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May 1618
30년 전쟁 시작.인 보헤미아에서의 창문투척사건이 서기 1618년 5월 23일.이야.
Rudolf II (18 July 1552 – 20 January 1612)
Matthias of Austria (24 February 1557 – 20 March 1619)
페르디난트1세 황제가 주고. 아들 막시밀리언2세.가 황제하고 죽고. 이 두 아들 루돌프2세.와 마티아스.가 황제를 하는겨. 둘다 엄마가 펠리페2세의 여동생 마리아.고 루돌프가 60에 죽고 자식없고 마티아스 가 55세.에 황제를 하는겨. 7년 하고 죽어 62세.에. 이사람이 또 자식이 없어. 타이틀이 보헤미아 헝가리 킹 겸임이걸랑. 늙어서 미리 후계자를 정해서 하나하나 떼준겨. 얘가 사촌동생 페르디난트2세.야. 이사람은 막시밀리언2세.의 동생 카를2세의 자식이여.
Ferdinand II (9 July 1578 – 15 February 1637), a member of the House of Habsburg, was Holy Roman Emperor (1619–1637), King of Bohemia (1617–1619, 1620–1637), and King of Hungary (1618–1637).
페르디난트2세.가 사촌형 마티아스 황제보다 21세 아래야. 아빠 카를2세.가 형 막시밀리언2세보다 13세가 어려. 엄마 보헤미아 안나.가 늦게 늦둥이로 낳은겨. 마티아스 가 사촌동생한테 먼저 보헤미아 킹.을 줘. 1617년 벌써 39세여 이때도. 프라하에 가서 대관식 하는게 1617년 6월 29일.이야. 헝가리 킹.을 다음해 받아 1618년. 요때 7월 1일 날 Bratislava 브라티슬라바. 지금 슬로바키아 수도.여. 당시는 Pressburg 프레스부르크.야. 여기 가서 대관식을 한거야. 즉 저때 로얄 헝가리 수도는 프레스부르크 인거야. 오스만애들때문에 아래는 다 뺏겼걸랑.
그리고 나서, 다음해 1619년 3월 20일 에 죽은겨 마티아스 황제는. 요때 페르디난트2세 가 황제에 오르는거고.
즉 보헤미아는 1617년 에 이미 킹.에 오른거고, 이미 이때부터 불안불안 한겨 보헤미아는. 아직 마티아스가 살아있어. 빌빌 한거고. 대관식 하고 만 1년 안되서 대리인 보내고 5월 23일 에 사건이 터진겨. 마티아스 황제는 이후 1년 지나서 죽은거고. 페르디난트2세.는 저 사건 직후.에 헝가리 킹.이 된겨 7월 1일에 대관식을 한거야 저 사건 터지고.
보헤미아에서 전쟁이 시작되는 화이트 마운틴 전투.는 1620년 11월 이야. 마티아스 가 1619년 3월에 죽고 페르디난트2세.가 황제 즉위하고 그 다음해에 전쟁이 시작이 된겨. 사건 발생하고 2년 반 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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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보헤미아 뿐 만이 아니라, 오른쪽 헝가리여.
슬로바키아.라는 나라는 1993년.에야 생긴 나라야. 저게 1918년 까지는 서기 1천년 부터 헝가리꺼야 저건. 헝가리의 Upper Hugary 어퍼 헝가리.라는 헝가리 고지대야. 9백년이 헝가리 꺼였어. 쟤들은 슬라브걸랑. 1918년에 체코슬로바키아.라는 이름으로 나온거여 체코라는 슬라브들에 붙었다가 1993년 이 쟤들 시작이여. 저긴 헝가리여 918년이.
체코.가 오스트리아.랑 아주 가까운겨 이게. 체코.가 위로는 폴란드와 길게 Sudetes 수디티즈 라는 산줄기로 나뉘고, 요 줄기따라서 모라바 강 Morava 이 줄기따라 오른쪽으로 흐르고 슬로바키아 국경에 꺾여서 요게 브라티슬라바 Bratislava 에서, 비엔나에서 오는 다뉴브 강 이랑 만나면서 부다페스트.로 다뉴브가 가는겨. 저 모라바강 안쪽을 모라비아.라고 해. 모라비아 산덩어리들이 체코가 오스트리아 국경을 맞대고 가운데 아래 덩그랗게 크게 있어. 이 모라비아 고원들 왼쪽까지 해서 모라비아 라고 하는겨. 슬로바키아 란건 루마니아 쪽에서 골뱅이처럼 꼬인 카르파티안 산맥이 돌아서 끝줄기인 그냥 산악 지대여 여긴. 브라티슬라바.가 그나마 저지대인겨. 지금 헝가리 란 나라는 평원 그자체여 저게. 저 헝가리가 지금 루마니아 써있는 카르파티안 산맥 삼각 모양 안쪽이 모두 헝가리 꺼였어. 지금 루마니아의 반이 넘어. 저걸 다 뺏긴겨 루마니아한테.
페르디난트2세.가 헝가리 킹.이 되서 대관식 하는 프레스부르크.라는 브라티슬라바.라고 갈때, 얘가 헝가리 킹이라지만, 이미 당시 헝가리는 오스만에게 70퍼 이상 뺏긴겨. 로얄 헝가리라 해봤자 저 슬로바키아 지역.인 어퍼 헝가리야. 그리고 헝가리 왼쪽 구석 오스트리아에 접한 알프스 기슭 조금이고. 저 어퍼 헝가리 조차, 오른쪽 트랜실베니아.에 반가까이 뺏긴 상태걸랑.
모하츠 전투 1526년 이후.에 사포야이 야노스.가 헝가리 킹 자처할때 동헝가리 킹덤.이란게 오른쪽 트랜실베니아에 어퍼 헝가리 오른쪽 부분인겨. 저 오른쪽 누리끼리.가 정확히 트랜실베니아.야. 오른쪽 카르파티안 산맥 돌아나가는 구석.에 왼쪽이 Tisza, Tisa 티사강.이야. 이 왼쪽이 부다페스트에서 똑같이 세로로 떨어지는 다뉴브 강이고. 저 왼쪽 다뉴브.가 죽 내려가서 드라바 강 Drava 이랑 만나면서 오른쪽을 틀어나가. 이 오른쪽 꺾인 다뉴브.가 위에서 내려오는 티사 강이랑 만나면서 아래로 꺾여. 꺾인 다뉴브.가 또 왼쪽에서 오는 사바 강 Sava 이랑 만나면서 오른쪽으로 죽 꺾여서 루마니아 불가리아를 가르는겨. 드라바 강 과 사바 강.이 크로아티아.의 위아래 헝가리 모하츠에 아래 세르비아 국경 경계선인거고.
할때 오스만 이란 애들은 다뉴브 양 쪽은 자기들이 직접 통치하는거고 오른쪽 트랜실베니아.는 사포야이 야노스 에게 임차인 자격으로 주고, 이게 뒤에 트랜실베니아 프린스.가 되는겨. 저 티사강 오른쪽 은 오스만에 하미지 하는 애들이고. 이어서 슬로바키아 땅인 어퍼 헝가리.를 가지고 합스부르크 애들과 다투는겨 이게. 대게 이쪽 오른쪽은 트랜실베니아.가 갖고 가면서 얘들이 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거고.
1570년 사포야이 야노스 부자.의 킹덤다음엔 그냥 트랜실베니아 프린스.의 땅이라 독립국인듯 보이지만 저건 오스만의 임차인일 뿐이여. 여기서 얘들이 합스부르크 편과 오스만 사이에서 낑기는거고. 저 어퍼 헝가리 대부분은 헝가리 킹덤.이라며 합스부르크.가 갖고 있는겨.
트랜실베니아.의 시작은 사포야이 야노스 다음에 스티븐 바토리. 부터야. 얘가 얀 자모이스키 후원으로 폴란드 킹이 되는거고. 트랜실베니아는 형한테 넘기는거고. 바토리 가문이 트랜실베니아.의 시작이야.
형이 크리스토퍼 바토리 인데. 이 다음이 얘 아들 지기스문트 바토리.걸랑. 아빠 크리스토퍼.는 카톨릭.이고 엄마는 칼뱅인데 얜 카톨릭 꼴통이여. 얘가 합스부르크.랑 손을 잡고 왈라키아에서 나온 용감 미하이.에 얘가 세운 몰도비아의 스티븐 라즈반. 이 셋.이서 반 오스만 전쟁을 하걸랑. 오스만이 쟤들을 다 진압하고, 폴란드 쪽에서도 라즈반.을 진압을 해. 오스만과 폴란드는 협정을 맺는거고.
그리고 지기스문트 바토리 다음에 추기경 사촌이 올랐다가 얘도 농노들에게 죽고. 이 빈자리를 꿰찮게 지기스문트 바토리 외삼촌 보츠카이.걸랑. 누이가 칼뱅이고 이사람도 칼뱅이야. 당시 헝가리는 칼뱅에 루터인 프로테스탄트여 이게. 폴란드와 마찬가지로 보헤미아 와 함께 이 서슬라브들은 프로테스탄트 가 대세걸랑.
보츠카이.가 합스부르크.를 막고 저 어퍼 헝가리.의 동쪽을 다 인정을 받아. 그리고 합스부르크.로 부터 프로테스탄트.를 인정을 받는겨. 이게 1606년 비엔나 조약.이야. 이들이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평화조약 독일땅 프로테스탄트 인정받은 이후 타지역에선 최초인겨. 이 스티븐 보츠카이.는 그래서 개신교쪽에선 성인이야 이사람은.
그러면서 당해 말에 Zsitvatorok 시트바토로크 조약.으로 합스부르크 황제진영과 오스만의 저 기나긴 13년 투르크 전쟁을 마무리를 해. 이것도 중심은 보츠카이여.
보츠카이. 다음에 Sigismund Rákóczi 같은 연배인 라코치.가 트랜실베니아 프린스 를 하고. 이사람때 카롤리.가 만든 비조이 성경(카롤리 성경) Vizsoly Bible(Károli Bible) 이 처음으로 헝가리어로 된 게 나온겨. 이들은 칼뱅이걸랑. 그러다가 바토리 핏줄 가브리엘 바토리.가 하이두크 꼬셔서 권력 잡고 개판되고 이걸 오스만의 지원 받은 Stephen Bethlen 베뜰렌.이 쟤를 죽이고 트랜실베니아 프린스.가 되걸랑. 이전에 썰한건데.
그러면서, 로얄 헝가리 킹을 말이야, 마티아스. 후임으로 베뜰렌.이 하려 한겨. 결국 헝가리 귀족떨거지들은 페르디난트2세.를 킹으로 추대한거걸랑.
보츠카이.가 1606 비엔나 조약을 합스부르크.와 맺으면서, 프로테스탄트.를 인정을 받은거야. 이 관심 지역은 저 어퍼 헝가리여. 보츠카이가 어퍼헝가리 오른쪽을 많이 갖고 왔걸랑, 더하여 왼쪽도 프로테스탄트들이 많고. 당연히 트랜실베니아 구석.은 칼뱅에 루터가 많은겨. 왜냐면, 여긴 오스만 애들이야 얘들은 합스부르크.가 웬수고 그 카톨릭이 그래서 더 싫어. 차라리 프로테스탄트.에 관대해 오스만애들은. 잉글랜드 와 그래서 친하고 네덜란드 땅도 오스만애들과 친한겨 같이 카톨릭 쳐부수자 함시롱. 오스만 애들은 저게 최고의 기회였걸랑 저놈의 종교전쟁이. 당연히 프로테스탄트 들을 적극 지지하는겨 오스만은.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인정을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이후로 한거야. 영주의 종교대로 영지는 하나다 그걸로 가름하지만, 저게 말이 쉽지, 한 동네에 카톨릭만 있고 프로테스탄트는 싸그리 없는게 말이 되냐고. 그렇게 될 수가 없어. 그래서 저 이후 간혹 종교 축제일때 서로 전쟁 비슷한 것도 났지만, 그냥 서로 섞여 사는걸 인정을 해 온 상태야.
막시밀리안2세.도 관대한 애고. 이 두 아들 루돌프2세.와 마티아스.도 종교에 관대했어.
헌데 문제는. 저 쌩뚱맞은, 막시밀리안2세의 동생 의 자식인 저 아들뻘 되는 사촌동생인 페르디난트2세.가 보헤미아 킹에 헝가리 킹.을 하고 곧 황제 될 놈인건데. 얘가 깝깝한 카톨릭인 거걸랑.
이미 보헤미아 에서 창문 투척 사건이 터졌어. 1618년 5월 23일. 저건 대관식 하고 일년 동안 불안 불안 부글 부글 하다가 일년만에 온 대리인들에게 분노가 터진거걸랑.
그리고 한달 후에 얘가 헝가리 킹.이 된겨. 7월 1일에 대관식을 프레스부르크.로 와서 해.
트랜실베니아 진영에서 특히나 칼뱅진영이 움직일 수 밖에 없는겨 이건. 보헤미아를 우리가 도와줘야 한다. 더하여 어퍼 헝가리.가 또한 카톨릭으로 다 전향해야 함은 뻔한거고, 이건 자기들 왼쪽에 머리 지역이걸랑. 합스부르크의 어퍼헝가리가 아주 완벽한 적이 되는겨 미래에는.
이때 트랜실베니아.에서 이 중심되는 인물이
George I Rákóczi (8 June 1593 – 11 October 1648) was Prince of Transylvania from 1630 until his death in 1648. Prior to that, he was a leader of the Protestant faction in Hungary and a faithful supporter of Gabriel Bethlen, his predecessor as Prince. I. Rákóczi György
라코치 기여르기. 조지 라코치.여. 이사람 아빠가 가브리엘 바토리.에게 쫓겨나다 시피한 그 라코치.여. 카롤리의 비조이 성경 만든 시대의. 이사람이 프린스 베뜰렌.시대의 코트 중심인물이야. 나중에 베뜰렌.이 죽고서 트랜실베니아.의 프린스.를 이사람이 해.
The Habsburg monarchs' Anti-Protestant measures had outraged the predominantly Protestant Bohemian noblemen.[17] Their representatives broke into the Prague Castle and threw Matthias's two Catholic lieutenants out of a window on 22 May 1618.[18][11] The Bohemian rebels sent envoys to the Protestant countries, seeking assistance against the Habsburgs.[19]
창문투척 사건이 터졌어. 보헤미아 에서 프로테스탄트 진영 모두에 파발을 돌리는겨 우리 도와달라고. 이때 보헤미아를 가장 먼저 도와서 전쟁을 한건 트랜실베니아 야. 그리고 이 뒤의 오스만 인겨. 프로테스탄트를 도와준 가장 큰 지원군이 의외로 이 오스만이야.
Osman II (Ottoman Turkish: عثمان ثانى ‘Osmān-i sānī; 3 November 1604 – 20 May 1622), commonly known in Turkey as Genç Osman ("Osman the Young" in English), was the Sultan of the Ottoman Empire from 1618 until his regicide on 20 May 1622.
이때 오스만 술탄.이 오스만2세.여. 아메드1세.가 형제살해를 멈추고, 다음 술탄이 동생 무스타파1세가 되고, 얜 어린시절 공포로 살 수 밖에 없었던거고, 2백년의 집단무의식이야 술탄의 형제는 죽어야만 했던. 살아남았어도 불안한거야. 첫 당사자가 이게 미쳐버린겨. 얘를 가두고, 아메드1세의 장남 오스만2세.가 술탄에 올라. 이게 하필 1618년.이여. 보헤미아 창문투척사건이 터진.
저 오스만2세.가 4년 후에 예니체리 한테 죽을 때, 이사람은 저 30년 전쟁 에 껴들어서 전쟁하다가 근위대에 죽은거걸랑. 이 오스만2세를 끌어들인 쪽이 당연히 트랜실베니아.의 프린스 베뜰렌.과 조지 라코치 인거야.
30년 전쟁은 이 동쪽에서 벌어지는겨 시작이. 백산 전투.는 2년 반 후에 벌어지는거고.
The Habsburgs' Anti-Protestant policy annoyed George who was a leader of the Hungarian Protestants.[20] He urged Gabriel Bethlen to intervene in the conflict on behalf of the Bohemian rebels.[21] He also started to hire Hajdú troops in summer 1619.[22] To prevent Rákóczi and Bethlen's cooperation, András Dóczy, the commander of the royal troops in Upper Hungary, offered Rákóczi's estates to Bethlen on the king's behalf.[23] Instead of accepting Dóczy's offer, Bethlen informed Rákóczi that he had decided to invade Royal Hungary.[21][24] To facilitate Bethlen's invasion, Rákóczi tried to capture Drugeth, but he could not prevent him from fleeing to Poland.[25] Then Rákóczi marched to Kassa and persuaded the predominantly Evangelical (or Lutheran) burghers to surrender on 5 September.[21][26] A day later, his Hajdú troops tortured and murdered three Jesuit priests, Melchior Grodziecki, Marko Krizin and István Pongrácz.
칼뱅의 중심 조지 라코치.가 엄청난 자부심의 인간이야. 아빠때 자기들 성경을 만들었어. 베뜰렌을 부추겨. 보헤미아를 도와야 한다. 우리 머리 위 어퍼 헝가리도 저런식이면 완전히 카톨릭의 땅이 되고 오히려 오스만보다 더 큰 적이 우리옆에 생기는거다 저건.
조지 라코치.의 영지.는 캇사 Kassa 인데. 여기가 지금 Kosice 코쉬체 란 곳이야 저 지도에 보이는. 슬로바키아 동쪽이야. 여긴 원래 명의는 어퍼 헝가리인데 트랜실베니아가 갖고있는겨.
어퍼 헝가리.는 친 합스부르크인 로얄 헝가리야. 슬로바키아 왼쪽진영. 프린스 베뜰렌을 꼬셔서, 너에게 라코치의 영지들을 우리가 줄테니까 우리편에 서라. 이걸 오히려 베뜰렌이 조지 라코치에게 알려줘. 그리고 반격을 하는겨. Drugeth 드루게뜨 가문을 잡으려는데 폴란드로 도망가. 이 드루게뜨 가문이, 이전 스티븐 보츠카이.가 죽을때 후계를 이 드루게뜨 에게 주라고 했걸랑. 헌데 코트에서 라코치.를 추대를 한거야. 그래서 이 드루게뜨.가 돌아서. 드루게뜨 가문이 헝가리 귀족가문이야. 얘들은 저때 라코치 들에 반감 생기면서 역사에서 사라져.
베뜰렌.이 어퍼 헝가리.를 다 먹기로 다짐을 한거야. 이사람이 헝가리 킹 하려다 못한거걸랑. 또한 프로테스탄트여. 조지 라코치.가 사람들을 모으고, 하이두크 를 소집하고, 제수이트 사제들 세명을 죽여.
Rákóczi returned to Sárospatak to meet with Bethlen who arrived at the head of the Transylvanian army on 17 September.[27] They went to Kassa where Bethlen held an assembly with the deputies of the noblemen and towns of Upper Hungary.[27] The deputies elected Rákóczi the commander of Upper Hungary on 21 September.[21] He established his seat in Kassa.[28] Drugeth hired irregular troops (primarily Cossacks) in Poland and broke into Zemplén County on 21 November.[29] Rákóczi tried to stop their invasion, but he was defeated in the Battle of Humenné on 23 November.[21] Bethlen soon lifted the siege of Vienna and hurried back to Hungary.[30] He blamed Rákóczi for the defeat, describing him as a young and inexperienced commander in a letter to the burghers of Kassa.
라코치. 가 말야. 1593년 생이야. ㅋㅋㅋ 저때 끽해야 25세여. 애가 너무 어려 아직.
드루게뜨 잡으러 갔다가 실패하고 베뜰렌을 보러와 이게 9월 17일 이야. 1618년이야. 페르디난트가 여기서 대관식한게 7월 1일인데. 캇사. 코쉬체 로 가서 어퍼 헝가리 의 대표들을 만나고, 여기서 라코치.를 어퍼 헝가리의 사령관으로 추대해. 이 어퍼헝가리는 로얄 헝가리 라는 합스부르크 꺼야 원래. 드루게뜨가 폴란드로 가서 코사크 중심의 병력을 데려오고 이 둘이 붙는게 후멘네 전투.여.
폴란드는 여전히 지기스문트 3세 바사.여. 얜 얀 자모이스키.도 1605년에 죽고 완전히 친합스부르크로 돌아섰고
The Polish–Muscovite War, also known as the Polish–Russian War of 1605–1618 or the Dimitriads, was a conflict fought between the Tsardom of Russia and the Polish-Lithuanian Commonwealth from 1605 to 1618.
모스크바 혼란기때 가짜 드미트리 내세워서 모스크바 코트도 점령하고, 자기아들 차르 시키지 말고 내가 짜르 할텨 해대고 그러다 스위든이 오고 스위든은 잉그리아를 다 먹고 러시아는 로마노프.가 들어서면서 폴란드 러시아 전쟁 13년이 또 하필 요때 끝난겨. 그러면서 폴란드는 리보니아를 무대로 스위든 이랑 전쟁을 하는겨 30년 전쟁 초기에.
저 지기스문트3세 바싸.가 완전히 합스부르크로 돌아선겨. 30년 전쟁은 이 폴란드 애들이 카톨릭을 대변하면서 제일 먼저 쳐나온겨 합스부르크.는 가만히 있는데.
폴란드는 말야. 아주 정확하게. 지기스문트3세 바싸.때문에 지금도 폴란드가 저모양 저꼴인거야.
헌데 저따위 지기스문트3세 바싸.가 폴란드 역사에서 가장 그레이트.인거야 저 폴란드 현재 사가들 왈.
이런 개 후짐의 사관은 말야 역사 후진 모든 땅에서 아주 공통적으로 벌어지는 현상인데.
드루게뜨.를 후원하는게 역시나 지기스문트 3세바싸야. 얘가 코사크를 붙여주고 비정규군을 붙여줘
Lisowczycy (Polish pronunciation: [lisɔfˈt͡ʂɨt͡sɨ]; also known as Straceńcy ('lost men' or 'forlorn hope') or chorągiew elearska (company of elears [pl]); or in singular form: Lisowczyk or elear) – the name of an early 17th-century irregular unit of the Polish-Lithuanian light cavalry. The Lisowczycy took part in many battles across Europe and the historical accounts of the period characterized them as extremely agile, warlike, and bloodthirsty. Their numbers varied with time, from a few hundreds to several thousands.
이 폴란드.가 더럽고 추해진건데. 이게 리소프체체.라는 비정규군 경기병대.야. 17세기 초에 등장한겨 모스크바랑 13년 전쟁 할 때 등장한게 리소프체체.여.
폴란드.의 중세 위대한 강국이었던 배경은, 포스폴리테 루셰녜. pospolite ruszenie. 라는 폴란드 귀족들의 자치 군대들이여. 자기 땅은 자기들이 지키는겨. 이 자부심과 사기는 엄청난겨 이게. 이 정체성이 세임으로 모여서 우리가 하나.란 의식이 있었걸랑. 헌데 이게 점점 자기들이 손해보는 방향으로 흘러가는거야. 자기들이 나서면 오히려 손해여. 남들이 챙기고 킹이 챙기는 구조로 가는겨. 이게 사라지는거야. 그러면서 킹덤 저 지기스문트.가 만든게 저놈의 리소프체체.야.
저건 용병이 아냐. 월급을 안줘. 비정규적으로 동원된 애들이야. 머겠어? 약탈을 허용하는겨. 약탈을 해서 니 돈 니가 챙겨라. 유럽 전쟁이 이전엔 이런 게 없었어. 이 독일땅 30년 전쟁 때 저런 약탈의 용병들이 등장하는겨 이게. 이 시작이 지기스문트 3세 바싸.
The Battle of Humenné (Hungarian: Homonnai csata, Polish: bitwa pod Humiennem or pierwsza odsiecz wiedeńska) took place on 22–23 November 1619 near Humenné (eastern Slovakia) during the first period of the Thirty Years' War between the Transylvanian army and the joined loyalist Hungarian and Polish forces of Lisowczycy. It was the only battle of that war to involve the Polish-Lithuanian Commonwealth.
후멘네 전투. 여기가 코쉬체. Kosice. 캇사 Kassa 의 동북쪽이야. 카르파티아 산맥이고 폴란드 경계야. 드루게뜨 가 델꼬온 코사크의 리소프체체.와 로얄 헝가리. 연합에 트랜실베니아의 조지 라코치.가 싸우는겨. 이게 서기 1619년 11월 22일이여.
이게 30년 전쟁 시작이야. 이후 1년 지나서 백산전투.가 보헤미아에서 터진겨.
이때 트랜실베니아의 군주 베뜰렌.은 비엔나.를 포위하고 있었어. 만약 저때 후멘네 전투를 조지 라코치.가 이겼다면 말야, 지금 세상이 어찌 되었을지 몰라. 30년 전쟁이란건 아예 없었을 수도 있어.
베뜰렌.이 후멘네 전투.를 대패했다는 소식을 듣고서리, 아 25세 어린애를 사령관으로 앉히는게 아니였어, 후회스러운겨 이게. 비엔나 포위를 풀고 돌아가는겨.
Drugeth's troops plundered the region of Kassa, but they could not capture the town.[32] Rákóczi ordered the mobilization of the local troops.[32] The Cossacks left Hungary before the end of 1619, and Drugeth followed them to Poland in early next year.[33] Ferdinand's army laid siege to Pressburg in October, but Rákóczi hurried to the town and forced the invaders to lift the siege.[34] However, Ferdinand's troops inflicted a decisive defeat on the Bohemian army in the Battle of White Mountain on 8 November.[35] His commander, Bucquoy, invaded Upper Hungary, forcing Bethlen to withdraw his troops as far as Kassa in the first half of 1621.[36] Most Hungarian noblemen sought a reconciliation with Ferdinand, but Rákóczi remained loyal to Bethlen.[37] After Bethlen's opponents seized the fortress of Fülek (now Fiľakovo in Slovakia), Rákóczi laid siege to it in April, but he could not force the defenders to surrender.[38] Bethlen launched a counter-attack against Ferdinand's army in August.[38][39] Rákóczi joined the military campaign and participated in the siege of Pressburg, but he returned to his family to Sárospatak in late August, only to return a month later at Bethlen's demand.
드루게뜨.의 코사크는 리소프체체.여. 용병이 아녀. 약탈하면서 자기돈 챙기는겨. 아주 걍 아작을 내는겨. 이 코사크.가 1619년 말까지 떠나지 않은거야. 일년 내내 저기서 약탈을 해댄겨 허락 한거걸랑 폴란드 킹이. 드루게뜨 쟨 더이상 헝가리 들 가문이 아닌거고 저건. 쟤들이 헝가리 최고의 귀족가문이었어.
저이후 1620년 11월에 백산전투.를 압승하고 페르디난트2세.가 자기손으로 복수를 하러 오는겨. 이걸 오히려 라코치.가 베뜰렌.이 포위된걸 도와주러 와. 라코치 가 베뜰렌에게 죽을때까지 충성을 다 해. 참 짠한데, 헝가리 쪽은 다 페르디난트에 붙어갈때 라코치 는 베뜰렌에 충성한겨.
그리고 베뜰렌.이 죽고, 이 자리를 라코치 가 이어가는데. 이때는 30년 전쟁 말기야. 자기가 프린스가 되고서 다시 쳐들어갈려는걸 오스만이 막는거야. 더하여 저러면서 트랜실베니아.는 완전히 힘이 소멸이 된겨 저게.
In 1644, he intervened in the Thirty Years War, declaring war against Emperor Ferdinand III. He took the whole of Upper Hungary and joined the Swedish army besieging Brno for a projected march against Vienna. However, his nominal overlord, the Ottoman Sultan, ordered him to end the campaign. In the Treaty of Linz (1645), Ferdinand recognized George's rule over the seven counties of the Partium and reaffirmed the religious liberties of Transylvania.
이사람이 1648년 에 죽어. 30년 전쟁과 함께 한겨. 아주 유일한 몇 안되는 사람이 이 조지 라코치야. 비엔나.를 다시 처들어가려했지만, 이미 트랜실베니아.는 이게 이름만 남은 존재의 땅이 된겨 저때. 오스만이 못가게 말리고. 이 사람아들이 이어받는데, 트랜실베니아 는 이 아들때 역사에서 사라지는거야. 오스만이 직접 통치하는겨. 그만큼 쉬워진거지 이땅이.
In the east, the Protestant Hungarian Prince of Transylvania, Gabriel Bethlen, led a spirited campaign into Hungary with the support of the Ottoman Sultan, Osman II. Fearful of the Catholic policies of Ferdinand II, Gabriel Bethlen requested a protectorate by Osman II, so "the Ottoman Empire became the one and only ally of great-power status which the rebellious Bohemian states could muster after they had shaken off Habsburg rule and had elected Frederick V as a Protestant king".[33] Ambassadors were exchanged, with Heinrich Bitter visiting Constantinople in January 1620, and Mehmed Aga visiting Prague in July 1620. The Ottomans offered a force of 60,000 cavalry to Frederick and plans were made for an invasion of Poland with 400,000 troops, in exchange for the payment of an annual tribute to the sultan.[34] These negotiations triggered the Polish–Ottoman War of 1620–21.[35] The Ottomans defeated the Poles, who were supporting the Habsburgs in the Thirty Years' War, at the Battle of Cecora in September–October 1620,[36] but were not able to further intervene efficiently before the Bohemian defeat at the Battle of the White Mountain in November 1620.[37] Later, Poles defeated the Ottomans at the Battle of Chocim and the war ended with a status quo.
트랜실베니아.가 최초로 등장했던거야. 당근 오스만 술탄 오스만2세.의 동의를 구하는거고. 헌데 이건 자체 병력인겨 이들은. 그리고 후멘네 전투 1619 패배.가 결정적인겨. 이 후 로 오스만2세 한테 도움을 요청한겨.
그러면서 오스만2세.가 직접 끼는거야. 1620년 1월에 프라하 와 콘스탄티노플 진영을 서로 특사들이 다녀오고. 오스만2세.가 6만명 기병들을 보헤미아쪽에 주기로 하고, 대신 일년마다 조공을 받기로 하고. 자기는 40만의 병력으로 폴란드를 치겄다는겨. 그래서 터지는게 폴란드 오스만 전쟁 1620-21 이야. 이전 썰한 체초라 전투. 에 코틴 전투.여.
오스만은 1453년 콘스탄티노플 점령하고 1485년에 8년을 몰도바 지역에서 폴란드랑 전쟁하고, 백년 지나서 용감미하이가 세운 라자반의 몰도바 때문에 폴란드 오스만이 전쟁하고 협약 맺은거걸랑. 저때 얀 자모이스키.가 악수한거고. 그래도 코사크.와 타타르 가 서로서로 붙으면서 어차피 또 가야했걸랑. 저걸 핑게로 가는거지 오스만2세가. 삼촌 감금하고 자기도 머 해야하걸랑. 저때 코친전투 패하고 다시 출정하려다 예니체리 말안들으니까 농민용병집단 세크반. 데려가려니까 예니체리가 열받아서 술탄을 죽이면서 다시 미친 술탄 무스타파1세가 복귀를 하는데, 더 미친상태가 되서.
아 얘들은 왜 이리 재밌게 살았는가 몰라.
조지 라코치.가 30년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야.
그럼 30년 전쟁터인 보헤미아땅은 다음에 가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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