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sare Borgia leaving the Vatican (1877) by Giuseppe Lorenzo Gatteri

 

주세포 로렌초 가테리. Giuseppe Lorenzo Gatteri (18 September 1829 – 1 December 1884) was an artist from Trieste, now in Italy.  트리에스테. 사람. 여기가 슬로베니아 경계야. 1877년 그림. 바티칸을 떠나는 체사레 보르자. 저게 1503년. 이야. 

 

아 이 개무시기 빠나나덜에게 이 체사레 보르자. 이야기라도 좀 하려니. 피곤한데 이거. 아 원체 개무시기해야지 이거원. 왜냐믄 이런걸 제대로 알려주는 인간들이 이땅바닥에 없걸랑. 걍 민족 민주 정의 평등 이념놀이에만 환장한 땅바닥에서 멀 제대로 알려주는게 있어야지 이게. 이 문꽈들은 말야 이땅바닥에 야 진짜. 이꽈애들은 밤 새도록 철저하게 약속된 공식들을 원서대로 디비파면서 고생 하면서 게우게우 쟤덜꺼 뻬긴 해방이후세월을 말야. 이 문꽈들이 이념놀이에 미쳐서리 아무것도 안하고. 지들 반대 이야기되는건 적폐고 아가리 처막아야 한다는 궁리만 해대고.

 

중국이 들이 민족 대면서 반민족 적폐 법 시행한다니까 여기도 저런걸 발의 했담시? 어쩜 저러냐 그래. 지들 개무시칸건 모르고 말야. 반나치법이 얼마나 욕처먹는지도 모르고, 가장 피해자인 프랑스 애들조차 헌법 위원회에서 위헌심의난걸 여전히 안고치는 저 후진 프랑스들에, 독일들이야 자기들 상공업 상대가 쟤들이니 더 수그리면서 더 나설 뿐이고 한 저런걸 말이지. 지덜이 진보의 지성 대는 촘스키 조차도 나치가 하던 짓들을 고대로 하는 저따위 짓이라니 해댐시 비판하는것도 쌩까고. 걍 지들 이념 아니면 다 적폐고 찢어 죽여야 하고. 이땅 문꽈는 정말 문제야 저거. 조선이 유교의 문치로 망했걸랑 저 이념놀이 적폐놀이만 하는 문치. 문민정부가 저 문치다 저 무시기 문치. 문민정부만이 지들 정통이라. 

Cesare was preparing for another expedition in August 1503 when, after he and his father had dined with Cardinal Adriano Castellesi on 6 August, they were taken ill with fever a few days later. Cesare, who "lay in bed, his skin peeling and his face suffused to a violet colour"[46] as a consequence of certain drastic measures to save him, eventually recovered; but the aged Pontiff apparently had little chance. Burchard's Diary provides a few details of the pope's final illness and death at age 72.:[47]

Saturday, the 12th of August, 1503, the Pope fell ill in the morning. After the hour of vespers, between six and seven o'clock a fever appeared and remained permanently. On the 15th of August thirteen ounces of blood were drawn from him and the tertian ague supervened. On Thursday, the 17th of August, at nine o'clock in the forenoon he took medicine. On Friday, the 18th, between nine and ten o'clock he confessed to the Bishop Gamboa of Carignola, who then read Mass to him. After his Communion he gave the Eucharist to the Pope who was sitting in bed. Then he ended the Mass at which were present five cardinals, Serra, Juan and Francesco Borgia, Casanova and Loris. The Pope told them that he felt very bad. At the hour of vespers after Gamboa had given him Extreme Unction, he died.



체사레가 아빠 교황이랑 바티칸에서 식사를 한게 서기 1503년 8월 6일. 이야. 여름이야. 그리고 며칠후에 열이 올라오는겨. 체사레는 완전히 누워서리 피부가 벗겨지고 얼굴이 바이올렛. 보라색에 점점 퍼래지는겨. 얜 살아남았어. 팔팔한 28세야. 헌데 72세 교황은 앓다가 8월 18일에 죽어. 

웬만하믄 지도 안올리려는데 짐께서. 구찮걸랑. 니덜이 스스로 찾아봐. 구글지도 좋아. 사오십대애들이 다 개무식한게 기본적으로 말야 쟤들은 지명. 을 알 수 있는 세대가 아냐. 쟤들이 읽고 들은 역사 이야긴 다 사기야 사기. 지명을 모르는 이야기는 의미가 없어. 문학이 그래서 의미가 없어 쟤들한테. 유럽 문학이란게 기본적으로 역사이야기.의 다른 풀이일 뿐이야. 허섭하게 번역된 문학에 지명도 모르고 걍 감동한척 읽은 척 하는 세대가 이땅바닥 지식인자연하는 애들이야. 쟤들 무시캐. 헌데 똑같이 유럽애들처럼 구글지도로 다 볼수가 있어 저 현장을. 지금은. 지도를 꼭 보도록해 자주. 
지금 바티칸 시티. 란건 테베레.강 왼쪽이야. Tiber 영어 타이버.여. 티버가 아녀. 이탈리아어 

Tevere 테베레. 웬만하믄 원주민애들이 부르는 발음으로 불러. 저긴 베드로 무덤이 있어서 저기에 교황 자리가 있는겨. 베드로는 네로가 있을때 유대인이야. 유대인의 무덤을 로마 성벽이있는 테베레강 오른쪽에 둘 수 없어. 왼쪽 위에 두는겨. 그 무덤 위에 세운게 바티칸이야. 로마 교황의 권위는 베드로에서 나올 뿐인거걸랑.

 

 

저 바로 오른쪽에. 성 천사성.하는 산탄젤로. Sant'Angelo . 홀리 앤젤 성이 있는겨. 이 산탄젤로는 하드리아누스 무덤.이야. 에드워드 기번.이 파이브 굿 엠퍼러즈.라고 명명했던 그 가운데 황제야. 처음 다섯을 끄집어낸 인간은 마키아벨리.였고. 

 

산탄젤로.가 뚱그런 견고한 성이야 저 무덤이. 해서 저기가 교황이 피신하는 피난처에. 바티칸의 감옥으로도 쓰는겨. 바로 옆이라 지하 비밀통로가 있어. 체사레.가 바티칸에서 나와서. 저 산탄젤로.로 옮기는 그림이야 저게. 체사레 보르자가 산탄젤로.에서 쉬다가. 바로 다음해 1504년. 스페인 라만차로 옮겨서 감금당하는거야.

 

 
로마의 일곱언덕.이 아벤티노. 첼리오. 카피톨리노(16세기까지. 이후 캄피돌리오). 에스퀼리노. 팔라티노. 퀴리날레. 비미날레. 
 
할때 말야. 퀴리날레.가 가장 북쪽이야. 여기에 저 퀴리날레 궁전.이 있는겨. 이건 16세기 말에 지은겨. 교황이 별장용으로 지은걸 이때부터 교황집무랑 콘클라베도 여기서 열리고 하다가. 이게 지금 이탈리아 대통령 청와대인겨. 퀴리날레. 에서 오른쪽 아래로 내려가면서 비미날레. 에스퀴날레. 첼리오. 이고. 남쪽언덕이 아벤티노. 위가 팔라티노. 이 서쪽 위에 카피탈리노.하고 여기에 제우스인 유피테르 신전이 있고. 저기의 포로 로마노.라는 광장은 카피톨리노.와 팔라티노 사이에 있는고. 오른쪽의 콜로세움.은 바로 아래언덕이 팔라티노에 오른쪽에 에스퀼리노.와 비미날레 사이에 쑤셔박혀 있는겨. 
 
해서 베드로성당이 있는 바티칸은 위도 로도 높이 동떨어져 있는거야 저건. 
 
판테온.은 일곱언덕들 벗어나서 서북쪽에 있는거야.
 
Vatican City (/ˈvætɪkən/ (About this soundlisten)), officially Vatican City State (Italian: Stato della Città del Vaticano;[d] Latin: Status Civitatis Vaticanae),[e][f] is an independent city-state[9] enclaved within Rome, Italy. Established with the Lateran Treaty (1929), it is distinct from yet under "full ownership, exclusive dominion, and sovereign authority and jurisdiction" of the Holy See (Latin: Sancta Sedes).[g][10] With an area of 44 hectares (110 acres), and a population of about 1,000,[3] it is the smallest state in the world by both area and population.
 
바티칸 시티. 
 
Vatican City is one of the few widely recognized independent states that has not become a member of the United Nations.[52] The Holy See, which is distinct from Vatican City State, has permanent observer status with all the rights of a full member except for a vote in the UN General Assembly.
 
유엔 193개 회원국.에 포함되지 않아. 헌데 홀리 씨.라는 교황.은 유엔총회에 퍼머넌트 옵저버 지위야. 옵저버.는 의결권이 없어. 그 결과만 옵저버. 볼 뿐이야. 참여해서 활동은 해도. 퍼머넌트.란건 회의 내내. 라는 겨. 전체끝까지. 참여할 권리고. 이게 지금 두 곳이야. 교황.이랑 팔레스타인. 
 
면적이 44헥타르. 1헥타르가 가로세로 백미터. 이게 44개 있어. 0.44제곱 키로. 
 

전체 지도.인데. 중심건물은 베드로 성당이야. 바실리카. 고대로마때 공공건물이야. 콘스탄티누스 대제. 서기 4세기 초에 지은겨 베드로 무덤위에. 이걸 천년 지나서 재건축을 해

 

Donato Bramante (1444 – 11 April 1514),[1] born as Donato di Pascuccio d'Antonio[2] and also known as Bramante Lazzari,[3][4] was an Italian architect. He introduced Renaissance architecture to Milan and the High Renaissance style to Rome, where his plan for St. Peter's Basilica formed the basis of design executed by Michelangelo

 

도나토 브라만테. 브라만테 라짜리.로 알려진. 1506년.때 재건축을 하는겨. 이것도 율리우스 2세 무섭 칼잡이 교황이야. 보르자의 적. 도나토 브라만테.는 우르비노 공국 태생. 라파엘로와 같은. 밀라노 스포르차 후원받다가 로마가서리 저걸 디자인해. 미켈란젤로.가 이걸 토대로 더 그리고. 더하여 시스티나 채플 천장 그리고. 

 

Construction of the present basilica, which would replace Old St. Peter's Basilica from the 4th century AD, began on 18 April 1506 and was completed on 18 November 1626.[6]

 

베드로 성당 재건축이 120년만인 1626년에 끝나는거야. 미켈란젤로가 저기 설계에 참여했다는건. 브라만테.가 1506년에 설계를 했는데. 이게 진도가 잘 안나가. 특히나 돔.이야. 이걸 비쥬얼 미학과 물리적 떠받침을 다 해결해서 그린게 미켈란젤로.여. 이 돔 설계를 최고로 치는거고. 이게 1546년. 40년만이여 미켈란젤로가 의뢰받은게. 그리고 죽고 나서 저게 지어진거야.


The Apostolic Palace (Latin: Palatium Apostolicum; Italian: Palazzo Apostolico) is the official residence of the Roman Catholic Pope and Bishop of Rome, which is located in Vatican City. It is also known as the Papal Palace, Palace of the Vatican and Vatican Palace. The Vatican itself refers to the building as the Palace of Sixtus V in honor of Pope Sixtus V.[2]

 

저 베드로 성당. 바로 위에 붙어있는게 사도궁전. 이 정식 명칭이야. 어파스탈릭 팰리스. 이게 교황궁전 바티칸궁전. 하는겨. 저 베드로 바실리카. 재건축 중에. 저것도 재보수하는겨. 여기가 교황 자는 곳.이자 사적공간이자 공적 업무도 보는 곳이야. 

 

이곳에 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인 시스티나 채플.이 저기 붙어있는거야. 더하여. 여기에 교황의 공간인 아파트.가 있어. 여기에 말야. 2층에 엘렉산더6세 교황인 보르자 아파트.가 있어. 이게 2층이야. 그리고 보르자 앙숙인. 저 체사레.를 스페인에 쳐 박은 율리우스 2세 교황의 아파트가 바로 위3층에 있는거야. 그리고 보르자의 아파트 층을 봉쇄를 해 이인간이. 19세기에야 볼수 있었어 보르자 아파트를. 이 인간의 보르자에 대한 사무침이 웃긴건데.

 

해서 율리우스2세 교황의 아파트 공간.에 라파엘로.가 와서리 라파엘로의 방들.이라는 이름의 네개의 방들에 아테네 학당.등의 그림들이 그려진거야. 이 교황의 바닥엔. 보르자를 지워라. 이게 엄청난 힘을 발휘해. 

 

베드로 성당부터. 자기 방을 라파엘로가 그리게 하고. 시스티나 채플 그림도 그리게 하고. 율리우스2세의 공은 지대한겨 한편으론. 

 

헌데 이 배후엔 역시나 보르자.라는게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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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rchbasilica of St. John Lateran, also called the Lateran Archbasilica, is the cathedral of the Bishop of Rome, the Pope. It is the only one called an "archbasilica". Its full official name is "Papal Archbasilica of the Most Holy Saviour and of Saints John the Baptist and the Evangelist at the Lateran, Cathedral of Rome".[8]
  • St. Peter's Basilica, also called the Vatican Basilica, is a major pilgrimage site, built over the burial place of Saint Peter. Perhaps the largest church in the world, it is used for most of the chief religious ceremonies in which the Pope participates. Its official name is the "Papal Basilica of Saint Peter in the Vatican".[9]
  • Basilica of Saint Paul Outside the Walls, also known as the Ostian Basilica because it is situated on the road that led to Ostia, is built over the burial place of Paul the Apostle. Its official name is the "Papal Basilica of Saint Paul Outside the Walls".[10]
  • Basilica di Santa Maria Maggiore, also called the Liberian Basilica because the original building (not the present one) was attributed to Pope Liberius, is the largest church in Rome dedicated to the Blessed Virgin Mary, hence its name of Saint Mary Major, i.e. the Greater. Its official name is the "Papal Basilica of Saint Mary Major".[11]

 

 

로마의 4대 교회.하면. 라테란 바실리카. 이건 성 요한을 기리는건데. 세례 요한.에 저자 요한. 같이 기리는거야. 이게 가장 오래된 교회로 봐 로마에서. 커씨드럴 오브 오마. 이게 로마의 커씨드럴 처치.야. 커씨드럴.은 막 쓰는게 아니라. 주교. 비숍이 있는 자리야 이게. 교황은 전세계 교황이지만. 로마주교로서의 교회.는 여기야 성 라테란 교회. 즉 말야. 교황의 원래 거주지.는 이 바실리카 옆에 있었던거야. 

 

The Lateran Palace (Latin: Palatium Lateranense), formally the Apostolic Palace of the Lateran (Latin: Palatium Apostolicum Lateranense), is an ancient palace of the Roman Empire and later the main papal residence in southeast Rome.

 

이게 라테란 궁전.이야. 원래 교황 거주지.이자 업무보는 곳이야. 여기서 잠을 잤던겨 교황이. 자기 주교 교회.옆에서. 이건 첼리오 언덕에 있는겨. 

 

성 바오로 성당. 아웃사이더 더 월즈. 성벽 밖에 잇는겨. 일곱언덕.이 성벽 안이야. 이건 완전 남쪽에 있는거야. 바오로.도 베드로.와 비슷한 네로때 죽은 걸로 보걸랑. 바오로.는 여기서 추모를 하는거야

 

다음 산타 마리아 마쬬레 성당. 마쪼레. 는 메이저. major 성모마리아 교회가 로마 에 몇개 되서 이게 가장 크다 부여하는거야. 이건 에스퀼리노 언덕에 있어. 

 

베드로 교회.외에 저 세개는 모두 바티칸 밖에 있지만. 소유권은 다 바티칸이야. 
할때 교황이 거주하던 곳이. 원래 성요한 라테란 성당.옆의 라테란 궁전.이었다가. 저 교회들에 붙은 집들 여기저기 살았던거야. 건물이 낡거나 화재가 나거나 하걸랑. 

베드로 성당.이 콘스탄티누스 대제때 건축을 하는데. 이건 성요한 라테란.보다 늦어. 그리고 백년지나서리 바로 위에 저 어파스탈릭 팰리스 라는 지금의 교황 궁전을 지은겨. 이것도 저 르네상스 이전 천년이 된거야 벌써. 해서 교황이 저기도 주 거주지였걸랑. 그러다가 베드로 성당을 재건축할때 저기도 재보수를 한거야. 그러면서 그림들을 그린거고 채플과 성당과 아파트들 안에. 그게 지금 위대한 작품들로 남은거고. 저기에 말야. 정작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그리지 않은겨. 저기에 미켈란젤로.가 특히나 찐하게 스민거고. 라파엘로.가 율리우스2세 아파트 방들에 그림그리면서 남긴거야 저게. 

The Cappella Paolina (Pauline Chapel) is a chapel in the Apostolic Palace, Vatican City. It is separated from the Sistine Chapel by the Sala Regia. It is not on any of the regular tourist itineraries.

Michelangelo’s two frescoes in the Cappella Paolina, The Conversion of Saul and The Crucifixion of St Peter were painted from 1542 to 1549, 

 

저 교황 궁전.이라는 어파스탈릭 팰리스.에 카펠라 파올리나. 사도 바오로 채플.이 있어. 여기에 미켈란젤로 프레스코화 두개가 있어. 베드로성당 돔을 디자인할때 말년에 그린 그림이야 이게. 사울의 개종. 성베드로의 십자가수난. 이건 졸작으로 봐 ㅋㅋㅋ. 똑같은 제목의 이름같은 카라바조.의 그림과 헷갈리믄 안돼. 미켈란젤로.가 신에 미쳐서리. 이제 하다하다가 자기를 베드로에 투사를 해 그림에. 넘어가고.

 

저긴 일반인 출입금지구역이야. 관광코스에 못들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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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때 말야 체사레 보르자 부자 이야기를 하는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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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apal States (ItalianStato Pontificio), officially the State of the Church (ItalianStato della Chiesa

Italian pronunciation: 

[ˈstaːto della ˈkjɛːza; ˈkjeː-]LatinStatus Ecclesiasticus;[3] also Dicio Pontificia), were a series of territories in the Italian Peninsula under the direct sovereign rule of the Pope, from the 8th century until 1870. They were among the major states of Italy from roughly the 8th century until the Kingdom of Piedmont-Sardinia unified the Italian Peninsula by conquest in a campaign virtually concluded in 1861 and definitively in 1870. 

 

교황령.이라는 페이펄 스테이트스.가 지금 쫄고 쫄아서리 저 44헥타르의 바티칸시티.가 된거야. 
교황령.이란게 이전 봤듯이. 우연히 생긴겨 어찌보믄. 로마주교.를 나중에야 교황이라 정리하지만. 조온나게 별볼일없던거야 이게. 고쓰족애들이 점령하고 망하면서 더한겨. 여기에 비잔틴애들이 왔다가 얘들이 용병으로 데려온 롱고바르디 라는 게르만이 비잔틴을 아래로 몰면서 이탈리아를 먹걸랑. 로마주교는 더 의미가 없는겨. 롱고바르디가 그래도 델꼬 살다가 니덜 세금 확실히 내라 하는걸 아 우린 못내 징징대다가 로마주교가 처음으로 알프스를 넘어서, 샤를마뉴의 아버지 소피핀에게 가서 비는겨. 이전에 사신을 보내서리, 그 편으로 소피핀의 서신을 롱고바르디 킹에게 주지만 먹히지가 않고, 로마주교가 직접 파리로 가고, 소피핀은 괜히 미안해하면서 오신김에 성유좀 발라줘 하고 아들 꼬마 샤를 마뉴.도 성유발림당하고, 그 값으로 직접 가서리 롱고바르디애들을 로마 아래로 내쫓으면서, 로마 부터 그 위땅을 모두 로마 주교에게 준거야 소피핀이. 나중에 아들 샤를마뉴가 다시 와서리. 꼬마때 한 성유발림 다시 해줘유. 하면서 로마에 와서 정식 대관식을 하고. 하면서 확인을 더 해준겨. 
즉 말야.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죽으면서 실베스테르1세 교황에게 이탈리아랑 유럽땅은 다 로마꺼다.라는 증서를 줬다는건 나중에야 가짜라고 밝혀지고, 저 가짜 소문 음모로 단테도 신곡으로 지옥놀이에 놀아났지만. 어쨋거나 이탈리아.는 롱고바르디애들이 쫓겨나서 정착한 남부 빼고는 샤를마뉴 아버지가 준거야. 저게 교황령이야. 이탈리아는 태생이 그래서 중세엔 교황령 그 자체야. 이게 줄고 줄어서리 서기 천년 지나면서 피렌체도 쌩까고 로마를. 돌려서리 로마냐까지.만 교황령으로 줄어버린겨. 그러다가 이것도 아비뇽교황정.이 되면서 일명 타이런트들이 각각 도시들 로어드로 선거걸랑. 로마는 완전히 개털이 된거야 교황은. 이걸 다시 회복을 하는겨 아비뇽교황정에 웨스턴스키즘 110년 이후로. 
저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리 콘스탄티노플 함락 되고, 그래서 대안을 찾은게 이베리아땅의 보르자 시작 칼릭스투스 3세 교황이고. 이러면서 교황의 권위를 회복하려는겨. 시작이 교황령을 다시 찾는거야. 그 절정이. 다음다음인 식스투스 4세 교황이야. 

Pope Sixtus IV (21 July 1414 – 12 August 1484), born Francesco della Rovere, was Pope from 9 August 1471 to his death in 1484.

 

아직 이탈리아 전쟁 전이야. 이전 썰한 페라라 전쟁. 페라라 공국 에스테 가문이랑 교황이랑 싸우는겨 소금으로 시작해서리. 식스투스4세가 제노바 출신이야. 이전엔 순결 추기경이라 뽑아줬더만, 제노바 하면 돈.이자 이권이야. 철저해 그 바닥이. 하나하나 찾기 시작하는겨 자기 사람들 심어서. 

 

이때 말야. 이 교황이 카디널. 추기경에 올리는 인간이 또한. 나중에 보르자가문 두번째 교황인 알렉산더6세.의 숙적 유스투스2세 교황이야. 이사람이 식스투스4세 교황의 조카야 역시나. 이 유스투스2세도 제노바 사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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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전환을 해서 

The Conspiracy of the Barons was a revolution against Ferrante of Aragon, King of Naples by the Neapolitan aristocracy in 1485 and 1486. It should be understood as a reaction of the local nobility to the royal policies of modernisation of the country pursued by the Aragon House in Naples.[citation needed]

King Ferdinand the First, also known as Ferrante, aimed at dispelling the feudal particularism, strengthening the royal power as the only unquestionable source of authority. In that political and financial context a crash between the barons and the royalty was inevitable.

 

나폴리.가 이전 썰했듯이. 저당시 말야. 아라곤 크라운의 알폰소5세가 부르봉 앙주의 르네.랑 10년가까이 전쟁하면서 나폴리를 가져왔걸랑. 그리고 적법자식을 못낳아서리. 다음 아라곤의 킹은 동생 조안2세에게 가고, 나폴리만 자기 애인 자식에게 물려준거야. 

 

나폴리 킹덤.이 이탈리아 남부야. 즉 아라곤의 트라스타마라의 안적법자식들이 지배를 하지만. 그 바닥은 이전 카페앙주 애들이걸랑. 여기에 아라곤의 적법도 아니고 안적법 자식이 이걸 받은겨. 나폴리는 이때부터 맛탱이가 간겨 이게. 그 바닥의 귀족들이 킹덤에 대드는거야. 

 

교황입장에선. 나폴리가 아비뇽때부터 눈엣가시였어 저게. 조안나1세부터 아비뇽 편들었걸랑. 카페앙주가 싫어. 부르봉앙주도 싫지만 뜬굼없이 아라곤의 안적법애들이 온거야 저길. 그 바닥의 귀족애들이랑 교황이랑 손을 잡는겨. 나폴리 킹을 뒤엎으려하는거고 저기서 교황령을 갖고 오려는거지. 롱고바르디애들이랑 비잔틴 애들이 이전에 프랑크 노르망디애들 불러서리 쫓겨났걸랑. 그러면 그 권한은 교황한테 있는거야 이들 논리는. 헌데 프랑크애들이 와서는 교황말이 안먹히는겨. 시칠리아 킹에 나폴리 킹이었던 황제 프리드리히2세랑은 괼피 기벨리니로 교황이랑 전쟁도 한 사이야. 이후 교황이 불러서 카페 앙주 샤를이 와서리 나폴리 킹했는데 교황을 쌩까. 커미션을 안줘 교황이 불러서 지덜이 왔는데. 더하여 조안나1세부턴 아비뇽 편이야. 다음 생판 이상한 아라곤애들이 저거까지 먹었어. 이걸 이전 카페앙주애들에 떨거지 귀족들이랑 합해서 나폴리를 먹기로 한거야. 

 

 

교황령을 갖고오는겨 다시. 교황정의 입장은. 이게 저 피렌체. 밀라노.도 역시 똑같아. 저건 원래 다 교황꺼야. 회복하는김에 교황이 다 먹겠다는 의지가 강한겨. 

 

 

Lorenzo de' Medici (

Italian pronunciation: 

[loˈrɛntso de ˈmɛːditʃi], 1 January 1449 – 8 April 1492)

Ludovico Maria Sforza (also known as Ludovico il Moro;[1] 27 July 1452 – 27 May 1508)

 

저때가. 메디치의 위대한 로렌초.와 밀라노의 루도비코 프리모 스포르차. 일 때야. 

 

The Treaty of Lodi, also known as the Peace of Lodi was a peace agreement between MilanNaples, and Florencesigned on 9 April 1454 at Lodi in Lombardy,

 

로렌초의 할배 코시모.와 루도비코의 아빠 프란체스코.가 메디치와 스포르차.의 시작이야. 이 둘이. 1454년에 평화조약을 맺어. 이게 저 둘까지 온거야. 스포르차 이전에 비스콘티의 밀라노와 피렌체는 웬수였어. 싸우지 말자. 이게 저 걸출한 두 인간 사이에 지켜져. 여기를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메디치에서 밀라노 왔다갔다 하면서 다닌거고. 

 

로렌초.가 병으로 죽어. 젊은 나이에. 43세. 말년엔 대출 잘못되서 못받고. 투자한게 잘못되서리 메디치은행이 파산이 나고. 로렌초가 죽고서 이탈리아는 끝의 시작을 간겨. 1492년. 루도비코.가 혼자서 헤매다가 프랑스 부르고 뒷수습하다가 쫓겨난거고. 

 

 

식스투스4세에 다음 인노켄티우스 8세. 다 정책은 확고해. 교황령 다 갖고오자. 아래 나폴리도 갖고 오고 위의 밀라노도 피렌체도 갖고 오자. 저거 원래 우리땅. 샤를마뉴 소피핀 부자가 준 땅.

 

식스투스4세 있을때 피렌체.에 위대한 로렌초.에 반기를 둔 일명 팟지가문의 음모.로 칼질당해서 동생이 죽고 로렌초는 다치고 팟지애들은 피렌체에서 쫓겨나는것도 식스투스4세 교황이 배후야. 피렌체가 교황이랑 결별을 해. 교황정 재산을 다 몰수하고, 교황은 피렌체 도시 자체를 파문을 해. 피렌체의 시민들도 세례를 못받는겨. 헌데 말야. 그러거나 말거나 이탈리아는 그런 교황에 관시미가 없어. 시대가 변한데다가. 이탈리아는 알프스 넘어의 깝깝 게르만애들이 아니걸랑. 

 

나폴리는 귀족들이 킹덤에 진압당하고. 이 정통성 약한 아라곤의 킹이 교황에 달라붙는거야. 교황 성하시여. 우리가 당신 편이요. 교황이 그러는겨 너 피렌체 쳐라. 

 

로렌초.의 메디치.랑 스포르차.의 밀라노.랑 평화조약을 한거지. 군대를 도움받는게 아냐. 쟤들은 군대가 없어. 용병이야 용병. 

 

Condottieri (

Italian: 

[kondotˈtjɛːri]; singular condottiero or condottiere) were Italian military leaders involved in classical formation battles, first as mercenary captains commanding free companies and later as generals of multi-national armies.

 

콘도티에리. 용병대장들이야. 용병대장들이라는 귀족들만 있는거지. 용병들은 돈으로 사서 써야해.

 

저때 로렌초가 힘들때걸랑. 나폴리애들이 들어오면 망해. 자기 혼자 나폴리 킹덤 안으로 직접 들어가서리 킹을 만나. 오히려 나폴리 킹이 감동을 해. 이런거에 열받아서. 인노켄티우스8세가 샤를 8세에게 나폴리 먹어라 황금사과 던져주고 죽은거고. 

 

그리곤 나폴리 애들이. 피렌체 말고, 밀라노를 칩시다 하는겨. 나폴리 공주가 밀라노의 독살로 나중 죽은 스포르차의 잔.에게 시집갔걸랑. 헌데 루도비코.가 섭정하면서 권력을 안줘. 결국 나중 독살당하는거고. 나폴리랑 교황이랑 여길 칠 테세야. 여기에 루도비코가 안절부절 프랑스를 다시 부른거고. 샤를8세 입장에선 교황도 자길 불러, 밀라노도 자길 불러. 이게 웬 떡이냐 하는거야. 그게 이탈리아 전쟁의 시작이야. 

 

 

 

헌데 저러면서 말야. 그 다음부턴. 이탈리아 전쟁 65년동안, 로마는 약탈도 당하지만, 이탈리아의 중심은 교황이 주도권을 확 쥐는거야. 베네치아랑 맞서는 캉브헤 동맹. 스페인이랑 맞서는 코냑동맹. 프랑스랑 맞서는 홀리 리그 어쩌고. 이걸 교황이 주도하는겨. 이러면서 이탈리아는 교황이 오히려 힘이 쎄져. 

 

이 시작이 체사레 보르자. 부자야. 다시 흐트러진 교황령 로마냐까지를 다 점령하는거야. 체사레가 추기경자릴 버리고, 무기를 잡아.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섭외를 해. 다빈치가 요새 설계만 해준게 아냐. 33-Barreled Organ. Triple Barrel Canon. 33개 총구가 있는 오르간 닮은 다발총. 3개 총구 총. 이걸 체사레를 위해서 만들어준겨. 체사레가 이 무기로 정벌을 해. 

 

저게 말야. 카디널 추기경 던지고, 나바라 여자랑 결혼하고 1498년. 다음해 루이 12세 들어오는 1499년. 부터 해서리. 식중독 걸려서 드러눕는 1503년. 딱 4년의 일이야 저게. 저때 피렌체 경계 까지 다 먹은거야. 아래 남부는 나폴리 넘어까지 드문드문 먹고. 막 피렌체 처먹을라다가 드러누우면서 끝난겨. 루이 12세가 그러고선. 저해 말에 나폴리에서 쫓겨난거야 페르디난도2세의 아라곤에게. 

 

Cesare was appointed commander of the papal armies with a number of Italian mercenaries, supported by 300 cavalry and 4,000 Swiss infantry sent by the King of France. Alexander sent him to capture Imola and Forlì, ruled by Caterina Sforza (mother of the Medici condottiero Giovanni dalle Bande Nere). Despite being deprived of his French troops after the conquest of those two cities, Borgia returned to Rome to celebrate a triumph and to receive the title of Papal Gonfalonier from his father. In 1500 the creation of twelve new cardinals granted Alexander enough money for Cesare to hire the condottieri, Vitellozzo VitelliGian Paolo BaglioniGiulio and Paolo Orsini, and Oliverotto Euffreducci, who resumed his campaign in Romagna.

 

체사레의 용병도 프랑스 루이12세가 보내준 애들인거야. 300명 기병에 4천명 스위스 용병들. 저 병력으로 자잘한 로어드들의 스테이트들을 로마냐까지. 그리고 마르케 서부지역들을 다 점령을 한겨 3년도 안되서리. 얘가 실력이 좋은거야. 

 

 

Giovanni Sforza, first husband of Cesare's sister Lucrezia, was soon ousted from PesaroPandolfo Malatesta lost RiminiFaenza surrendered, its young lord Astorre III Manfredi being later drowned in the Tiber by Cesare's order. In May 1501 the latter was created duke of Romagna. Hired by Florence, Cesare subsequently added the lordship of Piombino to his new lands.

While his condottieri took over the siege of Piombino (which ended in 1502), Cesare commanded the French troops in the sieges of Naples and Capua, defended by Prospero and Fabrizio Colonna. On 24 June 1501 his troops stormed the latter, causing the collapse of Aragonese power in southern Italy.

루크레치아.를 첫 시집 보냈던 스포르차.의 자잘한 땅도 뺏아오는겨. 스포르차애들이 벨류가 확 없어진걸 알고 이혼시키고 뺏는거고. 로마에서부터 주우욱 위까지 차례차례 다 갖고 오는겨 얘가 저 병력으로. 그러면서.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섭외하고, 이탈리아를 다 통일해야 합니다. 이리 자잘자잘 한체로 두다가는 이전처럼 샤를8세가 맘대로 군화발로 이 땅들을 아무런 제지없이 밟고 지나가고. 할배 당신이 설계한 이상적인 도시를 내가 통일한 이탈리아 곳곳에 만들겠소. 그 설계대로 이탈리아를 다시 로마의 시대로 만들어야 합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Ideal City 라는 설계도가 있어. 이걸 밀라노 있을때 만든거걸랑. 결국 이대로 구현을 못하고 죽은겨 레오나르도는. 체사레의 갑작스런 망함으로. 

 

체사레.는 정말 웃기지도 않게 죽은건데. 진짜 황당한겨 갑작스런 환자질은. 애비 교황이 없어도 그 뒷그림을 다 그렸을 인간이야 이인간이. 아비 교황이 죽었어도, 애들은 바티칸을 장악했어. 다음 교황도 콘클라베로 자기편을 만들었어. 헌데 한달도 안되서 죽은겨. 그 누운상태로, 다음 교황되는 유스투스2세 교황이 온겨. 돈 찔러주면서, 내가 교황이 되면 너 체사레.에게 내 충성충한다. 

 

완전히 뒤통수를 맞은거지. 헌데 여전히 걍 누워있을 수 밖에 없는 몸상태.였던거야 체사레가. 머 저건 어찌할 수가 없어. 역사란게 웃겨 이게 한편으론.

 

 

체사레.가 로마냐를 하나하나 정복할때, 위대한 여인. 

 

Caterina Sforza (1463 – 28 May 1509) was an Italian noblewoman and Countess of Forlì and Lady of Imola firstly with her husband Girolamo Riario, and after his death as a regent of her son Ottaviano.

 

포를리.의 백작부인. 이몰라 의 레이디. 카테리나 스포르차. 

 

저기가 아이밀리아 가도.의 볼로냐 바로 아래 이몰라. 라는 도시고. 그 아래 포를리.는 백작령.이고 길따라 내려가면 체제나 리미니 페자로. 인겨. 이 해변 위에가 라벤나.이고.
루도비코 프리모 스포르차.의 안적법 딸이야. 애인의 딸. 포를리 백작이자 이몰라 영주.에게 시집을 갔는데. 이사람이 로렌초 죽이는 팟지가문애들에 가담해서 그게 실패해. 그러다 암살을 당해. 메디치가 사주한게 아냐. 개인적 돈문제야. 여자가 25세때야. 백작령과 이몰라를 받은겨. 자식은 꼬마고. 그리고 재혼을 두번 더해. 헌데 다들 일찍 죽어. 포를리 이몰라 위는 베네치아야. 베네치아가 오는것도 이여자가 혼자 막아.
샤를8세 올때는 중립을 선언해. 그냥 나폴리 가라 안막아. 다음에 루이12세가 왔어. 헌데말야. 이전과 달리 체사레.라는 인간이 있는겨 교황 아부지랑

Alexander VI allied himself with Louis XII in return for the King's support in establishing Alexander's son Cesare Borgia, the Duke of Valentinois, as ruler in Romagna. Alexander issued a Papal Bull on 9 March 1499 to invalidate the investiture of the feudal lords,[42] including Caterina.

 

교황이. 로마에서부터 베네치아 아래 로마냐까지. 자잘한 중세 로어드들은 다 무효.라고 선언을 해. 교황 칙령으로. 카테리나도 같이.

 

저때 친정아빠 루도비코 스포르차. 이앤 이전에 자기 조카딸을 막시밀리언 나중 황제되는 인간이랑 결혼시키곤 오스트리아땅으로 토낐어. 옆동네 피렌체도 프랑스파가 장악했어. 완전히 혼자가 된거야. 혼자 무기 사들이고 건물 보수하는겨 용병 모으고 훈련시키고

On 24 November, Cesare Borgia arrived in Imola. The city gates were opened by the inhabitants, and he was able to take possession, after having conquered the fortress where the castellan Dionigi Naldi of Brisighella had resisted for several days. After seeing what had happened there, Caterina asked the people of Forlì if they also wanted to capitulate to Borgia, or if they wanted to be defended and endure the resulting siege. Because the people hesitated in answering, Caterina absolved the citizens of Forlì of their oath of fealty, and sealed herself in Ravaldino.[43]

 

체사레.가 위 이몰라.에 도착해. 주민들이 항복이야. 성문 열어서 반겨. 저항하는 한 곳은 며칠후 점령해. 아래 포를리.에 있던 카테리나.가 이 소식을 들어. 포를리 시민들에게 물어. 보르자.에게 항복하고프냐 아니면 싸울래. 이때 시민들이 주저주저해. 카테리나가 시민들보고 갈 사람을 가세요. 나를 배신한다고 머라고 안합니다 용서합니다. 하고는 혼자서 요새에 짱박히고. 싸우는겨 이 여자 혼자.

 

아 . 정말 말야. 조선 왕조 5백년 역사에선 절대 볼 수 없는 이야기지.

 

 

일본 들이 임란올때도. 왕이란 앤 혼자 토끼곤. 민들이여 각자도생 하라우. 

 

호란때도 혼자 토끼고는. 모든 민들 다 포로가 되고, 삼궤구고두 하민서리 저녁에 지 혼자 성에 들어가고, 그 주위의 민들은 엉엉 울어 오왕 오왕. 나의 왕아 나의 왕아 함시롱. 다 포로로 잡혀가는 사람들이걸랑. 우릴두고 너 어디가냐. 이게 실록에 그대로 있어. 저러고선 30년 만에 탈출 한 안단.이란 사람 숙종1년. 왜 탈출했냐. 조정에서 잡아서 청나라로 다시 보내.

 

 

 

그리고선 또 먹혀 일본들한테. 일본에게 먹힌건 또 남탓. 어라 조선을 욕하는건 일본를 찬양하는거임둥? 이 민족반역자 적폐.

 

 

들도 저따위 들이 없어 이 지구상에서. 저따위 덜이 민족 민주 정의 평등 벼라별 좋은 말들인듯 다 쓰지.

 

 

 

On 19 December, the Duke of Valentinois also took possession of Forlì and began the siege of the fortress. Caterina repeatedly refused all offers of peace, from Cesare and from Cardinal Riario. In response, Cesare offered 10,000 ducats for her, dead or alive. Caterina tried to capture Cesare when he came near the fortress to talk to her, but the attempt failed.

 

체사레.가 밀라노를 루이12세랑 같이 들어갔잖아. 그리고선 병력받아서리. 거기서 쭉 내려오는겨 저게. 1499년 당해야. 그해 12월. 이몰라 점령하고 내려가서 포를리 백작령을 가는거야. 카테리나는 시민들 도움 관심없고 남은 사람들 모아서리 혼자 버티는겨 걍. 체사레가 추기경을 보내. 1만 두카트를 주겠다. 헌데 카테리나.는 정작말야 체사레를 잡으려는겨 이야기좀 하자면서 꼬시는거지. 이게 실패해.

 

For several days the artillery of both factions engaged in a mutual bombardment: Caterina's cannon inflicted heavy losses on the French army, but the French artillery damaged the defences of the main fortress. What was destroyed during the day was rebuilt during the night. The besieged also found the time to play and dance.

Caterina's solitary resistance was admired throughout all Italy;[44] Niccolò Machiavelli[45] reports that many songs and epigrams were composed in her honour. All were lost except that of Marsilio Compagnon.

As time passed without decisive results, Cesare changed his tactics. His troops bombarded the walls of the fortress continuously, even at night.[46] After six days, they opened two breaches in the walls. On 12 January 1500, his forces stormed the fortress. The bloody battle was quick and decisive, and Caterina continued to resist herself fighting with weapons in hand until she was taken prisoner. Among the gentlemen who were caught together with her, was also her secretary, Marcantonio Baldraccani. Immediately she surrendered herself to Antoine Bissey (the bailli of Dijon) as a prisoner of the French, as she knew there was a law that prevented French forces from holding women as prisoners of war.

According to Machiavelli, the fortress was poorly built and defense operations were misdirected by Giovanni da Casale.[47] He said: "The poorly built fortress and the scant prudence of the defender, therefore, brought disgrace to the magnanimous enterprise of the Countess...".[48]

 

카테리나.가 대포로 쏘면서 막고. 체사레 애들 병력손실 당하고. 성이 파괴되면 밤에 카테리나.는 다시 복수를 하고. 

 

음청난겨 저여자. 카테리나 스포르차. 해가 바뀌고 1월 12일. 성벽을 뚫고 진입을 해. 카테리나를 잡아. 참모들도 잡아. 마키아벨리가 평하길. 요새 자체도 빈약했고 수비하는 이들도 허섭해서리. 위대한 백작부인에겐 불명예를 안겼다는 거지.

 

Cesare obtained custody of Caterina from the French general, Yves d'Allègre, promising that he would treat her not as a prisoner but as a guest. Caterina and her entourage were therefore forced to go with the army that was preparing to conquer Pesaro. The conquest had to be postponed because on 5 February Ludovico il Moro returned to Milan,[49] forcing French troops to turn back.

Cesare departed alone with the Papal army for Rome, where he took Caterina. In Rome, she was held in the Belvedere Palace. Towards the end of March, Caterina tried to escape but she was discovered and immediately imprisoned at Castel Sant'Angelo.

 

체사레.가 카테리나를 죄수 포로가 아닌 손님으로 대해. 조선에선 상상도 할수 없는 일이지. 한번 적이면 죽여야 하걸랑. 이 조선은 끔찍한 왕조야 이게. 적폐놀이에 미친들. 소인배놀이에 환장한 들. 소인배가 적폐가 돼. 아래 페자로.점령길을 다 데려가. 그러다가 루도비코 프리모 스포르차.가 도망간 튀롤.에서 밀라노에 다시왔다는 소식에 프랑스 병력이 돌아가서 늦어져. 체사레만 달랑 로마로 가. 카테리나.를 데리고. 탈출 시도하다가 산탄젤로.에 갇혀

 

Alexander VI alleged that Caterina signed documents renouncing all of her fiefs, because in the meantime his son Cesare, with the acquisition of PesaroRimini and Faenza, was appointed Duke of Romagna.

 

알렉산더 6세 교황이. 카테리나 한테 모든 영지를 포기한다는 싸인을 받아. 체사레가 로마냐의 첫 공작.이 돼. 이 로마냐 공작.은 체사레 보르자.가 죽고. 바로 없어져. 

 

카테리나.는 저 이후 걍 풀려났다가. 보르자들이 갑자기 식중독으로 죽고 눕고 하면서, 다음 교황에게 내땅 달라우 하는겨. 

 

헌데 말야. 교황만 바뀐거지. 똑같애. 교황령은 교황꺼야. 

 

이탈리아 전쟁과 이후 바티칸 시티.가 되는 19세기까지 말야. 교황의 힘이 이탈리아에서는 가장 쎄. 일단 베네치아도 맛이 갔고 제노바는 더 맛이갔고. 교황이 주도하면서 오히려 교황의 입지가 강해지는겨 저 이탈리아 반도에서만은.

 

이탈리아전쟁 이후에. 더 갖고 오는겨 교황령을 교황이. 밀라노와 피렌체 사이의 공국인 페라라-모데나-레쬬 공국령. 덧치.를 에스테 가문이 세우지만 말야. 저길 교황이 뺏으려하면서. 저기서 페라라는 결국 뺏겨 교황령으로. 해서 모데나 레쬬 공국.만 가는거고. 라파엘로의 고향 우르비노 공국령.이 4백년을 카운티에 덧치였걸랑. 이것도 결국 17세기 초에 교황이 갖고 가는겨. 4백년 영지땅이 사라져 교황 품안으로. 이게 나중에 나폴레옹이 와서리 프랑스가 먹다가 사보이 애들이 통일하는 19세기에 와서야 저 교황령이 사라지고 바티칸 시티. 0,44제곱키로미터 땅으로 남게 돼. 

 

 

할때 말야. 그야말로 교황애들에게 교황령을 찾게 되는 본보기를 보여준게 체사레 보르자. 부자야. 체사레 애들에게서 교황이 뺏으면서 이제부턴 교황것이 되는겨 저게. 체사레때에야 확실이 로마냐까지의 땅들이 교황령이 된거야 아비뇽 교황정 이후 백년 만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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