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쟁은 훗사이트 들에서 시작했지만, 여기에 서유럽의 많은 이야기가 응축이 된 거걸랑 대체 저 보헤미아가 머길래 유럽의 중심이 저때 되어버렸냐는 건데. 저건 말야, 중세 대학 이라는 유니버시티.의 등장이야.
이 유럽이란건, 저 유니버시티.라는 종합대학 이 만든거야.
볼로냐 대학 1088부터 시작해서, 파리, 옥스포드 케임브리지. 스페인땅에도 팔렌시아 살라망카 대학들이 바로 들어서 포르투갈에도 코임브라 대학이 서고 아일랜드 더블린 대학이 1320년.이야
프라하에 카를로바 대학.이 1348년이야. 28번째 대학이야. 오스트리아 비엔나 1365년. 독일땅 최초 투링기아의 에르푸르트 대학. 마르틴 루터 졸업학교가 1379년.이야 35번째. 이전에 폴란드 크라크푸 대학. 헝가리 페츠 대학 이 들어선겨 에르푸르트보다 먼저.
저 대학들이 이탈리아에 줄줄이 들어서지만, 특히나 스페인땅에 저 대학들이 많이 들어서. 저 유니버시티 라 하는건, 모든 영지인들에게 개방이 된겨 저건. 이건 정말 위대한거야. 저걸로 유럽의 리터러쳐 가 서로들 구석구석 전달이 된겨.
유럽이란건 하이미디벌 에 만들어진건데. 서기 1000년-1250년. 교회권력과 세속권력의 전쟁중에 완전히 끓어오른거야. 마당은 이 교회와 세속의 분쟁이 제공을 한거고 말야. 12세기에 특히나, 서유럽진영에선 잊혀진 고대 그리스 로마.의 리터러쳐.가 등장하는거야. 비잔틴은 이걸 꼭 감추고 있었어. 저 발칸산객과 로도피즈 산맥에 릴라 산 사이에서 움추리기만 하고, 바다로 가려진 저기가 서유럽엔 먼 곳이야. 더하여 그리스도 조차 익히기 버거운데 하물며 고대 그리스 로마를 들춰 낼 의지도 약한거야. 이게 십자군 가면서 저길 드나들며 알게 되고 갖고 오는거고, 무슬림 스페인에서 무슬림들이 갖고 있던 고대 그리스 로마 주석서들을 레콩퀴스타 하면서 확보하는겨 이게.
Alfonso VI (c. 1040/1041[a] – 1 July 1109[2]), nicknamed the Brave (El Bravo) or the Valiant, was king of León (1065–1072)[3] and of Galicia (1071–1109),[b] and then king of the reunited Castile and León (1072–1109).
After the conquest of Toledo in 1085, Alfonso proclaimed himself victoriosissimo rege in Toleto, et in Hispania et Gallecia (most victorious king of Toledo, and of Hispania and Galicia)[5]
알폰소 6세.가 서기 1085년.에 톨레도.를 점령해. 이건 큰 전투로 갖고 온게 아냐. 지속적 게릴라전에 평화조약하면서 얻어낸거야. 이 톨레도.가 비지고쓰족의 수도였어. 가장 상징적인 자리야 이게. 이 톨레도.를 갖고 오면서, 저때 처음으로 히스파니아 와 갈레시아의 킹. 선언을 한겨. 톨레도 의 킹 과 함께.
코르도바 는 저 이후 2백년 지나서 갖고오는겨. 저때 저기에 슬람이들이 갖고 있던 그리스 로마 서적에 주석단 책들이 코트에 남아있는거야.
1088년 부터의 볼로냐 대학 에서 시작하는 유니버시티 라는건 말야. 저 그리스 로마 책들을 번역하기 위함이야. 모든 영지인들을 불러야해. 12세기는 번역의 시대야 이게.
Latin translations of the 12th century were spurred by a major search by European scholars for new learning unavailable in western Europe at the time; their search led them to areas of southern Europe, particularly in central Spain and Sicily, which recently had come under Christian rule following their reconquest in the late 11th century.
12세기 라틴어 번역들. 유럽 르네상스 는 12세기부터인겨. 이건 1085년 톨레도 에서 시작하는거야. 이거 글들이 이상해. 이거 머지? 여러분, 번역하러 오세요~~. 모든 영지인들에게 개방합니다~~. 실력 있고 재능있는 사람들좀 보내주세요~~.
십자군 레반트 드나들면서 비잔틴 지나면서 갖고 오고. 비잔틴 콘스탄티노플 1453년 함락될때 직전에 저걸 다 갖고 온겨 이탈리아로 저 리터러쳐를. 비잔틴이 끌어안고 있던걸, 유니버시티 들에서 유럽 전지역으로 뿌린거야.
저때 또 하필 구텐베르크.가 막 무버블 타입의 인쇄기 만든 직후야. 번역한걸 유럽 전역에 뿌리는겨 또한.
지나보면 참 모든게 드라마틱한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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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걸 교황이 차터 주는거야 저걸. 신성로마 황제는 자기땅에서 차터주면서 3백년이 지나서야 저걸 하기 시작한겨 신성로마땅은. 이걸 적극적으로 한게 또한 브리튼 땅 잉글랜드고, 잉글랜드는 아일랜드 더블린에도 이걸 만들어. 스콧이 늦어 오히려. 앤드류 대학 글래스고 대학이 15세기에나 들어서, 더블린이 2백년 빨라. 아일랜드 리터러쳐는 이 더블린에서 나오는거고.
쟤들은 교회와 세속이 다툼하면서도, 저런 걸 하면서 해. 동시에. 그 와중에 교회가 맞니 세속이 맞니 논쟁 붙고.
아, 저런 장면이 눈에 그려지는 건, 정말 환상적이야. 쟤들만 저렇게 살아온거야. 아시아는 하렘놀이 창녀 놀이 환관놀이 적폐놀이 하면서 죽어있을때. 평화가 경제지. 지들만의 평화지. 에도도 마찬가지야. 도쿠가와 애들만의 평화였지. 저 조선찬양하는 애가 하는말이 기억이 나네. 메이지가 일본을 망쳤슈!! 에도의 의 다양함의 문화를 메이지애들이 획일적으로 묶으면서 일본은 잘못된거유!! 찬란한 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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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게 똑같은 논리였어. 막부애들이 양키애들 앞에서 부르짖걸랑. 야 세상에 우리 도쿠가와 막부가 평화롭게 잘 헤쳐먹고 살고있는데 니덜이 먼데 간섭하느냐 우리한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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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유니버시티 들로 말이지, 유럽 지식인들이 서로 활발히 섞이는거야. 유럽의 모든 인간들은 이 유니버시티.가 만든거야. 모든 리터러쳐.는 저 유니버시티 에서 나온거야 저기의 리터러쳐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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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 대학.이라는. 카를로바 대학은 1348년.이야. 라인강 동쪽에서 이게 최초야. 28번째 유니버시티.인데. 얀 후스.가 여기서 나올 수 밖에 없던겨 이게. 마르틴 루터 는 아주 똑같은 얀후스.의 버전 투. 일뿐이야. 이야기가 아주 똑같아. 단지, 얀후스.는 지켜줄 세속권력이 없었고, 마르틴 루터.는 지켜줄 영주가 있었을 뿐이야. 마르틴 루터.가 보헤미아 가서 놀래. 아니 왜 내 얘기를 여기서 먼저 하고 있는겨 이거? 내 우대한 이론이 이 프라하 촌동네에서 모두가 이미 알고있는겨 이거. 이거 대체 멈둥?
카를로바. 찰스.여. 카를. 저게 룩셈부르크 카를4세 황제.가 보헤미아 킹 게르만의 킹.일때 만든 대학이여 황제 전에. 이 사람 아들이 지기스문트 황제이고.
얀 후스.는 잉글랜드의 존 위클리프.를 빼놓고는 말할 수 없어. 존 위클리프.를 알았기 때문에, 얀 후스.가 있게 된거야.
얀 후스.는 농민 출신이야. 이사람 태생을 몰라. 단지 열살 즈음에 수도원에 들어가서, 프라하 도서권 사서.를 하다가 프라하 대학에 입학해서 학위를 딴 정도야 어린 시절 밝혀진건. 먹고 살게 없으면, 아이들을 수도원 수녀원에 보내는겨. 오히려 저기서 공부를 할 수 있게 된 거고.
Jan Hus, born Jan Husinec (/hʊs/; Czech: [ˈjan ˈɦus] c. 1372 – 6 July 1415)
John Wycliffe (/ˈwɪklɪf/; also spelled Wyclif, Wycliff, Wiclef, Wicliffe, Wickliffe; c. 1320s – 31 December 1384)
존 위클리프.가 60대인 1384년.에 죽어. 요크셔에서 태어나서, 레체스터셔. 런던 위. 여기 주교였어. 여기서 죽어. 존 위클리프 죽기 12년 전에 태어났어 얀후스는. 존 위클리프.의 글들을 프라하 대학에서 본거야 얀 후스.가.
얀 후스.는 존 위클리프.의 카피본이야.
존 위클리프.는 백년전쟁 때의 사람이야. 백년전쟁 1337-1453. 이걸 깔고 봐야 해 이때의 유럽 이야긴. 그리고 저때 동쪽에선 칭기스칸의 아이들이 갖고온 유럽 흑사병 이야. 1347-1351.
존 위클리프.는 청년 시절을 흑사병과 백년전쟁의 한 가운데서 보낸겨. 더하여
The St Scholastica Day riot took place in Oxford, England, on 10 February 1355. The disturbance began when two students from the university complained about the quality of wine served to them in the Swindlestock Tavern, which was based at Carfax, in the centre of the town. there were some reports of clerics being scalped. Around 30 townsfolk were killed, as were up to 63 members of the university.
옥스포드 에서. 서기 1355년.에 성 스콜라스티카 일 폭동. 3일간 벌어진 싸움인데, 옥스포드 대학에 마을 주점에서, 학생들이 먹은 와인 맛이 불량하다면서 시비가 붙어. 학생들 과 주민들 의 전쟁이 된겨. 주민들이 학교로 처들어도 가고. 이때 63명의 학생들이 죽고, 30명 주민들이 죽어. 요때 존 위클리프.가 아마 학부생 졸업반으로 보여. 저때 스캘핑.도 있었다는 보고서도 보여. 저건 머리 가죽 벗기는겨.
대학교가 들어서고, 그 대학교 주위에 마을들이 들어서면서 이게 웃기게도 학생과 주민간의 다툼이 생겨. 이전에 역시나 주민들의 집단 다구리로 옥스포드 학생이 맞아 죽어. 이 옥스포드 가 싫어서 이때 나온 사람들이 만든 대학이 케임브리지 대학이야. 그리고 이 두 대학은 또 서로들 웬수가 되는거고. 이게 지금까지 경쟁으로 이어져 오는건데.
"Very gloomy views in regard to the condition and prospects of the human race."
존위클리프.는 그래서, 인간에 대한 기본 본성과 전망에 대해, 아주 음울한 비관론자야. 시대가 그럴 수 밖에 없는거야.
Wycliffe completed his arts degree at Merton College as a junior fellow in 1356
He was Master of Balliol College in 1361 In 1369
Wycliffe obtained a bachelor's degree in theology, and his doctorate in 1372
존 위클리프.는 넉넉한 집안 출생이야. 옥스포드의 머튼 칼리지.를 이수하고. 유니버시티.를 졸업하면 받는게 배철러.야. bachelor. 마스터.는 더 전문적인거고. 대게 마스터.를 따면 교사 설교 자격증이 생겨. 닥터.는 박사야. 신학에서 또한 배철러. 학사.와 닥터. 박사를 받아.
배철러.라는건 Alteration of baccalārius, influenced by Latin bacca ("berry") and laurea ("laurel") 바카 라우레아. 바카.가 베리. 라는건 짝은 열매.인거고. 라우레아.가 로렐. 이라는 월계수.야. 이 월계수.는 검은 짝은 열매들이 열리는거고. 이 월계수 잎으로 향을 만들고. 로레알 하는기고. 저게 고대 로마때 가장 영광스러운 관.이야. 무엇보다 자기 동료를 전선에서 구한 자.를 저 월계관을 씌워줘. 이게 쟤들 전통이야. 그래서 미국애들도, 무엇보다 자기 동료 구하는걸 최우선시 하는거고. 자기 국민 구하는게 최우선이고. 조선 과는 아주 다른 특이한 종족이 된거지. 조선은 도망나온 38년 만에, 노예도 잡아서 도로 잡아 보내는 애들 이잖니. 이 피가 그대로 이어져서, 북조선을 탈출 한 사람도 살인자 라며 돌려보내잖니. 저게 조선의 피라서 그러는거야. 이 조선 애들은 참 특이하게도 기괴해 이게. 저럼 또 어머 참 잘 돌려보냈어요 넘 무셔 무셔. ㅋㅋㅋ.
참 싕기해.
baccalauréat 바칼로레아.라는 프랑스 대입시험이. 똑같아. 바칼라리우스.라는 바카 라우레아.를 얻기 위한 입학 시험인겨.
In 1374, he received the crown living of St Mary's Church, Lutterworth in Leicestershire,[17] which he retained until his death.
이 사람은 신학 닥터.가 되고 바로 레체스터셔.의 러터워쓰.에서 주교.가 되고. 이후 10년 동안 죽을때 까지 여기 주교.로 죽어.
존 위클리프.는 잉글랜드 교회진영의 핵심이야. 캔터베리 대주교.가 서임받아서 들어가는 서임식에 가장 먼저 앞에서 들어갔던 사람인겨.
헌데. 저때가 말야. 아비뇽 교황정 1309.에 로마교황정 갈라서는 스키즘 1378-1417.의 110년간의 기간이야.
존 위클리프.는 아비뇽교황정 의 시기 후반과, 아비뇽 과 로마 교황정이 갈라선 초기에 죽었어.
백년전쟁 시작 1337년. 이란건. 로마 교황이 무서워서 프랑스 쪽 아비뇽에 기들어간 1309년 이후 발생한겨. 이때 프랑스는 잉글랜드랑 전쟁하느라 정신 없을때고, 이때 교황은 언제나 프랑스 편을 들었고 기들어가서 더 프랑스 편 드는거고. 이 프랑스와 교황의 사이가 이게 웃긴겨. 이 교황애들은 프랑스애들한테 늙은 교황이 싸다구를 쳐맞고 죽었어도 프랑스를 절대 못버리는겨. 이 둘 사이가 아주 웃겨 이게. 그러면서 계속 세속 권력 특히나 황제권력을 갖고 논거야. 또한 말이지, 잉글랜드가 교황의 밥이야. 이전 썰.
존 위클리프.가 주교 되기 이전에도 교회진영에서 무시못할 존재야. 이 사람이 가장 어이없어 하는게, 교황의 세속화야. 대체 교회가 왜 세속을 갖고 노는거고, 대체 교회가 왜 세속의 땅 부자여야 하고, 왜 교회가 돈이 많아야 하는가?
이사람때는 이미 레반트 십자군 시대는 끝났어. 교회의 선동놀이는 끝난겨. 그래도 교회가 최곤줄 알았다가, 하늘에서 내려온 프랑스 애들이 하도 어이없어서 직접 애들 보내서 교황을 줘 패서 죽였걸랑. 그래도 이 뻔뻔함은 엄청난거야 이 교황쪽은. 이 교황쪽의 생존력이란건 정말 어마무시해. 바로 기들어가 오히려 프랑스로 아비뇽으로. 그리고선 또 세속의 주인행세를 하는겨. 신성로마를 대상으로, 또 한, 저 만만한 잉글랜드. 잉글랜드 교회 시작 캔터베리.와 요크.는 로마 가 시작했다는 뻣댐이 강하걸랑. 이 명분 하나야. 헨리2세가 하도 어이없어서 토마스 베킷.을 죽여 애들 시켜서. 이게 역풍이 불어서 킹이 완전히 고개 숙였걸랑.
교황의 힘이, 신성로마진영과 이 잉글랜드에 어마무시한겨 이게. 십자군레반트.의 2백년이 아코 함락으로 완벽히 실패했음에도 여전한겨. 프랑스는 자기들이 농락당한걸 알고 교황을 주패서 무릎을 꿇렸어. 헌데 그런 교황이 오히려 프랑스 킹에 달라붙어서, 신성로마와 잉글랜드를 갖고 노는겨 여전히.
이게, 세속에서 또한 진영이 갈리는거야. 교회에서도 킹파.와 교황파.로 나뉘는겨.
더 웃긴건 말야. 1378년 부터 시작하는 아비뇽과 로마의 분쟁이야. 교회진영이 또 둘로 나뉜거야. 아비뇽파 로마파. 서로 교황이 들어서고. 서로 안티교황이라 삿대질하고. 존 위클리프.는 1384년에 죽어. 막 스키즘 되었을때 죽은겨. 존 위클리프.는 교황과 세속의 대립의 한가운데 있었고. 얀 후스.가 저 스키즘 시절을 살았던 사람이야.
아비뇽과 로마 교황들이 분쟁하면, 또한 말야, 세속의 교회진영도 아비뇽파 로마파.로 나뉘는겨 이게. 여기서 세속군주.는 아비뇽에 서야 하나 로마에 서야 하나 이게 헷갈려지는거고. 얀 후스.는 정확하게 저 스키즘 한가운데의 사람이야. 얀후스.의 죽음.이 스키즘을 마무리하는겨. 얀 후스.가 죽고서 아비뇽교황정과 라틴교회분리. 총 110년.이 마무리가 되는겨.
존 위클리프.와 얀 후스.는 저 두시대의 각각의 사람인겨 이게. 얀 후스의 시대가 더 혼란스러운거고 교회가 더욱 더 추악해 보이는겨 얀 후스때의 세속과 교회 사람들에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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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게 유럽 대륙에서, 계속 말하는 거지만, 서기 756년 부터 시작한 교황령에서 이 교황이 비잔틴 교회진영과 비교되는 너무나 절박한 상황에서 자기 로마 진영을 넓히기 위한 과정의 연속이야. 지저스의 베드로의 교회의 본산.이라는 창대하고도 창대한 비전에 비해 세력은 너무나 미약한겨. 이 완벽한 괴리감.이 말도 안되는 교황의 억지와 또한 말도 안되는 힘을 낳은거야. 이건 아무도 못해 이런 뻔뻔한 짓은. 저런 완벽한 어긋남이기 때문에 가능한거야.
꿈은 그래서 크게 갖는겨. 교황을 보고 내가 느끼는겨. 꿈을 크게 갖아. 그리고 그 꿈을 믿어. 이땐 믿음의 함수값을 극도로 갖아. 나무아미타불 염불하듯이 니 꿈을 믿어. 그러다 보면 너가 교황이 될 수가 잇어 ㅋㅋㅋ.
진짜 말이야, 지금 세상의 교회.는 저 말도 안되는 어긋남.의 절박한 분발.에서 지금 세상의 로마교회가 만들어진거야 이건. 나만의 진단이지만, 탁월한 진단이야.
저게 성과를 거두기 시작한게. 레반트 십자군 발기하고, 1차 성공해서 이 기세로 얻은게 1107년 런던 협약이야. 잉글랜드 헨리1세.한테서 서임권을 뺏은겨. 그리고 1122년 보름스 협약이야. 신성로마 하인리히5세한테서 드디어 뺏은겨.
교황쪽은 그야말로 짧게는 756년 교황령 에서 350년. 길게는 수도를 밀라노로 옮긴 286년 부터 로마가 버려졌걸랑. 7백여년만에 교회의 이름으로 교황이 서유럽에서 라인강 동쪽과 잉글랜드 땅의 교회를 다 가진겨 이게. 너무 좋아 미쳐서리 난리 부르스 를 추었을거야 저때. 저건 그야말로 이빨.로만 얻은 땅이고 부.야. 세상에 이런 건 있었던 적이 없어. 칼안들고 저리 세력을 넓인건 저게 처음이야. 그리고 세계대전이야. 식민지 나라들이, 공짜로 자기 땅을 받은겨. 유럽애들이 승전국이 그냥 줬어. 저걸 너무나 당연시 하는데 소위 해방된 땅빠닥에서.
고마운줄 알어 고마운줄.
그러면서 터진게 대륙에서 카타르 부데스 프라티첼리야. 13세기부터. 교회진영에서도 말들이 나와. 어떻게 우리 교회가 세속의 것을 저리 소유하는가. 저때 등장하는게 잉글랜드의 오컴.인거지만.
잉글랜드 안에서도 저 문제가 심각한겨. 잉글랜드 영주들도 부들부들 떨어 백년전쟁 와중에.
이때 교회진영에서 세속편을 든 사람이 존 위클리프.야.
이때 세속 군주 입장의 대변자.가 곤트의 존.이야. 랭카스터 공작.의 시작. 에드워드 3세의 아들. 나중 여기서 튜더 를 시작하는 헨리7세가 이 핏줄에서 나와. 이 아들 헨리 8세.가 앤 불린.에 의해 앵글리카니즘.을 만들어. 헨리8세가 꼴통 카톨릭이었지만, 앤 불린을 죽이고서도 앵글리칸이즘을 할 수 있었던 깨달음은, 자기의 선조인 곤트의 존.인겨 이게.
교황이 제일 싫어하는게 그래서 잉글랜드의 존 위클리프.가 되는겨. 파문장을 날려. 킹 에드워드가 전달을 안해.
Wycliffe had come to regard the scriptures as the only reliable guide to the truth about God, and maintained that all Christians should rely on the Bible rather than on the teachings of popes and clerics. He said that there was no scriptural justification for the papacy.[23]
위클리프.가 교회 주교이면서도, 교회개혁을 주장하는겨. 시모니 하지 말라. 인덜전스 하지 말라. annates 에네트. 에네이트. 주교가 취임하면 그 아래 성직자들과 세속에서 돈을 바쳐. 주교는 또 교황에게 돈을 바쳐. 대체 이게 먼짓이냐 말야. 이런거 하지말자.
성경.으로 돌아가자.
교회권력에서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이. 저놈의 성경으로 돌아가자. 성경에 충실하자.인겨. 저 말의 속 뜻은. 교회가지 마세요.인겨. 걍 집에서 성경보세요. 이게 또한 루터의 솔라피데.야.
저걸 주교이자, 신학 박사인 존 위클리프.가 떠드는거야.
그럴려면 이사람은 멀 하겠어? 성경 번역을 하는겨. 민들이 이해하기 쉽게. 라틴어는 지배계급만이 이해하는 언어걸랑. 그 글자는. 민들의 버내큘러. 구어로 된 글자로 성경 번역을 하는겨.
로망스 언어족이 자리잡고, 게르만도 게르만언어가 자리잡으면서, 성경 번역은 루터 이전에도 있어왔어.
하물며 말이지, 고쓰족이 이동하기 전인 4세기에 저 동고쓰족에서 고쓰어로 고쓰글자로 성서번역을 했어. 이 게르만애들이 들여다 보면 엄청난겨 이게. 올드 이탤릭 글자를 알프스넘어 갖고 와서리 자기들 글자를 만들어서 성서도 번역을 해. 샤를마뉴때도 성서번역을 해. 그 파편들이 있어.
그러다, 올드 잉글리쉬.가 자리잡고, 올드 프렌취도 자리잡으면서, 게르만들도 함께. 자기들 구어로 성경번역을 하는겨. 민들을 위해서.
The Codex Argenteus (Latin for "Silver Book/Codex") is a 6th-century manuscript, originally containing a 4th century translation of the Bible into the Gothic language. Traditionally ascribed to bishop Ulfilas,
울리라스 주교.가 번역한 고쓰족 언어로 된 성경이야. 6세기 원고가 남아있어. 코덱스 아르겐테우스. 4세기 고쓰족 주교 울피라스.가 시작해서 6세기에 완성한 걸로 보여. 4대복음을 번역했어. 이게 당시 오스트로고쓰 킹덤 테오도릭.에 헌정된 걸로 보이는거고.
Later Charlemagne promoted Frankish biblical translations in the 9th century. There were Bible translations present in manuscript form at a considerable scale already in the thirteenth and the fourteenth century (e.g. the New Testament in the Augsburger Bible of 1350 and the Old Testament in the Wenceslas Bible of 1389). There are still approximately 1,000 manuscripts or manuscript fragments of Medieval German Bible translations extant.[1]
샤를마뉴 때도 프랑크족 성경 번역을 막막 해. 루터 이전에 게르만어로 된 성경들이 상당수고. 1000여개의 원고들이 지금 있는데
- 1226–1250, translation of Jean le Bon of the University of Paris. Unfinished and continued in the 14th century by Jean de Sy and the Dominicans, Jehan Nicolas, Guillaume Vivien, and Jehan de Chambly.
- 1297 the Bible historiale of Guyart Desmoulins or Guyart des Moulins. Consisting of the Historia Scholastica of Petrus Comestor, a liberal translation of most of the Bible, and an assemblage of glosses and other materials from several sources. The content of the manuscripts is variable, and successive versions seem to add books of the Bible which were missing in Guyart's original.
- 1377, Bible de Charles V. Translation by Raoul de Presles dedicated to Charles V
프랑스.도 올드 프렌취.로 파리대학에서도 번역을 하고. 걍 막막 해 성서 번역들을.이게 오리지날본을 찾기가 수월찮은거고.
Partial Bible translations into languages of the English people can be traced back to the late 7th century, including translations into Old and Middle English. More than 450 translations into English have been written.
영어로 된 성경번역은. 7세기부터 보여. 올드잉글리쉬.는 1066 정복왕 윌리엄 전까지고. 미들잉글리쉬는 15세기까지여. 즉 루터 이전때까지 450개의 번역들이 있어온겨. 엄청난겨 이게.
Richard Rolle (1290–1349) wrote an English Psalter. Many religious works are attributed to Rolle, but it has been questioned how many are genuinely from his hand. Many of his works were concerned with personal devotion, and some were used by the Lollards.[5]
이중에 존 위클리프. 직전이 리차드 롤.이야. 겹친 시대의 사람이야. 이사람은 시편을 영어로 번역을 한 거로 보여. 이걸 롤러드즈.가 본 것으로 보이고. 이 롤러드즈. 라는 롤러드 들.이 존 위클리프.를 따르는 사람들이야. 14세기 중반의 사람들. 잉글랜드의 이단의 대명사여.
대게 저런게 대부분, 성경 전집이 적고, 일부 책.만 번역한 것이 많고. 이걸 전집으로 제대로 번역한 사람이 존 위클리프야
In keeping with Wycliffe's belief that scripture was the only authoritative reliable guide to the truth about God, he became involved in efforts to translate the Bible into English. While Wycliffe is credited, it is not possible exactly to define his part in the translation, which was based on the Vulgate.[26] There is no doubt that it was his initiative, and that the success of the project was due to his leadership. From him comes the translation of the New Testament, which was smoother, clearer, and more readable than the rendering of the Old Testament by his friend Nicholas of Hereford. The whole was revised by Wycliffe's younger contemporary John Purvey in 1388.
There still exist about 150 manuscripts, complete or partial, containing the translation in its revised form. From this, one may easily infer how widely diffused it was in the 15th century. For this reason the Wycliffites in England were often designated by their opponents as "Bible men".
존위클리프.는 신약을 번역하고, 구약은 그의 친구 헤리포드의 니콜라스.가 번역하고. 전체 수정은 존 퍼비.가 했고. 지금 150개 카피본이 전집 또는 파편으로 남아있고. 이게 최근 한 카피본이 경매에 나왔는데, 170만달러, 20억 정도에 팔렸대.
Theologically, his preaching expressed a strong belief in predestination that enabled him to declare an "invisible church of the elect", made up of those predestined to be saved, rather than in the "visible" Catholic Church.[24] To Wycliffe, the Church was the totality of those who are predestined to blessedness. No one who is eternally lost has part in it. There is one universal Church, and outside of it there is no salvation.
프리데스티네이션. 예정설. 예정구령설 이라 하는데. 영혼을 구제하는건 이미 이전에 결정되었다는겨. 칼뱅의 예정설.로 유명한건데 이건. 이걸 구체적으로 들어간건 칼뱅이야. 저 말을 쓴 이유는, 존 위클리프.는 교회가서 돈 준다며 선행하는걸로 구원되는게 아니란 거야. 이말을 하고픈겨. 칼뱅의 예정설은 아주 끝모를 운명론이야. 존 위클리프의 말은 어감이 다른거야. 인비저블 오브더 일렉트. 진짜 교회는 눈에 안보이는겨. 지저스의 마태의 말씀의 교회야. 눈에 보이는 카톨릭 교회 열심히 다니면서 돈퍼부우면서 선행하면 구원이 되는게 아니라, 진짜 교회는. 선택된 안보이는 교회.라는겨. 그 교회란건 축복받기로 되어있는, 이미 축복받기로 결정된. 전부 전체 그 자체.라는거야. 그 예정된. 모두 라는 교회.에 속한 각각은 거기 속할 수 밖에 없어. 이 보이지 않는 교회는 하나의 우주적인 교회. 즉 하나 만으로 된 모두의 교회.인거고, 여기를 벗어난 누구도 구원이 되지 않아.
밀알을 심은 그 마음의 터가 우리의 교회야. 그 밀알을 심은 우리라는 모두.의 마음의 합이 교회야.
His first tracts and greater works of ecclesiastical-political content defended the privileges of the State. By 1379 in his De ecclesia ("On the Church"), Wycliffe clearly claimed the supremacy of the king over the priesthood.[7] He rejected the concept of purgatory,[15] and disapproved of clerical celibacy, pilgrimages, the selling of indulgences and praying to saints.[23]
교회에 대하여. 데 에클레시아. 세속의 킹.이 교회보다 절대적으로 위야. 교회는 세속에 간섭하는게 아냐. 교회는 세속의 테두리 안에 있어야해. 연옥따위 11세기에 교회에서 돈벌라고 주작한 개념이야. 연옥따위 없어. 인덜전스 하지 말어.
성직자의 순결. 결혼하지 말라는 거 없어. 성직자도 결혼해. 믿음만 있으면 되는거야. 순례 짓, 성인놀이 짓 하지 말어.
동쪽 교회진영의 1천년 간의 이단 규정된 말들의 종합판이야 이미. 여기서 존 위클리프.가 정제 해서 말하는거야. 루터 이전에 이 사람이 다 정리해서 말한거야.
In the 1380 Objections to Friars, he calls monks the pests of society, enemies of religion, and patrons and promoters of every crime.[10] He directed his strongest criticism against the friars, whose preaching he considered neither scriptural nor sincere, but motivated by "temporal gain".[14] While others were content to seek the reform of particular errors and abuses, Wycliffe sought nothing less than the extinction of the institution itself, as being repugnant to scripture, and inconsistent with the order and prosperity of the Church.[11] He advocated the dissolution of the monasteries.
존 위클리프.가 또한 말하는게, 프라이어. 저게 frater 프라테르. 형제 라는 말이걸랑. 형제들이란 이름으로 그룹으로 다니면서 탁발하면서 설교하면서 지내는 수도사야. 이건 머냐면 말야. 혼자 못 보내는겨. 혼자 삥 뜯을 수 있걸랑. 서로서로 감시해라덜. 저게 돈걷고 재물걷는 시종이 따라다녀 탁발수도라는게. 이사람은 이 저따위 탁발수도사든, 몽크 라는 모나스틱도 다 반대해. 저 수도원이라는게 타락하기 좋은겨. 이사람이 캔터베리 에서 있을때 대주교가 바뀌걸랑. 이 대주교가 수도사.에 올인하는겨. 위클리프 가 보기엔 완전히 한무당짓을 본거야 저때. 수도사들이 타락하기 제일 좋은거야. 그런걸 너무나도 많이 보니까, 저 수도사란걸 없애야 한다는겨. 탁발이든 독도다이 몽크든. 저건 너무 나갔다 며 비판하지만, 맞다고 봐 나는. 위클리프의 말이.
저 수도원들이 헨리8세가 직접 재무실사 보고서 보니까 어마어마 한거야 저게. 저걸 다 없앤겨. 한교구에 하나. 로 정리를 해.
존 위클리프.는 그래도 세속 군주.의 보호아래. 주교로써 편히 죽어.
얀 후스.가 프라하대학 사서.에 대학에 입학하고, 저 존 위클리프.의 글들을 본거야.
얀 후스.는 아주 존 위클리프.의 카피본이야.
헌데 얀 후스.때는 아비뇽교황과 로마교황의 웨스턴스키즘 이야. 프라하의 교회진영도 이 두개로 갈려. 세속군주는 중립을 선언하지만, 이놈의 중립이란게 사태를 더 악화시킬뿐이야. 결국 세속은 교회의 분리에 흔들흔들 할 뿐이야 이게.
얀 후스.는 스키즘된 교황들 시대에 이단으로 규정하는겨.
헌데 더 웃긴건 말이지. 아비뇽 로마 도 부족해서 다른 교황이 더 생겨. 교황이 세명이 등장해
저 스키즘을 정리하는게 콘스탄스 공회의.야.
이때 실세가, 지기스문트 나중 황제 되고 보헤미아 킹도 받을, 당시 게르만의 킹 룩셈부르크의 지기스문트.야. 저건 지기스문트 의 세속진영이 스키즘 정리하자며 회의를 요구하고. 6백명의 교회진영들이 모인거야. 지기스문트.는 얀후스 의 보헤미아 편일 수 밖에 없어. 얀 후스가 저때 메인 주제가 아니었어.
교회진영은 얀 후스.가 겁이 나는겨. 이전 카타르 부데스(발도파) 프라티첼리.로 아주 몸살을 겪고 겨우 조용해졌는데, 얀 후스가 휘젓고 다닌다는 소식이 들려. 바로 진압해야 해. 세속의 지기스문트는. 너 괜찮다 내가 너 안전보장하마 너 자신을 변론하라우. 콘스탄스로 부르는겨.
얀 후스.가 저기 가서. 유죄를 선고당하고 사형을 받는겨 저 콘스탄스 라는 독일 골짜기에서.
지기스문트.는 겁을 먹어. 이단을 변호해야 하는 입장이 된겨 자기도 모르게. 변호하면 자기도 이단이 되어버리는거야. 한발 물러서.
얀 후스가 죽어.
보헤미아에서 이 소식을 들은거야.
이게 훗사이트 전쟁이고, 이게 이어져서 30년 독일전쟁이 된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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