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마다. 라는건. 전함 모임이야. 전쟁하는 배들이야.

 

 

 

 

A fleet of warships.

 

Origin

 

Mid 16th century: from Spanish, from armata, feminine past participle of Latin armare ‘to arm’.

 

라틴어 아르마레. 아르마레. 라는건 전쟁 무기를 공급하는겨. 

 

arm. 은 동사,야 무기공급하다. arms 가 무기들.이야 armament 아머먼트. 같아. 암즈. 가 명사야. 

 

무기라는 다른 말 웨폰. weapon 은 게르만 말이야. 라틴어가 아냐. 따로 만든겨 쟤들이. 

 

해서. 코트 오브 암즈. 해야해. 코트 오브 암. 이란건 없어. 암은 동사야. 코트.가 외투 에 더하여 이게 덮개가 되는겨. 암즈. 무기들을 전체 덮은 코트 옷에 붙이는 상징. 이나 무기들의 전체 상징. 이 코트 오브 암즈. 라는 헤럴드리 문양이야. 이게 실. seal 이라는 국가의 실.을 쓸때 이걸 쓰는거야. 

 

군인.이란게 그래서 국가의 상징이야. 군대.란건 중요한겨 이게 국가 자체고 국가의 정체성이야.

 

 

이 군대.를 혐오 멸시 하는 들이 이념놀이하는 들이걸랑. 이 집단은 야 . 어설픈 감성으로 결국 모든 그 땅의 사람들을 다 몰살시키는 애들이야 이 이념놀이 하는 들은. 대표적인게 유교 국가야. 얘들은 국가 라는 정체성을 만들 수가 없어. 군대.다운 군대가 없는거야 이 들은. 

 

박정희에 부들부들하던 가. 군복 입고 까망 썬글라스 미치도록 써보고 싶었나봐. 골때리는 애들이야 진짜. 

 

쟤들은 걍 벌레야 저건.

 

 

저런 를 권력 중심에 쓰는 나.

 

이념에 환장한 들

 

.

 

아르마다.는 해군.에만 쓰는 말이야. 배야. 스페인 아르마다.란게 스페인 무적함대 가 아냐. 걍 스페인 해군이야. 

 

포르투갈이 동쪽 항로를 뚫었어. 인도를 매년 가는거야. 연 단위로 가는거야. 왜냐믄 바람 때문이야. 

 

The India armada typically left Lisbon and each leg of the voyage took approximately six months.[2][N 1] The critical determinant of the timing was the monsoon winds of the Indian Ocean. The monsoon was a southwesterly wind (i.e. blew from East Africa to India) in the summer (between May and September) and then abruptly reversed itself and became a northeasterly (from India to Africa) in the winter (between October and April). 

 

리스본에서 인도 서남단에 가는 기간이 6개월이 걸려. 오는 길도 같고. 바람을 잘 타야해.

인도양의 몬순.이 5월에서 9월사이에 서풍이 불고. 이 바람타서 인도 가고. 10월에서 4월 사이에 동풍이 불어. 이바람 타고 복귀를 하는거야. 인도에서 출발은 대체 연초에 해서 저바람타고 아프리카지나서리 대게 칠팔월에 리스본에 와. 리스본은 저들이 오기 전에 출발해서 삼사월에 출발해서 팔구월에 인도엘 닿은거야. 피드백이 한텀 늦어 이게. 긴급 연락선이나 저걸 거스르고 단독으로 다녀오는 거고. 

 

For a long time after its discovery by Vasco da Gama, the sea route to India via the Cape of Good Hope was dominated by the Portuguese India armada – the annual fleet dispatched from Portugal to India. Between 1497 and 1650, there were 1033 departures of ships at Lisbon for the Carreira da Índia ("India Run").[1]

 

바스코 다가마 1497-99 가 첫번째야. 아르마다.야 군함을 몰고 간거야. 2차로 가는게 바로 다음해야. 서기 1500년. 이후로 1650년 까지 150년 동안. 평균 일이년에 한번 꼴해서 100여번 간거야 저길.  정확한 숫자는 니덜이 뒤져보던가 말던가. 저때 총 1033척의 배들이 다녀온걸로 보는거지.

 

The size of the armada varied, from enormous fleets of twenty-something ships, to small fleets of only four or five. This changed over time. In the first decade (1500–1510), when the Portuguese were establishing themselves in India, the armadas averaged around 15 ships per year. 

 

한번 갈때마다 몇 척이 갔을까. 어떨땐 너댓개.가 가기도 하고. 처음엔 대규모로 가는겨. 평균 15척으로 본대. 초기 십년 동안. 이게 점점 가는 배가 줄어. 처음엔 무서워서 대규모로 전쟁 장비 갖춰서 가는거고. 그러다 규모가 주는거야 상선 위주에 전함 한두대 붙이는거지.

 

지중해.는 이탈리아 반도에서 스페인 반도 해변으로. 배로 삼사일일..꺼야 이게. 행군하면 보름정도 일꺼고. 지중해 동서 끝에서 끝으론 일주일될까. 해서 삼각 돛으로 바람 변덕 활용하며 갤리선에 노꾼들 붙여서리 걍 자기들 바다 라 이름짓고 동네 장터 다니듯 가는겨. 헌데 저긴 한번 가면 6개월이야. 베네치아가 다니덜 뱃길과는 달라 이게. 이걸 주도한게 포르투갈이야. 배를 개조하고 돛을 활용하고. 노 대신에 돛이야. 카라발라. 캐럭선. 을 만들고. 전함용으로 갤리온.을 만드는겨 스페인 포르투갈이. 
점점 베네치아.와 제노바.는 힘이 빠지는겨. 재료만 제공하고 역사에. 안타까운거지. 


쟤들 역사를 보면. 서로가 서로의 재료가 되면서 먼가 진보되는 게 보이걸랑.

이 조선 땅바닥은 말야. 인류에 전혀 보탠게 없어. 더하기 해준게 없어. 이 조선 들은 정말 개 들이야 이게. 여전한겨 . 여전히 이념 놀이에 환장하고 자빠졌으니. 여긴 말야. 인간이 없는 땅바닥이야. 그래서 존댓말을 강요하고 예의 을 하는거걸랑. 대대로 윗자리에 서면서. 개 들이란걸 무의식이 알아. 살아남으려면 존대와 유교예의인거야. 이게 칠백년째 접어드는겨. 아 끔찍한거지. 게르만애들은 자기들 분수 주제 안게 로마 만나고 사백년이 걸렸는데. 이 조선은 더구나 끔찍한 조폭 주원장이 벤치마킹이 되었으니.

 

Departure of fleet for the Indies from Lisbon harbor, by Theodor de Bry, 1592


리스본 항구에서 인도로 출발하는 함선들. 1592년. 테오도르 드 브뤼. 벨기에 리에주 출신 

Theodor de Bry (also Theodorus de Bry) (1528 – 27 March 1598) was a [Belgian] engravergoldsmitheditor and publisher, famous for his depictions of early European expeditions to the Americas

 

프로테스탄트여서리. 쫓겨나. 리에주가 꼴통 카톨릭이야. 부르고뉴랑 전쟁도 하고. 프랑크푸르트에 정착해. 여긴 헤쎄걸랑. 조각가 세공가 편집자 출판업자. 초기 아메리카와 인도행을 묘사한 사람. 저때랑 조선이랑 당시를 비교가 가능하까. 1960년에도 저런 모양이 이땅바닥에 이썬나. 참 한심한겨 이 조선들때문에. 여전히 저따위 시대를 그리워하며 위대함니당 대고 이념놀이에 환장하고 이 들 진짜.

 

 

저런 제국주의 나뻐유. 인도 아메리카 다들 평안하게 사는데 와서리 다 죽였슈. 그 아름답다는 몬테주마의 아즈텍은 연간 만명 신전에 태워죽인단다. 조선은 여전히 적폐놀이로 사람들 찢어죽이고. 허균이 저 시대 지나고서다. 역모다 너 . 나 아뉴. 그걸 억지로 팔 붙들고 서명을 시키. 싸인을 하게. 그리고 찢어죽여 거리에 걸어놔. 저게 1600년대여 저게. 아 끔찍한 야만 들 조선 .

 

 

왜 우리네끼리 우리민족끼리 적폐놀이 함서 사람들 찢어죽이면서 재미께 사는데 제국주의 양키때메 이게 먼일인감. 똑같아 이따위 말이. 중남미 들이나 이후 막부들이나 양이 대는 양반들이나. 이 대갈 구조가 똑같애 이 들은.

 

 

.

 

포르투갈. 참 애정이 스미는데. 

 

전체 면적이 9만제곱키로 쫌 넘어. 한국보다 짝아. 

 

 

The word Portugal derives from the Roman-Celtic place name Portus Cale.[32] Portus, the Latin word for port or harbour, Cala or Cailleach was the name of a Celtic goddess - in Scotland she is known as Beira

 

 

 

포르투스 케일. 케일의 항구. 케일이. 카라. 또는 칼리크. 스콧의 베이라. 여신이야. 날시의 여신. 겨울여신. 이 여신의 항구 란 거지.

 

즉 태생부터가. 바다야 여긴. 

 

 

1317년에 데니스.가 해군을 창설하고. 백년지나서리 헨리 네비게이터.가 아빠 주앙1세의 우산아래서 해외 탐사를 시작해. 아빠 주앙1세가 남단 알그라비.를 헨리에게 맡겨. 여기서 헨리 형 페드로가 주는 유럽의 정보들을 취합해서 모든 기획을 해. 이 헨리의 시작이 포르투갈 서남단 끝이야. 

 

라고스. 왼쪽 끝 곶. 케이프.가 확대하면 두 뿔이야. 가장 왼쪽이 성조르지 곶. 이고 다른 하나가 사그리스. Sarges. 이 사그리스.가 헨리가 만든 마을이야 이때. 여기서 시작하는거야.

 

 

백년전의 데니스.가 위대한겨. 포르투갈의 최초의 대학을 이 데니스.가 리스본에 세운거야. 

The first Portuguese university was established in Lisbon between 1288 and 1290, when Dinis I promulgated the letter Scientiae thesaurus mirabili, granting several privileges to the students of the studium generale in Lisbon, proving that it was already founded on that date.

 

중세의 스투디움 게네랄레. 리베랄리스 아르스. 자유로운 학문 7개를 세개 네개 로 묶어 배워 중세에. 트리비움 쿼드리비움. 문법 논리 수사학. 수학 지리 음악 천문. 여기에 신학 법학 의학.에서 하나를 또한 이수해야해. 

 

이 대학 수준이. 조선의 성균관의 커리큘럼과 비교가 되냐 말이지. 위대한 조선의 정신문명. 미친 개 하는거지. 

 

데니스.가 저걸 세워 또한. 늦은편이야 포르투갈은. 저 1290년이. 저게 지금의 리스본 대학에. 코잉브리 대학이야. 헨리가 수집한 데이타들이 리스본대학에 다 들어가.

 

 

헨리 네비게이터.가 발판을 마련하고 죽고. 1460년. 이후 바스코 다 가마.가 1497-99년. 40년 후에 드뎌 간겨. 이때는 마누엘1세야. 헨리 죽고. 그 조카 아폰수5세가 계속 킹하다가. 아들이 주앙2세. 이사람 아들이 말타다가 죽어. 마누엘1세.는 사촌이야. 할배가 같은 두아르츠. 에드워드야. 두아르츠.의 첫째 아들이 아폰수 5세고. 차남이 비제우 공작 페르난도. 마누엘의 아빠야. 

 

비제우 Viseu 공작.은 헨리.가 시작한 자리야. 헨리가 자식없이 죽어서 이 자리가 첫째형의 둘째 페르난도에게 간겨. 

 

이들을 다 인판테. 타이틀 주는데. 

 

Infante (

Spanish: 

[iɱˈfante]

Portuguese: 

[ĩˈfɐ̃t(ɨ)]f. infanta), also anglicised as Infant or translated as Prince, is the title and rank given in the Iberian kingdoms of Spain (including the predecessor kingdoms of AragonCastileNavarre and León), and Portugal, to the sons and daughters (infantas) of the king, sometimes with the exception of the heir apparent to the throne who usually bears a unique princely or ducal title.[1]

 

스페인어 인판테. 포르투갈어 잉팡치. 이게 영어권에서 프린스.야. 프랑스는 도팽.이고. 제1후계자 를 도팽 하지만. 이 이베리아 쪽은 후계자격있으면 다 이 잉팡치.를 붙여. 

 

 

네비게이터. 란건. 네비게이트. 의 네비.가 배.야 

 

Origin

Late 16th century (in the sense ‘travel in a ship’): from Latin navigat- ‘sailed’, from the verb navigare, from navis ‘ship’ + agere ‘drive’.

 

배타고 가는겨. 이를 위에서 기획하는거고. 바다의 네비가 지금 육지에서 쓰는거고.

 

.

 

마누엘.이 결국 헨리.를 이은겨. 헨리 네비게이터.는 작은 할아버지야. 비제우 공작 자리를 얘가 받은겨. 

 

이 마누엘때 바스코 다 가마. 가 인도를 다녀 와. 이사람이 26년을 재임해. 새로운 와꾸는 마누엘.이 짠거야. 방계.라 핏줄이 약간 달라. 헨리가 주도한 걸 지워. 헨리가 만든 그리스도 기사단.의 힘을 빼고 자기 왕조의 산티아고 기사단에 힘을 실어. 바스코 다가마.도 산티아고 로 바꾸는겨 그래서. 저 헨리의 그리스도 기사단.의 카사.가 힘을 잃는겨. 

 

이 마누엘이 와꾸를 다시 짜. 그리고 만든 게 인도 카사. 

Casa da Índia (

Portuguese pronunciation: 

[ˈkazɐ dɐ ˈĩdiɐ]India House) was the Portuguese organization that managed all overseas territories during the heyday of the Portuguese Empire in the 16th century. It was both the central authority for managing all aspects of overseas trade, the central shipment point and clearing house. As an economic institution, it worked like a feitoria(factory, trading post),[1] being the most important economic institution in Portugal of the time. It was located at the Ribeira Palace, the royal palace in Terreiro do Paço square (modern Praça do Comércio), in Lisbon.

 

카자 다 인쟈. 인도의 집. 스페인어 카사. 

 

As early as 1434 the Casa de Ceuta was founded in Lisbon, but it was not very successful because the Muslim merchants diverted the trade routes from Ceuta to other places. Around 1443 in Lagos, Algarve, the Casa de Arguim and Casa da Guiné, were established to administer Prince Henry the Navigator's monopoly on African trade - essentially a set of sheds, warehouses and customs offices, dedicated to outfitting ships, hiring captains and crews, handing out trading licenses, receiving and selling goods and collecting dues. After the death of Henry the Navigator in 1460, both houses were moved by King Afonso V of Portugal from Lagos to Lisbon.

The ascension of King John II of Portugal in 1481 revived the royal interest in African trade. In 1482, upon erecting the fortress of São Jorge da Mina to access the Akangoldfields and markets,[2] John II overhauled the old houses and organized the system into two new institutions in Lisbon - the royal trading house, the Casa da Mina e Tratos de Guiné, focused on commercial aspects of African trade (goods, licenses, dues), and the separate royal naval arsenal, the Armazém da Guiné, to handle nautical matters (ship construction, nautical supplies, hiring of crews, etc.) In 1486, after the opening of contact with Benin, John II established the Casa de Escravos, as a distinct slave-trading department of the Casa da Mina.

With the discovery of a sea route to India by Vasco da Gama in 1497-99, the spice trade became a new and important activity of the royal trading house, and the old Casawas renamed Casa da Índia e da Guiné (the first written reference to a Casa da Índia was in a royal letter dated 1501).

 

헨리가 만든 카자.를 이름을 바꾸고 그 주도권을 이 마누엘이 갖고 온거야. 명의를 완전히 포르투갈 킹.으로 갖고와서 킹이 주도하는거야. 

 

이전에 헨리가. 세우타 점령 1415이후에 세우타 카자.를 세운겨. 라고스.에 아르귕 카자. 기니 가자.를 세워. 아프리카 교역에 관한 본부야 여기가. 관세. 물류. 서류작업. 선박 루팅. 선장과 선원 고용.을 이 리스본.에서 하는거야. 헨리 가 주도해.  헨리가 죽고서 바로 조카 아폰수5세가 리스본으로 옮기는겨. 주앙2세가 또 시스템을 바꿔. 다른 카자들을 만들고. 

 

이걸 방계인 마누엘.이 인디아 카자.와 기니 카자.로 다시 세팅하고. 기니 카자.는 아프리카를 맡기면서 떼어 내는거야. 

 

 

그리고 킹이 완전히 이걸 주도한거야. 선박 스케줄에서 고용. 회계. 선박 수급. 제조나 구입. 모든 걸 킹이 다 하는거야. 성질이 바뀐겨. 헨리가 있을땐 킹의 간섭이 적었걸랑. 이걸 킹덤 차원에서 주도를 해. 그러면서. 아르마다.라는 이름으로 가는거야. 이 중심은 해군이야. 상선들이 여기에 끼는거야.

 

 

São Jorge Castle (PortugueseCastelo de São Jorge

Portuguese pronunciation: 

[kɐʃˈtɛlu dɨ sɐ̃w̃ ˈʒɔɾʒ(ɨ)]; Saint George Castle) is a Moorish castle occupying a commanding hilltop overlooking the historic centre of the Portuguese city of Lisbon and Tagus River

 

Ribeira Palace (

Portuguese pronunciation: 

[ʀiˈbɐi̯ɾɐ]PortuguesePaço da Ribeira) was the main residence of the Kings of Portugal, in Lisbon, for around 250 years. Its construction was ordered by King Manuel I of Portugalwhen he found the Royal Alcáçova of São Jorge unsuitable.

 

포르투갈.이 1100년 지나면서 리스본을 무어족에게서 뺏을때 수도 성.이 상조르지 성.이야. 이건 언덕 꼭대기에 있어. 이걸 뺏고 포르투갈은 저 상조르지 성에서 킹들이 산거야. 4백년을 산겨. 그러다가 마누엘1세가. 적통이 아니걸랑. 이전껄 바꾸는겨. 옮겨 성을. 강변으로. 이게 파소 다 히베이라. 리베리아 궁전이야. 여기에 저 인디아 카자.를 넣는겨. 카자.가 궁전 안에 있어. 이름만 카자 이지 이건 킹덤이 시작이고 끝이야 이건. 

 

 

이게 포르투갈.이 실패한겨. 영국과 네덜란드.는 컴퍼니.로 저걸 하는거야. 

 

 

세상의 중심은. 문명의 원동기 모터.는 컴퍼니야. 이건 고대 수천년 이전 부터의 일관된 기본 상식이야 이게. 

 

 

어떤 개 가. 누군지 몰겄는데.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간거 같다. 참 개소리도 저따위 개소리가 없어.

 

일단 세상을 말야. 권력. 이란 단어를 꺼내고. 이 권력이 누구에게 가고 오고.로 보고. 시장. 이란 마켓을 저 권력 이동의 한 주체로 보는 시선. 

 

 

 

후진겨 저게. 이념에 미친 들이. 권력 이란 단어 좋아하고. 이걸 민.들에게 줘야한다 대고. 저건 완전한 망상놀이야. 세상과 우주는 그따위 설계도로 움직인게 아냐 이 개새꺄. 

 

 

역사 공부를 좀 해. 이 개새꺄. 얼마나 개 무식하믄 저따위 소리를 해쳐먹냐 그래. 

 

 

권력이 정치권력을 말하냐? 정치권력 이란게 시장과 대치되는 단위냐? 정치권력과 시장권력이 싸웠냐 역사가? 그래서 프롤레타리아가 정치권력을 뺏아서리 부르조아 가 쥔 정치경제권력을 뺏아야 하는거냐.? 그럼 새꺄 민들이 배떼기 불러지고 행복해지는거냐? 정치권력은 시장권력을 감시하고 눈부라리고 통제하고 임금 정해주고 하는거냐? 

 

저 마르크스 사관이 개 허섭한걸 저걸 신주단지 모시듯 이니. 얼마나 단순한 개허섭한 논리냐 저게. 저긴 생각이 필요없어. 쉬워. 걍 감정만 분노만 일으키면 돼. 한심한겨.

 

 

정치는 고대부터. 수천년간. 시장을 위해서 있어왔어. 

 

시장을 막은 정치는 그 땅의 인간들을 몰살을 시켜왔어.

 

이게 다야. 이 개 새꺄. 

 

.

 

헨리의 카자.는 킹이 주도하는게 아냐. 이게 킹이 갖고 가면서. 이름만 카자 그대로 하다가. 얘들이 파산이 나는겨. 대체 독점해서 갖고온 그 많은 금과은 덩어리들. 인도에서 갖고온 값비싼 스파이스들이 대체 어디간겨. 

 

부랴부랴 펀딩을 받어 쟤들이. 컴퍼니를 따라가는겨. 이때부터 죽도밥도 안된겨. 

 

.

 

저 영국과 네덜란드.는 엄청난 애들이야. 얘들이 세상을 주도햇던 이유야. 영국은 엄청난 나라야 특히나. 얘들이 문명사의 본질을 꿰고 있걸랑. 고대이집트 역사. 고대 근동사도 제일 냉정하게 깊게 보는 애들도 영국 애들이야. 

 

.


Vila do Bispo (

Portuguese pronunciation: 

[ˈvila ðu ˈβiʃpu]) is a municipality (concelho) in the Portuguese Algarve. The population in 2011 was 5,258,[1] in an area of 179.06 km2.[2]

 

빌라 도 비스파. 비스파 마을. 여기가 저 사그리스.를 전초기지로 만든 헨리 네비게이터.가 개척한 도시들이야. 서남단 반도 끝에. 헨리는 여기 있었던거야. 여기서 인물들을 모은겨.

 

Another important centre was founded on 19 September 1460 by Infante Henry the Navigator, where he wrote: "...I order the construction of a town at the other cape before the cape of Sagres, from the west...that I named town of the Infante". This interpretation has been controversial, owing to the particular reference to "before", which historians have difficulty in realizing. 

 

헨리의 기록에. 저길 비포. 했다고 이전에 만들다.로 헷갈린다는거지 역사가들이. 저건 시간의 비포가 아니라 장소의 비포야. 그 부근에 만들었다는거야.

 

Sagres Point (Ponta de Sagres, 

Portuguese pronunciation: 

[ˈsaɣɾɨʃ], from the Latin Promontorium Sacrum ‘Holy Promontory’) is a windswept shelf-like promontory located in the southwest Algarve region of southern Portugal.

 

저 지역을 사그리스 포인트. 라고 해. 

 

The School of Sagres, also called Court of Sagres (in Portuguese Escola de Sagres)[1] according to some historians was a group of scientific Portuguese personalities and techniques related to ocean navigation of the fifteenth century, formed around the infant Enrique, nicknamed the Navigator in Sagres near Cape St. Vincent, the southwestern end of the Iberian Peninsula, in the Algarve.

 

저기서 헨리.가 과학을 다 모은겨 유럽대륙의. 형 페드로의 정보도 갖고와. 사람들도 스카웃을 하는겨. 에스콜라 지 사그리스. 사그리스 학파. 라고 명명해줘. 지금 문명은 이들이 만든겨. 

 

Romantic view[edit]

In the nineteenth century began to spread a version of the biography of Prince Henry whereby he would have installed his court in Sagres in 1418, shortly after the capture of Ceuta by the Portuguese. There would be formed around him the best of "science and navigation" and building a shipyard and a palace with the first observatory in Portugal.[1] They even wrote that Sagres represented modern refounding "the systematic study of applied science" in Christendom".[1] Others nuanced that, more than a nautical school in the modern concept of the word, Sagres was a meeting place for sailors and scientists to exchange information and techniques, designing maps, shipbuilding and organize expeditions.

The diverse religious status (Jews, Muslims, Christians) of the members of the alleged Sagres school, and even the ability to remotely connect them with the Templarsgiven the fact that Prince Henry was the commander of the Order of Christ, have increased the romantic halo that sometimes appears.


소세키가 해석한 낭만.적인 로마적인 관점. 로마는 낭만이야. 소세키한테 낭만이라 번역한걸 감사하게 생각하고 써라. 번역 못하는 무시기 덜아. 그러면서 일본 적폐 개. 
헨리가 사그리스.에서. 세우타 점령한 후에 본격적인 기반을 다져. 과학과 항해를 위한 모든 자료를 모으고. 야드도 만들어. 천문대도 만들어. 선원들 과학자들이 모여서 정보 기술 지도제작 선박제조 탐사조직구성 을 논의해. 유대인 무슬림 그리스도인 안따지고 다 모여. 이것때문에 포르투갈이 업적을 남기다.

라는 건 소설이다 라고 주장하는 파가 있는겨.

Critical view[edit]

According to the critical view, the Portuguese learned navigation in a practical way, on the decks of the ships,[6] and not being able to find archaeological and documentary support for the "Escola de Sagres", they consider it a myth of Portuguese history.[2][3][4][5]

 

걍 선원들이 걍 배 데크 에서 걍 따로따로 이리 가보까 저리가보까 하며 경험적으로 지들끼리 서로들 대보다가 우연하게 건진거지 무슨 사그리스 학파의 전문적 도움을 받니. 저따위는 포르투갈 띄우는 신화일 뿐이야.

 

 

저게. 문명 허섭한 중남미 애들 동양빠닥애들 슬라브 애들 무슬림 애들의 말이걸랑. 인간 문명사.를 모두가 우연인줄 알아. 그 수천년 이음의 과정에서의 인과의 결과물인걸 부정하는 애들이야. 얘들은. 아는게 없어. 그리곤 자기들 땅 애들의 역사가 위대하다 하면서리 자기들 똥은 비단으로 덮어.

 

 

Jehudà Cresques (

Catalan pronunciation: 

[ʒəuˈða ˈkɾeskəs], 1360-1410), also known as Jafudà Cresques, Jaume Riba, and Cresques lo Juheu ("Cresques the Jew"),[1] was a converso cartographer in the early 15th century.

 

저우다 크레스커스. 그리스도로 개종한 유대인이야. 15세기. 지도제작자.야 마요르카 파야. 마요르카 킹덤이 있었어. 마요르카.는 스페인땅 오른쪽의 섬이야. 스페인애들의 바다기술은 이 마요르카 섬에서 주도를 한거야. 발렌시아나 카탈로니아 애들이 이탈리아로 가는건 이 마요르카 사람들의 힘으로 가는겨. 해양지식에서 당시 베네치아에 못지 않아. 특히나 여기 유대인들이 많은겨. 섬에서 오히려 유대인 무슬림들이랑 그리스도랑 잘 어울려. 시칠리아 섬이 그랬어. 

 

마요르카.는 발렌시아가 아라곤 킹덤을 결혼으로 다이너스티 할때. 여기 방계가 독자적 킹덤을 세워. 그리곤 트라스타마라에게 발렌시아가 넘어갈때 이 킹덤을 바쌀로 만들어. 

 

헨리가 이사람을 초빙하는거야 사그리스로. 

 

It has long been believed that Jehuda Cresques is the same person as 'Mestre Jacome', a Majorcan cartographer induced by the Portuguese prince Henry the Navigator to move to Portugal in the 1420s to train Portuguese map-makers in Majorcan-style cartography.[2] 'Jacome of Majorca' was described as the head of Henry's legendary observatory and "school" at Sagres by Samuel Purchas, though the existence of the alleged school has long been discounted.[3] The identification of "Mestre Jacome" with Jehuda Cresques" is principally due to the Catalan historian Gonzalo de Reparaz (1930).[4] However, more recent research argues that Jehuda Cresques was already dead by 1410,[5]and "Mestre Jacome" must have been someone else, identity still indeterminate; Majorca had many skilled Jewish cartographers.

 

이 사람이 강제 개종당한후 이름을 바꿔. 헨리에게로 가. 그사람이 이사람이냐 논쟁이 많다. 허나 어쨋거나 헨리의 사그리스 학파에 마요르카 스타일의 지도제작이 드러난건 분명하다.

 

Duarte Pacheco Pereira (

European Portuguese: 

[duˈaɾt(ɨ) pɐˈʃeku p(ɨ)ˈɾejrɐ]; c. 1460 – 1533),[1] called the Portuguese Achilles(Aquiles Lusitano) by the poet Camões,[2][3] was a Portuguese sea captain, soldier, explorer and cartographerHe travelled particularly in the central Atlantic Ocean west of the Cape Verde islands, along the coast of West Africa and to India. His accomplishments in strategic warfare, exploration, mathematics and astronomy were of an exceptional level.

 

두아르치 파셰코 페레이라. 헨리가 죽고서 태어난 사람. 선장 군인 탐험가 지도제작자. 카보메르데 서안을 가고 인도에도 가다. 전쟁전술 탐험 과학 천문학에서의 수준은 압도적인 사람. 

 

이사람이 말야. 그 직전의 이야기를 남겨.

 

"... he came from the island of Majorca, a master Jacome, a very learned man in the art of sailing, who worked and nautical instruments, and which cost him a great deal to bring to this kingdom to teach his science to the Portuguese officers of that master." [8]

 

마요르카.의 제이콤.이 저 유대인이야. 이 사람이 왔는데 항해술에 매우 밝았다. 항해 도구들도 밝고. 그를 포르투갈로 데려오는데 굉장한 돈을 썼다. 포르투갈 사람들에게 그의 학문을 가르쳐 달라고. 

 

João de Barros (

Portuguese pronunciation: 

[ʒuˈɐ̃w̃ dɨ ˈbaʁuʃ]) (1496 – 20 October 1570), called the Portuguese Livy, is one of the first great Portuguese historians, most famous for his Décadas da Ásia ("Decades of Asia"), a history of the Portuguese in India, Asia, and southeast Africa.

 

주앙 지 바호스. 헨리 직후의 포르투갈 역사가야. 아시아 시대. 저때 이야기를 쓴겨. 이 사람 이야기에 헨리 이야기가 나와.

 

 

저 사그리스 학파.라는 조직적인 기반이 있어서 포르투갈의 성과가 가능했던겨. 콜럼버스가 이걸 곁눈질을 하고. 저건 단지 낭만적인 관점이 아냐. 팩트야 팩트. 

 

Fernão Mendes Pinto (

Portuguese pronunciation: 

[fɨɾˈnɐ̃w̃ ˈmẽdɨʃ ˈpĩtu]; c.1509 – 8 July 1583) was a Portuguese explorer and writer. His voyages are recorded in Pilgrimage (Portuguese: Peregrinação) (1614), his autobiographical memoir. The historical accuracy of the work is debatable due to the many events which seem far fetched or at least exaggerated, earning him the nickname "Fernão Mentes Minto" (wordplay with the Portuguese verb mentir 'lie', meaning "Fernão, are you lying? I am lying."). Some aspects of the work can be verified, particularly through Pinto's service to the Portuguese Crown and by his association with Jesuit missionaries.

 

페르낭 멩지스 핀토. 

 

António da Mota was a Portuguese trader and explorer, who in 1543 became one of the first Europeans to set foot in Japan.

While traveling to Ningbo on a Chinese junk in 1543 (some sources say 1542), Mota and the rest of the crew were swept off course from a bad storm. Among the crew were around one hundred East Asians, and several Portuguese. The Portuguese included were Francisco Zeimoto, António Peixoto, and Mota himself. Fernão Mendes Pinto claimed that he was on the voyage as well, but this claim is unlikely due to the fact that he also claims he was (more accurately) in Burma at the same time. Driven from the storm, the ship lands on the island of Tanegashima on August/September 1543. António Mota and Francisco Zeimoto are officially the first Europeans on Japanese soil.[1] António Peixoto is not recorded that he landed, and presumably died at sea prior to the landing.

안토니오 다 모타. 다들 포르투갈 아르마다.로 간거야. 안토니오 모타.는 저장성 닝보에 가는길이야. 포르투갈 사람 세명.에 동아시아인 백여명.이 절강성 영파에 가다가 태풍만나서리 타네가시마. 종자도에 떨어진겨. 규슈 바로 아래야. 가고시마랑 가까와. 1543년. 아마 한명은 죽은듯. 안토니오 모타.와 페이쇼토.가 공식 기록이야 일본에 처음 간. 아키버스. 조총으로 번역되는걸 주는겨. 

 

뻥쟁이로 소문난 페르낭 핀토. 얜 귀족 핏줄인데 가난해. 어드래 이리저리해서 꼬마때부터 산티아고 기사단의 배를 탄겨. 배를 알다가 아르마다에 껴서리 다녀 인도까지. 이사람은 이걸 자서전으로 남겼어. 자기가 먼저 일본에 갔다는겨. 헌데 지 글엔 그때 버마에 있었으면서 먼 일본에 갔다하냐. 뻥쟁이로 잘 안믿어. 헌데 나중에 보니 다 뻥은 아냐. 어쨋거나 간거 같어. 그래도 공식 기록은 안토니오 모타와 페이쇼토.야. 

 

이 뻥쟁이 페르낭 핀토.가 그래도 일본 가고시마 가면서 무역을 한거야. 

 

Francis Xavier, S.J. (/ˈzviər, ˈzævi-/; born Francisco de Jasso y Azpilicueta; Latin Franciscus Xaverius; Basque: Frantzisko Xabierkoa; Spanish: Francisco Javier; 7 April 1506 – 3 December 1552), was a Navarrese Basque Roman Catholic missionary, who was a co-founder of the Society of Jesus.

프란시스 제이비어. 영어. 스판시스코 하비에르. 스페인어. 자비에르. 포르투갈어. 

 

자비에르 출신이야. 여긴 나바라 킹덤이야. 해서 xivier 바스크어로 사비에르. 하는겨. 이 제수이트. 라는 소사이어티 오브 지저스.는 이전 썰했는데 기엉날리가 없을텐데. 제수이트. 가 1540년에 승인이 된겨. 

On 15 August 1534, seven students met in a crypt beneath the Church of Saint Denis (now Saint Pierre de Montmartre), on the hill of Montmartre, overlooking Paris. They were Francis, Ignatius of Loyola, Alfonso Salmeron, Diego Laínez, Nicolás Bobadillafrom Spain, Peter Faber from Savoy, and Simão Rodrigues from Portugal. They made private vows of poverty, chastity, and obedience to the Pope, and also vowed to go to the Holy Land to convert infidels.[17][18] Francis began his study of theology in 1534 and was ordained on 24 June 1537.

 

1534년에 7명이 만난거야. 짱이 로욜라.의 이그나티우스. 스페인사람이야. 어릴때 코트에서 페이지보이. 여자는 메이드.이고 어릴때 코트에서 에티켓을 배우는겨 페이지와 메이드라는 직으로 심부름 하면서. 얘가 여기서 나이트 쉬벌리를 알게되고 기사가 되었다가 병원에서 그리스도가 찐하게 되서리 7명이 모여 걍 소꼽장난으로 만든겨 수도회를. 이때가 루터 벽보 1517년 지나고 농민전쟁에. 프랑스는 막 위그노들 티나오고. 아 카톨릭 지켜야돼. 다들 보믄 스페인 땅 애들이야 쟤들이. 아주 순수한? 애들이야 저 시절에. 세상 변한 줄 모르고. 이땅은 종교전쟁이 없어 끝까지. 오히려 산맥너머 카톨릭 지키러 가는 애들이야.  피레네 산맥의 방패막은 엄청난거야. 나바라.만 찔끔 프로테스탄트 하지만 미미한겨 이건.

 

로마 교황청은 쟤들이 감지덕지야. 남들은 다 프로테스탄트 인데. 아 바로 승인해줘. 저 7명이 로마 카톨릭의 천사들이야. 포르투갈 킹이 이때 마누엘의 아들 주앙3세. 스페인과 같은 카톨릭 수호자야 포르투갈은. 아 우리가 아시아를 뚫었는데 로마여 저길 선교해야해. 이사람이 부른겨. 이그나티우스.는 딴애들을 보내려했어. 헌데 아프고 어쩌고. 해서리 사비에르.가 가는거야. 이때 일본에 동행하는 인간이. 저 뻥쟁이 핀토.

 

Francis Xavier left Lisbon on 7 April 1541, his thirty-fifth birthday, along with two other Jesuits and the new viceroy Martim Afonso de Sousa, on board the Santiago.[29] 

 

사비에르.가 리스본을 떠나는게 1541년 4월. 35세 생일날. 

 

In Malacca in December 1547, Francis Xavier met a Japanese man named Anjirō.[36] Anjirō had heard of Francis in 1545 and had travelled from Kagoshima to Malacca to meet him

 

Francis Xavier reached Japan on 27 July 1549, with Anjiro and three other Jesuits, but he was not permitted to enter any port his ship arrived at until 15 August,[38] 

 

島津 貴久(しまづ たかひさ)は、戦国時代の武将。薩摩守護大名戦国大名。島津氏の第15代当主。

 
포르투갈의 팩토리.인 말레이지아 반도 말라카. 인도의 고아. 에서 선교를 하는거야. 리스본 떠난지 8년 만에 일본 가고시마.에 도착한겨.
 
일본 가기전에. 그 전년도에 안지로. 아마 야지로.라는 이름을 저리 쓴걸로 보이는데. 이사람이 일본에서 살인을 하고서 포르투갈배를 타고 도망을 가. 안토니오 모타.가 조총준게 3년전이야. 이제 포르투갈애들이 뻔질나게 오는겨 여길. 사비에르.가 일본가기전에 이 안지로.를 만나. 여기서 일본에 대한 풍속이나 습성을 다 듣는겨. 그리고서 간거야 안지로 포함 일본인 세명이랑. 이 안지로.가 일본에서 최초로 세례를 받은 인물이 돼. 헌데 일본사에선 누군지 몰라 전혀. 이 안지로는 그후 해적이 되서 중국애들한테 죽은걸로 보여.
 
저때 저 뻥쟁이 페르낭 핀토.가 안지로.를 자기가 델꼬 왔다. 사비에르가 가고시마 갈때 자기도 갔다 하걸랑. 헌데 연도랑 다 달라. 이것도 뻥같어 보믄. 어쨋거나 저 사비에르.가 일본가는 저런 이야기를 얘가 직접 본건지 줘 들은건지 제수이트에 편지를 써 보낸겨. 
 
In late August 1552, the Santa Cruz reached the Chinese island of Shangchuan, 14 km away from the southern coast of mainland China, near Taishan, Guangdong, 200 km south-west of what later became Hong Kong.
 
사비에르.는 일본 도착하고. 3년후에 중국 광동성 아래 상천섬에서 죽어. 여기도 포르투갈 섬이야 당시. 사비에르는 못간겨 묻힌곳은 옮기고 옮겨서 인도 고아.goa
 
뻥쟁이 핀토.가 이후에 사비에르 죽고. 제수이트에 가입을 해. 다음 선교사와 동행해서 일본에도 가. 자기 재산을 제수이트에 기부도 해. 헌데 또 탈퇴하고. 별 일 다 겪고서리 귀국을 하는겨. 이사람이 인도있을때 제수이트에 보낸 편지가 출간되서리 이미 영웅이 되었어. 그 덕에 돈 벌어 농장도 사. 자기 자서전을 써. 헌데 아주 파란만장한데. 하튼 싕기한거지. 사비에르 이야긴 이사람이 또한 알려준겨. 
 
사비에르.가 일본에 1549년. 조총 준해가 15433년.다 연결이 된겨. 이때 만난 슈고다이묘가 시마즈 타카히사. 
 
사쓰마의 시마즈 가문이 가마쿠라 막부 부터 저기 영주였걸랑. 얘들이 메이지유신까지 7백년이야 저 사쓰마의 시마즈.가. 이 사쓰마의 시마즈.가 세키가하라 때 본진을 뚫고 도망오고 절치부심할때 바닥에서 배우는게 이전에 만난 이 포르투갈 애들이야. 
 
이 시마즈 가문.이 메이지유신을 만든거야. 지금 일본은 이 시마즈 가문이 만든겨.
 
1534년.이 오다 노부나가 태어나는 해야. 사비에르의 7명이 모인해야. 이후 조총 받은게 1543년. 사비에르가 1549년. 이젠 전혀 다른 이야기가 일본에서 벌어져. 카톨릭의 사비에르는 포르투갈의 후원으로 온거야. 그다음 스페인에. 이젠 프로테스탄트의 네덜란드가 오고 앵글리카니즘의 잉글랜드가 와. 이걸 저 세인간 시절에 버글버글 항구들이 외국인애들 배로 가득차. 오다 노부나가.는 흑인 용병을 경호원으로 델꼬 댕겨. 이 인간은 독특한걸 좋아하걸랑.
 
 
조선이랑 말야. 차원이 달라 이게. 조선에 오면. 못 나가. 박연과 하멜이 만나서 엉엉 울어. 그게 조선이야.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