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Oktober 1841, etwa zwei Monate nach dem Bruch mit Regine, reiste Kierkegaard nach Berlin, wo er in der Nähe des Gendarmenmarktes Quartier nahm. Er hörte vor allem bei Schelling Vorlesungen und arbeitete auch bereits an seinem ersten Werk Enten – Eller, das in Deutschland unter dem Titel Entweder – Oder erschien. Von Schelling enttäuscht, kehrte er bereits Anfang März 1842 in die dänische Hauptstadt zurück. 1843 begab er sich noch einmal für einige Monate nach Berlin, wo er dasselbe Quartier am Gendarmenmarkt bezog, dessen Wirt ihm in angenehmer Erinnerung war. Die Reise und das alte Quartier stellten für ihn eine Wiederholung dar. Genau dies, Die Wiederholung, ist auch der Titel einer Schrift,[8] an der er in dieser Zeit arbeitete und in der auch diese zweite Berlin-Reise literarisch verwendet wird, wenngleich die wirkliche Wiederholung nach Kierkegaard nicht in der Realität, sondern nur kraft des Glaubens (kraft „des Absurden“) stattfinden kann, der alles möglich werden lässt (etwa Regine wiederzubekommen).  
 
키에케고 1813년생, 이 1841년 28세, 8월 11일 에 반지돌려주고 파혼통보하고, 10월 11일 과 12일 올젠을 만나서 마지막으로 대화하고, 그리고 바로 베를린에 가. Gendarmenmarktes  장다르멘 마르크트 근처에 거하면서, 사람들만나고 강의 듣는거야. 
 

 
Der Gendarmenmarkt ist ein nach dem ursprünglich hier angesiedelten Kürassierregiment Gens d’armes benannter Platz im Berliner Ortsteil Mitte des gleichnamigen Bezirks.   
 
저기가, 베를린의 최고 광장이고, 장다름 퀴라스 여단, 의 이름을 딴거고, 이 레지먼트 부대 의 원래 본부였고, 장 드 아름, 피플 컬렉션 오브 암즈, 군바리들 모임, 이라는, 프랜치 불어잖니. 불어소리를 그대로 쓴다고. 샤를7세 때 만든 부대를 그대로 따서 17세기에 브란덴부르크 에서 만든 퀴라쓰 부대야. 
 
cuirass (/kwɪˈræs, kjʊəˈræs/;[1] FrenchcuirasseLatincoriaceus) is a piece of armour that covers the torso,  
 
퀴라쓰, 라는게, 토르쏘, 몸통에 쪼끼 모양의 철갑옷 이야. 중세 하이미디벌 지나면서, 주렁주렁달린 갑옷을 버리고, 몸통에만 입는 이 퀴라쓰 를 다들 입어요. 퀴라쓰 라는게 프랜취고 가죽 이란뜻이고 가죽이든 메탈 이든 으로 간편하게 바뀌고. 이건 고대로마때 갈바 가 입었던거로 보고, 즉 고대로마땐 사령관 끕이 입는거고 기원직후에. 
 
hauberk or byrnie is a shirt of mail.  
 
기원전부터 입던게, 호버크, 베니, 메일, 불어 마이 라는겨. 체인메일, 이 메일 이란게, 우편이지만, 원래는 빽, 짝은 가방이고, 라틴으로 마쿨라 macula 이건, 얼룩점 이야, 이게 더가서 스티치, 작은 것들을 쑤잉 바느질 엮은겨. 철조각들 주렁주렁 달린게 메일, 체인메일, 마이, 라는거야. 이건 동서에서 고대부터 입던거고, 메일 이 짧아진 간편한게 호버크, 베니, 라고 해. 영화 드라마 에서 보는. 중세 후기 지나면서 는, 이걸 다들 버리면서 퀴라쓰 로 가는거고, 총이 등장하잖니. 
 
Lorica plumata, Lorica segmentata, Lorica hamata, Lorica squamata 
고대 로마때 군바리들 옷이, 로리카 플루마타 세그멘타타 하마타 스무아마타, 로리카 가 꿰맨거야 마쿨라들을, 마쿨라 가 곧, 스케일, 비늘 조각 들인거고, 철판조각조각 물고기비늘들을 엮은게 고대 군바리들 옷에, 또한 이게 진시황제 무덤들에 보이는 돌조각들 갑옷이고 무덤용. manica (Latinmanica [ˈmanɪka], "sleeve"[1]) or cheires by the Greeks  마니카, 케이레쓰, 고대그리스는, 저런 스케일 조각들합체가 아니라, 긴 판데기 철판을 엮은거고. 
 
15세기 프랑스 장다름 퀴라쓰 부대를, 그대로 본따서 17세기에 프러시아 에서 만들어. 프러시아 의 힘은, 프랑스 태양왕 루이 가 낭트칙령 취소하면서 위그노들을 쫓아내고, 그 위그노들을 프러시아 가 받으면서, 이게, 독일 이 된겨. 뒤쳐진 독일땅에 프랑스 의 선진문물이 들어가는거고, 프리드리히 2세 의 가정교사 도 위그노고, 프랑스껄 그대로 카피 해서 만든 이름에, 광장이야 저게. 
 
마켓 이란게, 쟤들 저런걸 크라이스트 마켓 이라고 해. 지저스 를 기리는 건물들이 있는 마켓 이야. 이게 광장이 되는거고 인간들 득실에. 바자르 bazaar 란건 페르시안 마켓, souk 쑤크 아랍애들 마켓, 바자회 열때는 페르시안 시장 여는겨 그게. 
 
키에케고 가 저당시 베를린에서, 셸링 의 강의를 듣곤 졸 실망해서 돌아와.
 
Friedrich Wilhelm Joseph Schelling ( 27 January 1775 – 20 August 1854),  
Johann Gottlieb Fichte (19 May 1762 – 29 January 1814) 
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27 August 1770 – 14 November 1831)
 
셸링, 피히테, 헤겔. 이 셋은 서로 면대면 한 애들이야. 서로 멘토 멘티고, 셀링 이 가장 어리고, 키에케고 가 저당시 60넘은 셸링을 직접 들은거고 피히테 헤겔은 이미 죽은거고.
 
The Dorotheenstadt Cemetery, officially the Cemetery of the Dorotheenstadt and Friedrichswerder Parishes,  
 
피히테 와 헤겔은, 도로티엔슈타트, 베를린 묘지에 같이 묻혀. 헤겔이 무신론자냐, 애매해 이게. 그러나, 얜 무신론자야. 피히테 는 완벽한 무신론자고, 오직 신은 모랄 을 위해서 어거지로 만 필요한거고, 이런 애들은 결국 니체 를 낳을 뿐이야. 칸트 는 피히테 와의 접촉을 끊어, 아 쟤 나중에 쟤 생각으로 인간들 대학살 애구나. 헤겔 은 이런 피히테 를 은근히 지지해 이색히는.
 
헤겔 에게 평가할 만한건, 얜 역사철학 이란걸로, 역사 를 정말 찐하게 본 애야. 주인 노예 변증법, 이건 최고야. 그러나 또한 이걸 제대로 이해 하는 애는 없는거고. 주인노예 변증법 이나, 키에케고 의 이더 오어, 나 후썰의 디어더쓰 , 어더, 이게 같은겨 이게.
 
In phenomenology, the terms the Other and the Constitutive Other identify the other human being, in their differences from the Self, as being a cumulative, constituting factor in the self-image of a person; as acknowledgement of being real;   디어더, 칸스티튜티브 어더, 
 
헤겔의 다이얼렉틱 에서 힌트를 받은게 키에케고 의 이더 오어, 인거고, 이게 후썰에 가서 디어더 더칸스티튜티브 어더 야. 이게 우습게도 말이지, 다양성 을 지원하는, 다양성 이 답이다 라는 개 그지 쓰레기 이념으로 엮이는겨 이게. 모두가 신이다 이따위 개 ㅈㄹ 들 소리가 나오는거고. 골때리는 생각흐름으로 전락이 되어버리는건데 저런 흐름들이. 
 
헤겔 은 역사 를 참 찐하게 본 애야. 동과 서를. 헤겔 까지의. 얜 확실히 알아, 동양이 쓰레기가 된 이유를. 중국이 너무나 미개해져 버린 이유, 그게 머여? 언어여 언어. 표의문자 라는 글자고. 어떻게 저따위 글자 를 여전히 쓰지? 표의문자 로는, 생각이 확장 될 수가 없어요. 중국문명 극동 문명이 쓰레기 가 될 수 밖에 없는건, 표의문자 라는 한자 때문에, 미개할 수 밖에 없는겨 이게. 헤겔이란 녀석이, 똑 똑 하더라고. 난 헤겔을 보기 전에 이미 알았지. 저걸, 일본 애들이 메이지 때 자기들 스스로 안거야, 아, 한자 버려야 한다. 하물며 같은 표음문자라도, 저 표의문자 세상에서 자라난 표음문자라서, 언어가 너무나 미개한겨 자기들 일본글자 소리 가나가. 전혀 발전이 없어, 그 천장이 한자 라서. 아 ㅅㅂ 일본어 버리자, 라틴글자 의 영어 쓰자 영어. 이런 자각이, 일본을 만들어. 
 
교착어, 가장 미개한게, 교착어 라서 아 졸 배우기 어려워, 이 미개한 버러지들은, 배우기 어렵다 며 그래서 그 어려운걸 지들은 안다는겨 ㅋㅋㅋ. 그래서 지들이 상당히 선진적인 두뇌라는겨. 기가막힌거야 이게. 이 미개한 판단 잣대질이. .한글 조선어는, 아주 초보적인 베이비 토킹 일 뿐이야..헤겔 은 저 기서, 절대이성으로 가면서, 신 그까이꺼 알게 돼, 라는, 얜, 무신론자야. .무신론자 하고는, 상종하는거 아냐..그렇다고 조선애들처럼 하나님 예수님 해대는 오컬트 애들과는, 더욱 상종하는거 아니고..
Slavoj Žižek (born 21 March 1949) 셸링 빨아대며 슬라브 만세 웨스턴은 악마 , 이 슬라보예 지젝 이란게 얼마나 미개한 버러지냐고. 이따위 버러지 를 또 미개한 뒤쳐진 애들은 좋아해. 얜 웨스턴 에선 그야말로 미개한 벌레 지능 취급 받는 애야. 니덜은 모르겠지만. 
 
극동에서 빨아대는 총균쇠 니 어쩌고, 조오올라게 미개한 애들이야 저게. 안쳐줘야 웨스턴 리딩 그룹 에선 저따위 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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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따위 글들이 먼 대단한 바이블인양 ㅅㅂ 조선빠닥에선 수십년 베스트 셀러여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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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난 안봤어 쟤 책. 몇줄 만 보고는, 닐퍼거슨 의 문명 어쩌고, 머 청나라가 유럽과 지디피가 맞먹었느니, 다 ㄱ 소리 , 곧 중국의 시대 ㅋㅋㅋ, 기가막히지 진짜. 안쳐줘 저따위 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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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43 begab er sich noch einmal für einige Monate nach Berlin, wo er dasselbe Quartier am Gendarmenmarkt bezog, dessen Wirt ihm in angenehmer Erinnerung war. Die Reise und das alte Quartier stellten für ihn eine Wiederholung dar. Genau dies, Die Wiederholung, ist auch der Titel einer Schrift,[8] an der er in dieser Zeit arbeitete und in der auch diese zweite Berlin-Reise literarisch verwendet wird, wenngleich die wirkliche Wiederholung nach Kierkegaard nicht in der Realität, sondern nur kraft des Glaubens (kraft „des Absurden“) stattfinden kann, der alles möglich werden lässt (etwa Regine wiederzubekommen).  
 
키에케고 가, 1841년 8월에, 올젠을 최종 만나고, 베를린에 그달 갔다가, 셸링 등 듣보고, 실망하고 돌아와서, 다시 베를린에 가는게 2년 후 1843년 이야, 몇달을 머물러요.  Die Wiederholung,  여기서의 느낌으로 쓴게, 독어로 비더홀룽, 으로 번역되는, 영역 레피티션 Repetition 이야. 
 
레피티션 이란건, 이전에 내가 말했듯이, 키에케고 에겐, 이건 좋은 툴이야. 미디에이션 이란 중간다리놓기 는 나쁜거고 얘한텐. 
 
이걸 영역된걸로 보면, 말이 졸라게 애매해요. 리앨리티 란 단어가. 오히려 독어 번역이 구분을 제대로 하면서 뜻이 보다 명쾌해지는데. 
 
wenngleich die wirkliche Wiederholung nach Kierkegaard nicht in der Realität, 
 
비르클리히 비더홀룽 이, 레알리테트 가 아냐, true repetition is not in reality. 이 문장이 핵심이야. 
 
진짜반복 이란건, 현실에 존재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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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을 보면, 비르클리히 도 리앨리티, 레알리테트 도 리앨리티, 아 시ㅂ 리앨리티 를 대체 멀 리앨리티 라고 하는건지. 
 
영역도 ㅅㅂ 암호인데, 하물며 한글역은 더 암호지 저게. 
 
독어에서 레알리테트, 는, 다자인, Dasein 이야. 다자인 이란건, 자인 이라는 빙, 이건 우씨아 야 E 선분의 E 야. 에쎈쓰가 에쎈쓰 가 겪는 C 콘크리트 의 현실존재 C 가 다자인 이야. 즉 저 리앨리티 는, 신쩍인 리얼 그딴게 아냐. 걍 현실의 리얼 리앨리티 야. 영역 한게. 비트겐 슈타인 이 그래서, 더 제대로 보려고 덴마크어를 한거고 오직 키에케고 의 글을 이해하려고. 
 
 
 
레피티션 으로 똑같은 왔다갔다 드릴을 뚫다 보면, 전혀 다른 장면에 접하는겨, 키에케고 에게 레피티션 이란건. 얜 이걸 좋은 툴 좋은 말로 쓰는거라고. 
 
또한, 흔히 생각하듯, 레피티션 한다지만, 그런 레피티션 이란 반복은, 없다, 라는거야 키에케고 가 말하고 싶은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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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피티션 이란 책은, 키에케고 의 캐릭을 두명으로 나눈거야, 작가 닉 콘스탄틴 상담사 와, 영맨 이라는 환자, 이 영맨이 키에케고 를 직접적으로 대입을 한거고. 작가 콘스탄틴 캐릭 이, 베를린을 갔다는것은 1843년 두번째 방문의 경험이고. 
 
He had written about repetition previously in his unpublished book Johannes Climacus.

When ideality and reality touch each other then repetition appears. When, for example, I see something in the moment, ideality intervenes and will explain that it is a repetition. Here is the contradiction, for that which is, is also in another mode. That the eternal is, that I can see, but in that same instant I bring it into relation with something else which also is, something that is the same and which will also explain that the other is the same. Here is a redoubling; here this is the question of repetition. Ideality and reality therefore collide.[6]

 
키에케고 가 이전에 쓴 출판안한책에서, 레피티션 이란 개념에 대해 써. 
아이디앨리티 와 리앨리티 가 서로 터치할때, 레피티션 은 발생해. 일례로, 어떤 순간의 것을 내가 볼때, 아이디앨리티가 개입을 해, 얘가 말해 그것은 레피티션 이라고. 여기에 충돌이 생겨, 또한 다른 모드로, 다른 형태 모습으로. 그러다가 또다른 것이 연상이 되는 순간이 있어 , 이게 이터널 이래, 아 ㅅㅂ 말 졸 어려운데, 걍 계속 생각 생각 해서 겹쳐지는거지, 그런 겹쳐지는 과거 회상 들이, 다 쎄임 쎄임 같은거라는 거지. 여기에 리더블링 이 생긴다, 더블 이란게 두개의 합체고, 합체 의 연속들의 겹침이라 치고, 여기서 드러나는게, 레피티션 의 문제. 아이디앨리티 와 리앨리티 가 충돌이 발생한다. 
 
결국 마지막 말 하려고 하는거고, 우리가 흔히 경험하는 문장이잖니. 이상과 현실은 다르다.
 
아이디앨리티 는, 상상의 나래속의 완전체 이고, 리앨리티 는 저기서, 헤겔에 하이덱거 의 다자인 이란, 현실 이야 안이비설신의로 경험하는. 저걸 그야말로 궁극의 신 적인 리앨리티 라고 생각하면 안돼요. 저따위가 다 번역의 문제고 사소한거지만 저런건 다 설명을 해줘야 한다고 단어 하나하나를. 단어 자체 가 개념을 무엇으로 갖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겨 의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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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 reports that he has met a melancholic[13] young man and has decided to become his confidant.[14] He says, "an observer[note 2] fulfills his duties well, he is to be regarded as a secret agent in a higher service, for the observer’s art is to expose what is hidden".[14] During his conversation with the Young Man he comes to understand that he is in love but he talks about his love as though it were just a memory. He says the Young Man "was deeply and fervently in love, that was clear, and yet a few days later he was able to recollect his love. He was essentially through with the entire relationship."  
 
콘스탄틴, 얘가 일종의 정신과 의사 행세 하는거고, 자기가 우울증 환자 영맨을 만났다, 얘의 배프가 되기로 했다. 콘스탄틴 자기는 어브저버 로써, 외부의 관찰자 시점에서 자기 의무를 잘 수행한다며 자뻑질에, 고도의 직종으로써 비밀요원처럼 활동하면서 숨겨진 것을 들춰내는게 자기 의 아 엄청난 직무 라는거지. 즉 영맨 의 우울증 안에 숨겨진 내면을 들춰주는 일이란겨. 그러면서 영맨과 대화하면서 이해를 하게 돼, 영맨이란놈이, 러브에 빠졌구나, 자기의 연인 이야길 단지 기억에 의해서 말하는거고. 콘스탄틴이 전해, 영맨 이란 애는 아주 깊이, 미치도록 러브에 빠졌다, 아주 분명했다, 며칠후 그는 자기 러브 연인을 추억 회상 레콜렉트 할 수 있었다. 그는 그 연인과 아주 완벽하게 엮여있었다. 
 
His observations lead him to conclude that the young man really isn't in love, but that the girl (he never calls her a woman) is "the occasion[16][17] that awakened the poetic in him and made him a poet."[18] He calls him the "sorrowful knight of recollection’s only happy love."[19] He has had his first love but that's not anywhere near the experience of marriage. Kierkegaard says the following in Either/Or, "The question, namely, is this: Can this love be actualized? After having conceded everything up to this point, you perhaps will say: Well, it is just as difficult to actualize marriage as to actualize first love.   
 
콘스탄틴이 관찰해보니까, 저 영맨이란 애는, 실재로는 러브 에 빠지지 않았다 라는 결론에 이르러. 단지 그 여자 그 걸, 영맨 은 그녀를 우먼 이라고 결코 부르지 않았다, 그 걸 은, 영맨 의 시쩍감성을 깨워써 시인으로 만들었다. 콘스탄틴 은 그 영맨을, "오직행복한러브만 추억 회상 모음질 하는, 슬픔의 기사" 라고 부른다. 그는 첫사랑 의 경험만 있지 결혼 근처까지 간 경험은 없다. 키에케고 는 다음출판책 이더/오어 에서 말한다. 문제는, 즉, 이거다: 이런 러브는 액추얼라이즈드, 실현가는한가? 모든것을 다 제쳐두고 이지점만 볼때, 당신은 말할지 모른다: 글쎄, 첫사랑을 실현하는건, 결혼을 실현하는 것만큼 어렵지. 
 
액추얼라이즈 란게 ㅅㅂ 이것도 애매한거지. 첫사랑을 실현해, 결국 결혼이 실현 이야? 결혼만 하면 실현이 된거야? 결혼을 실현하는것도 어려운거고, 첫사랑을 영원한 사랑의 실현 도 실현이고, 하튼 말이지, 문장 이란것들이, 사람의 말이란게, 따지고 들어가면 졸라 애매한겨 이게 모든 말들이. 그래서, 항상, 뎁쓰 조절을 할 필요가 있어, 뭘 보든 간에.
 
To that I must respond: No, for in marriage there is a law of motion. First love remains an unreal in itself that never acquires inner substance because it moves only in the external medium. In the ethical and religious intention, marital love has the possibility of an inner history and is as different from first love as the historical is from the unhistorical. This love is strong, stronger than the whole world, but the moment it doubts it is annihilated; it is like a sleepwalker who is able to walk in the most dangerous places with the complete security but plunges down when someone calls his name. Marital love is armed, for in the intention not only is attentiveness directed to the surrounding world but the will is directed toward itself, toward the inner world."[20] The Young Man, like Byron, "declares that love is heaven and marriage hell. 
 
저런 말에, 키에케고인 나는 답해야해: 아니야, 결혼 안에는 거기에 모션의 법이 있어. 결혼은 어쨌거나 콘크리트적으로 움직이는거야. 첫사랑이란건 그 자체론 리얼한지 아냐, 안에 알맹이도 전혀 없어, 
 
여하튼 넘어가. 영맨이란 놈이 우울증에 걸렸는데, 아 저쉑, 과거 첫사랑만 회상하는 정신병자구만, 해대는겨. 그건 극장화면의 뜬구름 영상에서만 움직일 뿐이야. 윤리적 신앙적 의지로 하는 결혼 이란건, 알맹이 있는 역사 의 힘을 갖아, 첫사랑이란건 뜬구름 영화 화면이야. 역사적임과 역사아닌것과 다르듯이.
 
이런 사랑, 이런 첫사랑은, 강력해, 온세상보다 더 강력해, 그러나, 그 첫사랑, 그런 사랑이 의심을 하는순간, 아 이건 사랑이 아닌 정신병자의 영화화면인건가 하는순간, 증발해서 날라가서 아무것도 아닌거야; 그것은 마치 몽유병환자가 잠결에 완벽한안전함이 보장된 채 가장 위험한 곳을 걷고 있는데, 누군가가 그의 이름을 불러서 주저앉는것과 같아. 결혼의 사랑 이란건, 전쟁속의 전사 처럼 무장된 상태인거야, 결혼의 사랑은, 외부의 세상을 향해 쏠리지 않아, 결혼의 사랑이란 오브젝트는 그 자체를 향해, 그 사랑 내쩍 세상을 향해 (이더/오어). 영맨은 바이런처럼 선언한다, 러브 는 천국이다 결혼은 지옥이다. 
 
"He bit the chain that bound him, but the more his passion seethed, the more ecstatic his song, the more tender his talk, the tighter the chain. It was impossible for him to create a real relationship out of this misunderstanding; it would, in fact, leave her at the mercy of a perpetual fraud. To explain this confusing error to her, that she was merely the visible form, while his thoughts, his soul, sought something else that he attributed to her-this would hurt her so deeply that his pride rose up in mutiny against it. It is contemptible to delude and seduce a girl, but it is even more contemptible to forsake her in such a way that one does not even become a scoundrel but makes a brilliant retreat by palming her off with the explanation that she was not the ideal and by comforting her with the idea that she was one’s muse."[22]  
 
영맨 은 자기를 묶는 사슬을 끊으려 물지만, 고통이 들끓을 수록, 그의 노래는 뽕맞은 놈처럼 지극히 해피다, 그의 말소리가 부드럽고 감미로운듯 할수록 쇠사슬은 더 조여온다. 그가 이따위 망상에서 현실의 관계를 만든다는건 불가능하다. 그의 망상질이란건, 자기 여자를 끊임없는 조작질 주작질의 빛속에 모셔놓았기 때문이다. 풀어 설명하자면, 그녀는 단지 눈에보일 뿐, 포름 같은 신적이란 것며 (이 영맨 정신병자 상상에), 영맨 그의 생각들 , 그의 영혼은, 그가 그녀에게 있다는 어떤 것을 찾고자 한다는 것이다. 이 어떤것이 그녀을 아주 다치게 할 것이라서 영맨의 존심은 그 어떤것에 반기를 들며 침묵한다는것이다. 
 
그 여자 를 속이고 유혹하는 것은, 아주 나쁘다 경멸스럽다, 그렇지만, 그녀를 위한답시고 이렇게 하는것은 더 나쁘다, 즉 차라리 부랑자처럼 찝쩍대는게 더 낫지, 그러지도 못하고, 똑똑한척, 얍삽하게, 그녀를 속이면서 이따위 말을 하는 색히, 그녀는 내 이상형이 아니야 쏠메이트가 아냐, 그녀는 만인의 뮤즈야, 해대며 포기하는 수컷은, 그야말로 경멸스럽다. 
 
Constantin, "the aesthetic schemer",[23] tells the Young Man he should become a deceiver. He says, "Be inconstant, nonsensical; do one thing one day and another the next, but without passion, in an utterly careless way that does not, however, degenerate into inattention, because, on the contrary, the external attentiveness must be just as great as ever but altered to a formal function lacking all inwardness  
 
콘스탄틴 이란 상담사는, 감정의 설계사 로서, 영맨에게 말한다. 너 자신을 속여봐,  계속 말한다, 시선을 딴데로 좀 돌려라, 무감각해져라; 하루에 한가지를 해, 다음날 다른 한가지를 해, 걍 아무 생각 아무 열정말고 걍 해 봐, 걍 의미없이 움직여, 왜냐하면 그러다보면 신경이 딴데로 흩어져서, 좀 나아진다니까, 함 해봐 내 말대로. 
 
 
He then goes to Berlin, because he had been there once before and he wants to see if he can repeat the same experience he had the first time. He goes to the same place he stayed on his first journey and finds that his landlord is now married. “The landlord went on to prove the esthetic validity of marriage.[25] He succeeded marvelously, just as well as he had the last time in proving the perfection of bachelorhood.”.[26][27] He tries to find repetition at the theater but it eludes him, he tries the coffee shop and finally says, "I had discovered that there simply is no repetition and had verified it by having it repeated in every possible way".[28]   
 
그리곤 콘스탄틴 이 베를린에 가, 이전에 한번 왔었어, 다시 가고 싶어, 자기가 첫번째 방문시의 경험을 리피트, 반복할수 있는지. 이전과 똑같은 장소에 갔는데, 거기 머물렀던 이전 집주인이 결혼한걸 알게돼. 그 집주인은, 결혼이라는 아름다운 경험을 얻으려 결혼했다. 그 집주인은 환타스틱하게 성공했다, 총각시절의 완벽함을 그의 마지막시기에 경험한 것처럼.
 
일단, 레피티션 이 하나 깨진겨 콘스탄틴에게, 다음 의 레피티션을 얻기 위해서 극장에 갔어, 그런데 똑같은 레피티션을 못 얻었어, 커피숍에 갔어, 실패했어. 레피티션 이란 똑같은 반복이란건, 없는겨 . 그는 최총적으로 말한다, 나는 발견했다, 아주 심플하게, 레피티션, 반복이란건 없다, 이 문장을 나는 확실히 확인했다 모든 가능한 방법으로 반복을 경험하려 해봤지만.
 
Stuart Dalton from The University of Hartford regards Repetition essentially as a comedy and there is humor in much of the book.[note 4] Kierkegaard wrote humorously about the idea of repetition in Concluding Unscientific Postscript to Philosophical Fragments, he said,

There is a story about a sailor who fell from the top of the mast without injuring himself, got up on his feet, and said: Now copy me-but most likely he himself also refrained from doing it again. Likewise, repetition that involves good luck and inspiration is always a daring venture. p. 284-285 

 
스튜어트 달톤 은, 키에케고 의 반복 에 대해, 본질적으로 희극 이라고 평가한다, 거기엔 유머 가 있다며. 키에케고 는 유머있게 반복에대한생각 을 썼다. 키에케고는 말했다, 
 
이런이야기 가 있어, 선원이 돛대에서 떨어졌는데 다치지 않았대, 일어서더니 말하는거야, 자, 나 처럼 그대로 해봐 , 그렇지만 그 자신은 똑같은 짓을 하지는 않았다. 이처럼, 좋은 행운과 영감 인스퍼레이션 을 수반하는 반복이란건, 언제나 대담한 모험이다(반복이란건, 없다)
 
 

Report by Constantin Constantius[edit]

Constantin believes that "repetition and recollection are the same movement, except in opposite directions, for what is recollected[9] has been, is repeated backward."[10] An individual can remember some past event or emotional experience with intensity. That individual might try to "repeat pleasure continuously and eternalize the pleasure in the temporal".[11] This is what Constantin is trying to accomplish. He hopes that Repetition will become a new philosophical category. That it will trump Hegel and explain the relation between the Eleatics and Heraclitus. "Mediation” is a foreign word; “repetition” is a good Danish word, according to him  
 
다시, 맨 처음 시작으로 돌아가서, 이 글 시작에선, 콘스탄틴은, 레피티션 이란 반복 을 좋아해. 과거에 대한 회상 추억 을 개개인은 똑같이, 영화 화면 재반복 하듯, 할 수 있다는거야. 그러면서, 과거의 그 장면을 반복하면서, 계속, 그당시의 즐거움을 반복하는겨. 과거의 한순간의 즐거움을 영원히. 이게 콘스탄틴 의 항진명제이자 탈출구야 해방구 이고. 아 이런건 새로운 철학의 꼭지로 꼽아야 한다는거지. 그래서, 미디에이션 이 아니라, 레피티션 의 덴마크 단어에 개념이 더 옳다는거야. 
 
그런데, 저게, 두번째 베를린 방문에서, 첫번째 의 즐거움을 현실에서 똑같이 느끼려다가, 반복하면서, 완벽히 실패한거야. 현실에서 현실에서. 
 
저기까지 가, 
 

  • Part One: Report by Constantin Constantius
  • Part Two: Repetition
  • Letters from the Young Man, August 15 – January 13
  • Incidental Observations by Constantin Constantius
  • Letter from the Young Man, May 31
  • Concluding Letter by Constantin Constantius, Copenhagen, August 1843

 
전체 여섯개 챕터 에서 파트 원. 이야. 나머지는 당신들이 읽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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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레피티션 이란게, 그럼 헛거냐? 아니 일단, 그래도 정신속 두뇌 안의 화면 영사기 의 반복 에 의한 즐거움 은 가능한걸까 진짜? 아마 이런걸, 영맨 과의 대사 로 확인하려는 거겄지. 
 
똑같은 반복이란 현실세상 다자인 에선 없다.
그러면, 반대로, 생각세상 에선 가능할까. 
 
불가 지 그게. 몰라, 내가 저 뒤로 는 안 읽어봐서. 
 
똑같은 감정 느낌 이란건, 없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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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knight of faith (Danishtroens ridder) is an individual who has placed complete faith in himself and in God and can act freely and independently from the world. The 19th-century Danish philosopher Søren Kierkegaard vicariously discusses the knight of faith in several of his pseudonymic works, with the most in-depth and detailed critique exposited in Fear and Trembling and in Repetition.  
 
영맨 이라는 첫사랑 정신병 환자 도, 자기만의 평화, 자기만의 답을 찾아. 드릴로 파면서, 레피티션 인듯 아닌듯 한. 인트린식 내면 탐색 시ㅂ 말로 듣기는 좋은. 
 
인워드니쓰, 인너워크, 다 이놈의 키에케고 형님께서 다져주신겨 이게. 그런데, 참, 말은 좋은데, 이전에 말했듯이, 내안의 새 라는 나는 나라는 새 를 못봐요. 
 
주인노예 변증법 을 통한, 내가 밖을 품는 게, 오히려 나를 보는거야 그게. 
 
키에케고 의 내적탐색 서브젝티비티 는, 키에케고 처럼, 저런 추상명사 를, 글쓰기로 파보는 것 만큼 없어요. 멍때리는 참선보다. 
 
그럴려면 말이야, 펜대 잡고 빈종이 에 앉아있는다고, 되는게 아냐 이게. 
 
내면탐색의 글쓰기 란건, 무조껀, 내가 쓸 주제 단어 에 대해 서, 일단, 러닝, 공부 를 해야 해요. 그럴려면, 그러기 위해선, 그전까지의 당대까지의 역사 철학 과학 들을, 배워야만 해. 그걸 내 눈앞 에 샌드백으로 걸어두고, 그걸 줘 패는게, 
 
키에케고 의 서브젝티비티 일 뿐이야. 말이 좋아 써브젝트 어쩌고 인트린식 직관 해대지만, 이 색히도 결국은, 남들 이야기 를 꺼내놓고 거기에 대한 자기 생각 을 쓸 수 밖에 없어. 그러면서 직관 이 지랄 해대는거거든. 
 
직관 내면 탐색 이란건, 남의 것을 전제 하는거야. 남의 것 없이, 맨땅에 직관 어쩌고 , 너무나 너무나 개 소리 이자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그건. 
 
남들이 써놓고 해놓은거 배운 상태에서, 멍 때리든 머든 하는거지. 그런면에서, 걍 멍 때리기만 한, 땅은 후져진겨 이게. 
 
The knight of faith (Danishtroens ridder) is an individual who has placed complete faith in himself and in God and can act freely and independently from the world. The 19th-century Danish philosopher Søren Kierkegaard vicariously discusses the knight of faith in several of his pseudonymic works, with the most in-depth and detailed critique exposited in Fear and Trembling and in Repetition.  
 
키에케고 의 궁극의 지점은, 페이뜨 의 기사 야. 영맨 은 저기 근처에 간 사람이야. 나름 첫사랑의 망상을 레퍼티션아닌 레퍼티션은 통해서 리프오브 페이뜨 해서 도달해. 
 
키에케고 는, 영맨 이 나이트오브페이뜨 가 아니다, 라고 써. 
 
The Young Man has gone through the same ordeal as Job but neither of them is a Knight of Faith. Repetition, pp. 209–210  
 
욥기 의 욥 도, 자기 캐릭 영맨 도, 나이트 오브 페이뜨 는 둘다 아니다. 
 
Silentio personally believes that only two people were ever knights of faith: The Virgin Mary, and Abraham. It is also possible that Silentio regards Jesus as a knight of faith.  
 
씰렌티오 란 닉으로 공포와 두려움을 썼는데, 버진 마리 와 예수 이 둘만이 나이트오브 페이뜨 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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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하튼, 키에케고 는 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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