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an Isayevich Bolotnikov (Russian: Ива́н Иса́евич Боло́тников) (1565-1608) was the leader of a popular uprising in Russia in 1606–1607 known as the Bolotnikov Rebellion (Восстание Ивана Болотникова). The uprising was part of the Time of Troubles in Russia.  

 

이반 이사에비치 볼로트니코프. 나이 41세.에. 서기 1606-7년의 민중반란의 리더.였는데. 볼로트니코프 반란. 러시아 암흑기 1598-1613 때 있었던. 

 

가짜 드미트리1세.가 1606년 5월 17일 날 창문 뛰어넘고 다리 뿌러지고 목욕탕 숨다가 끌려나가서 죽어. 결혼식때 폴란드 색깔좀 지우고 말야, 오소독시를 카톨릭으로 바꾸려는 짓만 안했으면 얜 저리 안됐어. 고두노프.가 갑자기 죽으면서 그야말로 재수 운빨로 차르가 된거걸랑. 나름 처세술도 탁월했고. 헌데 너무나 너무나 러시아 역사에 무지했던거지. 사람들 마음읽기가 전혀 없던 애야 얜. 개인 처세술은 좋았는데 먼 관점의 정치적 지략은 전혀 없던애야.

 

Vasili IV (Russian: Василий IV Иванович Шуйский, Vasiliy Ivanovich Shuisky, other transliterations: Vasily, Vasilii; 22 September 1552 – 12 September 1612) was Tsar of Russia between 1606 and 1610 after the murder of False Dmitriy I. His reign fell during the Time of Troubles. He was the only member of House of Shuysky to become Tsar and the last member of the Rurikid dynasty to rule until end of monarchy.  

 

다음 차르.로 오른이가. 슈이스키 가문의 바실리4세.야. 4년 재임인데. 이 슈이스키 가문은 14세기 중반에 나온 류릭.의 방계야. 당시 귀족의 실세야. 류릭 직계가 끝나고 더 실세야. 니즈니 노브로고드.의 크냐즈. 프린스여. 니즈니.는 류릭의 시작 노브고로드.와 다른겨. 니즈니 는 모스크바 동쪽 에 있어. 이사람도 류릭.으로 치고 서기 1610년에 류릭이 끝났다 라고 보는 이들도 있는거고. 

 

The Battle of Klushino, or the Battle of Kłuszyn, was fought on 4 July 1610, between forces of the Crown of the Kingdom of Poland and the Tsardom of Russia during the Polish–Muscovite War, part of Russia's Time of Troubles.  

 

가짜 드미트리1세.는 폴란드가 세운거걸랑. 얘가 쫓겨나고 폴란드 지기스문트 바싸.가 전쟁선포하고. 서기 1609년.에 쳐들어가는겨. 쿠쉬노 전투 1610. 스몰렌스크 근처야. 여기서 바실리4세의 러시아를 물리치고 모스크바에 그냥 들어가는겨. 크레믈린의 바실리는 도망을 가고. 러시아 코트의 보야르들이 그래서 추대한게 지기스문트 바싸의 아들인 브와디스와프 바싸.야. 얘가 나중에 아빠 이어서 폴란드 카먼웰쓰 킹을 이어 하는거고.

 

Władysław IV Vasa[a] or Ladislaus IV Vasa (9 June 1595 – 20 May 1648) was king of Poland, of the House of Vasa, who ruled from 1632 until his death in 1648. Władysław IV was the son of Sigismund III Vasa (Polish: Zygmunt III Waza) and his wife, Anna of Austria (also known as Anna of Habsburg). 러시아 차르 1610-13

 

얜 저당시 15세 인겨. 러시아 귀족 보야르들이 추대한거고, 지기스문트 바싸.가 이걸 탐탁치 않게 여겨. 자기가 직접하겠다는거고 얜 러시아를 로마 카톨릭으로 바꾸겠다는 의지가  강한겨. 폴란드는 얘 때문에 망한겨 이게. 

 

모스크바 코트엔 폴란드 애들이 점령을 한 상태야. 군사력으로. 러시아 보야르들이 15세 된 폴란드 아들을 차르로 추대했어. 당연히 조건을 붙여. 로마 카톨릭인 아들이 오소독시.로 개종해야 한다고. 아들을 모스크바로 보내라고. 이걸 아빠 폴란드 킹이 거부를 해. 자기가 직접 다스리겠다고. 이게 3년인겨. 당연히 러시아코트에선 증오만 생기는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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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가 1610 쿠시노 전투.를 이기면서 모스크바.로 입성할때, 스웨덴이 러시아 편 들다가 패하고 물러나고, 다시온게 잉그리안 전쟁이야. 

 

쿠시노 전투.로 러시아는 폴란드 카먼웰스것이 된거야. 스웨덴 입장에서는 폴란드랑 리보니아에서 전쟁중에 러시아가 폴란드로 넘어간겨. 

 

The Ingrian War (Swedish: Ingermanländska kriget) between Sweden and Russia, which lasted between 1610 and 1617 and can be seen as part of Russia's Time of Troubles,[1] is mainly remembered for the attempt to put a Swedish duke on the Russian throne. It ended with a large Swedish territorial gain in the Treaty of Stolbovo, which laid an important foundation to Sweden's Age of Greatness  

 

잉그리안 전쟁. 서기 1610-1617. 에스토니아 와 페테르부르크 사이의 잉그리아 를 이름으로 전쟁딱지 붙였지만 이건 나중에 저 잉그리아 지역이 스웨덴것이 되면서 붙은 이름이고. 잉그리아는 이전에 고두노프가 섭정할때 리보니아로 쳐들어오다가 스웨덴이 반격하고 군대군대 요새를 만든곳이야. 행정적으론 러시아땅이지만 스웨덴과의 사이에서 어정쩡한 곳이걸랑 여기가. 

 

스웨덴 폴란드 전쟁이 리보니아에서 여기로 확장이 된겨. 얘들은 시작을 폴란드.랑 한거야. 폴란드가 크레믈린을 접수하고 폴란드 지기스문트 아들이 러시아 차르로 추대 되고 반 지나서 로마노프가 차르 되면서, 스웨덴이 이기면서 잉그리아 지역이 확실하게 스웨덴 것이 된거야. 이후 백년이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콜라반도 가는 그 지협 길목도 스웨덴꺼인겨. 이게 스위디시 잉그리아. 1617-1721 이야. 저게 대북방전쟁.이라는 서기 1700년에 벌어지는 표트르 대제.때 스웨덴과의 전쟁에서 이기면서 다시 러시아것이 된거야. 페테르부르크.는 서기 1703년에 먼저 찾고. 다음해 수도.가 모스크바.에서 이 상트페테르부르크 로 옮긴거고. 러시아는 표트르 대제.라는 걸출한 인간이 또한 만든겨.

 

러시아 입장에서는 저 러시아 암흑기.에 대기근 겹친데다가 뜬굼없는 가짜 놀이로 폴란드에 엮이고 더하여 스웨덴에 저쪽 땅을 확실하게 빼앗겨 버린겨 백년동안을. 지나고 보면 저 폴란드 지기스문트 바싸.의 똥은 러시아입장에서는 아주 이가 갈리는겨 저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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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브와디스와프 바싸.가 짜르 추대되었지만 모스크바론 안 오는거야. 아빠가 안보내고. 오소독시로 개종 못시킨다는거고, 자기가 직접 짜르 하겠다고. 어쨋거나 코트에선 아들이 짜르야. 화폐 동전도 폴란드 아들 이름 새겨서 발행을 하고. 크레믈린은 폴란드 병력들이 지배하는거고. 이걸 몰아낸게 러시아 로마노프 시작인 미하일 1세.야. 그러면서 러시아 암흑기가 끝나는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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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볼로트니코프.가 반란하는건 1606년.이야. 가짜 드리트리1세.가 죽고. 바로 슈이스키 가문의 바실리.가 차르가 되고 나서야. 그러면서 가짜 드미트리1세의 일년간 권력에 있던 애들이 쫓겨나고 도망가는거고.

 

Little information is available about Ivan Bolotnikov's life before the uprising. It is known that he was a kholop and belonged to the household of Prince Andrei Telyatevsky. It appears that Bolotnikov fled from his master's estate, then was captured by the Crimean Tatars, and sold to the Turks as a galley slave. He somehow managed to escape from his owners, reached Venice, and then was captured in Poland en route to Russia by the associates of Mikhail Molchanov (one of the assassins of Feodor Godunov, who had successfully fled from Moscow and was again contemplating the second coming of False Dmitry).  

 

볼로트니코프.는 콜로프 Kholop 였어. 러시아 농노. 프린스. 쟤들 영주 크냐즈.knyaz 안드레이 머시기의. 헌데 도망을 나와서 크림 타타르에 잡혀서 투르크애들의 겔리선 노예로 팔린겨. 여기서 탈출해서 베네치아로 갔어. 그러다가 러시아 가는길에 폴란드에서 잡힌겨 다시. 헌데 이때 얠 잡은 사람이 미하일 몰카노프. 인데 이 인간은 가짜 드미트리1세 입성할때 고드노프 모자.를 암살한 무리들중 하나였던겨. 가짜가 죽고 모스크바에서 탈출해서리 폴란드에서 후일을 계획하던 중이걸랑. 러시아 다시 먹을라고. 

 

 

 

Molchanov sent Ivan Bolotnikov to the town of Putyvl to meet a voyevoda named Grigory Shakhovskoy. The latter received him as the new tsar’s envoy and put him in charge of a Cossack unit. Ivan Bolotnikov used this opportunity to muster a small army of runaway kholops, peasants, outlaws, and vagabonds, disgruntled with social and economic situation in Russia. He promised them to exterminate the ruling class and establish a new social system. By the order of Grigory Shakhovskoy, Bolotnikov and his army advanced to Kromy (today's Oryol Oblast) in August 1606, defeating the Muscovite army under the command of Prince Yury Trubetskoy. From there, he moved towards Serpukhov and ravaged the city[1].  

 

 

볼로트니코프.를 몰카노프.가 잡아놓고 보니까, 도망간 콜로프. 농노 였어. 러시아 권력에 반감이 있는 사람이니까 자기 편으로 만들고 그리고리 라는 보이보드.에게 심부름을 보내. 보이보드.는 병력 리더, 사령관.이고. 헌데 이쪽에서 얠 차르.의 사신으로 대접을 해. 이때는 가짜2세가 등장하지 않을 때야. 가짜1세.가 죽고 폴란드에서는 전쟁 준비중인거고 1609년 까지는. 폴란드쪽에서 새 짜르를 옹립을 했다는거고 볼로트니코프.는 그 짜르의 사신이란거지. 볼로트니코프.가 연기력이 는거야 이건. 겔리선 노예선에 탈출해서 베네치아 까지 가서 오면서. 나이 40이고. 이사람에게 코사크 지휘권을 준겨 저 마을의 보이보드가. 

 

볼로트니코프.가 나름 의식이 있던 농노였던거야. 이걸 기회로, 도망간 농노들, 농민들, 무법자들. 강도들. 사회에 불만 갖은 모든 인간들을 다 모은겨. 그러면서 우리 저 지배층을 다 몰아내자고. 러시아 대기근 찐하게 겪고 차르는 가짜행세에 폴란드 출신 꼬마가 차르고. 완전히 개판이 된거걸랑 러시아가. 

 

그러면서 오리올 Oryol 지역의 모스크바 병력을 이기고. 막막 가는거지. 도시들을 약탈하고. 그러다 결국 바실리 차르.에게 포위 당하고, 가짜 짜르들은 지원안해주고. 항복하고 잡히고는, 저짝 북쪽 오네가 강에 눈가리고 빠뜨려 죽여. 1608

 

그리고 직전에 출정하는게 가짜 드미트리2세.야. 볼로트니코프.가 진압되고. 러시아 코사크와 이전 가짜 드미트리1세의 사람들이 다 이 가짜2세에 몰리는겨. 폴란드 귀족들의 지원도 있고.

 

The second False Dmitry first appeared on the scene around 20 July 1607, at Starodub. He is believed to have been either a priest's son or a converted Jew, and was relatively highly educated for the time. He spoke both the Russian and Polish languages and was something of an expert in liturgical matters. He pretended at first to be the Muscovite boyar Nagoy, but falsely confessed under torture that he was Tsarevich Dmitry, whereupon he was taken at his word and joined by thousands of CossacksPoles, and Muscovites.[2]  

 

가짜 드미트리2세.는 서기 1607년 7월에 등장해. 1세 죽고 1년 후야. Starodub 스타로두프.가 오리올. 오룔 Oryol 왼쪽이야. 모스크바 서남쪽에 칼루가 Kaluga 오룔 Oryol 에 더 가서 스타로두프.이고 스타로두프.위가 스몰렌스크.야. 지금 벨로루시 접경지역들이야. 스타로두프 아래가 키예프 인거고.

 

얜 처음엔 나고이.의 보야르 행세하다가, 애들한테 잡혀 고문받으면서 자기가 우글리치의 그 짜르.라고 한거야. 이 말에 오히려 얘를 짜르 대접을 해준겨. 

 

Marina Mniszech. 마리나 므니셰크. 가짜 드미트리1세.가 죽고 얘 부인인 폴란드 여자가 도망가서리 가짜2세.출현 소식을 듣고 만나걸랑. 저 폴란드 귀족가문의 여자가 저 가짜2세랑 결혼을 다시 해. 마리나의 의지라기보다는 아빠야 이건 배후에. 여자는 폴란드 힘있는 귀족가문이고. 부녀가 폴란드 귀족애들 모으는거고.

 

In the spring of 1607, another imposter by the name of False Peter (also known as Ileyka Muromets; he claimed to be the son of Feodor I of Russia) came to Tula with a whole mob of robbers to meet with Prince Grigory Shakhovskoy.  

 

가짜2세. 직전에 나타난게 가짜 표도르.야. 이반4세의 아들 표도르1세. 벨링거, 고두노프에게 정치맡기고 교회만 가던. 이사람의 아들이라고 자처하걸랑. 툴라 Tula 에서 티나와. 여긴 칼루가 오른쪽이고. 모스크바 정남쪽이야. 이들이 또한 이반 볼로트니코프.와 같이 반란을 했던거고. 이 가짜 표도르.는 캐릭을 잘못잡은겨. 표도르 보다는 드미트리.가 인기걸랑.

 

가짜드미트리2세.에게 폴란드 귀족 자잘한 애들이 몰리는겨. 여기에 코사크.들이 가세하고, 부랑자 들이 더해지고. 이때 볼로트니코프.가 반란할때 포위당할때고, 그래서 볼로트니코프.가 가짜 표도르.에 이어 가짜2세.에게 지원요청하다가 못받아서 항복해 죽고.

 

supplying him with some early funds and 7500 soldiers, among them Aleksander Józef Lisowski, leader of the infamous mercenary band later known as Lisowczycy.  

 

가짜2세.가 폴란드 자잘한 귀족들 펀딩받아서, 용병데리고 간게 7500명.이야. 

 

 His force initially included 7,000 Polish soldiers, 10,000 Cossacks and 10,000 other rag-tag soldiers, including former members of the failed Zebrzydowski Rebellion. His forces soon exceeded 100,000 men. He raised to the rank of patriarch another illustrious captive, Philaret Romanov, and won the allegiance of the cities of YaroslavlKostromaVologdaKashin and several others.[2]  

 

여기에, 1만의 코사크.가 합세하고, 이전에 폴란드 지기스문트에 반란한 사건이 있었걸랑. 여기에서 패하고 쫓긴 폴란드 귀족세력들이 또한 가담해 여길. 10만을 초과한겨. 엄청난겨 이게. 모스크바 주위의 도시들이 다 얘한테 뭉친거야. 

 

볼로트니코프.가 항복하고 그 다음해 부터 벌어지는 일이야 이건. 

 

저걸 진압하려는게 러시아와 스웨덴의 연합이야. 짜르 슈이스키.의 바실리.가 본격적으로 스웨덴과 손잡은겨. 숙적이 동지가 된겨 이때. 

 

The De la Gardie campaign was a joint military campaign by the Tsardom of Russia and Sweden during the Polish–Muscovite War from April 1609 to June 1610.

Russia was unofficially occupied during the early Time of Troubles by the Polish-Lithuanian Commonwealth, which had supported False Dmitry II as the Tsar of Russia since 1607. Tsar Vasili IV formed a military alliance with Sweden in 1609, providing a 5,000-strong auxiliary corps commanded by Jacob De la Gardie and Evert Horn to support Russian forces under Mikhail Skopin-Shuisky. The De la Gardie campaign was successful against False Dmitry II, dispersing his court in Tushino – a former village and town to the north of Moscow –, but failed against the Polish-Lithuanians and was defeated at the Battle of Klushino on 4 June 1610.  

 

드 라 가르디 캠페인. 원정. 스웨덴 귀족 Jacob De La Gardie 야콥 드 라 가르디. 이사람은 출생지가 에스토니아 지금 수도 탈린 Tallinn 이야. 당시 레발 Reval. 아빠가 귀족이고 엄마는 스웨덴 킹 요한3세.의 베스타드 딸이야. 요한 3세가 폴란드 킹 지기스문트 바싸의 아빠고. 드 라 가르디 가 네덜란드 독립전쟁에 자원해서 참전하고 나싸우의 모리스.에서 용병하는겨. 나싸우 모리스.가 아빠 조용 윌리엄.을 잇는거고 네덜란드에서. 이 모리스.가 네덜란드를 실재로 만든 인간이야. 조용 윌리암은 암살당하고 걍 죽고. 장남이 필립.이야. 얜 스페인에 볼모로 잡혀가 어릴때 아빠 죽기전에. 얜 스페인에서 카톨릭으로 커. 조용 윌리엄을 이어야 할 애가 카톨릭 꼴통이 되는겨 이게. 오히려 아빠가 반란했다고 절대 아빠를 안보겠다고 다짐을 해. 그와중에 아빠 죽고 이거 열받은 잉글랜드 레스터 백작 더들리.가 엘리자베스 물리치고 가서 아무것도 못하고 잉글랜드 다시 와서 1588 스페인 아르마다 하는거고, 할때 네덜란드.는 장남 필립.이 아니라 배다른 동생 모리스.가 중심인거야. 이 모리스.가 스페인 아르마다 1588 로 잉글랜드가 이기면서 이 기세에 힘입어 네덜란드가 일어선거걸랑. 이때의 네덜란드는 모리스.야. 장남 필립.이 아녀. 얜 카톨릭인 애매한 앤거야. 

 

드 라 가르디.가 저 모리스 밑에서 네덜란드 병법을 익힌겨. 스웨덴은 구스타프 바싸.가 건국하고 아무것도 아닌 촌동네여 이건. 최초로 징병제로 정규군을 유럽에서 만들었지만 갓 농민들을 훈련시켜서 군사력 키운게 역사가 무지무지 약한거야. 이게 너무나 우스워서 지기스문트 바싸가 소규모 용병데리고 쳐들어갔다가 삼촌 카를 죽일수 있는데도 살려주고 하면서 물러난거걸랑. 

 

드 라 가르디.가 네덜란드 갔다가 12년 휴전.때 스웨덴에 다시온거야. 네덜란드 80년 전쟁의 중간 12년 휴전.이 서기 1609년.이야 이 직전부터 전쟁이 소강상태였걸랑. 이때 러시아에선 가짜드미트리2세.가 난리가 난거고, 갓 차르가 된 슈이스키.의 바실리.가 지원요청을 하는겨. 노브고로드 때부터 스웨덴과는 12세기 부터 전쟁이었던 사이가 말야. 직전엔 이반4세의 리보니아 전쟁에 고두노프.도 다시 쳐들어갔던. 

 

모스크바 빼놓고는 거의 가짜2세의 세상이야. 노브고로드.를 재 탈환하고. 모스크바.로 향하는겨

Tushino 투시노.가 얘들 코트.야. 모스크바 에 인접한 북쪽 마을이고. 모스크바.는 가짜2세 병력으로 포위가 된 상태걸랑. 

 

The De la Gardie campaign was successful against False Dmitry II, dispersing his court in Tushino, a former village and town to the north of Moscow, where Dmitry II maintained an alternative court, challenging the authority of Vasili IV. On 12 March 1610, the Russo-Swedish army broke the rebel siege of Moscow and conquered the city.[7]

 

서기 1610년 3월.에 투시노를 함락하고 바로 모스크바로 가서 포위병력 진압하고 입성해서 모스크바.를 재점령한겨. 

 

그리고나서, 드 라 가르디 병력이 가는 곳이 스몰렌스크.야.

 

폴란드 지기스문트.가 가짜드미트리1세 죽고 전쟁선언하고 준비하고 출정하는게 서기 1609년.이야. 가짜 드미트리 2세.가 폴란드 페티 귀족들 중심 7천명에 코사크 만명 합세하고 이게 십만 병력이 되서 모스크바를 포위하는 건 폴란드 코트.와 별개야 이건. 

 

정식 킹의 군대가 직전에 출정을 하는겨. 얘들이 포위한게 스몰렌스크야. 이때 드 라 가르디.의 스웨덴군이 노브고로드에서 모스크바로 간거고. 이어 폴란드 킹의 군대를 막으러 가는겨 왼쪽으로. 이 종지부가 쿠시노 전투 Kushino 1610년 6월 이야. 여기서 드 라 가르디와 모스크바 연합군이 패하고. 폴란드가 모스크바를 다시 갖고 오는겨. 그리고 아들이 짜르로 추대가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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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 라 가르디.에 패한 가짜 드미트리2세.의 세력이 애매해진거야 저때. 즉 얘들이 모스크바 포위하고 주위 도시 다 함락할때에, 폴란드 정식 병력이 출정을 한거걸랑. 이때 가짜 2세.의 세력들이 분산이 된거야. 모두들 폴란드 킹.으로 가는겨. 그러면서 스웨덴 병력에 얘들이 대패하고 흩어진거걸랑. 

 

The arrival of King Sigismund III Vasa at Smolensk caused a majority of his Polish supporters to desert him and join with the armies of the Polish king. At the same time, a strong Russo-Swedish army under Mikhail Skopin-Shuisky and Jacob De la Gardie approached Tushino, forcing him to flee his camp disguised as a peasant and go to Kostroma, where Marina joined him and he lived once more in regal state. He made another unsuccessful attack on Moscow, and, supported by the Don Cossacks, recovered a hold over all south-eastern Russia. However, he was killed, while half drunk, on 11 December 1610 by a Tatar princeling, Peter Urusov, whom he had flogged.[2] Hetman Stanisław Żółkiewski described this event in his memoirs:  

 

폴란드 정식군대가 출정하면서 가짜2세의 병력이 빠져 저쪽으로. 동시에 드 라 가르디.병력이 얘들한테 온겨 투시노.로. 얜 도망을 가 농부로 변장하고. 재혼했던 이전 가짜1세의 부인 마리나.와 합류하고 다시 짜르 생활을 하는겨. 그리곤 다시 모스크바 공격하고. 이때 돈강 코사트들이 합세해주고. 그러면서 동남쪽은 여전히 얘 관할이 된거야.

 

저때는 말야. 쿠시노 전투 1610년 6월 끝나고. 모스크바.는 폴란드 것이 된겨. 이 상황에서 얘가 동남쪽은 얘 세상인거야. 모스크바에서는 폴란드 킹 아들을 차르로 세우고, 오소독시로 개종하라, 싫다, 하면서 오지는 않고, 동전은 폴란드 애 이름으로 발행하고, 아래쪽은 가짜2세.가 차르 행세하고. 걍 러시아는 개판이 된겨 이게.

 

이 상태에서 서기 1610년 12월.에, 타타르 영주.가 술취한 가짜2세.를 총으로 쏘고, 칼로 머리랑 손을 댕강 짤라 죽여. 이전에 가짜2세.가 이사람을 태형으로 곤장질을 했걸랑. 이걸 복수를 한겨. 가짜가 술 무지 먹고 썰매타면서 또 술먹고 질주할때에 타타르 영주가 같이 타서리 걍 죽여버려. 이걸 폴란드 귀족이 기록에 남기고.

 

가짜1세나 2세나 그냥 가짜가 아니라 진짜 차르 놀이를 한거야 쟤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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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 라 가르디.가 쿠시노 전투에서 패하고. 다시 돌아와 스웨덴에. 그리고 폴란드 것이 된 러시아.를 다시 쳐들어와. 노브고로드.를 들어와서 접수하고. 모스크바 위쪽을 점령하는겨. 러시아 코트에게 요구하는건 이전에 가짜2세 몰아내던 것에 폴란드 와 쿠시노 까지 싸운 캠페인.에 대한 보상을 하란거야. 주인이 바뀐 코트에. 즉 잉그리아 전쟁의 시작은 스웨덴 대 러시아.가 아냐. 스웨덴 대 폴란드야 저것도. 

 

저 상황에서, 폴란드 애들에 열받았던 러시아 보야르들이 들고 일어나고, 얘들이 모스크바 크레믈린.의 폴란드 세력을 다 몰아내고 차르에 오르는게 로마노프 가문의 미하일1세야. 폴란드는 다시 와서 재점령하려다 실패하고, 그러면서 이 어수선한 틈에 스웨덴은 잉그리아 점령하고 모스크바 북쪽까지 확장을 하는겨.

 

그러면서, 로마노프 미하일 1세.가 발트해 쪽을 모두 스웨덴에 줘. 페테르부르크 지역까지. 잉그리아 땅이 스웨덴것이 돼 이후 백년간. 그리고 러시아는 서유럽과의 통로가 발트해 가 막히고서, 모스크바 컴퍼니를 세운, 이전에 잉글랜드인 리차드 챈슬러.가 들어왔던 백해.의 Arkhangelsk 아르칸길스크.가 중요해진겨. 서유럽과 이 백해쪽 아르칸길스크.로 통해 무역을 하게된겨 백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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