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Old Zurich War (Alter Zürichkrieg), 1440–46, was a conflict between the canton of Zurich and the other seven cantons of the Old Swiss Confederacyover the succession to the Count of Toggenburg.

 

올드 취리히 전쟁. 취리히 캔톤과 다른 일곱캔톤들 간의 전쟁. 토겐부르크 백작 후계자 문제.

 

The Old Swiss Confederacy (Modern GermanAlte Eidgenossenschaft; historically Eidgenossenschaft, after the Reformation also République des SuissesRes publica Helvetiorum "Republic of the Swiss") was a loose confederation of independent small states (cantons, German Orte or Stände[2]) within the Holy Roman Empire. It is the precursor of the modern state of Switzerland.

 

1291 – 1798
옛날 스위스 연합. 올드. 지금 스위스 정식 국명은 스위스 컨페더레이션. 이야. 이전 버전 해서리 올드. 해. 이게 서기 1300년 직전부터 5백년 갔다가. 프랑스 혁명때 러퍼블릭 애들이 들어와서리 리퍼블릭 했다가. 나폴레옹때 다시 조정해줬다가. 지금 스위스.야.
처음 시작은 캔톤.이 8개. 이개 2백년 지나서리 마르틴루터전후에 13개. 지금은 26개 캔톤.이야. 
초기엔 느슨한 연합체에서 점점 정치적 조직체로 가. 초기엔 다들 사방의 가문에 속하고 중세로마제국법에 따르는 제국 령이야. 
저게 서브 단위가 캔톤. 만이 아냐. 이 캔톤. 들도 지역별로 나름 자기들 동맹체를 만들어. 다른 단위별로도 또한 연합체를 만들고. 해서 여러 연합. 동맹 체들 중에서 제일 큰 대표성을 띠는게 저 올드 스위스 연합.이야. 이게 그렇다고 최고의 의사결정 구조는 아니었지만 점점 얘들이 대표체가 되는거지. 
캔톤 하나 에도 여러 마을과 도시들이 있으니 여기서도 조직들이 나눠 생겨.

The Three Leagues was the alliance of 1471 of the League of God's House, the League of the Ten Jurisdictions and the Grey League, leading eventually to the formation of the Swiss canton of Graubünden

 

그리슨 캔톤. 그라우뷘덴 캔톤 이라는 동쪽의 캔톤.에는 세개의 연맹체가 있는겨. 이런 세부적인 단위와 연합체들의 연계가 지금의 스위스를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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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한지 150년이 지난겨. 점점 나름 이땅의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가는겨. 헌데 그러면서도 캔톤들간 경쟁을 하는거지. 저때  토겐부르크 백작령이 또한 핏줄이 끊겨. 여기를 취리히 캔톤에서 땅을 확보하려 하고. 여기에 다른 캔톤들과 여기에 엮인 다른 가문들이 반발하는거지. 캔톤들이 중세의 저 주위의 가문의 백후작들에 긴밀히 붙어있는겨.
결국 저 백작령은 찢어지면서 나눠갖고. 취리히.는 다시는 독자적 행동 안하겠다는 걸로 나머지 7개 캔톤과 다시 합쳐. 취리히는 바로 옆의 합스부르크와 결별해. 이 연합체는 앞으론 분리주의자는 관용이 없다고 선언해. 이 전쟁으로 저 연합이 공고해지는겨.

The Battle of Samobor (CroatianBitka kod Samobora) on March 1, 1441 was fought between the forces of Ulrich II of Celjeand Stjepan Banić around SamoborKingdom of Croatia, which then was under personal union with the Kingdom of Hungary.

 

크로아티아.의 사모보르 전투. 
크로아티아.는 7세기에 백작령. 2백년 후에 킹덤. 이후 2백년 후에 헝가리속의 킹덤.이 되서리 이게 다음에 헝가리와 함께 오스트리아속의 킹덤에서 20세기를 맞아.
1441년. 헝가리 왕 핏줄이 끊겼어. 헝가리가 끊겼으믄. 보헤미아도 끊긴겨. 
이전에 보헤미아에서 후스전쟁. 그리고 폴란드리투아티아 에선 튜튼전쟁. 하고서리. 
보헤미아의 룩셈부르크 4대 백년이 끊긴겨. 폴란드는 야기에워(요가일라)가 죽었어. 폴란드는 야기에워 자식이 이어가.
보헤미아의 룩셈부르크 지기스문트.가 헝가리 루이의 딸 마리와 결혼한 인간이야. 즉 이 지기스문트.가 보헤미아 왕에 헝가리(크로아티아) 왕에 신성로마황제야. 
자식이 없어 딸만 달랑 하나. 이때 잠시 티나오는애가 합스부르크의 알베르트 Albert. 이 사람이 이 룩셈부르크.의 딸이랑 결혼하면서. 보헤미아 킹. 헝가리 킹.이 되는겨. 헌데 신성로마황제는 못돼. 신성로마황제는 같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프리드히 3세.가 되는겨. 
합스부르크.의 시대를 여는겨 이제. 이 합스부르크 가문이 황제.와 보헤미아 헝가리 킹을 나눠가져. 이 프리드리히3세의 아들이 막시밀리언1세 황제.에 이사람 손자가 드디어 카를5세 인겨.
보헤미아킹에 헝가리킹이 되는 알베르트.가 오스트리아 공작 이었어. 킹 킹 이 된 상태에서. 이때 아래에서 오스만애들이 막 치고 올라올때야. 이사람이 게르만의 킹. 로마의 킹.을 또한 받았어. 황제관을 써야하는데. 여기에 관심이 없었어 이사람이. 아니 관심을 쏟을 여력이 없어. 보헤미아에서 이사람을 인정을 안해. 보헤미안과 폴란드인들이 반란을 자주해. 투르크신경 내부신경에 황제관을 못쓰고 킹킹하고 2년 만에 죽어. 

Albert the Magnanimous KG (10 August 1397 – 27 October 1439) was King of Hungary and Croatia from 1437 until his death and member of the House of Habsburg. He was also King of Bohemia, elected King of Germany as Albert II, Duke of Luxembourg and, as Albert V, Archduke of Austria from 1404.[1]

 

 

아들이 

 

Ladislaus the Posthumous, known also as Ladislas (HungarianUtószülött LászlóCzechLadislav Pohrobek, 22 February 1440 – 23 November 1457)

 

라디스라우스. 딱 하나야. 아빠 죽을때 얜 엄마 뱃속에 있었어. 이런애를 죽고 낳았다고 포스트휴머스. 해. 프랑스 장1세가 이 포스트휴머스.야 5일만 살고 죽은 왕.

 

헝가리.는 당장 아래 오스만이 문제야. 저 애기가 왕 자리는 안된다. 하는 이들이 들고 일어나는겨. 이때 얘들이 원하는 왕이 폴란드의 야기에워.의 자식이야. 

 

Władysław III (31 October 1424 – 10 November 1444), also known as Władysław of Varna, was King of Poland from 1434, and King of Hungary and Croatia from 1440, until his death at the Battle of Varna.[1]

 

이사람이 브와디스와프 3세. 죽은 요가일라(야기에워)의 아들이야. 크로아티아 에서 내전이 붙은겨. 야기에워 쪽과 저 알베르트 어린아기 쪽. 야기에워 지지파 가 이기고. 이 사람이 폴란드 킹.에 헝가리 킹.이 돼. 헌데 왕이 되고 4년 후에. 바르나 전투. 불가리아 동쪽이야. 오스만애들과 전투에서 죽어. 

 

이후 헝가리(크로아티아)는 이전 귀족가문에서 왕 하다가 바로 다시 야기에워 가문이 킹. 하다가 다시 다른 가문이 킹 하다가. 합스부르크. 우산으로 들어가는거고.

 

보헤미아.는 저 애기가 커서까지 킹 하다가 핏줄 끊기고. 다시 야기에워가문이 헝가리랑 같이 킹 해.

 

이 야기에워 가문이. 요가일라 그 리투아니아 페이건에서 기독교 세례 받아서리 헝가리 킹 루이와 폴란드 공주 사이의 헤드위그 랑 결혼해서리. 폴란드 킹에. 헤그위드 언니 마리의 땅 헝가리의 킹.에 그 언니가 시집간 룩셈부르크의 보헤미아 킹.까지 하면서 폴란드에서 2백년 가까이를 가는겨. 골때리는겨.

 

저 야기에워 애들이 헝가리 킹 보헤미아 킹 하고. 다음에 합스부르크 가 저길 다 먹는겨.

 

이 야기에워 가문에서 여자핏줄로 또한 스웨덴 킹도 하는겨. 얘가 또 지기스문트.이름일껴. 얘때메 플란드가 결국 망쪼가 들걸랑. 얘가 러시아에 뎀비고. 지 고향 스웨덴에 뎀비다가 이 폴란드가 폭삭 망하는겨. 얜 미친놈한테 암살당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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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rusade of Varna was an unsuccessful military campaign mounted by several European monarchs to check the expansion of the Ottoman Empireinto Central Europe, specifically the Balkans between 1443 and 1444. It was called by Pope Eugene IV on 1 January 1443 and led by King Władysław III of PolandJohn HunyadiVoivode of Transylvania, and Duke Philip the Good of Burgundy.

 

바르나 십자군. 저 헝가리 킹이 되고 바로 폴란드 킹이 되는 야기에워의 아들 브와디스와프3세. 

 

아래에서 오스만이. 서기 1300년 이후로 이제 150년 가까이 된겨. 불가리아 전쟁 터지고 백년 된겨. 바로 위 헝가리. 옆 세르비아. 막막 처먹는겨.

 

Murad II (June 1404 – 3 February 1451) (Ottoman Turkish: مراد ثانى Murād-ı sānīTurkish:II. Murat) was the Ottoman Sultan from 1421 to 1444 and 1446 to 1451.

 

이때 오스만 술탄이 무라드 2세. 

 

아직 오스만은 아나톨리아 조차도 여러 베이리크. 술탄들이 있어. 이걸 다 안 묶은 상태에서 계속 처 올라간겨. 백년 전에 카탈란 컴퍼니.를 비잔틴 애들이 암살안하고 그대로 뒀으면 오스만은 없었을껴. 지도가 바뀌었을껴 지금. 아예 세상이 다른 판일수도 있어 지금.

 

 

저 무라드2세.의 아들이. 음청 대마왕. 정복자 타이틀이 메메드 2세야. 얘 자식이 바예지드 2세. 이 자식이 셀림1세. 때에야 이집트까지 먹는겨.

 

무라드2세의 아들. 메메드2세 때에야 아나톨리아 반도. 지금 터키땅을 통일을 한겨. 150년 지나서야. 헌데 저 와중에 계속 저 불가리아를 넘어간겨. 배후는 그냥 두고. 콘스탄티노플 을 점령하고 나서야. 아래 레반트로 간겨 얘들이. 

저때 왕이 리투아니아 태생의 요가일라 야기에워.의 자식이 헝가리 크로아티아 킹에 폴란드 킹이걸랑. 위에 보헤미아.는 어린애기 킹. 여기 병력들이 십자군 이름으로 모여서 저 흑해 서쪽의 바르나.로 간겨. 저 야기에워 아들이 선두로.  몰도바에 왈라키아에 교황령에 튜튼기사단에. 
2년간. 니시 전투. 즐라티차 전투. 마지막 바르나 전투. 왕까지 죽고. 오스만의 대승리.
그리고 십년 후에. 구석탱이 남은 콘스탄티노플.을 먹는겨. 이 무라드 2세의 아들 메메드2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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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irst Battle of Olmedo, between Castilian forces and those of Navarre and Aragon, took place on 19 May 1445 outside Olmedo in Castile (now in the province of Valladolid, Spain).

 

올메도 전투. 카스티야. 와 아라곤. 이 올메도.의 타운의 세금을. 왜 니가 갖냐 하는 전투. 

The Second Battle of Olmedo was fought on 20 August 1467 near Olmedo in Castile (now in the province of Valladolid, Spain) as part of the War of the Castilian Succession between Henry IV of Castile and his half-brother Alfonso, Prince of Asturias.

 

두번째 전투.는 22년 후. 카스티야 후계자 전쟁.이 또한 여기 올메도 근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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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lbanian–Venetian War of 1447–48 was waged between Venetian and Ottoman forces against the Albanians under George Kastrioti Skanderbeg. 

 

알바니아 베네치아 전쟁. 
베네치아. 는 해상무역으로 먹고살아. 이들이 제일 중요한 길목이 아드리아해변이야. 크로아티아해변에서 알바니아 해변. 의 해적들이 특히 골치야. 여기가 막히면. 베네치아는 죽는거야. 해서 여기 해변 곳곳이 또한 베네치아 요새야. 동맹이어야 하고. 
알바니아.의 저 해변의 귀족과 동맹이었어. 이 귀족이 암살당해. 여기 핏줄이 없어. 여자가 이 해변 땅을 베네치아 에게 주는겨. 알바니아 귀족들이 반발해. 베네치아.역시 저기가 목숨줄 중 하나야. 싸워. 그러다 화해 하는겨. 그리고 오스만이 옆의 세르비아에서 쳐들어오고. 바다에서도 쳐들어올껴. 같이 오스만 무찔르자. 하고 끝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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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irst Margrave War (German: Erster Markgrafenkrieg) from 1449–50 was the result of disputes between the Free Imperial City of Nuremberg and Albrecht III Achilles, Elector of Brandenburg.[1] Numerous towns in Franconiain modern Germany were badly affected by the war.[2]

 

마그레이브 전쟁. 마그레이브. 마퀴스. 후작. 뉘른베르크 자유도시.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의 전투. 영역 전쟁이야. 브란덴부르크.가 후작이 된지 3백년이 되어가. 늦게 출발했어. 호헨졸레른 가문. 나중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제.가 나오는 그 호헨졸레른.의 브란덴부르크.

 

살리안 지고 작센 지고. 룩셈부르크 지고 합스부르크 의 황제가문을 이어서리 이 호헨졸레른.이 독일을 마침표 찍어.

 

The Second Margrave War (German: Zweiter Markgrafenkrieg) was a conflict in the Holy Roman Empire between 1552 and 1555.

 

2차 마그레이브 전쟁. 저것도 호헨졸레른 가문들이 방계로 찢어서리 야금야금 처먹는겨. 

 

 

 

The Battle of Castione was fought between the Golden Ambrosian Republic(Milan) and the canton of Uri on 6 July 1449.

 

카스티온 전투. 27년 전 아르베도 전투. 의 연장전. 스위스 캔톤과 밀라노. 그 밀라노 만 삐쭉 접한 스위스 국경선. 스위스가 복수전 하러 온겨. 스위스가 져.

 

In the Battle of Giornico (28 December 1478) a Swiss force of 600 defeated 10,000 Milanese troops.

 

저 부근에서 30년 후에 또 싸워. 죠르니쵸 전투. 스위스 600명이 밀라노 1만명을 이겼어

 

The Battle of Crevola was fought in the spring of 1487, 

 

십년후 또 저기 아래서 싸워. 스위스가 더 내려가서 더 먹을라고.  크로볼라 전투. 이건 밀라노가 이겨. 이걸로 저기 국경선은 정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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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에하자. 

 

 

King Władysław III of Poland in the Battle of Varna, by Jan Matejk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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