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사.가 독특한건, 정政 과 교敎 가 중세 천년.을 서로 적이자 동지로 대립을 해온겨. 

 

이게 무슬람과 인도와 중국 과 다른거야. 

 

이게 유럽을 지금의 유럽으로 만들고. 다른 나라는 철저하게 과거에 족쇄를 찬 체 실패한거걸랑. 

 

이슬람은 무함마드가 칼을 들었어. 그리스도는 칼을 들지 않았어.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의 것.일 뿐이야. 

 

믿는자들의 사령관 이라는 칼리프.가 교권과 세속권을 같이 쥔겨. 칼리프.가 술탄이야. 그러다 술탄들이 자기가 칼리프.란 타이틀은 취하진 않았지만 쪼개진 땅들에서 자기가 술탄이자 칼리프를 한거야. 수니에서 시아로 분파가 된것일 뿐이고. 이 시아는 미미한 세력이야. 분파 한 곳에서 그 안에서도 정교는 일치야. 다른 이슬람들의 다른 정교일치.와의 대립이었을 뿐이고. 저 프레임이 그대로 인도로 간겨. 인도는 슬람이들의 역사일 뿐이야 저게. 무굴조차 슬람이가 된 된 티무르의  핏줄이 왼쪽 사파비 설때 만든 인도제국일 뿐이고. 

 

슬람이는 교권과 세속권의 대립이 없어 이게. 그리스도쪽과 비교하면  미미한겨. 쟤들 수니의 분파들은 그리스도의 삼위일체 논점 중심으로 분열된 교회분리 이상 아냐. 

 

중국땅에서도 세속이 교권을 같이 쥔거야. 유교라는 말도 안되는 교권이 세속권과 한몸뚱아리로 가. 당나라는 도교라는 교권과 한몸으로 가고. 명나라 가서는 유교가 다시 확고한 세속권력이 돼. 유교 자체도 세상에 없는 하치리 이념일 뿐이였고. 유교란건 조폭이 자기 똘마니들 부리기에 확실한 도구걸랑. 그래서 유교 세상이 조폭 세상인거야. 공산주의 사회주의.가 이 유교를 써먹기가  좋은거고. 지금 이땅빠닥은, 공산주의 하면 머하니까 사회주의 하는겨 이게. 이들은 조선나치주의야 확실한. 아주 확실해. 조선 내셔널 소셜리즘.이 쟤들 의 얄팍한 종교야. 저 교 와 세속의 정.이 한몸뚱아리야

 

테레비에서 시사 풍자 에 지들 수령을 희화하 하는 게 완벽하게 사라졌어. 

 

지들 수령을 비하하면, 걘 적폐가 되서 공개적으로 매장을 당해. 인민재판을 받아 지금 이 조선들의 땅이. 코메디에서 저 수령을 빗대는 코너가 완벽하게 사라졌어. 테레비 기자가 자기들 정권의 정의님을 비판했다고 지방발령을 시켜. 지들 의견과 다른 프로를 만들면 사과해야 해. 

 

골때리는겨 이게. 완벽한 유교사회걸랑. 조선 오백년이 부활한거야. 화폐로 모시는 조선. 조선민족의 이름으로. 끔찍한 세상이 된거야 지금. 이명박 박근혜 때도 저지경 까진 아니었걸랑. 쟤들 흉내내는 프로 는 나오기 조차 는 했걸랑. 그걸 틀었다고 욕처먹고 짤려서 문제였지. 지금 정권은 저런 코너. 를 만들지 조차 못해. 꽈~ 꽈~ 로 코메디 만들면  웃길거걸랑. 전혀 만들 생각을 할 수 가 없어. 조선나치들이 이삼천만명이 깔린겨 이게 ㅋㅋㅋ. 완벽한 정교일치가 된겨.

 

보수 정권이란 애들은 권력차원에서 입을 틀어막았고

 

민주 라는 정권은 선동된 애들 이삼천만명이 달려드는겨 ㅋㅋㅋ. 조온나게 무서운겨 이 벌레들의 공격이 프로 기획자의 입장에선. 고올때리는 시대가 된겨. 완벽한 전체주의 국가로 가는겨 이게.

 

나치가 별게 아니걸랑. 야 괴벨스 흉내 내는  한두명이 마이크 잡고 저따위 정신병 걸린 이들 한둘이 선두에 서서 지휘해대고. 공중파에서. 골때린다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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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교일치.가 그 땅을 죽여버리는거걸랑. 

 

내가 써대는 정교일치.란 말과 니덜 뇌 속의 정교일치.가 맞는 게 아니고. 니덜이 익힌 정교일치.란건  그게 정교일치가 아녀. 그리스도 불교 다양하고 공존하는데 먼 정교 일침둥? ㅋㅋㅋ. 

 

이나라는 조선.의 나라야. 이나라는 유교의 나라고. 

 

이슬람은. 오스만의 술레이만 아빠 셀림1세.가 칼리프.를 다시 취해. 이름뿐인 쫓겨난 바그다드의 칼리프.를 얘들은 이전엔 아닌척 정교일치였다가 16세기 시작하면서 다시 무함마드시절의 완벽한 정교일치로 돌아간거야.

 

허나 동시대 유럽은, 카를5세의 동생 페르디난트.는 대관식하러 더이상 로마로 가지 않아. 자기땅 프랑크푸르트.에서 대관식을 해. 교황과 완벽하게 결별한겨 이건. 유럽의 정교분리의 본격적 시작이야. 저게 유럽과 무슬림.의 가장 확실한 분기점이야. 완벽한 마침표를 찍는거야. 유럽은 날라가고 슬람이는 죽었다는 이정표여 저게. 

 

쟤들은 저 즈음 전후부터. 수니에서 시아 분파하고 크게 십여개로 시아에서 더 분파질 하는 그 걸 저때 다시 하는 것일 뿐이야. 슬람이들은 유럽 중세천년.의 저 교회와 세속의 전쟁.을 전혀 하지 않은거야.

 

이게 오직. 유럽에서만 있었던겨 이게. 그리스도 세상에서. 그리스도 라서 그랬던게 아냐. 동쪽은 저런 교회와 세속의 대립이 없어 유럽에 비해선. 동쪽의 그리스도 교회는 또한 완벽한 정교일치인겨. 비잔틴 이후로 여긴 유럽땅에서의 교회와 세속의 대립은 없어 비잔틴쪽 동쪽 교회엔. 러시아 도 마찬가지고. 없어 없어.

 

저런 현상이 유독 말야. 게르만땅 유럽에서만 발생한거야. 이게 지금 유럽을 만든거야. 아 엄청난 할렐루캬님의 말씀이신데. 

 

그 한가운데 서임권.이란 말이 티나온겨. 이건 저 끊임없는 전투중에 나온 이벤트일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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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교회라는건 이전 썰했듯이 세상 최고의 징징이여. 엄청난 징징이야. 망한 서로마의 이탈리아 땅에서 버려진 한 구석탱이에서 그리스도. 하나만 잡고 앉아있던겨.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밀라노 칙령 313년 전에는 자기들만의 소꼽놀인거고. 저 이후엔 로마.는 베드로 이름 하나로 주인 자리 마음만 굴뚝이지 아무런 힘도 없는거고. 비잔틴에 연일 우리를 최고자리에 교회권력 다 주세요 징징징징 해대는겨 오도아케르 오스트로고쓰 롱고바르디 들의 킹덤일때도. 

 

이 롱고바르디 킹덤일때 로마교회.는 비잔틴 세력권이야. 비잔틴이 이탈리 해변 라벤나.를 중심으로 해변과 남부에 시칠리아.는 여전히 비잔틴의 땅이걸랑. 로마 교회도 라벤나 교회보다 끝발이 아래여 이게. 라벤나.대주교가 로마로 부터 독립도 선언하고 서로 파문도 했던 사이야. 로마가 위인건 단지 선언적 의미야.

 

이 라벤나.를 롱고바르디.가 막판에야 점령한겨. 롱고바르디가 그리곤 아래 로마를 위협하는겨. 로마시민당 비잔틴 금화 솔리두스 하나씩.을. 곧 쳐들어 올 기센거야.

 

 

이게 롱고바르디 애들이 라벤나 함락 이후 로마를 위협할때부터 오히려 로마교회가 살아날 궁리를 하는거야. 로마주교가 처음으로 알프스.를 넘어 파리로 가는겨 프랑크의 소피핀.을 만나러. 저 롱고바르디가 우리보고 조공을 바치라는데 저거 해결해달란 청원하러. 깡촌의 게르만들이 오히려 황송한겨. 자기들 최초 조상님 클로비스1세.는 독실한 그리스도였걸랑. 오메 그리스도의 반석 로마 주교께서 이 누추한 곳을. 성유발림 당하고 싶어유. 아들 당시 열한살 샤를마뉴.야 니도 성유발림 받으렴 저 우대한 베드로님의 로마주교님한테서. 

 

그리고 소피핀이 롱고바르디.에 서신 보내서, 둘이 친하니까. 헌데 이게 안통해서 소피핀이 직접 병력을 보내서 롱고바르디를 복속을 시킨겨 이게. 그리고 아들 샤를마뉴.가 아예 가서 지운거고 아래로 내쫓은거고.

 

로마교회란건 이때부터여. 

 

Pope Stephen II crossed the Alps to appeal for the aid of Pepin the Short upon his election in 752, following the Lombard conquest of Ravenna, resulting in the Donation of Pepin which strengthened the claim of the Popes to the de facto Papal States, and thus the incentives for secular interference in Papal selection.[17]  

 

포프.를 저리 쓰지만. 지금따위 포프가 아녀 저때는. 걍 로마교회 목사님이야. 로마주교여. 스테파누스2세.가 서기 752년.에 소피핀을 직접 만나 알프스를 넘어서. 저때는 교회의 중심은 라벤나.야 비잔틴 지배하의. 이 라벤나.가 엑스아르크.여. 비잔틴 바깥의 총 책임지인겨 서로마가 사라지고. 이 라벤나 교회.가 로마교회보다 권력이 훨 쎈거고. 자리는 로마가 위라지만,  롱고바르디.가 라벤나를 저 막판에 751년에 점령하걸랑. 

 

The Donation of Pepin in 756 provided a legal basis for the erection of the Papal States, which extended the temporal rule of the Popes beyond the duchy of Rome.  

 

서기 756년.에 소피핀.이 롱고바르디.를 항복을 시켜. 롱고바르디.가 아들 샤를마뉴.에 의해 18년 후인 774년에 지워지는거고 반기를 들어서. 저때 소피핀.이 사실상 로마주교의 영지들.을 준거야. 로마 위로 이탈리아땅 아펜니니 아래는 로마 교회땅입니다. 이게 페이펄 스테이트스.의 시작이야. 로마.는 이 명분으로로 또한 뒤에 피렌체에 산맥 너머까지 주인행세하는겨. 로마 교회의 저 명분의 뻣댐이 사보이의 이탈리아 킹덤 전까지 간겨 이게. 어엄 청난 전쟁인거야 이탈리아 땅 안에서 조차도. 이 로마 교회.란건 정말 엄청난 애들이야. 세상 최고의 징징이에서 세상 최고의 억지 억돌이 된겨 이게. 헌데 이게 지금 온 세상의 로마화.의 바탕이 된겨 어떻게 보면. 지금 세상은 카이사르의 로마화 지만. 이 바닥엔 또한 저 그리스도의 로마야 또한. 이 로마의 뢀지개.의 힘은 세계최고여 이게. 헌데 이럴수 있는 분수.를 천년 이상의 사유의 전쟁들이 바닥에서 해준겨. 저 당시의 논쟁의 수준을 근대이후 가 이길 수가 없어. 안돼 이건. 엄청난 거야 저 로마교회의 철학 신학 수준은. 아~~무도 감히 덤빌 수가 없어. 그냥 모.를. 뿐인거야 니들이. 

 

근대이후 철학과 산업혁명은 저기서 나온 것일 뿐이야. 

 

샤를마뉴 오는 774년 전에. 이미 서기 756년.에 로마 교회의 위상이 자리를 잡아.

 

헌데 말야. 세상에 공짜란 없걸랑. 게르만애들이 로마를 이미 저때까지 직접 주도하며 삼백년 이상. 이전 간접경험 합하면 칠백년이 넘었걸랑. 고대 로마 란 애들은 지극히 현실적인 애들이걸랑. 공짜란 없어. 게르만도 말야, 공짜란 없어. 무조건적인 이념에 미쳐서 자기들 현실을 버리지 않아.

 

프랑스.가 독일땅 30년 전쟁.에. 저 가장 고귀한 그리스도 란 타이틀을 갖고있는, 진짜 지저스의 자식.이라며 자처하는 애들이. 위그노를 조진 애들이. 저땐 위그노 프로테스탄트 편을 드는겨 이 프랑스가. 왜? 그게 자기들 이익이걸랑. 

 

이념에 미친 이 조선들의 땅빠닥에선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현실감이야.

 

이 이념에 미친 이들은, 보면 말야. 자살폭탄 테러하는 저 이슬람 여자들 보는거같아. 걍 북조선이면 미치는거야 좋아서. 중국이면 너무너무 미쳐 그 조선 오백년의 메조끼가 바닥에 있걸랑. 걍 폭탄을 짊어지고 쳐들어가는겨 자기 오육천만 민들을 같이 죽이려고 작정을 한거걸랑 저건. 저 이슬람 여자들이 얼마나 저 이념에 갇혀서 노예생활을 하냐. 그야말로 여전히 하렘이걸랑 체제가. 세뇌를 당하는겨. 아  이슬람 최고. 아  무서운거야 이념에 환장하면. 

 

자기들은 오백년 창녀 창기를 정권차원에서 모집 관리하고 병력에 제공했던, 관기를 전국에 두었던, 그야말로 정말 잡벌레중에 잡벌레걸랑 특히나 여자들 입장에선. 조선 남자들이 저런건 이해가 가. 내가 조선이여 해대면서. 조국은 조선과 라임이 같아서 입에 착착 달라붙걸랑 저것들이. 저 조선 수컷들이 과거 하렘을 두던 남충인 줄 조선 양반이고 싶은거라 저건 이해가 가. 어떻게 지들을 창기.로 정권이 공개적으로 부린 저것들을 떠받드냐는 거지 민족의이름으로.

 

헌데 후진 문명의 것들을 보면. 모~~두 이해가 가 저런 짓들이. 참으로 세뇌시키기  쉽걸랑. 

 

저것들이 지금 이 시대에. 자기들이 정의라며 울부짖는 현실이란.

 

벌레보다 못한 삶.

 

하루살이 벌레가 말야. 너보다 나. 쟨 걍 자기만 하루 살고 뒈지만 그만이지, 너는 정의의 이름으로 너의 이웃을 끔찍한 고통속에 죽게 할지니. 또한 너도 당할지니. 윗자리 배부른 돼지들의 의자는 몇개 없걸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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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핀.이 저 거대한 이탈리아 중북부의 땅을 주고. 그냥 두겠니. 진짜 세속을 갖게된 교황의 인사권.을 프랑크 애들이 개입을 하는겨 시작부터. 로마교황은 세속의 아래야 여전히. 

 

더하여, 저게 자기들 힘으로 교황령을 확보한게 아냐. 걍 남이 공짜로 준겨. 이건 자기들것이 제대로 될 수가 없어.

 

 

 The death of Stephen II's brother and successor Pope Paul I was followed by a bloody schism characterized by Toto of Nepi and Pope Stephen III; after Toto had his eyes gouged out and was imprisoned, Stephen III decreed that the entire Roman clergy had the right to elect the Pope but restricted eligibility for election to the cardinal-priests and cardinal-deacons (incidentally, the first use of the term "cardinals" to refer to the priests of the titular churches or the 7 deacons); the cardinal-bishops, supporters of Toto, were excluded.  

 

로마 주교 스테파누스2세.가 알프스 직접 넘어가고. 소피핀의 프랑크.가 롱고바르디.를 복속하고. 로마주교령들.을 로마주교에 줄때. 역시나 이사람.이 받은겨. 서기 756년.에. 이 사람이 그리고 다음해 죽어.

 

이 다음에 로마주교.가 스테파누스2세.의 형.이야. 

 

Pope Paul I (LatinPaulus I; 700 – 28 June 767)  파울루스1세. 동생보다 훨 많아 나이가. 실무를 이사람이 했던겨. 교황.에 오르고 세달 있다가 죽은겨 걍 늙어서. 이 

 

로마주교.자리가 이게 스테파누스2세 말년 서기 756년 부터.는 완전히 권력이 된겨. 포프.의 시작이야 실질적인. 아직 알프스 를 못넘은 포프 지만. 이 자리를 두고 네피.의 토토 콘스탄틴2세.와 다음 스테파누스3세.가 분쟁이 나는겨. 토토.의 두눈깔을 도려내고 투옥시키고 스테파누스3세.가 교황자리에 앉아. 그리곤 이때 카디널.이란 추기경들은 선거에 개입을 금지시키고, 성직자들이 민주선거를 하는겨. Lateran Council(769) 이게 서기 769년 라테라노 공회의.야 성요한 라테라노 교회.에서 나온 결과야. 

 

카디널.이란 말이. 6세기에 나와. 

 

There is disagreement about the origin of the term, but the consensus that "cardinalis" from the word cardo (meaning "pivot" or "hinge") was first used in late antiquity to designate a bishop or priest who was incorporated into a church for which he had not originally been ordained. In Rome the first persons to be called cardinals were the deacons of the seven regions of the city at the beginning of the 6th century, when the word began to mean "principal", "eminent", or "superior". The name was also given to the senior priest in each of the "title" churches (the parish churches) of Rome and to the bishops of the seven sees surrounding the city. By the 8th century the Roman cardinals constituted a privileged class among the Roman clergy. They took part in the administration of the church of Rome and in the papal liturgy. By decree of a synod of 769, only a cardinal was eligible to become Bishop of Rome. Cardinals were granted the privilege of wearing the red hat by Pope Innocent IV in 1244   

 

카디널.이란 말이. 피봇 힌지.로 보는데. 문 열고닫을때 회전축이야. 이건 6세기에 등장할때는 디콘.이었어. 디콘.이란건 서번트 미니스터.야. 얘들은 행정직이야. 사제가 아냐. 카디널.이 처음엔 낮은 의미였다가. 이때부터 점점 높아지는 겨. 그러다가 티튤러 교회 타이틀 패리쉬 처치 란게 머냐면. 저걸 영어를 막 보면 안돼. 로마 안에도 교회들이 많걸랑. 로마주교의 교회외의 교회들이 패리쉬 주변교회야. 여기 일곱 교회 타이틀, 이름 권위있는 교회들의, 원로 사제. 에게 이 호칭이 가는겨. 저 8세기 때에, 소피핀이 오기 전후에 이 카디널들이. 지배계급이 된거야 교회에서. 이들이 로마교회 행정에도 참여하는겨. 

 

티튤러 교회.란건 로마 도시의 교회들 초기에 기증받은 이들 타이틀.을 건 교회들이야. 이개 이삼십여개가 돼. 이들 중 일곱교회.엔 주교들 자리고. 로마 페이트리아크.가 대표로 있고 이게 나중 포프.가 되는거고 호칭이. 

 

원래 프리스트.란 사제는 성무만 봐야해. 행정은 디콘.이 하는겨. 이걸 다 쥐었다는겨 카디널들이. 이 인사권 총무권도 이전엔 디콘들이 다 했던겨 이게. 디콘이 허섭한 서번트가 아녀. 하물며 선거.도 디콘들이 주도적으로 선관위를 꾸려서 했던거고. 

 

이걸 원로사제들.이 디콘한테서 카디널 이름 뺏고. 자기들이 행정에 관여하면서 얘들이 선거를 깊게 관여하게 된거야.

 

이 시작.이 하필 스테파누스2세 말년 756에 교황령 받고. 죽고. 형이 교황되서 죽고. 요때 터진겨. 저때 선거전에 서너명이 다투고 그중 둘이, 토토.와 스테파누스3세 사이에서. 네피의 토토.를 카디널들이 밀은거걸랑. 

 

스테파누스3세.는 몽크.에 사제서임도 받고. 파울루스1세 임종도 지켜본 사람이야.

 

토토 콘스탄틴.은 귀족이지만 평신도여. 자격이 없는겨. 얘가 단 며칠만에 몽크.에 디콘. 자격증을 막막 받아. 세속 권력이 있어서. 그리고 무력으로 교회를 취한겨. 얘가 소피핀.에게 간청하는 서신을 보내 완곡하게. 하기싫은거 억지로 맡은거라며. 소피핀이 다 알고 얘를 무시하고, 힘이 스테파누스3세에게 실리는겨. 

 

토토.의 지원세력이 카디널들인겨 저때. 그래서 스테파누스3세가 교황선거.는 카디널.은 단 한명.만 투표권을 갖고. 성직자들 모두에게 준거야. 클러지.라는건 성직있는 모두야 이건. 교회 모두. 완전히 인민투표가 된겨 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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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교황.이란 자리를 뽑는 선거.란게. 소피핀 이전에는 이게 의미가 없는겨. 걍 로마 교회들 중에 짱 자리를 지들 몇몇 끼리 뽑는겨. 카디널이란것도 디콘에서 8세기 저때나 사제가 갖고 오는 말인거고. 걍 전임 주교가 죽으면 주교가 지명을 하고 죽거나, 아니면 걍 몇몇 숙덕숙덕이야 이게. 그리고 비잔틴에 통보하는 식인거고. 로마가 로마교회들 주변외에 세속영지가 없어. 자리가 의미 없는겨.

 

Acclamation. 어클러메이션. 박수로 추대하는겨 이건. 선거도 아니고. 고위직의 추대에. 또한 평신도들이 말야 교회밖에모여서, 성령을 봤다면서 누구를 교황에 앉혀야 한다고 데모도 해. 이리 주교 도 뽑아. 선거를 안하고 추대하는게 어클러메이션.이야

 

그러다 소피핀.이 땅을 준 서기 756년 부턴 이게 문제가 달라진겨. 카디널.이 이때 등장하는겨 본격적으로. 이 시작이 하필 실패한거야. 그리곤 이 카디널들 이란 일곱교회 원로사제들은 완전히 멀어진거야 선거에서. 이게 3백년 후에 회복이 된겨 1059년에.

 

이때까진 결국. 소피핀과 그 아들들.의 세속 권력에서 정하게 되는겨. 결국 투표권이 성직자들에게 갔다고 해도, 저기서 힘있는 놈은 세속의 권력들이야. 교황은 세속에서 결정하는겨. 3백년동안 직접적으로. 

 

There was no uniform procedure for papal selection before AD 1059. The Bishops of Rome and Supreme Pontiffs (Popes) of the Catholic Church were often appointed by their predecessors or by political rulers. While some kind of election often characterized the procedure, an election that included meaningful participation of the laity was rare, especially as the Popes' claims to temporal power solidified into the Papal States. The practice of papal appointment during this period would later result in the jus exclusivae, i. e., a right to veto the selection that Catholic monarchs exercised into the twentieth century.  

 

지금식의 콘클라베.가 시작한게 서기 1059년.이야. 카디널.들의 투표로 결정하는겨.  인민 민주 선거.가 그게 좋은게 아냐 그게. 난잡 혼잡할 뿐인겨 저당시. 교회가 오히려 개판이 된거야 3백년이.

 

 

안티포프.란 말이. 아비뇽 교황정때 나온말이 아냐. 서기 200년 부터 등장하는겨 이건. 특히나 저 네피의 토토.때부터 더 많아지는거고. 선거 결과를 인정을 못해. 대립교황들이 막막 서는겨. 이 배후에 세속권력이 있는거고.

 

Previously, Papal elections had effectively been controlled by the Roman aristocracy, unless the Holy Roman Emperor was strong enough to be able to intervene from a distance to impose his will. As a result of the battles with the Antipope Benedict X, Nicholas II wished to reform papal elections. At the synod held in the Lateran at Easter, 1059, Pope Nicholas brought 113 bishops to Rome to consider a number of reforms, including a change in the election procedure. The electoral reform adopted by that synod amounted to a declaration of independence on the part of the church. Henceforth, popes were to be selected by the Cardinals in assembly at Rome.  

 

1059년 카디널들의 콘클라베.를 시작한게 니콜라스2세 교황이야. 이사람도 안티포프.를 겪걸랑. 귀족들이 배후에서 콘트롤 하는거고. 걍 개판이 되는겨 큰 힘이 없으면. 신성로마황제.가 개입해서 지켜주지 않으면 안돼. 헌데 오토1세 전까진 또한 전국시대야. 지중해는 무슬림해적이 수시로 해적질하고. 오토1세 이후에도 황제가 강력하지 못해. 

 

선거를 성직자란 이름들의 아래에 맡기면 안되는겨 이게. 이걸 서기 1059년.에 카디널들.만 투표할 수 있게 하는거야.

 

이게 천년을 오는거야 지금.  당연히 이게 맞고. 그나마.

 

카디널.이 3백년 만에 회복이 된거야 제대로. 처음에 해보다가 눈깔 발리곤.

 

그런데 이 카디널들도, 결국  세속의 사람들이걸랑 가문들은. 신성로마황제가 힘이 있으면 교황자리는 황제에 휘둘리는겨 이게. 카디널들을 조종하면서. 

 

 

즉 저때 서기 1059년 까지만 보더라도. 로마 교황이란건. 자기 교황령 안에서 조차 내분 속에서 사는겨 상황이. 이전 오토1세.한텐 확실히 졌걸랑. 깨갱했걸랑. 그러면서 오토 4대 가고, 다음 살리안(잘리어) 시대 오고. 이탈리아 남부는 지중해 해적질 여전하고 이거 막아줘요 해서 노르망디.들이 서기 1천년 직전에 오는거고 이탈리아 남쪽으로. 프랑스는 위그 카페.가 막 섰을때고. 1066 정복왕 윌리엄이 막 잉글랜드 가는거고. 

 

저 상황에서 머 교황이 알프스 넘어의 세속권력을 가져오니 마니 할 상황이 전혀 될 수가 없어.

 

오토1세.한테 서임권을 달라. 유치한겨 오토1세 황제가 보기엔. 염치 없는 것도 정도가 있지 이게.

 

 

 

Pope Nicholas II (LatinNicholaus II; c. 990/995 – 27 July 1061), born Gérard de Bourgogne, was pope from 24 January 1059 until his death. At the time of his election, he was Bishop of Florence  

 

1059 카디널 콘클라베 선거제.를 만든 니콜라스 2세 교황.때 신성로마 황제가 하인리히 4세여. 뒤 카놋사 로드. 굴욕당하는. 

 

Henry IV (GermanHeinrich IV; 11 November 1050 – 7 August 1106) was Holy Roman Emperor from 1084 to 1105, king of Germany from 1054 to 1105, king of Italy and Burgundy from 1056 to 1105, and duke of Bavaria from 1052 to 1054.  

 

살리안조(잘리어)의 하인리히 4세.가 아빠 하인리히3세.가 죽은 해가 서기 1056년.이야. 이때 나이가 여섯살인겨. 이때 이탈리아 킹 자리를 취해. 이전에 네살때 게르만의 킹.이 된거고.

 

황제.란 타이틀.은 대관식.을 받아야 해 저때 로마 성베드로성당에 가서. 교황으로 부터 직접.

 

이사람은 원래 여섯살부터 황제여야 하는데. 공식으론 1084년. 34세.에 황제가 된겨. 대관식을 이때 한겨. 카놋사의 굴욕.이 1077년.이야. 

 

Pope Gregory VII (LatinGregorius VII; c. 1015 – 25 May 1085), born Hildebrand of Sovana (ItalianIldebrando da Soana), was pope from 22 April 1073 to his death in 1085.  

 

1059년 니콜라스2세.이후. 십여년 지나서 그레고리7세 교황.이야. 카놋사 굴욕 시킨. 하인리히4세.를. 

 

이사람 전 교황이. 알렉산더2세 교황이야.

 

Pope Alexander II (1010/1015 – 21 April 1073), born Anselm of Baggio (ItalianAnselmo da Baggio),[1] was pope from 1061 to his death in 1073. Born in Milan, Anselm was deeply involved in the Pataria reform movement. Elected on 30 September according to the terms of his predecessor's bull, In nomine Domini, Anselm's was the first election by the cardinals without the participation of the people and minor clergy of Rome.

 

이사람도 서기 1061년-73년. 하인리히4세.가 아직 11세야. 저때 살리안조 하인리히가 꼬마이고. 이전 오토의 작센들이 반란을 하걸랑. 저기가 어수선한거야. 황제도 어리고. 살리안조.도 얘가 막 3대걸랑. 기반이 약해.

 

이때 알렉산더2세 교황이. 알프스 넘어.의 교회에 눈을 뜬겨. 이사람 부터가 1059년 카디널 중심 선거의 오직 카디널만으로 뽑은 교황이야. 이사람때부터 카디널만의 정식교황이야. 이전 니콜라스.가 만든 선거제의 첫 시작인겨.

 

교회가 안정이 된겨 이 선거제로. 이사람이 교회의 성직매매.simony 시모니.를 금지하는겨. 이게 알렉산더 개혁.이야. 이건 세속권력의 인사권.을 갖고오겠다는 의지야 로마 교황의. 헌데 저게 세속의 입장에선 세금이걸랑 성직매매가. 이게 세속과 부딪히는거야. 

 

이때 등장한 첫 사건이. 바로 캔터베리 대성당.의 토마스 베켓.이야 하필. 헨리2세.의 오른팔이었던 챈슬러.가 대주교.로 임명되고 저분위기에 휩쌓인거야 저 두사람이. 둘이 졸 친했걸랑. 이게 제프리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의 중심이 되고.

 

이 다음이 그레고리 7세야. 아직 하인리히4세 가 어려. 선배 교황의 시모니 이슈.를 서임권.으로 제대로 가격을 하는겨. 황제를 포함 세속이 교회에 더 이상 간섭하지 말라.는걸 바닥에 먼저 까는거야 이건. 양면의 공격이야. 

 

그레고리7세는 어클레임. 박수로 추대된겨 웃기게도. 그만큼 자리가 더욱 확고해진겨. 이 로마 교회 교황.이 힘을 받게 된건 니콜라스2세.의 1059년 선거제도 개편이야. 이걸 이어서 알렉산더2세.가 기반을 다진 교회에서 제대로 세속에 목소리를 내고. 다음 주자.가 세속 황제를 무릎꿇리는겨. 

 

황제가 무릎꿇고 다시 알프스 넘어가서 작센 반란 조지고. 삼십대 중반이야. 여섯에 황제자리에 앉았지만. 이미 닳고 알고 다 알아 이 하인리히4세가. 힘도 생기고. 카놋사 굴욕의 복수를 하는게 로마약탈이고 감금하고 새 교황 자기가 세워서 대관식을 이때서야 하는겨 이사람이. 

 

즉 서임권 이야기는. 저 와중의 명사일 뿐이야 서임권이란건. 중요한 논쟁 주제이지만.

 

교황이 감금당하고. 완전히 무릎꿇고. 이 완전히 죽은 판세에서. 이 판을 뒤집은게 우르바누스2세.교황의 레반트 십자군 발기야. 1095년. 이건 기가막힌 시나리오야. 이걸로 완전히 기죽은 로마 교회가 주도권을 잡고 서임권도 갖고 오는겨. 이게 딱 2백년 반짝 한겨 레반트 십자군 국가들이 버티는. 로마 교회의 황금시기는 저 레반트 십자군 2백년이야 이게. 

 

이러면서. 교회와 세속의 대립이 한편으로는 극에 달하는겨. 이전까지 교회는 세속의 확실한 아래였어. 

 

니콜라스2세 1059년 부터. 어 이거 이상한걸, 해대다가 알렉산더2세에 그레고리7세.가서 황제 무릎 한번 꿇여보고, 줘 터지고. 다시 십자군 발기로 주도권 갖고 오면서 이 두 사이가 아주 팽팽하게 된거야.

 

이게 결국 겔피 기벨리니의 프리드리히2세 황제 교황파 황제파 로 가는거고. 이후 대공위 시대의 황제 안티황제.가 서면서 세속의 게르만 킹들 끼리 싸우는겨 이때는 배후가 이제 교황이 된겨 이게. 아주 웃긴 흐름인거야 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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