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he House of Ardenne-Luxembourg, descended from Count Sigfried.
- The House of Ardenne-Verdun, with several Dukes of Lower Lotharingia, descended from Count Gozelin.
- The House of Ardenne-Bar, with several Dukes of Upper Lotharingia, descended from Frederick I, Duke of Upper Lorraine.
초대 라인팔츠그라프 위거릭 Wigeric.과 말더듬 루이의 외손녀 쿠니군다 Cunigunda 의 자식들이. 아르덴-룩셈부르크, 아르덴-베르됭. 아르덴-바 가문.을 만드는데.
- Gebhard (903–910)
- Reginar (910–915)
- Gilbert (915–939)
- Henry (939–940)
- Otto (942–944)
- Conrad (944–953)
- Bruno, Archbishop of Cologne (953–965)
가운데 로타링기아.의 듀크. 공작이야. 저건 동프랑키아 게르만킹.이 임명한겨. 서기 903년. 루이 차일드. 동쪽 카롤린지언 마지막핏줄이야. 서쪽엔 뚱땡이 샤를 나가고 로베르의 오도.가 잠시 있다가, 말더듬 루이의 막내 심플 샤를.을 서기 898년 나이 아홉에 다시 올린거걸랑. 이러면서 로타링기아.는 오른쪽 게르만이 다 갖고온겨 대머리 샤를이 반 나눈걸. 그리곤 루이차일드.가 첫 공작을 임명해. 겝하르트.는 프랑코니안 콘라트.고, 끊겨서 레지나르(Reginar), 길버트. 부자에게 갔다가 오토 조의 새잡이 헨리의 아빠 헨리.에 오토 방계.에 다시 프랑코니안 콘라트.에 간걸 반란해서 오토황제가 빼앗고 동생 브루노.에게 준건데.
이걸, 고지대 로타링기아.는 아르덴-바 가문의 프레데릭.에게 준거고, 저지대 로타링기아.는
Godfrey I (died 964) was the count of Hainault from 958 and margrave or vice-duke of Lower Lorraine from 959, when that duchy was divided by Duke Bruno, who remained duke until his death in 965.
에노백작 곳프리(갓프리)에게 줘. 대리인이여. 브루노.가 죽고 정식 공작. 듀크가 되는겨 서기 965년.에.
이 곳프리.는 아빠가, 위거릭이 갖고있던 라인팔츠그라프.를 이어 받았어. 샤를마뉴 핏줄이여 엄마쪽으로. 저지대 공작 곳프리.는 작센 오토.가 오토황제하러 이탈리아 정벌하러 갈때, 이탈리안 정체성의 마지막 킹 이브레아의 아달베르트Adalbert 를 몰아낼때 같이 간 사람이야. 이 이브레아의 아달베르트.는 수도원 가서 죽고, 자식은 부르고뉴 백작령에 입양되서 이 핏줄이 카스티야 레온의 우라카.에 시집가서 스페인이 부르고뉴 이브레아 가문이 잇는거고 이게 트라스타마라 가문 핏줄이 방계가 되고. 저 곳프리는 자식없이 죽어.
저지대공작.을 2대3대 했던 레지나르 가문 Reginar 이 다시 갖고 가는거야. 이 레지나르 가문.이 에노 Hainaut. 뢰번. 브뤼셀.을 만든거고, 브라반트.를 또한 만든 가문이야.
레지나르 가문.이 서기 880-1406 이고. 이 마지막 핏줄 여자.가 룩셈부르크.의 장님 요한, 하인리히7세 황제의 아들,로 보헤미아의 프레슬리미트 조. 마지막 여자와 결혼하고 보헤미아 킹.을 한. 이 요한의 아들과 결혼하면서 브라반트를 다우리로 갖고 가고. 그러면서 레지나르 가문 520년 이 끊기는거야. 저걸 받은 룩셈부르크.는 아르덴-룩셈부르크 가문의 지크프리트. 핏줄인거고, 이 룩셈부르크.도 지기스문트 황제에 딸이 합스부르크에 시집갔다가, 신랑이 게르만킹으로 오스만과 전쟁하러가서 죽고. 저 룩셈부르크 여자한테 부르고뉴의 현명공이 돈빌려 주고, 아예 야밤에 쫓아내서 룩셈부르크.를 갖고 오고 저 룩셈부르크도 끊기는겨.
이 레지나르 가문.이 만든 게 헷세.야
Henry I of Hesse "the Child" (German: Heinrich das Kind) (24 June 1244 – 21 December 1308) was the first Landgrave of Hesse. He was the son of Henry II, Duke of Brabant and Sophie of Thuringia.
헷세의 헨리. 아빠가 레지나르 브라반트 공작.이고. 엄마가 투링기아의 소피.야
The War of the Thuringen Succession (German: thüringisch-hessischer Erbfolgekrieg) (1247–1264) was a military conflict over a successor to the last Landgrave of Thuringia for control of the state of Thuringia (now in modern-day Germany).
투링기아. 란 곳은. 이전에 투링기안.이라는 올드스템.의 한 부락이여 저기가. 메로빈지언때 들어온거야. 그리고 이 투링기안.들은 지워져. 여기에 프랑코니안.들이 마인강 따라 올라오걸랑. 바로 위는 작센족이고. 11세기부터 엄마 소피.의 가문 Ludovingians 루도빈지언.이 2백년 있던겨 여길. 작센인지 프랑코니안인지 몰라 이 족보를. 헌데 엄마 소피.의 아빠가 죽은겨 아들 없이.
투링기아 오른쪽이, 마이센 후작령이야. Meissen. 여기에 이전 시집간 딸의 자식이랑, 헷세에 시집간 소피.의 레지나르 가문의 브라반트.랑 다투는겨 이걸. 그리고 이걸 반 나눠서, 왼쪽이 헷세.가 된거고. 이 아들 헨리.가 첫 헷세의 란트그라프. 영주가 되면서 헷세.가 시작하는거야. 이게 서기 1264년.이고 이게 종교전쟁 하는 헷세의 필립까지 250년 왔던거고.
The Chatti (also Chatthi or Catti) 이 헷세.는 카티족 들이 들어와 살았던거고, 이들은 베저강 따라서 올라온겨 여까지. 이게 서기 1264년 에야 헷세.란 이름을 갖는거야. 레지나르 헨리와 투링기아 소피.의 자식부터.
저건 먼말이냐면. 지금 헷세.에 투링기아.로 두개가 나뉜듯 보이지만. 저게 예전엔 하나의 투링기아였어. 여긴 마인강 하류에 라인강 접하는 지역 빼고, 저기는 걍 고원지대여. 지금 투링기아란 곳은 사방이 산이고, 이 왼쪽 헷세도 걍 산악지대여 여기가. 저긴 개발이 들 된 곳이야. 걍 산 골짜기에 띄엄 띄엄 마을에 수도원들 있던곳이야 저기가. 저걸 걍 소피네 가문 루도빈지언.이 느슨하게 갖고 있다가, 저때 오른쪽 마이센 이랑 나눈겨. 이 마이센.이 베틴 가문의 마이센이야. 얘들이 이때 투링기아를 갖고 와서 나중 작센 선제후가 되는거고 이 두 땅을 기반으로.
저걸 보면, 마르틴 루터. 종교전쟁 할때. 대표 주자가 작센과 헷세걸랑. 저게 여자들 핏줄로 원래 루도빈지언.이라는 소피 핏줄로 같은 둘 이야. 투링기아를 헷세란 이름으로 나눈거고 얘들이 이모들로 피가 같아.
레지나르 가문.이 헷세를 만든거고, 이들이 서기 880년에 시작해서 520년 갔는데. 이들이 만든 도시가 에스코강 아래의 에노, 브뤼셀. 뢰번. 브라반트. 인거야. 물론 고대로마때 도시들이지만, 중세에 다시 시작한게 이들 레지나르 가문인겨. 저 도시 지역 이름들은 이들이 만든거야. 에스코강과 뫼즈강 사이여 여기가.
레지나르 의 시작이, 원래는 로타르1세 황제 코트의 사람이었다가, 막내 대머리 샤를로 갈아타고, 대머리 샤를이 게르만루이와 870년 가운데를 나눌때, 뫼즈강이 리에주 지나서 림부르크 감싸서 플랑드르까지 갖고 가걸랑. 이때 플랑드르는 원래 플랑드르 가문이 있어. 에스꼬 강.위에. 이 아래의 땅을 뫼즈강 줄기따라 레지나르 가문에게 준거야.
오토 동생 브루노.가 저지대 공작.을 라인팔츠그라프.의 아들에게 주고, 레지나르 로부터 에노백작령도 빼앗아서 줘. 헌데 자식없이 바로죽어. 이걸 다시 오토 황제가 레지나르.가문에게 에노땅도 돌려주고, 저지대 공작.타이틀을 줘. 그러다가 이 타이틀이, 심플 샤를.의 아들 루이4세.의 자식에게 가. 왜냐면, 루이4세에 시집간 여자가 오토황제 여동생이걸랑. 여기서 낳은 아들이 로타르.에 저지대공작 샤를.이야. 이 샤를의 아들에게 저지대 공작이 갔다가 끊겨서,
요게 아르덴-베르됭.의 고젤린 핏줄로 오는겨.
Gothelo (or Gozelo) (c. 967 – 19 April 1044), called the Great, was the duke of Lower Lorraine from 1023 and of Upper Lorraine from 1033.
고젤린.의 증손자. 3대째인데. 저 사이에 저지대 공작은 팔츠그라프아들. 레지나르. 샤를부자.였다가 이 고델로.에게 저지대 공작력이 온거고. 고지대 공작령.은 아드렌-바.의 프레데릭 핏줄이 끊겨서 또한 고델로.가 갖고와. 얘가 그래서 그레이트 타이틀을 쥐어. 이사람 죽고.는 황제는 살리안조.의 하인리히3세.여. 저 아르덴-바 와 아르덴-베르됭.의 로타링기아 공작 합친 가문은 작센 오토와 끈끈한 애들인겨. 저게 덩치가 커. 이걸 고델로의 장남에게 다 못줘.
Godfrey III[1] (c. 997–1069), called the Bearded, was the eldest son of Gothelo I, Duke of Upper and Lower Lorraine. By inheritance, he was Count of Verdun and he became Margrave of Antwerp as a vassal of the Duke of Lower Lorraine. The Holy Roman Emperor Henry III authorized him to succeed his father as Duke of Upper Lorraine in 1044, but refused him the ducal title in Lower Lorraine, for he feared the power of a united duchy. Instead Henry threatened to appoint a younger son, Gothelo, as Duke in Lower Lorraine. At a much later date, Godfrey became Duke of Lower Lorraine, but he had lost the upper duchy by that point in time.
장남이 턱수염 곳프리.인데. 아 얘 음청나. 하인리히3세.가 형에게 고지대 로렌. 동생에게 저지대 로렌.을 나눠주도록 해. 동생이 1046년.에 죽어. 이 저지대를 아르덴-룩셈부르크 가문에게 줘. 저 턱수염 곳프리.가 저지대 로렌도 자기꺼라며 쳐들어가는겨.
Adalbert (1000 – 11 November 1048 in Thuin) was the Duke of Upper Lorraine from 1047 until his death the next year. He was the first son of Gerard de Bouzonville (Gerhard), Count of Metz, and Gisela (Gisella), possibly a daughter of Theodoric I, Duke of Upper Lorraine.
황제가 고지대 로렌 공작 타이틀.마저 빼앗아서, 메스 Metz 의 아달베르.에게 준겨. 서기 1047년. 바로 준거야 이게. 엄마가 위그카페.의 누나이기도 해. 위그 카페.도 엄마가 오토황제의 누나야.
아달베르.가 고지대 로렌.의 공작이 되고, 턱수염 곳프리.와 전투하다가 죽어 자식없이. 동생이 고지대 로렌. 공작을 이어가
이게 서기 1047년 아달베르.부터 시작하는 메스 가문.의 로렌이야. 서기 1431까지 4백년. 이 마지막 여자 이사벨라.가 시집가는 곳이 나폴리 앙주의 르네.여. 조안나1세 죽고, 아비뇽과 로마 교황정 스키즘에 교황끼리 싸우고, 나폴리 킹들 서로 내세우고, 아빠 루이2세.는 다시 나가고, 이어 조안나2세.가 루이2세의 아들 르네 에게 줬지만, 약혼자 코스프레함시 옆 시칠리아의 아라곤 알폰소가 나폴리갖고 르네는 쫓겨나도 앙주에 바에 로렌에 프로방스 공작이야. 아 복을 을매나 받아쳐먹었으믄.
할때, 4백년 메스 가문에. 여자로 이은 앙주의 로렌.에 여기서의 딸이, 보데몽의 르네.에게 시집가면서. 로렌가문.이 시작하는겨. 이게 1474년부터 3백년 가는거고. 아달베르로 시작한 메스.가 로렌가문 이름까지 7백년 이상 가는겨 이게.
메스.의 아달베르가 받는 서기 1047년 부터. 고지대 저지대 로타링기아 는 사라지고, 로렌.이란 이름으로 고지대에 남은거고.
저 턱수염 곳프리.는 저지대 먹으려다 고지대 로렌도 뺏기고도, 10년을 저기서 황제를 적으로 두고 전쟁질 하는겨. 저걸 진압하는 세력이, 아달베르의 메스 가문이고, 플랑드르 가문이야.
Beatrice of Bar (also Beatrix) (c. 1020 – 18 April 1076) was a stateswoman and marchioness of Tuscany by marriage to Boniface III of Tuscany, and Regent of Tuscany from 1052 until her death during the minority of and in co-regency with her daughter Matilda. She was the daughter of Frederick II, Duke of Upper Lorraine, count of Bar, and Matilda of Swabia. She was married first to Boniface III of Tuscany and later to Godfrey of Lotharingia.
이 턱수염 곳프리.가 첫부인이 죽고, 재혼한 여자가, 바, 백작.의 베아트리스.여. 첫 시집간 곳이, 카놋사의 베아티리쵸.야 이 사람이 토스카나.의 마크 후작으로 임명된거고, 여기서 나온 딸이 유명한 마틸다.야, 카놋사의 마틸다.
신랑이 죽고, 저 턱수염 곳프리와 재혼을 한겨. 곳프리가 10년을 저기서 전쟁질하다가, 이리 도망을 와 마누라 땅으로.
특히나 말야, 이때 교황이, 저 턱수염 곳프리의 동생이야.
In 1057, Godfrey was exiled to Tuscany, where he joined Beatrice and co-governed with her. He was enfeoffed with the Duchy of Spoleto (1057) by Pope Stephen IX, his brother. In January 1058, Leo de Benedicto Christiano threw open the city gates to him and Beatrice after the election of Pope Nicholas II. Possessing the Tiber and assaulting the Lateran, Godfrey succeeded in expelling the antipope Benedict X on 24 January. During the papal reign of his brother and his brother's reforming successors, he played an important role in the politics of central and northern Italy, including Sardinia, where he interfered on behalf of Barisone I of Logudoro against the Republic of Pisa, indicating his authority over both.
서기 1057년. 이게 동서교회분리 하고 3년이 지난겨. 1054년 서로 파문장 날리는게, 마침 로마는 교황이 죽고 자리가 빌때 이 일이 감정적으로 터진거걸랑. 이들이 바로 화합을 시도해. 저때 막 서기 999년 부터 노르만이 들어와서 아래 롱고바르디의 베네벤토를 내몰때걸랑. 나폴리는 아직 멀었어 저때.
저 교황 스테파누스9세.가 곳프리 동생이야. 이사람이 노르만들 나가유 하면서 나름 교회개혁 하려는 사람이걸랑. 곳프리가 동생 교황으로 부터 스폴레토 도 받은겨. 형이랑 같이 먼가 하려한겨 좋게보믄. 체사레 보르자 교황 부자의 선배님격인겨 이게. 이 동생 교황이 곳프리를 신성로마황제로 만들려고 햇어. 고프리가 그냥 깡다구가 아니었던거지. 바로 동생 교황이 죽고. 저 곳프리 나이가 60이 넘었어 저때. 새 교황이 니콜라스 2세.야 이사람이 추기경들만의 선거제도.를 다시 만든 사람이잖오. 요때 안티교황 티나오고 이걸 진압하는걸 곳프리가 해. 니콜라스2세.가 나름 역사에 남은 교황이 된게 저 형제인 교황과 곳프리 라는거야 이게.
황제 하인리히3세.가 죽고. 교황이 자기편이야. 저때 교황과 황제는 아주 불편할 때야. 하인리히 4세는 어리고, 작센족 반란하는 분위기여. 곳프리가 저지대 로렌.공작을 다시 받아. 즉 이전 고지대는 이미 메스 가문이 갖고 갔고. 저지대 공작령은 룩셈부르크에 갔던걸 다시 받아.
- Godfrey, succeeded him in Lower Lorraine
- Ida of Lorraine, married Eustace II, Count of Boulogne[2]
- Wiltrude, married Adalbert of Calw
턱수염 곳프리.가 둘째부인과는 자식이 없고. 첫부인과의 자식.이 곱추 곳프리.에 로렌의 이다.Ida 라는 딸이야.
둘째부인 베아트리스.와는 자식이 없어. 이 베아트리스.가 카놋사.와의 자식이 마틸다.야.
곱추 곳프리 저지대 로렌 공작.과 마틸다.가 결혼을 하는겨. 남매 사이지만, 피가 전혀 섞이지 않은 남매야. 마틸다가 결혼하고 바로 와. 그리곤 카놋사의 마틸다 가 되어서, 교황 그레고리를 품어주고 하인리히4세황제를 카놋사 굴욕시키는건데.
저 턱수염 곳프리의 전부인과의 딸 로렌의 이다.가 시집가는 곳이, 불론뉴의 유스타스2세.야. 이 불론뉴.는 플랑드르가문.이야.
여기서 나온 자식 둘.이 십자군 가서 예루살렘 킹.을 하는 부용.의 곳프리.고 볼드윈 1세.인겨.
저 이후, 백년 지나서 십자군 4차때 비잔틴을 치러가서 발칸에 라틴제국을 세울때도, 여기 첫 황제가 저 플랑드르.여 여기도 볼드윈.이고. 저 플랑드르.의 큰 가지가 불론뉴.이고.
카놋사.의 마틸다.가 중세 최고의 여장부야. 이여자가 또한 십자군때 갈라고 했걸랑. 헌데. 저 부용의 곳프리.와 불론뉴의 볼드윈.이 간다고 해서, 안간거야 이여자가, 피는 안섞이고, 엄마가 재혼해서 간 집안의 자식들의 자식들이잖어. 숙모 조카뻘 사이걸랑. 특히나 곱추 곳프리의 인상이 안좋아서 기억에. 얜 맨날 돌아와줘 마틸다 랄지하고.
십자군 1차에서, 예루살렘 킹 타이틀을 동생 블론뉴.의 볼드윈.이 에뎃사 백작 겸하면서 첫 킹 타이틀이었지만, 시작은 부용의 곳프리.야. 이 곳프리.를 첫 킹.으로 보지 않걸랑. 자기는 그 타이틀을 받을 수 없다며. 그냥 수호자 디펜더.니. 프린켑스. 둑스. 주민번호 1번. 지배자 추장. 어떤게 정확한지는 몰라. 이사람이 죽고 동생 볼드윈.이 정식 예루살렘 킹.인데.
저때 예루살렘성을 정복할때까지, 사람들의 민심을 얻은게 이 부용의 곳프리.야.
저기서 툴루즈 가문.의 레이몬드.가 원래 돈도 제일 많고, 가장 최고의 사람이 이 레이몬드여. 헌데 사람들은 오히려 부용의 곳프리를 좋아하고 이사람을 추천을 한거야. 말로는 레이몬드가 사양했다고 하지만, 저 분위기에 삐쳐서 나가고, 트리폴리.를 취한건데.
저 부용의 곳프리.와 불론뉴의 볼드윈.이 턱수염 곳프리.의 전처 자식에 카놋사의 마틸다.와도 저리 엮이는건데.
즉 저 곳프리.가 아르덴-베르됭.의 곳프리고. 저 아르덴. Ardenne 이란건, 지금 벨기에의 룩셈부르크 주.가 이게 고원지대여. 이 주 자체를 아르덴.지역이라 보면 돼. 여기서 자우어 Sauer 강이 발원해서 오른쪽 나라 룩셈부르크.로 수평하게 흘러가면서 트리어의 모젤강과 만나는거고.
곳프리 Godfrey 갓프리 곳프리트 란 이름이 저기 졸 많은데. 프레이 가 프레데릭.의 프리드 Friden 프리덴 프리데. 라는 Peace 평화.야. 프레데렉.인 평화의 지배자고. 갓 프리.는 신의 평화.이고. 좋은 이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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