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ars of Liège were a series of three rebellions by the Prince-Bishopric of Liège, in the town of Liège in modern-day Belgium, against the expanding Duchy of Burgundy between 1465 and 1468. On each occasion, the rebels were defeated by Burgundian forces commanded by Charles the Bold and the city was twice burned to the ground.
리에주 전쟁. Liege. 리에주.
Depiction of the sack of Liège in 1468 by Barthélemy Vieillevoye (1842)
1468 리에주 약탈. by 바틀레미 비에브와.
이전에 네덜란드 벨기에 저지대 지도를 복기하면.
지금 지도상에 벨기에와 독일 사이에 쑥 파서 들어간 네덜란드 지역이 있어. 거기가 지도에 Liburg 림부르크. 독일어. 덧치어 림부르흐.
이전 림부르흐.가 지금 네덜란드의 림부르흐 주. 벨기에의 림부르흐 주. 로 나뉜겨. 벨기에도 네덜란드 림부르흐에 접하는 오른쪽을 림부르흐. 라고 해.
고 바로 아래. Luik 루익. 이 있어. 이게 리에주. liege. 불어야 리에주.는 이게 덧치.로 Luik 뢰크. 하는겨. 이건 벨기에 땅이야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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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저지대 17개 주 연합. 16세기에 세워진 것을 다시보면. 그건 부르고뉴 네덜란드. 라고 불렸던 곳이, 마리가 시집가서리 합스부르크 네덜란드 가 된겨. 그 중 하나가 저 리에주.
헌데 지난 퍼블릭 윌 동맹.이 루이11세랑 전쟁하면서 그 중 하나가 몽레리 전투였지만. 이건 부르고뉴.랑 프랑스 왕이랑 전쟁이걸랑. 똑같이 이어서 저 리에주.에서는 부르고뉴에 대한 반란이 일어난거지.
저기가 이전 로레인. 로렌. 이었걸랑. 이게 고지대 로렌 저지대 로렌. 에서 저지대 로렌.이 부르고뉴가 대부분 먹은 건데. 이 과정을 정리를 하자고.
Lorraine's predecessor, Lotharingia, was an independent Carolingian kingdom under the rule of King Lothair II (855–869). Its territory had originally been a part of Middle Francia, created in 843 by the Treaty of Verdun, when the Carolingian empire was divided between the three sons of Louis the Pious.
삼형제 로타르. 게르만루이. 대머리샤를. 이 싸우고. 패한 첫째 로타르 가 받은 땅이 가운데야. 이탈리아중북부랑. 대머리샤를이랑 부르고뉴를 나누고. 바로 위가 알사스. 로렌. 이걸랑.
The Duchy of Lorraine (French: Lorraine
[lɔʁɛn]; German: Lothringen), originally Upper Lorraine, was a duchy now included in the larger present-day region of Lorraine in northeastern France. Its capital was Nancy.
로렌. 불어. 영어 로레인. 독어 로트링겐.
As Lothair II had died without heirs, his territory was divided by the 870 Treaty of Meerssen between East and West Francia and finally came under East Frankish rule as a whole by the 880 Treaty of Ribemont. After the East Frankish Carolingians became extinct with the death of Louis the Child in 911, Lotharingia once again attached itself to West Francia, but was conquered by the German king Henry the Fowler in 925. Stuck in the conflict with his rival Hugh the Great, in 942 King Louis IV of France renounced all claims to Lotharingia.
로타르.가 죽고. 물려받은 자식도 죽고. 이걸 다시 양쪽 샤를과 루이 애들이 뜯어가는겨. 지금 프랑스.를 실재 세운 휴 대제 카페가문과. 오토1세의 작센가문이 서로 이 가운데 땅을 두고 니꺼 내꺼 하는겨.
In 953, the German king Otto I had appointed his brother Bruno the Great Duke of Lotharingia. In 959, Bruno divided the duchy into Upper and Lower Lorraine; this division became permanent following his death in 965.
이 로렌.이 저지대 고지대. 로 나뉜건. 959년 이야. 로타르.가 베르됭 조약 때 받고 백년 후에 나뉜겨. 얜 작센 오토1세 신성로마황제의 동생이야. 즉 이땐 신성로마 땅이 된겨.
In 959 King Henry's son Duke Bruno the Great divided Lotharingia into two duchies: Lower and Upper Lorraine (or Lower and Upper Lotharingia) and granted Count Godfrey I of Mons (Hainaut) the title of a Duke of Lower Lorraine
오토1세의 동생 브루노.가 이 전체 로렌땅의 듀크가 된게 서기 953년. 얘가 이걸 두개로 나눠. 얜 대주교야 원래. 쾰른의. 정치하는 애가 아닌겨. 오토보다도 열살이상 아래야. 저지대 로레인.을 몽스 땅의 백작에게 줘. 6년 후 서기 959년. 얘가 저지대 로렌 공작. 타이틀이야.
The first duke and deputy of Bruno was Frederick I of Bar, son-in-law of Bruno's sister Hedwig of Saxony.
고지대 로렌.은 자기 큰누나. 오토1세보다 많아 나이가. 이 큰누나의 남편에게 줘. 바 공작이었어.
고지대 저지대 공작들이 나뉘어서 정해진게 서기 959년.
Gothelo (or Gozelo) (
c.
967 – 19 April 1044), called the Great, was the duke of Lower Lorraine from 1023 and of Upper Lorraine from 1033.
저게 다시 묶인게 1033년. 고젤로. 원래 안트베르펜 후작이야. 형이 자식없이 죽어. 이걸 물려받아. 저지대 로렌. 그리고 고지대 로렌의 공작도 자식없이 죽어. 이걸 물려 받아. 타이틀이 저지대 공작 에 고지대 공작이야. 이때 물려받은 땅들에서 반란이 일어나. 진압을 도와줘 신성로마황제가.
헌데 이사람이 죽고 아들 godfrey 곳프리가 고지대 로렌.만 받고 저지대 로렌.은 황제가 승인을 안해. 신성로마황제 입장에서 가만 보니까 저 두개 지역을 한놈에게 다 주면 위협적인겨. 이때 황제가 하인리히 3세야. 살리안 애들이걸랑. 이전 오토황제파 작센애들이 반란 하고.
황제가 저지대는 동생에게 주는겨. 얜 좀 무능해보였나봐.
형이 이에 대해 반기를 드는겨. 저 멍청한 동생이 받은 저지대 로렌도 내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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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가 저지대 로렌까지 가서 약탈에 전쟁에 하다가 잡혔다가 협상하며 잘 타이르는중에 또 탈출해서리 또 대들다가 또 진압돼. 이때 얠 진압한 애가 아달베르.
Adalbert (1000 – 11 November 1048 in Thuin) was the Duke of Upper Lorraine from 1047 until his death. He was the first son of Gerard de Bouzonville (Gerhard), Count of Metz, and Gisela (Gisella), possibly a daughter of Theodoric I, Duke of Upper Lorraine.
얘가 저 난리 피운 곳프리.가 그나마 갖고 있던 고지대 로렌.의 공작으로 임명돼 황제에 의해서. 얘가 메스 Metz 백작이야. 해서 고지대 로렌은 이 메스 가문이 이어가는겨 계속. 이게 나중에 로렌 가문이 돼. 중간에 잠깐 곳프리가 다시 하고 또 앙주도 하지만. 이 고지대 로렌.의 로렌은 18세기 까지 가는겨. 얘들이 나중엔 합스부르크의 오스트리아 근세백년때 합스부르크 로렌.으로 같이 가.
우리가 로렌. 하는 건. 이 고지대 로렌. 이야. 브루노가 서기 959년에 나눠서 바 바 가문에 몽스가문에 백년 가까이 하다가 이후 로렌.이란 이름으로 18세기 온거고.
저지대 로렌.은 말야. 저때 고델로가 죽고. 황제의 명으로 장남 아닌 차남 멍청이에 줬지만 얘가 일찍 죽어. 해서리 형이 막 다시 달라고 뎀빈거걸랑. 황제가 이걸 나중 아달베르 메스 백작의 친척인 프리드리히에게 주는겨. 해서 고지대 고프리가 난리를 더 피는거고.
쟤가 거의 20년을 저을 해. 아주 포악한 듯. 그래도 풀어줘. 얘가 떠돌다가 다시 사람 모아서리 다시 처들어오고. 로렌사람들은 저 곳프리 짜증 나고.
결국 나중에 다시 와서리 저지대 로렌 공작을 해. 그리고 이 아들이 물려받아. 얜 곱추야. 나중 암살당해. 그러면서 점점 이 저지대 로렌은 흩어지는거야. 마지막 저지대 로렌. 공작 타이틀은 1190년 에 끝나. 이땐 이미 저지대에 여러 백작들 공작들이 생기는 중이야.
서기 959년.에 고지대 저지대 로렌이 나뉠때. 브루노 대주교 오토 동생이 받아서.
그 기준점은
Moselle 모젤 강이야. 저 트리어. Trier. 대주교 있는 대교구. 지나서 메스 Metz 지나는 강이 모젤 강. 트리어 지나서 모젤강에서 나와서리 알사스로 가는 오른쪽강은 자르강.
리에주 Liege. 베르됭 Verdun 지나는 강이
Meuse 뫼즈 강이야.
저 플랑드르 를 나누는 아래 강이 에스꼬 강. 벨기에는 이 에스꼬와 뫼즈가 삼등분되는겨. 저 캄브라이 cambrai 라고 쓰여있는 캥브해.는 지금 프랑스야.
저기서 지금 오른쪽 쾰른 트리어.는 독일이고. 베르됭 메스.는 프랑스야.
고 아래 스트라스부르 Strasbourg .가 알사스야. 오른쪽 경계 강이 라인강이야. 여기가 또한 참혹한 곳이야.
쉼.
지금 지도와 저 로렌 저지대 고지대와 스트라스부르의 알사스. 를 비교해보면
고지대 로렌. 즉 로렌이 뤽상부르. 룩셈부르크를 가운데에 두고. 벨기에 남부. 메스 Metz 있는 프랑스. 오른쪽 독일의 트리어 로 나뉜겨.
플랑드르.는 원래 대머리샤를. 프랑스 땅이야. 이게 지금 서쪽 찔끔갖고 대부분 벨기에로 간겨.
원래 말야. 네덜란드를 만든 나싸우가문의 윌리엄. 오렌지까지 받아 오렌지 공이지만. 처음엔 저 전체를 다 얘가 네덜란드로 만들려 한겨. 저게 다 부르고뉴 땅이걸랑.
헌데 결국 지금 네덜란드. 만 된겨. 그 이유는 그 가운데 저 리에주. 야. Liege. 저 리에주 전쟁이 결국 지금의 벨기에와 네덜란드를 나눌 수 밖에 없었어.
일단 저기서 말야. 트리어. 쾰른. 마인츠. 는 대주교 있는 선제후야. 7명의 선제후 중 세명. 이들은 말야. 대주교이자 군주야. 그게 프린스 비숍릭.이야. 얘들은 쎈 카톨릭이야. 여긴 종교전쟁때 절대 프로테스탄트가 될 수가 없어. 그리고 저 벨기에가 카톨릭으로 계속 간건. 저기 리에주야. 이 리에주 역시 대주교에 군주.인 프린스 비숍릭이야. 이들이 부르고뉴에 대항하면서 비록 졌지만 저때 똘똘 뭉친겨. 해서 종교전쟁때도 말야 여긴 뭉친겨 로마 카톨릭의 힘으로. 민들이 뭉친겨. 군주가 꽂은게 아니야. 민들이 우린 카톨릭이야 한겨. 나갈라믄 니덜이나 나가 한겨. 해서 계속 합스부르크에 오스트리아에 들어간겨 이들이.
저기가 그래서 가운데라서. 로타르 이후로 말야. 정체성이 애매한거야. 프랑스냐 독일이냐. 해서 저 지역을 잡는 인간들이 따로 나라를 만들려고 한겨. 그게 부르고뉴고 그게 나싸우의 오렌지 윌리엄 이었던거지.
알사스.도 마찬가지야. 독일과 라인강을 경계로 해서리. 신성로마황제는 저 알사스. 특히 저 스트라스부르.는 자기들 꺼야해.
Between 362 and 1262, Strasbourg was governed by the bishops of Strasbourg; their rule was reinforced in 873 and then more in 982.[20] In 1262, the citizens violently rebelled against the bishop's rule (Battle of Hausbergen) and Strasbourg became a free imperial city. It became a French city in 1681, after the conquest of Alsace by the armies of Louis XIV. In 1871, after the Franco-Prussian War, the city became German again, until 1918 (end of World War I), when it reverted to France. After the defeat of France in 1940 (World War II), Strasbourg came under German control again; since the end of 1944, it is again a French town. In 2016, Strasbourg was promoted from capital of Alsace to capital of Grand Est.
황제령에서. 태양왕 루이가 이걸 프랑스로 갖고와. 백년 후에 다시 독일로 넘어가. 1차대전 승리로 프랑스로 다시가. 2차대전때 히틀러가 다시 갖고와. 그리고 패전하고 프랑스로 갖고 온겨.
굳이 저게 원래 누구꺼냐. 하믄 저건 독일땅이 되었어야지.
저 저지대도 원래 누구꺼냐. 로타르.는 프랑스도 독일도 아니걸랑. 그 시작은 게르만 킹이었던 오토 1세 아빠가 오토 동생 브루노에게 줘서리 얘가 나눈거걸랑. 저것도 원래 독일께 되었어야지.
지금 땅을 보면 말야. 독일이 짝아. 저 메스. 아래 낭시. 그리고 스트라스부르.는 원래 독일땅이야. 세계 대전 두번하면서 저길 다 뺏긴겨 얘들이..
할 때 전 리에주 전쟁. 은 또한 삼년간 참혹했어. 결국 부르고뉴 용감공 샤를 이 이겼지만. 도시는 폐허가 되었어.
용감공 샤를이 낭시전투로 죽고. 남은 핏줄 딸 마리.가 저길 감당을 못해. 여기 대주교한테 다시 줘. 해서 저기 지도 보믄 부르고뉴령 하면서 빗금친게 좀 권력 미친게 약하다 하는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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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Irmandiño revolts (or Irmandiño Wars) were two revolts that took place in 15th-century Kingdom of Galicia against attempts by the regional nobility to maintain their rights over the peasantry and the bourgeoisie.
이르만디뇨 리볼트.
아 이거 은제 다하냐.
쉼.
니덜은 말야. 세계에서 제일 좋은 글들을 지금 보능그야 지금. 영어로도 일어로도 이런 글이 없어. 세계사를 저 고대에서 지금까지 동서양을 관통하는 이런 글은 어디에도 없어 .
일본애들보다 더 잘볼 수가 있어.
하물며 말야. 저 유럽애들도 자기들 역사를 잘 몰라. 안에선 잘몰라. 저 각각의 전투의 내용들을 영어로 푼거 봐도 그 전투의 전쟁의 의미를 잘 몰라 쟤들도.
저 리에주 전투도 보믄. 몰라 저 전쟁의 의미를.
하튼 걍 그런줄 알어. ..
갈리시아 킹덤. 409–1833
우리네는 스페인. 포르투갈. 머 두개 달랑. 스페인도 좀 아는인간은 머 카탈로니아에 나바르에 카스티야 네온. 이정도지 머.
저기에 갈리시아 킹덤. 이 또한 1400년 동안 있었던겨.
스페인의 산맥이. 프랑스랑 경계로 피레네.가 있고 얠 이어서리 반도 북부에 칸타브리아 산맥이 일짜로 있어. 이 옆 구석탱이에 있어 얘들이
Political map of southwestern Europe around the year 600, which referred to three different areas under Visigothic government – Hispania, Gallaecia, and Septimania
저 왼쪽 구석탱이에. 서기 6백년. 갈라이키아. 한겨. 지금 이 바로 밑이 포르투갈.이야. 포르투갈.은 저 서북쪽은 스페인땅이야. 저 아래 길죽 사각형으로 있는게 포르투갈일 뿐이야.
Political situation in the Northern Iberian Peninsula around 1065
서기 1065년. 무슬림애들이 나눠서 갖고 있지만. 저 산맥들에서는 갈리시아. 레온. 카스티야. 나바르. 아라곤. 바르셀로나의 카탈로니아.는 저 오른쪽에 어디 있겄지.
The Kingdom of Asturias (Latin: Regnum Asturorum) was a kingdom in the Iberian Peninsula founded in 718 by the Visigothic nobleman[2] Pelagius of Asturias (Asturian: Pelayu, Spanish: Pelayo). It was the first Christian political entity established after the Umayyad conquest of Visigoth Hispania in 718 or 722.[3] That year, Pelagius defeated an Umayyad army at the Battle of Covadonga, in what is usually regarded as the beginning of the Reconquista. The Kingdom of Asturias transitioned into the Kingdom of León in 924,
갈리시아에 아스투리아스.라는 킹덤이 또한 있었어. 얘들은 2백년 하다가 레온.으로 흡수돼. 서기 9백년 직후에. 즉 이때 레온 킹덤이 서는겨. 이게 삼백년 후에 1230년에 카스티야.에 흡수되민서리 없어져. 킹덤이 지워지고 프린스령이 돼.
갈리시아.에서 포르투갈 이 독립해. 1128년. 그리고 레온이 카스티야에 들어갈때 이 갈리시아도 카스티야에 들어가는겨. 카스티야.가 1230에 아스투리아스를 먹은 레온을 먹고. 이때 또한 갈리시아를 먹어. 해서 이때부터 킹덤 딱지를 떼고 크라운 딱지를 붙여. 즉 얘들은 크라운 이 킹 보다 위의 말이야. 킹은 게르만어고 크라운은 라틴어야. 크라운.은 교황이 씌워주는겨. 신의 힘이 더 깃든거지.
카스티야 크라운. 할때는 갈리시아. 레온. 카스티야 킹덤들을 합한거고. 저기엔 나바르 아라곤 은 따로야.
- 1466–1469 Irmandiño Wars
이르만디뇨. 가 i
rmandade 이르만다지. 브라더후드. 형제애. 핏줄들이란겨. 이 직전에 터진 오른쪽 끝 카탈로니아의 레멘사 들의 반란. 악습에 항거하는겨. 이르만다지. 우리는 형제다 하면서 대든겨.
갈리시아.는 바로 옆 칸타브리아 산맥에 꽉 막혀잇는 곳이야. 카스티야 크라운의 속주 킹덤이 되었지만. 이 산속 처박힌 곳에서 고리타분한겨.
민들 입장에선 저 고리타분 킹덤 보다는 이른바 대국 연방인 카스티야.의 법제도가 그리워. 헌데 이 갈리시아 구석 킹덤은. 카스티야의 속주가 되었는데도. 지리상 여전히 더 민들을 못살게 구는겨. 민들이 오히려 카스티야.에 요구하는겨 여기 킹덤들 좀 조져달라고.
이들이 킹덤에 대드는겨. 이때도 중심은 말야. 패전트들이 아니라 리드는 부르조아들이 하는겨. 귀족이야. 낮은 계급이지만. 물론 다 진압이 되는거지. 그래도 그 소리가 카스티야에 간겨. 이때부터 카스티야에서 이 킹덤을 감시 철저히 하는거지. 니덜 좀 사람들 심하겐 갈구지 말라고.
The Second Battle of Olmedo was fought on 20 August 1467 near Olmedo in Castile (now in the province of Valladolid, Spain) as part of the War of the Castilian Succession between Henry IV of Castile and his half-brother Alfonso, Prince of Asturias.
올메도 2차 전투. 카스티야 크라운 후계자 전쟁. 킹이 이복동생이랑 싸우는겨. 1차 올메도는 카스티야 킹이랑 아라곤 킹이랑 전투고. 이건 그 아들 카스티야의 후계자 전쟁을 똑같은 올메도 에서 하는거고. 상대는 다르고.
The War of the Priests (1467-1479, German: Pfaffenkrieg, Polish: wojna popia, wojna księża) was a conflict in the Polish province of Warmia between the King of Poland Casimir IV and Nicolaus von Tüngen, the new bishop of Warmia chosen – without the king's approval – by the Warmian chapter. The latter was supported by the Teutonic Knights, by this point vassals of Poland, who were seeking a revision of the recently signed Second Peace of Toruń.
사제들의 전쟁. 폴란드. 바르미아.
튜튼이 개겨왔걸랑. 아 어거지 튜튼. 가만보믄. 하튼 우낀겨 어거지로 쑤셔들어와서리 결국 얘들이 독일을 맹근거 보믄. 걍 어거지로 버티는 놈이 결국 짱인겨 인생은.
이전에 막 헝거전쟁 버티고. 후스전쟁할때 후스들이 폴란드편들어서리 또 튜튼이랑 싸우고. 십삼년 전쟁으로 또 서로 싸우고. 튜튼은 왼쪽 포메라니아. 위의 리보니아까지 다 처먹다가 땅이 확 줄은겨 원래 프러시아 구석탱이로. 위에 리보니아 찔끔하고. 깨갱 중이었걸랑. 폴란드와 사이에 바르미아 주교령 이 섰지만 이것도 결국 폴란드의 관할로 넘어온겨.
원래 바르미아 주교.는 튜튼 기사단과 좋을 수 밖에 없어. 쟤들은 로마 카톨릭 기사단이고 . 폴란드는 말야. 슬라브에 걍 세례 받았걸랑. 아직 그리스도 가 쎄게 스민게 아냐. 해서 나중에 튜튼이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하고 이 폴란드 킹에 하미지를 한거걸랑. 이때 폴란드는 딱히 카톨릭이냐 프로테스탄트냐 관시미가 없는겨. 오히려 프로테스탄트 기운이 더 있는거고. 또한 후스들 중에서도 급진파 후스들이랑 같은 편 먹었었걸랑. 그만큼 로마 카톨릭이랑 끈이 약한겨 이게.
전쟁에서 진것들이. 다시 저 가운데 바이마르 교구에서. 킹 허락도 안받은 애가 주교가 된겨. 여기에 튜튼이 존심은 있어서리 또 배후놀이 하고. 사제들이 튜튼과 연합해서리 폴란드 킹에 대든게 저 사제들의 전쟁. 결국 져야지 머. 지들이 별수 있남. 킹 말 잘들어야지 계속.
폴란드는 13년 전쟁으로 이미 끝난거야 저게. 결국 그게 나중에 마르틴루터 말을 핑게로 폴란드로 들어간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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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the Waldshut War of 1468 – a localized conflict over hegemony in the south Black Forest region – Tiengen was absorbed by the Old Swiss Confederacy, while the town of Waldshut was besieged and partly destroyed.
발트슈트 전쟁. 여기는 독일 서남부. 고지대 왼쪽. 스와비아. 스위스와 경계선이야. 스위스가 연합체 맹글고 아래로는 밀라노 위로는 스와비아 독일이랑 싸우는겨.
wald 발트. 하면 숲. 포레스트야. 애들 지역이름이 뒤에 발트. 붙으면 어디 숲.이야.
잉글랜드에 말야. 맨체스터. 레스터. 콜체스터. 하는 스터. 는 샤이어. shire. 라는 영주가 준 영지.의 변형이 또한 스터.야. 버크셔 햄프셔. 쟤들 땅이름 지역이름.이 다 중세에 영주가 하사한 땅이란거고. 부르크. 가 버러. 버거. 라는 영지고. 발트. 는 저것과 상관없는. 숲. 이고
저때 스위스로 들어갔지만. 근대에 와서 다시 독일땅이 되었다.
The Bohemian War (1468–78) began when the Kingdom of Bohemia was invaded by the king of Hungary, Matthias Corvinus. Matthias invaded with the pretext of returning Bohemia to Catholicism;
보헤미안 전쟁. 보헤미아 킹덤에 헝가리 킹이 쳐들어와서리.
이전 디페너스트레이션. 프라하 창문투척사건. 후사이트 전쟁. 이 끝나고 30년이 지났어. 온건 후사이트들이 이겼걸랑. 급진파는 폴란드 가고. 이때 킹이 후사이트 킹이야. 보헤미아는 다른겨 이 성질이.
헝가리 마티아스.가 저건 카톨릭이 아니다 란 핑게로 처들어간거지. 얜 훈야디 가문이야. 헝가리 귀족가문.
룩셈부르크 지기스문트가 죽고. 끊겨서리. 합스부르크의 알베르트.가 보헤미아킹. 헝가리 킹. 오르고서리 무라드2세랑 바르나 전투전에 불가리아에서 전사했걸랑.
보헤미아.는 이 알베르트.의 아기.가 왕자리를 이어서 하다가. 죽어. 보헤미아
다이어트.에서. 저때 아기의 섭정이었던 사람을 킹으로 선정해. 얜 후사이트였어. 후사이트 들의 킹이된겨.
다이어트 란 귀족회의를 신성로마만 쓴게 아냐. 보헤미아도 헝가리도 다이어트 해.
헝가리는 요가일라.의 야기에워 가문이 킹을 해. 얜 폴란드 킹이었어. 폴란드와 헝가리는 헤드위그와 마리 자매간이라 사위들이 엮인겨.
저 야기에워 가문의 킹도 죽어. 이때 보헤미아의 아기가 좀 자랐어. 얘가 이 헝가리 킹도 겸임해. 이때 섭정들 중 하나가 헝가리 구 귀족가문애야.
저 보헤미아의 꼬마였던 킹이 죽고. 보헤미아의 킹은 후사이트가. 헝가리의 킹은 훈야디 가문이 킹을 해. 얘가 마티아스.
이 마티아스.가 저 보헤미아.의 후사이트 킹을 치는겨. 넌 후사이트. 난 로마카톨릭. 일종의 똑같은 종교전쟁 이음이야. 쳐들어갔는데 프라하는 못먹었어. 이 프라하는 쎈곳이야. 그리고 걍 서로 인정해.
저 마티아스가 져들어 올때. 역시나 보헤미아.가 구원 요청하는 곳은 폴란드야. 급진파 후사이트랑 안좋았지만 어쨋거나 같은 후사이트 걸랑. 폴란드의 야기에워 가문이 오는겨. 얘가 마티아스.랑 붙었다가 휴전이 되었는데. 그리곤 후사이트 킹이 죽었어. 이 야기에워 가문 사람을 보헤미아 에서 킹으로 옹립을 하는겨.
Vladislaus II, also known as Vladislav II,[1][2] Władysław II[3] or Wladislas II[4] (1 March 1456 – 13 March 1516; Czech: Vladislav Jagellonský; Hungarian: II. Ulászló; Polish: Władysław II Jagiellończyk; Croatian: Vladislav II. Jagelović; Slovak: Vladislav II. Jagelovský), was King of Bohemia from 1471 to 1516, and King of Hungary and Croatiafrom 1490 to 1516.
이 사람이 야기에워가문의 블라디슬라우스. 블라디슬라프. 걍 야기에워 해. .
이 야기에워가 킹이 되고 저 마티아스.를 치는겨. 저 헝가리는 이전에 야기에워가 킹 한번했걸랑. 오스만 그 투르크애들이랑 싸우도 죽은 자리를. 다시 꼬마애 섭정하다가 훈야디 마티아스가 갖고 간거걸랑. 이전 전쟁의 이음에 자기도 명분이 있는겨. 하튼 그래도 승부가 안되서 끝나. 보헤미안 전쟁.
마티아스가 십여년 후에 죽어. 헝가리 다이어트에서 저 야기에워를 킹으로 옹립해. 얘가 보헤미아 킹에 헝가리 킹을 하는겨. 다른 야기에워는 또한 폴란드 킹에. 다른 야기에워 핏줄은 리투아니아 대공작을 계속 하는거고.
즉 이 야기에워 가문. 요가일라.가 헤드위그랑 결혼하고 말야. 폴란드 리투아니아 를 지배하면서. 또한 헝가리 보헤미아 도 킹을 하는겨. 이 야기에워 가문이 엄청난겨 저 동유럽에서. 요가일라 이후로 2백년을 저리 가는겨. 중간에 헝가리 보헤미아 도 킹하면서.
하튼 헝가리 보헤미아는 저리 왔다리 갔다리 하다가 결국 합스부르크가 가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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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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