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enna in 1493
The Austrian–Hungarian War was a military conflict between the Kingdom of Hungary under Mathias Corvinus and the HabsburgArchduchy of Austria under Frederick V (also Holy Roman Emperoras Frederick III). The war lasted from 1477 to 1488 and resulted in significant gains for Matthias, which humiliated Frederick, but which were reversed upon Matthias' sudden death in 1490.
오스트리아 헝가리전쟁.
from 1477 to 1488. 헝가리 마티아스.와 오스트리아 프리드리히.
보헤미안 전쟁 10년 직후에 터진겨. 마티아스.가 보헤미아의 후사이트 킹이랑 싸우다가. 후사이트 킹 죽고 야기에워의 블라디슬라프.가 보헤미아킹 이어받아서리 다시 싸우다가 휴전한겨.
휴전한 이유가 보헤미아 아래 오스트리아.걸랑. 이것도 역학관계를 보면 재밌는겨.
Frederick III (21 September 1415 – 19 August 1493) was Holy Roman Emperor from 1452 until his death.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대공작. 1457
Matthias Corvinus, also called Matthias I (Hungarian: Hunyadi Mátyás, Croatian: Matija Korvin, Romanian: Matei Corvin, Slovak: Matej Korvín, Czech: Matyáš Korvín; 23 February 1443 – 6 April 1490), was King of Hungary and Croatia from 1458 to 14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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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의 프리드리히 3세 황제야. 합스부르크야. 1250년 시칠리아 섬의 킹. 호헨슈타이펜 가문의 프리드리히2세가 죽고. 신성로마황제자리가 비는 대공위시대 후에 룩셈부르크 가문이 세명 황제하고서리. 마지막 지기스문트.가 보헤미아 킹 겸하면서 후사이트전쟁 겪고 죽어. 그다음이 이 합스부르크.의 프리드리히 3세 황제야.
이제 합스부르크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온겨. 1452년 부터. 나폴레옹이 끝내는 때까지 이 합스부르크야 350년이. 그리고 이 황제관을 이유로 오스트리아 제국이 이어서리 백년이야. 여기 황제도 이 합스부르크야. 로렌. 이전 고젤로의 아들 곳프리.가 로렌 땅 다 달라고 깽판칠때 진압한 메스 백작 Metz 아달베르.가 받은 고지대 로렌.을 받으면서 이게 정식 로렌 더치. 공작령이 되고. 이게 로렌 가문이 된겨. 아달베르의 방계가문이야. 이 로렌과 합해서리 뒤의 황제를 합스부르크와 같이해.
할때 합스부르크의 본격 시작이 저 프리드리히3세 황제야. 루돌프.가 오스트리아 땅을 헝가리 도움받아서리 뺏으면서 이후 2백년 가까이만에 등장하는겨 본격적으로. 종교전쟁은 얘의 손자 카를5세 동생인 페르디난트1세의 손자 2세 에서 터지는겨. 이것도 시작은 보헤미아의 프라하야. 이 전초전이 또한 저 프리드리히 3세야. 이미 백년전에 시작한겨 저게.
이 시작은 또한. 이전 합스부르크의 알베르트1세야. 이사람이 헝가리의 루이 둘째딸 마리가 룩셈부르크의 지기스문트 랑 결혼하면서. 헝가리랑 보헤미아랑 묶였걸랑. 지기스문트가 죽고 이걸 이어받은게 알베르트1세야. 이사람이 오스만애들이랑 싸우다가 죽어. 황제관도 받을 차례였는데 못받고. 아들이 막 태어났어. 헝가리는 안된다 하고 야기에워 가문애들 킹으로 앉혔는데. 역시 이사람도 오스만애들이랑 싸우다가 죽어 바르나 전투. 해서 저 합스부르크 알베르트의 꼬마 아기가 보헤미아킹에 헝가리킹을 하는겨. 이걸 각각 섭정을 해. 보헤미아는 후사이트 사람이. 헝가리는 훈야디가문의 마티아스.
저 아기가 자라서 17세에 죽어. 혼자 다 커서 할만 할때 죽은겨. 이 자리가. 각각 섭정하던 이들이 차지를 해. 보헤미아는 후사이트 사람이. 헝가리는 훈야디의 마티아스가.
저때 신성로마황제는 프리드리히3세야. 합스부르크의.
마티아스.가 보헤미아의 후사이트 킹의 딸과 결혼해. 아들이 없어서리 저 킹이 죽으면 보헤미아까지 먹을라는거야. 헌데 이 시집혼 후사이트 딸이 죽어. 14살에. 마티아스의 기대가 사라진겨. 해서 후사이트.는 이단이다라는 걸 내걸고. 황제의 허락하에 보헤미아를 치러간겨 얘가. 자기 장인을 치는겨. 나폴리의 베아트리체와 재혼하고.
거의 다 먹었는데 프라하를 점령을 못했어. 그러는 와중에 장인이 죽고. 저길 야기에워 가문이 받아서리 대드는겨.
이때 저 전쟁을 허가한 프리드리히3세.가 가만보니 열받는겨. 헝가리나 보헤미아나 자기들 가문꺼였걸랑 알베르트1세 때문에. 얘가 사위야 지기스문트와 헝가리마리의. 저 핏줄 끊겼다고 섭정하던 애들이 지들끼리 전쟁하는거걸랑. 가만보니 마티아스.가 쎄. 저러다간 마티아스가 헝가리에 보헤미아 까지 처먹는겨.
보헤미아.의 후사이트 킹이 죽고. 야기에워 가문이 킹이 되는걸. 그래서 황제 입장에서 허가를 하는겨. 반 마티아스에 서는겨 저 합스부르크의 황제가. 물론 저 알베르트의 자식이 죽고 황제 자리에서 오스트리아 대공작.도 받은 상태야.
해서. 마티아스가. 야기에워 와 협상으로 끝내고서. 방향을 틀어서리 비엔나로 가는겨.
- Siege of Hainburg
- Battle of Leitzersdorf
- Siege of Vienna (1485)
- Siege of Retz
- Siege of Wiener Neustadt
저 오스트리아 헝가리 전쟁을 11년간 볼때. 큰 전투가 다섯개. 비엔나.가 목표야. 부다페스트에서 고개 들어서리 약간 서북쪽에 있는겨. 하이네부르크. 라이체르스도르프. 다 비엔나 부근이야. 저
이전 오스트리아 지도에서. 스위스 까지 뻗은 길죽한게 튀롤. 바로 옆이 카린티아. 그리고 오른쪽 동그라미를 위에서 아래로. 오스트리아 스튀리아 카르니올라.
오스트리아 가 그랜드더치야. 나머진 걍 더치야. 다 오스트리아 대공작꺼야. 저 오스트리아 그랜드더치. 수도가 비엔나야. 여기를 저지대 오스트리아. 해. lower. 바로 아래 스튀리아 카린티아 카르니올라. 를 안쪽 오스트리아. inner.
잘쯔부르크.는 저 긴줄기에서 크게 오른쪽 퍼질때 고 모가지 위야. 여긴 대주교령이야. 교회들의 도시야 여긴. 이쪽 위를 고지대 오스트리아 해 upper. 튀롤 도 이 고지대 오스트리아.다 아니다. 지들끼리 해. 넘어가.
헝가리 마티아스 의 루트는 저 저지대와 안쪽 인너.야. 여기가 헝가리 접경이걸랑. 저기서 비엔나 부근부터 치고 내려오는거야.
마티아스가 저 비엔나를 점령을 해. 그리고 아래 인너 오스트리아까지 다 먹어 얘가. 음청난 인간이야. 오스만이 여긴 못먹었어. 2백년 후에 오스만은 여기서 패하고 점점 쇠락했걸랑.
저때 마티아스의 손에 오스트리아는 다 들어온겨. 오스트리아 대공작이자 신성로마황제 프리드리히3세는 걍 깨갱한겨.
저 비엔나 오스트리아 대공작령인 저지대 오스트리아를 다 정복하고. 휴전한겨.
아 헌데. 마티아스.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죽어. 나이 47세.
헝가리는 저때 끝난겨.
프리드리히3세.는 이미 나이가 80이 다 되어가. 고지대로 도망갔걸랑. 이미 쪽 다 팔리고. 협상당사자로 아들이 가는겨. 막시밀리안. 뒤의 황제가 돼.
마티아스.는 자식이 없었어. 시녀와의 사이에 어린아들.이 있는데. 귀족들이 얘를 옹립을 안하고. 보헤미아의 후사이트를 이은 야기에워.를 옹립하는겨. 이전 마티아스와 이어서리 싸운 킹. 블라디슬라프.
그리고서리. 마티아스가 재혼한 과부가 된 나폴리의 베아트리체.랑 야기에워의 블라디슬라프랑 다시 결혼시켜. 얜 이혼하고. 이여자도 재혼해서 왔었걸랑.
막시밀리안.이 저 야기에워 가문애랑 협상을 하는거야.
막시밀리안은 이미 로마의 킹. 칭호를 받았어 아부지로 부터. 이게 후계자 자리걸랑. 곧 아부지 죽으면 게르만 킹에 황제가 되는겨.
이 야기에워. 리투아니아 촌놈이걸랑 시작이. 루이 딸 들 때메 폴란드 킹에. 헝가리 킹에. 하다가 마티아스 때메 잠시 헝가리 킹 내려놨다가. 다시 헝가리 킹에. 보헤미아는 처음 킹. 이걸랑.
협상력이 오히려 말야. 패배한 합스부르크 의 막시밀리안에게 있는거야 저게.
더군다나. 마티아스.랑 싸웠던 야기에워읠 블라디슬라프. 는 저 마티아스가 웬수 중에 웬수걸랑. 마티아스 이전의 야기에워 같은 블라디슬라프1세. 바르나에서 죽은. 사람은 작은아부지야. 이 자리를 얘가 꿰차고. 보헤미아에서도 전쟁한 사이걸랑. 마티아스 한 짓이 싫어 얘눈엔.
그리고 게다가. 보헤미아는 첫 킹이야. 이 촌놈들이 말야. 얘가 요가일라.의 삼대야 끽해야. 보헤미아는 중원이걸랑 여긴. 헝가리 킹 마리 이후 2대째 자리잡고 보헤미아 막 중원인듯 시작이고. 아 저긴 그래도 신성로마황제야. 상대가 곧 황제 될 애야. 로마 킹이래 지금.
오히려 마티아스 이전으로 다 주는겨 오스트리아에게. 그리고 야기에워 자기가 죽고 후손 없으면 막시밀리안 니가 내 후계자 해라.
Vladislaus II, also known as Vladislav II, 1456 – 1516. 보헤미아 헝가리크로아티아 킹
Maximilian I (22 March 1459 – 12 January 1519) was Holy Roman Emperor from 1508 until his death.
나이도 세살 터울이야. 서로 형동생 하는거지.
1515 First Congress of Vienna they arranged two royal weddings of Vladislaus' daughter Anne with Maximilian's grandson Ferdinand and of Maximilian's granddaughter Mary with Louis II. The double wedding celebrated at St. Stephen's Cathedral decisively advanced the Habsburg succession agenda.
야기에워 딸과 막시밀리안 손자. 막시밀리안 손녀와 야기에워 아들.
십여년 후인 1515년에 비엔나에서 만나. 이때는 폴란드 리투아니아.의 야기에워 가문들도 다 오는겨. 이때 저 두 쌍을 결혼시켜. 야기에워에 자식이 큰딸. 작은 아들 단 둘이 있었걸랑. 얘들과 막시밀리언의 손자녀. 즉 미남왕 펠리페와 미친년 후안나. 이사벨라 여왕의 딸. 의 자식들.
Woodcut by Albrecht Dürer from the Triumphal Arch commemorating the double wedding at the First Congress of Vienna, on 22 July 1515. Anna's betrothed Ferdinand I(age 11) is not shown. From left to right: Maximilian I; Maximilian's granddaughter, Mary (age 9) marrying Vladislaus's son Louis (age 9); Vladislaus II; Vladislaus's daughter, Anna (age 12); and Vladislaus's brother, Sigismund I.
꼬마애들 두쌍이 같이 결혼한겨 저때. 9세에서 12세야 네명이.
저때부터. 야기에워가 받은 보헤미아와 헝가리.는 합스부르크께 된겨. 야기에워 아들과 결혼 마리.사이엔 아들이 없어. 저 페르디난트1세 황제되는 애가 여까지 다 먹어.
합스부르크가 야기에워랑 합치면서. 보헤미아 헝가리 뿐 아니라. 여기에 폴란드.와 이탈리아.가 쎄게 얽혀. 특히 사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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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튼 막시밀리안.이 중세의 협상의 최고 귀재였어. 짐이 명명해주는그야.
마티아스. 란 인물이 아까운겨 헝가리 입장에선.
Matthias Corvinus, also called Matthias I (Hungarian: Hunyadi Mátyás, Croatian: Matija Korvin, Romanian: Matei Corvin, Slovak: Matej Korvín, Czech: Matyáš Korvín; 23 February 1443 – 6 April 1490)
다시보면 말야. 이 마티아스.
쉼.
훈야디 가문. 신흥 귀족가문이었걸랑. 이들이 꼬마 합스부르크 애가 있을때 섭정을 하고. 이어서리 킹을 한건데. 조상이 왈라키안. 인듯 하면 루마니아 사람들이야.
타이틀이 르네상스 킹.
His marriage to Beatrice of Naples strengthened the influence of contemporaneous Italian art and scholarship,[224] and it was under his reign that Hungary became the first land outside Italy to embrace the Renaissance.[225] The earliest appearance of Renaissance style buildings and works outside Italy was in Hungary.[226][227] The Italian scholar Marsilio Ficino introduced Matthias to Plato's ideas of a philosopher-king uniting wisdom and strength in himself, which fascinated Matthias.[228]
나폴리의 베아트리체.와 재혼하면서. 이때 이탈리아에 눈을 떠.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대륙을 넘을때. 헝가리가 가장 최초 라는겨. 이 마티아스.가 이탈리아의 화가. 학자들을 스폰하는겨. 해서리 이탈리아 학자가 마티아스는 플라톤이 말한 철학자 왕. 칭해주고.
건물을 새로 만드는겨. 지금 부다페스트 궁전을 이사람이 개조한겨. 그리고 도서관 세우고.
The Royal Palace in Buda, engraving from the 1480s
상비군을 둬. 이때 오스만 애들이 치고 올라올때걸랑. 돈이 필요하걸랑 저땐 상비군이 돈이야. 건물 르네상스 할라믄 돈이고. 왕실에 돈이 있어야해. 세제개혁을 하는겨. 특히나 귀족들 면세를 다 없애. 소금광산도 전매제로 돌려.
왕이. 리더가 말야. 나라를 위해서 저 하는 애는 위대한 거걸랑. 저게 곧 자기 국가를 위해서 쓰는거걸랑 개인 착복이 아니라.
조선이 망한 이유가. 세금이야 이거. 나중에 언급하던. 양반들 한테 세금을 안걷고. 걍 십분의 일.이야. 면세에. 국고엔 돈이 없고. 돈은 귀족 양반에게만 있는겨 그래서 조선이.
유럽 애들은. 귀족들이 말야. 장사로 돈을 버는겨.
조선은 말야. 오직 땅이야. 이 땅에서 세금을 내는데. 국가로 들어가는 것은 없어. 대부분 귀족 애들 주머니로 가는겨 이게. 해서 구휼 하걸랑. 그게 왕실에서 나가는겨 또한. 나라에 돈이 없어. 멀 할라고 해도 할 수가 없어.
해서 나중 독립 해대민서리 . 머 어디 지주가 노예문서 태우민서리 다 팔고 서리 간도 가서리 학굘세우고 머하고 할때말야. 다시 보믄. 즉 그 재산이. 어마어마 한 겨.
이황 재산이 얼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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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티아스.가 죽었어.
제일 신나는 들이. 귀족인겨. 마티아스가 귀족들 삥땅을 친거걸랑.
마티아스의 모든 개혁정책을 이들이 빠꾸를 시킨겨. 촌놈 야기에워.는 걍 촌놈 일 뿐이야. 같은 왈라키안. 루마니아 태생인 마티아스.는 남의 것 앞선것을 익히고 감동하고 자기 나라를 위해서 한거걸랑. 저걸 감정적으로 다 원상태로 돌린겨. 그리고 오직 가문에게만 기대서리. 합스부르크에 그냥 먹히고. 오스만에 당하는겨 중간에서.
저게 지금 헝가리야.
마티아스. 는 위대한 헝가리 사람이야. 헝가리에서는 저 인간을 배워야해. 왜 저인간에게 더 그레이트. 딱지가 없냐 위키영어에.
I. Mátyás arcképe egy corvina miniatúrájá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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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arinthian Peasant Revolt (German: Kärntner Bauernaufstand; Slovene: koroški kmečki upor) took place in the Duchy of Carinthia(present-day Austria) in 1478.
카린티아 농민반란.
리볼트. 리벨리온. rebellion. 할때 차이는. 리벨리온. 은 벨룸 이란 전쟁에 리. back. 반대로 걸랑. 즉 뒤통수 친다는겨. 전쟁은 밖의 적이 전쟁인데. 이건 뒤에서 자기편이 뒤통수 친거란 의미야. 해서 반란. 이 딱 맞아.
리볼트.는 이게 더나가사 레볼루션 했다고 했잖니. 이건 전쟁.이란 무력이 방점이 아냐. 무력에 방점은 리벨리온.이고 이건 먼가 이념 사상이 스며든겨.
카린티아. 오스트리아 에서. 아래 지금 슬로베니아가 예전에 카르니올라. 더치 공국이고. 고 위가 카린티아. 스튀리아.야. 인너 오스트리아.야 여기서의 농민들의 반란. 1478년.
이미 말야. 아래서는 오스만이 쳐 올라오는겨. 발칸을 다 먹었어 얘들이. 헌데 저당시가 헝가리 마티아스랑 11년 전쟁할때야 오스트리아가. 아래서는 오스만 오는데 얘들이 관시미가 없어. 비엔나 막는다느니. 니덜이 알아서 하라느니. 얘들이 반기를 드는겨. 헌데 막 아래서 오스만이 또 올라와. 이들이 오스만에 맞서서 싸워.
In May the farmers gathered at Villach where they organized a 3,000-strong army to face the invaders. They started obstructing the steep Predil Pass route, however, a 20,000-strong Turkish contingent of professional akinji cavalry were able to remove the barriers and to abseil their horses over rocky terrain.
When on June 25 the Ottoman forces came down the mountains and neared Tarvis, most peasants fled overnight to protect their belongings. The next day only a small group of some 530 peasants and 70 miners from Bleiberg chose to make a stand against the Turks and to try to stop them at the Battle of Kokovo (Goggau) near Tarvis. About 300 men died in the futile attempt, surrounded and slain by about 20,000 akinji horsemen. The Turkish army broke through and proceeded to plunder all the way up to Millstatt Abbey and Gmünd in Upper Carinthia.
오스만 2만명 기병대 애들이 쳐들어와. 농민들 3천명이 무장을 해서 막아. 얘들이 그냥 후퇴하면서 카린티아 곳곳을 약탈하는겨. 그리고는 나중에 오스트리아에서는. 저 농민들이 이전에 역모를 꾸몃다고서리. 지도자를 잡아서 사형 선고로 공개 처형 시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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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the Battle of Giornico(28 December 1478) a Swissforce of 600 defeated 10,000 Milanese troops
죠르니코 전투. 스위스 연합과 아래 밀라노 공국의 이어지는 전투. 밀라노가 깊숙히 쳐 올라가. 죠르니코까지. 600명의 스위스인이 1만명 밀라노 병력을 이기다.
밀라노가 멍청한게 저때가 겨울이걸랑. 더하여 저긴 산악지대고 얘들은 치고 올라가는겨. 수가 많지만 이기기가 힘들어. 크램폰. 쟤들 스위스는 신발에 안미끄러질라고 아이젠을 차는겨. 이런것도 없었던겨 밀라노가. 질수밖에.
The First Battle of Guinegate took place on August 7, 1479. French troops of King Louis XI were defeated by the Burgundiansled by Archduke (later to be Emperor) Maximilian of Habsburg.
기느게이트 전투. 앙기느게트. 여기가 프랑스 벨기에 접경이야. 지금 프랑스. 여기가 아르타와 백작령이야. 바로 오른쪽이 플랑드르야. 프랑스랑 플랑드르랑 맨날 전쟁하던 곳이야. 이전 스퍼 전쟁. 여기도 부르고뉴 땅이었어.
이건 부르고뉴 전쟁. 그리고 낭시전쟁.을 봐야해. 이것도 목록에 없는데.
The Burgundian Wars (1474–1477) were a conflict between the Dukes of Burgundy and the Old Swiss Confederacy and its allies.
The Battle of Nancy was the final and decisive battle of the Burgundian Wars, fought outside the walls of Nancy on 5 January 1477 by Charles the Bold, Duke of Burgundy, against René II, Duke of Lorraine, and the Swiss Confederacy.
이것만 하자.
쉼.
Territories of the house of Valois-Burgundy during the reign of Charles the Bold.
부르고뉴의 마지막 용감공 샤를.의 땅이야. 저기서 트리어. 지나는 모젤강. 으로 룩셈부르크 위로 저지대 로렌. 그 아래 바 더치. 로렌 더치. 베르됭 프린스비숍.을 고지대 로렌. 하고 이걸 다 로렌.해. 저 땅을 샤를이 차지한겨. 그 와중의 전투가 부르고뉴 전쟁.이야 3년간. 그리고 그 마지막인 낭시 전투에서 샤를 이 죽어. 낭시가 로렌 공작령의 수도야. 바로위가 메스. metz. 안달베르.가 여기서 로렌 가문을 만든겨. 곳프리에게 뺏아서리.
로렌애들이 저기 주축이야. 즉 로렌과 샤를의 싸움이야. 로렌이 스위스 연합이랑 동맹맺은거고. 부르고뉴 바로 옆이 또한 스위스야. 얘들이 스위스 까지 먹으려는겨. 샤를 포함 아마 유언일껴 윗세대의 니가 프랑스 말고 로타르 제국을 가운데에서 세워라.
샤를이 아버지를 이어서리. 저 룩셈부르크 아래의 고지대 로렌땅을 다 먹는겨. 아래 자기 부르고뉴 더치랑 카운티랑 연결이 돼 그럼. 그리고 오른쪽 알사스에 스위스도 보이고. 쨈봉인거지.
샤를은 전쟁만 한겨. 44세에 죽었어. 닉넴도 전사 워리어야. 테러블.에. 용감.에. 프랑스 왕 루이11세랑도 연일 전쟁. 퍼블릭 윌. 그리고 저지대 리에주 에서도 전쟁.
아마 낭시에서 안죽었으면 킹덤을 세웠을껴.
헌데 저 낭시 전투에서 죽는겨. 딸 달랑 하나. 마리.
Charles the Bold (also translated as Charles the Reckless) [1] (French: Charles le Téméraire, Dutch: Karel de Stoute, 10 November 1433 – 5 January 1477)
Mary (French: Marie; Dutch: Maria; 13 February 1457 – 27 March 1482)
아빠가 죽을때. 얘가 나이 20세.
전쟁하느라 바쁜지. 얘 혼처를 안정한겨. 스무살인데. 결혼시장에서 최고걸랑. 아라곤의 페르디난도.가 먼저 들이댔어 꼬마일때. 얘가 이사벨라 랑 결혼하기 전에 마리.한테 청혼한겨. 만약 성사되었으믄 카스티야의 이사벨라는 없는거지 역사에.
벌벌 떨거 아냐. 부자인데 말야. 스무살 여자애야. 결국 저러다 땅이 다 흩어지는겨.
프랑스 왕 루이11세. 의 아들 곧 왕이 되는 샤를 8세가 지금 여섯살이야. 14살 적은 얘한테 시집가겠다고 숙여들어갔어. 루이는 저 플랑드르까지 다 먹어야해. 이미 고지대 로렌.은 전쟁 패하고 프랑스 령이 되었어.
사신을 보내. 결혼하겠다고. 헌데 빈손으로 돌아왔어. 저 모든 땅을 다 프랑스 령으로 달라는겨.
이게 디게 애매한데. 어차피 시집오믄 자기꺼걸랑. 그걸 왜 그리 서둘렀는지 몰라 얜.
마리가 이걸 거부해. 그리고 찾은 사람이 바로 막시밀리안. 이야.
어찌보믄 재수가 좋은거 같은데 말야. 지나고 보믄 당연해 보이지만. 저때 막시밀리안.은 아직 황제가 아냐. 로마의 킹도 아냐. 걍 아빠만 프리드리히3세 황제일뿐이야. 합스부르크 에서는 첫 황제야. 어찌 될 지 모르는겨. 이전 대공위때도 막 갈렸걸랑 가문들이.
더군다나 저때는 막 헝가리랑 오스트리아랑 전쟁 시작 전이야.
마리 입장에선 재수 좋은 도박이 잘 터진겨 저게. 막시밀리안의 합스부르크도 재수 좋은거고.
저 결혼상대 결정은 마리가 한겨. 샤를이 죽고나서 벌벌 떨때에.
그리고 터진게. 저게 부르고뉴 후속 전쟁이야. 프랑스 루이가 합스부르크 랑 부르고뉴 땅을 두고 싸우는겨 저 아르트와의 기느게이트.에서.
합스부르크가 이겨. 그리고 부르고뉴 땅의 권리를 결정하는겨.
이미 로렌땅은 프랑스 왕꺼야. 부르고뉴는 저 바 더치 로렌 더치.에 아무런 권한이 없어. 또한 부르고뉴 더치.와 부르고뉴 카운티.도 프랑스 왕 것이 되었어.
문제는 저 저지대야.
낭시전투에서 샤를이 죽고. 플랑드르까지 다 프랑스 령이 되었어. 이걸 막시밀리안이 다시 합스부르크 로 갖고 온겨.
저 막시밀리안이 이기고. 플랑드르.를 다시 뺏아오고. 아르트와. 피카르디. 만 프랑스에서 갖고 가.
저게 먼말이냐면 말야. 하미지.를 프랑스 왕에게 하는거야. 즉 저기에서 걷는 세금을. 카운트 나 듀크.가 또한 받아서 왕이나 황제에게 일부 떼서 내야 하잖아. 그 권한이야 저게. 까놓고 말하면.
해서. 비록 샤를이 죽고. 프랑스 땅의 부르고뉴 더치랑 카운티가 프랑스 왕 것이 되었다고 해서. 저기에 다른 핏줄이 발령이 되는게 아냐. 여전히 마리.가 공작이야 저기선. 마찬가지로. 저 저지대에세 아르트와 피카르디 를 프랑스에서 갖고 갔지만. 여전히 이전 애들이 저기서 짱이야. 맨 위 하미지 받는 인간이 프랑스냐 황제냐 의 차이야.
해서 다시 저 마리가 샤를 8세에게 시집간다고 할때 루이가 요구한게 아마도 영지 자체를 다 뺏아서리 자기가 갖겠다고 요구를 한겨 저게. 즉 마리는 완전히 빈털털이인거야 그러면. 해서 거부한 거고 막시밀리안에게 간건데. 그리 추정이 돼. 짐만의. 그렇다면 쟨 생각 완전히 잘못한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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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는 결혼하고 5년 후에. 저 저지대 벨기에 땅에서. 신랑이랑 같이 사냥하러 갔다가. 말 좋아하는 마리가. 말에서 떨어져서리 도랑에 걍 머리가 처박혀서리 척추가 뿌러졌어. 끙끙 앓다가 몇주후에 죽어. 나이 25세.
마리가 낳은 필리프가 이사벨라의 딸과 결혼하면서 스페인이랑 저 부르고뉴땅들이 엮이면서. 합스부르크가 스페인과 한몸되고. 프랑스와 스페인은 이후 2백년 이상을 저 땅으로 전쟁을 하는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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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1세 가 띨빵한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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