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lkan region c. 850. Duchy of the Croats shaded pink.

서기 850년 경 발칸 지도인데. 크로아티아.는 7세기.에 더치.가 서. 오른쪽 아래 세르비아.는 8세기.에 독립 군주가 서고. 크로아티아.가 서기 925년.에 로마교황 승인으로 킹덤이 될때. 세르비아.는 170년 후인 1091년.에 벨리키 주판. 자기나름 킹덤이 된겨. 그리곤 1217년.에 정식 킹덤이 돼 비잔틴으로 부터. 

 

크로아티아.는 7세기.에 달마시아 왼쪽해변에 사바 강 Sava river 까지 자리잡는 이들이. 크로아티아 더치.야. 다른 크로아티안.의 더치.가 판노니아 더치.야. 7세기로 봐 이것도. 저지대 판노니아.여. 수도가 sisak 시삭전투.의 시삭.이야. 여긴 드라바 강. Drava 과, 내려온 다뉴브.가 만나는 접점이야. 

 

크로아티안.의 두개의 더치.가 저지대 판노니아 더치.와 사바강과 아드리아해까지의 크로아티아 더치.야. 지금 판노니아 더치.는 드라바강 위에는 헝가리 땅이 된거고. 

 

판노니아 더치.는 저당시 아바르족.의 지배하에 있는거야. 더치.가 대단한게 아니라. 걍 로마식 dux 둑스. 바바리안 추장이야. 그 듀크여. 아바르족의 세입자야 크로아티안의 판노니아는. 

 

아바르 567–after 822  

1차불가리아 681–1018 

 

아바르.가 서기 8백년 지나면서 오른쪽 불가리아.에 의해 지워지는거야. 아바르.가 저때 왼쪽 프랑크.에게 도움을 요청하는겨. 샤를마뉴.가 막 통일 다하기 직전일때 부터. 그리스도 세례도 받아. 이전까진 전쟁상대였다가. 헌데 결국 불가리아.에 지워져. 그러면서 판노니아 더치.의 크로아티안들은 불가리아의 세입자가 된겨. 이 크로아티안의 판노니아 더치.가 아바르.에 왼쪽 프랑크.에 오른쪽 불가리아에 낑기면서 세입자 생활하다가, 마갸르.에 쫓겨나고 사바강 아래의 크로아티아 더치.에 들어가면서 킹덤이 되는겨. 서기 925년.에. 로마 교황.의 인정으로. 

 

사바강 아래의 크로아티아 더치.는 비잔틴.이 보증한거야. 7세기에. 이때는 중간에 세르비아가 프린스 들어서기 전이기도 하지만, 비잔틴.은 여전히 이태리 해변을 갖고 시칠리아도 비잔틴이야. 롱고바르디 킹덤이 들어서도.  라벤나 Ravenna 가 비잔틴의 외곽 수도로 핵심이야. 여긴 롱고바르디에 751년.에 뺏겨. 비잔틴과 멀기는 하지만 바다로 만나는겨 저 크로아티아 더치.하고는. 그러다가 샤를마뉴 등장하고 이탈리아는 로마교회가 세력을 다 갖고 가는겨. 크로아티아 오른쪽엔 세르비아.가 벨리키 주판.이라는 지들식 킹이 선거야 독립국으로. 크로아티아.가 판노니아 더치.와 합해서 킹덤이 되면서 로마 교황이 승인을 해주는 서신을 줘. 이 크로아티아.는 로마교회로 들어가고. 지금 대부분 여긴 로마카톨릭이야. 오른쪽 세르비아.와 완전히 달라. 세르비아.는 킹덤을 비잔틴이 승인하면서 여긴 90퍼가까이가 반대로 오소독시.여 지금. 페이트리아크.가 세르비아에 있어. 그리스 Greece도 페이트리아크 교회가 없는데.

 

 

서기 850년 저당시 지도를 보면. 판노니아 더치.의 위에 모라비아.야. 얘들이 다뉴브를 따라 아래까지 온겨. 이 모라비아.와 크로아티아족 판노니아 더치 왼쪽이. 판노니아 카린티아 카르니올라.라는 지역이름으로 써있는 전체.가 바바리아.의 동쪽 마크.여. 이지역은 고대로마때 Noricum 노리쿰.이란 곳이야. 

 

즉 저때보면 말야. 오스트리아. 라는건 아직 없을 때야. 

 

지금 오스트리아 슬로베니아 땅이. 이게 매우 애매한거야. 이 지역을 알려면. 할 수 없이 다시 로마로 돌아가야 하는데 말야. 여기는 저 판노니아와 함께 상당히 애매한 지역이야 이게. 다들 애매하게 알고 있는거고.

 

판노니아.라는건. 부다페스트.에서 다뉴브가 뚝 떨어져 내려가면서 시삭 지나서 오른쪽 흘러 다시 내려가는 베오그라드까지여. 여기와 만나는 사바 강. Sava 까지고. 이 사바 강이 알프스 에서 동남진하면서 슬로베니아 왼쪽에 남부에 지나서 크로아티아 숙 손가락 내민 세르비아 와의 경계선이야. 판노니아 에서의 중심은 헝가리 가운데 줄기 다뉴브 여. 이 안쪽지역을 판노니아 라 하고 여기가 평원인겨. 오른쪽 티사강 까지. 헌데 판노니아 하면 다뉴브 까지야. 여기가 또한 아바르.가 있던 중심이고. 

 

오스트리아 슬로베니아.가 판노니아 왼쪽에서 저 판노니아.에 있는 아바르.에 다음 슬라브들.을. 막는 마크인겨 여기가. 판노니아 왼쪽과 겹치면서. 이게 고대로마의 노리쿰 Noricum 이야. 

 

저 땅은 거대한 마크. 지킴이 경계지역 초소인겨. 저땅은 말야. 롱고바르디 킹덤.의 일종의 마크였던겨 저게. 저긴 이탈리아의 롱고바르디.를 지키는 마크 였다가. 샤를마뉴.가 이탈리아을 점령하면서, 저지역은 이탈리아 를 지키는 마크.가 아니라. 바바리아 더치.를 지키는 마크.가 된겨. 호적을 파서 바바리아로 준겨 샤를마뉴의 자식 경건 루이가. 바바바리아.가 저 마크들을 카린티아.를 거점으로 관리하다가. 카린티아.는 더치.로 승격을 하고 이때 북쪽은 오스트리아 마크.를 따로 두면서 이건 카린티아에서 떼내고 바바리아.가 직접 관리하는겨. 물론 카린티아 더치.도 바바리아 친척인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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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chy of Friuli , March of Verona and Aquileia 

 

롱고바르디 킹덤일대 프리울리  더치.가 샤를 마뉴가 오고 그대로 둬. 이탈리아 킹덤 세입자로. 이걸 오토1세가 재통일하면서 이탈리아 킹덤에서 떼내서 자기 동생의 땅 바바리아 더치.의 마크.로 만드는겨. 이게. 베로나 앤 아퀼레이아 마크.인데. 이전이름도 같어 이게. 저당시.는 마크.니 더치.니 구분이 크게 없어 지위가. 둑스.가 듀크.고 지배인이야. 마크.의 주인이 바바리아로 바뀐겨 오토1세때. 이 베로나 아퀼레이아 마크.가 이 동쪽의 중심인겨 찰스들의. 그러다가 이 중심이 나중 생기는 카린티아.로 옮겨져. 아퀼레이아.는 교회령으로 가고. 베로나.는 왼쪽 이탈리아만 지키면 되는거로. 하인리히4세 카놋사 로드 이전 썰.

 

롱고바르디 일땐. 베로나 아퀼레이아 마크 이전 이름 프리울리 더치.가 동북부 이탈리아에서 오스트리아 와 슬로베니아 의 땅을 일종의 마크로 둔거야 이게. 프리울리 더치 성격이 저 동북지역을 관리하면서 막는거야. 롱고바르디 킹덤의 땅이, 이탈리아 반도 만이 아니라, 저 마크 지역까지가 롱고바르디 킹덤이야. 지금 대부분 롱고바르디 킹덤 지도 보면 다 잘못된겨 그건. 걍 그런줄 알아. 내가 제일 잘 나가니께롱.

 

그리고 샤를마뉴.가 와서 걍 그대로 두다가, 작센의 오토1세.가 다시 통일하면서, 당시 이탈리아 킹덤이 반反 작센이었걸랑. 오토1세.가 이때 이탈리아 킹덤을 사실상 지운거야. 이때부터 신성로마제국.의 이탈리아 킹덤.은 타이틀 만 남게되는겨 이게. 황제 는 이탈리아의 킹.이란 타이틀만 취하는겨. 이전에는 파비아.에 수도를 둔 정식 이탈리아 킹덤 이었어. 오토1세.가 저길 점령하고, 명함 만 남기고. 저 프리울리 베로나 를 바바리아 로 호적을 옮긴겨. 여긴 이탈리아 킹덤꺼였걸랑. 즉 이탈리아 동북쪽이 바바리아 땅으로 들어간겨 이게. 그리고선 동쪽은 아퀼레이아 교회령으로 따로 독립을 하는겨. 베로나 마크.만 남고 바바리아가 갖고 가는거고 여전히. 

 

샤를마뉴.가 롱고바르디 를 지우고 이탈리아 킹덤을 세워. 저 지역을 그대로 둔거야. 프리울리 더치.는 그대로 이탈리아 킹덤의 더치.이고. 또한 말이지. 오스트리아 슬로베니아 에 있던 롱고바르디 당시의 프리울리 더치의 주변마크.들을 여전히 프리울리 더치.의 관할로 둔겨. 이걸 경건루이.가 한번 뜯어내서 반을 바바리아.에 주고. 오토1세 가 나머지 반.인 베로나 아퀼레이아.까지 바바리아에 주는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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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로 가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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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 킹덤 481–843

 

수에비 킹덤 409–585

부르고뉴족 킹덤 411–534

비지고쓰 킹덤 418–c. 721

 

Odoacer's kingdom 476–493

오스트로고쓰 킹덤 493-553.

롱고바르디 킹덤 568–774

Kingdom of Italy (Holy Roman Empire)  855–1801

 

우리가 대부분 확실히 모르는게 저놈의 신성로마제국.의 이탈리아 킹덤이란거야. 이탈리아 킹덤.이 있어 이름은 천년 동안. 아를 킹덤.도 있어 4백년이. 얘들 코트.도 있는겨. 이탈리아 킹은 황제가 대리인 앉힌거고. 파비아.에 있었어. 그러다 이름 뿐이 된 작은 코트가 밀라노 위 몬차. monza 로 옮긴겨. 이탈리아 킹덤.이 서기 855년 부터.인데 말야. 저건 경건 루이 세 아들이 베르됭 조약 843년 후에 이탈리아 킹덤.이라 한겨. 원래 이자리가 장남 로타르.가 황제. 타이틀의 로마인의 황제 였던 자리야. 이게 의미가 약해지면서 킹덤으로 주저앉고 오토1세가 다시 통일하면서 얘가 코트를 여기 안 있고 자기 땅으로 가면서 자연스레 신성로마황제.는 독일 땅이 된 것일 뿐이걸랑 이게. 

 

서로마 가 망할때. 수에비.가 먼저 포르투갈 끝으로 가서 킹덤 세우고. 부르고뉴족.이 부르고뉴 땅에서 킹덤세우고. 비지고쓰 서고쓰가 툴루즈.에 있다가 피레네 넘어가면서 스페인과 아키탄 전역을 지배하는 킹덤이 되고 클로비스1세.의 프랑크가 늦게 시작해서 피레네 쪽까지 통일을 한겨.

 

오도아케르.가 476년.에 서로마의 라벤나.를 점령해. 17년간 지배해. 얜 서로마.의 파트리쿠스였어 게르만이지만. 게르만 외인부대.를 지휘하는 로마의 게르만동맹군 사령관이었어. 이탈리아 킹이 되고나서 오스트로고쓰.라는 동고쓰가 쳐들어오는거야. 이 동고쓰족은 다키아 땅에 있던 이들이야 비잔틴의 정식 승인하에. 이들이 달마시아에 프리울리 거쳐서 이탈리아 북부로 들어와서 해변의 라벤나.의 오도아케르.를 점령한겨. 오도아케르를 초대하고 죽이고 오스트로고쓰 킹덤.이 60년 서는겨. 얘들의 땅도. 달마시아 까지 오스트로고쓰 킹덤의 땅이야. 정확히 저 판노니아에 노르쿰.의 다뉴브 안쪽이 다 이 오스트로고쓰 땅인겨 이탈리아 포함해서.  거대한 킹덤이야 이게.

 

오스트로고쓰 킹덤일때 스와비아(슈바벤)와 바바리아.가 프랑크.의 더치.가 되는겨. 바바리아.는 오스트로 고쓰.가 망하자마자 프랑크의 더치가 되는거고. 저때 오스트로고쓰가 저까지는 못 가져오고, 알프스 포함 동쪽 노리쿰.과 판노니아.에 달마시아 까지 다 오스트로고쓰 킹덤이야. 여기에 아바르.와 슬라브.가 껴들어와 자리잡은 거고. 그래서 쟤들을 상대하는건 저당시 클로비스의 메로빈지언들이 아니라 오스트로고쓰.인거야. 얘들 60년 있을 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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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틸라.가 카탈로니안 평원. 샤롱 마우리카 트롸 등 이름 붙은 이 전투에서 패한 듯 돌아와서 이탈리아 북쪽 쑥대밭 만들고 술처먹고 죽걸랑. 저 전투.가 결정적이고 이때가 최후의 로마인.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여. Flavius Aetius. 이 아에티우스.가 아틸라 죽고 다음해 암살당해. 이때 황제가 

 

Valentinian III (LatinFlavius Placidius Valentinianus Augustus;[a] 2 July 419 – 16 March 455) was Western Roman Emperor from 425 to 455. His reign was marked by the ongoing collapse of the Western Empire.  

 

발렌티니아누스 3세.야. 얘 아빠가 콘스탄티우스3세.인데. 이 콘스3세.는 호노리우스.의 사령관이었어. 로마가 갈리아 이후 8백년 만에 함락을 당해. 비지고쓰족 알라릭.에게. 알라릭.은 복수하는거고. 호노리우스.가 스틸리코.를 의심하고 스틸리코.가 비잔틴에 가서 호노리우스.의 형 아르카디우스.와 코트인간 루피누스.에게 죽걸랑. 이때 스틸리코를 따르던 비지고쓰족들도 다 죽고. 복수로 로마 약탈 하고 로마가 죽었슈 하니 서로마 호노리우스.가 자기 키우던 닭 로마 죽은줄 알고 흑흑대던. 저 두 형제 황제가 테오도시우스.의 두 아들이고 할때 말야

 

스틸리코.가 비잔틴 가서 죽고. 다음 사령관을 잇는게 콘스탄티우스3세 나중 자칭 황제. 얘가 호노리우스.의 병력으로 갈리아땅 자칭 황제자연하는 로마군단 진압하고 게르만 진압하면서 자기가 자칭 황제 해대는겨. 죽고. 호노리우스.도 바로 죽어 자식없이. 이 서로마.의 황제자리가 콘스탄티우스3세.의 자식.인 발렌티니아누스3세.에게 가는겨. 얘가 엄마가 호노리우스.의 배다른 누이걸랑 또한. 얘도 그래서 테오도시우스 조.야. 엄마때문에. 얘 일때 아틸라와의 저 샬롱 모리카 전투가 있었고 이때 로마 사령관이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야. 로마에 인물이 많은겨 저때도. 헌데 이 황제 발렌티니아누스.가 역시나, 육십넘은 할배 아에티우스.의 힘이 무서운거야. 초대하곤 암살 시키는겨. 스틸리코 당하듯이.

 

아틸라도 죽고. 로마가 다시 일어날 수 있을 때걸랑. 쟤가 그럴 기회를 아주 밟아버린거야. 저게 아틸라 죽고 다음해 서기 454년.이야.

 

아에티우스.를 따르던 사람들이 열받걸랑. 이중 시디언. 이란 스텝 조상님들이. 저 황제를 암살하는겨. 이게 45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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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당시 서로마 수도.가 말이야. 호노리우스.는 닭 로마 슬퍼하며 울던 곳은 라벤나 Ravenna 야. 해변도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위기의 3세기 정리하고 로마를 2분할 할때 서로마.의 수도를 로마에서 밀라노.로 옮긴겨. 서기 286년. 이때 로마는 버려진겨 로마라는 도시는. 그리고 호노리우스.가 훈족이 무서워서 오른쪽 해변으로 옮긴거걸랑 150년 지나서. 방어 요새로 저기가 최고야. 그리고 스틸리코 죽고. 로마가 서고쓰에 약탈당하고. 콘스탄티우스3세.가 갈리아 출격하고. 죽고. 호노리우스 자식없이 죽고. 콘스의 아들 발렌티니아누스3세.가 아틸라.가 더 무서워서 수도를 라벤나에서 로마.로 간거야 얘때. 밀라노로 간지 170년 만에 로마가 다시 수도가 된겨. 그리곤 아에티우스.가 아틸라를 이기고. 아틸라가 술처먹고 죽고. 황제가 아에티우스 암살시키고. 다음해 황제도 암살당하고. 이건 로마에서 벌어지는 일이야.

 

Petronius Maximus[1] (LatinFlavius Anicius Petronius Maximus Augustus)[2] (c. 396 – 31 May 455[3][4]) was Western Roman Emperor for two and a half months in 455 

 

쟤 다음이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야. 얜 로마 원로원이야. 이제 수도 코트는 로마인겨. 얘가 발렌티니아누스3세 암살의 배후여. 그리고 뇌물먹여서 얘가 황제.가 돼. 이전 황제 마누라도 얘가 취해. 얜 딱 두달 반. 한거야. 얘때 다시 로마가 약탈 당하는겨. 사르디냐섬에서 온 반달족.한테. 비지고쓰족 도움 요청한게 안되고. 도망가는겨. 아수라장이 된겨. 이전 비지고쓰족 알라릭의 로마약탈.은 얘들 약탈에 비해선 약탈이 아닌겨 이건. 그때는 버려진 로마고. 이땐 수도 로마인겨. 아주 걍 아작을 내 아작을. 반달족 애들이. 황제는 도망가다가 근위대들도 잃어버리고 죽어. 

 

Julius Nepos[1] (full name: Flavius Julius Nepos Augustus; c. AD 430 – 480) was de jure and de facto Western Roman Emperor from AD 474 to 475 and then only de jure until his death in AD 480. He was also the ruler of Roman Dalmatia from AD 468 to 480.[2]  

 

20년이 지나서. 율리우스 네포스. 얘 다음이 서로마 마지막 로물루스.야. 네포스.가 마지막이냐 로물루스.가 마지막이냐 하는데. 주류는 로물루스.이고.

 

In 475, Orestes was appointed magister militum and patricius by Western Roman Emperor Julius Nepos. This proved to be a mistake on the part of Nepos. By August 28, 475, Orestes, at the head of the foederati levies, managed to take control of the government in Ravenna, which had been the de facto capital of the Western Roman Empire since 402.

 

오레스테스.가 율리우스 네포스.에 의해 마기스테르 밀리툼. 군수권을 쥔겨. 이탈리아의 게르만들 동맹군도 쥐어. 그리곤 얘가 쿠데타를 해. 라벤나.로 쳐들어가. 네포스.는 도망가고 나중 암살당하고. 반달족 약탈로 다시 수도는 라벤나.였던거고.

 

Orestes refused their petition, and they turned to Odoacer to lead their revolt against Orestes. Orestes was killed at Placentia along with his brother Paulus outside Ravenna

 

오레스테스.가 황제를 내쫓고, 자기 아들 꼬마 로물루스.를 올린거야. 

 

 

저때 게르만들이 도와줬걸랑. 이들이, 약속대로 우리가 이탈리아땅에 영구히 살게 해달라.고 청원을 해. 이걸 거절해. 이 게르만들이 찾아간게 오도아케르.야. 오도아케르.가 이 병력으로 오레스테스.를 치는거야. 피아첸차에서 죽이고. 라벤나.로 가서 로물루스.를 폐위시키는겨. 오도아케르.가 로물루스.를 보고는. 애가  이뻣나봐 남자애가. 죽이지 않고 연금줘서 살게 해. 저게 서기 476년.이야. 

 

Odoacer generally used the Roman honorific patrician, granted by the emperor Zeno, but is referred to as a king (Latinrex) in many documents 

 

오도아케르.가 동로마의 황제 제노.에게서 받는 호칭은 파트리쿠스.여. 즉 넌 로마의 일개 귀족이란겨. 너의 시민들은 너의 클라이언트들일 뿐이란겨. 그렇지만 많은 문서에서 오도아케르.는 rex 렉스.여. 로마 공화정 이전의 킹.인 렉스. Rex. 임레파토르.라는 엠퍼러.는 동로마 혼자 만 쓰는겨.

 

오도아케르.가 이탈리아 킹.의 최초 인간이야. 기원 후.의. 

 

오도아케르.는 게르만이야. 게르만이 로마를 다스리는겨. 신중해야 해. 자기는 이전 쫓겨난 율리우스 네포스.의 대리인 일뿐이라는거야. 네포스.가 달마티아.로 도망갔걸랑. 이 네포스.가 480년에 암살을 당해. 오도아케르.의 지시로 죽였다는 설이 주류이고. 그러면서 달마티아.를 갖고오는거야. 이 달마티아.가 서로마와 동로마의 사이지만 이건 서로마땅이걸랑.

 

Zeno the Isaurian (/ˈziːnoʊ/LatinFlavius Zeno AugustusByzantine Greek: Ζήνων; c. 425 – 9 April 491), originally named Tarasis Kodisa Rousombladadiotes[1] /ˈtærəsɪs/, was Eastern Roman Emperor from 474 to 475 and again from 476 to 491  

 

비잔틴.의 제노. 지노우.는 레오 다이너스티.여. 이 전이 호노리우스의 형 아르카디우스.인 테오도시우스 조.이고. 레오 조 다음이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나오는 유스티니안 조.야. 이 제노.가 오도아케르 의 저 킹덤.이 싫은거지.

 

The Ostrogothic Kingdom, officially the Kingdom of Italy (LatinRegnum Italiae),[5] was established by the Ostrogoths in Italy and neighbouring areas from 493 to 553.  

 

Theodoric the Great (454 – 30 August 526), also spelled Theoderic or called Theodoric the Amal (/θiˈɒdərɪk/LatinFlāvius TheodoricusGreek: Θευδέριχος, Theuderikhos), was king of the Ostrogoths (471–526), and ruler of the independent Ostrogothic Kingdom of Italy between 493–526,[3] regent of the Visigoths (511–526), and a patrician of the Roman Empire. As ruler of the combined Gothic realms, Theodoric controlled an empire stretching from the Atlantic Ocean to the Adriatic Sea. He kept good relations between Ostrogoths and Romans, maintained a Roman legal administration and oversaw a flourishing scholarly culture as well as overseeing a significant building program across Italy.[4]

 

오스트로고쓰 킹덤.의 테오도릭.은 비잔틴에 하미지 하던 게르만 수장이야. 다키아.와 모에시아(미셔) 에서 정착을 허락받은 상황이야. 모에시아.는 발칸산맥 넘어서 흑해 주변까지야 땅이. 황제 제논.이 테오도릭.에게 너 서로마.를 먹으면 너가 저거 갖아. 하는겨. 

 

이 테오도릭.이 프리울리 아퀼레이아 쪽으로 들어가는겨 달마티아 점령하고. 그리고 오도아케르.를 치는거고. 오도아케르.를 초대하고는 암살을 하고. 오스트로고쓰 킹덤.을 세워. 493. 60년동안. 자식대에서 끝난겨. 이사람이 단지 무식한 게르만들이 아냐. 이미 배울 데로 배운겨 오도아케르나 테오도릭 이나. 

 

그리고 저 테오도릭의 오스트로고쓰 킹덤을 쳐부수는게. 제노 다음 조.의 유스티니안 조인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야. 환관 나르세스.가 데려간 용병이 롱고바르디 인데 이 롱고바르디.가 저당시 있던곳이 지금 슬로베니아 땅인겨 이게. 즉 이탈리아 동북부 접경지야. 여기에 아바르에 슬라브에 낑겨서 이들이 있었던겨. 슬라브가 다뉴브 티사 강 따라 판노니아로 들어오고, 여길 아바르가 들어와서 슬라브 지배하고. 여기에 롱고바르디가 낑겨 들어간겨. 여 구석탱이에 낑기다가 비잔틴이 오스트로고쓰 치러 갈때 용병으로 아퀼레이아 프리울리를 지나 이탈리아로 들어간겨.

 

오스트로고쓰킹덤의 땅 역시나 달마티아 까지야. 다뉴브 떨어지는 판노니아 포함. 노리쿰 포함. 지금 오스트리아 슬로베니아.는 오도아케르 에 오스트로고쓰에. 다음 롱고바르디 킹덤의땅도 마찬가지야 이게. 

 

 

프랑크 킹덤 481–843

 

수에비 킹덤 409–585

부르고뉴족 킹덤 411–534

비지고쓰 킹덤 418–c. 721

 

Odoacer's kingdom 476–493

오스트로고쓰 킹덤 493-553.

롱고바르디 킹덤 568–774

Kingdom of Italy (Holy Roman Empire)  855–1801

 

오도아케르.가 설때 이미 알프스넘어는 수에비 부르고뉴 비지고쓰가 아틸라 이전에 쫓겨나서 들어선거고. 프랑크.는 아틸라와의 카탈로니안 평원 전투.때 클로비스1세 할배 메로빈지언 단어 조상님이 싸우신거걸랑. 프랑크는 이후에 들어서는겨. 오스트로고쓰 킹덤일때에 스와비아 와 바바리아 가 프랑크의 더치.가 되는거고. 얘들은 알프스 넘어 잇는거야. 바바리아 더치.라는 저당시 올드 스템.은 알프스를 기어 올르는게 아냐. 잘츠부르크.라는 오스트리아 도시는 알프스 넘어서 막  기슭에 잇는겨. 저기가 바바리아 남쪽 경계여. 

 

St Peter's Abbey (GermanStift Sankt Peter), or St Peter's Archabbey (German: Erzabtei Sankt PeterLatinArchiabbatia sancti Petri Salisburgensis), is a Benedictine monastery and former cathedral[1] in the Austrian city of Salzburg.[2] It is considered one of the oldest monasteries in the German-speaking area, and in fact the oldest with a continuous history since its foundation in 696

 

잘츠부르크.는 완전히 저건 교회도시걸랑. 수도원의 도시야. 처음 수도원이 성베드로 수도원.인데 서기 696년 에 선거야. 프랑크.에 이때즈음에 들어온걸로 보면 돼. 즉 프랑크의 바바리안 들은 서기 7백년 일때는 알프스를 넘어간게 아냐. 대부분 저긴 오도아케르.에 오스트로고쓰.에 롱고바르디.의 땅이었던겨. 여기에 아바르.와 슬라브.가 쑤시고 들어와서 부딪히는거고. 

 

오스트로고쓰. 60년이 끝나고 롱고바르디.가 이탈리아에 서면서 2백년을 있어. 그러면서. 저짝에 마크를 두는거야. 이 마크의 주인은 프리울리 더치.이고.

 

In June 774, the kingdom collapsed and the Franks became masters of northern Italy. The southern areas remained under Lombard control as the Duchy of Benevento is changed into the rather independent Principality of Benevento. Charlemagne adopted the title "King of the Lombards" and in 800 was crowned "Emperor of the Romans" in Rome  

 

샤를마뉴.가 서기 774년.에 롱고바르디. 를 지워. 나이 20에 아빠 소피핀.을 이어서 프랑크 킹.이 되고. 6년후에 이탈리아를 정복해. 그리고 넘어가서 통일하고 서기 800년에 황제관.을 쓰는데. 

 

서기 774년에 롱고바르디.를 지우고. 롱고바르디는 나폴리 아래 베네벤토.로 내려가 더치.가 되고. 비잔틴의 세입자인듯 한거야 처음엔. 샤를마뉴.는 자기 호칭을 롱고바르디 족.의 킹. Rex 이야. 샤를마뉴.는 롱고바르디.를 지우지 않았어. 그 이름을 그대로 자기가 취한겨. 그 땅도 그냥 그대로 둔겨. 프리울리 더치.에 이 더치 오른쪽의 나중 마크령들도 그대로 둔거야.

 

이걸 제대로 정리한게 안보이는데. 

 

Enn 이란 좌표. 슈타이어 위 도시.가 Enn 강이 흘러 다뉴브와 만나는 도시. 샤를 마뉴.가 여기 경계로 오른쪽에 아바르 마크.를 세움

 

Carantania, also known as Carentania (SloveneKarantanijaGermanKarantanien, in Old Slavic *Korǫtanъ), was a Slavic principality that emerged in the second half of the 7th century, in the territory of present-day southern Austria and north-eastern Slovenia. It was the predecessor of the March of Carinthia, created within the Carolingian Empire in 889.  

 

Between 819 and 823, the native Slavic population supported Ljudevit Posavski in revolt against Frankish overlordship.[4] In 827, the Bulgars attacked Carinthia and, in 828, Louis the Pious reorganised Friuli into four counties, the two northernmost of which — Carinthia and Lower Pannonia — were detached from the Italian kingdom and incorporated into Bavaria. LouisKing of Bavaria, reorganised Carinthia into Frankish counties soon after.[4] The division of Carinthia may have occurred as early as before 819 or perhaps simultaneously with division of Friuli. Before this, the Carinthians were still ruled by native dukes. The new comital administration was mixed Bavarian-Slavic.

 

저때 프리울리 더치.의 마크.인 오스트리아 슬로베니아 지역의 마크.가 카란타니아.야. 이게 뒤에 카린티아.가 되는건데. 

 

7세기 중반.에 보이는겨. 서기 650년 전후에. 롱고바르디 킹덤 있을 때야. 이 카란타니아.가 지금 오스트리아 가운데 대부분이야. 슈타이어. 엔. 린츠. 라는 비엔나 왼쪽 가운데 도시들에 알프스넘어 아래로 그라츠.에 클라겐푸르트.에 슬로베니아 접경지걸랑. 여기에 7세기에 슬라브들이 자치령으로 들어와 살았다는겨. 

 

모라비아 사모제국.이 631-658 이야. 이 모라비아의 슬라브들이 판노니아 고지대까지 들어와. 모라비아란곳이. 바로 아래가 헝가리야. 카르파티아 산맥과 수디티즈 산맥 사잇길로 들어오는거걸랑. 이들이 왼쪽으로 이 오스트리아 땅까지 들어오는겨. 헌데 저기는 롱고바르디 관할이야 역사적으로. 단지 허름해진겨. 아바르 들이 판노니아에도 들어오고. 즉 오도아케르 이후 오스트로고쓰에 롱고바르디.가 저기를 방치한거야.

 

카란타니아.란 땅은 고대로마.의 노리쿰.에 서로마 관할에 오도아케르 킹덤. 오스트로고쓰 킹덤. 롱고바르디 킹덤.의 땅이야.

 

오스트로고쓰 킹덤.이. 테오드릭 이 다키아에서 오면서 달마티아.부터 점령하면서 지금 보스니아에 세르비아까지여 이땅이 처음엔. 다음 롱고바르디가 설때엔 얘들이 저 달마티아.넘어로는 포기를 한거야. 자기들 원래 거주지.인 지금 슬로베니아와 위 오스트리아까지만 지배를 한겨. 그것도 허름하게. 그러면서 저짝은 크로아티아 더치.가 비잔틴.의 승인으로 뜬금없이 들어서고, 다른 크로아티안.의 판노니아 더치.는 아바르 지배하에 들어서는겨. 저 넘어엔 세르비아족들이 독립적으로 들어서고. 롱고바르디들이 슬라브가 들어서는걸 방관하면서 남의 땅이 된 듯 해버린겨 저게. 

 

마찬가지로. 완전히 저 중심인 카란타니아.에 역시나 슬라브들이 막 선거야. 

 

저곳들은 비잔틴께 아냐. 서로마꺼였고. 롱고바르디.도 자기들것이라 생각을 해. 단지 적극적으로 안나서는겨. 라벤나.도 후기에야 겨우 비잔틴으로부터 뺏었걸랑. 

 

저 카란타니아.의 슬라브들이. 롱고바르디.때는 슬그머니 자치적으로 살다시피 하며 롱고바르디 킹덤에 고개숙여 살았던거야. 그러다 샤를마뉴가 지배하고, 서기 820년 전후.에 프랑크에 반기를 드는겨. 직전에 샤를마뉴가 죽고 아들 경건루이 때야. 

 

모라비아와 고지대판노니아.의 사모제국.의 사모.가 631-658 짧게 지고. 슬라브들이 저기선 170여년 흩어지면서 왼쪽 프랑크와 부딪히는겨. 그리고 모라비아.를 세우는 모이지르1세.가 서기 820년대에 등장하는겨. 카란타니아.의 위가 저 모이지르.의 모라비아야. 오른쪽 아바르.도 쇠퇴하고. 이 더 오른쪽에 불가르 1차제국도 서진을 하고. 갓 세운 카롤라인 샤를마뉴의 자식인 경건루이.가 보니까 이전 체제론 여기가 관리가 안돼. 아래 프리울리 더치.가 마크역할 하면서 저길 관리하는데, 이게 관리가 안되는겨.

 

이탈리아 땅은 서로마 망 이후. 오도아케르 에서 오스트로고쓰에 롱고바르디 오면서 이게 기운이 다 빠진거야 얘들은. 막 힘을 내서 멀 할 수가 없어. 메로빈지언의 프랑크.도 비실비실해지고 이걸 샤를마뉴.가 발기해서 묶은겨. 저곳도 자기들이 새로 세운 애들한테 맡기는거야. 이게 바바리아.야. 프리울리.의 관할의 네지역에서 두개를 쪼갠다는 의미가. 프리울리의 이탈리아 땅 두개는 그냥 두고. 이 위 카란타니아.에 오른쪽 판노니아.를. 모두 바바리아 더치.에게 준거야, 경건 루이가 이땅 너한테 줄테니까 바바리아 더치 수장인 너희들이 갖아서 오른쪽 슬라브들을 막아라. 여기 호적이 로마부터 8백년만에 이게 바뀐겨.

 

저때 카란타니아 땅이 지금 오스트리아에 슬로베니아 로 보면 돼. 이게 노리쿰이고. 판노니아.가 이 오른쪽 헝가리 중남부여.

 

경건루이 때인 서기 853년.에 바바리아 더치.에 저길 맡기면서. 바바리아가 알프스를 넘어서 완전히 다 갖고 오는겨. 

 

The March of Carinthia was a frontier district (march)[1] of the Carolingian Empire created in 889  

 

그리고 서기 889년. 40여년 지나서. 본격적으로 마크령.을 두고. 따로 영주.를 두고 자기들이 저걸 본격적으로 관리한게 카린티아 마크.여. 이 카린티아 마크.의 수도.는 Klagenfurt 클라겐푸르트.야. 오스트리아 남쪽에 슬로베니아 접경이여 여기가. 완전히 지들 땅 바바리아와 정반대인, 알프스를 넘어서. 기슭에 마크를 둔거야. 이건 지들 동남 알프스를 여기서 철저히 다 먹고 관리하겠다는 의지걸랑 이게. 

 

 

The Avar March (Avaria, GermanAwarenmark) was a southeastern frontier district of the Carolingian Empire, established in the late 8th century by Charlemagne against the Eurasian Avars on the Danube River, in what is today Lower Austria.  

 

The Eastern March (Latinmarcha orientalis) or March of Pannonia was a frontier march of the Carolingian Empire, named after the former Roman province of Pannonia. It was erected in the mid-ninth century in the lands of the former Avar Khaganate against the threat of Great Moravia and lasted only as long as the strength of that state. 

 

 

카린티아 마크.가 들어서기 전에. 샤를마뉴가 이탈리아 점령하고 세운 마크.가 아바르 마크.야. 당시 아바르.가 판노니아에 활발할때야. 이건 저지대 오스트리아. 여긴 비엔나.여. 고지대 오스트리아.는 비엔나 왼쪽이야. 잘츠부르크 오른쪽. 알프스 넘어 오스트리아의 북부땅 나중 오스트리아 더치.는 이 고지대 저지대 오스트리아 둘의 합이야. 

 

판노니아 마크. 이건 판노니아에 세운겨. 저지대 판노니아.에. 9세기 중반에. 아바르들 다 쇠하고. 불가리아들 쳐들어오고. 저기에 크로아티안 판노니아 더치.있을때 저짝에 마크를 세운겨.  

 

아바르 마크.는 샤를마뉴가 세운 거고. 프리울리 더치.소속인거고 경건루이가 떼서 바바리아에 넘기는거고. 판노니나 마크.는 경건루이 직후로 봐야해. 이것도 바바리아 소속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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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됭조약.이 843년.인데. 경건 루이 세아들.이 땅을 나눌때. 그래서 말야. 동쪽 게르만루이.의 땅이, 아빠 경건루이가 저지역을 바바리아에 떼낸 이유로 저게 동프랑키아 게르만 루이 땅이 된거야. 만약 저때 안 떼어냈으면 저건 가운데 장남 로타르.가 프리울리이름으로 가져가야만 했던거걸랑 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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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노니아 마크.에서 일하던 프랑크 소속 공무원이. 슬라브족 니트라의 프리브나.야. Pribina. 모라비아를 세운 모이지르1세.에 쫓겨나는. 이 아들이 코첼.이고. 두 부자.가 슬로바키아.와 슬로베니아.의 파더인겨. 

 

By the 890s, the Pannonian march seems to have disappeared, along with the threat from Great Moravia, during the Hungarian invasions of Europe

 

판노니아 마크.는 마갸르 들어오면서 사라지고 해체되는거고. 아바르 마크.는, 아바르족이 망했어. 필요없어 이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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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린티아 마크.가 카란타니아 땅에 다시 서는겨 바바리아 에 의해서. 경건루이한테서 받은 카란타니아.에 저지대 오스트리아 까지. 얘가 관할을 하는거야 이게. 서기 889년.에. 이제 얘 상대는. 헝가리 마갸르족이야. 

 

이 카린티아 마크.가  중요해진겨 동프랑크 입장에선. 카린티아 마크.가 저 동쪽 변방을 다 관리한다고 봐야해. 저 아래에서 위 비엔나 지역까지 관리하는겨 이게. 

 

이 카린티아.가. 저 마갸르.들이 들어오면서 가장 중요해지는겨.

 

Arnulf of Carinthia (c. 850 – December 8, 899) was the duke of Carinthia who overthrew his uncle, Emperor Charles the Fat, became the Carolingian king of East Francia[3] from 887, the disputed King of Italy from 894 and the disputed Holy Roman Emperor from February 22, 896 until his death at RegensburgBavaria.  

 

카린티아.의 아눌프. 가운데 로타르. 핏줄이 죽고. 카롤라인 핏줄 대신 스폴레토.의 Guido 구이도. Guy 가이 부자.가 로마황제.를 하고. 다시 카롤라인.의 마지막 핏줄 카린티아.의 아눌프.가 잇는데. 동프랑키아 킹.에. 삼촌 샤를 뚱땡이.를 내리는데. 샤를 뚱땡이.가 대머리 샤를.의 서프랑키아.도 대머리 죽고 받아서 동서전체 실재 황제야. 대머리 사를 장남 말더듬이가 먼저 죽고. 그 아들은 애기고. 황제 뚱땡이가 무능해, 파리도 바이킹에 함락되서 노르망디를 주고. 무능 그자체걸랑. 조카 아눌프.가 반기를 들고 내쫓아서 킹에 황제 자처 하는데. 서프랑키아.는 말더듬 자식인 애기가 커서 갖고 가고.

 

이사람의 타이틀이 카린티아.여. 위키영어 에선 듀크.라고 햇지만 말야. 저사람은 마크.의 영주여. 카린티아 가 더치로 승격되는건 칠팔십년 지나서야. 

 

이사람은 바바리아.에 적을 둔. 카린티아.의 마크.담당 마그레이브.야. 헌데 호칭은 dux 둑스.라고 해주는겨 이게. 프리울리 더치.도 샤를마뉴 때는 원래 저게 마크.여. 호칭은 둑스.라 해줘. 그래서 저게 막 헷갈리는건데. 

 

마크.니 더치.니 라는건 나중에야 자리매김 위계가 정리되는겨. 저당시는 걍 듀크.가 마그레이브여. 경계지역 듀크.가 마그레이브일뿐이야. 저게 차이가 없어. 위계도 우리가 아는 그따위 공후백자남 의 고개숙임이 아냐. 피어리지.야 쟤들은. 원탁이야. 걍 의전때만 서열정리할 뿐이고. 이것도 나중에서야.

 

 

Louis the Child (893 – 20/24 September 911), sometimes called Louis III or Louis IV, was the king of East Francia from 900 until his death in 911 and was the last ruler of the Carolingian dynasty there. He succeeded his father, king Arnulf of Carinthia in 899, when he was six and reigned until his death aged 17 or 18. Louis also inherited the crown of Lotharingia with the death of his elder illegitimate half-brother Zwentibold in 900. During his reign the country was ravaged by Magyar raids. 

 

아눌프.의 아들이 루이 더차일드.야. 동프랑키아 킹덤.을 받아. 얘가 카롤링거의 마지막인데. 

 

The Battle of Pressburg[4] (GermanSchlacht von Pressburg) or Battle of Pozsony (HungarianPozsonyi csata), or Battle of Bratislava (SlovakBitka pri Bratislave) was a three-day-long battle, fought between 4–6 July 907, during which the East Francian army, consisting mainly of Bavarian troops led by Margrave Luitpold, was annihilated by Hungarian forces.  

 

헝가리 마갸르와의 서기 907년 프레스부르크 전투.에서 아르파드.가 바바리안.을 이기면서 헝가리땅에서 완전히 자리를 잡아. 이걸 막는게 바바리아.의 마크 레오폴드.야. 카린티아 마크의 마그레이브 대리.여 이사람은. 아눌프.의 아들 루이 더 차일드.도 카린티아.의 마그레이브.이고. 

 

저 카린티아.가 저당시 동프랑키아.의 핵심인겨 저게. 황제 자처에 동프랑키아 킹도 이어서 하는자리에. 왜냐면 마갸르.에 이전 모라비아 슬라브들 상대하면서 병력이 많아지고 병권이 강해진거야. 

 

저 프레스부르크.가 지금 슬로바키아 수도 브라티슬라바.야. 체코와 경계고. 안쪽 내륙이 니트라.야. 

 

저 카린티아.가 그만큼 중요했다는 거였고 말야. 저때도 저긴 마크.야. 저 마크.가 다 담당을 한거야.

 

 When the march of Carinthia was raised into a Duchy in 976, a new Carinthian march (that is, a march defending the Carinthian duchy) was created. It became the later March of Styria.  

 

카린티아 마크.가 서기 976년에 승격이 되는겨. 그러면서 이 위로. 스튀리아. 아래 카르니올라.  이 아래에 이스트리아.를 마크로 두는거야. 

 

스튀리아.의 수도가 그라츠. 야 Graz. 카르니올라.가 슬로베니아.야 카르니올라 마크에 더치.의 수도가. 지금 슬로베니아 수도 뷰를랴나.야. 이스트리아는 반도지역이고.

 

동시에 생기는게. 오스트리아.여. 같은 해 976년.이야. 오토1세.가 죽고 아들 오토2세 황제 때야.

 

The Margraviate of Austria was a southeastern frontier march of the Holy Roman Empire created in 976 out of the territory on the border with the Principality of Hungary. Originally under the overlordship of the Dukes of Bavaria, it was ruled by margraves of the Franconian Babenberg dynasty. It became an Imperial State in its own right, when the Babenbergs were elevated to Dukes of Austria in 1156.  

 

서기 976년.에 오스트리아 마크.가 생기는겨. 카린티아.를 더치.로 승격할때에. 

 

In contemporary Latin, the entity was called the marcha Orientalis ("Eastern march"), marchia Austriae, or Austrie marchionibus. The Old High German name Ostarrîchi first appeared on a famous deed of donation issued by Emperor Otto III at Bruchsal in November 996.  

 

마르카 오리엔탈리스. 동쪽의 마크.란거야. 오스트리아 란건 오스터 라는 게르만말의 영어화된 말이야. 예전 아바르 마크 자리여. 비엔나 있는 저지대 오스트리아.와 왼쪽 고지대 오스트리아.야. 알프스 접한 고지대. 지금 이 두개의 스테이트. 주.가 오스트리아의 시작인겨. 요 아래 오른쪽 변경에 스튀리아. 마크. 를 둔거야. 이게 지금 모두 오스트리아 주. 이름들이 돼. 

 

저 오스트리아 마크.의 주인.은 바바리아 더치.야 왼쪽의. 카린티아.를 더치로 올리고. 오스트리아 마크.를 따로 만들면서 얜 바바리아에 떼서 준겨. 저건 카린티아 것이었어. 카린티아도 바바리아것이지만. 이게 모두 바바리아의 바벤베르크 가문. 이 갖고 가는겨 저때. 그리고 200년 가까이 지나서 더치.가 된겨. 오스트리아 더치. 같은 바벤베르크.에서. 그러다 바벤베르크.가 끊기면서 저걸 보헤미아.와 합스부르크.가 경쟁을 하고 합스부르크.가 저걸 취하면서  루돌프.의 합스부르크.의 오스트리아.가 1278년 부터 서는겨. 

 

그러면서. 킹덤 된 보헤미아.가 선제후.도 되고. 시작부터 보헤미아와 웬수였던 합스부르크.가 우린 머냐 며 칙령 위조해서 자칭 아치더치.라는 걸 만들고. 백년지나 정식 아치더치.라는 유일무이한 게 된겨 유럽에서.

 

 

할때. 저 오스트리아 란 땅은 저렇게. 정식 오스트리아 라는 이름이 출현하는 마크.가 서기 976년 나올때까지. 걍 이름조차 없는 경계지었던 곳이야. 아바르 마크.가 그나마 있었던. 서로마 이후로 그냥 허름한 경계의 땅을. 합스부르크.가 확실히 취하면서, 저 아무도 관심없던 그야말로 신성로마 제국.의 변방의 변방 지역.이 나중 유럽의 중심이 된건 졸 아이러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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