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e to you, teachers of the law and Pharisees, you hypocrites! You are like whitewashed tombs, which look beautiful on the outside but on the inside are full of the bones of the dead and everything unclean 

Mattew 23:27

당신들, 법과 파리시즈의 선생들에게 외치노니, 니덜은 위선자니라. 니덜은 하얗게 씻긴 무덤과 같다, 겉으론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은 죽은자의 뼈들과 더러운 모든 것들로 가득 찼도다. 마태

 

Spiritus Liberat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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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난 말야. 정말 이 사람 도스토예프스키. 아 정말 이사람 존경한다. 존경할 만한 인간 단 하나 없는 이땅빠닥에서. 내 이 사람 진짜 존경한다.

 

눈물은 안흐르는데 눈물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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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의 마지막 이야기에선. 한글자 한글자 읽게돼. 왠지 말야. 한땀한땀 읽히는거야. 그럴 수 밖에 없어.

 

아이가 죽어. 장례식에. 알료샤.가 아이들에게 말해. 열몇몇이던데 몇명인가. 그렇지. 열두명이야. 역시.

 

카라마조프.라는 상징은 러시아야. 유럽에겐 야만으로 보이는 그 러시아. 

 

알료샤.가 말해. 우리가 앞으로 살아갈 힘의 안식처.는 지금 이순간 이 아가페의 마음들이라고. 그리고 머 참되고 진실되게만 산다면 산다는건 좋은거야. 하는데 나중 원문 요것만 확인해보고. 말야.

 

아이들이. 알료샤.라 안해. 카라마조프! 우린 당신이 너무너무너무 좋아! 우라 우라 우르라 카라마조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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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를 정말 끔찍하게 사랑하는게 보여 도스토예프스키 선생님. 

 

너무나 너무나 좋아해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러시아.를

 

러시아.이므로 도스토예프스키 라는 인간을 만들어낼 수 있었어. 

 

가장 위대한 작가다 이 도스토예스스키. 가장 위대한 지식인이고 지성인 이다 이 도스토예스키.

 

이런 강렬한 말글들은 이전에도 없었어. 아 이후에도 없을 듯해. 최고의 소설이야 이 카라마조프.

 

아  강렬하다 진짜. 지금 솔직한 감정을 걍 내리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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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인간을 만든 러시아가 말야.

 

이념에 미친 애들때문에.

 

저런 러시아.가 죽은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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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참되게 진실되게 살아라. 저런 이념벌레에 치여 살지 말고. 그럼 사는것도 좋은거래. 

 

삶 그자체.가 걍 거짓말에 드러움과 위선으로 점철된. 저따위 삶에. 온갖 거짓으로 도배된 감정들의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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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 아 내 당신 존경한다 진짜. 

 

카라마조프. 진실로 진실로. 위대한 책이다 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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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an IV Vasilyevich (/ˈaɪvən/Russian: Ива́н Васи́льевич, tr. Ivan Vasilyevich; 25 August 1530 – 28 March [O.S. 18 March] 1584),[2] commonly known as Ivan the TerribleIvan Grozny; "Ivan the Formidable" or "Ivan the Fearsome"), was the Grand Prince of Moscow from 1533 to 1547 and the first Tsar of Russia from 1547 to 1584. 

 

이반4세. 이반.이란 이름은. 요한. 존. 요아네스. 의 슬라브말이야. 아반4 바실리예비치. 이사람 아버지가 바실리3세.고. 할배는 이반3세인데. 바실리.란 이름은 비잔틴 황제.가 이라클리오스 610-641.때 나오기 시작해. 카이사르.와 같이 쓰여.

 

Basileus (Greek: βασιλεύς) 바실레우스. 슬라브로 바실리 바실.해. 고대 그리스.에선 알렉산드로스 에 독자적으로 붙여 이 호칭을. 이건 기원전 1100년 이전의 진흙판 글자에도 보여. 킹. 족장이란 의미여. 호메로스.의 글들에서도 이 바실레우스.가 무지 쓰이는데 이걸 영어로 킹.번역하지만 엄격히는 걍 프린스.고 사령관이야 호메로스 글에선. 

 

이반 더 테러블.로 알려졌는데. 그로즈니.라는 러시아어가. 저 이반에겐 성격결함으로 악마.라는 닉이 아니라. 용감하고 적에게 공포를 주는 의미.래. 테러블 보다는 포미더블, 피어섬.이 맞다는거지.

 

 

Vasili III Ivanovich (Russian: Василий III Иванович, also Basil; 26 March 1479 – 3 December 1533, Moscow) 

아빠 바실리 3세.가 나이 54세.에 다리에 종기에 염증으로 죽어. 1533년. 이때 이반.의 나이가 세살.이야. 말년에 자식을 두번째 부인에게서 낳은겨 둘.을. 이반 동생.이 있는데 이사람은 귀머거리여. 후계에서 제외가 돼.

 

엄마가 섭정을 해. 

 

Elena Vasilyevna Glinskaya (Russian: Елена Васильевна Глинская ; c. 1510 – 4 April 1538 (13 April 1538), Moscow

 

엘레나 그린스카야. 31세 연상한테 시집을 간겨. 바실리.가 이혼.하고 1525년. 15세의 그린스카야.를 들인거야. 자식이 없어서 들인겨. 그리고 아들 둘을 낳아. 이여잔 리투아니아 귀족의 딸이야. 1533부터 5년간 섭정을 하는데, 러시아 귀족들(보야르)애들과 다투는거야. 리투아니아완 휴전협정하고 스웨덴과는 중립선언하고 화폐개혁에 모스크바 성 개축.하고 수녀원들도 방문을 자주 했다고 해. 보야르들 눈밖에 난겨. 28세.에 죽어. 최근와서 부검해보고 독살설이 맞는듯.

 

이반나이 8세. 동생 유리 6세. 

 

The regency then alternated between several feuding boyar families fighting for control. According to his own letters, Ivan, along with his younger brother Yuri, often felt neglected and offended by the mighty boyars from the Shuisky and Belsky families. In a letter to Prince Kurbski Ivan remembers, "My brother Iurii, of blessed memory, and me they brought up like vagrants and children of the poorest. What have I suffered for want of garments and food!![15] "  

 

저때 보야르 가문들이 슈이스키.와 벨스키.인데. 얘들이 권력을 잡아. 아마 여자를 죽이고. 나중 이반.의 회고편지.에서. 나의 동생 유리, 탁월한 기억력의 아이. 와 나를 그들은 거지처럼 키웠다. 옷과 음식이 부족해서 얼마나 힘들었던가. 라고 했다는데 저 글 인용한 곳에서 출처가 의심스럽다 하지만. 하튼 그래도 뭔가 저때 구박을 많이 받기는 받은듯 해 보여.

 

The Grand Duchy of Moscow,[2][3] Muscovite Rus'[4][5][6] or Grand Principality of Moscow[7][8] (Russian: Великое Княжество Московское, Velikoye Knyazhestvo Moskovskoye,  

 

이반4세 전까지는 벨리케 크냐즈스트바. 여. 벨리키.가 그랜드. 그레이트. 큰 거고. 크냐즈.가 지배하는 곳. 모스크바란 도시를. 크냐즈.란게 걍 영주.여. 얘들은 처음에 몽골에 하미지를 한 겨. 아빠 바실리3세.도 벨리키 크냐즈.라는 큰 영주.이름으로 대관식을 한거야. 이반3세.부터 차르를 선언했어도 돼. 헌데 보니까. 이사람이 자칭 짜르. 카이사르.를 선언을 했어. 헌데 이사람은 대관식을 할때 벨리케 크냐즈.로써 한겨. 해서 역사에서 이걸 정식으로 안쳐.

 

On 16 January 1547, at age sixteen, Ivan was crowned with Monomakh's Cap at the Cathedral of the Dormition. He was the first to be crowned as "Tsar of All the Russias", hence claiming the ancestry of Kievan Rus'. Prior to that, rulers of Muscovy were crowned as Grand Princes, although Ivan III the Great, his grandfather, styled himself "tsar" in his correspondence. Two weeks after his coronation, Ivan married his first wife Anastasia Romanovna, a member of the Romanov family, who became the first Russian tsaritsa.  

 

이반4세.가 보야르들 밑에서 잘 버티고 자라서리. 16세 나이에 성인이 되서리 대관식을 하는겨. 짜르로 하는겨. 당연히 해야해 이건. 이반.이 뭔 생각이 있어서 한게 아니라 귀족애들이 당연히 시킨거야. 비잔틴도 망하고 그 핏줄 여자가 할매였고 당연히 자기들이 짜르여. 이걸 모스크바.의 도어미션 성당. 에서 한겨. 러시아 마지막 황제 니콜라스2세까지 여기서 하는겨 이반4세 부터.

 

Dormition 이란건 오소독시.에서만 쓰는 단어야. 성모 마리아.가 잠드는겨. 마리아의 죽음 장면은 성경에 없어. 

 

The Cathedral of the Dormition (Russian: Успенский Собор, or Uspensky sobor), also known as the Assumption Cathedral or Cathedral of the Assumption is a Russian Orthodox church dedicated to the Dormition of the Theotokos

 

테오토코스.가 신의 엄마.란 그리스말이고. 저 성당을 어썸션 성당.이라고도 하다. 할때 어썸션.이란건. 추정성당 이딴 것이 아니라. 성모 마리아.가 육신의 몸으로 하늘에 가는 걸 어썸션.이라고 해. 교회용어야. 

 

The oprichnina (Russian: опри́чнина, IPA: [ɐˈprʲitɕnʲɪnə]) was a state policy implemented by Tsar Ivan the Terrible in Russia between 1565 and 1572. The policy included mass repression of the boyars (Russian aristocrats), including public executions and confiscation of their land and property.   

 

이반4세.는. 힘이 없어. 짜르 라고 올랐지만 권력들은 귀족들인 보야르.들이 갖고 있는거고. 얜 아무것도 아닌겨. 어릴땐 동생이랑 거지처럼 살은 것.이 실재인지 몰라도 그 심정 처지.로 살은건 맞을꺼야. 아무것도 아냐 얜. 나이 서른이 넘어서도. 16세에 짜르가 되었지만 이후 18년을 걍 바보생활한거야. 

 

이사람이 도박을 하는겨. 권력 갖고 오기.

 

On December 3, 1564, Ivan IV departed Moscow on pilgrimage. While such journeys were routine for the throne, Ivan neglected to set the usual arrangements for rule in his absence. Moreover, an unusually large personal guard, a significant number of boyars, and the treasury accompanied him.[8]

After a month of silence, Ivan finally issued two letters from his fortifications at Aleksandrova Sloboda on January 3. The first addressed the elite of the city and accused them of embezzlement and treason. Further accusations concerned the clergy and their protection of denounced boyars. In conclusion, Ivan announced his abdication. The second letter addressed the population of Moscow and claimed “he had no anger against” its citizenry. Divided between Sloboda and Moscow, the boyar court was unable to rule in absence of Ivan and feared the wrath of the Muscovite citizenry. A boyar envoy departed for Aleksandrova Sloboda to beg Ivan to return to the throne.[9]

Ivan IV agreed to return on condition that he might prosecute people for treason outside legal limitations. He demanded that he might execute and confiscate the land of traitors without interference from the boyar council or church. To pursue his investigations, Ivan decreed the creation of the oprichnina (originally a term for land left to a noble widow, separate from her children's land). He also raised a levy of 100,000 rubles to pay for the oprichnina[10] 

 

1564년. 34세. 차르 오르고 18년 정도 지난겨 순례길 간다며 모스크바를 떠나. 헌데 이때 대규모 근위대.와 핵심 보야르들.과 금고도 같이가. 백키로 북동쪽 알렉산드로바.에서 두통의 편지를 써. 하나는 머문 도시의 귀족들에게. 하나는 모스크바에. 야 여기 와보니 인간들이 횡령에 역모짓 하고 파면된 보야르들도 이도시에서 돌봐주고 성직자도 썩었고. 난 자리에서 물러난다. 라고 선언을 해. 모스크바에도 그리 쓰면서 모스크바여 난 그대 시민들에게 화를 내는게 아냐. 하는거야

 

 

보야르 들이 난리가 난거야. 모스크바 시민들이 부글부글 한겨. 두 도시의 보야르들이 어찌할 줄 몰라. 폭동이 날 기세야 이게. 이반에게 사정사정하고 제발 돌아오라고 해. 이반이 그러면 초법적으로 역모짓에 대한 법집행을 하게 해달라. 이걸 동의해. 그리곤 보야르들과 성직자들을 역모로 잡아 넣고 영지들을 다 몰수를 해. 이 조사.를 위해서 이반이 만든게 오프리치니나.라는 정책이자 제도야. 

 

이건 제도.야. 용어를 헷갈리게 막막 쓰는데. 

 

Oprichnik (Russian: опри́чник, IPA: [ɐˈprʲitɕnʲɪk]man aside; plural Oprichniki) was the designation given to a member of the Oprichnina, a bodyguard corps[1] established by Tsar Ivan the Terrible to govern a division of Russia from 1565 to 1572.  

 

오프리치니크.가 오프리치니나.의 조직원.이야. 이 복수형이 오프리치니키.이고. 이반4세.가 저당시의 역모혐의자들 법집행을 구실로 만든 제도여. 오프리치니크.가 초기엔 천명.이었다가 이게 6천명이 돼. 

 

조사를 하고 집행을 하다가. 저 당시의 이반의 역모 기소껀을. 

 

이게 러시아의 다른 보야르들로 확대가 되는겨. 러시아판 정치경찰의 시조님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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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보니안 전쟁.1558년 시작하고 6년이 지났는데, 초기엔 저 리보니아는 무주공산인줄 알았걸랑. 고립되고 대륙 종교전쟁 독립전쟁에 저긴 걍 그냥 주울 줄 알았어. 아 헌데 원수처럼 싸우던 삼국이 동맹을 해. 리투아니아로 쳐들어가는 크냐즈.는 항복을 하고. 돈도 마르는겨. 

 

보야르들의 땅들이고, 자기를 차르 로 올렸지만 이름뿐이고. 코트의 돈은 없는겨 이게. 보야르들도 적극적으로 전쟁 참여도 안하는겨. 얘가 이걸 완전 노린거야. 이걸 머 후대 사가들은 파라노이아에 정신병 운운하는데. 얜 걍 정치적으로 고단수의 인간이야.

 

저때 만든 조직.오프리치니크.들의 오프리치니나.란 정책으로. 수사범위를 확대를 하면서. 보야르들을 더 기소하고 그 들 땅을 더 몰수를 하는거야. 저들이 이반4세.의 근위대가 되는겨.

 

러시아.의 부의 중심은 모스크바.가 아니라. 위 노브고로드.인거야. 노브고로드.는 류릭.이 왔을 때부터 몽골때도 안 다쳤어. 바랑기안들의 상권의 중심이야. 한자동맹들과도 싸우면서 상업하면서 부를 키운곳이야. 이 노브고로드.포함 이 북쪽땅의 보야르들 땅을 뺏는게 가장 커.

 

The Massacre of Novgorod was an attack launched by Tsar Ivan IV (The Terrible)'s oprichniki on the city of Novgorod, Russia in 1570  

 

노브고로드 학살 1570년.

 

Ivan's terrible ‘vengeance’ left Novgorod severely wounded. The death toll of the massacre is uncertain. According to the Third Novgorod Chronicle, the massacre lasted for five weeks. The First Pskov Chronicle gives the number of victims as 60,000. These numbers are debated, however, and are not from an impartial source.[14] Western sources from the time give figures ranging from 2,700 to 27,000 killed. Modern researchers estimate the number of victims in a range from 2,500 up to 12,000. Ruslan Skrynnikov, reconstructing the sinodiki (prayer lists) of the Kirillo-Belozersky Monastery, found only 1,505 named victims of the massacre, although these were most likely elite citizens and lesser citizens were not listed. Based on these lists, Skrynnikov considers that the number of victims was 2,000 to 3,000.[15] As the author of Ivan the Terrible (Ivan Grozny), R.G. Skrynnikov stated, "the sack of Novgorod is the most repulsive episode in the brutal history of the oprichnina. The cruel, senseless slaughter of innocent people made oprichnina synonymous with lawlessness and excess."[16]  

 

그냥 반역자. 적폐. 하면 되는겨 씨바. 러시아판 적폐놀이야. 누군 6만명.이 죽었다. 유럽애들은 2700-27000 으로 보다. 누군 만명. 누군 이삼천. 여하튼 걍 잔인하게 죽인겨. 이때부터 오프리치니나.는 무법과 초법의 상징이 돼.

 

저 이후 2년 후에 이반4세가 저걸 없애. 그리고 보스니아전쟁.에서 패하고 잉그리아 땅까지 스웨덴에 뺏기지만. 그래도 말년에 시베리아 정벌을 병행해. 

 

이반4세.는 파라노이아 환자가 아냐. 고단수의 권력자야. 

 

대부분의 이념놀이 하는 애들은 걍 파라노이아지 그리 따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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