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etition (DanishGjentagelsen) is an 1843 book by Søren Kierkegaard and published under the pseudonym Constantin Constantius to mirror its titular theme. Constantin investigates whether repetition is possible, and the book includes his experiments and his relation to a nameless patient known only as the Young Man  
 
레퍼티션, 은 1843년. 30세, 콘스탄틴 콘스탄티우스 닉으로 쓴 책. 레퍼티션 이란 방법이 괜찮은 툴 도구 인지를 확인해본다. 그의 실험 방법이고, 무명의 환자 영맨 과의 관계 로 푼다. 
 
The Young Man has fallen in love with a girl, proposed marriage, the proposal has been accepted, but now he has changed his mind.[2] Constantin becomes the young man's confidant. Coincidentally, the problem that the Young Man had is the same problem Kierkegaard had with Regine Olsen. He had proposed to her, she had accepted but he had changed his mind. Kierkegaard was accused of "experimenting with the affections of his fiancée"  
 
영맨,은 어떤 걸 과 러브에 빠졌다, 청혼했다, 여자는 받아들였다. 그러나 남자가 마음을 바꾸다. 콘스탄틴은 영맨의 베프가 된다. 영맨은 키에케고 의 레기네 올젠 과의 관계와 똑같다. 키에케고도 올젠에게 청혼했고 올젠은 수락했지만, 키에케고 가 일년만에 마음바꾸고, 자기 여자의 애정으로 자기생각을실험한것에 죄의식을 느꼈다. 
 
Søren Aabye Kierkegaard (5 May 1813 – 11 November 1855
Regine Schlegel (née Olsen; 23 January 1822 – 18 March 1904) 
 
On 8 September 1840, Kierkegaard formally proposed to Olsen. He soon felt disillusioned about his prospects. He broke off the engagement on 11 August 1841, though it is generally believed that the two were deeply in love.  
 
키에케고 가 올젠에게 정식으로 프로포즈 를 1840년. 27세 , 18세 올젠에게. 9월 8일. 다음해 만 1년 이 안된 8월 11일에, 약혼을 깨.
 
Kierkegaard and Olsen met on 8 May 1837 and were instantly attracted to each other, but sometime around 11 August 1838 he had second thoughts. In his journals, Kierkegaard wrote idealistically about his love for her  
 
첫만남이, 3년 전, 24세 키에케고 15세 올젠. 바로 서로 끌렸다. 키에케고 는 1년 후에 확 빠졌다 고 써.  키에케고 는 이때 저널에서 올젠에 대한 자기 러브 를 아이디얼리스틱하게 최고의 러브라며 쓴거지. 
 
키에케고 는 저널 의 인간인데, 
 
According to Samuel Hugo Bergmann, "Kierkegaard's journals are one of the most important sources for an understanding of his philosophy".[59] Kierkegaard wrote over 7,000 pages in his journals on events, musings, thoughts about his works and everyday remarks.[60] The entire collection of Danish journals (Journalen) was edited and published in 13 volumes consisting of 25 separate bindings including indices. The first English edition of the journals was edited by Alexander Dru in 1938.[61] The style is "literary and poetic [in] manner"  
 
7천페이지 의 저널을 썼다, 나중에 저널전집이, 13볼륨 챕터에 25권으로 목차포함 출판. 영어번역 1938년. 
 
저 저널 이란게, 일기 야 일기. 다이어리 는 라틴어고, 게르만애들은 저널 이라고 해. 저널이 신문 잡지 도 쓰지만.
 
Tagebuch 타게 부흐, 로 독어는 쓰고, tidsskrift 덴마크 위키 에 티드 스크리프트, 탁, 티드, 데이, 북, 스크립트 스크라이브, 매일 일기야 이게. 
 
키에케고 는 일기 의 인간이고, 이건, 나중에 죽어서 출판이 되는거고, 자기 일기 에서 뽑거나 쓰면서, 출판을 해댔던거야 키에케고 는. 
 
키에케고 는, 생전에, 인기 없어요. 덴마크어로 만 출판하는거고, 조오오올라 어려워, 몰라, 책도 안팔리. 키에케고 는 아주 외롭게 살았던 인간이고. 나중에 덴마크 의 주교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면서, 요때 잠깐 핫 하게 덴마크 내 지식계층에 알려졌을 뿐, 그리고, 죽고 수십년 지나서야 19세기 말 지나면서 독어 불어 로 번역이 되면서 알려진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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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에케고 와 올젠, 9년 차고, 1837에 처음 만나. 24세 15세. 1840년 청혼, 27세 18세. 일년 후, 청혼 파기. 
 

키에케고 는 가족사 를 봐야해. 이 인간은, 조올라게 우울한 인간이야 일단. 자기가 너무나, 아니 서로가 너무나 러브한 사이를, 스스로 파혼 한다는게, 이게 참 거시기 한건데. 저 그림이 아주 좋은데 연도 보기가. 
 
엄마가 1834 에 죽어. 66세. 아빠가 4년 후 죽어 1838년 82세. 키에케고 각각 21세, 25세. 청혼은 1840년에 다음해 파혼. 
 
키에케고 는 아빠를 아주 리스펙트해. 아빠는 부유한 양모 상업가 면서, 철학 신학에 나름 찐해. 주교 도 친구야 들락거려. 이 주교 가 덴마크의 소위 아카데미 펠로우야 나중에. 아빠죽고 키에케고 가 이 주교 를 공개비판 하면서 반짝 스탁가 되는거고. 
 
아빠 는 재혼 이야. 엄마 가 웃기게도, 이집에 메이드 , 써번트 로 일하다가 결혼을 한거야. 독어 위키 에 아주 정확히 이집의 메이드 였다고 나와, 영어 위키 는 하녀신분 으로만 찍혀서 부정확해. 이집에서 가정부로 일하다가 홀애비 집주인한테 시집간거고, 전부인에겐 애가 없어요 아마도. 이게 확실한 문장이 없는데, 저 모든 자식들을 아마 키에케고 엄마가 다 낳은듯해. 
 
보면, 4남 3녀 중 막내 이고. 위에 다섯명이 싸그리 죽어요. 엄마 죽기전에, 마이를 12세, 니콜린 33세, 닐쓰 24세, 엄마죽을때 페트레아 33세 도 같이 죽어. 아빠가, 공포에 떨어. 내가 죄가 많아서 자식들이 죽는구나, 아마도, 나머지 너희들도 나보다 먼저 죽을듯하다, 아 난 그걸 막기 위해서 신을 철저히 믿고 리펜턴스 콘페션 을 해야겠다, 
 
형 피터 와는 8년 차이야. 이사람은 주교 가 돼고, 나중 자기 동생 키에케고 이야기 하는거고. 
 
아빠 유산이 많아요 키에케고 가. 그래서, 먹고 살 걱정도 전혀 없어. 결혼 하면 돼. 저 올젠 이란 여자도, 아주 빵빵한 여자고 집안이. 
 
Olsen was born on 23 January 1822 in Frederiksberg, a district of Copenhagen, Denmark. Her parents were Terklid Olsen, councilor of state and department head in the Finance Ministry, and Regine Ferderikke Malling Olse  
 
아빠는 카운슬러 에 재무부쪽 두목이야. 졸 좋아 집안도. 키에케고 를 좋아해요 소위 장인될 사람은. 
 
Olsen later recalled that upon this first meeting Kierkegaard had made "a very strong impression" upon her and a friend recalled Olsen being enraptured by the words and way in which Kierkegaard spoke 
 
나중 올젠의 회고, 처음 보자마자 키에케고 의 초강력 인상, 올젠 의 친구 가 말하길 올젠은 키에케고의 말하는 모습에 완벽하게 끌렸다. 
 
올젠이, 시바, 쇼킹을 먹어요, 파혼 선언으로. 
 
On 8 September 1840 Kierkegaard finally revealed his feelings to Olsen when she was playing the piano for him at her family's house. He recounted the events years later in his journal: "'Oh! What do I care for music, it's you I want, I have wanted you for two years.' She kept silent." Kierkegaard proceeded to plead his case to Etatsraad (Councilman) Olsen, Olsen's father, immediately. Her father granted Kierkegaard his blessing, and the two became engaged to be married  
 
1840년 청혼하는 날, 올젠 이 피아노를 쳐. 키에케고 가 나중 저널에, 청혼의 상황, 오! 나는 음악이 안들어와, 내가 원하는건 당신이야. 나는 당신을 2년동안 원했어. 올젠은 침묵했다 키에케고는 올젠의 아빠한테 가서 말하고, 그는 즉시 허락했다, 결혼하기로 약속된거다. 
 
because there was "something spectral about me, something no one can endure who has to see me every day and have a real relationship with me".[10] Kierkegaard also believed that God was calling him to celibacy and that his life was soon to be over as his health was always poor[a], being rejected by the military for being unfit previously.[7][11] He sent Olsen a farewell letter along with his engagement ring  
 
일년 후 파혼, 나에게 먼가 스펙트럴, 표현못할 귀신같은게 붙어있다, 아무도 지니지 못할 이 무언가의 벽이, 매일 나를 지켜보고 나와 찐하게 엮여 있다. 신은 그에게 콜링한다고 믿었다, 쎌리버시 하라고. 카엘렙쓰, 결혼하지 말라고, 그리고 또 믿었다 자기는 곧 죽을꺼라고, 몸이 너무 약해서, 군대에도 거부당한 신세. 그는 올젠에게 반지와 함께 작별 편지를 쓰다.
 
Olsen, heartbroken, immediately went to Kierkegaard's house; he was not there, but she left a note pleading for him not to leave her. Olsen did not want the engagement to end, fearing it would strengthen Kierkegaard's growing melancholy and depression although to envision Kierkegaard as a husband was foreign to her thoughts.[7] In her conversations with Hanne Mourier in her later life, she stated that:  
 
올젠 은, 즉시 키에케고 집에 갔다, 그는 없었다. 노트를 남기다 떠나지 말라고. 올젠은 원치않았다, 무서웠다, 오히려 키에케고 가 그러면서 우울증 낙담이 더 커질듯 해서. 올젠 도 느꼈는데, 키에케고 가 자기남편이라는 이미지가 상상할때 낯설었다고 했다. 올젠은 나중에 말했다. 
 
Kierkegaard’s motivation for the break was his conception of his religious task; he dared not bind himself to anyone on earth in order not to be obstructed from his calling. He had to sacrifice the very best thing he owned in order to work as God demanded of him: therefore he sacrificed love … for the sake of his writing. 
 
키에케고 가 파혼한 이유는, 자기에게 신앙적인 임무 가 있다, 라는 관념때문이었다. 그는 그런 신의 부름에 방해받지 않기위해서 땅위의 생체육신과는 엮이고 싶지 않았었다. 그는 자기가 가졌던 최고의 것을 희생해야 했다, 갓이 자기에게 요구한 사명을 하기 위해서. 그래서 그는 러브를 희생제물로 바쳤다...자기 글을 쓰기 위해서. 
 
라고, 올젠 이 키에케고 를 분석을 한거야 저게. 역시나, 알고는 있어, 남편으로선 상당히 낯설었다는 걸. 애초에 서로 알았던거야 저건. 
 
키에케고 도, 자기는 결혼해선 안될 수컷 이란걸, 그 벽을 확실히 느낀거고. 저 마음의 장벽, 스펙트럴 한게 있는 사람은, 결혼 을 못해. 
 
 On 11 October 1841 Kierkegaard met with her and again broke off the engagement in person. Her father tried to persuade him to reconsider after assessing Olsen's desperate condition, claiming that "It will be the death of her; she is in total despair".[14] Kierkegaard returned the next day and spoke with Olsen. To her query as to whether he would ever marry, Kierkegaard icily responded: "Well, yes, in ten years, when I have begun to simmer down and I need a lusty young miss to rejuvenate me."[14] In reality, Kierkegaard had no such plans, and would remain a celibate bachelor for the rest of his life.  
 
딱 두달만에, 키에케고 가 찾아가. 올젠 이 아주 완벽하게 무너졌거든. 더하여 키에케고 를 걱정해요, 키에케고 는 우울증 환자여, 아마 죽을수도 있다 는 불안감도 상존하는거고. 아빠가 열 졸라받는거지 야이 개 색햐 내딸 살려내 비스무레, 내딸 죽을듯해. 완벽한 절망에 빠졌어. 키에케고 가 다음날 다시 가고, 이때 올젠에게 말해 올젠이 질문을 했대, 너 결혼 평생 안할거야? 키에케고 가 아이씰리 차갑게 대답, 응, 십년후에 만약 내가 좀 차분해져서, 내가 러스티 한 카널 디자이어를 일으키는 젊은 암컷을 만나 나를 젊어지게 해주면 할수도 있겄지. 실제로 키에케고는 그런 계획이 없었고 평생 결혼안한 채로 살았다. 
1855에 죽으니까, 1841이 28세, 14년 후인 죽을때 42세, 나머지 인생 이라봤자. 
 
저 파혼 사건이, 코펜하겐에서 작은 이슈 가 돼요. 다 알아 서클에서. 
 
On 16 April 1843  2년후 교회에서 잠깐 스치듯 봐, 올젠이 살짝 고개 끄떡여. 용서 해준다는 신호. 어쨌거나 열받는거지. 
 
On 3 November 1847  파혼후 6년 지나 결혼. 올젠 25세. 키에케고 34세. 올젠의 남편이
 
Johan Frederik Schlegel (22 January 1817, Copenhagen – 8 June 1896, Copenhagen)   
 
슐레겔, 30세. 이 슐레겔 이 올젠 의 가정교사 였고, 키에케고 와 올젠 이 만날때 시기질투 졸 해요. 자기가 점찍어놓은 여자거든. 결혼식때 키에케고 의 출판물 의 글을 낭독을 해. 유명한 사건이니까, 아마, 이런식으로, 부부가 , 키에케고 를 다루면서 세상의 시선을 비웃는듯이 넘기는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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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젠, 은, 키에케고 에 대해서, ㅅ ㅂ, 끔찍 할 수 밖에 없어. 
 
사람들이 머 올젠 과 키에케고 의 러브 어쩌고 해대면서 포장하지만 지금도, 
 
올젠 입장을 생각해 보라고 어쨌거나. 끔찍한겨 저거. 기분 드러운거고 ㅋㅋㅋ.
 
올젠이 Regine Schlegel (née Olsen; 23 January 1822 – 18 March 1904)  1904년 82세에 죽는데, 저때 키에케고 가 ㅅㅂ 유럽대륙에서 졸 스타가 된겨 죽고서 삼사십년, 막 이름을 날릴때야. 
 
키에케고 이야길, 웃기게도, 무신론자 들이 써먹기 좋아 ㅋㅋㅋ. 실존주의 란 이름으로 키에케고 를 써먹는것도 웃긴거지만. 키에케고 알아유 해대면서 지식인 행세 하는겨 우리가 듣보는 19세기 말 20세기 초 대륙 철학자 애들이. 디다보면 별것없는 애들이, 오잉 키에케고 짱 해대면서 걔들이 나댄거거든 대륙 프랑스 독일 철학자 행세 해대는 그야말로 버러지 인생들 ㅅㅂ.
 
다 늙은 올젠한테 ㅅㅂ 외쿡에서 찾아오는겨. 
 
Olsen is buried in Assistens Cemetery in Copenhagen, along with both Kierkegaard and Frederik Schlegel. In his commentary about her, Robert Neiiendam wrote that "she knew 'that he took her with him into history.' And this thought made up for what she had suffered."  
 
올젠은 키에케고 와 남편 슐레겔 의 곁에 묻혔다. 전하는 자 가 말하길, 그녀는 알았다, 그놈이 그녀를 역사속으로 데려갈것임을. 그리고 이런 생각은, 그녀가 겪어왔던 고통을 메이드업포, 치료 개선 제거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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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라고 봐. 묘한 사이야 하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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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etition (DanishGjentagelsen) is an 1843 book by Søren Kierkegaard and published under the pseudonym Constantin Constantius to mirror its titular theme. Constantin investigates whether repetition is possible, and the book includes his experiments and his relation to a nameless patient known only as the Young Man.  
 
다시 돌아가서, 레퍼티션 이란게, 리콜렉션 recollection , 같은건데 이게. 키에케고 만의 사전이여. 키에케고 가 싫어하는 단어가, 미디에이션 이라는 소위 일본말 변증법 이야. 
 
 "Mediation” is a foreign word; “repetition” is a good Danish word, according to him.[12]  
 
헤겔의 미디에이션 다이얼렉틱 이라는, 중간의 매개체 를 통해서 진짜에 닿는것 을 거부해 키에케고는. 
 
미디에이션 이란건, 외국 말이다, 덴마크어로 레퍼티션 이, 아주 딱 좋다. 
 
Heinrich Moritz Chalybäus[needs IPA] (3 July 1796, in Pfaffroda – 22 September 1862, in Dresden) was a German philosopher best known for his exegetical work on philosophy, such as his characterisation of Hegel's dialectic as a triad of "thesis–antithesis–synthesis."  
 
헤겔의 변증법 이라며, 테제 안티테제 정테제 라는 단어를 만든건, 하인리히 모리츠 칼리보이쓰 야. 헤겔은 앱스트랙트-네거티브-콘크리트, 이 단어를 썼고, 피히테 가 저런 와꾸 헤겔이 시작했다며 ㄱ소리해댄 거고, 거짓말이고, 이 피히테 는 ㄱ 쓰레기고. 헤겔은 칸트 에서 따왔다고 했고, 저걸 단어바꾼 정반합 은 칼리보이쓰 야. 
 
안티테제 니 네거티브 니, 이걸, 키에케고 는 미디움, 중간의 돌다리 전법 으로 본거거든. 
 
키에케고 는, 중간돌다리놓기 전법 을 혐오해. 오직 다이렉트 의 인튜이션 인트린식 이야. 키에케고 에게 중간은 없어. C 와 E . 메터 와 마인드, 있음 없음 으로 다투는거지 시바 중간에 영매 귀신 미디움을 왜 놓아. 
 
리 피트, 페토, 페토 라는게, 씨크 seek 찾아 가는거고, 센트리피털, 구심력 이잖니 가운데로 찾아가는 힘. 컴피트, 같이 찾아가 경쟁. 리피트, 걍 반복적으로 계속 찾아, 이걸 반복 해대는겨.
 
걍 다이렉트로 써브젝트적으로 반복해서 계속 드릴로 뚫다 보면, 페이뜨 가 생겨. 리프오브 페이뜨. 

 

더하여, 키에케고 에겐, 반복 이란건, 똑같은 되풀이 란건, 없어, 존재하지 않아. 다음으로 넘기고 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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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에케고 가 말은 조조오오올라리 많은데, 저게 모두 엮이는 단어들이야. 불안과 공포, 왜 생겨? 리프오브 페이뜨 하면, 사라져. 불안 공포 는 키에케고 가 왜 꺼내? 마르틴 루터 라는 버러지 색히의 신앙 시작이, 젊을때 대학 방학 시절 말타고 집에 가다가 번개 한방에 공포 덜덜, 아 지옥 갈듯 너무나 무셔, 안나 를 외쳤잖니 이 버러지는, 성모 마리아 의 엄마. 에반젤리칼 이 머여? 어머 예수 믿으면 지옥안간당께 천당간당께, 이게 루터 의 에반젤리칼 굿뉴스 여 별게 아니라 ㅋㅋㅋ. 내가 농담 하는줄 알어? 니덜 주위 루터 신학 전문가 한테 물어봐 ㅋㅋㅋ. 
 
덴마크 루터 교회고, 불안 공포 로 신을 믿는 저따위 루터 라니 해대면서 까대는겨 키에케고 가
 
칼 바트 가, 장칼뱅 리포엄드 의 프리데스티네이션 까대는것 처럼.
 
얘들은 말이야, 자기들 이념의 교주님들을, 까대면서 자기 이야길 해요. 조선 버러지 들은 자기 교주님 까대면 적폐가 되잖냐. ㅋㅋㅋ. 
 
키에케고, 아 ㅅㅂ 말할거 많은 줄 알았는데, 막쌍 하려니, 딱히 정리 할게 없는듯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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