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라는 도시국가가 나오기 전이야. 신화에서 로물루스.가 쌍둥이 동생 레무스.를 죽이고 로마.를 세운건. 

 

the history of the Roman Kingdom began with the city's founding, traditionally dated to 753 BCE with settlements around the Palatine Hill along the river Tiberin Central Italy, and ended with the overthrow of the kings and the establishment of the Republic in about 509 BCE.

 

기원전 753년.이야  날짜도 있어. The ancient Romans were certain of the day Rome was founded: April 21, 

 

저날 건국일 비슷한 축제를 하겄지. 쪽빠리네도 건국일이 찍혀.

 

日本書紀に紀元前660年1月1日 (旧暦)とあり[2]、その即位月日を明治に入り新暦に換算した日付である。

 

建国記念の日(けんこくきねんのひ)は、日本国民の祝日の一つ、日本の建国を祝う日で、日付は2月11日1966年昭和41年)制定。

 

쟤덜 건국기념일 제정했다고. 건국절 논쟁  하는거지.  한심한거지.

 

아 증말 이놈의 땅은 역사논쟁하는 짓거리 보믄. 가래침이 티나와

.

 

 

저기서 보믄 로마는 킹덤이 전 753년이야. 공화정이 전509년이야.

 

저 로물루스 전에 저 이탈리아 반도.에 살았던 이들은. 포강 po r. 밑에 에드루이아.에 에트루이아 사람들.이 있었어. 이 사람들은 어디서 왔는지 설이 분분해. 터키땅 아나톨리아에서 왔다는 설이 많고. 글고 저 라티움.latium. 에 라티니. 라틴족이 원래 있었어. 라틴어족이 인도유러피안족으로 보믄 저 라틴족은 카스피해 북부 스키디아에서 온거겠지. 그 아래 노란색 이태리 남부와 시칠리아.에 그리스 사람들이 또한 살고 있었어. 그리고 페니키아 사람들도 있었고.

 

 

저기를. 로물루스.의 조상인 아이네아스.가 트로이전쟁에서 지고 아나톨리아의 트로이야.에서 사람들 데리고 저 라티움의 쿠파이.에 닿은겨. 그리고 삼사백년 후에 후예인 로물루스.가 킹덤을 세운거지. 그리고 저 킹덤이 공화국이 되서리 나중 로마제국이 된겨.

 

저 지도 보믄. 알프스 위에는 골족.이란 켈트가 있었던거고. 이들이 가끔 넘어와서 약탈하는거고 고대 로마를. 그래서 나중 기원직전에 카이사르.가 알프스 넘어 점령하는겨 유럽대륙을. 그 이야기가 갈리아전기.인거고

 

그러다가. 기원후.2세기에 다른 게르만인 롱고바르디.가 내려오고. 고트족이 서로마 엎어버릴때 이 롱고바르디.는 이태리 중부북부에서 자기들 킹덤들 2백년 유지하다가. 샤를마뉴(카를대제)가 유럽 통일할때 내려와서리 이태리 남부로 쫓기내려가는거고.

 

 

저기서 로마는 공화정을 전 509년으로 봐.

 

고대 그리스는 어드런지 연도 보자 

 

Before the Athenian democracy, the tyrants, and the Archons, the city-state of Athens was ruled by kings. Most of these are probably mythical or only semi-historical.

 

아테네.가 민주정. 참주들. 아크론들.이 있기전에 아테네란 도시국가에 킹들이 있었다.

 

일단 킹덤은 중요해. 킹이 다스리는 덤 킹덤. 킹덤에서부터 문명이 시작되는겨.

 

고대그리스.의 킹의 시작은 

 

Cecrops /ˈsˌkrɒps/ (Ancient Greek: Κέκροψ, Kékrops; gen.: Κέκροπος) was a mythical king of Athens who, according to Eusebius reigned for fifty years. 

 

케르롭스.로 봐. 

1556–1506 BC. 대략 이때로 겐또쳐.
민주정의 기반을 닦은 이는 솔론.이란 사람으로 봐

Solon (GreekΣόλων Sólōn [só.lɔːn]; c. 638 – c. 558 BC) was an Athenian statesman, lawmaker and poet. He is remembered particularly for his efforts to legislate against political, economic and moral decline in archaic Athens.[1] His reforms failed in the short term, yet he is often credited with having laid the foundations for Athenian democracy.

 

하튼 고대 그리스 고대 로마의 민주정 공화정은 지난번 언급한걸로 넘어가.

 

저 지도의 지명을 알아둬 일단. 아이네아스.니 단테 신곡이니 고대로마 이야기 볼때 저 지명 이해 없으면  무의미해. 저 에트루이아.가 단테때 토스카나 지방이야. 지금도. 저기 포강. 로마지나는 테베강.  tiber river. 나폴리 naples 있는 깜바니아 지방. campania. 발굽 아래 칼라브리아. calabria . 깜바니아 맞은편 산맥 건넌곳이 아푸리아. apulia 지방.

 

이태리 저 땅이 전체 30만 제곱키로야. 시칠리아섬이 2.5만 제곱이야. 시칠리아섬 옆에 사르디나.는 2.4만제곱이야. 그 위의 나폴레옹의 섬.은 프랑스 땅이야. 저 반도만 대략 25만 제곱인거지. 한반도가 22만제곱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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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브리튼.에서는 서로마 망하는 5세기 초. 로마에서 먼 지역이니 로마세력이 더 약해서리 410년에 로마 나가고. 게일 이란 켈트족 땅이 되었나 싶더니 앵글족 색슨족.이라는 게르만들이 덴마크 주변에서 넘어오고. 더하여 바이킹 이라는 게르만들도 넘어오고. 

 

앵글로 색슨의 칠왕국체제에서 웨섹스의 알프레드 더 그레이트.가 앵글로 색슨을 통일하고. 손자인 애덜스턴.이 데인로의 바이킹을 어느정도 내쫓고. 더 킹 오브 더 잉글리쉬. 첫 타이틀을 취하는게 930년 전후야.

 

이때 대륙에선. 메로빙거 실재 시작인 클로비스1세. 독실한 그리스도가 되서리 프랑크왕국으로 통일전쟁을 시작해. 3백여년 후. 방계인 카를 마르텔이 무슬림 내쫓아서 피레네 산맥넘어로 보내고. 손자 샤를 마뉴(카를대제)가 유럽을 통일해. 서기 800년. 그리고 바로 세아들이 분열해서 나눠 땅을. 프랑스 이태리 독일지역.

 

저때 비잔틴은 아나톨리아 콘스탄티노플에 있고. 무함마드가 티나와서리 이슬람.이란 새로운 종교가 나오고 우마이야 왕조섰다가 얘들은 이베리아반도 스페인땅 점령하고. 이어 바누하심인 압바스왕조가 이어가서리 바그다드로 수도 옮기고 본격적 이슬람 황금시대를 열고. 사산왕조란 이란애들은 여기에 묻히고. 아나톨리아.의 비잔틴제국은 점점 땅 줄어들고. 

 

 

쉼.

 

 

The extent of the Angevin Empire around 1172; solid yellow shows Angevin possessions, checked yellow Angevin hegemony

 

지난번에 1172년의 이 영국 지배하의 지도그림.에서 백년전쟁 이야기했지만 말야.

 

백년전쟁이 저 서유럽사를 가름하는 이야기라고 했는데.

 

The Hundred Years' War was a series of conflicts waged from 1337 to 1453

 

저 1453년.은 중요한 해야. 백년전쟁 끝나는. 저 해에 비잔틴제국의 콘스탄티노플도 함락이 돼. 십자군전쟁이 일단락이 되는 해이면서 서유럽 체제가 확 개편이 돼.

 

막 중세가 지는 지점이야 또한. 르네상스가 이태리에서 본격적으로 물이 오르는 시기야.

 

 

그럼 중세라는 5세기에서 15세기의 천년의 기간을 더 이어서 르네상스 지나는 기간들을 백년 전쟁 포함해서 어드래 봐야 이해가 편하냐는 거지. 

 

곰곰 생각해 보면 말야. 교황 대 군주(신성로마제국 황제,와 킹덤의 킹들. 특히 황제). 그리고 이어서 프랑스와 에스파냐 의 대결로 보면 돼 이걸. 물론 짐만의 독자적인 해석이야. 

 

 

교황 대 황제.

 

프랑스 대 에스파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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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대 에스파냐. 의 국면은 나중 좀 더 풀어서 영국 대 프랑스 대 에스파냐. 로 가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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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로마제국 황제(이하 황제)의 시작은 샤를 마뉴.(카를대제)야. 서기 8백년. 독실한 그리스도야. 그리스도의 힘으로 통일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야. 로마.에 직접 가는겨. 가서 대관. coronation 관을 써. 무릎꿇고 교황으로 부터. 

 

교황의 권위가 확 서는거야 이때부터. 

 

서임권.이라는 각 영지의 주교. 대주교.의 선임권이 교황에게 부여되고. 이 교황은 각 영지들의 군주들이 계승 또는 임명 될때도 투표권을 행사해 배후에서. 그리고 황제를 뽑는 선제후.에 교황의 사람들인 대주교들이 포진이 돼. 

 

교황은 태양이고 황제는 달이야
교황은 신권의 대리인이고 황제는 속세에서 교황을 대리하는 사람일 뿐이야.

헌데. 바로 다음 대 부터 이 유럽땅이 분열하는거지. 세아들에게 각각 삼분의 일씩.
그러면서 프랑스는 독자적인 넓은 킹덤이 되고. 이탈리아는 킹덤들과 영지로 나뉘고. 독일땅만 신성로마제국이 돼. 
그래도 교황의 주교들은 저 독일 땅 외의 땅에도 영향력을 행사를 해.


헌데 저러면서 또 싸우는거라. 아 교황의 힘이 약해지는겨. 
공후백자남. 이란 영주들이 있지만. 프랑스 땅에서도 왕은 있지만 지들끼리 또 서로 싸워. 프랑스 왕의 직속 영지는 웬만한 후작 백작땅보다 작아. 지들끼리 막막 싸워 땅따먹기.
독일땅에서 열라 싸워 서로. 
특히 baron. 배론. 이라는 남작. 이들은 독고다이들이야. 황제나 왕의 영향력이 없어 거의. 걍 독자적으로 남 땅 빼먹는 전쟁 자잘하게 해. 그러다 정치적 눈치를 볼 뿐이야. 이 남작 계층이 복속하는 제후가 되는건 중세 후기에야 그리 돼.

샤를 마뉴.가 죽고 814. 이후에 또 내전들 저리 하다가. 오토1세 때에야 어느정도 정리가 돼. 962년에 대관식을 해. 150년 만에야 수습이 되는겨.
오토 1세 직전 40년 동안은 황제가 없었어. 

There was no emperor in the west between 924 and 962.

 

저리 오토1세가 힘이 생기면서, 로마의 교황과 권력 충돌을 하는거지. 너  내 군사력 힘없으면 조또 아니니께 서임권 달라. 황제 선거권도 개입 말라. 이때부터 카톨릭이랑 세속 권력의 힘겨루기가 본격적으로 돼. 

 

오토1세는 그러면서 협박하는거지. 비잔틴에 붙는다. 비잔틴의 그리스 정교 그거 믿을 수도 있다 로마 카톨릭 버리고. 물론 허세겄지만.

하튼 샤를 마뉴와의 14년 동거생활 반짝하고 150년이 힘이 없었어. 그러다 더 힘이 없어지고.


The Investiture controversy or Investiture contest was a conflict between church and state in medieval Europe over the ability to appoint local church officials through investiture.[1] By undercutting imperial power, the controversy led to nearly 50 years of civil war in Germany. According to Historian Norman Cantor, the investiture controversy was "the turning-point in medieval civilization", marking the end of the Early Middle Ages with the Germanic peoples' "final and decisive" acceptance of Christianity. More importantly, it set the stage for the religious and political system of the High Middle Ages.[1]

It began as a power struggle between Pope Gregory VII and Emperor Henry IV in 1056.[2]

 

인베스티쳐. 사람한테 인베스트. 베팅하는겨 투자. 서임권. 저기선 오토1세보다 백년지난 하인리히4세부터 시작했다 고 하지만. 이미 시작은 오토 1세였어.

 

In October of that year a diet of the German princes in Tribur attempted to find a settlement for the conflict, conceding Henry a year to repent from his actions, before the ratification of the excommunication that the pope was to sign in Swabia some months later

 

Henry was approaching, took refuge in the castle of Canossa (near Reggio Emilia), belonging to Matilda. Henry's troops were nearby.

 

Henry stood in the snow outside the gates of the castle of Canossa for three days, from 25 January to 27 January 1077, begging the pope to rescind the sentence (popularly portrayed as without shoes, taking no food or shelter, and wearing a hairshirt - see Walk of Canossa).

 

카노사의 굴욕. 오토1세의 짱돌이 하인리히 4세한테 떨어진건데. 백년후에.

 

 

로마 카톨릭 교황은 점점 힘이 약화된겨. 그러다 하인리히4세가 공식적으로 대든겨. 납치까지해. 로마사람들 도움으로 교황은 탈출을 해. 그리고 파문.하겠다 협박한 것을 공식화 하겟다는거지. 

 

excommunication. 커뮤니케이션.을 ex 익스. 아웃. 하겠다는겨. 끊는겨. 파문. 문파의 문을 뽀개 닫는겨. 문으로 못들어가. 

 

이 파문이란 느낌이 당시 사람들에겐 죽음이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승인이 되고 7백년이 지난겨. 사람들은 그리스도 아래 사는겨. 

 

파문을 당하면 그 사람뿐만 아니고 그 영주의 영지도 파문이야. 성무 금지야. 미사도 못봐. 아이들 태어나는것도 안봐줘 사제가. 그 정치적 부담감도 무지 큰거지.

 

더군다나 황제 아래 여러 제후들이 있걸랑. 눈치볼 수 밖에 없어. 교황이 아무리 힘이 없다손 치더라도 아무것도는 아니걸랑.

 

카노사의 굴욕. 하는데 카놋사.의 성이 롬바르디아 지역 이태리북부 아펜니 산맥 기슭에 잇걸랑. 1월 말이야. 삼일동안 저 성문앞에 서있었대. 신발도 안신고 먹지도 않고. 헤어셧 .시실리.라 해. 거친 옷감 머리수건이걸랑 참회할때 쓰는. 

 

교황이 용서해준다 하미 보내는거지.

 

Born 11 November 1050

 

하인리히.가 저때 27살 막 넘은거걸랑.

 

 

Born c. 1015

 

교황은 저때 대략 62살이야. 교황 생년은 기록을 안해 원래. 

 

노인한테 당한거지 어린이가.

 

 

저때부터 하인리히4세는 이를 가는겨. 한이 맺힌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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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1천년의 지도를 보믄. 프랑크의 샤를마뉴가 이태리 중북부 점령하고. 그이후 로마 윗쪽은 저리 롬바르디아. 베로나 후작령. 토스카나 후작령. 로마교황 직속령 로마냐. 로 나뉘지만 저 안에도 통제 안되는 도시국가들이 있고.

 

해안에 저 제노바. 피시. 아말피. 베네치아.는 독자적 공화국들이고
로마 아래로 스폴레토. 베네벤토. 살레르노.는 위에서 내려온 롱고바르디 족이고. 
이태리 맨 아래는 비잔틴 제국령이고
시칠리아.는 에미레이트. 즉 무슬림의 땅이고.
옆에 사르디나 섬은. 걍 해적들 땅이야.


이태리는. 완전히 찢어진 나라가 된겨. 어찌보면 서로마 망하고 부터는 470년에. 그때부터 19세기에 이태리 왕국.으로 통일하기 전까지 1400년을 저리 흩어져 있는 상태로 지낸거걸랑.
저게 더 찢어져. 이태리 북부는 코뮨.으로. 이태리말 코무네. 자치도시들로 나뉘어져

 

Member cities of the first and second Lombard League.

 

걍 자잘한 도시국가들이 되는겨. 

 

헌데 저런 나뉨이. 르네상스를 맹그는데 또한 크게 일조를 하는거지만

 

 

이탈리아가 르네상스 이후에 힘을 못쓰는 나라가 된건. 즉 고대 로마부터의 그 천오백년의 힘을 못 활용한건 저런 힘들을 하나로 못모은데에 있어. 너무 늦은거지.

 

그럼 독일도 늦게 나중 나폴레옹 몰아내고서야 통일을 했는데 왜 이태리보다는 쎄냐? 하는 질문이 생겨. 이건 나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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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 마뉴 이후에 이탈리아의 힘이 집중되지 않았어. 통일된 힘이 없어. 이때 비집고 들어오는게 아래 북아프리카 무슬림들의 해적들이야.


이 해적질. 로 저기 시칠리아 섬까지 점령도 하고. 나중엔 얘들이 교황까지 납치하려하고. 저 이태리 전역을 무슬림 해적들이 쳐들어가서리 해적질을 해. 천년을 해 이 후부터. 프랑스가 알제리 식민지 할때까지.

공포야 공포. 특히 이태리 해변 전역은. 특히 저 서해안과 북쪽 제노바까지. 동쪽엔 베네치아 해군이 있어서 덜했어 그나마. 저걸 같이 힘을 합쳐서 막을 그런 중심이 없었던거야 이탈리아가.

샤를 마뉴 이후 2백여년을 저리 해적질을 당해. 시칠리아섬을 뺐기기도 했어. 여기서 백년을 점령을 해 무슬림이. 
이탈리아 남부 사람들이, 이때 불러들이는거야 노르망디의 기사들을. 프랑스 서북부에 노르족.

저 카놋사의 굴욕이 1077년.
저 이전 에 정복왕 윌리엄이 바다건너서리 잉글랜드를 먹잖냐. 1066. 헤이스팅스 전투. 이때부터 잉글랜드는 윌리엄의 자식들이 지금까지 지배를 하는데.
이 윌리엄이 노르망디 공작이잖오. 노르족이야. 게르만 역시. 
이 노르족 프랑스 기사들이 예루살렘 성지 순례하다가 오는길에 저 발굽 지역 아풀리아 땅에 도착을 해. 저 지방 큰손들이 이들을 꼬셔. 여기 비잔틴이랑 저 무슬림들 몰아냅시다 우리 힘합쳐서. 그리고 여기 롱고바르디 족 애들도 몰아냅시다.

서기 천년 직전에 이들이 사람들 몇십면 데리고 와. 이들이 수십년에 걸쳐서 각개전투를 하는겨. 이 노르족인 게르만들이 이들을 다 몰아내고 이태리 남부랑 시칠리아섬을 지배하는겨.

Islamic rule over Sicily was effective from 902, and the complete rule of the island lasted from 965 until 1061. The turn of the millennium marked the end of the darkest period of Italian history.

 

In the 11th century, the Normans occupied the Lombard and Byzantine possessions in Southern Italy, ending the six century old presence of both powers in the peninsula. The independent city-states were also subdued. During the same century, the Normans also ended Muslim rule in Sicily. Norman rule in what had once been Byzantine territory naturally angered Byzantium, which in 1155 made a last attempt under the Emperor Manuel I Komnenos to reassert its authority in Southern Italy. But the attempt failed, and in 1158 the Byzantines left Italy.[citation needed] Unlike the Norman conquest of England (1066), which took place over the course of a few years after one decisive battle, the conquest of Southern Italy was the product of decades and many battles, few decisive. Many territories were conquered independently, and only later were all unified into one state. Compared to the conquest of England, it was unplanned and unorganised, but just as permanent.

 

이슬람이 백년 지배하다 시실리섬을. 서기 천년을 지나며 남부 이태리 역사의 어둠의 일장을 끝내다. 

11세기. 노르만 노르족들이 롱고바르디와 비잔틴이 갖은 남부를 점령. 6백년의 이들 시대를 마감시키다. 나중에 비잔틴이 다시 달라고 했지만 쌩깠다. 노르족들이 잉글랜드를 점령할 때는 대규모의 전략적 전쟁이었지만, 이태리 남부 점령은 수십년동안 각개전투로 막막 걍 해서리 이긴 과정이었다. 나중에야 합쳤다 이 노르족들은. 잉글랜드 점령때완 다르게 계획적이지도 않았고 조직적이지도 않았지만 그후 오래 점령했다. 

 

 

이들의 후예가. 아  위대하신 분. 프리드리히 2세야. 

 

똑같은 이름의 그 나중 1700년의 프리드리히 2세인 올드 프리츠 말고. 이 올드 프리츠.는 황제는 아니걸랑 프로이센에 프리드리히 두번째라 같은 이름일뿐인거고.

 

 

Frederick II (26 December 1194 – 13 December 1250; SicilianFidiricuGermanFriedrich) was King of Sicily from 1198, King of Germany from 1212, King of Italy and Holy Roman Emperor from 1220 and King of Jerusalem from 1225. His mother Constance was Queen of Sicily and his father was Henry VI of the Hohenstaufen dynasty

 

엄마가 시실리섬의 여왕. 아빠가 호헨슈타우펜 가문의 하인리히 6세.

 

Speaking six languages (Latin, Sicilian, Old Germanic, Langues d'oïl, Greek and Arabic[4]), Frederick was an avid patron of science and the arts.

 

라틴어. 시실리어 독일어 그리스어 아랍어 까지 아주 능수능란하게 했어. 
시실리섬이 무슬림 백년 지배잖아. 노르족이 쫓아냈지만 이들 무슬림들을 고대로 걍 살게했어 차별안하고. 죽이지도 않고. 이 속에서 자랐어. 여긴 종교의 차별이 없었어. 완전히 열린 곳인거야. 여기서 아랍어까지 걍 듣고 배우는겨. 
교황이 십자군 가래. 제발 좀 가라 제발 좀 가라. 협박  해. 파문 한다 막막 하고. 
아. 머 이슬람이 어때서리. 짜증 나지만. 걍 가.
거서 칼질 한번 안하고 쿠르드의 그 살리만의 동생의 아들하고 화기애애 협상하고 와. 예루살렘을 양분해. 싸우지 맙시다. 
프리드리히 의 하인들도 무슬림이 있어. 수하들도 무슬림이 있어. 예루살렘 성안에서리 무슬림 종소리 들리면 프리드리히 황제의 사람들이 무릎 꿇고 기도해. 황제는 가만 딴짓해. 쿠르드 사람들이 무슬림들이 놀래. 머 이따위 프랑크인간이 황제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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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이야기는 이야기가 너무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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