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건너뛰어서, 폴란드 삼분할.이 1772부터 시작해서. 이때는 20퍼만 뺏기는겨. 그러다가 세번째인 1795년. 23년만에 폴란드 리투아니아.는 사라져.
프러시아.가 허연색 지금 칼리닌그라드. 쾨니히스베르크.라는 칸트의 도시.에서 시작해서, 왼쪽의 로얄 프러시아.를 먹고 이 프러시아.가 바르샤바.를 먹어. 오스트리아는 크라크푸.와 루블린.을 먹어.
그리곤 바로 나폴레옹.이 티나오는겨. 나폴레옹이 바르샤바 공국.이란 이름으로 꺼내주고. 작센킹덤과 유니온으로 있게해줘. 작센킹이 바르샤바 공작.을 겸하는겨. 나폴레옹 지고 다시 뜯겨나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1차대전 끝나고서야 자기 나라 이름들을 다시 찾아.
The Free, Independent, and Strictly Neutral City of Cracow[1] with its Territory (Polish: Wolne, Niepodległe i Ściśle Neutralne Miasto Kraków z Okręgiem), more commonly known as either the Free City of Cracow or Republic of Cracow (Polish: Rzeczpospolita Krakowska, German: Republik Krakau), was a city republic created by the Congress of Vienna in 1815, which included the city of Kraków and its surrounding areas.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에서 모스크바 함락하고 퇴각하는게 1812년 겨울이야. 이게 졸 웃긴건데, 승리한게 승리한게 아녀 이게. 어정쩡하게 빈 도시 모스크바에서 놀다가 돌아오면서 러시아 코사크들에게 된통 당하는거걸랑. 나폴레옹은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갔어야 했어. 이게 가장 결정적인겨. 애매한 의사결정이 스스로 몰락을 가져온건데.
그리고 1814년.에 엘바섬.으로 가는겨. 백일천하.는 그 다음해 이고. 이때 워털루 전투.로 종지부를 찍고. 세인트헬레나 섬가는게 1815년 이걸랑. 저때 짧은 8년간의 바르샤바 공국.은 러시아.가 대부분 먹는거고. 일부를 프러시아.가 갖고 가는거고. 베를린 처럼, 크라크푸.가 중립도시가 돼. 서기 1815년.에. 1846년까지. 31년간. 그러다가 이게 오스트리아.로 들어가는겨.
Jan Alojzy Matejko (Polish pronunciation: [jan aˈlɔjzɨ maˈtɛjko]; also known as Jan Mateyko; 24 June 1838[nb 1] – 1 November 1893) was a Polish painter known for paintings of notable historical Polish political and military events.[2][3]
얀 알로이지 마테이코. 얀 마테이코.라는 화가인데. 크라크푸 자유도시.에서 태어나서 나이 8세에 이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들어가면서 다시 뺏긴 나라이름으로 죽은겨. 즉 평생을 오스트리아 국민으로 산거지 폴란드인간이.
자기나라가 1772년 부터 결국 나라가 쪼개진거걸랑. 폴란드 리투아니아.는 이때 망한겨 1772년.에. 일차대전후인 2백년 만에야 독립을 한거고, 그리고는 다시 소련의 우산으로 들어간거고.
얀 마테이코.가 그린 유명한 그림이 있어.
The Sermon of Piotr Skarga[1] or Skarga's Sermon (Polish: Kazanie Skargi) is a large oil painting by Jan Matejko, finished in 1864, now in the National Museum, Warsaw in Poland. It depicts a sermon on political matters by the Jesuit priest Piotr Skarga, a chief figure of the Counter Reformation in Poland, where he rebukes the Polish elite for neglecting the national interest.[2]
카자니에 스카르기. Kazanie Skargi. 스카르가.의 연설. 이라는 그림이야. 서기 1864년.에 얀 마테이코.가 그린 그림이야. 오스트리아-헝가리 식민시절에. 나이 26세에 그린겨 이건. 지금 얘들 바르샤바 박물관.에 있는 그림인데. 폴란드에서 가장 귀하게 생각하는 그림이야. 가장 귀하다는건, 결국 그 나라의 정체성.이야. 자기 나라 정체성.의 상징.을 그림으로 표현한게 그나라의 최고 작품이 돼.
우리네는 저런 그림이 없어. 이상하게 조선왕조 시대가 이땅의 상징인데, 그렇다고 딱히 조선을 상징하는 그림도 없어. 정말 이 땅의 정체성은 심각한겨 이게.
나이트 와치. 야경. 야간순찰. 렘브란트.의 1642년. 작품이야. 네덜란드.가 역사가 없지만, 그림이 어마무시해. 이 그림이. 네덜란드의 상징이야. 암스테르담 박물관의 컬렉션이고. 얘들은 박물관.을 정체성 다지기.로 지은겨. 그중 단연 이그림이고.
우리네는. 그림이 없어 그림이. 우리의 정체성.을 대표할 그림이 없고. 우리의 정체성은 조선.이 아냐 . 어떻게 저따위 조선 것들이 겨우 오백년 있으면서 과거 1500년의 역사를 다 지운 저따위 들이 우리의 정체성이 되어야 하니.
우리는 그림이 없어. 음악이 없어. 정체성이 없어. 그래서 저따위 기괴한 이들이 정의를 외치는 시안한 땅바닥이 된건데 이게.
Piotr Skarga (less often, Piotr Powęski[nb 1]; 2 February 1536 – 27 September 1612) was a Polish Jesuit, preacher, hagiographer, polemicist, and leading figure of the Counter-Reformation in the Polish-Lithuanian Commonwealth. Due to his oratorical gifts, he has been called "the Polish Bossuet".[2]
피오트르 스카르가. 이사람 말년.이 지기스문트3세 바싸.재임 일때인데. 킹 지기스문트 바싸.보다 30세가 많아. 얀 자모이스키.가 1542-1605. 이고. 스카르가.는 제수이트 설교사.이고. 해기오그라퍼.에 폴레미시스트. hagios 하기오스.가 holy 성스러운거고. 해기오그러피.가 성인전.이고 그리스도 성인들 기록하는 카톨릭 제수이트.에 폴레모스.가 전쟁이야. 그리스어. 전쟁 전투하듯 설교하는 인간을 폴레미시스트.라고 해. 논객.이라 번역하는데, 걍 열정적으로 설교하는 인간이야.
Sejm Sermons or the Eight sermons before the Sejm,[1] (Polish: Kazania sejmowe) is a political treatise[2][3] by Polish Jesuit Piotr Skarga, published in 1597. It is one of two most famous works by Skarga, the other being Żywoty świętych (The Lives of the Saints).[4]
스카르가.의 글중에 카자니아 세이모베. 라는 글이 있어. 세임.의 연설.이야. 서기 1597년. 에 출판된건데. 스카르가.가 세임.에서 연설을 하는 형식으로 쓴거걸랑. 의회야 내말을 들어라. 8개의 주제로 설교하듯이 쓴거야.
In the Sermons, Skarga discusses what he sees as the problems of the ailing Commonwealth: lack of love for the Fatherland, internal quarrels, tolerance of "heretics", the relative powerlessness of the king, problematic laws (a critique of the Golden Freedoms) and immorality.[6][1] Another noteworthy aspect of the book is its focus on the desperate situation of the serfs (the peasants).
조국에 대한 러브.가 부족하다. 내부적 다툼들. 이단에 대한 허용이 문제고. 킹은 상대적으로 힘이 없고. 법자체가 문제고. 부도덕하고. 농노들 농민들의 비참한 상황들도 문제고.
저게 서기 1597년.에 나온겨. 저 제수이트.의 연설들이 묻혔다가. 폴란드 분할 되는 23년간의 시기에 저게 재출간된거야. 18세기에. 2백년 지나서. 자기들 문제를 2백년 전에 스카르가.가 이미 꼬집었다는거지.
저걸 스카르가.가 직접 세임.에 가서 연설을 했다는 전설이 있는겨. 글은 확실히 쓴건데, 진짜 세임에 가서 연설을 했냐는건 확인이 된게 전혀 없어.
Polish historian Janusz Tazbir, author of Skarga's biography, notes that there is an incorrect myth[nb 1] that the Sermons were delivered as a real sermon to the king and deputies.[8][9] Although a sermon would traditionally open and close the Sejm session,[5] there is no proof that Skarga's work was ever delivered to the deputies (or anyone else for that matter) in the form of a real sermon (although it is likely that the book incorporates fragments of real sermons, perhaps even some that Skarga or another priest delivered to the deputies of the 1597 Sejm – however no tangible proof for that has been found by the historians)
얀 마테이코.가 나라잃은 1864년. 나이 26세에. 저걸 상상하며 그린거걸랑.
내용도 환타지고, 그림도 환타지야 저건. 폴란드 애들은 저게 정답인지 알고 안타까와 하는거지만.
저런걸 보면, 역사가 후져진 애들이, 후대에 해석하는것도 후진건데. 이전 썰했지만, 지기스문트 3세 바싸.를 위대하다 떠받드는거 하며. 저런것도 마찬가지야. 역사에 대한 무지야 저건. 반은 맞고 반은 틀려. 저사람의 연설의 내용은.
서기 1597년.이야.
Sigismund III Vasa (Polish: Zygmunt III Waza, Swedish: Sigismund, Lithuanian: Žygimantas Vaza; 20 June 1566 – 30 April 1632 N.S.), also known as Sigismund III of Poland, was King of Poland, Grand Duke of Lithuania and monarch of the united Polish–Lithuanian Commonwealth from 1587 to 1632 as well as King of Sweden and Grand Duke of Finland from 1592 until his deposition in 1599.
이 문제적 인간 지기스문트 3세 바싸.가 막내 캐서린 야기에워.라는 스웨덴 퀸.의 자식으로 폴란드 킹이 되는게 서기 1587년. 이야. 오스트리아 대공작.이랑 전쟁하고 킹이 된겨. 이 인간을 킹으로 만들어준 인간은 얀 자모이스키.이고. 자모이스키.가 1542년생이야. 24세가 많아. 아빠뻘이야. 지기스문트의 외삼촌 지기스문트2세.가 킹할때 챈슬러.로 등용된 인간이야 20대에. 그리고 다음 스티븐 바토리.킹을 만들어주고, 그 다음 저 스웨덴 바싸.를 킹에 올린 인간이 얀 자모이스키.야. 칼뱅에서 카톨릭.으로 전향했지만, 슬라브 가 찐해.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의 영향으로 들어가는게 싫어 이 자모이스키.는
자모이스키.가 폴란드 보헤미아 러시아.와의 유니온.을 제안해. 슬라브들끼리 합쳐야 한다는겨. 오히려 킹과 세임에서 반대를 해. 그리고 킹이 결혼하는 여자.가 합스부르크.의 앤. 안나.여. 더하여 자식이 없으면 카먼웰스.의 다음 킹은 합스부르크.가 갖고 가는겨 이게. 21세에 폴란드 킹이 되고, 5년후 1592년.에 아빠 스웨덴 킹.이 죽어. 스웨덴 킹.도 된겨 26세에.
폴란드.는 이전 후사이트들도 들어와있는, 프로테스탄트.들이 많은 땅이야. 스웨덴도 프로테스탄트.야. 얘가 엄마 캐서린 야기에워 아래서 꼴통 카톨릭으로 큰겨 이게. 합스부르크.랑 손잡고 더 카톨릭이 되는거고. 저 스웨덴도 카톨릭으로 만들려는거고. 아주 골때리게 된겨. 얀 자모이스키.는 유학가서는 칼뱅에서 도리어 카톨릭으로 전향했지만, 종교보다 자기나라 걸랑. 합스부르크.로 넘어가면 자기들 정체성이 사라진다고 느낀겨 얀 자모이스키.는
코트.의 실세는 얀 자모이스키.야. 아빠뻘인. 이사람은 스티븐 바토리.때도 킹 올리고 자기가 리보니안 전쟁.을 직접 참여해서 스웨덴과 함께 러시아 이반4세에 맞서 싸운 인간이야. 군인이 아냐. 저기서 실전을 경험하고 헤트만. 군사령관이 돼. 이미 지기스문트.와는, 저 결혼으로 틀어진겨. 코트에서 서로 쌍욕하며 싸워. 사과하고. 바로 내려가서 이번엔 몰도바.뒤의 오스만과 크림타타르.랑 맞서고 잠재우고. 할때 1598년.에 지기스문트.가 직접 용병데리고 스웨덴 원정을 가는겨. 삼촌 카를 진압하러. 이미 1597년.에는 핀란드에서 커즐워.라는 곤봉전쟁 농민반란이 삼촌 카를 배후로 터진거고.
즉 저 서기 1597년.에는, 얀 자모이스키.와 킹더하기세임.간의 대립 이 있었을 뿐이야. 합스부르크.라는 세력을 두고 벌이는 다툼인겨 저게. 저기에 종교가 개입이 된거고 바닥엔.
더하여. 문제는 세임.이야.
얀 자모이스키.의 세임 개혁안.은 지기스문트 3세 바싸.가 킹이 되기 전의 이슈야 이건.
After the extinction of the Jagiellon dynasty in 1572 during the election sejm (special session of the Commonwealth parliament) he used his influence to enforce the viritim election (meaning all nobles had the right to vote for the new king during the upcoming 1573 Polish–Lithuanian royal election).[8][9] However, his proposal for majority voting did not pass, which opened the process for abuses of liberum veto in the future.[8] He was a colleague of Mikołaj Sienicki and Hieronim Ossolinski, and with them he was one of the leaders of a faction of the lesser and middle nobility (szlachta) in the Commonwealth, whose goal was the reform the country - the execution movement - preserving the unique constitutional and parliamentary government of the Commonwealth with the dominant role of poorer nobility (Golden Freedom).[9][10][11] He was so influential and popular among the lesser nobility that he was known as the "first tribune of nobility"[12][13] or "Polish Gracchus."
지기스문트2세.의 죽음으로 야기에워 가문이 끊겼어. 지기스문트2세 때에 폴란드 리투아니아 카먼웰스.를 한거야. 카먼웰스.란건 의회.라는 세임.이 하나가 된거야. 즉 리투아니아.의 세임.이 사라진겨. 물론 각 지역마다 세임이 있어 또한. 지방의회가. 이걸 sejmik. 세임익.이라고 해.
폴란드 리투아니아.는 리투아니아의 요가일라.가 폴란드 헤드위그.와 결혼하면서 이때 유니온이 된겨 실질적으론. 리투아니아.는 이후 요가일라.의 사촌인 비타우타스.가 지배하지만 이후 핏줄 끊기고 요가일라의 야기에워 가문이 지배하걸랑.
폴란드.가 헤드위그.의 아빠 앙주 헝가리 루이 대제.이전에 마지막 피아스트.킹이 카시미르3세 대제.야. 이사람이 크라크푸.에 대학을 세워. 1364년. 이게 야기에워들이 나중에 개명해서 지금 야기에워 대학이야. 650년된 학교여. 엄청나 이 폴란드란 나라가. 참 안타까운 나란데 이나라가. 저 아쉬움을 저 그림 한장.으로 표현한거걸랑. 헌데 완전히 잘못 해석한 그림이야 저건.
야기에워 시작하는 요가일라.가 1434년.에 죽어. 요가일라의 두 아들이 리투아니아.와 폴란드.를 잇는겨. 리투아니아의 비타우타스.가 먼저 죽어서 막내 카시미르.가 가고, 요가일라가 죽어서 형 브와디스와프3세가 폴란드 킹.을 하다가, 얘가 죽어서 카시미르가 폴란드도 겸하면서 얘가 카시미르 4세.가 되는겨. 그러면서 또 자식들이 나눠갖기도 하지만 이미 두나라는 야기에워 가문이 해. 서기 1434년 즈음 부터 유니온이야 저긴. 이반3세 모스크바가 서진하면서 또한 막으려고 동맹을 해. 킹이 달라도. 백여년 지나서 지기스문트2세.가 카먼웰스.를 한겨. 리투아니아 세임.을 지운겨. 그리곤 바로 야기에워 직계가 끊긴거야. 그리고 세임에서 선거.를 하는겨. 서기 1573년.에. 얀 자모이스키가 31세야.
얀 자모이스키.는 죽은 지기스문트2세.가 스카웃한 아이야. 집안은 낮은 귀족이고. 베네치아 상원 추천장 하나로 챈슬러를 시켰어. 최고위직이야. 이사람이 한 운동이 두개야. 하나는 리베룸 베토. liberum veto. 를 없애고 다수결로 하자. 다른 하나는 엑서큐션 무브먼트. 법대로 하자. 법을 좀 지켜라 귀족들아.
폴란드는 갑툭튀걸랑. 신기한겨 이게. 슬라브놈들이 갑자기 게르만을 익히고는 동쪽지역에서 실세가 된거걸랑 이게. 저건 프랑스 앙주가문의 나폴리 애들이 헝가리로 가서 앙주 샤를.에 앙주 루이.가 잇고 이 딸이 폴란드 헤드위그.가 여기 있으면서 리투아니아 요가일라.랑 이으면서. 이 촌동네에 앙주가문이 갖고온 프랑스.와 나폴리.의 문명이 여기에 심어진거야 이건. 이걸 슬라브애들이 자기들것과 적극적으로 섞은거야.
포스폴리테 루셰녜.라는 귀족들 용병들을 서로 만들면서 자기들이 적극적으로 영지를 확장하고 보호했걸랑. 그리고 세임.을 만들어서 정기적으로 모이면서 정체성을 다진겨. 폴란드 리투아니아.는 이들 귀족들이 만든거야. 세임이란 이름으로 szlachta 슐라흐타.라는 귀족층. 귀족계급.이 생긴거고. 러시아는 저런 귀족계급집단.을 만들지 못했어. 걍 각각 개인들의 보야르.들만 있을 뿐이야.
법을 안지키는겨. 얘들이. 무법자가 된겨. 얀 자모이스키.가 어린나이에 챈슬러가 되서리 첫번째 일이 저 무법적 귀족들 사건 해결하는거였걸랑. 법이 유명무실해진겨. 좀 이제 법대로 하고 법을 지켜라 걸랑. 얀 자모이스키.가 한 운동이.
그리고 저놈의 리베룸 베토.
The liberum veto (Latin for "(I) freely oppose") was a parliamentary device in the Polish–Lithuanian Commonwealth. It was a form of unanimity voting rule that allowed any member of the Sejm (legislature) to force an immediate end to the current session and to nullify any legislation that had already been passed at the session by shouting, Sisto activitatem! (Latin: "I stop the activity!") or Nie pozwalam! (Polish: "I do not allow!"). The rule was in place from the mid-17th century to the late 18th century in the Sejm's parliamentary deliberations. It was based on the premise that since all Polish noblemen were equal, every measure that came before the Sejm had to be passed unanimously. The liberum veto was a key part of the political system of the Commonwealth, strengthening democratic elements and checking royal power and went against the European-wide trend of having a strong executive (absolute monarchy).
저게 1인칭 라틴어야. 나는 자유롭게 반대한다. 세임의 한 애라도 반대.하면 안건이 통과가 안되는겨 이게. 그만큼 귀족 각각이 아주 힘이 엄청난겨. 그만큼 각각의 자부심이 큰거고. 폴란드를 만든 힘이 폴란드의 독이 되어버린거야. 이 폐해를 자모이스키.가 서기 1573년.에 이미 알고 있던겨. 저때는 이게 문제가 안될때야. 이게 17세기 중반부터 문제가 되기 시작해. 즉 지기스문트3세 바싸.가 죽고 아들 브와드스와프 바싸.부터 아무것도 되는게 없는겨. 얘가 어릴때 러시아 암흑기 잠깐 러시아 짜르.이름 올렸잖오. 크레믈린에 가지는 않지만. 얘때부터 폴란드는 망한거야. 물론 아버지의 똥인거고.
세임에서 한놈이라도. 시스토 악티비타템. Sisto acticitatem. 나는 그 안건을 반대한다!. 또는 Nie pozwalam! 폴리쉬로 니에 포즈발람. 나는 허락하지 않는다! 하면 아무것도 못해. 이건 먼말이냐면, 이전엔 그래도 이런소리를 자제한거야. 그래서 만장일치를 얻어냈어. 헌데 지기스문트 바싸.이후로, 절대 합의를 안해주는겨. 사정사정을 해도. 그만큼 귀족애들이 마음이 떠난거야. 정체성을 확실히 잃은거야 얘들이. 지기스문트 바싸 때에 스웨덴 러시아 와의 양면 전쟁에, 이전에 동지였던 오스만도 적으로 만들어서 전쟁을 하게 돼. 귀족애들이 자기들 재산을 저 사방의 전쟁으로 다 날리는거야. 아주 의미없는 전쟁질이었던거야 나중에 보니. 스웨덴과 친하려고 데리고 왔구만 스웨덴을 적으로 만들어버렸고, 합스부르크와 손잡고 보니 오스만과 적이 되어 버렸고. 저 사이에서 귀족들이 완전히 치인겨. 반대 소리가 절대 죽지를 않아.
폴란드.는 저 갈라진 마음으로 망한거야. 제도로 망한게 아냐.
모두들 저 리베룸 베토.라는 걸로 망했다 하지만, 제도 라는게 중요한게 아냐. 제도를 개혁하자 어쩌고 개소리야 개소리.
가장 개소리야 진짜. 법제도 개혁. 개혁 개혁 해대는거. 개혁이란 듣기좋은 두글자로 민들 꼬시는거걸랑.
머 유럽애들 제도는 개혁적이라서 잘사냐?
저 잘나가는 유럽나라들 대부분이 아직 킹덤.이다 킹덤. 고리타분한 정치 체제 아니냐? 개혁해서 킹덤 다이너스티.를 없애야 하는거 아니냐?
가장 헛소리야. 개혁개혁 하는건.
결국 모랄.의 문제야 모든건. 그만큼 동유럽은 아직 안된겨 그 역사의 두께가. 너무 빨랐어. 아니면 각성하고 그 모랄을 쌓을 생각을 햇어야 해. 제도 탓 을 하는건 유치한거야.
아무것도 해본 적이 없는 애들이 유럽애들껄 그냥 카피하다가 살육 학살 내전만 나는거야 그게.
이 조선땅이 그래온거고. 여전히 이 조선땅은 미개할 뿐이야.
.
Many historians hold that the liberum veto was a major cause of the deterioration of the Commonwealth political system, particularly in the 18th century, when foreign powers bribed Sejm members to paralyze its proceedings, and the Commonwealth's eventual destruction in the partitions of Poland and foreign occupation, dominance and manipulation of Poland for the next 200 years or so. Piotr Stefan Wandycz wrote that the "liberum veto had become the sinister symbol of old Polish anarchy". In the period of 1573–1763, about 150 sejms were held, about a third failing to pass any legislation, mostly because of the liberum veto. The expression Polish parliament in many European languages originated from the apparent paralysis.
많은 사가들이 저 리베룸 베토.가 가장 큰 원인이다. 카먼웰스.가 사라진. 특히나 18세기 폴란드 분할때. 리베룸 베토.라는건 사악한 상징이 되다, 구 폴란드 무정부상태의. 1573-1763 2백년간 150 회의 세임이 열렸는데 삼분의 일.의 안건이 통과되지 못하다. 대부분 리베룸 베토.때문이었다.
저 문제제기를 얀 자모이스키.가 했는데, 저게 안받아들여져. 합의로 한겨 그래서. 반대로 2/3 는 통과가 된거야. 아 이게 더 놀라운겨. 즉 뒤에는 가면 갈수록 안되는거지 아무것도. 그만큼 애들이 삐친거야. 웬만하면 따르걸랑.
.
피오트르 스카르가.가 연설했다는 서기 1597년.은 폴란드 카먼웰스.가 좋을때야 저때가. 얀 자모이스키.도 다수결로 하자.는게 안 받아들여졌지만, 저 문제는 이 다음에 발생하는거고 리베룸 베토.라는건. 1598년 지기스문트.가 스웨덴 원정하러 가기 전이야. 스웨덴과 적이 안될때야. 리보니안 전쟁의 러시아는 스웨덴과 힘합쳐서 몰아낸거고. 저때 막 아래 몰도바.로 내려가서 타타르에 오스만 막을때걸랑 자모이스키.가.
스카르가 입장에선, 얜 제수이트 꼴통 카톨릭이걸랑 얘가. 킹이 로마 카톨릭이고, 마누라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대공작의 딸이고. 헌데 얘 뜻대로 폴란드가 안움직이는겨. 얀 자모이스키 때문에. ㅋㅋㅋ.
저게 스카르가 입장에선, 내분 으로 보이는겨. 저땐 아직 내분 날것이 없어. 오히려 귀족들이 더 들이대야야 할때야. 지기스문트.가 합스부르크.에 폴란드 카먼웰스를 주려는 분위기걸랑 저게. 더하여 자유의 폴란드를 로마 카톨릭으로 만들겠다는 거걸랑. 선으로 향하는 내분. 싸움.은 좋은겨.
Golden Liberty (Latin: Aurea Libertas; Polish: Złota Wolność, Lithuanian: Auksinė laisvė), sometimes referred to as Golden Freedoms, Nobles' Democracy or Nobles' Commonwealth (Polish: Rzeczpospolita Szlachecka or Złota wolność szlachecka, Latin: aureă lībertās) was a political system in the Kingdom of Poland and, after the Union of Lublin (1569), in the Polish–Lithuanian Commonwealth. Under that system, all nobles (szlachta), regardless of rank or economic status, were considered to have equal legal status and enjoyed extensive legal rights and privileges. The nobility controlled the legislature (the Sejm—the Polish parliament) and the Commonwealth's elected king.
골든 리버티. 골든 프리덤. 노블즈 데모크라시. 노블즈 카먼웰쓰. 당시 폴란드 정치시스템을 칭하는 용어들이야. 황금의 자유.야 폴란드 카먼웰쓰의 정치체제는. 이때 귀족들은 나름 무법천지에 엑서큐션 무브먼트.가 나올 지경으로 법을 안지키지만, 자유의 폴란드야. 폴란드 황금시대고. 자기들이 선거로 킹을 뽑아. 선거인단이 4만명이야. 모든 귀족들이 투표권이 있어. 최초야 이건.
저걸 지기스문트 바싸.가 다이너스티.를 하려는겨. 선거제도 없애려하는거고. 프로테스탄트가 득실득실대걸랑. 로마 카톨릭을 강하게 심고싶은데 차마 못하는겨. 귀족들 힘때문에.
이게 저 피오트르 스카르가.라는 제수이트. 눈깔엔. 힘없는 킹.이고. 내부다툼 소모전.으로 보일 뿐이야.
서기 1597년 저 글 나올땐 폴란드.가 최고의 시기야. 아직 얀 자모이스키. 살아있을때고. 스웨덴과 적이 안될때야.
저 스카르가.의 연설은 완벽하게 잘못 해석된 후대의 이야기야 저건. 더하여 26세 짜리가 그린 저 그림도 완벽한 환타지일뿐이야. 어린애가 무엇을 알겠니.
저 그림에서. 왼쪽 앞에 앉아있는 하양 빛이 나는 힘없는 모습이. 지기스문트 3세 바싸.야. 불쌍하다 이거여. 오른쪽에 서서 연설하는게 스카르가.야 왼쪽 끝 위에 앉아서 스카르가.에 집중하는게 얀 자모이스키.야
저 그림은 스카르가.가 반대편의 얀 자모이스키.에게 부르짓는 장면으로 그리고 픈겨 얘가 화가 가. 불쌍한 듯 킹 가운데 앉히고. 오른쪽에 귀족들이 서있고. 이 귀족들이 반란을 해 자모이스키 죽고.
저건 자모이스키.를 탓하는겨. 얀 자모이스키 같은 귀족들 때문에 우리 폴란드.가 지워졌다는거걸랑.
자모이스키.가 귀기울이라는겨. 우리 스카르가 님 한테.
완벽한 주작이야 저건. 패배한 역사 후진 역사의 후대 해석들이 그래서 ...
Zebrzydowski's rebellion (Polish: rokosz Zebrzydowskiego), or the Sandomierz rebellion (Polish: rokosz sandomierski), was a rokosz (semi-legal rebellion) in the Polish–Lithuanian Commonwealth against King Sigismund III Vasa. The rokosz, formed on 5 August 1606 by Mikołaj Zebrzydowski, Jan Szczęsny Herburt, Stanisław Stadnicki, Aleksander Józef Lisowski and Janusz Radziwiłł in Stężyca and Lublin, was caused by the growing dissatisfaction with the King among the nobility (the szlachta). In particular, the rebels disapproved of the King's efforts to limit the power of the nobles, his attempts to weaken the Sejm (the Polish parliament) and to introduce a hereditary monarchy in place of the elective one. The rebellion (1606–1608) ended in the defeat of the rebels. Despite the failure to overthrow the King, the rebellion firmly established the dominance of the szlachta over the monarch in the Polish–Lithuanian political system.
젭르지도브스키. 반란. 로코스 젭르지도브스키에고. 러시아 귀족들이 반란을 한겨. 서기 1606년.에
Mikołaj Zebrzydowski (1553–1620) of Radwan coat of arms, voivode of Lublin from 1589, Grand Crown Marshal 1596–1600, voivode of Kraków from 1601. He is famous for an armed rebellion against King Sigismund III Vasa, the Zebrzydowski Rebellion, a rokosz named after himself. It took place in 1606, and was defeated by 1607. After the failed rebellion, he sponsored the creation of the Roman Catholic monastery of Kalwaria Zebrzydowska, which is regarded as one of the most important pilgrimage sites of Poland.
주모자가 미코와이 젭르지도브스키.야. 얀 자모이스키.가 1605년.에 죽었어. 가장 파더랜드. 조국을 생각하던 사람이걸랑. 이미 스웨덴과 적이 되고, 킹때문에. 더하여 자모이스키.는 리보니아에서 스웨덴 상대로 전투하다가 이기곤 돌아와서 죽은거걸랑. 이제 완전히 지기스문트 바싸.의 세상이 된겨. 저때 가짜 드미트리1세.가 러시아에서 5월달에 죽은겨. 창문으로 떨어져 도망갔다가. 바로 지기스문트가 전쟁을 선포하는거고 러시아에. 코메디도 저따위 코메디가 없는겨 자모이스키. 입장에선. 얀 자모이스키.가 저 가짜 드미트리 의 코트 놀이도 보면서 실소를 하고 죽은거걸랑.
로코스 rokosz 라는게 폴란드 정치체제.에서 인정된 겨. 리베룸 베토.처럼
- rokosz (insurrection), the right of szlachta to form a legal rebellion against a king who violated their guaranteed freedoms;
슐라흐타.라는 귀족계급의 권리여. 자기들에 보장된 자유를 킹이 침범을 하면 반란을 할수 있어. ㅋㅋㅋ. 아 폴란드 짱이야 진짜.
그래서 저걸 반란.이라고 하면 안돼. 저건 리걸.한 합법적 행위야. 킹이 프로테스탄트들을 카톨릭으로 바꾸려는겨. 노골적으로. 선거를 없애고 다이너스티.를 하겠다는거고. 세임.을 무력화 하겠다는겨. 왕권신수설, 킹자린 신이 준 자리라면서.
왕권신수설.이란건. 유럽에 없어. 중세엔. 이건 그냥 연설할때나 하는 상징적 소리야. 디바인 라이트. divine right 라는건 사자심왕 리차드.가 처음 한 소리야. 저 생기발랄. 허나 잉글랜드 만큰 킹 힘이 없는 나라도 없어. 저건 짐이 국가다.라는 말을 했는지 안했는지 라는 루이14세에게나 절대군주.를 붙일까 말까야. 옌 18세기 인간이야. 17세기말에서. 얘때 잠깐이야. 얜 근대야 근대. 사례가 거의 없어 저놈의 절대군주란건. 17세기에 덴마크.에 잠깐 있고.
개소리중에 개소리야 중세유럽의 절대군주. 왕권신수설이 진짜 행세된 줄 알아. 무지의 소리야 그건. 이건 나중에 풀고.
얜 이걸 진짜 실현하려는겨. 절대군주를. 세임을 없애고. 귀족을 죽이려는겨. 얀 자모이스키.가 아주 지긋지긋 했걸랑. 아빠뻘이. 아 저 자모이스키.가 죽었어. 더하여 러시아짜르도 자기들이 움직이려는데 일년만에 죽었어. 전쟁선포해. 저길 카톨릭으로 만들꺼야. 그 김에 우리 폴란드도 카톨릭이어야 해.
저때 반란하고 전쟁을 하는겨. 미코와이 젭르지도브스키. 가 저 가운데 서있는 사람과 무리야. 저때 반란한 귀족들. 얀 마테이코.가 스카르가.의 연설을 그리면서. 저 앞에 바닥에 장갑 하나가 있어. 전쟁을 선포하는겨 킹과 귀족이. 저 전쟁 반란이 젭르지도브스키의 로코스. 야.
저 반란에 귀족들이 패해. 패한 세력들이 가짜드미트리 2세.에게 몰리는거고 ㅋㅋㅋ.
저들은 세임에서 힘없는 귀족들이야. 자모이스키.는 소수파야. 대부분 세임 애들은 킹과 하나가 된겨 슐라흐타.라는 지배층 귀족계급은. 얘들이 중재하면서 반란 정리하고. 오히려 세임의 귀족들이 힘을 갖아. 킹은 약해지고. 킹이 함부로도 못하는겨. 즉 주류가 된 귀족들이 킹과 손을 잡게 된거야. 의미있는 귀족들은 사라져가는거고.
.
저 그림에서 얀 자모이스키.와 젭르지도브스키.들은 폴란드 지우개.의 잘못 지분이 약해. 오히려 저 불쌍한듯 앉혀놓은 저 애와 저주위의 슐라흐타.라는 귀족들이 폴란드 카먼웰스.를 망친겨 저게.
아주 완벽한 오해된 일개 로마카톨릭만의 시선인 제수이트.의 쓰레기 연설이고, 그걸 바탕에 둔 그림이야 저건.
'세계史'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럽사218. 이란고원. 코라산. 대마밴드 산 (1) | 2019.10.20 |
---|---|
유럽사217. 오스트리아 헝가리 보헤미아 1526. 남슬라브 서슬라브 동슬라브 (1) | 2019.10.18 |
135. 캔터베리 이야기 by 제프리 초서 (1) | 2019.10.16 |
134. 천로역정 (2) | 2019.10.16 |
유럽사215. 볼로트니코프. 가짜2세. 쿠시노전투. 잉그리아전쟁 (2) | 2019.10.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