獻帝初平元年(190年),關東聯軍以討董為名起兵[2],但大多並未對董卓發兵;190年1月17日,董卓遷都長安,曹操起兵追擊,在滎陽汴水遭受徐榮擊敗,隨後聯軍發生內鬨而解散。

 

동탁이 낙양을 접수해 189년. 조조 튀고 진류에서 처음으로 거병해. 연말에. 그다음해 190년. 관동연합군. 저기서의 관.세키 는 낙양 의 사수관(호뢰관) 

虎牢关,又称汜水关. 의 동쪽이겠지. 연의에선 구분하지만 같은 입구야. 당때에야 호뢰관.이란 이름이 쓰여. 낙양 북서쪽. 연의에선 18개 지만 실제는 13개 연합군이고. 

조조가 거병할때 유비.는 

先主不甚樂讀書,喜狗馬、音樂、美衣服。身長七尺五寸,垂手下膝,顧自見其耳。少語言,善下人,喜怒不形於色。好交結豪俠,年少爭附之。

독서. 책읽기를 심히 즐기진 않았다. 저말이 디게 웃긴데. 좋아하지 않은게 아니라 깊게는 안좋아했대. 

저 심. 이란 글자를 보면

”是“”的本字。,金文

(甘,品味)

(匕,食匙酒勺),结构与“”相反;有的金文

在“匕”

上加“八”

(兮,感叹)。

造字本义:沉溺于美酒声色享受,生活安逸

품미. 맛을 보는 감. 더하기 식시주작. 밥 한숟갈에 술한잔. 침닉 우 미주 성색 향수. 생활안일. 술과 여색에 빠져서리 생활이 안일해지는건데.

 

그렇게 지나칠 정도로는 독서. 글읽기를 좋아하진 않았고. 말타기. 음악. 좋은 옷 을 좋아했다. 말이 적고 아랫사람에게 선했다. 기쁨 노여움을 드러내지 않았다. 호걸 협객과 사귀길 좋아했다. 나이가 어린이들이 그래서 막막 따라다녔다. 

 

저걸 보믄 유비가 샌님이 절대 아녀. 우리네는 유비를  샌님으로 알고 범생이로 인식하는데 절대 아녀 그게. 유방이랑  비슷해. 유방은 저기에서 글을 심히 좋아하지 않았다 는 것만 빼믄 돼. 유방은 글을 아예 안좋아했어 ㅋㅋㅋ. 

 

저 이어서 바로

中山大商張世平、蘇雙等貲累千金,販馬周旋於涿郡,見而異之,乃多與之金財。先主由是得用合徒衆。

중산.의 대상.인 장세평과 소쌍 등이 재산이  많아서리 말장사하미 돌아다니다 탁군에서 유비를 보고 달리 눈여겨 봐서 유비를 스폰한겨 해서 이 돈으로 유비가 무리들을 모았다.

 

이 부분을 이문열.이 장세평과 소쌍을 말장사로 각각 장비 관우 에 엮고 둘이 싸워서리 장세평 소쌍을 중재하고 도원결의 하는 개연성을 만드는겨. 잘 썼다고 봐 이문열은. 모종강본 연의는  뜬금없걸랑 도원결의과정이. 

 

靈帝末,黃巾起,州郡各舉義兵,先主率其屬從校尉鄒靖討黃巾賊有功,除安喜尉

영제 말 황건적때 각 주와 군에서 의병 나설때 유비는 교위.직의 추정.을 따라다니면서 황건적을 토벌하고 그 공으로 안희.의 위.라는 벼슬을 처음 받은겨. 여섯살 많은 조조나 그 또래 공손찬이나 원소보다  늦은겨. 조조 공손찬 손견 원소 는 당시 잘 나가는 이름떨치는 이들이고. 저때 유비는 탁군 부근 안희현.의 위. 尉 는 무관 장교. 군도 아닌 현.

 

 

頃之,大將軍何進遣都尉毌丘毅詣丹楊募兵,先主與俱行,至下邳遇賊,力戰有功,除為下密丞。復去官。後為高唐尉,遷為令。英雄記云:靈帝末年,備甞在京師,後與曹公俱還沛國,募召合衆。會靈帝崩,天下大亂,備亦起軍從討董卓。為賊所破,往奔中郎將公孫瓚,瓚表為別部司馬,使為青州刺史田楷以拒兾州牧袁紹。數有戰功,試守平原令,後領平原相。郡民劉平素輕先主,恥為之下,使客刺之。客不忍刺,語之而去。其得人心如此。魏書曰:劉平結客刺備,備不知而待客甚厚,客以狀語之而去。是時人民飢饉,屯聚鈔暴。備外禦寇難,內豐財施,士之下者,必與同席而坐,同簋而食,無所簡擇。衆多歸焉。

 

대장군 하진. 하진은 소제 오르기 전에도 영제 말에 대장군이었어. 관구의.를 단양에 보내서리 병들 모아서리 황건적 잔당들 치라고 해. 단양.은 지금 장쑤성 장강 아래 난징 그쪽이야. 저기에 유비가 같이가. 가다가 하비. 서주의 오른쪽. 아래 하상.이 있고 여길 꺾어 내려가서 단양 갈라했는데 저 하비에서 황건적 잔당들을 만난거지 저기서 공을 세우고. 하밀.의 승.이 돼. 하밀은 저 하비보다 훨 위 산동. 발해접하는 청주. 그러다 고당.의 위. 다시 령.이라는 고당현 이라는 마을의 짱이 되는데.저기까지가 조조랑 원소는 황건적 몰아내고 낙양서 벼슬할때 유비는 저짓 하다가 청주의 고당현의 현령.짱 이 되는거고. 저때 동탁이 낙양 접수하고 원소도 떠나고 조조도 떠나서리 거병하는 때야. 그리고 동탁이 칠때의 이야기는 정사 삼국지엔 없어. 

공손찬 따라서 연합군 참여해서리 사수관 에서 관우가 술 식기전에 화웅 죽이고 오는 이야기는 그래서 연의 의 소설일 뿐인데

 

저기 주.에 조조 거병할때 유비의 이야기가 나와. 영웅기. 

 

英雄記》,或稱《漢末英雄記》,是一部記錄了關於中國東漢末年的史書。內容記載了漢末軍閥的事績。作者為王粲

撰寫年代不明,但從《英雄記》內容明確記載208年的周瑜火攻曹操記錄來看,其著作下限當在王粲死去以前(217年之前)。

 

왕찬.이 쓴 영웅기. 동한 말의 사서. 王粲(177年-217年2月17日).왕찬 죽기 직전까지의 이야기.야. 진수 보다 훨 이전이지. 

영제말년. 즉 189년에 유비도 경사. 즉 낙양에 있었단 거지. 아마 황건적 잔당 물리치고 상 받으러 갔겄지. 조조가 튈 때 같이 패국.으로 튀었다는겨. 영제 죽고 십상시난 터지고 하진 죽고 동탁이 권력쥐고 소제 내리고 헌제 올리고 하며 천하 대란이 일어날때 유비도 역시 동탁을 치러 거병을 했다는거지. 

 

해서 저 영웅기. 주 다음의 공손찬 따라 다니며 공을 세우고 평원령.에 평원상.이 된거는 동탁이가 낙양 태우고 장안으로 숨고. 불탄 낙양에서 손견이 전국옥새 주워서리 튀고 하며 저 13개 연합군이 분열하고 싸울때 이야기야. 저때 공손찬을 따라댕긴겨.

 

장안으로 숨은 동탁. 13개 연합군이 어찌 해 볼 수가 없어. 문제는 군량이걸랑. 전쟁은 보급이 최우선이야. 포에니 전쟁 한니발도 보급이 막혀 진거걸랑. 가장 최우선이 보급이야 전쟁은. 헌데 이게 안되는거지 저 관동 연합군이. 흩어지면서리 서로 싸워 땅 뺏기 싸움이야 본격적으로. 

 

저기서 평원령. 은 현령. 현의 짱이고. 평원상.은 현보다 큰 평원군.의 상. 넘버 투가 되었다는거겠지.

 

상. 相 이란 말을 국상. 썰했을때 했지만 왜 저 서로 상.을 높은 자리에 단어로 쓰냐면

 

,甲骨文

(木,树)

(目,远眺),表示在高树上远眺。

造字本义:古人爬上高树远眺侦察,预警放哨

 

相 이란 글자가 처음 시작이. 높은 나무에서 멀리 보는 눈이야. 옛날에 높은 나무에 올라서 보초스는겨. 높은 자리에서 본다 해서리 저게 나중 왕 다음 자리에 쓰는겨 상.을

 

郡民劉平. 저기 보믄 평원군.의 민. 인 유평.이란 사람이 유비 밑에 있는걸 수치스럽게 생각해서리 자객을 보내서리 죽일라 했는데 오히려 저 자객을 유비가 환대를 해. 자객이 안죽이고 사정 말하고 그냥 가. 연의에 유평.은 없어. 그 주. 위서를 보면 유비가 평원군 상.할때 屯聚鈔暴。備外禦寇難,內豐財施,士之下者,必與同席而坐,同簋而食,無所簡擇。衆多歸焉。 인민들이 굶주려서 둔취. 마을을 벗어나서리 따로들 모여서 살면서 노략질 폭력질을 했다. 유비는 밖으로는 도적 난적을 맊고. 안으로는 재산을 늘리면서 베풀었다. 사.라는 가장 낮은 벼슬자리의 그 아래자리 사람과도 같은 자리에 앉아서리. 같은 밥그릇으로 먹었는데 가려서 좋은것만 골라 먹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다시 돌아왔다.

 

저기서 동석 동궤. 라는게 자리 위치도 차별 없고. 밥그릇도 똑같다는거지. 밥그릇 하나에 숟가락질 서로 한게 아니라. 저때는 사람 위치마다 앉는 자리 먹는 그릇 먹는 반찬이 다 예.에 따라 차별질  했걸랑 조선의 유교질 처럼. 예기. 라는 책은  더럽고 추하고 역겨운 책이야 그게. 

 

위서.라는 위나라 책도 저리 쓰는거 보면. 유비가 보통은 아니란겨 저게.

유비의 저 사양지심은 증말 어마어마해. 짜증  날 정도로. 결국 저게 유비의 힘이었겠지만. 보통 사람은 학실히 아냐. 쉽게 흉내낼 수 없어 유비를 또한.

 

유비는 호걸 협객. 호협과 사귐을 좋아하다. 배운거 그리 없고 원시적 정서의 교감을 즐기던 유비. 가진 것도 없어. 핏줄 먼 황족 그게 다야. 핏줄 하나면 다른 유씨들과 비교를 해도 유비는 머가 다르긴 다른거지. 저 유비가 스무살 아래 제갈량을 만나서 허섭한 나라 하나 갖는겨 그나마. 제갈량도 저런 유비마음에 끌린거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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