. 로마교황이 열  받아서, 프랑스 샤를8세한테. 너 머하냐 나폴리 안먹고 빨랑 쳐들어가서 나폴리 먹어 해댄거걸랑.

 

라디슬라우스.가 로마 교황이랑 타협의 줄타리를 걷는겨. 헌데 새로운 적이 등장한겨. 알렉산더 5세 안티교황. 얘들이 앙주 루이2세에게 찰싹 달라붙었걸랑. 

 

In 1408, the Charles University in Prague was divided by the Western Schism, in which Gregory XII in Rome and Benedict XIII in Avignon both claimed the papacy. Wenceslaus felt Gregory XII might interfere with his plans to be crowned Holy Roman Emperor. He denounced Gregory, ordered the clergy in Bohemia to observe a strict neutrality in the schism, and said that he expected the same of the University. Archbishop Zajíc remained faithful to Gregory. At the University, only the scholars of the Bohemian "nation" (one of the four governing sections), with Hus as their leader, vowed neutrality.[citation needed]     

 

서기 1408년. 얀후스 1372년 생. 36세. 저때 프라하.도 아비뇽과 로마 교황정으로 갈려. 1378년 부터 시작해서 40년 지났어. 이후 10년 후에 끝나고 얀후스는 죽는건데. 저때 아비뇽은 클레멘스 7세 다음 베네딕트 13세.고 이사람은 스키즘 종결되고 아비뇽에서 쫓겨나서 아라곤에서 난 여전히 교황이여 하다가 죽는 인간이고. 로마는 우르바누스6세 이어이어서 그레고리 12세야. 

 

이때 보헤미아 킹 바츨라프(웬슬라우스)는 게르만의 킹.을 뺏긴 상태고, 비텔스바흐.가 갖고잇는 거고. 그래도 자기가 로마 황제.가 될 기대를 하는 상태야. 결국 뒤에 동생이 게르만의 킹.이 되서 포기를 하지만. 저때 로마 그레고리는 자기 반대파라 생각하고. 교회진영에 중립을 지키라고 한겨. 즉 반로마파 로 간거야. 대주교는 로마교황 그레고리에 마음 준 상태고. 이때 보헤미아의 중심은 프라하고, 프라하의 중심은 프라하 대학.이야. 

 

얀 후스.는 프라하 대학을 나오고, 저기서 교수 하는 거야. 이때 대학 학자 진영이 크게 네 진영인데. 한 진영이 보헤미안.들이고, 나머지 세 진영이 게르만들이야. 

 

게르만은 북 게르만이 있고, 엘베강 오른쪽에 동게르만.이 있어. 이 동게르만 중에서도 오데르강 오른쪽의 게르만이 부르고뉴에 고쓰족이야. 이 고쓰에서 오스트로 비지 동고쓰 서고쓰인거고. 여기에 루기이 헤룰리. 에 반달이 다 여기 폴란드에 보헤미아여 이게. 슬라브 오기전에는 여기가 동게르만의 땅이여. 게르만이 이동하고 슬라브가 들어온거지만, 이 바닥은 동게르만인겨. 

 

프라하의 네 진영에서 저 세진영이 게르만들이고 한 진영이 보헤미안.이야. 

 

저때 문제는. 얀 후스. 를 중심으로 발생하는 거지만. 

 

 

Tomáš Štítný ze Štítného (c. 1333 – 1401/1409) 토마슈 슈팃니 제 슈팃네호. 얀 후스 할아버지 뻘이야. 40년 빨라. 이사람이 보헤미아 쪽 개혁진영 원조야. 이런 이들이 있던건데. 

 

Hus began teaching at the university in 1398 and in 1399, he first publicly defended prepositions of Wycliffe  

 

얀후스.가 서기 1398년. 27세 부터 프라하 대학에서 가르치는데. 주제가 존 위클리프.야. 

 

이 중세 대학이란게, 유니버시티.라는 모든 영지인들에게 개방하는 이 시스템이 유럽을 만든겨 이게. 유럽 전역의 모든 리터러쳐를 서로 돌려가며 보는거걸랑. 얀 후스가 저런 시스템의 유니버시티.에서 존 위클리프.를 알게 된겨. 존 위클리프 의 이야기를 강의하고 설교하는겨 얀 후스.가. 

 

Hus was a strong advocate for the Czechs and the Realists, and he was influenced by the writings of John Wycliffe. Although church authorities banned many works of Wycliffe in 1403, Hus translated Trialogus into Czech and helped to distribute it  

 

그리고, 체크스. 라는 보헤미안 정체성을 렬렬히 지지하는 사람이야. 이 바닥을 존 위클리프.로 갖고 가고, 위클리프.의 트리알로구스. 세사람의 대화. 교회이야기를 사제와 농부에 한 캐릭을 더해서 그리스도 이야길 하는거야. 보다 쉽게 전달하기 위해서. 위클리프.의 자기들 버내큘러 영어로의 번역된 성경에 감명 받은거고, 트리알로구스.를 체크어.로 번역을 한거야. 이사람은 성경을 체코어로 번역하진 않았어. 그러면서 보다 보헤미안들에게 그리스도 이야기를 제대로 알려주겠다는거고 저 번역서로. 

 

이 사람이 체코어 글자들을 진화시키는데 이바지 한겨. 저 번역서 만들면서.

 

Jan Hus introduced reforms to medieval Czech orthography, including the "hook" (háček) diacritic which was used to form the graphemes ⟨č⟩, ⟨ě⟩, ⟨š⟩, ⟨ř⟩ and ⟨ž⟩, which replaced digraphs like ⟨cz⟩, ⟨ie⟩, ⟨sch⟩, ⟨rz⟩ and ⟨zs⟩; the "dot" above letters for strong accent,[clarification needed] as well as the acute accent to mark long vowels ⟨á⟩, ⟨é⟩, ⟨í⟩, ⟨ó⟩, and ⟨ú⟩, in order to represent each phoneme by a single symbol. Some sources mention documented use of the special symbols in Bible translations (1462), the Schaffhausen Bible, and handwritten notes in the bible. The symbol ⟨ů⟩ (instead of ⟨uo⟩) came later. The book Orthographia Bohemica (1406) may have been written by Jan Hus, or by another author from Charles University.  

 

다이어크리틱.이라는 알파벳 레터들에 쓰이는 부호.들은 소리.를 제대로 내기 위한 방법이야. 특히 체코어에 하첵.이라는 낙시 브이 모양.에, 어큐트 엑센트라는 빗금 부호.로 소리를 정하고 단어의 레터들을 줄이고자 한겨 저건. 

 

저게 말이야. 우리 한글.도 저걸 도입해야해. 이 한글이 못내는 소리가  많아. 이 한글 우월주의에 빠져서 저런 시도를 전혀 하지 않는데 말야. 저걸 전혀 할 생각을 못해 이 조선민족 놀이 하는 애들은. 아 저걸 내 해주고 싶지도 않은데  구찮아서. 저 글자라는건 말야, 만드는게 별게 아냐. 저건 기본 생각 있는 이면 만들수 있는게 글자야 알파벳이고. 먼 저게  대단한 듯이 여기는데. 

 

저 유럽 애들 소리, 슬라브 소리 등 못내는 소리를, 우리 자음에 다이어크리틱 찍어서 빨랑 빨랑 글자를 만들어야 해. 

 

그럼 남들보다 완벽한 소리의 언어를 할수가 있어.

 

27세부터 시작한겨 얀후스.는 1398년. 53세 1415년에 죽어. 26년 활동한건데. 시작하고 10년을 걍 저리 설파를 한거야. 그러다 스키즘의 여파가 여기까지 온거고. 바로 1409년.에 뜬굼포 알렉산더 5세 라는 또다른 교황이 등장한거야 나폴리 때문에. 

 

이때 보헤미아가 엮이는겨. 얀 후스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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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들이, 자기 정치 세력을 만드는데, 가장 좋은게 적폐 놀이야. 그게 저당시의 이단놀이고. 남을 적폐로 규정하면서 자기가 정의가 되고 시선을 받으면서 표를 받는거걸랑. 

 

새로 등장한 알렉산더 5세 안티교황이, 얀 후스의 보헤미아이야기를 들은거야. 

 

In January 1409, Wenceslaus summoned representatives of the four nations comprising the university to the Czech city of Kutná Hora to demand statements of allegiance. The Czech nation agreed, but the other three nations declined. The king then decreed that the Czech nation would have three votes in University affairs, while the "German nation" (composed of the former BavarianSaxon, and Polish nations) would have one vote in total. As a consequence of the changed voting, by May 1409 the German dean and rector were deposed and replaced by Czechs. The Palatine Elector called the Germans to his own University of Heidelberg, while the Margrave of Meissen started a new university in Leipzig. It is estimated that over one thousand students and masters left Prague. The emigrants also spread accusations of Bohemian heresy.[19]  

 

저 스키즘 시절에. 쿠트나 호라. 호라.가 산.이야. 여기서 프라하 대학 네개 진영의 대표를 킹이 소환해서, 중립을 요구하면서 이견을 내지 말라는거지. 얀후스.의 체코인들은 동의하는데, 나머지 세진영인 게르만들 학자들은 동의를 안해. 바츨라프 가 체코진영은 세표 이고 니덜 게르만진영은 한표로 취급한다. 따라서 중립 지켜라. 게르만 학자들이 반발하고 떠나는겨. 이들이 라인팔츠그라프 선제후의 하이델베르크 대학으로 가는겨. 당시 게르만의 킹.이야. 더하여 마이센이 세운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옮기고. 여기서 얀 후스 이야기가 퍼지는거야. 쟤들 이단이다. 

 

그리고 바로 피사에서 안티교황 알렉산더5세 가 새로이 등장하는겨. 아비뇽과 로마 와는 별도로. 

 

새로 등장한 알렉산더5세는 아비뇽과 로마 를 압도할 꺼리가 있어야 하걸랑. 마침 저걸 들은거야. 니덜 존 위클리프의 이야기 그거 막 퍼뜨린다며, 그거 내가 보니까 이단이다. 이사람이 자기도 교황 이걸랑. 칙령을 내리는거야. 존 위클리프.가 이 안티교황 알렉산더5세.가 이단으로 규정한겨 이게. 

 

 

 

Lollardy, also known as Lollardism or the Lollard movement, was a pre-Protestant Christian religious movement that existed from the mid-14th century to the English Reformation. It was initially led by John Wycliffe,[1] a Roman Catholic theologian who was dismissed from the University of Oxford in 1381 for criticism of the Roman Catholic Church. The Lollards' demands were primarily for reform of Western Christianity. They formulated their beliefs in the Twelve Conclusions of the Lollards.  

 

이 롤라디.라는 롤라디즘.은 존 위클리프.를 따르는 사람들인데, 옥스포드 대학에선 1381년에 짤렸어. 위클리프.는 3년 후인 1384년에 죽는거고. 

 

The Anti-Wycliffite Statute of 1401 extended persecution to Wycliffe's remaining followers. The "Constitutions of Oxford" of 1408 aimed to reclaim authority in all ecclesiastical matters, and specifically named John Wycliffe as it banned certain writings, and noted that translation of Scripture into English by unlicensed laity was a crime punishable by charges of heresy.  

 

존 위클리프가 죽고 바로 1401년.에 그 무리들은 기소가 되는겨. 옥스포드 법 1408년.에서 재규정해. 존 위클리프.를 확실히 거론하면서 관련된 글도 쓰지 말고, 자격없는 평신도가 영어로 성서 번역하는 죄고 이단으로 처벌한다. 이건 잉글랜드 안에서만의 이야기야. 저건 저 섬을 벗어나지 않은겨. 헌데 이게 뜬굼없이 얀 후스가 이걸 들춰낸거야 대륙에서. 

 

이걸, 새로 등장한 안티포프 알렉산더5세.가 저걸 공식적으로 이단 규정한거야 존 위클리프.를. 프라하에서 나온 게르만 학자들이 흩어지면서 이 이야기들이 유럽에 퍼진거고. 이 직후에 교황에 오른 안티교황 알렉산더5세가 이걸 받은거야.

 

그러면서, 저 알렉산더 5세 진영의 교황정.이 보헤미아.에 발을 담구는거야. 

 

이단은 13세기 카타르에 부데스에 프라티첼리 에 아주  무서운겨 세속입장에선. 보헤미아 킹이 식겁을 한거야 이건. 고분 고분 할 수 밖에 없어. 바츨라프.가 걍 존 위클리프 관련된거 다 태워라. 니네 말도 꺼네지도 말아라. 

 

Alexander V died in 1410, and was succeeded by John XXIII (also later declared an antipope). In 1411, John XXIII proclaimed a crusade against King Ladislaus of Naples, the protector of rival Pope Gregory XII. This crusade was preached in Prague as well. John XXIII also authorized indulgences to raise money for the war. Priests urged the people on and these crowded into churches to give their offerings. This traffic in indulgences was to some a sign of the corruption of the church needing remediation.[citation needed]  

 

알렉산더5세는 일년후 죽어. 이사람을 이은게 요한 23세.야. 아비뇽엔 베네딕트 13세. 로마엔 그레고리12세. 

 

요한23세는 세속끈이 발루아 앙주 루이2세고. 쟤한테 나폴리 찾아줘야해. 이단 꺼리가 생긴 저 보헤미아를 갖고 노는거야 얘가. 니덜 위클리프로 감히 이단 놀이 했어? 너 이단 아니란걸 증명해봐. 저 나폴리를 쳐라. 그럼 내가 너희 이단 아닌걸 인정하마. 인덜전스 면죄부 발행해 돈없으면. 

 

바츨라프.와 교회 사제들이 벌벌 떠는겨. 인덜전스 막막 써서 팔아. 여긴 슬라브여 게르만보다 더 늦은. 오메  저거 사면 지옥에 안감둥? 지옥에 간 내 부모 꺼내주는검둥? 장사진을 이루는거지. 

 

저런 걸 보고, 오히려 얀 후스.와 친구들이. 더 뼈저리게 문제점을 느끼는거야. 훗사이트.는 저때 등장한겨 이게. 저 때 저 황단한 인덜전스 현장. 속에서. 

 

요한23세 진영도, 어차피 아비뇽과 로마의 분열을 못 보겠다고 통합하겠다고 등장한 세력이야. 이럴 수는 없어. 저걸 세속에서 요구하는겨. 니네 그러지 말고, 전부 다 모인 자리에서 결정해서 한 사람이 교황 해라. 이걸 요한 23세.가 받아서 콘스탄스 공회의.를 소집하자 라고 한건 웃기게도 이 요한23세.야. 물론 안티포프.로 나중 딱지 받고. 아비뇽의 베네딕트13세.는 안가. 애들 소규모만 보내고. 로마의 그레고리12세는 공회의 시작하고는 자진 사퇴해. 나 물러날테니 교황 새로 뽑으시라. 그리고 저 회의 결과로 로마 교황이 이어가는거고. 여기서 나온 교황이 마르티누스 5세 교황이야. 

 

저때 지기스문트.는 게르만의 킹.을 받은 상태야. 세속에서 힘있는 실세 중 하나여. 얀 후스.보고 너 와서 변론해. 먼가 오해가 생겼다고. 지기스문트.는 이게 일이 커질 줄 몰랐던겨. 오자마자 얀 후스를 감금하는겨 이게. 지기스문트가 니덜 왜그래 막다가, 당신 이단이야? 이 말에 주춤해지는겨 지기스문트가. 이때부터 완전히 얀 후스.가 혼자 된겨. 

 

It is not known whether Hus knew what his fate would be, but he made his will before setting out. He started on his journey on 11 October 1414, arriving in Constance on 3 November 1414. The following day, the bulletins on the church doors announced that Michal z Německého Brodu would be opposing Hus. In the beginning, Hus was at liberty, under his safe-conduct from Sigismund, and lived at the house of a widow. But he continued celebrating Mass and preaching to the people, in violation of restrictions decreed by the Church. After a few weeks on 28 November 1414, his opponents succeeded in imprisoning him, on the strength of a rumor that he intended to flee.  

 

얀 후스.는 자기가 죽을 줄 몰랐을거야. 지기스문트가 

 

Freies Geleit 프라이스 겔라이트. 자유로운 경호. 겔라이트.가 게 라이텐. 라이텐이 리드하고 나가는건데 앞서 나가는겨. 이 사람이 지나가면 경호원이 앞에서 리드해주면서 지켜줘라 하는 에스코트.야. 누구라도 저 사람을 경호해줘라. 벌하지 말란거걸랑. 지기스문트.는 당시 황제 공백의 게르만의 킹.이야. 콘스탄츠.는 신성로마 땅이고. 아잉 최고가 안전보장 해준다는데 안 가면 이상한거지 그레. 10월에 출발해서 1414년 11월 3일. 한달만에 도착하고. 게시판이 붙어 다음날. 얀 후르.를 저격할 사람 이름이 붙어. 얀 후스는 그럼 쟤랑 논쟁하면 되는거야. 한 과부집에서 살면서 미사도 하고 설교도 해. 이건 좀 나간거지. 삼사주 후인 11월 28일. 반대진영이 감금을 해. 그가 도망갈거 같다며. 

 

He was first brought into the residence of a canon and then, on 6 December 1414, into the prison of the Dominican monastery. Sigismund, as the guarantor of Hus's safety, was greatly angered and threatened the prelates with dismissal; however, the prelates convinced him that he could not be bound by promises to a heretic.[29]  

 

12월 6일.에 도미니칸 수도원으로 옮겨지고, 지기스문트.가  화를 내. 니덜 주교들 원장들 파면하겠다고. 헌데 지기스문트.에게 말하는겨. 이단자 와는 약속에 얽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On 4 December 1414, John XXIII entrusted a committee of three bishops with a preliminary investigation against Hus.  

 

보헤미아를 상대하는건 요한23세야. 이전 알렉산더5세를 이은. 얘들이 이단 규정한거걸랑. 

 

Here he remained for 73 days, separated from his friends, chained day and night, poorly fed, and ill  

 

그러다 요한23세.도 공회의 분위기가, 자기를 내칠 기세걸랑. 쫓겨나기 싫어서 콘스탄츠에서 도망가 사라져. 얀 후스는 기소권자도 사라지고, 완전히 이상하게 된 상태에서 73일간 격리가 돼. 

 

On 5 June 1415, he was tried for the first time, and was transferred to a Franciscan monastery

At the last trial, on 8 June 1415, thirty-nine sentences were read to him,

 

다음해 6월 5일. 첫 재판을 받고. 프란치스칸 수도원으로 이감되고. 3일 후에 39개의 혐의있는 문장들이 읽어지는거지. 저게 다 죄인겨.  지기스문트.는 저 현장에서 쫄게 되고. 

 

The condemnation of Jan Hus took place on 6 July 1415,  

 

한달 후에. 컨뎀네이셔. 판결이 난겨. 컨댐! 댐잇도 아니고 컨댐. 이날 바로 이단 이라 최종 규정되고, 이날 화형 시켜서 이날 라인강에 뿌린겨. 이때 노파가 약한 불 로 괴로우실듯 장작을 더 갖고 불지르게 하고, 주위 사람은 저 노파 미쳤나 하는데,  얀 후스가 O Sancta Simplicitas!. 오 심플하신 성녀시여! 햇다는 말이 있고. 

 

얀 후스.는 너가 이단이고, 그짓을 했다고 자백을 하라고 계속 요구받아. 얀후스는 끝까지 거부해

 

God is my witness that the things charged against me I never preached. In the same truth of the Gospel which I have written, taught, and preached, drawing upon the sayings and positions of the holy doctors, I am ready to die today  

 

갓이 나의 증인이다 나에게 부과한 것들을 나는 결코 말한 적이 없음을. 복음이 갖은 그 똑같은 진리를 나는 썼고 가르쳤고 설교했고, 신성한 교부들의 말씀들과 자리들에 의지해왔을 뿐, 나는 오늘 죽을 준비가 되어있다. 

 

Love the truth. Let others have their truth, and the truth will prevail. 

 

진짜를 러브하라, 다른이들도 그들의 진짜를 갖게 하라, 그러면 그 진짜.는 퍼져 이길것이다.

 

 

보헤미아.가 얀 후스.의 죽음 소식을 갑자기 들은겨. 작년 10월달에 떠난 사람이. 7월에 죽었다는겨 이게. 

 

난리가 난겨 보헤미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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