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 밝은 경계가 지금 독일 주. 라인란트-팔츠.야. 오른쪽 경계가 헷세. 영어 헤스. 독어 헷슨. 이고. Sigegen 지겐 이란 도시는 북베스트팔렌 주.이고. 아래 딜렌부르크 Dillenburg 는 헷세여. 이 사이 산맥이 Rothaar 로타르 산맥이고, 이게 헷세.와 북베스트팔렌 을 경계해. 

 

The Duchy of Nassau (GermanHerzogtum Nassau) was an independent state between 1806 and 1866  

 

낫사우.가 7백여년 동안 두 핏줄로 나뉘고 십여개로 자잘하게 쪼개지고. 이걸 또한 나폴레옹이 와서, 합친겨. 이게 낫사우 공작령.이야. 이 공작령이 저 두개 주로 나뉘기 전.이고. 이 공작령의 수도는 바일부르크.에 다음 비스바덴.이야. 비스바덴.이 지금 헷세의 수도야. 그리고 프러시아 킹덤이 독일 통일하면서 낫사우.와 헷세.를 묶었다가, 2차대전끝나고 지금 저렇게 된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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낫사우 Nassau 란 도시는 코블렌츠 Koblenz 와 디즈 Diez 사이에 있어. Lahn 란 강이 위 로타르 산맥에서 발원해서 내려와서 디즈.에 낫사우를 지나 코블렌츠.의 라인강으로 들어가는겨. 낫사우 가문의 땅이 지금 라인란트팔츠 주.와 오른쪽 헷세 주.로 양분 되었다고 보면 돼. 오른쪽 헷세의 딜렌부르크. 아래 헤르본 Hernorn. 아래 바일부르크 Weilburg. 죽 아래 비스바덴 Wiesbaden 이 낫사우의 땅이여. 거의 반반.을 왼쪽 오른쪽으로 나뉜거고, 라인란트팔츠.가 이 낫사우 땅을 나누려고 코블렌츠에서 라인강을 넘어 온거야. 지도를 보면 아예 의도적으로 쪼갠겨 저걸. 그렇다고 헷세에 다 주긴 그렇고 저리 반반으로 나눈거야. 즉 저건 머냐하면, 낫사우에 대한 독일 애들의 불편한 감정을 볼 수 있는겨 저게. 이 낫사우 때문에 네덜란드.가 떨어져 나간거걸랑. 

 

저 낫사우가 저 정도 땅에서도 십여개로도 쪼개졌걸랑. 낫사우의 벼라별 낫사우의 도시 이름들은 다 저기 안의 이름들이여. 네덜란드 쪽 이름 몇개 빼고는. 룩셈부르크쪽도 몇개 빼고는.

 

Dudo was probably a son of Rupert (German: Ruprecht), the Archbishop of Mainz’s Vogt in Siegerland. Dudo is mentioned as Tuto de Lurinburg between 1093 and 1117.[1] In a charter dated 1134 (after his death) he is mentioned as Count of Laurenburg. 

 

라우렌부르크 Laurenburg 의 두도. 가 서기 1134년. 죽고나서. 차터로. 라우렌부르크.의 백작.으로 처음 언급이 돼.

 

Rupert is mentioned as count of Laurenburg between 1124 and 1152. He probably ruled together with his brother Arnold I.[1][2] Rupert and Arnold built Nassau Castle around 1120. 

 

두도.의 두 아들.이 낫사우 성.을 지었어. 서기 1120년.에 아빠 죽기 직전 늙으막에 아들들이 지은거로 보여. 라우렌 부르크.가 낫사우 오른쪽이야 디즈 Diez 가기 전에. 

 

Walram I of NassauGermanWalram I. von Nassau (c. 1146[1] – 1 February 1198),[1][2] also known as Walram I of Laurenburg, was Count of Nassau and is the oldest Nassau whose ancestorship is absolutely certain  

 

루퍼트 의 손자 발람1세 부터. 낫사우 백작.으로 확실히 찍히기 시작해. 낫사우 란 이름은 이사람때부터 시작하는겨. 낫사우가문의 시작.은 두도.의 1093년.으로 보고. 

 

발람1세.의 아들 헨리.의 아들대에서 낫사우가 나뉘어.

  1. Walram II (c. 1220 – 24 January 1276)
  2. Otto I († between 3 May 1289)  

발람2세.와 오토1세. 발람 조. 와 오토 조. 로 이때부터 나뉘어. 

 

발람 낫사우.들이 바일부르크. 비스바덴.을 갖고오고. 오토 낫사우.가 위의 딜렌부르크. 지겐 Siegen 을 거점으로 남과 북으로 나뉘는거야. 

 

발람 낫사우.가 지금 나라 룩셈부르크 대공작.이야. 

 

오토 낫사우.에서 조용 윌리엄.의 오렌지 낫사우.가 나와. 이들이 지금 네덜란드 킹 핏줄인거고. 

 

 

René of Chalon (5 February 1519 – 15 July 1544), also known as Renatus of Chalon, was a Prince of Orange and stadtholder of HollandZeelandUtrecht and Gelre.  

 

침묵 조용 오렌지 윌리엄.이 오렌지(1533년생)가. 되고, 네덜란드에 등장하는 발판.이 사촌 형 샬롱의 르네.여. 이 르네.는 아빠가 조용 윌리엄 아빠의 형.이야. 조용 윌리엄 아빠는 낫사우에만 있는거고, 르네 아빠가 카를5세의 사령관 하면서 프랑스와의 이탈리아 전쟁시 저지대 전투들을 전담한겨. 이들의 아빠는 카를5세의 아빠 막시밀리언의 핵심이고. 이 낫사우가 2대에 걸쳐 합스부르크. 오른팔이야. 특히나 르네쪽. 이 자식 르네에게 카를이 네덜란드 지역의 스타트홀더 stadtholder 를 준거야. 저지대의 실질적인 로어드. 책임자야. 이 르네가 엄마로부터 받은 땅이 프랑스의 오렌지.야 그래서 오렌지의 프린스.인데. 나이 25세 에 죽어. 이때 사촌동생 조용 윌리엄이 11세야. 카톨릭으로 전향해서 내 땅 모두 받아라. 약속하고 죽어. 윌리엄은 아빠뜻대로 카톨릭으로 바꾸고 저 땅을 받는겨. 카를은 너 성인되서 스타트홀더 자리 주께 하는거고. 

 

그러면서 80년 전쟁이 터지고, 조용 윌리엄.이 네덜란드에서 스타트홀더 로 중심에 서고. 암살을 당해. 

 

이 조용 윌리엄.이 네번을 결혼 해. 두 여자는 죽고, 작센의 안나와는 이혼하고. 이전썰. 자식이 16명이야. 다 합법적 자식이야. 

 

조용 윌리엄.의 첫째 아들은, 스페인 코트에서 자라서 꼴통 카톨릭이 돼. 프로테스탄트  혐오해. 오렌지의 프린스는 받지만, 네덜란드에선 당연히 싫어하고 못 가고.

 

Maurice of Orange (DutchMaurits van OranjeGermanMoritz von Oranien; 14 November 1567 – 23 April 1625)  

 

다음이 모리스.여. 아빠 조용윌리엄이 1584년 암살 당할때, 17세야. 어려. 이때 들어오는 사람이 잉글랜드 레스터 백작 더들리.여. 더들리도 그냥 떠나고 그러다 1588 스페인 아르마다.를 잉글랜드가 격퇴하면서 부터 상황이 급반전 될때, 모리스가 다 커서 스타트홀더.를 하는거야. 12년 휴전을 하고, 30년 전쟁이 터진겨 이사람 말년에. 

 

라인팔츠그라프.인 헷세 프리드리히5세.가 모리스.의 조카야. 모리스.의 여동생.이 프리드리히5세 엄마야. 동복남매여 작센 안나.한테서 나온. 이혼당하고 작센 선제후 성에 갇혀서 밥만 받아먹고 죽어 모리스 남매의 엄마는. 

 

백산전투.에 패하고, 보헤미아 겨울 킹퀸 부부인 프리드리히5세.와 엘리자벳.이 모리스 가 있는 네덜란드로 가는겨. 이때 모리스.가 있던 코트.는 헤이그.야 Hague . 로테르담 위에 해변이야 여기가. 엘리자벳.은 임신한체 간겨 저길. 부부가. 남편 프리드리히5세의 외삼촌 땅으로. 신성로마제국 땅에는 발을 못디디게 칙령을 내렸어. 대륙에서 갈 곳이 저기 뿐인거였고. 

 

모리스.가 30년 전쟁이 터지고 7년 후인 1625년 에 죽어. 나이 58세. 헌데 이사람은 결혼을 안했어. 마가렛타.라는 귀족여자 인데, 애인이야. 헌데 이여잔 카톨릭이야. 그러면서도 자식 셋을 낳고, 이들은 후계권이 없어. 뒤에 네덜란드의 도시들 영주 자리들을 이어가긴 해.  또 다른 여인들 넷에 자식들이 있는데 다들 배스타드야. . 모리스.의 자리를. 이복동생.이 이어가는겨. 

 

Frederick Henry (DutchFrederik Hendrik; 29 January 1584 – 14 March 1647) was the sovereign prince of Orange and stadtholder of HollandZeelandUtrechtGueldersOverijssel in the Dutch Republic from 1625 until his death in 1647. The last seven years of his life he also was the stadtholder of Groningen (1640-1647).  

 

프레데릭 헨리.가 세번째.인데. 이사람은 엄마.가 콜리니.의 루이즈.야. 이여자도 조용윌리엄에 재혼자리인데. 이 루이즈 아빠가 콜리니.의 가스파르.야. 성 바르텔레미 학살 때 암살 당한 그 가스파르.이고, 저 미국땅 조지아 해변 개척 시작하는 가스파르의 부대들의 그 위그노이고. 해적 호킨스 만나서 배 받아서 감사해하는 위그노들 부대의 짱이었던. 

 

형을 이어받아서 80년 전쟁의 후반전인 30년 전쟁 대부분의  네덜란드 대표가 프레데릭.이야. 이사람이 30년 전쟁때 네덜란드 독립전쟁하면서 땅을 많이 회복한겨. 그리고 1646년 부터 협상에 들어간거야. 그러다가 죽은겨. 이 협상 마무리는 아들.이 하는거고. 이때 네덜란드 협상의 실재 배후가 프레데릭.의 부인.이야. 

 

Amalia of Solms-Braunfels (31 August 1602, Braunfels – 8 September 1675, The Hague), was Princess consort of Orange by marriage to Frederick Henry, Prince of Orange. She acted as the political adviser of her spouse during his reign, and acted as his de facto deputy and regent during his infirmity from 1640–47. She also served as chair of the regency council during the minority of her grandson William III, Prince of Orange from 1650 until 1672. She was the daughter of count John Albert I of Solms-Braunfels and countess Agnes of Sayn-Wittgenstein.  

 

졸음스 가문.의 아말리아. 헷세땅 작은 지역 졸음스.의 귀족 여자야. 이 여자가, 제임스 딸 엘리자벳.의 코트 레이디.인거야. 같이 보헤미아도 간겨. 그러다가 또 같이 헤이그도 간거고. 이 헤이그 에서. 18세 연상.인 프레데릭 을 만났는데. 모리스 가 조카 부부 보러 갈때 배다른 동생 프레데릭.도 같이 오는거야. 이때 프레데릭.이 아말리아.를 보면 완전히 바보가 된겨. 저때 아말리아.는 갓 스물이 안된거고, 프레데릭.은 사십바라보는 나이인데. 

 

아말리아 가  싫어해 프레데릭.을.  나 결혼안할래요. 찝쩍대지 마셔요. 모리스가 죽기전에 결혼을 성사시키고 죽는겨. 1625년. 그래서 아말리아 23세 프레데릭 41세 즈음에 결혼을 해. 

 

엘리자벳.이랑 신랑 프리드리히5세.는 완전히 객식구걸랑. 

 

While in exile Elizabeth produced eight more children, four boys and four girls. The last, Gustavus, was born on 2 January 1632 and baptised in the Cloister Church where two of his siblings who had died young, Louis and Charlotte, were buried. Later that same month, Frederick said farewell to Elizabeth and set out on a journey to join the King of Sweden on the battlefield.  

 

엘리자벳.이 헤이그 와서 망명중에 8명의 아이들을 낳아. 둘이 금슬이  좋은겨. 그러다가 스웨덴 킹 구스타부스 아돌푸스.가 들어올때 신랑이 같이 참전하러 가걸랑. 가서 병들어 죽고, 엘리자벳.은 먹지도 자지도 않았다는데. 

 

이 엘리자벳.의 레이디 코트 였던 여자 아말리아.가 안주인이 된겨. 망명지에서. 여자가 이쁘진 않은데, 먼가 자기주장 확실하면서 남들이 보기엔 무례하지만, 여기서의 먼가 매력이 절절한겨 이여자가. 헌데 엘리자벳과 이 사이가 갑자기 바뀐거걸랑. 아주 애매해져 버린건데.

 

영국에선, 엘리자벳.의 남동생 찰스1세.가 목짤려죽어. 1649. 30년 전쟁 끝나고. 올리버크롬웰 애들에게. 

 

Mary, Princess Royal (Mary Henrietta; 4 November 1631 – 24 December 1660) was Countess of Nassau by marriage to Prince William II, and co-regent for her son during his minority as Sovereign Prince of Orange from 1651 to 1660.  

 

아말리아와 프레데릭.의 아들인 오렌지 윌리엄2세. 와 결혼하는 여자가. 찰스1세의 딸 메리.여. 뒤 찰스2세.의 누나야. 

 

이게 애매해져 버린게, 아말리아.가 자기 아들 장가 보낸 제임스 집안의 여자 메리.가 시집올때는 1640년 이야. 그러다가 찰스1세가 죽어버린겨. 이때 네덜란드.는 막 프레데릭 죽고, 다큰 자식이 네덜란드 독립한 곳의 짱이걸랑. 며느리 집안이 이게 날라간거야. 엘리자벳.은 신랑 죽고, 더하여 자기 동생 죽고. 완전히 이 제임스 가문이 죽은거야 이게. 

 

아말리아.가 레이디 코트 였다가, 안주인이 되고, 엘리자벳.은 객이 된거야. 그래도 잉글랜드 킹은 자기 동생이고, 자기 조카딸도 와서 사돈이 되었는데 찰스1세.가 목이 짤려나갔어. 이후 10년 지나서야 찰스2세.가 복귀를 한겨 몽크 장군의 힘으로. 

 

엘리자벳.은 마침 베스트팔렌 조약 1648년 으로 헷세 복귀되서 가는거고 헷세에. 메리.는 네덜란드에서 걍 숨죽여 지내다가, 오빠 찰스2세.가 다시 킹에 오르면서 어깨 피는거고. 이 메리.와 윌리엄2세.의 자식이 잉글랜드 1688 명예혁명 하는 오렌지 윌리엄.이야. 엘리자벳 코트의 레이디.의 핏줄이. 영국의 킹이 되는겨 이게. 

 

저 아말리아.가 프레데릭 말년에 뮌스터 조약으로 스페인과 밀당하는데, 진짜 배후는 이 아말리아 인거야. 이때 아들은 갓 20넘어서리 혈기왕성 무조건 반대 해대지만, 각 지역의 짱들과의 투표로 스페인에게 남부를 주는걸 받아들여. 할때 이 아말리아. 가 스페인의 대화 상대인겨. 스페인 펠리페4세.가 벨기에 자기땅 튀른하우트 성을 줘. 

 

할때 저 오렌지들은, 오토 낫사우.의 오렌지의 네덜란드에 영국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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