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설부모은난보경. 이라고 있다. 일명 부모은중경. 으로 불린다. 이것에서, 낳으실제 괴로움 다잊으시고 어버이날 노래가 나오다
佛說父母恩難報經
後漢安息國三藏安世高譯
[0778c28] 聞如是:
[0778c28] 一時婆伽婆在舍衛城祇樹給孤獨園。
[0778c29] 爾時世尊告諸比丘:「父母於子,有大增益,乳餔長養,隨時將育,四大得成。右肩負父、左肩負母,經歷千年,正使便利背上,然無有怨心於父母,此子猶不足報父母恩。若父母無信,教令信,獲安隱處;無戒,與戒教授,獲安隱處;不聞,使聞教授,獲安隱處;慳貪,教令好施,勸樂教授,獲安隱處;無智慧,教令黠慧,勸樂教授,獲安隱處。如是信如來、至真、等正覺、明行成為、善逝、世間解、無上士、道法御、天人師、號佛、世尊教,信法教授,獲安隱處。諸法甚深,現身獲果,義味甚深。如是智者,明通此行,教令信聖眾。如來聖眾甚清淨,行直不曲,常和合,法法成就,戒成就、三昧成就、智慧成就、解脫成就、解脫見慧成就。所謂聖眾——四雙八輩,是謂如來聖眾,最尊最貴,當尊奉敬仰,是世間無上福田。如是諸子!當教父母行慈。諸比丘有二子:所生子、所養子,是謂比丘有二子。是故諸比丘!當學所生子,口出法味。如是諸比丘,當作是學。」
[0779a19] 爾時諸比丘聞佛所說,歡喜奉行。
대만 전자불경. CBETA.
언젠가 길을 가다가, 노숙자가 길바닥서 기독성서를 피고 필사하는거라, 그 길바닥서, 무릎꿇고 엎드려서리,
인생이 바닥이 되고, 의식이란 작은 새가, 사思의 저 밭전 모양의 머리에서만 다니다가, 삶이 엎어진거라, 그때 의식이란 작은 새는 죽은거라, 다른 새, 다른 의식이 티나온단다. 그리고 저 인간의 머리모양 밭전에서 나와서리 아래 바닥의 그 우주 크기의 마음심 싸이키란 곳에 들어간단다.
아! 미치는거다 그 inspire, 그 calling, invoking. 신 god 이 to call, to invoke 라 잖냐? 어원이? 그 콜 하는 소리 깨우는 소리는 저 밭전의 뇌가 아니라 저 마음심의 싸이키에서 울리는거라
그걸 무릎꿇고 쓰는거라 막막 이해가 되는거지.
길바닥가다 엎드려서리 기독성경이든 불경이든 사경하며 보는 이들에겐 경배하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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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새지 말자 이번엔.
저 부모은중경. 이 저기도 안세고. 번역. 이리 나오는데, 아 그이전에,
저게 석가모니 말이 아닌거라 저거. 석가모니가 저런 말을 할 사람인가? 왜 저런 말이 불경에 저리 있지? 저게 고려대장경에도 편입이 되어있다. 똑같이 안세고 역. 해서 한글대장경에도 한글번역 되어있다.
석가모니사후 일차결집 이차결집 하면서리 분파가 되다. 저때 대승불교들 번역이다 저런게.
《父母恩重难报经》,有的版本題為《父母恩重经》,译者不详,是释迦牟尼佛称扬赞叹父母之宏情操与贡献的经典。目前的流通本题为姚秦三藏法师鸠摩罗什所译。因为其源流不明,有部份佛教学者怀疑它并非由印度传入而是由中国人所写,因该经强调孝道较接近中国的儒家思想
부모은중경, 역자 불상. 번역자 모름.
안세고. 安世高,生卒年不詳(大約2世紀)。本名清,字世高,西域安息太子,信仰佛教。是繼迦葉摩騰及竺法蘭後,著名的佛經漢譯者
생몰모름. 대략 2세기 사람. 서역의 안식국 태자. 안식국이 아래 썰 풀었던 파르티아 제국. parthian. 거기 태자란다. 저사람 불경으로 안반수의경 이 대표된다. 사마타 등 저런것중 흔히 알려진게 나중 지관수행. 수습지관좌선법요. 란 것이 있다. 저 안세고의 번역책 보자
《人本欲生經》、《安般守意經》、《陰持入經》、《道地經》、《阿毘曇五法行經》、《四諦經》、《十二因緣經》、《轉法輪經》、《八正道經》、《禪行法想經》、《阿難問事佛吉凶經》等
저기에 부모은중경이 없다. 저사람이 그런 효사상에 관시미가 있을 사람이 아니다.
어떤 유학자가, 안세고가 서역사람이니까, 만만하지, 알려졌고, 이름있고, 저걸 나중에 안세고. 란 이름으로 번역자 박고 만든거라 저거.
대승불경 중에 석가모니 진짜 말씀이 어떤 것이 있을까?
불경은 아함경 보시라. 그리고, 구마라지바, 구마라습 의 번역을 보시라.
이 유학자들이 이젠 은근히 여 불경에도 자기들 사상을 주입시키는거라.
이 모던패밀리, 시즌 8까지 나왓네? 시즌 3인가 까지만 보고 말았는데
사람들간의 진짜 예의, 진짜 효도 저기서 찾아라 저기서.
인간에 대한 예의는 저기서 찾아라 저기서.
니들이 찾는 예의는, 깡패들 예의다. 전제군주자들의 예의다.
포경언 鮑敬言. 기원전 사람. 생몰모름. "예교 유교는 만악의 근원이다 화를 부르고 깊게할 뿐" 鮑敬言認為禮教「救禍而禍彌深」 예교. 유교. 이건 재앙 화 분노 화 질만 더 더 키우다. 인간들 질서 지우고 윗계급이 아랫사람들 노예부리는 종교다. 예를 빙자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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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걸 심는것이 집안에, 효란 이름으로 세뇌시키다.
삼강행실도. 언제 나오나 보자.
세종실록 56권, 세종 14년 6월 9일 병신 2번째기사 1432년 명 선덕(宣德) 7년
집현전에서 《삼강행실》을 편찬하여 서와 전문을 더불어 올리다
삼강행실도를 1432년에 집현전에서 다 썼다. 세종에게 보고한다 이렇게 썼습니다. 한글 나오기 전이다. 한글은 1443 최초 등장하다. 한문글에 그림을 넣다. 삼강행실을 그린 그림 도. 해서 삼강행실도. 다. 나중 성종때 어유동 사건으로 정절 부분만 한글 언해로 풀어서 먼저 전국에 뿌린다. 여자들 정절 지켜라.
정절이란게 어디서 나오냐? 충신불사이군. 충성 충 신하는. 신하신, 굽신굽신 대는 인간 형상. 의 신하는 두 군주를 섬기지 않는다.
따라하거라 집안에서, 여자는 두 남자를 섬기지 않는거란다. 남자는 첩질해도 되는거라. 군주는 임금은 여러 후궁들 부비부비 해도 되는거라. 헌데 신하는 두임금 섬기지 말거라. 여자도 마찬가지라 한남자만 따르거라.
정절
그래야 왕조가 유지된단다.
부자유친. 친이란 글자는 감옥 갇힌 죄수에 면회하는 형상. 애비가 죄를 지었다. 허나 자식은 애비가 나쁜애라도 가서 모시거라. 친함을 유지하라. 친할 친이다. 애미는 애비를 떠받들고 자식은 애비가 죄인이라도 떠받들어라 부자유친이니라.
자 세뇌를 시키거라. 이 땅은 무도의 땅이라. 민들은 화살찔린 애꾸형상의 죄수라. 맹자가 그랬단다 인간은 금수와 다를 바가 거의 없다. 서민거지라 군자 존지라. 금수와 다른 인간은 서민이란다 우리는 군자님이다 우리만의 문명을 보존하자.
저들에게 도라는 것을 알려줘야 한다. 그래야 다스리기 편하단다
다음해 1433
세종실록 59권, 세종 15년 2월 24일 무신 2번째기사 1433년 명 선덕(宣德) 8년
예문 대제학 정초가 명을 받들어 《삼강행실도》에 발미를 지어 올리다
대제하 정초가 발미. 주자소. 인쇄소 에서 찍은 삼강행실도에. 펴내면서 쓴 acknowledgement 를 보고하다. 전국에 뿌리다. 고려의 인쇄술은 저리 쓰는 거란다. 오직 유교 세뇌 시키는 책만 써라. 독일 처럼 3천개 인쇄소가 자기들 이야기 찍어내는 그런짓을 우린 하면 안된다. 민들은 무지한거다. 자기들 이야기 하면 안된다. 나중 중종아 명심해라. 설공찬전 이란 허황된 불교 도교 한문이야기를 한글로 번역한 책이 나올거다. 그따위 이야기 다 금지하거라. 중종은 충실히 그짓한다
최만리. 이사람 정감간다. 세종에 반기들었다 역적으로 매도하다. 최만리 뿐이냐? 다들 최만리였다. 최만리가 그냥 저때 상징일 뿐이다. 오히려 최만리는 유연한 사람이다. 실록에 이적의 일. 이란 것이 있다. 이적이 죽었는데, 이적 아들이 살아생전에 이 아들이 애비한테 비난한 편지가 있다고 하다. 세종이 교형에 처해 죽이라는 판결을 하다.
최만리가 상소를 한다. 아니 너무한거 아님둥? 이적도 나중 화해해서 그 자식 집에서 죽었고, 정작 그 편지 내용은 볼수 없어 모르고, 살려주심둥. 이때 세종 논리 허섭하다. 야 그럼 냉중에 자식이 애비 때려 죽였으면 어쨌었겠니? 그래도 살려줘야 하니?
저게 논리야? 말이야?
세종실록 94권, 세종 23년 윤11월 11일 갑술 2번째기사 1441년 명 정통(正統) 6년
사리각 경찬회에 관해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이 아뢰다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일찍이 경연(經筵)에 납시어 신 등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불교에는 절대로 뜻이 없다. ’고 하셨는데, 어제 성교(聖敎)를 듣사옵고 놀람을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신 등은 생각하기를, 역대의 제왕은 본받을 만한 이도 있고 본받을 수 없는 이도 있습니다. 역대의 부처를 섬긴 임금은 본받을 수 없는 자이옵거늘, 하물며 한(漢)·당(唐) 이후에서는 어찌 전하를 위하여 법을 취하오리까. 신 등의 말을 듣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너희들의 말을 들으매, 말뜻이 곡진(曲盡)하니, 비록 이처럼 조목을 진술하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어찌 알지 못하겠느냐. 그러나, 사리각을 이미 수리하여 창건하였으니 어찌 치제(致祭)하지 않을 것이며, 또 불교가 천하에 두루 퍼졌고, 우리 나라는 작기가 여뀌잎[蓼葉] 같은데, 이같은 법을 일체로 배척할 수 없다."
하였다.
최만리 등 유자들이 말한다. 세종! 니 불교에 절대 뜻이 없담시롱? 부처를 섬긴 왕 치고 본받을 이 하나 없는데 어찌 부처 떠받드는 짓을 은근히 하능겨? 이 말다르고 행동다른 임금아!!
세종이 말한단다. 야, 지금 아직 1441년이야. 고려 없어진지 50년 넘을까 말까고, 아직 조선반도에선 고려야 조선이 먼지도 모르는 미물들이 많아 전화가 있냐 테레비가 있냐. 아직 불교 세상이야. 그리고 말이다. 이 나라 매우 짝아, 손바닥 만한 이파리 크기야. 이 사람들을 어찌 그리 하나의 법으로만 다루려 하니?
한글 나오기 2년 전이다. 그리고 세종어지 란 이름으로 왜 한글을 반포하게 되었나 하는 말이 나오기 5년전이다. 저때 세종은 아직 마음품이 컸다. 저때 불교논쟁 존나 재밌다. 물론 생체육신 미물들인 학자들은 저게 재밌는 건줄 모를거다 불경을 알겠니 유학을 알겠니 저 학자란 타이틀 애들이.
저기서 눈여겨 볼 말이. 이 나라 작기가 여뀌잎 같다. 란 거다. 我國小如蓼葉. 요엽. 여뀌잎. 한해살이 풀.
저 감정이 저 세종의 감정이 한글반포 1446 훈민정음 하는 세종어지에 나온다.
거기서 세종이 그런다. 세종이 아는거라. 이땅이 너무나 작은걸. 땅바닥도 작다. 힘이 너무 없는거라.
문자. 글월 문. 글자 자. 라고도 작명을 못하다.
그 1443년 12월 마지막날, 한글 자음 모음 만들다. 짧게 끝난다. 그 한해 마지막날. 그 좋지도 않은날. 그리 자랑스럽다 난리친다는 그 한글을 단 몇글자, 그 안좋은 날에 기사를 삽입한다. 편집하는 인간들의 주작질 인지 모르나, 그런거 다 배제하라, 사실은 중요한게 아니다. 그 바닥의 정서를 읽어라.
저날이 북한에선 한글날이다. 저날을 양력으로 추산해서 1월 중순에 한글날 한단다
1446년 한글 반포하는 긴 문장. 저것도 9월 마지막날이다. 그 안좋은 날. 허튼짓하면 귀신이 들러붙어 다음달이 안좋은게 그믐날이다
거기에 그 세종의 비애. 찐하게 느끼는 인간이 과연 몇일까?
문. 자. 라는 말도 못한다. 언해. 라고 한다. 언. 이란 글자는 암벽, 돌에 새기는 글자다. 암벽에 옛날 민들이 그냥 막막 써대는 하류취급받는 글자다. 그게 언. 이란 거다 彦.
훈민. 가르칠 훈. 꾸짖는거다 훈이란 글자는. 뚜들겨 패서 주입시키는거다. 무식한 민들을.
정음. 음. 音. 예기의 악기. 에 저 음. 이란 글자가 나온다. 성. 음. 악. 금수들이 내는 소릭가 소리 성. 사람이 그냥 내는 소리가 음. 고급진 소리가 악.
훈민정음. 저 네글자 만으로도, 저 안에 깊은 소국 소민 약소의 비애감을 느껴라.
문자. 문. 자. 라는 말도 못붙이다. 중국 문자 띄우신다. 세종이 어쩔수 없이 띄우는거라. 또한 지극한 사대주의다.
세종의 자부심은 마지막. 전환무궁! 여기서 나온다. 이 전환무궁의 글자. 여기에 우리의 희망이 있단다 조선사람들아!!!! 부디 이 한글로 나중에 힘을 받아라!! 세상의 모든 언어를 쉽게 배울 수가 있단다!!!
표준어쓰세요. 철자틀려요 철자 맞추세요. 한문 배우지마세요. 외국말 쓰지 마세요. 한글 더렵히지마세요. 앞으로 우리가 규정하는 단어만 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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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세종의 속내를 알 수 있는 말이. 저 2년전 최만리와의 대화에서 여뀌잎같은 우리 작은 땅. 에서 읽을 수 있다
세종실록 103권, 세종 26년 2월 20일 경자 1번째기사 1444년 명 정통(正統) 9년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이 언문 제작의 부당함을 아뢰다
1443년 마지막달 마지막날. 세종이 한글 자음모음 만들었다. 짤막하게 나오고, 조정에 소문이 난거라. 아 우리 세종이, 세자한테 정사를 맡기시고 쓰잘데기 없는 짓을 하신다니 그래? 만리야 니가 가서 좀 말리라
하니, 만리(萬理) 등이 대답하기를,
"설총의 이두는 비록 음이 다르다 하나, 음에 따르고 해석에 따라 어조(語助)와 문자가 원래 서로 떨어지지 않사온데, 이제 언문은 여러 글자를 합하여 함께 써서 그 음과 해석을 변한 것이고 글자의 형상이 아닙니다. 또 새롭고 기이한 한 가지의 기예(技藝)라 하온 것은 특히 문세(文勢)에 인하여 이 말을 한 것이옵고 의미가 있어서 그러한 것은 아니옵니다. 동궁은 공사(公事)라면 비록 세미한 일일지라도 참결(參決)하시지 않을 수 없사오나, 급하지 않은 일을 무엇 때문에 시간을 허비하며 심려하시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전번에 김문(金汶)이 아뢰기를, ‘언문을 제작함에 불가할 것은 없습니다.’ 하였는데, 지금은 도리어 불가하다 하고, 또 정창손(鄭昌孫)은 말하기를, ‘삼강행실(三綱行實)을 반포한 후에 충신·효자·열녀의 무리가 나옴을 볼 수 없는 것은, 사람이 행하고 행하지 않는 것이 사람의 자질(資質) 여하(如何)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 꼭 언문으로 번역한 후에야 사람이 모두 본받을 것입니까.’ 하였으니, 이따위 말이 어찌 선비의 이치를 아는 말이겠느냐. 아무짝에도 쓸데 없는 용속(庸俗)한 선비이다."
하였다. 먼젓번에 임금이 정창손에게 하교하기를,
"내가 만일 언문으로 삼강행실(三綱行實)을 번역하여 민간에 반포하면 어리석은 남녀가 모두 쉽게 깨달아서 충신·효자·열녀가 반드시 무리로 나올 것이다."
아니지, 설총 이두는 그래도 한문 글자모양이랑 우리 발음이랑 같잖냐? 세종 니가 하치리란 뜻으로 작명한 언문 그건 글자 형상이 아녀 그거. 그리고, 오해말어, 한가하게 할 짓없어 놀이했다고 비아냥 된거 아녀, 현학질 잘난척 한다고 내가 그랬냐 언제? 세자가 대리청정하는 거에 일일이 간섭은 해야하는거는 내 머라 안해. 헌데 급한 것도 아닌 그따위 글자 만드는 짓은 대체 왜 하니? 몸 안좋아서 뒤로 물러났음서 건강이나 챙겨.
세종이 답하다.
만리야. 니가 급할것이 없다고 했는데, 만리야, 삼강행실도. 그거 우리 왕조가 오래 갈라믄 그 삼강행실도가 제일 중요한겨. 샘이 깊은 물이 안말러, 뿌리가 깊은 나무가 바람에 안날리고 열매가 풍성한겨, 샘이 깊어야 물이 안말러. 우리 유교가 나무고 뿌리야. 아직 이 조선바닥은 저 썩을놈의 불교세상이야. 유교를 박아야해. 저 모지리들을 저 화살박힌 애꾸의 서민들을 다스릴라므는, 뿌리가 깊어야해. 샘이 깊어야해. 집안 구석구석에 저 삼강행실도를 뿌린이유야. 저걸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선, 쉽게 전파하기 위해선 쉬운 커뮤니케이션 도구가 있어야 해
그게 한글이야 한글. 언문이야. 언문.
정창손 저따위가 저번에 그러더라? 삼강행실도를 뿌린지 십년 가까이 되었는데, 아직 충신 효자 열녀 가 안나옵니다. 즉 저 민들을 가르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합니다. 인간은 타고난 자질여하에 따르는 거지. 가르치다니요? 공자님의 말은 우리 선비를 위한거지. 선비 사 가 군자가 되란 거지. 민들을 가르쳐서 군자 맹글라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하는거걸랑
세종 왈, 어찌 저딴 애가 선비라니?
인간은 가르칠수 있는겨. 두고 봐라. 내 앞으로 저 삼강행실도 한문으로 된 것을 한글로 번역시켜 뿌리라고 내 자식들에게 제일 첫째 유업으로 남길거다. 나중 성종이 정절 여자로 언해질 하고 중종이 또 내게도 하고 임진란 지나서 이야기들 나오면 개정판들 내게 해서 이걸로 뿌리와 샘을 대신할거다.
앞으로 일이천년간은 우리 유교세상이 되는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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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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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은 알까? 지금 그렇게 해서, 2천년대 이 한반도의 인간들이 바바리안이 된 것을?
질기디 질기지. 친영기간 줄이는데 삼백여년, 제사 장남이 갖고 오는데 또한 삼사백년. 그 질기디 질긴 세월. 그 이념들을 박정희가 써먹고, 그래서 먹고살게는 해주고, 그 이념은 아주 이땅의 인간들에게 뿌리깊이 쎄멘바닥으로 공그리가 된걸.
먹고는 살게 되었는데, 정작 사유는 없어졌어. 의식의 새가 날라다닐 공간이 없어. 밭전. 이란 머리안에서만 뱅뱅 돌아다니다가 곧 그 싸이키의 새도 말라죽어가는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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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삼강행실도 논한적. 그때는 관점이, 왜 세종때 이야기 중 빠진 세개 이야기. 곽거매자 원각경부, 그리고 하나는 머냐? 나중 정조때 개정판 낼때 뺀이야기 중복은 하지 말자
삼강행실도가 왜 문제일까?
효 만 보자
맨처음 나오는 몇개만 보자
db.sejongkorea.org:8080/sejong/pageDetailInfo.do?bkCode=P01_SG&bkContNo=5&ver=n
민손단의
민 손의 계모가 손이를 미워하여 제 아들일랑 솜 두어 주고 민 손일랑 갈꽃을 두어 주거늘, 추워서 말 고삐를 놓아 버리니까, 아비가 알고 계모를 내치려 하거늘, 민 손이 꿇어 말씀드리되, “어미 있으면 한 아들이 추우려니와 없으면 세 아들이 추우리이다.” 아비 옳게 여겨 아니 내치니, 어미도 돌이켜 뉘우쳐 어여삐 여기더라.
저기 언문 그대로 있다.
민손단의. 민손. 이란 인간. 공자 제자다. 민손의 어미는 의붓애미 계모다. 친모가 낳은 아들이 민손.이고 계모가 와서 아들을 낳았겠지. 그 계모가 자기가 낳은 아들만 이뻐한다. 자기 아들한테만 솜옷을 준다. 민손에겐 걍 짧은 얇은 옷만 주는 거라 추운 겨울인데. 애비가 보고 열받아서리 내쫓을라한다 여자를. 민손.왈 그래도 계모가 있으면 저만 추으면 그뿐. 계모가 가면 계모의 두 아들 포함 세 아들이 추워져유 아부지. 내쫓지 마세유. 아 감동. 애비감동 애미감동
자로부미
자로가 가난하여 명아주와 팥잎만 가지고 밥 먹더니, 어버이 위하여 백 리 밖에 가서 쌀 지어 오더라≪삼백 보가 한 리요 백 리는 온 리다≫. 어버이 여의고야 높이 되어 딸린 수레가 일백이며, 곡식을 십만 석을 쌓으며, 요를 겹쳐 깔고 앉으며, 솥을 벌여 먹더니, 한숨 지어 이르되, “명아주와 팥잎을 먹고 어버이 위하여 쌀 지려 하여도 못하리로다.” 공자가 들으시고 이르시되, “자로야말로 살아서는 힘껏 효도하고 죽어서는 못내 그리는구나 하리로다.”
공자 제자 자로. 자로가 쌀을 지다. 지다 부. 아 어릴땐 백리 밖. 40키로를 나가서 쌀을 등에 지고 와서리 친 親 을 어버이 해석. 아버지다 아버지. 부모가 아니다. 아버지 쌀밥 멕일라곡 백리밖 고생고생 쌀밥 드시게 한 가난한 시절. 아 지금 관리가 되서리 잘 살지만 아부지가 돌아가시고 없네? 아 옛날 가난했던 그 시절이 더 좋아라. 아버지 살아계셔서 백리밖 돌아다니며 쌀밥 드시게 하던 그시절이 차라리 좋아. 공자가 그런 자로를 보고는. 자로 니가 효자니라
양향액호
양 향(楊香)이라 하는 딸이 열 넷인 적에 아비 따라 가서 조 베다가 범이 아비를 물거늘 달려들어 범의 목을 졸라 드니 아비 살아나니라. 원이 곡식이며 비단 주고 그 집 문에 홍문 세우니라.
양향. 이란 딸이. 액. 조르다 쥐다 막다. 호랑이를 목졸라 막다. 열네 살인 딸이, 호랑이에 물린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달려들어 호랑이 목을 잡고 애비가 살다. 관리가 알고 그 집에 기념문을 세우다.
저런거 뿌리고, 막막 공문 올라온다. 우리마을에 호랑이에 물린 애비 잡혀간거를 다시 산에 올라가서리 그 호랑이를 때려죽이고 애비 구한 자식이 있어유!! 조선 조정에서 정려문. 홍살로 된 깃발 정. 마을려. 기념문을 세워준단다 실록에 보믄.
다 저런거다 저런거.
효의 잣대를 아주 높게 설정하다 이야기로. 왠만한 효는 효가 아니다. 정말 머리 좋은 거다 저거.
그러니 사소한 잘못은 천하의 악마가 되는거라. 이 유교에서는 이 삼강행실도 에서는.
저 수준으로 따르라! 하는게 아니다.
하나님이란 잣대를 상상을 초월하는 인격으로 설정을 한다. 거기서 사소한 짓해도 지옥가는거라. 똑같다 그런 스킴이랑.
저런 것들이 효의 표준인데, 하물며 어찌 애비애미에게 절하고 떠받드는 건 그따위가 효 수준에 들어가긴 하겄냐? 아주 기본중에 기본인거라.
저 프레임이 아주 똑같다. 여자에게 정절. 임금에게 충성.
정절 충성의 이야기들 봐라. 정말 끔찍한 수준이다. 대부분의 인간들이 할 수 가 없는 경지다.
그러니 웬만한건 정절도 충성도 아닌거라. 웬만한건 그냥 기본으로 해야하는거라
세종 머리 좋은거다 저거.
모든 권력 독재 는 저런짓 을 가장 우선시 한다.
조선왕조는 유교 "만" 있어. 유교 외엔 죽음이야. 유교 중에 주자 "만" 있어 주자 외로 사서 오경 해석하면 뒈진다 뒈져
고구려 보자.
卷第二十一 髙句麗本紀 第九 > 보장왕(寶藏王) > 二年春三月 당에 도교를 구하니 노자의 도덕경을 보내주다(0643년 03월 (음))
당에 도교를 구하니 노자의 도덕경을 보내주다 ( 643년 03월(음) )
3월에 연개소문이 왕에게 아뢰어 말하기를 “삼교(三敎)는 비유하자면 솥의 발과 같아서 하나라도 없어서는 안됩니다. 지금 유교와 불교는 모두 흥하는데 도교는 아직 성하지 않으니, 소위 천하의 도술(道術)을 갖추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엎드려 청하오니 당에 사신을 보내 도교를 구하여 와서 나라 사람들을 가르치게 하소서.” 하였다. 대왕이 그러하다고 여겨서 국서를 보내어 청하였다. 태종이 도사(道士)註 010숙달(叔達) 등 여덟 명을 보내고 동시에 노자의 도덕경註 011을 보내 주었다. 왕이 기뻐하고 절을 빼앗아 이들을 머물게 하였다.註 012
註 010
道敎의 司祭者이다.
註 011
李聃의 저술로 도교의 중요 경전이다.
註 012
보장왕과 연개소문은 儒敎와 佛敎와 함께 道敎를 아울러 진흥시킨다는 정책을 세우면서 특히 道敎를 우대하고 불교사원을 빼앗아 道敎의 사원으로 삼았다. 이외에 道士를 儒士 위에 앉히고, 도사들을 시켜 국내의 유명한 山川을 鎭護하게 하고, 도사들의 주장에 따라 수도 평양성의 형세가 초생달 모양이라 하여 보름달 모양으로 증축하기도 하였다(《삼국유사》 권3 寶藏奉老 普德移庵 참조).
삼국사기. 연개소문 이야기. 지금 이땅에 유교가 흥하고 불교가 흥합니다. 헌데 도교가 흥하지 않습니다. 당나라에서 도교를 갖고 오시죠 왕이시여.
그래? 니말이 맞다 도교 갖고 오자.
고구려가 왜 고구려겠니?
신라 볼까?
신라 하면 불교로만 알잖냐?
卷第四十一 列傳 第一 > 김유신(金庾信) 상 > 유신이라 이름짓다(0595년 (음))
유신이라 이름짓다 ( 595년 (음) )
[태어난 아이의] 이름을 정하고자 함에 [김서현이] [만명]부인에게 이야기하였다.
“내가 경진일 밤 길몽을 꾸어 이 아이를 얻었으니 마땅히 이로써 이름을 지어야 하오.註 042 그렇지만 《예기(禮記)》에 따르면 날짜로써 이름을 짓지는 않는다註 043고 하니, 곧 ‘경(庚)’자는 ‘유(庾)’자와 서로 비슷하며 ‘진(辰)’과 ‘신(信)’은 소리가 서로 가깝고 하물며 옛 현인(賢人) 중에도 유신(庾信)註 044이라는 이름이 있으니註 045 어찌 그렇게 이름 짓지 않겠소?”註 046
마침내 [김]유신(庾信)이라 이름 지었다. 만노군은 지금의 진주(鎭州)註 047이다. 본래 [김]유신의 태는 높은 산에 묻었으므로 지금[고려]까지도 이 산을 일컬어 태령산(胎靈山)註 048 이라고 한다.
註 042
별과 관련한 사료에 대해 후대의 윤색으로 판단하는 견해도 있다(정구복, 「김유신(595~673)의 정신세계」, 《청계사학》 16·17, 2002, 596쪽). 그것에 의하면 인간의 운명을 별이 주관하고 특히 무인에게 별의 설화가 관련된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이는 靈星에 대한 관념을 보여주는 것으로 여기에 28수의 이름을 붙이거나 어느 별이라 표현한 것은 윤색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김서현의 태몽 이야기에서 별자리와 관련한 부분은 후대에 「(김유신)행록」을 저술하면서 부회된 것으로 보았다
註 043
「禮記」권1 曲禮 上篇에 실려 있는 이름짓는 법(取名之法)에 따르면 國名이나 日月名, 隱疾名, 山川名 등으로는 이름을 짓지 않는다는 규정이 있다고 한다(이기동, 「역사편」, 《한국학기초자료선집 -고대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7, 86쪽).
註 044
庾信(512~580)은 남조의 梁과 北周에서 벼슬하였던 문인이며, 자는 子山이다. 徐陵과 함께 시문으로 이름을 날려 ‘徐庾體’라고 일컬어졌다. 候景의 난 때 江陵으로 도망갔다가 양의 元帝가 즉위하자 武康縣候에 봉해졌다. 그 후 북주에 사신으로 가 장안에 머무는 동안 양나라가 멸망하였는데, 북주에서 그의 재능을 아깝게 여겨 驃騎大將軍,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등의 중책을 맡겼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庾開府’라고 통칭하였다. 문집으로 「庾子山集」을 남겼고, 「周書」권41 열전33과 「北史」권83 열전71에 그의 전이 실려 있다(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하, 을유문화사, 1996, 343쪽 |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650쪽 | 이강래, 「삼국사기 Ⅱ」, 한길사, 1998, 750~751쪽).
註 045
이 기사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庾信의 시집이 이미 김유신이 출생할 무렵에 신라로 들어와 통용되고 읽혔다고 볼 수 있다(김태식, 「방사로서의 김유신 -도교교단으로서의 화랑 탐구를 겸하여-」, 《신라사학보》 11, 2007, 79쪽).
註 046
김서현이 유교 경전인 「禮記」에 대해 언급한 것이나 작명 과정에서 중국 故事에 나오는 賢人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은 그가 중국문화에 대한 일정한 이해와 상당한 수준의 유교적 소양을 갖추고 있었음을 뒷받침한다(이문기, 「금관가야계의 시조 출자전승과 칭성의 변화」, 《신라문화제학술논문집》 25, 2004, 24쪽).
註 047
漢州 黑壤郡의 고려시대 지명으로, 지금의 충북 진천군 진천읍에 해당한다. 黑壤郡을 고려 초에 降州라고 칭하였다가 뒤에 鎭州로 고쳤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38쪽).
註 048
충북 진천군 진천읍 상계리 계양마을은 김유신이 태어난 곳으로 전하며 ‘담안밭(장군터)’·‘군자터’·‘蓮寶井’ 등 김유신과 관련된 전승을 갖고 있는 곳들이 산재되어 있다. 계양마을의 뒷산은 지금도 胎靈山으로 불리고 있는데, 태령산 정상 부근에 김유신의 태를 묻었다고 하는 태실이 남아 있다. 이와 같은 김유신의 탄생지와 태실은 현재 사적 제414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진천 지역에 남아 있는 김유신과 관련 유적에 대해서는 정영호·조익현, 「진천 김유신장군사적 학술조사 보고서」, 한국교원대 박물관, 1999 및 조익현, 「진천지역의 김유신사적에 대한 재검토」, 《고문화》 55, 2000을 참고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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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 유신. 저게 유교에서 따온거다. 신라는 불교만의 나라가 아니다 유교도 흥했다.
아, 저기 이기동. 꼰대 수구꼴통글이당 우왕 보면 안됑~
卷第三十八 雜志 第七 > 직관(職官) 上 > 국학(0682년 (음))
국학 ( 682년 (음) )
국학(國學)註 345은 예부(禮部)에 속해 있었는데 신문왕(神文王) 2년(682년)에 두었다. 경덕왕(景德王) 태학감(大學監)으로 고쳐 삼았다가 혜공왕(惠恭王)이 본래대로 되돌렸다.
註 345
신라시대 유교 경전을 교수하는 최고 교육기관이며 동시에 관리 양성 기관이기도 하였다(역주 이승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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