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anna (6 November 1479 – 12 April 1555), known historically as Joanna the Mad (Spanish: Juana la Loca), was Queen of Castile from 1504, and of Aragon from 1516.

 

스페니쉬.로 후안나 라 로카. loco 로코.가 미친겨. 매드. mad. 여성형 라카. 

 

여자이름은 남자이름에 뒤에 모음 붙인게 고대로마여. 요한이란 존.의 여성형 조안나. 스페니쉬 후안나.야. 후아나.라 한글 쓰는데. 후안나. 해. 이발음이 더 가까와. 

 

존. john. 이 포르투갈은 주앙. João 이야. 스페이니쉬는 후안 juan. 으로 읽어야하고. 아라곤 킹들은 조안.으로 읽어야해. 얘들은 카탈란 발음으로 읽어. 

 

이 여자 자식들을 보면. 여기서 카를5세와 페르디난트1세 황제가 나오지만 말야. 

 

Eleanor, Queen of France
Charles V, Holy Roman Emperor
Isabella, Queen of Denmark
Ferdinand I, Holy Roman Emperor 
Mary, Queen of Hungary
Catherine, Queen of Portugal

 

이 여섯명의 자식들이 짱짱하걸랑. 2남 4녀야. 첫딸은 프랑스 퀸. 둘째 카를로스와 동생 페르디난도는 황제. 셋째 이사벨라는 덴마크 퀸. 마리는 헝가리 퀸. 캐서린은 포르투갈 퀸.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페르디난도2세의 딸 미친년 딱지 후안나의 자식들이 유럽을 지배한겨.

 

저기서. 위의 삼남매인 엘레오노르. 카를5세. 이사벨라.는 저지대. 플랑드르에서 태어났어. 카를5세는 헨트.에서 태어난겨 벨기에 중심도시. 에스꼬강 중류야. 

 

후안나.가 시집가는 미남왕 펠리페.는 플랑드르 당시 수도 브뤼허.에서 태어났어. 

 

Bruges (/brʒ/; Dutch: Brugge 

 

[ˈbrʏɣə]; French: Bruges 

 

[bʁyːʒ]; German: Brügge) is the capital and largest city of the province of West Flanders in the Flemish Region of Belgium, in the northwest of the country.

 

덧치로 브뤼허. 프렌치로 브뤼즈. 영어 브루즈. 여긴 위 북해에 가까운 곳이야. 에스꼬강 본류가 흐르는 헨트.의 훨 서북쪽이야. 이 강 지류가 여기에 흐르는겨. 
이 미남왕 펠리페.의 엄마 브루고뉴.의 마리.가 말야. 태어난곳이 브뤼셀.이야. 말타고 낙마사고로 죽어 묻힌 곳이. 펠리페를 낳은 곳 브뤼허.야. 친정아빠 용감공샤를.이 낭시전투로 죽었는데. 이사람 무덤도 브뤼허.의 성모교회야. 모녀가 같이 있어 지금. 

미남왕 펠리페.의 아빠 막시밀리언.은 오스트리아 본토 출생이지만. 마리.랑 주로 여기 플랑드르 브뤼허.에 있었던거야. 

Philip I[a] (22 July 1478 – 25 September 1506),[1] called the Handsome or the Fair, was the first member of the house of Habsburg to be King of Castile.

 

펠리페.가 후안나보다 한살 많아. 후안나가 엄마 이사벨라가 죽고. 스페인에 갈때 같이가서. 여기서 죽어. 28세에.

Archduchess Margaret of Austria (German: Margarete von Österreich; French: Marguerite d'Autriche; Dutch: Margaretha van Oostenrijk; Spanish: Margarita de Austria) (10 January 1480 – 1 December 1530)

 

부르고뉴의 마리.가 딸도 하나 낳아. 펠리페.의 두살어린 동생 오스트리아의 마가렛.이야. 

 

Mary (French: Marie; Dutch: Maria; 13 February 1457 – 27 March 1482)

 

부르고뉴 마리.가 1482년에 죽어. 펠리페 네살. 마가렛 두살.때. 막시밀리언이랑 프랑스 루이11세랑 저지대변경을 두고 전쟁을 했어 이전에. 이때 두살 딸 마가렛.을 루이11세 아들 샤를8세 꼬마와 결혼시키려해. 마리땅 쳐들어오지 말라고. 

 

여동생 마가렛.은 저 이후 후안나의 오빠에게 시집갔다가. 바로 죽고. 다음 사보이 공작에 시집갔다가 신랑이 또 죽고. 다시 플랑드르로 와서, 다신 결혼안한다 하고. 엄마 마리땅 합스부르크 네덜란드.를 대리 통치하는겨. 자식이 없어. 이때 잉글랜드의 앤불린 꼬마 여자아이가 이 마가렛.의 코트.에서 놀아주는겨. 앤불린이 플랑드르에서 놀며 자랄때의 코트.는 저 미남왕 펠리페.의 여동생 마가렛.인겨 과부되고 혼자 살고 있는.

 

 

Margaret of Parma (Italian: Margherita di Parma; 28 December 1522 – 18 January 1586) was Governor of the Netherlandsfrom 1559 to 1567[1] and from 1578 to 1582. 

 

뒤의 네덜란드 80년 전쟁 터질때의 합스부르크 네덜란드 땅의 대리 통치자는 파르마의 마가렛.이야. 같은 마가렛.이지만. 이여자는 카를 아들 펠리페2세의 배다른 누나야. 카를이 결혼전에 낳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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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전에 기사 몇개 보다가, 레오나르도 다빈치 . 르네상스의 이땅 존문가랍시고 책 냈다는데. 레오나르도가 출생 비천한 서얼어쩌고 힘들게 살다 저런인간이 되었다. 하는데. 

 

개소린겨 그게. . 하튼 쟤들 이야길 이 조선 이야기에 젖은 애들이 그 시선으로 쟤들을 보걸랑. 

 

서얼 할때 서자는 양민. 얼자는 천민. 사이의 자식 하걸랑. 서얼 차별하는건 조선 들이나 했던거야 이 개새꺄. 조선은 서얼이 애비한테 호부호형을 못해. 관직에 못나가. 재수 터진게 유자광이야. 조선시대 인물 중 인물은 이 유자광이야. 이전 일곱개 인가 씨리즈로 썰 풀은. 이땅바닥 최초의 제일 제대로 된 유자광전이다 그게. 이땅바닥에선 간신이라 낙인 찍힌 가 그나마 인물이고 충신이란 는 이조선을 지옥으로 만들고 일본 식민지로 만든 들일 뿐이야

 

쟤들은 서자던 얼자던. 그 적통 후계자 승계만 안 줄뿐. 저 파르마의 마가렛 처럼 넓은땅 군주를 시켜. 이전 이야기 쭉 보듯이. 다들 코트에서 한 자리 다 줘. 영지들 주고 얼.이란 백작이던 듀크던 다 줘. 적통 이을 없으면 킹자리 까지 줘. 그게 나폴리 킹이야. 유럽사는 저 서얼애들이 없으면 지금 문명이 또한 없어. 

 

사람차별. 인권말살. 상대 찢어죽이기. 적폐놀이 소인배놀이. 아 이 조선왕조 오백년은 끔찍한 들의 땅이었는데.

 

빗나가지 말고. 

In 1496, Joanna, at the age of seventeen, was betrothed to the eighteen year old Philip of Flanders, in the Low Countries. Philip's parents were Maximilian I, Holy Roman Emperor and his first wife, Duchess Mary of Burgundy. The marriage was one of a set of family alliances between the Habsburgs and the Trastámaras designed to strengthen both against growing French power.[citation needed]

Joanna entered a proxy marriage at the Palacio de los Vivero in the city of Valladolid, Castile (her parents had secretly married there in 1469). In August 1496 Joanna left from the port of Laredo in northern Spain on the Atlantic's Bay of Biscay. Except for 1506, when she saw her younger sister Catherine, Princess Dowager of Wales, she would not see her siblings again.

 

후안나.가 플랑드르 출신인 마리 아들 펠리페.와 약혼을 하는게 1496년. 나이 17세때야. 저때 펠리페의 아빠 막시밀리언 황제 나이가 37세야. 홀애비가 되었지만 짱짱해. 그리고서리 재혼을 브리타니의 안나.랑 약혼했지만 이 안나를 프랑스 샤를8세가 납치하다시피 해서 결혼을 해. 브리타니.란 프랑스지역 땅을 절대 줄수 없는겨 합스부르크에. 해서 이 브리타니의 안나.는. 샤를8세가 이탈리아전쟁 하기전에 결혼을 하고. 다녀와서리 테니스장 대들보에 마빡깨져서 나이 서른 안되서 죽는데 말야. 다음 오를레앙의 루이12세가 킹자리를 받고. 퀸으로 올린 여자가 또한 저 브리타니의 안나.야. 브리타니땅을 프랑스킹덤에 묶어놓으려는겨. 이 브리타니의 안나.는 프랑스 킹들 두명과 결혼한겨 그래서. 

 

루이12세는. 이전에. 샤를8세의 애비 루이11세가. 오를레앙 핏줄을 끊을라고. 샤를8세의 누나 잔.이 생산능력없는 기형이걸랑. 해서 자기딸 잔.을 오를레앙의 나중 루이12세의 부인으로 강제 결혼을 시킨겨. 얜 어거지로 결혼한거고. 갑작스레 샤를8세가 죽고 재수좋게 킹이 되서리 이전 결혼을 무효화 하고. 저 샤를8세의 누나 잔.은 수녀가 되서리 성녀로 사는거고. 킹되서 재혼 들인게 브리타니의 안나.이고 여기서 클로드 가 나오고 이 클로드가 앙굴렘의 프랑수아1세에게 시집가서 브리타니가 그제서야 프랑스킹덤에 들어온거야. 그러면서 이 브리타니 출신.의 자크 카티예.가 프랑스인임둥 우리 브리타니는. 하고는 프랑수아1세의 스폰으로 캐나다를 프랑스 이름으로 발견을 한건데.

 

그리곤 브리타니의 안나.가 죽어. 세번째 여자가 헨리8세의 여동생 마리.야. 저때 네덜란드에서 오스트리아의 마가렛.과와 놀던 앤불린.이 마리.가 프랑스 시집오는데 같이 말동무로 온거고. 헌데 이미 루이12세는 늙었어. 죽어. 마리.가 과부가 되서 다시 잉글랜드로 돌아가고. 앤불린.은 프랑스에 남아서 클로드.랑 재밌게 놀다가 잉글랜드 가서리 헨리 발정하게 하는건데.

 

 

 

후안나.가 1496년 17세에 비트로쓰. 약혼하고. 프락시 매리지. 라는게. 프락시.가 대리하는 권한의 사람.이야 대리인이야 이것도. 이건 로마때 프로쿠라토르.라는 국세청 세금쟁이의 줄임 변화된 말이야. 국세청이 국가의 핵이야 돈 걷는게 최고의 힘이야. 마기스트레이트.란 실재 권력은 없어. 

 

빌라도.라고 알려진 폰티우스 필라투스.는 이전엔 저 프로쿠라토르.라는 지위인줄 알았어. 헌데 필라투스 돌.이란게 발견이돼 1960년 직후에. 여기서 아주 걍. 폰티우스 필라투스.는 프레펙트.라고 꽉 찍힌겨. 모든 고대 로마사서들이 다 저 프로쿠라토르.라 했걸랑. 이게 뒤집어졌어. 프레펙트.는 마기스트레이트.라는 사법행정군사권력이 있는자리야. 프로쿠라토르는 그게 없어. 

 

할때 저 proxy 는 저기서 온건데. 또한 대리. 야. 이 프록시 결혼은. 사정상 둘이 참여를 못하니까. 한 사람은 대리로 세우고 결혼을 하는겨. 중세에 흔해. 그리고 정식결혼을 나중에 하는거고. 약혼. 이란게 약혼식이 따로 있는게 아냐 이게. betroth. 니 engagement 하는건. 프로포즈 해서 승낙을 받는겨 걍. 이것 이상 없어 인게이지먼트니 비트로쓰니. 약혼식 따로 결혼식 따로.는 저 프록시 매리지.란 거에서 와전된겨 저게. 

 

이탈리아 전쟁 전이야. 프랑스는 백년전쟁을 이겼어. 힘이 뭉칠때야. 그리고나서리 마리땅 네덜란드를 경계로 루이11세와 막시밀리언이 전쟁을 자주해. 부르고뉴의 용감공 샤를.대신 합스부르크가 하는겨 땅 가졌으니. 프랑스와 합스부르크의 이탈리아전쟁 65년은 이미 마리가 막시밀리언이랑 결혼하면서 불씨를 지핀거야. 해서 막시밀리언.이 유일한 저때 아들 펠리페.랑 스페인의 후안나.랑 결혼을 시킨거야. 프랑스 때문이야 이건. 

 

이 막시밀리언.황제가 참 독특한데. 이 전략이. 말야. 뒤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는데.

 

자기 자식 둘 뿐이야 정식자식이. 펠리페.와 마가렛. 이 둘을. 이사벨라의 두 자식과 결혼을 동시에 시킨겨 언약을.

 

 

 

카스티야 이사벨라와 아라곤 페르디난도2세와의 자식들.이 1남 4녀 인데. 첫째 이사벨라.는 포르투갈에 이미 시집갔고. 이여자도 또한 말야. 포르투갈의 아비스 가문 시작 주앙1세의 장남 에드워드. 두아르츠의 자식 아폰수 5세에 주앙2세.와서 얘 아들 에게 시집가서 죽어 저 후계자가. 해서 아폰수5세의 동생 핏줄인 방계 마누엘1세가 받을때. 얘한테 재혼을 해.

 

이전 알카소바스 조약으로. 아폰수5세랑 맺을때 저 손자결혼을 시킨건데 죽었으니 마누엘1세가. 다시 이은겨 저 조약을. 그러다 이사벨라가 죽어. 이 다음 자리를. 후안나의 여동생이자 아라곤의 캐서린의 언니인 마리아.가 들어가는겨. 마누엘1세가 이사벨라의 두 딸이랑 결혼을 한건데. 이 마리아도 죽어. 다음 부인이. 후안나의 첫째딸이자 카를5세의 누나인 엘레오노르.야. 나이 스물에 오십된 마누엘에게 간겨. 마누엘이 오래 산거 보다는 딸들이 단명한거야. 저 알카소바스 조약이고 저 마누엘 자식들이 다 스페인딸들의 애들인거고.

 

해서 남은 아들 카스티야의 후계자 아스투리아스.의 프린스 후안.이랑 자기딸 마가렛. 다음 미친년 후안나 미치기전에.랑 자기 아들 펠리페.랑 동시 결혼하기로 해서 프락시 결혼한게 1496년 이야. 저때 포르투갈에 시집간 이사벨라.는 마누엘1세에 재혼해서 살아있을때야. 2년 후에 죽어 저여잔. 

 

그러면서. 후안나.는 플랑드르로 가는거고, 마가렛.은 스페인으로 오는겨. 

 

후안나.는 당해 1496년에 플랑드르로 가. 마가렛.은 그 다음해 스페인으로 와. 헌데 . 마가렛의 신랑이자 카스티야 후계자인 후안이 정식 결혼한 그해.인 1497년 에 걍 죽은겨 나이 19세에. 해서 마가렛은 다시 사보이에 재혼했다가 또 죽고 에이 네덜란드나 줘 하다가 앤불린 꼬마랑 노는거고.

 

막시밀리언 입장에선 마가렛을 통해 스페인에 기대는거지. 후안나.는 세번째야. 의미가 없어. 헌데 말야. 혹시나 전략 이란 보험 개념을 만든겨 이 인간이 결국. 후안 도 바로 저리 죽고. 첫째딸 포르투갈 재혼한 여자도 바로 다음해 죽어. 이여자가 마누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은 그다음해 죽어 두살되서. 이게 서기 1500년.이야. 

 

후안나.가 셋째 자식인데. 서기 1500년인. 시집가고 4년만에. 후계자 일순위가 된거야. 

 

Catherine of Aragon (Spanish: Catalina de Aragón; 16 December 1485 – 7 January 1536) was Queen of England from June 1509 until May 1533 as the first wife of King Henry VIII; she was previously Princess of Wales as the wife of Henry's elder brother Arthur.

 

막내 여동생 아라곤의 캐서린.은 여섯살이 어려 후안나 보다. 걍 딸같은 동생이야 어찌보믄. 캐서린이 헨리8세 형 아서.와 프락시 결혼하는게 1499년.이야. 나이 14세. 후안나는 결혼해서 플랑드르 있는거고 20세에. 캐서린이 잉글랜드 가는게 2년후의 11월이고 그 다음해 초에 아서.가 죽어서 과부 된 상태로 칠팔년을 산건데 헨리8세랑 결혼까진.

 

 

 

서기 1500년에. 후안나.가 제 일 승계자가 된겨 카스티야 레온.은. 언니에 오빠에 언니 자식이 다 죽었어. 4년후에 엄마 이사벨라가 죽어. 엄마 이사벨라.가 정식으로 자리를 물러난게 죽는 해 가을.이야. 병에 눕고 바로 죽은건데. 53세에 죽은겨. 즉 오십이 넘었어. 이미 후안나.가 제 1 승계권자야. 

 

후안나.가 플랑드르에서 카를5세.의 누나.와 여동생.도 낳은거야. 뱃속에 카를동생 페르디난트.를 임신한체로 스페인에 간거야. 코트에 충성맹세. 하미지를 받는겨 미리. 엄마 죽기 전에. 

 

In 1502, the Castilian Cortes of Toro[9]:36–69[10]:303 recognised Joanna as heiress to the Castilian throne and Philip as her consort. She was named Princess of Asturias, the title traditionally given to the heir of Castile.[11] Also in 1502, the Aragonese Cortes gathered in Zaragoza to swear an oath to Joanna as heiress; however, the Archbishop of Zaragoza expressed firmly that this oath could only establish jurisprudence by way of a formal agreement on the succession between the Cortes and the king.[12]:137[10]:299

In 1502, Philip, Joanna and a large part of the Burgundian court travelled to Spain for Joanna to receive fealty from the Cortes of Castile as Princess of Asturias, heiress to the Castilian throne, a journey chronicled in great detail by Antoon I van Lalaing (French: Antoine de Lalaing). Philip and the majority of the court returned to the Low Countries in the following year, leaving a pregnant Joanna in Madrid where she gave birth to her and Philip's fourth child, Ferdinand, later a central European monarch and Holy Roman Emperor as Ferdinand I.

 

스페인에 하미지.를 받으려고 놀러온겨 신랑 펠리페.랑. 이게 1502년.이야. 그리고 여기서 와서 뱃속의 페르디난트1세 황제를 스페인에서 낳은거야. 그리곤 다시 돌아가. 페르디난트의 여동생 마리.는 브뤼셀.에서 낳은겨. 이 두 남매가. 할배 막시밀리언의 똑같은 작전.으로 헝가리 마티아스가 죽어서 헝가리 킹으로 초빙된 보헤미아 킹인 야기에워의 브와디스와프의 두 자식남매.와 똑같이 꼬마들일때 아예 합동결혼식을 시켜서리 합스부르크가 나중에 헝가리 보헤미아에 폴란드 크로아티아까지 먹는건. 막시밀리언이 후안나에의해 얻어걸린 로또의 똑같은 반복으로 또 얻어걸린겨. 아 이 막시밀리언은 최고의 로또쟁이인겨 인류사에서.

 

 

후안나.와 펠리페.는 저때 스페인의 카스티야 코트.애들에게 하미지를 받고 페르디난도 낳고 다시 플랑드르로 간거야. 

 

이때 말야. 플랑드르에서 낳은 아이들 셋은 여전히 걍 플랑드르에 잇어. 스페인에서 낳은 페르디난도.도 걍 스페인에 잇어 애기를 델꼬다닐수도 없고. 해서 페르디난트1세는 스페인 꼴통으로 자라는겨 그러다가 카를 따라서리 유럽물을 먹는겨 청년되서. 얜 독일어를 커서 익혀. 그러면서 좀 열리게 돼. 카를5세는 원체 플랑드르에서 자라다가 프랑스도 너무 좋아해. 얜 어릴때부터 나름 열린인간인겨. 카를 때문에 그나마 종교전쟁이 적게 나고 프로테스탄트를 인정하는 아우크스부르크. 평화조약이 나온거야.

 

 

엄마 이사벨라.가 죽었어. 1504년. 이때 다시 오는겨 킹자리를 받으려고 후안나와 남편이. 친정아부지 아라곤의 페르디난도2세와 여기서 싸우는겨. 후안나 딸년에게 못주겠다는거야 아빠가. 

 

Joanna was a clever and diligent child and an excellent student.[3] She was educated and formally trained for a significant marriage that, as a royal family alliance, would extend the kingdom's power and security as well as its influence and peaceful relations with other ruling powers. As an infanta she was not expected to be heiress to the throne of either Castile or Aragon, although through deaths she later inherited both. Her academic education consisted of canon and civil law, genealogy and heraldry, grammar, history, languages, mathematics, philosophy, reading, spelling, and writing.[4] She read an impressive list of authors of classical literature that included the Christian poets Juvencus and Prudentius, Church fathers Saint Ambrose, Saint Augustine, Saint Gregory, and Saint Jerome, and the Roman statesman Seneca.[4]

 

후안나.도 명석하고 성실한 아이였고 우수한 학생이었다. 후안나 낳고 레콩퀴스타가 완전히 끝나. 카스티야가 문명의 중심으로 들어서는 시기이고 이걸 엄마가 알아. 나중 결혼을 잘 시켜야 해. 아이들 교육이 철저한겨 더. 왕위 승계될 경우의 수가 희박해도 다 시키는겨 애들 교육을 철저하게. 이게 조선이 가 된 이유야. 이 조선은 세자 아니면 교육을 안시켜 제대로. 갈수록 종친애들은 걍 머저리들이 되는겨 킹자리 위협안받게 해야해. 걍 야 조선 오백년은. 저 교육 과목을 보면 알아.

 

후안나도 이전 캐서린 여섯살 어린애 이야기했듯이. 이전 엘리자베쓰1세 꼬마의 언어실력에 수놓고 책만드는거 봤듯이. 이들 수준이 음청난겨 이게. 교회법에 세속법 시빌로. 계보학 헤럴드리 문법 역사 언어들 수학 철학 읽기 말하기 쓰기. 이건 기본이야 저들에겐. 

 

이전 교육 볼때. 최초 학교가 잉글랜드 캔터베리 킹스스쿨.이 서기 597년이야. 저 유럽바닥에 저리 애들 학교가 세워지는겨. 학교 없으면 개인 과외선생을 붙이는거야 이미 저때부터. 스투디움 게네랄레.라는 리버벌한 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대학 유니버시티가 1088년 볼로냐 대학 하지만. 이미 이전부터 귀족애들은 저런 제너럴한 자유로운 교육 커리큘럼을 서기 6백년 전후부터 다 한거야 저게.

 

이게 조선과의 차이야. 조선 왕조는 커리큘럼이. 유교경전이야. 이게 다야. 역사를 제대로 하는것도 아냐. 역사란건 관념이 아냐 이건. 리앨리티.를 직접 몸으로 체험하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학습이야. 역사를 제대로 습해야 현실적인 인간이 되걸랑. 조선은 이걸 안한거야. 끽해야 중국사가 다야 들의 인간사 잣대는. 저 중국사도 경전에 공자왈 의 그 코트 인용일 뿐이야. 중국사에 대한 이야기도 관념 수준이야 얘들이 익히는건. 쟤들 실록에 우리네의 고려 삼국시대를 언급을 제대로 하는것도 아냐. 사람 이야기를 리얼하게 익히지도 않아. 

 

해서 애들이 관념도 아니고 망상에 머물면서 공자왈 맹자왈 나무 공자불 나무 소학불 만 하면서 도사연하는겨 저게.

 

저게 구한말에 실록을 보면 심심하면, 이럴수록 공자님 말씀에 더 집중하고 유교를 더 익혀서리 단합하면 하늘이 도와줄거임둥. 이따위 문구가 심심하면 나오는겨. 

 

왜냐믄. 애들이. 공부하는. 교육 받는 게 지극히 편협 협소에 망상 이야기만 습하는거걸랑. 이런 애들이 정의놀이 소인배놀이 적폐놀이에 열광하는거야 이게. 이게 조선 오백년이야. 똥천지를 만든겨 이게. 이게 쟤들과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야.

 

교육은 무기를 제공하는겨. 이걸 풀어서 말해준게 호르투스 델리키아룸.이야. 이런 단어조차 한글러는 전혀 몰라. 

 

쟤들은 저런 호르투스 델리키아룸.을 어릴때 부터 익히는거야. 저게 귀족에서 민들에게 퍼지는겨. 그러면서 산업혁명을 만든거야. 무수수한 애들이 바닥에 깔려줘야. 거기서 지니어스라는 엔진 덩어리가 만들어지는거거든. 

 

후안나.도 바탕이 명석 성실에 교육을 잘 받았어. 이여자가 엄마에게 디인게. 종교재판이야. 좋은말로는 마음이 디게 여린겨 이여자가. 저런 인퀴지션에 트라이얼 바이 오어딜.에 충격을 먹곤 한거야. 특히나 레콩퀴스타 하고는 유대인에 무슬림 문제에 모리스코스들 탄압에 종교재판이 더 극성일 때걸랑. 무슬림 식민지 8백년 만의 복수를 하는겨 쟤들은.

 

 

후안나.가 저런 스페인땅에서 말야. 펠리페 에게 시집을 17세에 가면서. 플랑드르로 가는거야. 이때의 플랑드르는 그야말로 환타지인겨 이여자 시선에선. 저땐 포르투갈의 스파이스와 메르 myrr 몰약이 저기로 모아져서 여기에 사람들이 다 몰리면서 그야말로 시끌벅적한 자유의 플랑드르여 저기가. 바스코다가마.가 1499에 저걸 갖고와서 풀기시작한겨. 이전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백년 물건들도 플랑드르 시장에서 팔았던거야. 터진겨 이게 본격적으로. 그게 북 르네상스의 그림들이야. 저긴 스페인과 전혀 다른겨 그 분위기가. 스페인은 전쟁 마무리에 이제야 시작이야. 아무것도 없어 저긴. 남부 안달루시아. 지역 빼곤. 

 

저기서 애들을 낳고 자유롭게 살다가. 하미지 받으러 잠깐 왔다가 가고. 다시 온거야. 저때 후안나의 생각 속으로 들어가면, 다시 말야, 아 이놈의 스페인 저 구질구질 . 사람들 죽이는 땅. 그림자에 치일 수도 있어. 저게 신경질로 나올 수도 있고. 해서 하미지 받으러 왔을때 엄마아빠랑 말다툼 열라 할수도 있어. 아빠 페르디난도2세가 저년 미친건가 라고 느꼈을 수도 있어. 

 

후안나.는 미친게 아냐. 어릴때의 그 깝깝한 곳에서 자유를 만끽하다가. 다시 저리 갈 수 밖에 없었던거야. 저 무게감이 엄청난겨. 그렇다고 그 권력을 놓을 수는 없어. 자기가 저길 플랑드르 처럼 만들고 싶어 라는 마음도 찐하게 들었을 수 있어. 거기서 오는 자괴감이 클 수가 있어. 왜냐믄. 바로 남편이 죽걸랑. 펠리페가 바람 어쩌고 저쩌고는 의미가 없어. 오자마자 바로 죽어. 한무당식으론 풍토병인거지. 환경이 전혀 달른 곳이야. 그걸 몸이 못 버틴겨. 후안나는 미친년 딱지 받을 정도뿐이 안된겨 어찌보면.

 

해서 정서적으로 점점 문제가 많아졌을 수도 있어. 아들 카를이 와서도 연금상태를 안풀걸랑. 정신적으로 문제가 되어버린 지경으로 온거일꺼야. 허나 그정도로 미친년 딱지는 아닌 경우인듯해. 코트를 맡을 힘은 안되는거야 이여잔 더이상.

 

 

Upon the death of her mother in November 1504, Joanna became Queen regnant of Castile and her husband jure uxoris its king. Joanna's father, Ferdinand II, lost his monarchical status in Castile although his wife's will permitted him to govern in Joanna's absence or, if Joanna was unwilling to rule herself, until Joanna's heir reached the age of 20.

Ferdinand refused to accept this; he minted Castilian coins in the name of "Ferdinand and Joanna, King and Queen of Castile, León and Aragon," and, in early 1505, persuaded the Cortes that Joanna's "illness is such that the said Queen Doña Joanna our Lady cannot govern". The Cortes then appointed Ferdinand as Joanna's guardian and the kingdom's administrator and governor.

 

1502년.에 와서 코트애들에게 하미지.를 받고. 다음해 1503년 봄에 아들 페르디난트1세 황제를 낳고. 얜 남고. 부부는 다시 가 플랑드르로. 그리고 다음해 엄마가 죽어. 와야 해. 이미 서기 1500년에 정해진겨 후계자 후안나. 원래 카스티야 크라운은 이사벨라꺼야. 아라곤 크라운이 신랑꺼야. 카스티야는 아라곤이 갖질 못해. 이사벨라가 카스티야 크라운은 후안나에게 주라고 유언을 남겨. 아라곤은 신랑가 누구에게 주던 관시미가 없어. 후안나가 퀸 레그넌트. 권력있는 여왕이 된겨. 남편 펠리페는 이름뿐인 킹이야. 여긴 프랑크 살리안족의 살리크법이랑 상관이 없는 곳이야. 

 

페르디난도가 권력 주기를 거부해. 카스티야 동전에 펠리페 사위말고 자기 이름을 넣어. 자기가 카스티야 조정을 설득해. 저 후안나 제정신아니다. 쟨 마돈나 라는 레이디 자격이 없다. 해서 코트에서 페르디난도를 후안나의 가디언. 보호자로 지정하고 통치를 맡겨. 저게 1505년이야. 

 

아직 말야. 후안나와 펠리페.가 스페인에 오지 않았어. 페르디난도 혼자만 바쁜거야.

 

 

Joanna's husband, Philip the Handsome, was unwilling to accept any threat to his chances of ruling Castile and also minted coins in the name of "Philip and Joanna, King and Queen of Castile, Léon and Archdukes of Austria, etc."[10]:315 In response, Ferdinand embarked upon a pro-French policy, marrying Germaine de Foix, niece of Louis XII of France (and his own great-niece), in the hope that she would produce a son to inherit Aragon and perhaps Castile.[13]:138[11]

 

펠리페.도 이건 자기 마누라꺼야. 동전을 바꿔. 자기 이름을 박아. 이제부턴 아라곤 친정아부지랑 카스티야가 싸워. 해서 페르디난도가 재혼하는 여자가 퐈가문이야. 여긴 프랑스고. 나바라 킹덤이 퐈가문이 막 되었을때야. 여기 친척여자야. 프랑스랑 친해지려는겨. 프랑스는 합스부르크랑 웬수야. 그러다가 결국 나중엔 카를이 받아서리 외할아버지의 퐈가문의 나바라킹덤이 또한 골칫거리가 되지만 말야. 하튼 퐈가문의 여자로 아이 낳아서 여기에 아라곤과 카스티야를 넘기려했던거다 하는거지. 여기서 아들을 하나 낳는데. 태어나자마자 죽어. 

 

Ferdinand's remarriage merely strengthened support for Philip and Joanna in Castile, and in late 1505, the pair decided to travel to Castile. Leaving Flanders on 10 January 1506, their ships were wrecked on the English coast and the couple were guests of Henry, Prince of Wales, later Henry VIII and Joanna's sister Catherine of Aragon at Windsor Castle. They weren't able to leave until 21 April by which time civil war was looming in Castile.

Philip apparently considered landing in Andalusia and summoning the nobles to take up arms against Ferdinand in Aragon. Instead, he and Joanna landed at A Coruña on 26 April, whereupon the Castilian nobility abandoned Ferdinand en masse. Ferdinand met Philip at Villafáfilaon 27 of June 1506 for private interview in the village church. To the general surprise Ferdinand had unexpectedly handed over the government of Castile to his "most beloved children", promising to retire to Aragon. Philip and Ferdinand then signed a second treaty secretly, agreeing that Joanna's "infirmities and sufferings" made her incapable of ruling and promising to exclude her from government and deprive the Queen of crown and freedom.

Ferdinand promptly repudiated the second agreement the same afternoon, declaring that Joanna should never be deprived of her rights as Queen Proprietress of Castile. A fortnight later, having come to no fresh agreement with Philip and thus effectively retaining his right to interfere if he considered his daughter's rights to have been infringed upon, he abandoned Castile for Aragon, leaving Philip to govern in Joanna's stead.[13]:139

 

페르디난도.가 오히려 악수를 둔거야. 카스티야 코트.는 저래서 자기들이 아라곤에 넘어갈거란걸 눈치채 재혼으로. 해서 오히려 후안나에게 더 뭉치는겨 코트가. 이 부부가 이사벨라 죽고 햇수로 2년 후인 1506년 초에 플랑드르를 떠나는거야. 이때 배가 난파되서 잉글랜드에 닿을때 자기 여동생 여섯살 어린. 과부가 된 캐서린.을 언니가 만난겨. 10년만에 본거지. 저때 후안나는 27세. 캐서린은 21세. 동생 캐서린은 3년후인 1509년에 여섯살 어린 18세 헨리8세랑 재혼하는거고.

 

이때 보고 두 자매는 평생 못봐. 

 

수도 바야돌리드.라는 카스티야 레온의 수도는 북쪽 내륙이걸랑. 위가 갈리시아야. 해서 이땐 외국에서 배로. 스페인 북쪽 비스케이만으로 들어오는겨. 펠리페.는 원래 남쪽 안달루시아.에서 귀족세력 모아서리 무장해서 장인한테 맞설려 했다. 당시 귀족들 세력은 남쪽 안달루시아.라는 거지. 헌데 뱃길이 이게 피곤해. 걍 바로 위에 닿아서 내려간겨. 

 

장인 페르디난도.랑 사위 펠리페.랑 단독회담을 해. 의외로. 펠리페 니가 카스티야 킹 해라. 대신 마누라 내딸후안나는 정무에서 배제시켜라. 이걸 펠리페가 받아. 뒤에껀 나중 취소시켰다. 즉 후안나 없인 자기도 없는겨. 

 

On 25 September 1506 Philip died after a five-day illness in the city of Burgos in Castile. The official cause of death was typhoid fever. The general opinion publicly declared was that his father-in-law Ferdinand II, who had always disliked his foreign Habsburg origins and with whom he never wanted to share power, had had him poisoned by "bocado".[citation needed] Joanna was pregnant with their sixth child, a daughter named Catherine (1507–1578), who later became Queen of Portugal.

By 20 December 1506 Joanna was in the village of Torquemada in Castile, attempting to exercise her rights to rule alone in her own name as Queen of Castile. The country fell into disorder. Her son and heir-apparent, Charles, later Charles I, was a six-year-old child being raised in his aunt's care in northern European Flanders; her father, Ferdinand II, remained in Aragon, allowing the crisis to grow.

 

플랑드르에서 잉글랜드 거쳐. 스페인에 도착한게 1506년 6월이야. 권력을 받았어. 헌데 바로. 삼개월 후인 9월에 펠리페.가 병에 걸려서 죽어. 독살설이 퍼진거지. 벨류없는게 대부분 이 독살설이야. 조선왕조 오백년에 독살설로 왕들 죽다며 책팔이 하는 개 학자들. 정말 야 저것들은 특히. 

 

이때 후안나.는 막내딸을 임신한 상태에서 얠 여기서 낳은겨. 즉 2남 4녀 중에. 페르디난트1세와 막내딸만 카스티야 에서 낳은거야. 캐서린.이라고 이름을 지어. 이전에 자기가 잉글랜드에서 십년만에 만난 여동생 이름을 딴거야. 불쌍한겨 언니 입장에선 캐서린이. 헨리랑 재혼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하민서 갓 시집가서리 과부되서 혼자 생활한지 4년이상된 여동생보면서 눈물 흘렸을꺼야. 해서 자기딸 이름을 지은겨. 후안나.는 이 스페인행이 지옥이 되는겨 어릴때 부터의 기억에. 플랑드르의 자유와 상반되는 걸 다시 겪고 복기하면서. 헌데 신랑이 삼개월만에 죽었어. 

 

이미 선동질에 당한겨. 카스티야나 후안나나. 페르디난도2세라는 아빠한테. 후안나.가 미친년 이라고 연일 댄거야 저게. 이사벨라 죽고 2년동안. 딸 부부 안올때. 펠리페가 미남딱지 에 그나마 안심이었는데 확 죽어버렸어. 이전 선동질의 기억에 갑자기 꽃그림이 지워지면서 더 혼란스러운겨 카스티야 그 자체가. 후안나가 야 니네 그거 선동질 이다 넘어가지 마라 해봤자 안먹혀 저게. 그러면서 후안나는 진짜 미친년이 된거야.

 

저 상태에서 저걸 페르디난도2세. 아라곤이 먹은겨. 

 

Ferdinand II and Joanna met at Hornillos, Castile on 30 July 1507. Ferdinand then constrained her to yield up her power over the Kingdom of Castile and León to himself. On 17 August 1507 three members of the royal council were summoned - supposedly in her name - and ordered to inform the grandees, of her father Ferdinand II's return to power: "That they should go to receive his highness and serve him as they would her person and more." However she made it evident that this was against her will by refusing to sign the instructions and issuing a statement that as queen regnant she did not endorse the surrender of her own royal powers.

 

후안나.는 정치 경험이 없어. 코트애들이 도와줘야 하걸랑. 저걸 소문과 선동으로 방치를 하는거야. 후안나는 섬세하고 여린여자야. 스페인하곤 안맞아. 헌데 교육을 받은 여자야. 헌데 주위에 사람이 없어. 플랑드르 생활 십년에 젖은 후안나가 카스티야 코트애들에겐 낯설어. 얘들은 꼴통 카톨릭이야. 8백년만에 자기들 힘으로 무슬림을 몰아냈어 그리스도의 힘으로. 

 

저 간극이 큰거야. 이걸 페르디난도2세 아빠가 즐기는겨. 아마 하미지. 하러 올때 틀어진듯해. 어릴때 기억이 머가 있었을듯하고. 이 부녀관계가 안좋아. 펠리페 죽고 다음해 7월 말 10개월만에 걍 접수하는겨 후안나. 감금을 하고. 펠리페가 죽고 이후엔 얘 작전대로 먹었을 뿐이야. 후안나.는 자기 혼자만의 상황에서 진짜 미친년.이 된겨. 저들이 후안나를 미친년으로 만든거야 저게. 

 

Ferdinand II (Aragonese: Ferrando; Catalan: Ferran; Basque: Errando; Spanish: Fernando; 10 March 1452 – 23 January 1516), 

 

아라곤의 페르리난도2세.는 저 이후 10년을 카스티야까지 다스린겨. 1516년. 죽을때까지. 완전히 혼자만의 세상인거지. 나이 64세. 죽고는 카를5세가 플랑드르에서 나이 16세에 오는거야. 삼년 후 19세에 할배 막시밀리언.을 이어 황제가 돼.

 

막시밀리언. 황제가 아라곤의 페르디난도2세.보다 7살 어려. 둘다 카를5세의 할아버지야. 친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 

 

.

 

여기서 부터 재밌는게. 후안나의 자식들 처음 세명.과 다섯째딸은 플랑드르.에서 나고 자란겨. 넷째 페르디난트1세와 막내딸만 스페인에서 나고 자란겨. 부모가 움직일때 애들을 델꼬 다니지 않았어.

 

 

카를 5세는 스페인땅은 생판 처음이야. 16세에 오지만. 여긴 딴나라야. 헌데 마음속으론 디게 신성하게 여기는 자기 외가야.헌데 무엇보다 8백년만의 레콩퀴스타야. 이건 찐한겨 그 다음 세대의 이들에겐. 그 땅의 사람들. 조상들에게 엄숙해질 수 밖에 없어. 

 

이 조선 땅바닥이 후진건 저거야. 이게 먼가 드러운겨. 그리 당했는데 말야. 일본에게 임란으로 짓밟혀 중국이들에게 호란으로 짓밟혀. 저 전쟁의 원인도 들어가 보면. 조오온나게 한심해. 조오오온나게 없는 들이 망상에 쩔어서리 지들은 선비요 문명이고 남들은 오랑캐에 야만이고 적폐고 소인배고. 그러면서 조오온나게 도망가. 민들은 각자도생하라우. 인질로 조오온나게 잡혀가. 귀족들만 살아남아. 민들이 압록강을 건너오면 오히려 잡아가. 압롱강너머엔 도망나온 피로인들 조선인들 백골이 산을 이룬대. 그래도 관시미가 없어. 나중 30년 만에 탈출한 안단.이란 사람도 코트에서 잡아서 중국이에게 보내. 임란은 명나라들이 와서 싸워주고 흉년에 곡물줘서 버텨. 일본랑 협상해서 전쟁 마무리도 명나라가 나서서 해줘. 일본들은 그냥 돌아가 명나라랑 조약해서. 호란땐 킹가 무릎꿇고 잘못했슈 내 땅 민들 노예로 잡아가슈. 그리곤 이번엔 일본들의 일제에 먹혀. 양키들의 원자폭탄으로 해방이돼.

 

 

그리곤. 위대한 조선이여~~~~~. 조선의 님들이여~~~~ 

 

 

지페와 동전으로 모셔.

 

 

모든건 일본탓이여~~~~. 중국이한테 당한건 말도 하지 말어. 중국이는 우리네 주인님들이여~~. 일본에게 당한것만 책임을 물어~~ 조선에 책임을 왜물어~~~. 조선은 위대한 것이여~~~.

 

 

 

참 조오오온나게 코메디야 저게. 저따위 들의 이념이 민족 민주 정의 평등 평화 야. 

 

역사를 잊는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 참 웃긴 말이지. 저게 대체 먼말이야. 조선의 위대함을 잊어서리 미래가 없단겨, 아니면 위대한 조선이 당한 역사만을 잊지말자는겨 머여 저게.

 

 

끔찍한거야 저게.

 

카를에겐 자기 외가지만 여긴 달라. 해서 이 인간도 스페인어를 그리 대해

 

 It is said that Charles spoke several vernacular languages: he was fluent in French and Dutch, later adding an acceptable Castilian Spanish (which Charles called the "divine language"[9]) required by the Castilian Cortes Generales as a condition for becoming King of Castile.

 

 

헌데 말이지. 스페인애들이 보기엔 쟨 걍 남자 후안나.야 ㅋㅋㅋ. 플랑드르에 프랑스가 절고 절은 인간이야. 해서 터지는게 카스티야는 코무니다데스 반란이고 아라곤에서 게르마니아스 의 반란이야. 귀족들이랑 길드 애들이 각각에서 뭉친겨. 

 

 

이때 말야. 동생 페르디난트1세.가 세살 어린데. 얘한테 민심이 쏠리는겨. 얜 스페인을 벗어난적이 없어. 즉 카를이 16세에 와서 13세인 동생을 처음 본거야 스페인에서. 얘를 여기 두면 안돼. 얘를 대신 플랑드르에 보내는겨 ㅋㅋㅋ. 해서 얘가 엄마 후안나처럼. 꼴통 스페인에서. 플랑드르로 가서리 저기 문명 문화를 익히면서 나름 열린인간이 된겨 이게. 그래서 카를5세가 황제자리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를 동생에게 준거고. 꼴통 카톨릭인 자식 펠리페2세에겐 독일땅 수많은 영지에 종교전쟁의 가운데 자리를 얘한테 줄 수 없었던겨.

 

 

후안나.의 자식들을 보면. 

 

Eleanor of Austria (15 November 1498 – 25 February 1558), also called Eleanor of Castile, was born an Archduchess of Austriaand Infanta of Castile from the House of Habsburg, and subsequently became Queen consort of Portugal (1518–1521) and of France (1530–1547). She also held the Duchy of Touraine (1547–1558) in dower. She is called "Leonor" in Spanish and Portuguese and "Eléonore" or "Aliénor" in French.

 

첫째 딸 오스트리아.의 엘레오노르. 플랑드르가서 2년만에 낳은겨. 포르투갈의 마누엘1세에 후안나의 큰언니와 아랫동생이 차례차례 시집을 가고 둘다 죽어서. 얘가 세번째로 오십넘은 늙은이에게 가. 마누엘이 삼년 살고 죽어. 이여자가 재혼하는 곳이 프랑스의 프랑수아1세야. 1530년. 나이 32세에. 

 

저때 프랑수아1세가. 즉위하자마자 마리냐노 전투.로 밀라노 찾고 루이12세가 뺏긴 밀라노 찾으면서 전반전 마무리하고, 후반전 시작하자마자. 파비아 전투로 얘가 카를5세의 합스부르크에 인질로 잡혀가서 신성로마와의 경계땅 다 주겠다 약속하고 짜그러질때야. 그리곤 바로 교황 클레멘스7세가 코냑동맹을 맺어서 카를5세에 맞서다가 베네치아가 뒤통수맞아서 교황개개끼하고 등돌리고 로마약탈당하고 프랑수아1세는 더 짜그러지고 

 

할때. 카를5세가 자기 누나.를 저기 디리 밀은겨. 프랑수아1세는 부인 클로드.가 몇년전 죽었고. 둘다 재혼이야. 프랑수아1세가 억지로 재혼한겨 카를5세는 우리 화해하자 하는거고. 그리곤 절치부심 오육년 지나서리. 밀라노의 스포르차 핏줄이 끊기고 그걸 카를5세가 그냥 주으려 하는걸. 그 밀라노 내꺼다 해서리 다시 쳐들어가는거고 이탈리아로. 이 프랑수아의 근성은 인정해줘.

 

Isabella of Austria ( 18 July 1501 – 19 January 1526), also known as Elizabeth, Archduchess of Austria and Infanta of Castileand Aragon, was Queen of Denmark, Sweden and Norway as the wife of King Christian II. She was the daughter of King Philip Iand Queen Joanna of Castile and the sister of Emperor Charles V. She was born at Brussels. She served as regent of Denmark in 1520.[1]

 

카를이 둘째고. 셋째가 오스트리아.의 이사벨라. 덴마크 퀸이야. 브뤼셀에서 나서 헨트에서 죽어. 완전 플랑드르야. 남편이 덴마크 크리스티안2세.야 얘가 스웨덴이 칼마르 체제에서 벗어나 독립하게 하는 코펜하겐 블러드베쓰 일으키고. 구스타브 바싸가 스웨덴 독립하고, 종교개혁때 성서번역하고 루터 따르는듯 하다가 삼촌한테 킹자리 뺏겨서리 다시 카톨릭 할래 하면서 지저분해진 애야. 영세사업자 위한답시고 재벌 죽여 하민서리 코펜하겐 경제 망가지고 쫓겨난겨 얜. 저따위 소득주도 경제란 망상놀이가 저따위 바이킹 갓 한 애들이 먼저 해보다가 개피를 본거지.

 

When King Christian was deposed in 1523 by disloyal noblemen supporting his uncle DukeFrederick, the new king wanted to be on good terms with Isabella's family. He wrote her a personal letter in her native German, offering her a dowager queen's pension and permitting her to stay in Denmark under his protection while King Christian fled to the Low Countries. But Isabella wrote back to Duke Frederick in Latin, stating that : "ubi rex meus, ibi regnum meum", that is "where my king is, there is my kingdom".

 

삼촌 프리드리히.가 킹을 빼앗고. 후안나의 딸 이사벨라.에게 편지를 써. 크리스티안이 나쁜지 당신은 그냥 덴마크에 살라고 연금주겠다고. 이때 신랑는 혼자 저지대로 튄거야. 이바벨라 왈. 나의 킹이 있는 곳이 나의 킹덤이다. 아 후안나 딸이 멋져. 

 

넷째 다섯째가 페르디난트1세와 헝가리의 마리. 막시밀리언이 야기에워애들의 두 남매자식과 꼬마때 정식결혼시켜 합동결혼식. 이걸로 동유럽을 먹어. 페르디난트1세는 플랑드르 와서 오히려 진짜 대륙인이 되는거고.

 

카를5세의 막내동생 캐서린.은 마누엘1세의 아들 포르투갈 주앙3세에게 시집가고.

 

주앙3세의 여동생 이사벨.은 카를5세에게 시집가고. 카를5세가 이때 포르투갈에 기대려고 자기 여동생들 끼리 결혼하는거고.

 

주앙3세와 그 여동생 이사벨.의 엄마는. 카를5세의 엄마 후안나.의 동생이자 캐서린의 언니.인 마누엘1세에 두번째 시집간 마리아.고.

 

 

This portrait of Joanna was done in Flanders, 

c.

1500: it is a detail from the wings of the Last JudgementTriptych of Zierikzee, by the Master of Afflighem (Royal Museums of Fine Arts of Belgium)

 

서기 1500년 즈음. 플랑드르에서의 후안나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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