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918 1392

 

초창기 250년, 무신정권 백년, 원간섭기 몰락기 백년. 

 

요나라 거란족이 세번 침공하다. 송나라를 먹으려는 요나라. 송나라 치기전에 후환 제거 하기 위해 고려를 치다. 이는 정묘호란 병자호란과 똑같다. 청나라가 명나라 치기 전에 조선을 먼저 제압하려는 것과. 

 

고려는 저런 거란족을, 서희의 국제적 감각과 강감찬의 귀주대첩 등으로 물리치다. 거란을 물리치기 위한 간절한 마음들, 고려의 싸이키 psyche는 초조대장경을 만들다

 

조선, 임금아 내 임금아 우릴 두고 어딜가냐? 최명길에 의하면 20만명이 노예로 잡혀가다. 잡혀 간후 38년만에 도망나온 안단. 이란 사람도 청나라에 압송해서 보내는 숙종. 병란 후 5년 압록강변엔 청나라에서 도망나온 조선인들이 조선을 바라보고 못건너오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그자리서 죽은 이들이 백골이 되어 널려있다는 정언 하진의 상소.

 

 

알게 머야? 그깟 민들, 압록강변서 뒈지던 말던, 우리만 왕놀이 공자놀이 유교놀이 잘 하믄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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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는 그후 무신정권시기, 몽골과의 전쟁. 이때 역시 그 간절한 마음들 팔만대장경을 만들다.

 

허나, 몽골은 세계 제패국. 지금의 중국 더하기 미국이다. 강화도로 천도한지 40여년만에 개경으로 환도하다. 무릎꿇고. 그래도 그 칭기즈칸의 원나라에 40여년 버틴게 어디냐? 조선에 비하면.

 

 

 

 

그후 부마국이 된다. 열선숙혜목정공, 충렬왕이 쿠빌라이칸 딸과 결혼, 그 사이에 나온 충선왕. 아빠는 고려 엄마는 몽골, 쿠빌라이칸의 외손자.

 

고려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망하는거라 특히. 왕들이 원나라에 항상 가있다. 입원 入元 하다. 원나라는 넓은 영토를 행성. 으로 다스리다. 지금식으론 미국의 각 주. 이 행성제도가 지금 중국 성省의 기초가 되다. 

 

저 입원 하는 왕은 돈이 필요하다. 고려를 관리하는 행성 정동행성. 원나라 거주하는 왕. 이 원나라에 같이 드나들며 원과 세력을 엮는 세력 附元 부원배 라고 하다 원에 빌붙은 애들. 

 

고려에서 저 왕에 돈을 부쳐야 하고, 저 왕이 원에 로비해야 하니, 그리고 거기서 지내야 하니, 거기에 정동행성 이란 애들도 찝쩍되고, 부원배들이 또한 찝쩍대다. 고려가 특히 후반기에 세금제도가 개판이 될 수밖에 없다. 민들은 말라 죽을 수 밖에. 고려의 법체제도 힘이 없다. 원에 줄 댄 이들이 고려의 법 위에 서다. 충선왕이 어드래 해 볼 수도 없다 아무리 방패질 우산질을 하려해도, 충선왕은 지 인생 대부분을 원나라에서 보내고 원나라에서 죽다. 

 

고려말은 썪고 썩었다. 거란애들 막으랴, 몽고랑 전쟁 치르랴, 이미 힘이 다 한거라. 거기에 저  원나라의 서릿발. 

 

아무 힘도 없는 고려왕, 그 극이 충선왕 다음 충숙왕 다음인 충혜왕에 이르다. 기황후가 원에서 순제의 부인 제2 황후가 되다. 옥상옥. 오직 할 짓은 교미다. 신궁을 짓다. 나라엔 신궁들 주춧돌 밑에 아이들을 묻으려 한다는 소문도 돈다. 원 사신들이 고려에 와서리 이 충혜왕을 집단으로 개패듯 패고 끌고간다. 유배가다 죽다. 고려에서 충혜왕 죽어 기쁘다는 노래가 퍼지다.

 

개혁이란 건 아무 의미가 없다. 당시 신하들은 어느세력이 힘이 쎄냐 빌붙기 눈치보기 바쁘다. 충선왕 충숙왕도 거기에 환멸을 느끼다. 충숙왕은 아예 정사를 돌보지 않다. 충혜왕 이후 그 아들 둘, 충목왕 충정왕, 다들 열살 내외들. 첫째는 일찍 죽다. 둘째는 이거또한 싸이코라 꼬마가, 지나가는 사람을 죽도록 팬다. 쫓아내고 오른 왕 공민왕. 

 

원나라의 쇠퇴기를 틈타는 공민왕의 개혁. 허나 이미 고려의 세는 기울었다. 여기에 또, 원나라의 부패로 강남에서 홍건적이 날뛰다. 원나라가 진압하니 이 홍건적이 돌고 돌아 고려를 친다. 왜구도 들어온다 본격적으로. 일본은 막부의 시대라 중앙집권력의 힘이 약한 틈을 타다, 제국인 원나라의 힘도 약하다 왜구들에겐 호기.

 

 

 

 

저 당시. 입성책동. 이란 것이 있다. 열선숙혜목정공. 저 1300년대에, 입성책동이 6번. 아마도. 6번 일어난다. 

 

 

원나라의 행성. 원나라의 주.에 , 이 고려를 편입해라. 즉, 제국인 원나라시여! 고려를 없애시고 정식으로 먹으소서!

 

 

이걸, 고려 왕조 신하들이 하는 거라. 물론 심양의 왕인 심왕.과의 관계도 있었지만, 넘어가고.

 

 

 

 

권125 > 열전 권제38 > 간신(姦臣) > 유청신 > 유청신 등의 입성 책동에 대하여 원 통사사인 왕관이 불가 상소를 올리다

 

〈유청신(柳淸臣)은〉 충숙왕을 따라 원에 갔다가 심왕(瀋王) 왕고(王暠)가 몰래 왕위를 엿보고 있음을 알아차리고는 조적(曹頔) 등과 함께 왕을 배반하고 왕고에게 붙어 온갖 간교한 계책을 꾸몄다. 또한 오잠(吳潛)과 함께 원 도성(都省)에 글을 올려 고려에 성을 세워[立省] 원의 내지(內地)와 비견되도록 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원 통사사인(通事舍人) 왕관(王觀)이 승상(丞相)에게 상서(上書)하여 말하기를,


“대저 일이 사소하다고 소홀히 여기면 말할 수 없이 걱정거리가 남게 됩니다. 이 때문에 지혜로운 사람은 두려워하며 심사숙고하는 반면, 용렬한 자는 이를 소홀히 여기니, 대개 보통 사람은 눈앞의 이익만 탐내고 멀리 도모하는 것에 우매합니다. 이 때문에 도끼날이 무디어지고 호미가 부러지는 것도 어린 싹[勾萌]에서 시작되며, 집이 물에 잠기고 사람이 떠내려가는 재앙도 개미구멍에 스며든 물에서 시작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주역(周易)』에서 이르기를, ‘서리를 밟아보면 얼음이 굳어진 것을 안다.’라고 했는데, 어떤 일을 판단할 때에 성급히 판단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또 〈『주역』에서〉 이르기를, ‘하늘과 물은 그 행하는 것이 서로 달라 분쟁이 생기니 군자는 일을 할 때에 처음부터 깊이 도모한다.’고 하였습니다. 엎드려 듣자오니 조정에서는 고려에 정동행성(征東行省)을 설치해 내지(內地)와 같이 만들려 한다는 말을 한다는데, 이 일을 거론하는 자들의 불찰로 헛된 이름만 얻고 실질적인 폐해를 입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고려는 의리를 중시하여 성조(聖朝)에 귀순한지 백여 년이 넘었으며 대대로 서로 이어 신하로서의 절의를 잃은 적이 없습니다. 세조 황제께서는 그 충성을 가상히 여겨 공주를 시집보냈으니, 그 지위는 친왕(親王)과 같고 그 융성한 총애를 더불어 견줄 데가 없습니다. 또 그 나라의 예악과 형정(刑政)은 자기들의 관례에 따르도록 허락하고 조정의 법령으로 그들의 제도를 강제하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국가가 항시 동방에서 변란이 있으면 고려는 일찍이 출병하여 전투를 지원하지 않음이 없었고, 요수(遼水)의 동쪽 해안 1만 리가 그 덕분에 평온했습니다. 고려는 동쪽 번병이 되어 대대로 현저한 공을 세웠으며, 여러 대에 걸쳐 우리 왕실과 혼인을 맺어 마침내 그것이 관례가 되었습니다. 이는 대개 고려의 충성과 조종(祖宗)의 유훈(遺訓)에 의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하루아침에 황당무계한 건의를 받아들여 오래된 제도를 무너뜨리려 하니, 세조 황제의 성스러운 지략과 신이한 계획이 어긋날까 두려우니, 이것이 합병이 불가한 첫 번째 이유입니다. 고려는 〈원〉 수도에서 수천 리나 멀리 떨어져 있고 풍토와 습속도 이미 다르며 형벌제도·혼인·송사 등이 중국과 같지 않습니다. 이제 중국의 법으로 고려를 다스린다면 반드시 격렬한 동요와 저항에 부딪히고 여기에는 말할 수 없는 우환이 따를 것입니다. 이것이 합병이 불가한 두 번째 이유입니다. 삼한(三韓)은 땅이 척박하고 백성들이 가난하여 모두 산에 의지하고, 바다에 막혀서 별과 같이 흩어져 살고 있으며, 군현(郡縣)과 정읍(井邑)에 풍요로움이 없습니다. 행성을 설치하려고 하면 형편상 반드시 호구를 편적하고 부세(賦稅)를 책정해야 하는데, 섬이나 먼 산골짝에 사는 백성들은 이런 일을 드물게 보았기 때문에 반드시 놀라 도망쳐 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 선동해 불의의 변란이라도 일으킨다면 심각한 이해관계를 초래할 것입니다. 이것이 합병이 불가한 세 번째 이유입니다. 각 성(省) 관리의 봉록은 예에 따라 해당 성에서 일괄 거두어 지급하는 것인데 지금 정동행성의 경우 모든 관리의 월봉과 공공 비용은 모두 합쳐 매년 1만여 정(錠) 정도일 것입니다. 고려는 이미 부세를 바치는 것이 없는데, 반면 그들은 우리 조정에서 봉급을 보내주기를 기대할 것이기 때문에 행성을 설치하면 한 명의 백성과 한 치 땅의 이익도 갖지 못하면서 공연히 막대한 국가 재정만 낭비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합병이 불가한 네 번째 이유입니다. 강남의 여러 성은 이미 동일한 체제를 유지하려는 예에 따라 필수적으로 군대를 주둔시켰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 병력이 적으면 동방의 여러 나라를 제압하기 어렵고 그 반대의 경우 소요되는 경비가 몇 배나 되어 백성이 그 요구를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또한 하물며 국가에는 금위병으로부터 지방 주둔병에 이르기까지 이미 군액이 정해져 있을 것입니다. 진실로 〈군사에 관한 일은〉 보통사람이 논할 바는 아니나, 정동행성에 파견할 군사들은 과연 어디서 징발할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것이 합병이 불가한 다섯 번째 이유입니다. 옛날에 큰일을 이루려면 널리 여러 사람들과 상의하였는데 그것은 옹색하게 가리는 것을 방지하자는 뜻이었습니다. 가만히 듣기에 입성책(立省策)을 맨 먼저 올린 두 사람은 곧 그 나라에서 재상을 지낸 자들로 참소와 이간질을 일삼다가 임금으로부터 죄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 이유로〉 독기를 품고 스스로 의심하다가, 마침내 자기 나라를 전복시켜 일신의 안전을 도모하려고 하는데, 그 본심을 따져보면 처음에 성조(聖朝)에 충성을 바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로 말미암아 보건대 효경(梟獍)이나 개·돼지보다 못한 자들이니 죄를 밝혀 형벌을 내림으로써 신하들 가운데 충성스럽지 못한 자들을 훈계하는 것으로 활용해야 할 것입니다. 옛날 당 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하고자 하여 안시성(安市城)에 이르렀는데,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회군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그 성주에게 비단 한 꾸러미를 주면서 임금을 잘 섬기라고 권면하였습니다. 대개 태종은 고려와 더불어 서로 적국으로 대치하였는데, 〈태종은〉 천하의 군사력으로 조그만 성 하나를 능히 함락시키지 못하고 패배한 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고 도리어 〈그 성주의〉 충의를 권면했으니, 〈후대에서는〉 이를 역사에 기록해 미담으로 삼고 있습니다. 하물며 성조는 고려에 대해 도의로는 군신관계이며 친척으로 보면 장인과 사위지간인데 어찌 안위(安危)와 고락을 같이 하지 않음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어찌하여 도리어 두 사람의 속이는 미치광이의 말을 받아들여 임금을 팔고 스스로를 팔아 출세하려는 자의 간악한 계책이 이루어진다면 정치와 교화에 이루 말할 수 없는 피해를 가히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합병이 불가한 여섯 번째 이유입니다. 듣건대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그 지위에 있지 않거든 그 정치에 끼어들지 말라.’고 하였으니 믿음성 없이 다른 사람에게 간언하는 것은 비방하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스스로 초야에 묻힌 미천한 선비로서 조정의 정사에 대해 망령되게 논평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태평성대에 간악한 자에게 속임을 당하는 것을 목도하게 되어 북받치는 충분(忠憤)을 이기지 못해서 갑작스럽게 황급한 글을 늘어놓아 주상의 귀를 더럽히게 되었습니다. 참람한 죄로 받게 될 죽음은 피할 수 없사오나, 조정이 안타까워 어찌할 바를 모를 따름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제현(李齊賢) 역시 도당(都堂)에 글을 올리니 입성(立省)을 설치하는 논의는 중지되었다.

 

 

유청신 과 오잠 이란 신하, 저게 고려사에서 열전에 간신.으로 다뤘다. 이들이 원 조정에게 고려를 먹으라 하는거라.

 

헌데 원나라 왕관 이란 신하가. 실익으로도 명분으로도 그래선 안된다. 오히려 저 유청신 오잠이란 이들이 고려법을 어긴 간신이다 저놈들을 처벌해야 한다고 상소를 하다. 

 

저 왕관은, 저런 말 하는 거보면 고려의 충신 저리 가라다. 왕씨 이니, 아마 고려 사람이 원나라에 귀화 한 거일 수도 있다. 왕관을 알아주자.

 

저 안되는 이유중에, 고려는 산으로 막혀서리 못산다 하는거라. 원나라의 제국에 비해서, 뽑아먹을게 없다 식이다. 하기사 저때 무슨 부 가 있을까 고려에.

 

저런 짓들을 6번인가를 한다. 원나라여 ! 우리 고려를 먹으소서!

 

 

 

원나라는 실익을 따져서, 그냥 그대로 둔다. 안먹고. 물론 그 후로 지들도 망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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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조선이다

 

첫 번째, 전 국민은 단발한다.
두 번째, 외국 유학생을 선발하여 파견한다.
세 번째, 궁내성을 별도로 설치하여 왕실 업무와 일반 국무를 구분한다.
네 번째, 국왕을 '성상(聖上) 폐하(陛下)'로 칭해서 타국의 황제와 동등하게 예우하며 대조선국의 군주로서 존엄을 유지한다.
다섯 번째, 지금까지의 관제를 폐지하고 내각에 여섯개의 부서를 둔다.
여섯 번째, 과거제도를 폐지한다.
일곱 번째, 내외의 공채(公債)를 모집하여 국가 재정을 충실히 한다.

 

 

김옥균의 갑신정변 개혁안.

 

그놈의 상투짜르는게 머라고, 이름 일본이름 바꾸는게 머라고, 저 고려때 왕들 다들 몽골이름 다 가졌다

 

망명한 김옥균을 홍종우가 암살하고 시신을 갖고 오다

 

 

김의 시신을 관에서 끄집어내 땅위에 놓고 절단하기 쉽게 목과 손, 발밑에 나무판자를 깔았다. 목을 자르고 난 다음에 오른쪽 손목 그다음 왼쪽 팔을 잘랐다. 이어 양 발목을 자르고 몸통의 등 쪽에서 칼을 넣어 깊이 한 치 길이 여섯 치 씩 열 세 곳을 잘라 형벌을 마쳤다.

시신을 조각조각 떼어서 팔도에 보내어 저자거리에 내다 걸게 하고, 목은 대역부도옥균(大逆不道玉均)이라고 커다랗게 쓴 현수막과 함께 양화진 형장에 효수해 놓았다. 이 끔찍한 형벌은 임금(고종)의 이름을 빌려서 민비와 민영익의 십년을 벼르다 벌인 철저한 복수극이었으리라. 아! 그렇게 조각조각 잘려진 시신은 그 후 어떻게 처리되었을까? 어느 기간동안 저자거리에서 구경거리로 내 보인 다음엔 누군가 조각시신을 다 모아서 장례를 치러도 되는 것인가? 아니면 어떻게 시신을 처리할까?    
     
— 일본 시사신보 1894년 4월 28일자

 

김옥균 한글위키. 거기 김옥균 효수되어 저잣거리에 걸린 사진도 있다

 

홍종우는 조선의 영웅이 되다. 저 능지처참한 김옥균의 시체를 조각조각 저잣거리에 걸어놓다. 외국인들이 기겁을 하다

 

 

이게 나라여? 이게 무슨 지금 원시시대의 식인종들이여??

 

 

며칠 걸어놓다가 쪽팔려서리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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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는 그래도 그 험한 요나라 이기고 최최최강의 몽골과 40년 버티면서 자기들 나름의 국풍이라도 건졌다. 일연 김부식 이승휴 들이. 대장경도 만드는 애절함이 있었다.

 

저때 일본은, 고려 무신정권에, 일본은 막부시대로 접어든다. 저때도 고려와 일본을 비교할 수 있나 없나

 

동남아 국 대부분은 저 당시 왕조 조차 서지 않았다.

 

중남미도 왕조 조차 있을까 없을까다

 

 

 

 

 

 

 

 

 

조선 구한말을 봐라. 

 

 

 

 

 

내재적 발전론, 유일한 국가가 태국이다. 태국보단 더 잘살았을까?

 

 

유럽의 내재적 발전? 로마식민지 이후 천오백년의 내재적 발전한걸 그걸 바로 카피가능할꺼란 망상은 머니

 

 

 

 

 

 

 

조선은 왜 저리 되었을까? 왜 조선은 일본에 먹힌걸까? 조선의 치자들은 멀한걸까?

 

그 이유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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